장회익의 자연철학이야기 4-1. 상대성이론의 역사지평 : 아인슈타인 이야기


이 자료는 녹색아카데미 유튜브 ‘자연철학이야기’에서 나눈 대담 4-1을 정리한 것입니다. 대담은 책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의 이해를 돕기 위해 2020년에 제작되었습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이야기” 녹취록 모두 보기 링크


장회익의 자연철학이야기 4-1. 상대성이론의 역사지평 : 아인슈타인 이야기

  1. 올림피아 아카데미, 너무 과대평가되는 건 아닐까?
  2. 스승이나 학교는 얼마나 필요한 걸까?
  3. 사고 세계의 발전은 ‘놀라움’으로부터의 지속적인 도주?
  4. ‘광속 일정’이라는 사리에 맞지 않는 가정이 받아들여진 배경?
    4.1. 마이켈슨-몰리 실험
    4.2. 광속 일정 가정과 기존 시간, 공간 관념의 충돌
    4.3. 아인슈타인의 시간, 공간 개념 조작적 정의
    4.4. 마흐의 철학
    4.5. 아인슈타인이 해결하고자 했던 것
    4.6. 상대성 원리
    4.7. 상대성 원리가 성립하지 않던 전자기법칙
    4.8. 시간 공간 관념이 바뀌어야 관측자에 따라 자연법칙이 달라지지 않는다
    4.9. 아인슈타인은 기존 시간 공간 관념을 깼다 그러나…
    4.10. 민코프스키가 시공간이 4차원을 이룸을 밝혔다
    4.11. 시간 공간이 4차원이면 아인슈타인의 복잡한 가정이 필요 없다
    4.12. 시간 공간 이해하기 – 아인슈타인의 길? 4차원의 길?
  5. 자연법칙이 절대적인데 왜 ‘상대성’인가?
    5.1. ‘상대성’ – 기준축 설정에 대해서 상대적. 기준축을 어디로 잡아도 자연법칙은 동일
    5.2. 시간의 간격이 기준축에 따라 달라진다
  6. ‘바탕 관념’이란 무엇인가, 시간은 바탕 관념 중 하나?

최우석 이번 대담에서는 제3장 상대성이론으로 넘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에서처럼 역사지평 이야기를 먼저 나누어보겠습니다. 그 전에 선생님과 저희들(녹색아카데미 회원들과)이 2017년, 벌써 3년이 됐는데요, 아인슈타인의 자취를 찾아서 유럽에 갔던 이야기를 먼저 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때 찍은 사진이 있어서 몇 장 가져왔습니다. 그때 아인슈타인의 출생지인 울름(Ulm)에 갔었는데 아인슈타인의 자취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수대가 하나 있었는데요. 그 앞에서 선생님께서 아인슈타인의 제자의 제자의 제자로서 비슷한 표정을 취해주신 사진이 있어서 가져와봤습니다(그림 1).

[그림 1] 아인슈타인의 이 유명한 사진이 찍힌 날은 1951년 3월 14일, 그의 생일이었다. 기자들의 사진 세례에 지친 아인슈타인이 프린스턴 고등연구원 전 원장 프랭크 아이델로트 부부와 함께 차를 타고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이런 표정을 지었고 UPI 기자가 포착했다고 한다.(출처: discovery.com) 오른쪽은 2017년, 녹색아카데미 회원들과 독일 울름 여행 당시 장회익선생님. (사진: 녹색아카데미)

장회익 아인슈타인이 생전에 저런 사진을 하나 찍은 게 있어요. 그걸 동상으로 만들어놓은 건데, 아인슈타인을 가장 코믹하게 표현하고 싶을 때 사람들이 많이 애용해요.

최우석 대학자인데 너무 가깝게 느껴지네요. 뉴턴도 저런 초상화 하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웃음) 그 다음 사진은 조금 이따 얘기할텐데, 아인슈타인이 올림피아 아카데미를 하던 시절에 살았던 베른의 집, 아인슈타인하우스라고 부르는 집에 저희가 갔었죠(그림 2).

2층이 아인슈타인 집의 거실이고 3층이 아마 침실이었을 것 같은데, 3층은 지금 전시실이 되어 있고 거실은 당시 모습을 일부 재현 해놓고 있었습니다. 거실에서 창밖으로 내다보면 베른의 시계탑이 보이고(그림 2, 맨 오른쪽 사진), 시계탑을 넘어서 특허국으로 출근을 했다고 하죠. 집이 생각보다 좁던데, 여기서 아마 올림피아 아카데미 세 사람이 테이블 위에 다과를 놓고 토론을 했을 것 같습니다.

장회익 특수상대성이론을 이 집에서 만든 거죠.

최우석 여기를 갔던 기억이 있어서 상대성이론 공부는 뭔가 좀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효과가 나는 것 같습니다. 여행을 다녀오면 공부할 때 조금 더 친숙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림 2] 스위스 베른의 아인슈타인하우스. 2층 창을 통해 길 끝에 있는 시계탑이 보인다. 아인슈타인은 출근길에 늘 이 시계탑을 지나 다녔다고 한다. 사진은 2017년 녹색아카데미 회원들과 베른 여행 당시. (사진: 녹색아카데미)

1. 올림피아 아카데미, 너무 과대평가되는 건 아닐까?

최우석 역사지평 부분에서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하나 줄거리를 따지기 보다는 문득 문득 드는 의문들을 여쭤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는 올림피아 아카데미 얘기를 하셨는데요. 아인슈타인이 대학을 졸업한 후 사실은 이렇다 할 직업을 잡지 못하고 전전 하면서도 자기 연구를 계속 해나가던 시절에 세 사람이 모여서 모임을 했었습니다. 고담준론을 했던 모임이기는 하지만 밖에서 누군가가 봤다면 한담을 나누는 세 청년의 모임 정도로 봤을 것 같습니다(그림 3).

[그림 3] 올림피아 아카데미. 콘라드 하비히트, 모리스 솔로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903년. (출처: wikipedia)

최우석 세 사람이 사진관에 가서 이런 사진(그림 3)도 찍었더라고요.

장회익 그때는 사진관에 안 가면 이런 사진을 못 찍었지.

최우석 책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인용 1). 올림피아 아카데미(Olympia Academy)에 대한 포이어(Lewis Samuel Feuer. 1912-2002)의 이야기를 선생님께서 소개를 해주셨는데요. 프로이트의 서클(Freud’s inner circle)이나 ‘보이지 않는 대학’(Invisible College)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포이어도 올림피아 아카데미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고 선생님도 그렇게 보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아인슈타인이 대단한 것이지, 나머지 두 사람은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인 건 아닌가, 그저 아인슈타인의 말벗이 되어주었다는 면에서는 칭찬해줄만 한데, 이 공동체가 대단한 공동체였다는 것은 좀 과장된 해석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지성계의 혁명적 풍토를 예리하게 분석한 사회학자 포이어는
“올림피아 아카데미는 과학의 역사상 가장 결실을 크게 거둔
반체제공동체counter-community의 하나였다.이것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서클이나,
17세기 영국의 ‘보이지 않는 대학Invisible College’에 비견된다”고 말한다.

