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회익의 자연철학이야기 2-2. 예측적 앎의 바탕 구도와 시공간에 대한 바탕 관념


이 자료는 녹색아카데미 유튜브 ‘자연철학이야기’에서 나눈 대담 2-2을 정리한 것입니다. 대담은 책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의 이해를 돕기 위해 2020년에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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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회익의 자연철학이야기 2-2. 예측적 앎의 바탕 구도와 시공간에 대한 바탕 관념

  1. 예측적 앎?
    1.1. 좋은 앎은 예측적 앎의 구도를 갖나?
    1.2. 점도 예측적 앎이라 할 수 있나?
    1.3. 동아시아의 이(理)는 근대학문의 이치와 다른가?
    1.4. 예측적 앎은 무불통지(無不通知)?
  2. 앎의 바탕 구도: 장현광으로부터 알게 되는 앎의 틀 속으로 들어가기
    2.1. 특성, 상태, 변화의 원리 – 예측적 앎의 3요소?
    2.2. 변화의 원리와 대상의 특성 사이의 관계?
    2.3. 심학1도 – 예측적 앎의 보편적인 틀?
  3. 앎의 바탕 관념: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념에 대하여
    3.1. “왜 안 떨어지나” vs “왜 떨어지나” 질문의 근원?
    3.2. ‘바탕 관념’은 ⟪과학과 메타과학⟫의 ‘서술공간’?
    3.3. 차원 개념?
  4. 어떻게 공부하면 좋은가?
  5. 자연철학 공부의 의의 – 세상이 어지러울 때 자연철학은 공부해서 뭐하나?

1. 예측적 앎?

1.1. 좋은 앎은 예측적 앎의 구도를 갖나?

최우석 자연철학 전체에서 논의하고 있는 지식들이 다 공통적으로 ‘예측적 앎’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측적 앎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어요. 첫째는, 대비적으로 예측적 앎이 있다면 설명적 앎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우리가 주머니로 찰 수 있는 여러가지 좋은 앎 중에 어떠한 변화를 설명하고 예측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종류의 앎들만 다 모아서 이 책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에서와 같은 설명을 해주시는 건지, 아니면 좋은 앎은 어떤 한계가 있을 수는 있지만 종국적으로는 예측적 앎이라고 하는 형태를 띌 수 밖에 없다라는 생각을 하시는 건지 궁금합니다.

장회익 흥미로운 질문인데, 이렇게 봐요. 제대로 된 앎은 모든 상황에 대한 시공간적인 관계가 어떻게 합법칙적으로 연결되어 있느냐, 그 연결의 틀을 보는 거예요. 시공간적인 모든 변수가 어떻게 서로 얽혀 있느냐, 어떻게 연결돼 있느냐. 그렇게 돼서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앎이 형성돼요.

예측적 앎이라고 하는 것은 그 중에서 특별히 일부를 따로 가시적으로 엮어 놓은 거예요. 우리는 미래를 알고 싶은 거예요. 미래는 직접은 모르니까. 알고 싶어하는 우리의 욕망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의 초점이 바로 거기에 가 있다는 거지.

이것을 시간 변수로 펼치면 이게 예측적 앎이 되는 거야. 시간 변수로 펼쳐서 엮어진 앎을 보면, 이게 체계적으로 시공간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으니까, 현재의 시간에 이렇다면 미래의 시간에는 어떻게 간다하는 예측적 앎의 형식으로 우리가 쓸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예측적 앎이라고 하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전체적인 구조가 인과적으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에 대한 이해가 전제가 돼서, 그 중에 시간 변수를 명시적으로 추려내서 보는 것이 예측적 앎이에요. 예측적 앎이 되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이론 체계의 인과적인 구성을 파악을 해야 되는 거죠.

그런데 모든 중요한 앎은 바로 그러한 파악 속에 있는 거예요. 뿔뿔이 흩어져서 여기에는 이것이 있고 저기에는 저것이 있어, 이런 것은 큰 뜻이 없어요. 여기에 이게 있고 저기에 저게 있지만 이건 어떻게 관계가 있고 저건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러한 관계 전체를 파악하는 것이 우리가 희망하는 제대로 된 앎이에요.

그러한 구조가 어느 정도 성공이 돼야 예측적 앎이 가능한 거예요. 그래서 예측적 앎이 가능하다는 것이 확인이 되면, 그런 합법칙성이 이미 그 안에 파악이 된 앎이라고 할 수 있어요. 공간 변수로 펼치면, 공간적으로 여기는 어떠한데 저기는 어떠할 것이다하고 예측하는 것도 가능해요. 그리고 (예측적 앎을) 과거에 대해서도 펼치면, 지나가버렸지만 우리가 못 봤으니까 과거에 대해서도 어떠했을 것이다하고 볼 수 있죠.

1.2. 점도 예측적 앎이라 할 수 있나?

최우석 인류의 역사를 보면 예측하는 행위, 그 행위를 뒷받침하는 정당화로 여러가지가 있었지 않습니까? 점, 주술도 그런 것이고 주역같은 것도 일종의 그런 것인데요. 그런 것들이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걸로 보면  ‘예측적 앎’이 되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장회익 그런데 사실 점이라는 것도 일종의 예측적 앎이지. 점괘같은 바탕으로 하는 근거가 있어야 돼. 점괘가 이렇게 나왔다 할 때, 점괘라는 것은 미래에 대해서 제시해줄 수 있는 뭔가가 담겨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그래야 예측을 하니까.

