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료는 녹색아카데미 유튜브 ‘자연철학이야기’에서 나눈 대담 3-1을 정리한 것입니다. 대담은 책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의 이해를 돕기 위해 2020년에 제작되었습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이야기 3-1. 고전역학의 역사지평 : 데카르트와 뉴턴
- ‘역사지평’은 어떻게 읽어야 하나?
- 내 생애 큰 앎을 이루리라는 포부, 특출난 사람들 이야기?
- 역사적 관련성’이 아니라 ‘문제의식의 연관성’?
- ‘역사 지평’의 장현광, 데카르트, 뉴턴의 공통점은 무엇?
- 앎의 혁명은 어느 때에? 혹시 앞의 것이 무너져 갈 때?
- 21세기의 학문 작업은 어떠한 것이 될까?
- 데카르트의 방법, 오늘에 보기에는?
- 정규 과정에서 벗어나기, 누구에게나 좋은가 될 사람에게나 좋은가?
1. ‘역사지평’은 어떻게 읽어야 하나?
최우석 지난번까지 저희가 선생님 책의 1장, 2장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는데, 2장은 본격적으로 다루었다기 보다는 장현광과 대비해서 데카르트와 뉴턴을 조금 다룬 정도였습니다.
오늘 나눌 이야기는 2장 고전역학 중에서 역사지평입니다. 데카르트와 뉴턴이 서구에서 근대 학문을 열었고, 또 한편에서 장현광이 앎의 구도를 제시했지만 그 구도에 빈칸이 있었고 뉴턴이 역사상 최초로 그 빈칸을 채워서 성공적인 예측적 앎을 구축했다는 얘기입니다. 오늘은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선생님께 여쭤보려고 합니다.
이 책의 2장부터 역사지평에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뉴턴이 학교 안 간 얘기, 데카르트가 정규 교육 과정을 피해 다녔다는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봤습니다.
장회익 데카르트가 정규교육 과정을 피한 건 아니지.(웃음) 데카르트는 당시로서는 최고의 정규교육을 받았다고 자인한 사람인데, 당시의 학자들 얘기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었죠.
최우석 선생님께서는 심학 10도 중에서 고전역학 부분을 ‘소를 보다’ 혹은 ‘소를 얻다’가 아니라 ‘소의 자취를 보다’에 놓으셨는데, 왜 그렇게 하셨는지 말씀을 들으면서 이해를 해볼까 합니다.
제가 처음에 가진 궁금한 점은 역사지평 부분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데가 내용정리 부분이라고 생각을 했었고, 역사지평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얘기 혹은 흥미롭게 앎의 지평으로 끌고 들어가는 유인책같은 얘기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보았는데요.
그러다 보니까 문득 든 생각이, 보통 교과서에서 사람 얘기는 쏙 빼고 앎만 주어져있는 것 같이 다루는 경향이 있는데, 제가 이 책을 교과서 보듯이 하고 있나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역사지평 부분을, 사실 분량으로 보면 이 책의 절반 이상일 수도 있는데, 왜 이렇게 열심히 쓰셨는지 어떤 의미로 이렇게 쓰셨는지 어떻게 읽으면 좋겠는지 이런 얘기를 먼저 듣고 싶습니다.
장회익 근본적으로는 내가 어떻게 앎을 추구해 나가겠느냐 하는 길이라고 할까, 그것을 좀 전하고 싶은 것이 큰 동기 중의 하나가 돼요. 역사적인 지평을 살펴보고(역사지평), 그럼 거기서 중요한 내용은 뭐였냐(내용정리), 이렇게 둘이 같이 가는 것으로 구조를 짰어요.
일단은 내가 지금 어떤 앎을 추구하려고 나섰다, 독자도 그런 자세를 같이 가져달라는 얘기지. 그러면 내가 무엇을 알고 싶고 뭐부터 해나가야겠느냐, 이런 자세에서 접근해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려고 하니까 그 뜻을 직접 독자들한테 얘기할 수는 없어서 역사적으로 살펴본 거예요. 이런 사람들은 각자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해서 알려고 했고 그래서 얻은 결과가 무엇이다, 이런 것을 연결해야 내가 현장에서 내 자신이 앎을 추구해나가는 느낌을 가지게 할 수 있어요. 이것이 역사지평을 살펴보는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에요.
여기에 나온 인물들은 정말 중요한 업적에 관여된 사람들인데, 그런 분들이 대개 어떤 자세로 어떻게 했기에 그런 업적을 이루었느냐하는 것에 대한 이해도 동시에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거죠. 지금 나는 그저 독자로서 이 정도 알면 되는 사람이야 하고 처음부터 선을 그을 필요가 없어요. 나도 이제, 이 사람들 못지 않게 큰 일을 할 사람이야 하는 자세를 같이 가지자는 거지.
그 사람들과 동급으로 생각하면서, 앞선 내 동료들은 이렇게 했는데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을 당당하게 같이 생각하자는 거예요. 위인전이라고 하면 그런 사람들은 아주 대단한 사람들 이야기, 나는 그저 소시민 이런 게 아니에요. 학문을 해나가는 데서는 지금 이 책을 읽고 강의를 듣는 모든 사람들이, 나도 지금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자는 거예요.
그래서 그분들이 보통 사람들과 달랐으면 어떻게 달랐는지, 그런 것에 대해서 직접 내가 배우고 거기서 얻을 것이 있으면 그걸 얻어서 뭘 하자, 이런 취지가 함께 담겨 있다 이렇게 보면 돼요.
최우석 그러기에는 너무 대단한 분들이라… (웃음)
장회익 그러면 안 돼.(웃음) 학문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아이쿠 나는 뭐 별로 대단하지 않다,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이분들이 한 것 보다 나는 더 큰 것을 할 수 있지 않냐, 그런 가능성을 열고 당당하게 봐야 돼요.