– 인용 1.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p.141.

장회익 글쎄, 보기에 따라서는 그런 관점도 가능하죠. 그런데 만약에 이 두 사람이 없었어도 우리가 아는 아인슈타인이 출현 했을까 하는 물음을 던져보면, 그렇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어요. 왜냐하면 이때 아인슈타인이 혼자서 자기 학문을 했지만, 혼자서 할 수 있는 한계가 분명히 있어요.

자신과 꼭 같은 수준의 사람들이 같이 해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가 말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보고 그런 다음 반응을 보고 또 그것을 받아서 발전시키는 과정이 꼭 필요한데, (아인슈타인이 했던) 그런 수준의 추상적인 이론을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아요.

하비히트는 물리학, 수학을 한 사람이고 솔로빈은 철학자예요 . 당시에는 철학자라고 하더라도 대개 물리학도 하기는 했고, 이 사람들이 지적으로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적어도 아인슈타인의 말을 알아듣고 거기에 대해서 반응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 그것이 대단히 중요해요.

우리가 어떤 학문을 이루기 위해서는 스승한테 직접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래들이 비슷한 수준에서 서로 수평적으로 얘기를 나누는 것도 굉장히 중요해요. 우리는 지금 그런 문화가 조금은 부족하지 않나 싶어요. 물론 요즘 사회 서클들을 많이 하지만, 가장 높은 수준에서 그런 것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좀 의문이 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아인슈타인의 올림피아 아카데미) 그런 것을 했다는 거지. 그런 면에서 상당히 의미 있다고 봐요.

최우석 조금 폄하해서 보자면 동네 친구 모임으로도 볼 수 있을텐데요. 사실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의견을 내고 비평을 받고 상호 증진을 목표로 하는 곳이 학회 같은 곳일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런 학회라는 데가 아주 큰 곳은 수천 명이 모일 정도로 커졌는데, 학회와 이런 소모임을 놓고 비교를 해본다면 어쩌면 소모임이 학회 못지 않게 지성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시는 건가요?

장회익 그렇죠. 학회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물론 더 구체적이고 높은 수준의 논의를 할 수 있지만, 이 정도 모임에서는 정말 기본적이고 단순한 그러면서도 거쳐가야 되는 그런 얘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이런 모임이 상당히 권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죠.

최우석 그러면 우리 사회가 여러모로 성숙해지고자 한다면, 특히나 지적으로 성숙한 풍토를 갖고자 한다면 학회같은 공식적 혹은 준공식적인 것 이외에, 격의없이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작은 모임들과 교류들이 활성화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선생님과 저희 몇몇 사람들이 십 여 년 동안 20명이 넘어가지 않는 사람들의 작은 모임(녹색아카데미)을 해오고 있는데, 이런 모임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선생님께서는 보시는 건가요? 왜 그 모임에 선생님께서 계속 나오시는지 이해가 잘 안 갔었거든요.(웃음)

장회익 중요하다고 보고 있는 거예요. 지금도 여기 두 사람이 없다면, 내가 여기서 학생들 상대로 강의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고 듣는 사람들도 재미가 없을 거예요. 이렇게 같이 하면 우리도 재미있지만 듣는 사람들한테도 유익할 수 있죠. 그것과 비슷할 거라고 봐요.

황승미 저희가 하비히트와 솔로빈만큼의 역할을 못할 것 같은데요?(웃음)

장회익 우리도 셋이고 저 사람들도 셋이니까. (웃음)

2. 스승이나 학교는 얼마나 필요한 걸까?

최우석 뉴턴 부분을 다루면서 했던 얘기와 좀 맥락이 닿는 질문인데요. 아인슈타인 얘기를 하면서 여러 차례 그런 부분이 나오는데 두 군데만 뽑아보았습니다.

특히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후 수행된 학습이 거의 전적으로 자신에 의한
그리고 자신을 위한 학습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 인용 2.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p.149.

뉴턴의 경우도 그랬지만 아인슈타인에게서 또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은 그에게는
특별한 스승 곧 멘토mentor가 없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어떤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멘토가 있었더라면 거의 틀림없이 그의 사고 진로를 방해했을 것이다.

– 인용 3.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p.153.

최우석 아인슈타인에게 있어서 특별히 중요했던 것이, 주로 학창시절의 이야기인데, 수행된 학습이 거의 전적으로 자신에 의한 그리고 자신을 위한 학습이었다는 것이 책에서 강조되고 있습니다(인용 2). 그리고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공통점으로, 특별한 스승 즉 멘토가 없었다는 것, 누군가에게서 강력한 영향을 받거나 추종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있었다면 이러한 놀라운 업적이 이루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선생님께서는 보고 계십니다.

책의 다른 부분에서는, 스승이 있었다면 도리어 방해가 되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고 제도권 교육에서 벗어 났었던 얘기도 있습니다. 뉴턴 부분에서 했던 이야기의 연장선이 될 수도 있는데 조금 달리 여쭤보면, 스승이나 학교는 그러면 얼마만큼 필요한 건가요? 완전히 없으면 또 안될 것도 같은데, 이런 창조적인 일에서는 또 방해가 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되새겨보면 어느 정도는 울타리, 어느 정도는 사다리 역할을 해주되 너무 견고한 사다리 역할이 아니라 휘청대는 사다리 역할을 한다든가, 어느 정도는 도움을 주되 일정 수준 내지는 일정 단계에서는 조금 거리를 두고 멀찍이서 모른 체를 해준다든가, 스승이나 학교 입장에서 보면 그런 노하우들이 필요할까요?

장회익 그렇죠. 그 균형을 어떻게 잡느냐하는 것은 간단하지는 않아요. 또 그때그때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수가 있어요. 그런데 나는 그 두 가지 요소가 결국은 같이 갈 수 밖에 없다고 봐요. 높은 수준의 학문을 처음부터 자기 혼자서 바닥에서부터 출발해서 한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죠.

그래서 어느 정도 도움을 받아야하는데, 그것이 지나쳐서 어느 한쪽으로 끌려갈 경우에는 성장에 한계가 있어요. 항상 뻗어갈 수 있는 공간, 여백을 남겨두고 성장을 시켜야 돼요. 그 두 가지의 조화를 잘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 현재 돌아가고 있는 일반적인 상황은 너무 제도에 매여서 가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 내 느낌이에요. 그래서 오히려 지금같은 경우에는 공백을 좀 더 두고, 학문을 하는 사람이나 지도를 하는 사람도 그런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런 사례를 통해서 알 수가 있죠.