최우석 그런데 거기에 인과적인 연관은…

장회익 그 인과적인 것을 그냥 건너뛰어서 점괘가 그렇다 하는 것으로 그냥 보죠. 심지어는 어떤 사람이 뛰어나서 직관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 있어서 미래를 투시한다, 이런 가정을 해요. 그 투시라고 하는 것에 대한 어떤 가정이 성립할 때에 (점이)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는 거예요.

노스트라다무스가 미래를 예측했다고 하는데 뭘 가지고 했나? 아마 자기 나름의 뭔가 있었을 지도 모르지. 어쨌든 미래를 예측하려는 시도를 하는데 예측의 바탕원리 혹은 합법칙적인 법칙, 상태변화의 법칙이 제대로 된 거냐, 검증이 된 거냐 안 된 거냐 여기에서 차이가 나는 거지.

검증되지 않은 것을 가지고 해보고 우연히 몇 개 맞췄다고 해서 아, 이 사람 신통하다, 이런 것은 학문이 안 돼요. 그런데 몇 백 번을 봐도 이것은 틀림없다고 하는 법칙으로 확인이 돼서 그것을 기준으로 할 때에, 이것은 우리가 신뢰할만한 예측적 앎이 될 수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이것은 100 퍼센트 진리이고 다른 것은 100 퍼센트 허위다, 이렇게 나눌 수는 없어.

진리에 굉장히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검증이 아주 잘 돼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도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허점이 발견될 수도 있고 그러면 더 나은 것으로 바뀔 수도 있지만, 적어도 현재로서는 이것이 가장 신빙성 있는 원리라고 한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예측적 앎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앎이에요. 그렇지 못한 것은 근거가 없는 거죠. 그래서 사실은 그냥 믿음에 불과하거나 미신이 돼버리는 경우가 많죠.

이 둘을 구분하는 데에 절대적인 기준은 없지만, 거기에서 합법칙적이고 합리적인 원리들을 제대로 찾아내고 그 원리에 바탕을 하느냐 안 하느냐, 우리가 이것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최초로 아주 중요한 성공을 한 것이 뉴턴의 고전역학이에요. 지금도 우리가 하늘의 모든 천체의 움직임을 미리 예측할 수 있잖아요. 그게 다 뉴턴의 역학으로 되는 거야.

점쟁이들이 그런 것은 못 하죠. 그런 차이가 있는 거예요. 뉴턴 역학을 이용하면 사람이 달에도 갈 수 있고 화성에도 갈 수 있고, 이런 것까지 다 같은 원리를 가지고 하죠. 하지만 달에 사람 보냈다는 점쟁이는 없죠. 그러니까 그런 차이를 우리가 알아야 돼. 그런 차이를 모르고 이 사람 말에도 귀에 솔깃 저 사람 말에도 귀에 솔깃, 이래서는 안돼. 앎의 기본 틀, 기본 원리가 어떤 구조로 되어 있고, 어떤 것이 우리가 신뢰할만한 것인지 아닌지를 분명히 가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 우리가 자연철학을 이해하려고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죠.

1.3. 동아시아의 이(理)는 근대학문의 이치와 다른가?

최우석 동아시아에서 이(理), 기(氣)를 얘기할 때 ‘이’는 오늘날 우리가 이런 걸 논의할 때 얘기할 수 있는 이치 그런 것과는 다른 건가요?

장회익 그걸 포함하는데 그것보다 더 넓은 개념이에요. 당연히 포함하죠. 더 넓게는 행위 규범의 ‘이’도 있는 거야. 행위를 어떻게 해야 된다, 그런 것도 이치에 맞아야 된다고 봐요. 그때 ‘이’는 후대에 와서는 오히려 도덕적인 규범을 ‘이’라고 하는 방향으로 많이 기울어져 갔는데, 본래 ‘이’의 개념은 자연의 이치가 더 기본적이죠. ⟪우주설⟫같은 책에서는 주로 자연의 이치를 얘기하지만, 거기서도 사람의 행위에 대한 것도 그러한 ‘이’에 속한다하는 것을 인정을 하고 들어가고 있어요.

최우석 영어에서 ‘must’가 일상에서는 ‘…해야 한다’는 규범적이고 강제적인 뜻으로 쓰이는데, 또 한편으로는 어떻게 될 수 밖에 없다라는 뜻으로도 쓰이는데요. 마치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다는 이치가 확대되어서 이러이러해야한다는 규범으로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장회익 그런 변천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동아시아에서는 그걸 구분 안 하고 ‘이’라는 개념에 그 둘을 다 담고 있는 것으로 봤어요.

1.4. 예측적 앎은 무불통지(無不通知)?

이렇게 얻어진 이치를 통해 지난 일들을 추구해보면 오늘의 일로써 지난 만고의 일들을 가히 알 수 있으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추구해보면 다가올 만세의 일들 역시 오늘의 일을 통해 가히 알아낼 수가 있다.

–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p. 53-54.