2. 내 생애 큰 앎을 이루리라는 포부, 특출난 사람들 이야기?
최우석 그런 차원에서 사실 이런 것도 궁금합니다. 1장에 장현광선생도 그랬고 데카르트나 뉴턴도 그랬고, 사실 선생님께서도 그러신데요. 나는 이 세계를 다 이해해보리라, 나는 뭔가 꿰뚫는 통찰을 얻어보리라, 깊이 학문을 해보리라, 대단한 앎을 얻어보리라하는 포부가 굉장히 크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이 사실 드물고 제 일상에서는 만나기 힘들고 굉장히 독특하고 특출난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취직해서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데 취직 공부 하기도 바쁜데 그런 대단한 앎을 추구해보리라 하는 이런 사람은 만나보기도 힘들고 내가 그런 인물이 돼본다는 건 더더욱 힘들 것 같습니다. 물론 저를 잘 뜯어보면 의외로 그런 구석이 어디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너무 비현실적인 사람들의 얘기인 것 같다는 느낌이 저는 들거든요.(웃음)
장회익 너무 현실에 맞춰서 생각을 하니까 그런 거예요. 적어도 공부할 때는, 나는 이것을 다 알아야하고 이것을 넘어서야 된다 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해야 돼요. 실제로 그것이 실현될 가능성이 얼마나 있냐? 그것은 물론 사람에 따라서 차이도 있고 다르지만 공부의 자세에서는 달라야 할 이유가 없다는 거지. 그래서 그런 자세로 공부를 해야 제대로 자기 역량을 발휘할 수 있어요. 나는 처음부터 한계가 있는 사람이다하고 딱 씌워 놓으면 그 이상 넘어가지를 못해. 그래서는 제대로 앎을 파악할 수가 없죠.
최우석 24시간 그런 포부를 가지고 살라는 것이 아니라, 책을 앞에 두었을 때 만큼은 내가 이 세상의 지혜를 다 꿰뚫어보리라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씀인 것으로 이제 이해가 됩니다.
장회익 내 어릴 때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나한테 삼촌이 꽤 여러 분이 계세요. 그 중에 나하고 제일 나이가 가까운 삼촌이 나보다 한 살이 많아. 그래서 가끔 만나고 친구처럼 얘기를 나눴어요. 그런데 내가 어떤 질문을 던져요. 책에 이런 게 있는데 나는 이것이 납득이 안 된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면 그 삼촌은, ‘야, 이거 다 너보다 나은 사람들이 한 거야, 넌 그냥 받아들여, 니가 아무리 해봤자 니가 이런 사람들만큼 할 거야?’ 이런 지적을 몇 번 받았어요.
지금까지도 그 일이 강한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내가 12살, 13살이지만 내 입장에서는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 했어도 내가 봐서 맞으면 받아들일 것이고 내가 봐서 납득이 안 되면 납득이 될 때까지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내가 더 나은 것을 할 수도 있는 건데 하는 생각을 했어요.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12살 먹은 아이가 대단한 사람들이 쓴 걸 보고 이상하다고 안 받아들이는 것을 온당치 않게 볼 수도 있죠.
그런데 내 자세는 그게 아니었고, 그때도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대단히 불만을 느꼈어요. 지금 생각해도 그런 자세는 가지면 안 된다는 거지. 어느 대단한 사람이 얘기를 했고 책에 써있다고 하더라도 이해가 안 되면 왜 안 되는지 12살이라고 하더라도 파들어가고 틀렸으면 틀렸다는 말을 할 수 있어야 된다, 그게 공부하는 자세예요. 거기서부터 기가 죽어서 못 하면 큰 공부를 못 하죠.
그래도 역시 아무나 그렇게 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 이 강의를 듣는 사람은 ‘아무나’가 아니야.(웃음) 적어도 나한테 와서 학문을 하겠다, ‘철학자를 위한 물리학’을 공부하겠다는 사람은 철학자의 마음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돼요. 동시에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자세를 가져달라는 거예요.
최우석 맞는 말씀이네요. 이 강의를 듣는 사람이나 이 책을 손에 쥔 사람 자체가 예사롭지 않은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해야겠습니다.(웃음)
3. 역사적 관련성’이 아니라 ‘문제의식의 연관성’?
최우석 역사지평을 읽어가면서 제일 처음에 눈에 띈 대목부터 여쭤보겠습니다. 책 초반부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인용 1)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보려는 것은 그 어떤 역사적 관련성이 아니라 이들이 지녔던 문제의식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느냐 하는 점이다.
인용 1 –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p.81
고전역학이 데카르트와 뉴턴에 의해서 태어났고 상대성이론은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태어난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기는 하지만, 양자역학의 탄생 뒤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서는 그 모든 사람들이 책에 다 소개된 것은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역사지평을 통해서 소개하고 그 사람들의 일화 중에 굳이 특정한 것만 실은 이유는 역사적인 맥락보다는, 사실은 선생님의 문제 의식에 의해서 굴비 꿰는 것처럼 엮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선생님께서 관련성을 찾아서 그렇게 보신 거죠?
장회익 그렇죠. 그러니까 학문의 중요한 흐름의 맥락을 통해서 그 사람들이 어떤 자리에서 어떤 역할을 했다, 이것에 주 관심사가 있어요. 몇 년에 누가 무엇을 하고 누가 무엇을 거쳐서 뭐를 했다, 이런 연대기적인 얘기보다는, 적어도 이런 학문을 하는 사람은 어떤 자세로 어떤 동기로 그리고 어떻게 해서 이렇게 갔다, 이것이 우리한테는 더 중요한 도움이 되는 거죠.
