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회익의 자연철학이야기 1-2. 책의 주제와 형식에 대해서


이 자료는 녹색아카데미 유튜브 ‘자연철학이야기’에서 나눈 대담 1-2을 정리한 것입니다. 자연철학세미나 2기 진도에 맞추어 진행할 예정입니다. 이전에 만들었던 대담 녹취록(링크 참조)은 내용 정리가 목적이기도 했고 급하게 작업하느라 읽기에 불편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대담의 특성도 더 살리고 삽화도 적절히 넣어서 이해와 재미를 높이려고 합니다. 공부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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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회익의 자연철학이야기 1-2. 책의 주제와 형식에 대해서

목차

  1. 책의 주제에 대한 이야기
    • 1.1. “철학을 잊은 과학에게, 과학을 잊은 철학에게”?
    • 1.2. 학문이란 무엇인가? 학문의 본디 정신?
    • 1.3. 자연철학이란 무엇인가?
    • 1.4. 자연철학과 메타과학?
    • 1.5. 자연철학과 과학철학?
  2. 책의 형식에 대한 이야기
    • 2.1. 수학적 이해는 자연철학의 본령?
    • 2.2. 동아시아 학문 전통과 장회익의 자연철학?

1. 책의 주제에 대한 이야기

1.1. “철학을 잊은 과학에게, 과학을 잊은 철학에게”?

최우석 앞 시간에 꽤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이어서 이제 이 두툼한 책, 두께에 비하면 각 장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너무 간단하게 다루신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책이라고 저는 생각하는데요. 책에 대한 말씀을 두루 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은 몇 가지 질문을 뽑아서, 가벼운 것에서부터 진지한 쪽으로 넘어가는 순서로 잡아봤습니다. 여쭤보다 보면 순서없이 얘기를 나누게 될 것 같습니다. 첫 번째로 운을 띄우는 의미에서, 책 제목은 너무 중요하니까 조금 뒤로 미루고, 부제에 대해서 질문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부제를 “철학을 잊은 과학에게, 과학을 잊은 철학에게”로 지으셨어요.

앞에서 해주신 말씀들을 요약해보면, 철학이라고 하는 큰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많은 탐구들이 나왔고, 그 중에 물리학이 굉장히 중요한 성공사례 혹은 가장 심오한 뭔가를 이뤄낸 기념비적인 분야가 되었는데, 그 분야가 나온 후에 또 새로운 새끼들을 치게 되고, 그러면서 그 안에 서로서로를 나누는 벽이 생기고, 원래부터 서로 관계가 없었다고 생각할만큼 거리가 멀어지는 여러가지 일들이 생겼다, 하지만 그것을 다른 의미와 다른 차원에서 다시 발전시키는 새로운 방향을 찾아야 된다,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나 여기서는 그런 것들이 모든 분야에서 일어났는데, 특별히 ‘철학을 잊은 과학에게, 과학을 잊은 철학에게’, 이렇게 과학과 철학 둘 간의 관계 혹은 대비를 가장 크게 염두에 두신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왜 이러한 것이 문제인지,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신 이유를 여쭤보고 싶습니다.

장회익 조금 전에 대충 얘기한 내용인데 다시 한번 정리를 하면, 철학자들이 물음을 묻죠.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이 얻어지는데, 의미있는 대답을 못 얻을 수도 있고 얻을 수도 있어요. 의미있는 대답을 얻으면 그것은 말하자면 보존이 될 것이고 또 그 위에 더 쌓여나갈 거예요. 그런데 같은 질문을 계속 반복하는데도 아직 손에 잡히는 않는 그런 부분도 있을 수 있고. 같은 물음에 대해서 크게 그 두 가지, 철학과 과학으로 갈라졌다고 볼 수 있죠.

그 갈라진 것에서 성공 사례는 하루이틀만에 없어지는 게 아니야. 그 다음에 그 위에 또 더 쌓이고 쌓여서 더 올라가는 이런 구체적인 성과들이 있는데, 이것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분가해 나온 거예요. 철학에서는 그 껍데기 물음만 가지고 항상 반복하면서 여러가지 답이 나오는데, 그 나온 답을 가지고 또 비슷한 걸 가지고 계속 씨름하고 있어요.