최우석 책 p.53-54에 나오는 장현광선생의 얘기를 보면(위 인용), 예측적 앎을 알게 되면 무불통지(無不通知)가 되는 것인가, 이런 느낌이 들거든요. 뒤에 나오는 라플라스의 얘기도 그렇죠. 과학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라플라스의 자신만만함을 보고 어떻게 그렇게 오만할 수 있나하고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장현광선생의 말씀을 보면, 이치를 알면 오늘의 일로서 과거도 알 수 있고 미래도 알 수 있다고 하는 담담한 서술같다는 느낌도 들고, 한편으로는 와… 정말 그런 이치가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신비로왔다가 뭐 그런 거 아니야 싶기도 하고, 여러가지 생각들이 듭니다. 여하튼 예측적 앎이라고 하는 것이 이런 구도를 갖게 되면, 이런 이치만 확실히 알 수만 있다면 정말 무불통지가 되는 구도를 가지는 건가요?

장회익 그런데 ⟪우주설⟫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가지로 또 분리를 해요.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있고, 그걸로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이렇게 구분하는데, 나누는 기준은 분명히 잡지는 않았어요. 거기서 중요한 것 하나는 우리가 직접 관찰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는 것에는 적용할 수 없다, 즉 관찰의 대상이 되느냐 안 되느냐, 다시 말하면 앎의 연결 구도가 그 대상까지 닿느냐 안 닿느냐를 중시하고 있어요.

그래도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것도 있다고 봤는데, 그것은 현대 과학에서도 마찬가지에요. 현대 과학에서도 역학적인 예측의 범위와 통계역학적인 예측의 범위는 조금 달라져요. 역학적인 예측이 안 되는 것을 이용해서 확률적으로 예측하는 게 또 있어요. 그것도 예측적 앎에 들어가죠. 그렇다고 해서 그것으로 다 되느냐? 그것으로도 다 구성할 수 없는 더 복잡한 것에 대해서는 얘기할 수 없는 거지. 원천적으로 얘기를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알 수 없는 것들은 많이 있어요.

그런 것들도 다 인정을 하죠. 그런데 앎의 이상을 얘기하자면 이것(알아낸 이치)을 가지고 다 알아내는 시도를 하고, 그런 시도를 함에 따라서 앎의 범위가 점점 넓어진다, 이런 정도로 파악을 하면 되겠어요.

최우석 한계들을 그렇게 설정할 수 있는 거군요.

장회익 그렇지.

2. 앎의 바탕 구도: 장현광으로부터 알게 되는 앎의 틀 속으로 들어가기

2.1. 특성, 상태, 변화의 원리 – 예측적 앎의 3요소?

… 고 하는 것은 ‘예측적 앎’의 보편적 구도에  해당한다. 이를 현대적 용어를 사용해 다시 표현해보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주장에 해당한다.

1. 우리는 우주 내의 존재물들을 관찰함으로써 그것에 적용되는 변화의 원리(이理)를 찾아낼 수 있다.
2. 이렇게 얻어진 변화의 원리를 활용하면 그 존재물의 현재 상태를 확인함으로써 그것의 과거 상태와 미래 상태를 산출해낼 수 있다.

–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p. 67.

최우석 여기서부터는 이제 문헌을 좀 자세히 봐야될 것 같습니다. 위의 인용을 보면 선생님께서는 변화의 원리와 현재 상태를 확인함으로써 과거 상태와 미래 상태를 산출해낼 수 있다고 하는 구도를 여헌선생의 말씀으로부터 찾아내셨고, 그리고 특성과 상태에 대한 말씀을 하셨어요. (아래 인용).

그러나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중요한 개념이 더 요구된다. 그 하나는 어떠한 존재물을 지정했을 때 이를 특징짓는 성격 즉 존재물의 ‘특성’을 나타낼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특성을 지닌 존재물의 ‘상태’를 나타낼 개념이다. 즉 “무엇이 어떠하다” 할 때, ‘무엇’(특성)을 나타낼 개념과 ‘어떠하다’(상태)를 나타낼 개념을 구체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p. 68.

그리고 뒤로 가면(아래 인용) 장현광선생 말씀으로는 ‘형이 없는 형’과 ‘상이 없는 상’이 있는데, ‘형이 없는 형’이 ‘특성’을 말하는 것이고 ‘상이 없는 상’이 ‘상태’를 얘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장현광선생께서 이런 얘기를 다 했다기 보다는 장회익선생님께서 이해한 틀이 장현광선생의 얘기와 잘 맞아들어가고, 그렇게 해석할 여지가 있기 때문에 ‘형이 없는 형’을 ‘특성’으로, ‘상이 없는 상’을 ‘상태’로 해석하셨는데요.

… 여기서 우리가 만일 ‘형이 없는 형’을 대상의 ‘특성’으로, ‘상이 없는 상’을 대상의 ‘상태’로 해석한다면, 필요한 개념 체계를 모두 갖추는 셈이다. 굳이 ‘형이 없는 형과 상이 없는 상’을 언급한 것은 대상의 특성과 상태를 눈에 보이는 표피적 형상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정량적 서술에 적합하도록 개념의 정교화가 필요함을 역설한 것이다.

–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p. 68.