그리고 유명한 역사학자 E. H. 카아(E. H. Carr)도 그랬듯이, 역사도 사실은 그런 거예요. 후대 사람들의 관심사에 맞춰서 그 역사적인 사건이 연결이 되는 것이지, 관심도 없는데 과거의 사람들이 했던 행적 하나하나를 기록영화 보듯이 보자는 게 역사가 아니거든.
그렇더라도 ‘역사지평’을 역사라고 말하기는 적절하지 않고, 조금 전에 얘기했지만 나도 앎을 추구하려고 하는데 이분들은 어떻게 그런 것을 했나 이 정도의 관심에서 굵게 눈에 보이는 중요한 줄거리만 추려서 얘기를 한 거죠.
그러니까 이것을 역사 책으로 보면 안 돼요.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같은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걸어간 마음의 자세, 학문에 대한 자세, 그리고 물론 역사적인 계기도 있겠죠. 이런 것을 우리가 학문을 해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측면에서 소개하고 생각하자, 이렇게 이해를 하면 되겠어요.
최우석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여기에 주로 설정한 인물들은 일종의 혁명가 혹은 그 이전의 주류를 따르지 않은 이단아, 이런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나요?
장회익 결국은 그렇죠.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한번 학문의 흐름을 뛰어넘거나 깨고 뛰어넘은 사람들이니까 당연히 그렇게 돼요. 그렇더라도 사실은 거기에 비슷하게 기여한 사람들도 많이 있어. 그런데 그 사람들까지 다 집어넣으면 너무 난삽하죠. 그래서 몇몇 사람을 중점적으로 집중해서 본 거예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픽션을 만든다고 할 때 주인공 몇 사람을 내세워서 흐름이 머리 속에 잘 들어오게 짜야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역사 자체라기 보다는 사극 비슷한 그런 면이 있어요.(웃음) 그렇다고 내가 극적인 요소를 일부러 넣은 것은 아니야. 적어도 뽑아낸 면에서는 그렇죠. 너무 많은 사람들을 집어넣으면 혼란스러워요. 그래서 역사적으로 관계되는 몇몇 사람들을 추렸어요. 여기 나오는 사람들 중에서 뒤에도 계속해서 나오는 사람들도 있어요. 데카르트도 그렇고 아인슈타인도 거듭 나오고 슈뢰딩거도 여러번 나와요. 이렇게 해서, 그 몇몇 사람들의 행적을 통해서 학문을 하는 이런 세계를 다시 머리 속에 재창조해서 보이는, 어떻게 보면 좀 지나치기는 한데 그런 면이 있어요. 내가 몇 사람을 임의적으로 추린 거예요.
최우석 선생님께서 쓰신 사극이라고 생각하고 보도록 하겠습니다.(웃음)
4. ‘역사 지평’의 장현광, 데카르트, 뉴턴의 공통점은 무엇?
최우석 여기서 구체적으로 서술된 인물들에 대해서 궁금한 것들을 더 여쭤보겠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한데요. 2장까지로 보면 장현광, 데카르트, 뉴턴 세 사람이 나옵니다. 제가 볼 때는 선생님께서 유독 부각시키고 있는 인물들은 권위에 순응하지 않고 혹은 권위에 눌려서 기죽지 않고, 조금 더 나가면 말 잘 안 듣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심지어 저 옛날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는 노트에 한 마디도 안 적으리라 이러기도 하고요.(“이후의 페이지에 기록될 진리에 관한 어떤 내용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오는 것은 전혀 없도록 함.” – 뉴턴.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p.100)
제가 느끼기에는 이 사람들 말 잘 안 듣는 사람들이구나, 조금 더 좋게 표현하자면 혁명가적 기질을 가졌구나 이렇게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냥 말 안 듣는 기질을 주로 보신 건지 혁명가라면 모름지기 이럴 것이다 해서 뽑으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또 한 가지 더 여쭤보자면 근거가 있는지 없을지 몰라도 이 사람들이 다 엄청난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런 것까지 포함해서 이 사람들의 공통점을 무엇으로 보셨나요?
장회익 고전 학문과 근대 학문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가 할 때에 중요한 기준이 무엇이 되는지 지난 시간에 한참 논의를 했어요. 내가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다 재검토하고, 가장 옳다는 것을 내가 찾아나가겠다 하는 자세를 가졌느냐 아니냐가 근대 학문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했죠.
이전까지의 학문은 일단 앞에서 해놓은 학문을 전수해준 분들의 업적을 대단히 높이 여겨서 그것을 일단 받아들여요. 사실은 거의 거기서 그치죠. 그러면서도 조금 납득이 덜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이 조금 살을 붙이는 정도였어요.
그런데 근대 학문의 정신은 이게 아니야. 근대 학문은 누가 뭐라든 내가 알고 싶은 것을 찾기 위해서 일단 백지에서 출발하고, 그 이전의 답은 참고로 삼아 자신의 앎을 엮어나가는 이런 거예요. 장현광, 데카르트, 뉴턴 이런 분들이 근대 학문의 기점에 섰다는 얘기는 그런 자세를 가진 대표적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이고, 이것이 이분들의 특징이고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지난 시간에 얘기했듯이 장현광 선생은 내가 본격적인 학문을 내 힘으로 해보겠다하고 나섰어요. 사실 우리 동양 학문 세계에서는 이렇게 하는 데 보통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니죠. 바로 그 역할을 서구에서는 데카르트가 아주 철저하게 했어요. 데카르트는, 예를 들어서 우리 쪽의 여헌과 비교한다면 좀 더 제도적인 교육을 잘 받았죠. 그런데 여헌은 거의 못 받았어요. 사실 그 당시에 제도적인 교육이라고 할만 한 것도 별로 없었지만. 요즘으로 치면 여헌의 학벌은 ‘무’였어요. 그냥 혼자 공부했을 뿐이에요. 물론 누구한테 가서 잠깐씩 배우기는 했지만.