말하자면 알맹이는 빠져나가고 껍데기만 쥐고 있다고 표현하면 좀 지나치지만, 그것이 바로 ‘과학을 잊은 철학’이죠. 진정한 자기 물음에 대한 답과 성과는 빠져나가고 물음만 계속 안고 있는, 그러니까 자기가 만들어낸 건데 알맹이는 잃어버린 상황이 현재 우리가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의 상황과 가깝다. 그러니까 알맹이를 찾아라, 내가 만든, 철학 자신이 만든 알맹이를 찾아라, 그래서 정말 내가 만든 것 중에 중요한 내용이 뭔지를 다시 되살려서 내(철학)가 가지자. 이것이 ‘과학을 잊은 철학’의 현재 처지이고 해야할 일이에요.

반면 ‘철학을 잊은 과학’은 알맹이만 달랑 나와서는 그게 전부인 줄 아는 거야. 처음에 어떤 물음에서부터 나왔고 그리고 왜 그걸 했는지는 잊어버리고 알맹이만 가지고 주무르고 있고, 심지어는 그 알맹이의 용도도 지금은 부분 부분 잘라서 쓰고 있는 것이 현재 과학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너(과학)는 본래 그게 아니고 원래 여기(철학)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본래 집은 여기 철학이다, 그래서 철학에다가 다시 넣어서 그 본래 물음과 철학에서부터 얻게 되는 중요한 내용을 통합하자, 본래 철학은 분산하자는 것이 아니라 통합해서 연결하는 것이다, 다시 철학이라고 하는 바탕을 되찾자,하는 것이 ‘철학을 잊은 과학에게’의 의미에요.

그래서 철학과 과학 양쪽에 다 물음을 던지는 거죠. 그러니까 현재 철학하는 사람들에게는 과학이라고 하는 알맹이를 이 책을 통해서 다시 다시 잡아보게 하고, 과학하는 사람들은 정말 내가 어디서 왔는지 바탕이 뭔지를 연결해서 보는 게 좋겠다 해서, 이 책 이름을 ‘자연철학’으로 해서 연결을 해본 거다, 그런 의미로 보면 돼요.

최우석 그러면 과학과 철학, 양쪽에서 다 이 책을 보기를 희망하시는 건가요? (웃음)

장회익 희망은 하는데, 양쪽에서 다 안 볼 가능성이 있죠. (웃음)

1.2. 학문이란 무엇인가? 학문의 본디 정신?

최우석 어떻게 보면 같은 질문의 반복일 수 있는데, 점층법이라고 생각해주시고 비슷한 질문에 대해서 더 멋진 답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우선 책 안에 있는 구체적인 대목들을 들어가면서 여쭤보고 싶은데요. 책 머리에서 눈에 띄는 부분을 먼저 보겠습니다.

“철학의 한 중요한 부분이 전문 학문 영역으로 분화되면서 본래 철학이 간직했던 학문 정신 또한 상당 부분 왜곡되고 있다. … 그간 철학으로 대변 되던 진정한 ‘학문’이 사라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P.5.

여기서 ‘진정한 학문’이 사라지고 있다, 내지는 본래 철학이 간직했던 학문 정신 또한 상당 부분 왜곡되고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본래 학문이 가지고 있던 정신, 이런 것에 대한 상이 분명히 있으실 것 같습니다. 사실 굉장히 어려운 질문인데, 어쩔 수 없이 여쭤보겠습니다. 학문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웃음)

장회익 우리는 ‘알겠다’, ‘이해하겠다’고 하는 원초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어요. 그렇게 해서 얻은 답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 이게 학문이죠.

최우석 너무 소박하게 말씀하시는 것 아닌가요? (웃음)

장회익 뭐 어려울 게 없죠. 그렇게 해서 이뤄진 것이 있어요, 그 이루어진 것을 다듬은 것이 학문인데. 원초적인 본래 학문의 정신은 바로 그것을 ‘내가 이해하겠다’하는 거죠. 앞서 말했듯이 ‘심층적인 그리고 통합적인 이해를 하겠다’,하는 것이 기본적인 철학의 정신이고 지금도 그 학문 정신을 가지고 와야 되는 거죠.