지금 우리가 수학을 안 한 상태에서 얘기하다보니 분명하게 말하기는 힘들지만 특성과 상태, 변화의 원리가 예측적 앎의 3요소인 것 같습니다. 그 3요소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래 그림처럼 써도 될까요? 선생님의 그림을 약간 바꿔본 것입니다.

[그림 1] 심학 제1도 : 앎의 바탕 구도

장회익 정리를 참 잘 했어요. 특히 첫줄은 우석씨가 만든 것 같은데. 그러니까 지금 무엇을 대상으로 하고 있느냐, 대상의 특성을 구분하지 않고는 대상에 대해서 얘기할 수가 없어요. 대상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며, 대상이 무엇인지 분명히 잡혀야 그 대상이 가질 수 있는 여러가지 다른 상태들 중에서 현재는 어떠한 상태에 있다 알 수 있죠. 대상이 앞으로도 여전히 존속이 될 텐데, 그 상태가 어떻게 달라질 수가 있는지 알 수 있어요.

대상은 (시간이 지나도) 같은 대상이지만 대상의 상태는 시간에 따라서 어떻게 변하느냐, 그것을 알고 싶은 거예요. 그것을 얘기해주는 것이 변화의 원리다 이거죠. 그러면 나중의 상태가 알려진다, 그런 거예요. 내가 밑의 부분만(그림 1) 표현했지만, 사실은 위의 부분이 중요한 거예요. 무엇이(대상) 그렇게 되느냐(특성)하는 거죠.

여기서 대상이라고 하는 것은 수없이 많은 다른 것들이 있는데, 이것들 하나하나에 대해서 다 달리 할 수는 없죠. 그래서 그런 대상들의 중요한 공통점을 추상화해서, 그 공통점에 관한 한 그림 1처럼 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보편적인 이론으로 쓸 수가 없어요. 하나하나에 대해서 다 따로 하자면 되기는 되는데 너무 복잡한 거예요.

장회익 그래서 뉴턴이 한 중요한 일은 그 대상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을 골라내고, 상태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을 골라냈다는 거예요. 아까 ‘형이 없는 형’, ‘상이 없는 상’이라고 했는데. ‘형’이 우리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형’이 아니고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특성을 잡아내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형이 없는 형’을 제대로 잡은 거예요. 그리고 상태(‘상이 없는 상’)도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제일 중요한 중심적인 것, 전체를 포괄하면서도 중요한 상태를 찾아내요.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예측하는 거예요.

그래서 몇 가지 개념을 가지고서 하지만, 그 적용 범위는 굉장히 넓어요. 왜냐하면 그런 것들을(특성과 상태) 모든 것이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조금씩 변형시키면 많은 것에 적용이 돼요. 그래야 상당히 보편성 있는, 거의 어디에나 적용이 되는 이론이 만들어지죠. 특성과 상태 개념, 변화의 원리, 이 세 가지가 이론을 만드는 데에 중심적이고 핵심적인 내용이에요.

최우석 이렇게 생각해도 됩니까? 책과 책상과 돌멩이 이런 것들에서 본질적으로 관통하는 어떤 요소들을 찾아내고, 그 요소들 중에 일반적인 내지는 특정한 조건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특성으로 분류하고 변하는 것을 상태로 분류를 해서, 변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한 이치를 찾아내고 그 이치를 특성과 상태라는 언어로 변화의 원리를 구성한다, 이렇게 생각해도 될까요?

장회익 아주 우수한 학생이에요.(웃음) 핵심을 바로 제대로 잡은 거예요. 바로 그거야. 사실 우리가 물리학을 배워보면 그런 말이 없어요. 물리학에도 없고 물리 교육 속에도 없고. 물리의 철학적인 구조를 파악을 해서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법칙 무슨 법칙 해서 현상 하나하나에 대해서 그냥 이 현상은 이렇게 된다고 해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얘기한 것, 바로 그것을 잡아야 되는 거예요. 모든 사례를, 각각 사례에서 어떻게 구현되느냐 그것을 따져서 보면, 그러면 그 틀 속에서 이해를 하게 되는 거지. 그 틀을 분명히 하고, 그 틀 속에서 상태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고, 처음 상태는 어떻고 변화의 원리는 무엇이 되고, 나중 상태는 어떻다(그림 1)하는 것이 나오죠. 이것은 뉴턴이 만들어낸 걸 여기에 대입시킨 거예요. 이렇게 하면 하나의 훌륭한 예측적 앎이 되는 거예요.

2.2. 변화의 원리와 대상의 특성 사이의 관계?

최우석 [그림 2]에서 박스 안의 내용이 뉴턴의 변화의 법칙 즉 고전역학을 선생님께서 심학 제2도로 구성하신 것이고, 바깥 쪽의 내용은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가 조금 더 추가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제가 흥미롭게 본 것은, 대상의 특성을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질량과 힘으로 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대상의 정체성을 질량과 힘이 나타내는 것이라고 본 것이죠. 이만한 질량을 가지고 이만한 힘을 받고 있는 어떤 것이라고 정체성을 규정 했을 때 변화의 원리는 그 특성을 가지고 서술한 것이다, 이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림 2] 심학 제2도 : 고전역학

장회익 그렇죠. 변화의 원리는 보편적인 것이니까 대상의 특성만 알면 그 원리에 특성을 대입할 수 있고 그러면 변화의 원리의 구체적인 모습이 나오게 되지. 그래서 힘이라는 것을 안다고 치고 운동량은 질량과 관계가 있어요. 우리가 원하는 바로 이 대상에 대해서 운동량이 뭔지 알려면 특성을 변화의 원리에 집어넣어야 돼. 아는 힘을 집어넣어야 실제로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변화의 원리가 되는 거죠.