그러나 데카르트가 살던 때에는 학교가 있었고, 그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의 학교에 다녔어요.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를 했고, 그 중에서 배울 게 뭐냐 하고 비판적으로 본 거죠. 그랬더니 별로 배울 것이 없다, 도대체 내가 볼 때는 어떤 진리를 전해주는 것이 없는 것 같다 하는 비판을 한 거예요. 이게 대단한 거죠. 그러나 그 중에서도 받아들일 것은 있었죠. 그게 뭐냐 하면 수학이에요.
이게 아쉬운 점이죠. 동양에서는 여헌선생이 살던 당시에 수학이 그렇게 정리가 되어있지 않았거든. 산수라고 해서 좀 초보적인 것은 있었지만. 그 당시에 이미 서구에서는 수학이 상당히 높은 수준까지 가있었어요. 그래서 수학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해서, 데카르트는 수학 하나만 딱 받아들였어요.
반면 철학은, 진리를 말한다고 하면 10명의 철학자들이 하나의 통일된 얘기를 해야하는데 10가지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지 않느냐, 이것이 어떻게 진리냐 이렇게 데카르트는 생각한 거죠. 그래서 수학 하나 빼놓고는 모든 것을 내가 새로 하겠다, 이 자세를 가진 거예요.
그리고 뉴턴의 경우는, 물론 대학에 들어갔어요. 그 당시로서는 몇 안 되는 대학 중의 하나인 캠브리지에 들어갔어요. 요즘도 유명하지만. 그 학교에 들어가서 정식으로 공부를 하려고 하다가 데카르트의 책을 접한 거예요. 학교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익히라고 하니까 그렇게 하다가 데카르트를 떡 접하고 보니까 야, 이게 진짜 학문이다 해서 노트에 그렇게 기록을 했어요. ‘데카르트를 내가 공부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집어던진다’(⟪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p.100) 하고 학생 때 선언을 했죠.
그런 자세가 있다고 해서 다 큰 학문을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자세가 없었다면 큰 일을 했겠느냐, 아니지 않느냐 이거죠. 적어도 그런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지금도 이것을 우리가 본받아야 돼요. 지금 훨씬 많은 것들이 정리되어 있지만, 지금도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그 자세를 스스로 가지고 읽어나가야 돼요. 이거 진짜 맞는 얘기냐 틀린 얘기냐, 맞다면 그것이 맞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스스로 판단하느냐 그런 것까지를 생각하면서 봐야 된다, 이런 것을 우리가 배우자는 거죠.
선천적으로 그런 사람들은 누구한테 배우지 않고서도 그런 자세를 가졌다고 봐야죠. 선대들이 그렇게 이미 했으니까 지금 우리는 그런 자세를 가지는 게 그렇게 어렵지도 않아요. 정말 큰 업적을 내려면, 꼭 업적이 목적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기가 어떤 뜻이 있는 학문적인 세계에 가겠다면 그런 자세를 응당 본받아야 돼요. 안 가지고 있다면 본받을 필요가 있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소개를 했어요.
5. 앎의 혁명은 어느 때에? 혹시 앞의 것이 무너져 갈 때?
최우석 뭔가 으리으리한 것들이 서 있지 않을 때는 기존의 것들을 좀 우습게 보고, 내가 시작하지 뭐 하는 마음을 갖기가 쉬울 것 같기도 하지만, 어마어마한 것들이 크고 화려하게 누구도 범접할 수 없게 서 있을 때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지금은 사실 물리학의 경우에는 두세 번의 과학혁명을 거쳐서 엄청난 깊이로 양적으로 많은 것들이 확립되어 있고, 다른 분야들도 대학에서 다룰 수 있는 학문의 종류와 양이 어마어마한 정도가 되어 있는 상태인데요.
그런 상황은 이분들이 이런 마음을 먹었을 때에는 뭔가 완숙한 것이 없거나, 예전 것이 너무 고리타분한 구닥다리가 돼서 이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지금처럼 어마어마한 성채가 쌓여 있는 상황인데도 혹은 도리어 그랬기 때문에 새로운 학문을 할 수 있었던 것인지, 그런 저간의 사정도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장회익 굉장히 재미난 질문을 던졌는데, 그건 현재 지금 우리의 판단이야. 그때 그 사람들이 했을 때 대학에서 가르치던 것들은 으리으리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어요. 아리스토텔레스, 성경의 진리의 말씀, 등등 다 있는 거예요. 우리 동양 전통에서도 마찬가지야. 퇴계선생이 ⟪성학십도⟫라고 해가지고 성인들에서부터 내려오는 중요한 10가지를 정리해서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볼 때나 그렇지, 당시로서는 그렇게 가벼운 게 아니야. 그것만 공부하려고 해도 일생을 바쳐도 부족하다, 이럴 정도였어요. 하지만 그래도 핵심만 추려라, 그렇게 많지만 핵심만 추리면 뭐냐 하고 정리를 해보면 별 게 안 나올 수도 있다, 이런 것이 중요한 한 가지예요.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나중에 상대성이론 들어가면 할 얘기인데. 20세기 딱 들어설 때, 19세기까지의 고전역학의 권위라는 것이야말로 아주 컸어요. 그때는 과학 이전의 생각들을 넘어서서, 이제는 과학이 만들어낸 엄청난 것들이 19세기 말까지 확립이 되었어요. 그러면 이제는 더 이상 과학에서는 기본적인 것은 할 게 없고, 확립된 것들을 써서 계산만 하는 게 남았다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였어요.
그런데 그때 아인슈타인같은 사람이 나온 거예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가 나왔어요. 물론 아인슈타인 혼자만 한 것은 아니고 마하(Ernst Mach)라든가 몇몇 철학자들이 그런 의문을 슬금슬금 던져주기는 했지만, 그런 시대 정신의 흐름이 있었어요. 그것이 20세기의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거죠.