동양에서는 그냥 ‘학’이라고 했어, ‘학문’의 ‘문’도 나중에 붙였고, 그냥 ‘학’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야, 하나야. 그런데 지금은 100개의 갈래가 있고 100가지 학문이 있지만 본래 ‘학’이었어요. 한 덩어리로 본 거죠. 갈라지기 이전에 ‘전체’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그러한 추구, 그리고 추구한 이해에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담아야하는데, 그 의미가 무엇이냐하는 것을 찾아가려고 하는 자세, 이것을 갖춘 것이 본래 학문의 정신이다.

그래서 구체적인 것이 얻어지고, 그리고 그것을 어떤 구체적인 목적에 활용하기 보다는 내 삶의 지침, 내가 어떻게 살아야되느냐 하는 삶의 방향을 내가 찾는 데에 본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이런 내용이 학문이라고 보는 거죠. 그런데 현대 학문은 그 정신을 상당 부분 잃었다 이거지.

최우석 그게 연결이 안되는 분야가 대부분 아닌가요?

장회익 그렇죠. 그 중의 한 부분만 떼어 놓고 보면 서로 너무 멀어서 원래 거기서 왔는지 아닌지도 모를 정도가 돼있죠. 그러니까 말하자면 부분적인 전문가들이 되어 있고, 원래 학문이 가지고 있던 총체적인 것 그 정신부터 잊어버리고 있는데, 그것은 온당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학문의 본래 정신)을 되살릴 수 있어야겠다하는 생각이죠.

그런데 요즘 실용적인 걸 많이 따지죠. 학문을 실용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앞으로 우리가 어떤 문명을 만들고 어떤 방향으로 문명을 끌어가야되느냐 하는 판단을 무엇을 가지고 하겠냐 이거야. 100명의 전문가들을 여기다 모아 놓으면 그 사람들 아마 100가지 얘기를 하고 있을 거예요. 아무도 그 전체의 모습은 못 보면서 얘기만 하는 거죠.

그걸 통합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어야 돼요. 그러한 것(통합적으로 보는 눈)을 가지는 학문적 자질이 필요하고, 이상적으로는 적어도 대학 이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그러한 학문적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 거야. 그런데 지금은 별로 그렇게 되지 않죠. 결코 쉽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어려울 수 밖에 없어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 많은 것을 통합하는 데 가장 중요한 줄거리를 연결하고 뿌리를 찾아야 돼. 그런데 이 학문이 몇 천 년, 짧게는 몇 백 년 동안 발달해오면서 엄청나게 심오해졌는데, 이것을 한 사람이 몇 개월 또는 몇 년 만에 파악할 수 있느냐. 어려움이 있죠. 그렇지만 그것을 못하면 항상 깨진 것(분리된 것) 밖에 가지지 못해요. 그래서 계속해서 (통합을) 추구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된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불가능한 게 아니냐하는 생각을 먼저 하고 미리 포기를 해버린 것이 지금 현재의 상황이에요.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가 그렇게 만들어. 너희는 통합하는 일은 못하니까 너는 이거 하고 너는 저거 해라. 물론 그걸 다 모으는 것을 또 하나의 전문 분야로 생각할 수도 있죠. 다 모으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그런 사람도 필요한데 그런 분야는 지금 없는 거야, 그게 필요하죠.

그래서 그걸 다 모으되 표피적이고 지엽적인 것을 쌓는 게 아니고 줄거리 전체를 연결해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학문의 기본 정신이라고 보고 그리로 돌아가자. 옛날에 학문을 출발한 사람들은 다 그것(전체를 연결)을 생각하면서 했는데, 그 학문이 성과를 거두다보니까 학문 자체를 깨버리는 거야. 이게 참 비극이죠. 학문을 키워놨더니 아무도 못한다고 해서 (학문 자체를) 깨고 전부 한 조각씩만 가지고 있는 이런 상황인데, 이것은 바른 상황이 아니다. 적어도 일부 사람들이라도 기본 학문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거죠.