최우석 그러면 어떤 대상에 변화의 원리가 내재하고 있다, 이런 얘기도 할 수 있을까요?

장회익 변화의 원리는 대상에 내재하고 있다기보다는 우주, 자연 전체에 적용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어디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고 우주 현상에 적용이 되는 어떤 거예요. 그런데 그 형태는 이렇게(그림 2) 된다는 거지. 변화의 원리를 이런 형태로 썼지만, 운동량이 뭐고 힘이 뭔지 알아야 이렇게 쓰는 것이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대상의 특성을 집어 넣어야 된다는 거예요.

특성을 알아야 변화의 원리에 적용할 수 있어요. 변화의 원리는 이미 공통적으로 안다고 치고, 특성을 알면 그것을 변화의 원리에 집어넣어서 변화를 예측하는 방법을 쓸 수 있는 거죠.

2.3. 심학1도 – 예측적 앎의 보편적인 틀?

최우석 이제 어느 정도 이해가 됐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구도만 가지고는 충분히 이해를 못 했고, 고전역학에 대입해봤을 때 알았는데요. 특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 특성을 이루고 있는 본질적인 요소는 있으되 개별 사물들의 특성은 그 본질적 요소를 정량화하거나 측정을 해서 알아내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특성은 그냥 저절로 주어져 있다기보다는 다 알아내서 그것을 가지고 진짜 보편적인 변화의 원리에 넣으면 개개의 상태(변화)들을 알 수 있다, 이런 구도인 것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장회익 그렇죠. 그렇게 보면 돼요.

최우석 이런 완성된 형태의 구도가, 주역 점이라든가 예측 행위를 하는 다른 유사 지식들에는 없었던 거죠?

장회익 없지. 주역으로 치자면, 점괘가 이렇게(처음 상태) 나왔다고 할 때 그 점괘를 해석하면(변화의 원리) 이렇게(나중 상태) 된다고 하는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 방법(변화의 원리)를 써요. 그렇게 쓰는데, 그 변화의 원리가 신빙성이  분명치 않아.

최우석 변화의 원리도 왜 그래야되는지 모르고, 대상의 특성과 변화의 원리 사이에 관계도 없는 것 아닙니까?

장회익 그건 나름대로 연결을 하지. 대상의 특성에 대해서 점을 치거든. 점괘가 이렇게 나오면(처음 상태), 아 이건 앞으로 이렇게 된다는 뜻이다해서 저렇게(나중 상태)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구도를 지키기는 해. 그런데 변화의 원리에 신빙성이 없기 때문에 이 구도를 믿을 수가 없는 거야. 이런 구도가 없으면 점을 얘기할 수가 없어요. 이 틀거리 자체는 벗어날 수가 없어요.

여기에 대해서는 내 책 ⟪삶과 온생명⟫(1998, 2014)에 “주역과 양자역학의 비교 검토”이라는 논문에 있어요. 양자역학도 바로 이 틀을 가지고 있는데 주역도 이 틀을 가지고 있다, 그 틀을 비교해보자 한 것이 그 논문의 내용이에요. 근본적으로 이러한 틀을 벗어나서는 예측적인 말을 할 수는 없는데, 주역은 어딘가 이런 틀에 해당하는 것을 나름대로 집어넣어서 뭔가를 만드는 거예요.

3. 앎의 바탕 관념: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념에 대하여

3.1. “왜 안 떨어지나” vs “왜 떨어지나” 질문의 근원?

또 한 가지 여기서 지적할 흥미로운 점은 여헌을 비롯해 그 이전의 많은 사람들이 “이 무거운 대지가 허공에 떠 있는데, 왜 떨어지지 않는가?”하는 물음이 진지하게 던졌다는 사실이다.
… 이는 서로 대등한 앞뒤 방향과 좌우 방향이 2차원을 이루며, 상하 방향은 이들과 대등하지 않으므로 별도의 1차원을 이룬다고 보는 입장에 해당한다.

–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p. 69-70.

최우석 1장과 2장에서 굉장히 중요한 내용 중의 하나는 앎의 바탕구도를 선생님께서 여헌 선생의 논지로부터 끌어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게 다가 아니고 또 한 가지가 더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던지는 질문들이 근거하고 있는, 알지 못하던 바탕의 어떤 관념들이라는 것인데요. 그 바탕 관념들에 따라서 여헌은 왜 대지는 떨어지지 않는가라고 물었고, 반대로 뉴턴은 실제로 자기가 그렇게 했는지는 몰라도 사과는 왜 떨어지는가라고 질문했습니다.

어떤 대상에 대해서 누구는 왜 떨어지는가를 묻고 누구는 왜 안 떨어지는가를 묻는가하는 것은, 그냥 문화적인 차이를 넘어서는 본질적인 앎의 어떤 틀거리가 그 밑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틀거리가 앎의 기본 구도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중요하게 지적을 하셨습니다.