6. 21세기의 학문 작업은 어떠한 것이 될까?
장회익 그러면 지금 21세기는 어떠냐? 이제는 더 확실해졌지. 고전 학문이 근대 학문으로 가고 근대 학문이 또 한번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이 혁명적인 변화가 최종적인 게 아니라는 것은 거의 분명해졌어요. 그러면 이제 우리는 거기서 그 변화가 또 뭔지 보고, 그 다음에 더 중요한 새로운 것이 무엇인가 당연히 생각을 해야죠.
그것이 지금 21세기 학자들이 해야할 일이에요. 이왕 말이 나왔으니까 좀 더 얹으면, 내가 보기에 그 작업 즉 21세기 학문의 작업의 내용은 철학적인 작업일 가능성이 많다는 거예요. 이건 나한테 떠오른 생각이에요. 지난 번 대담에서 논의했지만, 철학은 물음을 던졌어요. 그리고 과학이 해답을 내놨다고 했죠. 정말 중요한, 그 물음에 대해서 정말 의미 있는 또는 대단히 생산적인 답을 냈어. 그래서 심지어는 철학의 일부가 아니라 과학이라는 체계적인 학문으로 뻗어나갔어요.
철학은 그 출발점에 있었다고 했죠. 그런데 철학은 출발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완결점이 또 철학이에요. 다시 가져와서, 지금 내가 여기서 정리한 그것을 다시 정리해서 그 전체 즉 철학과 과학을 다시 묶는 작업이 또 철학적이다 이거죠.
유명한 얘기라서 들어봤겠지만 ‘미네르바의 올빼미’라는 얘기 들어봤죠. 어떤 맥락에서 나온 건가?(웃음)
황승미 밑바닥에서 작업이 충분히 이루어져야 지성의 통찰 그런 것이 마지막에 결과물로 이루어진다는 그런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웃음)
장회익 맞아요.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희랍 신화에 나와요. 그것을 근대 학문에서 거론하게 된 것은 헤겔의 법 철학이라는 책의 서문에 들어가면서부터였어요.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돼야 날개를 편다, 그게 무슨 뜻이냐? 철학적인 작업이라는 것, 통합적인 작업은 지금까지 되어 있는 모든 것이 낮동안 어느 정도 다 이루어지면 그걸 종합해서 철학이 다시 그 작업을 한다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이제 우리의 맥락에서 보면, 철학에서 출발을 해서 엄청난 성과들을 냈어. 그럼 이게 대낮에 한 거야. 이제 저녁이 됐어. 그 올빼미가 상징하는 것은 철학적인 지혜를 얘기하는 거야. 이제 우리 지혜는 뭐냐 하면, 그것을 다 모아서 정말 이것이 우리한테 그리고 우리 삶에 어떠한 지적인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지, 이제 다시 펼쳐야될 시간이 왔다는 거지.
그래서 지금 21세기에 와서 20세기에 한 것들이 퍼져나가고 있는데, 그러니까 대낮에 그런 활동을 했어요. 이제 21세기 황혼이 됐어. 이번에는 올빼미가 날아가는 것 같이, 그것을 모으는 이런 큰 작업이 우리 앞에 남아 있는 거야. 이것은 내 개인적인 소신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그 어떤 때에 못지 않은 창의적인 작업을 하는 거죠
그 작업의 종류는, 이제는 무조건 비판만 하거나 새로운 것만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찾은 결과가 무엇인지 정돈하는 작업을 해야돼요. 정돈해서 다시 정말 의미있는 것을 만드는 일 이것 역시 여전히 창의적인 작업인데 그 작업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에요.
지금 이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앞으로 그러한 작업을 해야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것을 위해서 적어도 어떤 밑바탕이 됐으면 하는 것이 이 강의의 목적이에요. 그래서 각자가 누구 못지 않은 중요한 학문적인 일을 내가 해야되겠고 내가 할 수 있다,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고 봐요.
황승미 우리가 그동안 이만큼 해냈는데 도대체 우리가 뭘 한 거지, 하고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장회익 그렇지. 바로 그거야. 그 작업을 지금 해야된다는 거예요. AI한테 맡길 일이 아니야. AI가 그 일을 할 수가 없어. 그래서 이게 사실 아이러니인데, 그런 작업을 하는 사람한테는 교육을 너무 잘 하면 안 돼. 그리고 너무 충실하면 안 돼.(웃음)
예를 들어서 내가 책에도 썼지만, 뉴턴이 캠브리지대학에서 공부할 때 뉴턴한테 너무 잘 가르치려고 아리스토텔레스를 너무 충실하게 교육을 잘 시키는 교수가 만일 있었다, 그러면 뉴턴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자는 될 수 있었겠죠. 사실 당시 교육이 좀 느슨했어. 느슨한 틈을 타서 뉴턴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한 거예요.
그래서 교육은 너무 철저하면 안 돼. 틈이 필요해요. 빈틈이 있어서 숨 쉴 공간을 줘야지, 그래야 그 사람들이 창의적인 것, 뭔가 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을 수 있어요. 그렇지 않고 꽉꽉 조여서 정해진 길만 따라가게 하면, 그걸 못 할 경우에는 낙오되고 그걸 해야 그저 그 다음 단계에 겨우 올라서는 그런 결과가 되기 쉬워요. 제도 교육의 문제가 거기에 있어요. 제도 교육을 너무 잘 하면 전부 그렇게 돼버려.
요즘 우리 학생들이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학교를 못 가잖아요. 학교 못 가는 게 나쁜 게 아니야. 왜냐하면 늘 정해진 시간에 학교에 가서 공부하던 것 대신에, 지금 이 시기를 혼자서 책도 읽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가 있어요. 물론 이 상황이 좋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엄청난 오해예요.