최우석 그러면 학교나 아니면 누군가를 이끌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커리큘럼이라든가 다루고자 하는 과정 자체를 너무 빡빡하게 짜서 과중하게 부담을 주는 것도 피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올림피아 아카데미처럼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도움이 되는 그런 또래들, 비슷한 벗들의 모임을 활성화 하려면 너무 지나치게 경쟁을 시켜서도 안될 것 같습니다. 지금은 경쟁때문에 또래들 간의 교류가 방해를 받는 것 같더라고요.

장회익 그렇죠. 참 불행한 일이죠. 약간의 자극을 줘서 분발하게 하고, 나도 좀 해야되겠다하는 정도까지만 경쟁이 필요하고 거기까지는 도움이 돼요. 그런데 그 이상이 돼서 자기 인생의 길을 가르는 정도로 영향을 주는 정도의 경쟁, 이쯤 되면 엄청난 부담이 되고 공부에 방해 요소가 되죠.

시험이라고 하는 제도도 그렇죠. 시험이 공부를 시키는 일종의 자극제는 되는데, 지나치면 그것때문에 공부를 부담으로 느끼게 돼요. 공부에서 재미를 느껴야되는데 공부가 부담이 돼버리는 거죠. 그리고 시험에 갇히면 시험에 나오는 정도까지만 해야지, 그것 이상을 하면 시험에 불리해. 그런데 훨씬 더 깊은 생각도 해야하는데 스스로 자제하게 돼요. 이건 시험에 난다, 이건 안 난다 구분을 해서, 이것까지 하다가는 시험 성적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이렇게 되면 안 돼.

그래서 시험, 성적에 무관하게 공부를 해야하는데, 지금 우리 제도가 그렇게 허용하는 경우가 별로 없죠. 그리고 예를 들어서 중고등학교 학생들 공부가 아주 대표적이에요. 좀 더 이름 높은 학교로 진학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그 시험에 적응시키기 위해서 자기 능력을 낮춰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거기를 가면 뭐하냐는 거지.

그러니까 성적이나 학교와 무관하게 자기 발전을 하고 그 발전 수준에 대해서 받아주는 학교가 없다거나 경쟁을 뚫고 가기 어렵다고 한다면 좀 수월한 데로 가면 돼요. 그래서 수월한 학교에 가서 자기가 또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열면 돼. 그래서 대학을 선택할 때에 가장 적절한 대학은 그곳이 내가 공부하는 데 맞는 학교인가 하는 거예요.

열심히 공부시키는 데 가면 좋을 것 같지만, 별로 그렇지 않아요. 그것만 하다가 보면 정말 자기 창의력을 발휘하기 어려워. 아까도 얘기했지만 스승이나 제도가 너무 교육을 잘 시키려고 하는 곳이 오히려 내 발전에 도움이 안 되는 수가 있어요. 대학도 마찬가지야. 나한테 제일 맞는 대학이 어디냐, 거기를 찾아가는 것, 나는 그것을 권장하고 싶어요.

그래서 중고등학교에서 너무 그렇게 이름 높은 대학에 보내려고 할 필요 없어요. 이름 높은 데 간다고 잘 되는 게 아니야. 어쩌면 최고의 대학이라는 데는 최고의 바보를 만드는 곳일 수도 있어요. 지금 우리나라만 해도 좋은 대학이 많아. 이름값은 다 다르지만 실제로 내용에서는 큰 차이가 없어요. 나한테 맞는 데가 어디냐, 나한테 자유를 충분히 주면서 나를 발전시키는 데 적당히 자극을 주는 그런 곳이 어디냐, 그곳이 좋은 곳이에요. 큰 꿈을 꾼다면 그렇게 해야 돼요.

최우석 그러면 우수한 학생들을 유치하려고 하는 대학은, ‘우리는 공부 많이 안 시킨다’고 홍보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웃음)

장회익 그런 것도 필요하지. 우리는 자유를 준다, 와라! (웃음)

3. 사고 세계의 발전은 ‘놀라움’으로부터의 지속적인 도주?

최우석 선생님께서 책에 아인슈타인 자신의 말을 옮겨주신 부분이 있는데요(인용 4). 이 대목이 인상깊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고 세계의 발전은 ‘놀라움’으로부터의 지속적인 도주라고 할 수 있다는 멋진 표현이 있습니다.

“이런 ‘놀라움’은 한 경험이 우리 속에 이미 설정되어 있는 개념들의 세계와 갈등을 일으킬 때 발생한다.
이런 갈등이 심하고 강렬하게 느껴질 때마다 이것이 우리의 사고 세계에 결정적인 방식으로 충격을 준다.
사고 세계의 발전이라 함은 어느 의미에서 ‘놀라움’으로부터의 지속적인 도주라 할 수 있다.”

– 인용 4.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p.148.

나침판 얘기를 하면서 이런 얘기도 합니다(인용 5). 아인슈타인 자신은 이런 놀라움의 경험, 어떤 앎으로부터 감명을 받은 경험이 자신에게 매우 중요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어떤 인간의 지적인 성장 자체에 중요한 계기,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계기가 아닌가라고 말합니다.

“… 이 (나침판의) 자침이 그처럼 일정한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은 무의식적 개념들의
세계에 자리 잡고 있는 (직접적 ‘접촉’에 의해 효과가 발생한다는) 일상적 사물의 성격에
전혀 들어맞지 않는 것이었다. … 이 경험은 내게 깊고 지워지지 않는 감명을 주었다.
깊이 감추어진 어떤 것이 사물 뒤에 숨어있다고 여겨진 것이다.”

– 인용 5.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p.148-149.

공부나 탐구를 해나가는 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느껴졌는데요. 과연 나는 놀라움을 느끼면서 뭔가를 접해왔는가하는 점에서부터, 학교나 학문 세계들은 놀라움을 권장하고 놀라움을 겪도록 뭔가 조성하고 있는가, 그리고 놀라움은 어떨 때 오는가 등등에 대해서 여러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놀라움으로부터의 지속적인 도주가 선생님의 학문 세계에 계속 있었다고 보시나요?

장회익 글쎄, 꼭 그렇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런 거예요. 내가 세상을 보고 살아갈 때에 항상 나도 모르게 세상은 이런 것이다하는 어떤 기준이 있어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모든 물건은 공간 안에 놓여 있다 하는 것처럼 여러가지 전제하는 것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 전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하나 턱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이 놀라움을 주는 거지. 그 벗어나는 것을 어디에다가 처리해야 되느냐? 그래서 그것을 처리하다가, 아하! 이것이 여기 가려고 보니까 내가 생각했던 여기가 좁았구나, 좁은 곳을 이렇게 펼쳐서 보면 벗어나 있던 것이 갈 자리가 생기는구나! 이렇게 해서 지적으로 껑충껑충 발전하는 거예요.

그래서 앞에서 시간, 공간 개념도 얘기했지만 처음에 ‘2차원+1차원’으로 생각하면 지구가 안 떨어지는 게 놀라운 일이야. 그런데 3차원으로 생각하니까 그 문제가 해소가 돼. 이렇게 해서 우리가 시간, 공간을 어떤 차원으로 보고 세상을 봐야하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되고, 이제 곧 나오겠지만 4차원으로 생각해야 된다, 3차원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안 되는 문제가 생겨요.