3.2. ‘바탕 관념’은 과학과 메타과학의 ‘서술공간’?

최우석 바탕 관념에 대해서 조금 더 어렵게 여쭤보고 싶습니다. 선생님 저서 중에 ⟪과학과 메타과학⟫을 보면, ‘의미 기반’이라는 것과 ‘서술 공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주요한 동역학 이론들에 대해서 논의를 펼쳐가는데, 그 중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난 부분 말고 저간에 어떤 의미들을 부여해주는 지적인 틀이 있고 그것을 ‘의미 기반’이라고 하면, 그 중에서 몇 가지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서술 공간’이다, 이런 말씀이 하셨습니다. 여기 이것이(그림3에서 맨 아래 바탕 관념) 바로 그 ‘서술 공간’인가요?

[그림 3] 앎의 바탕 구도와 바탕 관념

장회익 그렇지, 바로 그거지. 우리는 사물을 볼 때 시간, 공간의 개념을 바탕과 연결해서 사물을 봐요. 시간, 공간 개념이란 게 참 재미있는 것이, 그 개념을 우리가 학습받은 게 아니야. 우리가 태어날 때는 시간, 공간 개념이 없다고 봐야 옳겠죠. 아무 그런 의식적인 지식이 없으니까. 그런데 스무 살쯤 되면 시간이 뭐고 공간이 뭔지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아무것도 배우지 않아도 학교에 가본 적이 없어도 누구나 시간이 뭔지 공간이 뭔지 다 알아요. 어떻게 알았어? 결국은 성장해오는 과정에서 모든 경험을 하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서 뭘 움직이다보면, 이게 여기 있는 것과 저기 있는 것이 다르다, 뭐가 다르냐, 둘의 공간의 위치가 다르다하는 생각을 하기 위해서 공간이라는 개념을 바탕에 깔게 돼요. 공간이라는 개념이 머리 속에 얻어지는 거지. 또 조금 전의 것과 조금 후의 것이 차이가 있죠. 그러면 이것은 시간의 차이다, 시간은 순간순간 쭉 지나간다, 이것도 같이 생각해야 어제라는 것이 이해가 되고, 오늘과 내일이 이해가 되는 거예요.

이러한 시간이라고 하는 틀, 공간이라고 하는 틀은 누구한테 배운 것도 아닌데, 자신의 어떤 지적인 바탕에다가 스스로 만들어가지고 그것을 통해서 사물을 보는 거야. 이것이 아주 놀라운 건데, 그건 자기가 만든 거예요. 성장하는 동안에 자기가 그 의식을 만들었어. 이것을 나는 ‘자득적 개념’이라는 말로 만들어서 부르고 있는데, 자기도 모르게 이미 그것을 가지고 사물을 본다는 뜻이에요.

물론 사물을 보는 동안에 그 개념이 수정될 수도 있어. 말하자면 이 바탕틀이 잘못됐구나하고 느끼는 경우가 있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죠. 그런 개념은 무의식 속에서 다 만들어져요. 그래서 시간과 공간은 벌써 아마 초등학교 중반 정도 되면 다 안다고 봐야할 거예요. 말하면 다 알아들을 거예요.

그런데 그 시간, 공간 개념이 사람마다 다 똑같으냐? 사람마다 다르냐? 혹은 시대마다 다르냐? 여기에 대해서는 분명한 얘기를 잘 못 했어요. 관점에 따라서 달라요. 예를 들어서 뉴턴은 다 같다, 또는 유명한 칸트는 이것(시공간 관념)은 이성 속에 이미 박혀있기 때문에 다를 수가 없다고 봤어요. 그래서 공간에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성립한다든다 이런 것은 우리가 경험을 해서 찾은 게 아니고 이성 속에서 나왔다. 이렇게 본 거죠. 시간은 따로 독립적으로 있다고 봤어요.

이렇게 해서 상당히 정교한 공간 개념을 가지고 3차원 공간 개념을 만들었어요. 공간이 3차원이다는 말은 세 수직된 방향으로 변화가 가능하면 3차원이에요. 시간은 공간과 완전히 별도로 과거에서부터 미래로 쭉 가는 하나의 직선상으로 연결할 수 있는 1차원이라고 보았다. 이것이 우리가 현재 보통 가지고 있는 개념이에요.

그런데 처음부터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니라는 거지. 지금으로부터 몇 백 년 전으로 가면 공간을 3차원으로 보지를 않았어요. 공간은 2차원과 그 2차원에 독립된 1차원(수직 방향)으로 봤죠. 평면 상은 대등해요. 앞뒤와 좌우 방향이 다를 게 없어. 두 개의 수직선을 기준으로 (평면상의) 위치를 다 얘기할 수 있어요.

그런데 (수직 방향의) 공간은 우리가 팔을 움직이는 걸 보니까 여기에도 뭔가 공간이 있기는 있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공간이야. 왜냐? 공간에 물건을 놓으면 떨어져. 다른 성격을 가지는 공간이 하나 있는 거예요. 즉 2차원으로는 대등한 두 개의 차원이 있고 수직 방향으로는 독립된 또 하나의 차원이 있다고 본 거죠.