최우석 어려워서, 제 나름대로 다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소박하게 볼 때 학문, 학이라는 것은 알고자 하는 욕망에 따라서 알게 된 것을 잘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러 사람들의 노력을 통해서 알아낸 것들을 넓고 깊게 연구를 하다보니까 그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것 자체가 이제는 큰 일이 되어 있다. 현재로서는 워낙 많은 분야로 깊이 들어가있기 때문에 다 섭렵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과거 ‘학’의 전통은 우리 인류가 공통적으로 얻은 것들의 골간이 되는 혹은 중요한 것들을 내가 다 이해하고 말리라고 하는 야망 혹은 야심을 가지고 ‘학’을 했다면, 지금은 워낙 방대해져서 ‘그걸 누가해,’ ‘아무도 할 수 없어’라고 하면서 그건 내 일이 아니다, 나는 이 부분을 할테니 너는 저 부분을 해라, 각기 자기 분야를 열심히 하다보면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거야라고 하는 막연한 기대만 가지고 각자 자기 일들을 하고 있다.

그 와중에 아무도 우리 모두가 노력을 해서 얻어낸 전체의 모습, 코끼리의 모습 이런 것들은 아무도 접근하려고 하지도 않고 욕심도 안 내고 자기 일이라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러면서 점점 무관심해지고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 상황이 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다시 여러 부분들을 종합해서 코끼리의 모습을 그려보려고 하는 그런 정신을 어느 분야, 어느 작은 부분을 하는 사람들이건 다 두루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그 중의 일부라도 나서서, 개별 학자들이 하는 것들로부터 전체의 모습을 그려내는 그런 작업, 새로운 전문 분야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다른 작업을 이제 해야 한다. 그럴 의향이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 되고, 그것이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학문의 본디 정신, 학문 그 자체다, 이렇게 정리를 해봐도 될까요?

장회익 아주 요약을 잘 했어요. 보면 이 사람이 아주 모범 학생이야, 정리를 아주 잘 했어요. (웃음) 잘 알아들었어. 바로 그것이 필요하다는 거지. 그래서 다른 모든 걸 떠나서, 이 과목 그리고 이 책을 쓸 때 내가 의도했던 것은 (학문을 다시 하는) 출발이라도 만들어보자하는 했던 거라고 보면 되겠죠.

최우석 같은 예는 아닌데, 저희가 요즘에 녹색아카데미 웹진을 하면서 세계의 기사들을 여러가지 찾아보고 그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요. 그러다보니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요즘 기후과학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한편으로 보면 기후과학이 통합적인 학문의 모습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느낌도 듭니다.

어떤 사람은 하와이에서 이산화탄소 농도를 측정하고, 누구는 어디서 해수 온도를 측정하고, 온 사방에서 여러 사람들이 각자 자기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런데 사실은 그 각각 만으로는 자신의 연구 결과가 무엇의 증거다라고 말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그런 연구들을 다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세계적인 차원에서 각자의 연구들을 한 데 모으고, 태평양 바다의 해수의 상태가 의미하는 것과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의미하는 것, 한편에서는 어떤 생물종이 멸종하는 것 이런 것들이 어떤 공통된 원인이나 결과를 가리키고 있다는 식으로 종합을 해서 지구 전체의 상태를 드러내는 데 활용을 해서 뭔가 결론과 방향과 과제를 내고 있거든요.

그런 차원에서 이것은 협업을 하는 노력인 것도 같고, 또 한편으로는 여러 분야의 연관성을 찾지 않으면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을 다 모아서 종합해내는 그런 결과들을 보면, 요즘은 ‘집합 지성’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멋진 모자이크같다 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됩니다.

황승미 집합지성이라는 것도 결국은 한 사람이 하는 거잖아요. 여러 연구 논문들을 모아서 보니 이런 것들은 이런 패턴을 나타내더라는 연구도 결국은 한 사람 혹은 여러 명으로 구성된 한 팀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생님 말씀대로 또 하나의 새로운 전문가, 새로운 분야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 같지는 않아요.

장회익 그렇죠. 연결해내는 지성이 없으면 갖다놔도 그것에서 어떤 통합적인 비전을 가질 수가 없어요. 연결해내는 지성이 필요한 거죠. 그러니까 물론 하나하나의 분리된 내용, 데이타들이 매우 중요하지만 연결돼야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거에요. 아마 기후 정도에서는 연결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을 수 있지만, (웃음) 그러나 우리 문명 전체를 생각해본다거나 할 때는 통합이 쉽지 않은 거죠.