3차원도 놀라운 일인데 그걸 또 4차원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보통 이것을 내가 미처 못 봤다하는 정도의 작은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생각했던 사고의 틀을 근본적으로 개선해야되는 이런 경우가 아주 큰 놀라움이고, 그것이 아주 큰 성취로 가는 거죠.

나 자신의 경험을 보면, 나는 상대성이론을 처음 들었을 때 굉장히 놀라움을 느꼈어요.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시간이라는 것이 관측자의 속도에 따라서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한다는 거야. 시간이 길어졌다 짧아졌다한다는 것이, 이게 도대체 무슨 얘기냐? 이걸 내가 어떻게 이해를 안 하고 세상을 살 수가 있느냐, 이런 생각이 번쩍 들었어요.

그래서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아! 이걸 하려면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해야 되겠다. 그래서 그것이 물리학과를 선택하게 된 하나의 계기도 되었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상대성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관심을 많이 가졌어요. 내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상상이 안 되는 어떤 것이 나타날 때 그게 놀라움이죠.

그런데 지금 아인슈타인이 나침판을 얘기하고 있는데 이게 굉장히 놀라운 거예요. 물건이라는 것은 이렇게 놓으면 이렇게 있고 저렇게 놓으면 저렇게 있는 것인데, 나침판은 어떻게 놓아도 항상 같은 방향을 가리켜, 이런 것이 있더라 이거야. 이게 도대체 어디서 나온 도깨비같은 것이냐? 이것을 놀랍게 봤어요. 그게 아인슈타인은 납득이 안 되었던 것이고 그래서 지적인 자극을 받았다하는 표현이에요.

그러한 것을 놀라움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사고방식에서, 모든 것을 자신의 어떤 틀 안에서 이해를 하겠다하고 하나하나 시도해 보는 거예요. 다 이해가 되면 편한 거야. 그러다가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으면 그때 놀라움이 되고, 놀라운데 이해가 안 된다고 그냥 포기해버리면 끝이지만 그걸 내가 알아야되겠다하고 붙들고 늘어지면 성장을 하는 거죠. 그런 얘기라고 생각하면 돼요.

최우석 책에도 그런 얘기가 나오지만 놀라움을 느끼려면, 어떻게 보면 선입견이 있어야 놀라움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장회익 선입견이 아니라, 자기가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보편적인 사고의 틀이 있어요. 그걸 선입견이라고 하면 좀 부정적으로 보이는데, 이건 긍정적이야. 누구나 보편적인 사고의 틀이 있어요. 그 틀과 연결해서 (경험 내용과 틀 사이에) 긴장이 형성되는 거죠.

자신의 사고의 틀에 맞지 않으면 바꾸려고 하는데, 보통은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아. 그래서 포기해버리고 말거나 신화다, 신비다 하고 넘겨버릴 수 있어요. 그런게 그렇게 하지 않고 이해가능한 것인데 이 틀로는 안 되는구나, 한번 해보자 이런 생각을 하는 자세가 필요한 거예요.

최우석 많은 사람들에게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해의 틀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 틀을 명확하게 드러내려고 노력을 하고 그것이 모순 됨이 없게끔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비로소 놀라움이라는 게 오고, 그러거나 말거나 그랬는지 마는지 그냥 일상이 중요한 사람들, 즉 이상한 것을 느낄 수는 있지만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을 명징하게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움도 잘 안 나타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렇다면 자기의 앎을 가꾸려는 사람한테 결국은 놀라움도 오는 것일까요?

장회익 그런 면이 강하죠. 그래서 사실 비교적 어릴 때부터 그런 사고의 습성을 가지는 것이 중요해요. 그런 습성을 가지면 그만큼 지적인 것이 발달해요. 그리고 그 습성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해요. 성년이 되면 그거 뭐 생각을 하나, 어릴 때나 생각하지, 이렇게 해버리면 안 돼요. 그걸 계속 해서 가지고 가는 자세가 필요해요.

그래서 처음에는 다 비슷하지만 그런 경험의 차이때문에 점점 달라지기 시작하지. 그래서 결국 일생을 두고 그런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큰 중요한 지적 업적을 만들 수 있고, 그렇지 않는 사람은 어느 단계에서 그냥 이 정도, 하면서 말아버리는 중요한 차이가 있어요.

모든 사람들이 똑같다고 얘기하기는 어렵죠. 그렇지만 그러한 자세를 가지는 것은 자신의 지적 성장을 위해서 대단히 중요해요. 크게 보면 그것이 그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줘요. 그렇게 여러가지로 다양하게 생각을 하게 하고, 정신적인 건강도 주는 거죠. 지적 활동을 위해서는 굉장히 중요한 방식이에요.

그런데 내가 자꾸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 교육이 그걸 살려주고 있느냐? 정답을 외워서 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버리면 그 (놀라움을 느끼는) 능력이 떨어져요. 그건 좋지 않아요. 공부하면 할수록 그 능력이 올라가야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공부를 하면 할수록 그런 능력이 줄어드는 방식으로 해요. 그렇게 하다가는 성적이 떨어진다, 세상에서 낙오된다, 이런 생각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러면 그런 발전(놀라움을 느끼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이 없어요.

4. ‘광속 일정’이라는 사리에 맞지 않는 가정이 받아들여진 배경?

최우석 이제 본격적으로 아인슈타인의 이론으로 들어가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의 책에 보면 아인슈타인은 빛이라고 하는 트로이의 목마 안에 시공간 4차원이라고 하는 대혁명을 숨기고 들어가서 기존의 성체를 뒤집었다고 하는 표현을 하셨어요.

그 대목에서 제가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 중의 하나는, 광속이 일정하다고 하는 아인슈타인의 대전제, 가정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시공간을 4차원으로 하면 불필요한 가정이라고 하셨지만 아인슈타인은 그렇게 가정을 하고 접근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당시에 받아들여질 수 있었는지 그 맥락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장회익 나도 거기에 대해서 정확한 진단을 하기는 어려워요. 그런데 빛이라고 하는 것은 독특한 것이다, 아주 신비로운 것이다,하는 어떤 관념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쭉 가지고 있었어요.

4.1. 마이켈슨-몰리 실험

장회익 그리고 마침 그 시기에 유명한 마이켈슨-몰리의 실험(Michelson-Morley experiment)이 있었어요. 빛이 방향에 따라서 속도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에테르(Aether)라는 것이 깔려있기 때문에 빛은 파동이므로 에테르의 진동에 의해서 나타날 것이라고 봤어요.

그런데 지구가 에테르 공간에 가만히 정지해있다고 볼 수 없다, 최소한 태양계는 크니까 에테르 공간에 정지해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은 분명한데 지구가 에테르 공간에 정지해있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에테르가 어느 방향으로 흐를테니까 지구 상에서는 빛이 방향에 따라서 속도가 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가설을 세웠어요.