팬데믹 상황은 큰 불행이에요. 그러나 이 책에 이미 나와있는데 뉴턴이 젊어서 아직 학생일 때일텐데 큰 업적은 낸 것이 지금 우리 시대의 코로나처럼 큰 역병이 유럽에 돌 때거든. 대학이 다 문을 닫았어요. 시골로 전부 내려갔어. 뉴턴도 시골에 내려가서 한 1년 가까이 있었는데 그 기간에 고전역학이 나온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지금 코로나19 시기에 어떤 새로운 학문이 나올 지도 몰라요. 지금 이 숨막히는 교육 여건에서 벗어나서, 이 기간에 이번에는 내가 좀 해보자 이런 사람이 나올 수 있죠. 그러니까 여건이 나쁘다고만 할 게 아니고 그것을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해요.
요즘 교육부에서 고민이 많은가봐요. 언제부터 학교 강의를 다시 시작할 거냐 가지고 고민이 많은 것 같은데, 나는 조급하게 볼 거 없다고 봐요. 학생들한테는 절호의 기회야. 학생들이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는 기회가 잘 없어요. 그런 자유를 느끼면서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도 나는 필요하다고 봐요.
7. 데카르트의 방법, 오늘에 보기에는?
최우석 역사지평 얘기를 많이 했는데요. 이제 데카르트에 대한 질문 한 가지만 더 드리고 뒤로 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데카르트의 얘기 중에 제가 궁금했던 것은 데카르트의 네 가지 규칙에 대한 것입니다. 데카르트가 논리학의 여러가지 규칙 중에서 이렇게 네 가지만 추려서 자기의 방법 내지는 지침으로 삼았다고 선생님께서 보시고 정리하셨습니다.
저같은 경우에는 사실 데카르트에 대해서 좋은 얘기는 별로 못 듣고 공부를 해왔습니다. 그 사람이 이루어 놓은 근대 학문, 근대 과학의 세계가 빛나는 업적이기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연 혹은 지식이 파편화 됐다든가 하는 근원이 데카르트가 아니냐, 이렇게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데카르트까지 내가 공부할 필요는 없겠구나 이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황승미 특히 환경 공부하는 사람들한테는 데카르트와 베이컨은 양대 악의 축이에요. 이 사람들때문에 환경 문제가 비롯되었다, 항상 이렇게 시작을 하거든요.(웃음)
최우석 저도 대학에 와서 학문에 접해보면서 꼭 그런 것만은 아니겠구나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전반적으로는 데카르트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데카르트가 정리한 네 가지를 보면(인용 2) 눈에 띄는 부분이 가능한 한 작은 부분으로 나눌 것, 가장 단순하고 알기 쉬운 것에서부터 출발해서 복잡한 데까지 단계적으로 갈 것, 이런 구절입니다. 이것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보시는지, 아니면 지금의 근대 학문을 끌어내는 중대한 기틀을 만들어냈지만 지금에 와서는 유효기간이 다 됐다고 보시는지 그런 것들이 좀 궁금합니다.
첫째,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석 판명하게 내 정신에 나타는 것 외에 어떤 판단도 내리지 말 것.
인용 2 –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p.94.
둘째, 검토할 어려움들을 각각 잘 해결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작은 부분으로 나눌 것.
셋째, 내 생각들을 순서에 따라 이끌어나갈 것, 즉 가장 단순하고 가장 알기 쉬운 대상에서 출발해 단계적으로 가장 복잡한 것의 인식에까지 이를 것.
넷째, 아무것도 빠트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 만큼 완벽한 점검과 총체적 검토를 전 과정에 걸쳐 수행할 것.”
장회익 사실은 데카르트가 근대학문으로 세운 업적은 대단히 창의적인 것이고, 그리고 그 기초는 일단 우리가 받아들여서 해야 돼요. 그리고 사실 그런 비판에 대해서 데카르트는 책임이 없어요. 자꾸 데카르트한테 책임을 묻고 뉴턴과 데카르트를 공격 하는데, 그들의 학문을 경직되게 만든 것은 후세 사람들이 그렇게 한 거예요. 데카르트와 뉴턴이야말로 그 당시로서는 가장 새로운 것을 찾아나간 거예요.
어떻게 보면 데카르트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게 또 어떤 진리인양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럴 수도 있죠. 데카르트가 말한 것에서 마땅치 않은 것이 있다면 우리가 검토하고 비판을 하면 되는 거지, 데카르트한테 책임을 지울 수는 없어요. 데카르트로부터 배울 게 많아. 굉장히 상식적이면서 아주 실용적인 거예요.
데카르트 이전에 그때도 이미 논리학도 있고 뭐도 있고 다 있었어요. 형식논리며 복잡한 것들 다 있었는데 그거 너무 난삽하다 하고 데카르트는 탁 집어던지고 지금 나한테 필요한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뭐냐, 이 네 가지를 내놓은 거야(인용 2). 너무도 단순하고 간결하지.
그러니까 이건 누구에게나 당연히 이렇게 해야 된다는 거예요. 복잡한 문제 가지고 씨름 하면 안 되니까 그 줄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가지고) 가장 단순화시켰을 때 나오는 것을 찾아서 거기서 출발해서 넓혀나가는 이런 거죠.
여기서 세 번째 항목 “셋째, 내 생각들을 순서에 따라 이끌어나갈 것, 즉 가장 단순하고 가장 알기 쉬운 대상에서 출발해 단계적으로 가장 복잡한 것의 인식에까지 이를 것”을 봅시다. 물리학을 예를 들면, 물리학과라는 데를 입학해서 물리학 정규 교육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워요. 수학에서 뭐 배우고 물리학에서 뭐 배우고, 그 모든 것을 배우는 동안에 도대체 물리학이 뭔가에 대해서는 없어. 그저 이렇게 해서 나중에 다 알고 보면 그 다음에 짜맞춰져서 이런 것이다 하고 알게 되는 거예요. 자동차 만드는 공장에 가보면 부품 하나하나를 다 따로 만들고, 마지막에 가서 다 연결해서 발동을 윙 걸어야 움직이는데, 이런 식으로 학문을 하는 것이 이 경우예요.