마치 시간이 별도의 다른 차원을 가지는 것처럼, 수직은 공간이라는 공통점도 있지만 다른 점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2+1’차원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수직 방향은 물건을 떨어지게 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수직 방향으로는 떨어져야 정상이야. 무거운 것이 공간에 붕 떠서 안 떨어진다면, 그게 왜 안 떨어지는지 설명을 해야되는 거예요.

그런데 대지, 우리가 살고 있는 땅덩어리를 보니까 밑바닥이 비었어요. 서쪽으로 해가 내려가서 밤새 동안 그 밑을 통과해서 아침에는 동쪽으로 올라오는 거야. 비어있는 게 틀림없어. 지구가 얼마나 크고 무거운데 이게 허공에 떠 있다 이거야! 이게 왜 안 떨어져? 이게 문제야. 왜냐하면 ‘2+1’차원에서는 무거운 것은 떨어져야되는 건데, 가벼운 것은 날아갈 수도 있지만, 이 가장 무거운 대지가 안 떨어진다, 아주 중요한 예외가 생긴 거죠. 이 문제를 풀어야돼요. 이것이 ⟪우주설⟫에 문제로 등장하고, 여헌선생은 풀려고 애를 쓴 거예요.

그런데 반대로 3차원이라고 보면, 3차원은 근본적으로 평면의 2차원과 수직 1차원 셋이 다 같은 성격이라고 봐요. 그러면 평면으로는 안 떨어지는데 수직으로는 떨어진다 이거야. 그러니까 이번에는 떨어지는 것을 설명해야 돼요. 수직 방향도 평면과 성질이 같은데 수직 방향으로만 예외적으로 떨어지니까, 이게 왜 떨어지느냐? 이것이 뉴턴의 질문이야. 사과를 예로 제시했지만. 사과가 왜 떨어지느냐?

두 사람의 질문이 다른 거예요. 여헌 은 대지가 왜 안 떨어지느냐? 뉴턴은 사과가 왜 떨어지느냐? 서로 다른 질문이 나온 배경은 서로 다른 공간 개념의 차이 때문이다 이거죠. 바탕 관념의 차이. 한쪽은 떨어지는 것을 정상으로 보니까 안 떨어지는 것을 이상하다고 보고 그것을 설명을 해야 되고, 3차원으로 보게 되면 안 떨어지는 것이 정상인데 떨어지는 게 있으면 그 떨어지는 것이 설명돼야 돼요.

그래서 3차원으로 보면 떨어지는 것을 설명해야 하니 아, 지구가 당기는 힘을 받았기때문에 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돼요. 여헌의 입장에서 보면 힘이고 뭐고 수직 방향의 공간적 성질(떨어지는 성질)때문에 무조건 떨어져야 되는 거예요. 안 떨어지는 것은 설명이 되고.

그래서 같은 것을 보더라도 우리가 바탕 관념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질문이 정반대로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실은 3차원으로 보는 것이 좀 더 합당하고, 그래서 그 이유를 설명 해낸 것이 고전역학의 놀라운 성과죠. 중력이라는 힘을 변화의 원리(그림 2)에 집어넣어서 운동을 다 설명하는 것, 말하자면 상태 변화의 법칙을 가지고 변화를 설명하는 것이 고전역학인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힘이 지구가 당기는 중력이에요.

만약에 ‘2+1’차원이라고 한다면 중력이라는 것이 필요가 없어요. 중력이 있든없든 공간이 그렇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아까 얘기한 것처럼 안 떨어지는 게 나오면 문제인 거예요. 안 떨어지는 게 없었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고, 다 이해가 되는 거죠. 수직 방향으로 다 떨어지고 있고 모든 것이 다 이해가 됐는데, 대지가 안 떨어지는 데서 문제가 생겨서 걸린 거예요.

3.3. 차원 개념?

최우석 보통 사람들에게는 차원 개념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제가 이런 식으로 그려봤는데(그림 4) 말이 되는지 한번 봐주시겠어요?

[그림 4]에서, 우리가 보통 3차원 그래프를 그릴 때 쓰는 것이 오른쪽 그림입니다. 제가 생각해볼 때 몇 차원이라고 할 때는, 각각의 방향의 스케일을 나타내는 선분들이 붙어서 서로 연관을 맺고, (그림 4의 오른쪽 그림의 경우에는 성분이 x, y, z로 3개인데) 이 3개의 성분이 만드는 공간 안에 점을 찍어서 대상의 어떤 상태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이 축들에 어떤 변화가 생기면 x축에 대해서 숫자가 변할 때 y축과 z축의 숫자가 같이 연동된다, 이런 의미로 생각을 하면 될까요?

[그림 4] 차원 개념

장회익 그렇게 하면 되죠. 잘 이해했어요.