그런데 그것을 실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아주 묘한 장치를 만든 것이 마이켈슨-몰리의 간섭계라는 실험 장치예요. 빛의 간섭을 이용해서 간섭 무늬의 차이가 나오도록 고안된 거예요. 그런데 (실험을 해보니 간섭 결과가) 실험 할 때마다 항상 0으로 떨어져. 초기에는 실험이 정밀하지 못해서 그런가 해서 계속 개선을 했는데도 여전히 0이었어요. 당시에 이 실험이 좀 알려져 있었어요.

사실 마이켈슨, 몰리 이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속도 차이가 얼마 나왔다고 해야 연구가 빛이 나는 건데, 차이가 안 나오니까 논문이 잘 안 돼. 그렇게까지 해도 안 되니까 그나마 나온 결과를 가지고 논문을 냈어요. 여전히 이해는 잘 안 된 거죠.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빛의 ‘효과적인 속도’는 같은 게 아니냐 하고 그때 생각했어요. ‘효과적인 속도’라 말은, 어떤 이유때문에 그쪽으로 공간이 줄어든다든가 어떤 이유가 있어서 다른 방향의 빛의 속도를 서로 같도록 만드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들이 좀 깔려 있었어요. 빛의 속도에 대해서는 아직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그런 분위기가 학계에 좀 깔려 있었어요.

4.2. 광속 일정 가정과 기존 시간, 공간 관념의 충돌

장회익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과감하게, 그러면 빛의 속도를 일정하다고 가정을 하자,하고 내밀어 버린 거죠. (마이켈슨-몰리의 실험 결과도 나온) 그런 당시 분위기에서 그 가정 자체를, 이건 말도 안 된다 하고 아인슈타인의 가정을 딱 잘라버리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아인슈타인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활용해서 밀고 들어간 거야.

그렇게 가면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결국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 공간 개념으로는 말이 안 돼요. 생각해보면 금방 알지만, 빛의 속도는 $c$라고 하는 유한한 속도에요, 무한한 게 아니야. 그 유한한 속도 $c$의 90%로 달리는 물체가 또 있을 수 있지. 그러면 그 물체에서 보면 빛의 속도가 얼마냐? 그러면 $c$라야 돼요. 광속도의 99%로 가는 물체에서 빛을 보면 빛의 속도는 또 얼마로 보이느냐?

시속 100km인 차를 타고 갈 때 시속 99km인 차로 가는 사람이 보면 앞의 차는 시속 1km로 뒤의 차로부터 멀어져요. 그건 극히 당연한 일인데, 빛의 속도의 경우에는 이것이 적용이 안 된다 이거야. 빛의 속도가 무한대라면 상관없는데 빛의 속도는 유한해요. 유한하다는 것은 이미 확인이 됐어요. 유한한 데도 불구하고 아무리 빨리 가도 빛의 속도는 여전히 일정하게 광속도다, 이게 말이 안되잖아요.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가정을 해버렸다고. 그러니까 이것을 어떻게 합리화하느냐? 아인슈타인의 입장은 거기까지 일단 가정이 가능하다는 것만 도장을 찍어 놓고, 그 다음에 뒷 수습을 이제 아인슈타인이 해야지.

4.3. 아인슈타인의 시간, 공간 개념 조작적 정의

장회익 그러면 그런 문제를 어떻게 해야되느냐. 그래서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시간, 공간 개념을 버리자 이거야. 지금 얘기한 그런 시간, 공간이라고 하는 어떤 형이상학에 우리가 사로잡혀 있다는 거지. 말하자면 3차원 그리고 1차원 그걸 구체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그 틀에서 보면 그렇게 밖에 안 되는데, 우리가 시간, 공간을 잘못 알고 있지 않겠느냐?

그래서 우리가 시간 공간에 대해서 확실히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시계로 잴 수 있는 것이고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자로 잴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관측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추상적으로 만들어놓은 것에 묶일 필요가 없다, 그래서 이런 것을 ‘조작적 정의’(operational definition)라고 해요. 사물에 대해서 우리가 많이 (말을) 하지만 결국은 이것이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그 값을 가질 수 있느냐를 말하기 전에는 내가 이것이 어떻다고 하는 것은 다 형이상학이라는 거예요.

앞서 우리가 얘기했듯이 질량이라고 하는 것을 측정할 방법이 없으면 질량은 허구일 수도 있다, 그런데 질량은 여기서 저울로 재서 눈금으로 얼마가 나와서 이건 질량이 얼마다 하는 것으로 얘기할 수 있어야 질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이에요.

4.4. 마흐의 철학

장회익 그래서 시간, 공간도 그러한 조작적 정의에 맞는 것만 인정하자, 그리고 이 가정을 도입하고 나머지 시간, 공간에 대한 모든 것은 우리가 검증해보지 않은 어떤 추상적인 일반화니까 과감하게 걷어내자, 이런 철학을 당시 마흐(Ernst Mach, 1838-1916)라는 철학자가 얘기를 많이 했어요. 요즘 우리가 쓰는 음속의 단위 마하 수(Mach number)에서 말하는 그 마하가 이 사람이에요.

마흐는 물리학자이면서 동시에 철학자이고 공학자이기도 했어요. 마흐는 당시 학계가 너무 형이상학에 휘둘린다, 믿을 수 없는 형이상학은 모두 걷어내라, 그리고 우리가 검증 가능한 것에서만 출발하자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어요. 어떻게 보면 데카르트의 정신에도 해당돼요.

그런데 마흐의 그런 정신에 아인슈타인이 영향을 많이 받았지. 그래서 시간, 공간도 그렇게 하자,해서 다시 만든 거예요. 광속이 일정하면 이렇게 된다 하고.

4.5. 아인슈타인이 해결하고자 했던 것

장회익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아무 목적없이 그렇게 만들어본 것은 아니고 중요한 목적이 하나 있었죠. 얼마 전에 얘기했던 것 같기도 한데 전기자기 현상에서는 어떤 문제가 결국은 나타나는고 하니, 아, 그 전에 상대성 원리라는 것을 먼저 해야 돼요.

4.6. 상대성 원리

장회익 상대성 원리는 이런 거예요. 지구에 대해서 정지한 입장에서 자연 법칙을 서술하는 때와, 지구에 대해서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자연 법칙을 서술할 때, 두 자연 법칙의 모습은 같아야 한다는 거예요.

이 얘기를 유람선의 예로 다시 해보면, 큰 고급 유람선 안에는 테니스 코트도 있죠. 유람선에서 테니스를 칠 수가 있어요, 배가 움직이는데. 움직이는 지구 위에서 테니스를 치는 것과 유람선 위에서 테니스를 치는 것이 똑같아요. 내가 지구 위에서 지구가 움직이는지 어떤지 못 느끼면서 테니스를 치는 것과 같아요.