그래가지고는 너무도 과정이 난삽하고, 굉장한 인내력을 가지고 하지 않으면 해나가기가 어렵죠. 요만한 거 하나라도 진짜 제대로 움직이는 걸 만들자, 자동차라고 한다면 장난감자동차 하나를 먼저 만들어라, 그래서 어떻게 움직이냐를 알자, 그 다음에는 더 성능을 좋게 하려면 뭘 더 붙이고, 이렇게 해나가는 거예요.
그런데 자동차를 그렇게 해나가기는 어려워. 그래서 나는 송아지를 비유로 들어요. 소는 큰 소가 돼야 일을 하지만, 큰 소를 처음부터 만들 수는 없잖아요. 송아지를 키워. 송아지는 이미 살아서 뛰어다니는 동물이야. 거기다가 영양만 주면 점점 힘이 커지는 거죠. 학문의 송아지가 뭐냐. 그 송아지처럼 가장 간단하고 우리가 손쉽게 다룰 수 있는 것, 이미 작동하는 것, 그 안에 살아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것을 먼저 하나 가지고 키워나가는 방식 그것이 바로 여기 데카르트의 방식이에요.
가장 단순하고 알기 쉬운 대상 하나를 먼저 확실하게 해놓고, 아 그러니까 이게 더 복잡하고 더 현실성을 가지려면 뭐가 더 있어야 되고 또 뭐가 더 있어야 되고, 이렇게 나아가자는 거죠. 이 방법이 아주 좋은 방법이에요. 우리가 본받을 필요가 있는 거죠.
최우석 저는 이 방법을 보고 송아지를 키워 나간다고는 생각을 못 해봤고, 소 다리도 보고 소 뿔도 보고 소 염통도 보고 이런 식으로 생각했었습니다.(웃음)
장회익 가장 간단한 것이 뭐냐? 송아지야. 그것으로서 작업을 할 수 있는 제일 간단한 것을 먼저 추리라는 거예요. 많은 복잡한 것들이 있지만, 핵심만 추리고 중요하지 않은 가지는 다 긁어내고, 그래도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작업할 수 있는 그것을 찾는 지혜, 그게 필요한 거예요.
황승미 첫째 항목은 편견같은 것이나 선입견을 가지지 말라는 뜻인가요? (“첫째,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석 판명하게 내 정신에 나타는 것 외에 어떤 판단도 내리지 말 것.”)
장회익 학문은 우선 일단 성인이 내려준 거니까 의심이 되더라도 받아들여라 하는 것에서 벗어나자는 거지. 나한테 납득이 돼야 돼. 내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데, 나한테 이해가 안 되면 그건 내가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거지. 받아들이면 그건 도그마가 돼서, 자기도 이해를 못 하는 것에 매여서 자기가 그걸 아는 것처럼 착각을 해요. 거기서 벗어나라는 거야.
이게 정답이다? 정답이라는 것은 없는 거야. 정답은 어디에 있냐? 정답이라고 나한테 확인이 될 때까지는 없는 거야. 내가 정답을 찾는 것이지, 정답을 받는 게 아니라는 거지. 그게 중요한 자세예요.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아무것도 빠트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 만큼 총체적으로 검토 하라고 돼있죠. 전체를 다시 연결 하라는 거야. 조각을 낸 것에 만족하지 말라는 거죠.
황승미 그러면 연결이, 그러니까 통합과 종합이 데카르트의 이야기 속에 이미 들어있는 거네요?
장회익 들어있지. 이걸 잘 이해를 못 하고서는 공연히 데카르트를 비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서 더 배워나가야 돼.
최우석 데카르트가 이미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모든 것을 바닥까지 의심할 필요가 없어진 게 아니라 지금도 데카르트가 했던 것처럼 다 반복을 해야되는 건가요?
장회익 바로 그 얘기지. 데카르트의 그 자세를 받아들이는 거죠. 데카르트가 다 의심해 놓았으니까 나는 의심 안 해도 된다, 이 얘기가 아니에요.(웃음)
황승미 통합하는 일은 너무 힘든 것 같아요. 어떻게 하는 게 통합인지 잘 모르겠어요.
장회익 (앎이) 이제 너무 커졌으니까 힘은 들지만, 그래도 거기서 중요한 줄거리를 찾자는 거지. 중요한 줄거리를 또 엮어낼 수가 있겠지.
8. 정규 과정에서 벗어나기, 누구에게나 좋은가 될 사람에게나 좋은가?
최우석 학교가 문을 닫았을 때 뉴턴이 큰 성취를 냈다고 말씀하셨는데, 거기에 대해서 이렇게도 되물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사색과 자유로운 학문을 할 여건이 주어졌기 때문에 꼭 그렇게 성과를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될 놈은 어떻게 해놔도 된다, 이런 게 아닐까요?(웃음) 안 될 놈은 학교가 문을 닫으면 다 들로 산으로 놀러가지, 누가 공부를 했겠느냐, 뉴턴은 어떻게 놔둬도 했을 거다, 이렇게도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웃음)
선생님께서는 그런 것이 꼭 빼어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우리들 모두, 이른바 학생이라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학’을 위해서는 자유로운 공간을 열워줘야 된다, 이런 입장이신 것 같은데요. 그래서 제가 문득 생각해본 것이, 그러면 모든 학생들에게 1년이나 반 년 정도의 유급 안식년같은 것을 주면 더 좋아질까? 혹은 요즘 점점 젊은 세대들이 줄어든다고 하는데, 앞으로 후세들이 (인구가 줄어서) 더 적어질텐데 이들이 더 훌륭하게 일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투자를 해서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네 마음대로 1년 지내다 와라, 이런 것을 줄 필요가 있겠는지, 이런 것도 한번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장회익 그게 참 재미난 주제인데. 나는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적어도 한 번은 대략 한 1년 정도를 완전히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기 나름의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을 주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 보다 낫다, 누구에게나. 그렇게 봐요.