최우석 그렇다면 여헌의 2차원 공간과 위아래 공간은 서로 붙어있을 수가 없고 떨어져야 되고, 시간 역시도 공간과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별도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논할 때는 같이 논해야 되기 때문에 한 바닥에는 그리되, x-y 차원의 변화가 z 차원에 영향을 안 주고, z 차원의 변화가 x-y 차원에 영향을 안 주지만 x-y 차원 자체가 위아래로 왔다갔다 한다든가 시간축으로 왔다갔다 한다든가, 이것은 논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장회익 [그림 4]의 왼쪽에서 좌표축이 수직 방향 z축 위아래로 왔다갔다 할 수는 있고, x-y축과 z축은 수직이고 기울어질 수는 없어요. 그래서 2+1차원이에요. 반면 오른쪽 그림에서는 (x, y, z는 각각 수직이지만) 축 자체가 기울어질 수 있어요. 그게 3차원이에요. 세 방향이 대등하니까(x-y-z축이 각각 서로 90도를 유지하면서 축 전체가 360도로 회전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3차원으로 좌표 변환을 할 수 있어요. 왼쪽 그림에서는 x와 y만 대등하고 z는 다르기때문에 기울어질 수는 없어요(z축은 아래쪽으로 향하는 특별한 방향으로 고정되어 있다).

그래서 차원이 높아져서 네 방향으로 다 바꿀 수 있으면 4차원, 세 축에 대해서 바꿀 수 있으면 3차원이에요. 3차원은 세 축에 대해서 바꿔도 아무런 차이도 없고 구분도 안 돼요. 자연법칙이 세 방향 중 어느 방향으로 해도 대등하게 적용되면 3차원이에요.

2차원은 평면에서만 대등하고, x-y 축이 기울어졌을 때(z축과 수직이 아닐 때) 대등하지 않고 달라져요. 중력이 공간의 중요한 성질로 남아있다면 x-y축과 z축이 수직일 때와 기울어졌을 때 다른 거야. 위의 오른쪽 그림에서 3차원에서는 축이 기울어져도 대등한 거야. z축으로는 미끄러지지 않느냐할 수 있는데, 그건 중력을 생각했으니까 그런 것이고  중력을 빼고 생각하면 똑같죠.

그래서 차원 개념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3차원까지는 우리가 비교적 쉽게 갈 수가 있는데, 4차원으로 가는 것이 중요한 도약이에요. 그게 상대성이론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걸 우리가 이해한다는 것은 지적인 도약이죠. 시간 축까지 합쳐서 4차원이 된다는 것은, 실제로 되는 것이지만 그것을 우리가 이해한다는 것은 굉장히 흥미로운 문제에요. 20세기에 와서 아인슈타인을 통해서 최초로 이해가 된 것이죠.

4. 어떻게 공부하면 좋은가?

최우석 이 책을 어떻게 공부를 하면 좋을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장회익 이 책을 재미있게 읽어라, 어렵다고 너무 심각하게 씨름하지 말고 재미있게 익혔으면 좋겠어요.

5. 자연철학 공부의 의의 – 세상이 어지러울 때 자연철학은 공부해서 뭐하나?

황승미 책 뒤쪽에 가면 앎에 대해서, 인간으로서 우주의 한 존재로서의 의미에 대해서 많이 설명을 해주시기는 하는데 미리 질문을 가져왔습니다. 기후위기, 환경위기에 심지어 지금은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으로 난리가 났는데 공부해서 뭐하나 이런 생각을 저도 그렇고 많이 할 것 같아요.(웃음) 보통 우리는 직접적인 지식이나 도움을 원하기 때문에, 물리학도 모자라서 자연철학을 공부해서 무슨 도움이 될지 선생님께서는 잘 설명해주실 것 같아서 여쭈어 보았습니다.

장회익 그 얘기를 하기 위해서는, 자기 삶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달라는 말을 먼저 하고 싶어요. 내가 여기서 살아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냐? 알고 보면 우주 138억 년의 긴 역사를 통해서 정말 놀라운 기적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나’라는 존재가 지금 현재 여기 와서 앉아 있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내 삶이라는 것이 주어져 있어. 물론 코로나때문에 얼마나 일찍 죽을지는 몰라도 어쨌든간에 상당 기간을 내가 살게 되어 있는데, 이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하고, 그 삶을 내가 얼마나 의미 있게 채우느냐,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는 거예요.

살아있는 한 그 일이 남아 있는데, 그 의미를 어떻게 채울 것이냐? 정말 이 우주가 무엇이며, 나가 무엇이며, 그러니까 산다는 게 무엇이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해야죠. 그래서 내가 찾은 답을 가지고 내가 살아야 내 삶을 내가 사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나한테 주어진 것에 따라서 로봇처럼 움직일 뿐이에요. 자기 삶을 소중하게 여기면 자기 삶을 위해서 제일 필요한 앎이 이런 앎(온전한 앎?)이다 이거죠. 그래서 내 삶이 무엇인지를 결정해주는 판단 근거가 바로 이런 앎인데, 그걸 제외하면 헛 살 수가 있다는 얘기죠.

그런 의미에서 내가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앎을 찾고, 그걸 통해서 나를 파악하고 그걸 통해서 내가 사는 그 길을 살피자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지금처럼 좋은 기회가 없어요. 왜냐? 밖에 나다니기도 어려워.(웃음) 그냥 앉아서 열심히 공부하면 돼요.

‘장회익의 자연철학이야기 2-2’ 끝.

대담 : 장회익, 최우석, 황승미
영상 편집 : 최우석
녹취, 그림, 편집 : 황승미
전체 제작 : 녹색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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