유람선이 정지해있다고 가정하고 유람선 위에 적용하는 자연 법칙이나, 지구 위에 적용하는 자연 법칙이나 똑같다 이거야. 그런 것을 오래전부터 알았어요. 갈릴레오 때부터 알았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것을 갈릴레오의 상대성 원리라고 부르죠.

배 위에서 적용되는 법칙과 지구 위에서 적용되는 법칙이 같다는 거예요. 배에서는 위쪽에서 물건을 떨어뜨리면 배가 움직이니까 (똑바로 떨어지지 않고) 옆으로 비껴서 떨어질 것 같은데, 그냥 배 위에서도 수직으로 떨어지는 거야.

황승미 상대성 원리가 적용이 안 되면 돛대에서 점프를 못 할 것 같아요. 점프 했는데 바다에 빠져버리고…(웃음)

장회익 그렇지. 내가 뛰어내리면 떨어지는 동안 배는 가버리는데, 바다에 빠지는 게 아니고 배 위에 떨어져요. 지구 상의 안 움직이는 땅 위에서 움직였을 때와 동일한 거예요. 그러니까 움직이는 기준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는다는 게 상대성 원리인데, 그것에 어긋나는 현상이 하나 있다 이거지.

4.7. 상대성 원리가 성립하지 않던 전자기법칙

장회익 그게 그 당시까지 알려져있던 유명한 전자기법칙, 맥스웰이 네 개의 기본 방정식으로 잘 묶어서 해 놓은 것이 있어요. 여기에 어떤 문제가 있냐하면, 자기장의 출처(어디서 어떻게 생기는지)가 문제야. 자기장이라고 하는 것은 전기를 띤 물체가 움직일 때, 이걸 전류라고 하는데, 그 전류 주변에 생기는 것이 자기장이에요. 전류가 안 흐르고 가만히 있으면 자기장이 안 생겨.

전류 주변에 자기장이 생긴다, 그건 좋은데 움직이냐 안 움직이냐는 관측자의 입장에 따라서 달라요. 내가 움직이는 전류와 같이 움직이면서 보면 자기장이 없고, 안 움직이는 사람한테는 자기장이 있어. 그러면 여기서 전기장을 받아서 움직이는 입자가 하나 있을 때 이 입자의 운동은 자기장을 받는 운동을 하느냐, 안 받는 운동을 하느냐?

그러면 내가 안 움직이면서 볼 때는 전류가 있으니까 내 계산에 의하면 이 입자가 자기장을 받아서 이렇게 움직여야 되는데, 내가 입자와 같이 움직이면서 보면 자기장은 없고 전기장만 받는 운동밖에 못해요. 그러니까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이 입자가 어떻게 갈 거냐에 대한 계산 결과가 달라진다는 거죠. 이게 상대성 원리에 어긋나는 거야.

최우석 전류의 속도와 같이 가는 상황은 어떤 상황이죠? 

장회익 내가 전류가 흐르는 속도에 맞춰서 자동차를 타고 간다고 하면 되는 거지.

최우석 전류의 속도는 굉장히 빠르잖아요?

장회익 그거야 내가 빠른 자동차를 타고 가면 되지. (웃음) 전류는 천천히 움직이게 하고 같이 가도 되고. 가상적인 실험이지만, 내가 전류와 같이 간다고 하면 그 입자는 자기장을 안 받아요. 자기장은 없고 전기장만 받는 거야. 전기장은 그대로 있는 것이고.

4.8. 시간 공간 관념이 바뀌어야 관측자에 따라 자연법칙이 달라지지 않는다

장회익 그런데 다른 데서(안 움직이면서) 보면 분명히 자기장이 있으니까 자기장의 힘을 받죠. 이게 바로 상대성 원리에 어긋나는 사례예요. 그 상황이 허용이 될 수가 없다 이거지. 그렇게 안 되려면 시간, 공간 개념이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것과는 달라져야만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아까 광속도가 방향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는 걸 설명하는 실험 방법과 교묘하게 같은 거예요.

그래서 속도가 달라지면 시간, 공간의 크기가 이렇게 달라진다 하는 것을 ‘좌표 변환의 법칙’이라고 해요. 움직이는 좌표계에서의 시간, 공간의 값들과, 정지해있을 때의 시간, 공간의 값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느냐하는 것이 로렌츠 변환식이라는 거예요.

우리의 기존의 시간, 공간 틀로 단순하게 보면 시간은 안 변해요. 움직인다고 해서 시간이 달라지지 않으니까 그냥 공간만 변하면 되죠. 그런데 로렌츠 변환은 (우리가 움직일 때 공간 뿐만 아니라) 시간도 같이 달라진다는 거야.

그래서 시간, 공간이 달라지는데 어떻게 달라지느냐?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하도록 달라져요. 하나는 광속도가 결과적으로 일정하게 되도록 달라지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전자기 법칙이 움직이는 사람이 보나 정지한 사람이 보나 받는 힘이 같게 되도록 달라진다, 그 두 가지 조건을 맞춘 거예요.

이것이 상대성 이론이야. 1905년에 나온 논문의 핵심이 그거예요. 그래서 “대전된(전하를 띠는) 움직이는 물체의 역학에 대해서”가 논문의 제목이에요, 상대성 이론이 아니라. 그러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이 움직이는 좌표계로 갈 때 이런 식으로 바뀌어야 된다 하는 것이 로렌츠 변환식이에요.

그런데 로렌츠는 광속을 일정하게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찌그러뜨려서 달라진 것으로 해서 만들어낸 식인데, 그 식에 해당하는 것을 조금 더 일반화해서 찾아낸 것이 (아인슈타인의) 광속 불변의 법칙, 상대성 원리 두 가지예요. 상대성 원리는 전자기 법칙도 (관측자에 상관없이) 일정해야한다는 것이고, 광속 불변의 법칙은 광속이 어디서 보나 즉 움직이면서 보나 정지해서 보나 같다는 거예요.

(*이 부분은 영상으로 다시 확인해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렵네요. ^^ 대담 영상 4-1에서 46:55~47:30에 해당합니다.)

이 두 가지를 집어넣어서 그 관계식을 얻었고, 전자기 법칙을 거기에 맞춰서 새로 정리하니까 움직이면서 보든 정지해서 보든 광속이 같은 것이 됐어요. 그리고 동시에 그렇게 하니까 움직이느냐 정지하느냐에 따라서 일부 자기장이 전기장이 되고 일부 전기장이 자기장이 되고, 이렇게 바뀌었어요. 이렇게 힘도 4차원에 해당하는 형식으로 바뀌게 돼요. 이것을 정리해서 내놓은 논문이 1905년에 낸 논문이에요.

4.9. 아인슈타인은 기존 시간 공간 관념을 깼다 그러나…

장회익 그래서 그 기본 바탕, 상대성 이론의 기본 바탕이 이것(시간공간 4차원)인데, 아직 그때까지 아인슈타인은 시간, 공간이 4차원을 구성한다는 것을 몰랐어요. 사실은 시간, 공간이 어떤 공간적인 차원에 있다는 것 까지는 아예 깨트렸어. 왜 깨트렸느냐? 그걸 맞추려면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틀은 안 맞으니까.