옛날에, 여헌 장현광 같은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에는 학교라는 게 거의 없어요. 향교라는 게 있기는 했지만 다 다녔던 것도 아니고, 일생을 자유롭게 공부했던 사람들이에요. 지금은 초등학교 이전에 벌써 유치원, 유치원 전에 또 어린이집이라는 것도 있어서 태어나자마자 제도권의 교육에 그냥 들어가요. 그렇게 들어가서 거의 한시도 쉴 틈이 없이 박사학위까지 그냥 가죠. 그 기간 동안 언제 자기 것을 생각할 수가 있었겠느냐,하고 보면 별로 틈이 안 보여.
우리가 창의적인 학문을 한다고 할 때 이것이 가능한 길이겠느냐 하는 생각이 있어요.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흥미로운 것이, 뉴턴과 아인슈타인 두 사람 다 두번씩 공백을 가지고 있어요. 첫째 공백은 대학에 들어가기 이전의 공백, 우리로서는 중고등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않고 혼자 공부하는 기회가 있었고 그 다음에는 대학 들어간 이후에 공백이 있었어요. 뉴턴은 바로 1665년 감염병이 돌아서 학교 공부를 쉬었고, 아인슈타인은 취직이 안 돼서 3-4년 혼자 공부하는 공백을 가졌어요. 그리고나서 놀라운 업적이 나왔죠.
그것이 우연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나도 개인적으로 그런 경험이 있거든. 나도 초등학교 졸업을 못 했어요. 한 1년 이상 혼자 공부해야될 상황이 있었는데, 그때는 대단히 괴로웠고 정말 학교에 꼭 가고 싶었지만, 할아버지가 학교에 가지 말아라하고 엄명을 내려서 못 갔는데(웃음) 결과적으로는 그게 나한테 도움이 됐어요. 혼자 공부해보면서 자신도 생기고 나도 모르게 능력이 개발됐어요.
그래서 나는 그런 것에 대한 느낌을 조금 더 알죠. 시간이 지나고 나서 혼자 공부할 때의 상황을 지금 생각을 해보니까, 이게 도움이 됐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모든 사람한테 그런 것을 제도적으로 한다는 것은 너무 복잡한 일이겠지만, 우연히라도 그렇게 될 기회를 가졌으면 그 기회를 꼭 나쁘게 볼 필요는 없어요.
사실 내가 몇 년 전에 부산에 있는 과학영재학교에서 강연을 하고 교장선생을 만나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거기서는 고등학교 과정을 2년만에 마친다고 해요. 그러면 1년은 뭐하느냐 했더니 대학교에 보낸다는 거야, 1년 미리. 그러지 말고, 1년 자유를 주는 게 어떠냐고 했어요. 대학에 갈 수 있을 정도로 준비가 됐으면, 아예 2학년 때 대학에 입학을 해놔도 좋아요, 단 학교에서는 대학까지 확실하게 가게 됐으니까 이제는 심적인 부담이 없잖아요. 나머지 1년은 네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걸 해라 하고 기회를 주면, 아마 그렇게 좋은 기회가 없을 거다 하고 제안을 했어요. 그 비슷한 것을 시도한다는 얘기도 들은 것 같아요. 나는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봐요.
황승미 아무나 그렇게 되는 것 같지는 않아요.(웃음)
장회익 여기서 ‘아무나’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야.(웃음)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벌써 될 사람은 되고, 그게 다 능력의 차이라고 만드는데, 그게 크게 잘못 된 거예요. 사람들의 기본적인 능력은 모두 같다는 대전제 아래, 차이는 그것을 어떻게 키우느냐에 있어요. 왜냐하면 DNA에 차이가 별로 없다고. 천재 DNA, 없어요. DNA는 근본적으로 같아요. 그러니까 그것을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그것은 자기 스스로 할 수 없는 면이 있죠. 어릴 때의 환경을 자기가 만들 수는 없어요. 부모라든가 주변에서 만들어주니까 자기한테 책임을 꼭 둘 수는 없지만, 태어날 때부터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큰 잘못이야.
그렇게해서 아예 낙인을 찍어버린 것, 이것처럼 나쁜 게 없어요. 그래서 누구나, 나도 아인슈타인, 나도 뉴턴, 이런 자세를 가지고 일단 살아가야 돼.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20대에 뭘 했는데, 나는 벌써 40대인데, 이런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나는 좀 특별해서 난 40대 이후에 뭘 해내는 사람이야 하고 자신을 가질 수도 있지. 그러니까 나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야, 이럴 수도 있어요. 절대로 기죽을 필요가 없어요.(웃음)
황승미 낮이 너무 길어요, 선생님.(웃음) 저도 고등학교 때와 대학교 때 1년씩 두번 쉬었거든요. 저는 학원 다니면서 선행 학습을 했습니다. 지금도 다들 집에서 인터넷으로 선행학습 하고 있을 것 같아요.(웃음)
장회익 선행학습, 그런 거 할 필요가 없는데.(웃음) 어차피 학교 가서 다 배울 건데 그걸 미리 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그때 아니면 못할 것, 이것을 해야 돼요.
황승미, 최우석 네, 알겠습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이야기 3-1’ 끝.
대담 : 장회익, 최우석, 황승미
영상 편집 : 최우석
녹취, 그림, 편집 : 황승미
전체 제작 : 녹색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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