그 틀을 깨고 그것은 미신이다, 공간 3차원과 시간 1차원 그건 미신이다 하고 쓸어 버리고, 공간과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아까 얘기한 조작적 정의에 의존하고 나머지는 기본 논리와 원칙에 맞춰서 그냥 그 성질을 살필 뿐이지 그 외의 것은 훑어내자, 이것이 1905년 논문의 정신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관념틀, ‘3차원+1차원’이라고 하는 굉장히 중요한 사고의 바탕을 깨버렸어. 그런데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은 성공하지 못했어요. 대체 시키지는 않고 있는 것만 깼어. 그러니까 혼란이 오는 거예요.

깼다는 말도 명시적으로 하지 않아요. 단지 다른 것은 믿지 말고 자로 재고 시계로 재자, 그것만 믿으라고 했어요. 그런데 우리는 이미 (시간, 공간) 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이건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뭐가 잘못 됐으니 믿지 말아라, 이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것만 가지고 따라가려면 굉장히 어려워. 왜나하면 거기에도 논리도 쓰고 이유도 대야 하는데, 이 이유는 되고 저건 안 되고 어디는 되고 어디는 안 된다 하는 것이 분명치 않아요. 그러니까 혼란스러운 거지.

4.10. 민코프스키가 시공간이 4차원을 이룸을 밝혔다

장회익 이래서 초기에 상대성 이론을 받아들이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는데 민코프스키가 살려낸 거예요. 민코프스키(Hermann Minkowski. 1864-1909)는 아인슈타인이 대학 다닐 때 그 대학 수학 교수였는데, 탁 보니까 이 친구가 이게 4차원인데 이걸 몰랐구나 하는 것을 알아봤어요. 그래서 이것은 이제부터 공간 3차원, 독립적인 시간 1차원이 아니고 합쳐서 4차원 시간-공간 체계를 만족하는 것으로 봐야 된다 하고 탁 선언을 했어.

4.11. 시간 공간이 4차원이면 아인슈타인의 복잡한 가정이 필요 없다

장회익 4차원을 가지고 보니까 바로 상대성이론에 맞는 거야.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시간, 공간에 대해서 3차원+1차원이라는 개념을 4차원 개념으로만 수정을 하면 나머지 가정이 필요가 없어요. 4차원에서 다 나와. 그렇게 우리가 상대성 이론을 이해할 수 있는 거예요.

내가 이 책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에서 정리한 것은 후자 쪽이지. 민코프스키의 해석 쪽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먼저 시간, 공간을 4차원으로 생각하자, 그렇게 하면 아인슈타인이 했던 복잡한 유도 과정 다 필요 없고, 금방 답이 탁탁 나와요. 그래서 그것을 택한 거예요.

최우석 아인슈타인은 사실은 얻고 싶었던 결과, 즉 자연을 쭉 이해하고 나면 광속은 일정할 수 밖에 없고, 자기가 이상하다고 느꼈던 전자기 법칙이 상대성 원리에 안 들어맞고 있는 이 이상한 현상이 어딘가에 문제가 있기 때문일 테니까 뭔가를 고치면 이게 딱 들어맞을 것이다 라고 해서 얻고 싶은 결과를 가정으로 갖다 올려놓고, 이렇게 가정 했을 때 두들겨 맞춰야 될 데가 어딘지 찾아내서 그렇게 딱 보여준 것이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장회익 그렇지. 아인슈타인이 굉장히 어려운 과정을 겪은 거예요. 사실 그렇게 생각하려면 중간중간 하나하나가 굉장히 어려워요. 그래서 나는 그걸 예를 들기를, 아인슈타인이 전쟁을 하는데 상대방의 큰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접근을 해요. 정식으로 정문을 부수고 들어갈 힘은 안 되고, 그래서 광속이 일정하다는 비밀 무기를 하나 들고 보초한테 출입증으로 내보이고는 살금살금 기어올라가서 들어가서 성 안을 헤집고 다닌 거예요.

모든 사람들이 그 길을 따라가기는 굉장히 힘들어요. 그런데 그게 4차원이라는 것을 알면 쉽게 되거든. 그러니까 민코프스키가 살금살금 따라가봤더니 바로 4차원이더라는 거지. 그래서, 아! 이게 4차원이다하고 선언을 하고 성문을 열어젖힌 거예요. 아, 4차원! 그러니까 이해가 되네 하면서 이제 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하고 성이 점령된 거지. 그런 비유를 책에 들었어요.

(상대성 이론을 찾아낸) 역사적 과정은 굉장히 재미가 있어요. 간단히 보면 4차원인데 아인슈타인은 4차원인 줄 모르고, 결국 4차원이기 때문에 나온 그 결과를 찾아서 선언을 했다, 이렇게 전자기 법칙을 4차원 형식으로, 역학 법칙도 4차원 형식으로, 결과적으로 그렇게 바꾼 거예요. 그런 역사적인 상황이 있어요.

4.12. 시간 공간 이해하기 – 아인슈타인의 길? 4차원의 길?

장회익 지금 상대성 이론을 공부하는 데에는 아인슈타인이 갔던 길을 밟아서 가는 방법이 있고 4차원으로 먼저 이해하고 공부하는 방법이 있어요. 그런데 나는 불행히도 아인슈타인의 방법을 따라가는 식으로 처음에 공부를 했는데, 그게 마음에 안 들더라고. 시간, 공간이 몇 차원이냐를 제대로 정리하기 전에는 모든 게 다 불분명해보여. 그래도 논리적으로 그렇게 가면 그런대로 되기는 되는데, 사리에 안 맞고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광속의 99%를 따라가도 광속은 여전히 광속이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말이 되느냐, 항상 거기 가서 딱딱 걸려.

왜냐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시간, 공간 개념을 깨끗하게 청산하고 새 걸로 바꿔 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요. 늘 그렇게(기존 관념으로) 생각을 하는데, 그걸로(상대성 이론으로) 생각하면 또 안 된다. 그러면 어디까지는 되고 어디까지는 안 되느냐? 아무것도 안 된다 그러면 그냥 포기할텐데, 또 뭐가 된다고 하면서 답을 내놨단 말이야, 그러면 그건 또 어떻게 믿어? 이것도 못 믿는데! 이렇게 되는 거지.

그래서 이론의 틀 자체를 새롭게 딱 정리해버리면 그런 문제가 해소가 된다는 거죠. 그렇게 해 버리면 아까 얘기한 두 가지 문제, 아무리 빨리 가면서 봐도 광속은 여전히 광속 $c$라는 것도 금방 이해가 되고, 등속도로 움직이는 모든 좌표계에서 어디에서 보나 자연 법칙은 같다는 것도 금방 이해가 돼요. 4차원이라고 하면, 바로 그 안에 담겨 있어요.

그리고 어떤 방식의 4차원인가 하는 것은, 곧 얘기하겠지만 그냥 4차원이 아니에요. 나머지 네 번째 차원은 복소수 평면의 허수 축을 시간 축으로 삼으면 한 축이 더 늘어나는 거예요. 그런 의미의 4차원이다 하는 것을 딱 인정하면 아인슈타인이 했던 것이 다 나와요. 그래서 그 방법(4차원을 이용하는)을 이해보자하는 것이 여기서 우리가 공부하는 취지라고 볼 수 있죠.

최우석 선생님께서도 들이받는 사람들 중의 한 분이시네요. (웃음)

장회익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

최우석 그 대단한 아인슈타인이 내놨는데 마음에 안 들어서, 내용은 안 바꿨지만 이해 방식을 바꾸셨네요. (웃음)

장회익 아무리 아인슈타인이 했다고 해도 내가 그대로 따라갈 이유는 없다는 거지.

5. 자연법칙이 절대적인데 왜 ‘상대성’인가?

황승미 아까 갈릴레오도 ‘상대성’ 원리이고 아인슈타인도 ‘상대성’ 이론이잖아요. 갈릴레오의 상대성 원리에서는 배에서나 땅에서나 동일한 자연 법칙이 적용된다고 했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는 광속이 일정하다고 하고, 다 동일하고 절대적이라고 하면서 왜 모두 ‘상대성’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았는지 저도 그렇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5.1. ‘상대성’ – 기준축 설정에 대해서 상대적. 기준축을 어디로 잡아도 자연법칙은 동일

장회익 ‘상대성’이라고 하는 이유는 기준 축 설정에 대해서 상대적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기준 축을 이렇게만 해야한다 하면 그건 절대적인 거예요. 그런데 기준 축을 이렇게 잡아도 되고 저렇게 잡아된다하는 의미에서 상대적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어느 기준 축으로 잡더라도 내용은 같다는 의미에서 보면 오히려 절대적인 것에 가깝죠.

그래서 상대적이라고 하는 것은 까딱 하면 잘못 이해하는 수가 있어요. 보는 기준 축에 따라서 자연 법칙이 다 달라진다, 이게 상대성 원리다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건 정반대로 잘못 이해한 거예요. 그게 아니고 자연 법칙은 어느 기준 축에 대해서도 같다 하는 자연 법칙의 기준에 중점을 두면 이건 절대성에 가까워요. 그런데 기준 축을 어떻게 잡을 수 있느냐, 기준 축을 이렇게 잡아도 되고 저렇게 잡아도 된다 하는 면에서는 상대성에 가깝죠.

황승미 기준 축 설정에 대해서 상대적이라고 하는 말이 어려워요.

장회익 기준 축을 움직이는 좌표계로 잡아도 되고, 지구에 대해서 정지된 좌표계로 잡아도 되고, 기준 축을 잡는 데 자유가 있다는 거예요.

5.2. 시간의 간격이 기준축에 따라 달라진다

장회익 그리고 거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시간의 간격이 기준 축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시간의 간격이 기준 축에 무관하게 어디서나 일정하게 다 같다고 보고 있었어요. 두 사건에 이르는 거리는 달라도 시간은 같다고 봤어요. 그것이 기준 축이 어디냐에 따라서 시간 간격을 길게 봐야하기도 하고 짧게 봐야하기도 해요.

사건들 사이의 시간 간격은 좌표 축에 의존한다, 그런 의미에서 상대적이라는 것이 또 좀 부각이 돼요. 그런데 그건 별 게 아니거든. 우리가 위치를 나타낼 때에 2차원에서 $x$, $y$좌표로 나타내잖아요. 좌표 축을 바꾸면 $x$값과 $y$값은 당연히 달라져야지. 사실 그 내용이에요. 4차원이기 때문에 당연히 달라지는 거예요.

시간이 4차원, 즉 $x, y, z, \tau$ 중의 하나니까. 시간 $\tau$도 나머지 값 $x, y, z$와 대등하니까 좌표 축이 달라지면 당연히 $\tau$값도 달라지죠. $\tau$값 자체는 좌표 축에 의존한다는 의미에요. 그런 의미에서는 좌표 값을 보면 상대적인데 거기에 적용되는 법칙은 같다, 이 둘을 동시에 함께 이해를 해야 돼요.

6. ‘바탕 관념’이란 무엇인가, 시간은 바탕 관념 중 하나?

황승미 그리고 ‘바탕 관념’ 개념이 잘 안 잡힙니다. 그리고 이것이 시간과는 어떠한 관련이 있는 건가요?

장회익 공간이 어떻게 되어 있고 시간이 어떻게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러한 관념을 머리 속에 품고 사물을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간을 3차원과는 다른 별도의 1 차원으로 보느냐, 이게 하나의 바탕 관념이에요.

황승미 우리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태어나서 저절로 알게 되고 교육을 받으면서 알게 된 그런 관념 말씀인가요?

장회익 처음에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보다가, 그 다음에 교육을 받으면서 조금씩 바뀔 수도 있죠. 그 다음에 상대성 이론 쯤 되면 의식적으로 노력해가면서 바꿔야 되지. 그때 바꾸는 것이 바탕 관념을 바꾸는 거야. 사고 방식을 바꾸는 거지. 그래서 그것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시간이 바탕 관념의 중요한 한 요소거든.

황승미 그러면 상대성 이론이 나오기 전에는 시간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었는데, 상대성 이론이 나오면서 시간도 위치와 동일한 하나의 차원이 된다?!

장회익 과거에는 셋이었는데 시간이 네 번째의 좌표 값이 돼버린 거지. 바탕 관념 중의 하나가 시간인데 상대성 이론으로 그걸 수정하는 거죠. 시간의 관념이 독립적이고 어디서나 같고, 사건들 사이의 시간 간격은 누가 어떻게 보더라도 다를 수가 없다 하고, 누가 그렇게 증명한 것도 아닌데 대전제로 깔고 지금까지 봐온 거예요.

그런데 이제 그것을 바꿔야 되니까 바탕 관념에 변화가 오는 거예요. 그것이 어렵기는 하죠. 그런데 그것의 수학적인 구조가 재밌어요. 묘하게 허수 축과 맞아들어가는 그런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그것의 수학적인 구조가 굉장히 재밌어요. 그래서 자연의 조화가 아주 놀랍다는 거예요. 뒤죽박죽이 아니라 놀라운 질서를 품고 있다, 이렇게 하면 좀 받아들이기 쉽죠.

최우석 자연은 수학을 아는 사람들을 편애하는 것 같습니다. (웃음)

장회익 자연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수학 공부를 좀 해야지. (웃음)

최우석 다음 시간에는 좌표 자체에 대한 얘기, 상대성 이론의 전개, 그것이 앎의 바탕 구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다루게 되겠습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이야기 4-1’ 끝.

대담 : 장회익, 최우석, 황승미
영상 편집 : 최우석
녹취, 그림, 편집 : 황승미
전체 제작 : 녹색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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