조금 다른 예를 하나 들면, 군대나 전쟁 얘기가 좋은 예는 아니지만, 군대 조직에서 영어 계급 명칭에 재밌는 게 있어요. 사병 중에서 우리로 치면 상병 쯤 해당되는 계급이 스페셜리스트(specialist; 미 육군 상병에 해당하는 계급)에요. 우리도 군대에 가면 ‘특기’라는 걸 받는다 그러는데, 그 사람이 스페셜리스트, ‘특기’를 받은 사람, 전문가라는 얘기죠. 그런데 장군은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요?

황승미 제너럴?! 오! 그렇구나! 와… (웃음)

장회익 그렇지, 제너럴이야. (웃음) (general; 미 육군의 장성 일반 명칭. 별 1~5개까지 모두 General Officer) 그러니까 전체를 보는 사람은 제너럴이고 전문가는 스페셜리스트야. 둘 다 필요하죠. 군대에서 스페셜리스트는 낮은 계급이고 제너럴은 전부 통괄하는 계급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해서 이기려면 제너럴리스트가 위에 서야 제대로 할 수 있다,하는 거지.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제일 맞는 조직을 짜다보니까, 제너럴을 제일 꼭대기에 놓고 스페셜리스트는 밑에서 작업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스페셜리스트 100명 갖다 놓고 거기서 니가 작전해라, 그러면 결과가 제대로 나오지를 않아, 제너럴이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전쟁은 정말 생사를 걸고 하는 거니까 그런 조직이 필요한데.

우리 문명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문명을 제대로 이끌어나가려면 제너럴에 해당하는 학문, 제너럴에 해당하는 시야가 있어야 하고, 많은 스페셜리스트들이 있어야 되죠. 숫자는 스페셜리스트가 더 많아야지, 그래야 많은 일을 할 수가 있죠. 그렇지만 소수의 사람이라도, 이런 다양한 분야의 일을 모아서 전체를 이끌어가는 그런 모습으로 비유를 해볼 수 있겠죠.

최우석 감동 깊게 와 닿았습니다, 선생님. (웃음)

1.3. 자연철학이란 무엇인가?

최우석 이제 책 제목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아까 ‘자연철학’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셨는데요. 철학을 하는 사람 내지는 ‘학’을 하는 사람이 물리학을 공부한다 혹은 과학을 공부한다고 했을 때 그것에 또 다른 분과 학문의 이름을 붙이기 보다는 ‘자연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겠다,라고 비교적 소박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책 머리에 이렇게도 써주셨어요.

“자연철학은 한마디로 자연에 대한 합리적인 그리고 포괄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학문이라 규정할 수 있다.”

–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P.4.

일단 제가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은, 우리가 분과학문 체계를 논할 때는 상당히 대비적으로 이해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윤리학, 법학, 사회학… 이런 식으로 영역들을 나누어 공부하고 있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어떤 나름대로의 종합적인 분야를 ‘자연철학’이라고 하셨습니다. 철학 그 자체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거든요. 만약에 지금의 스페셜리스트 학문들은 그대로 두고 이것들을 종합하는 제너럴리스트 학문들이 다시 또 다수로 포진할 수 있다고 한다면, 자연철학과 병립할 수 있는 다른 철학들을 또 상상하신 게 있을까요?

장회익 그렇죠. 내가 그냥 ‘철학’이라고 하지는 않고 굳이 ‘자연철학’이라고 했던 데에는, 일단 자연에 대한 통합적인 이해를 먼저 추구한다,하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사실은 역사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자연철학자가 누구냐? 뉴턴이란 말이야. 우리는 뉴턴을 물리학자라고 부르지만, 뉴턴 자신은 스스로 물리학자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철학자, 자연철학자라고 얘기했어요.

뉴턴의 대표적인 고전역학 주저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요. 자연철학이라고 했죠. 여기에는 철학이라고 하는 학문 정신을 살리되, 그 철학에서 자연에 대한 이해를 가장 중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삼겠다, 이런 취지가 담겨있어요.

내가 여기서 ‘자연철학’이라고 하는 것도, 지금은 다들 그냥 자연과학이라고 부르면서 하고 있죠. 그러나 자연과학이라고 하는 의미의 학문 조각이 아니라, 철학이라고 하는 것으로 자연과학 전체를 연결한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를 거냐? 그걸 자연과학이라고 보통 요즘 얘기를 하지만, 그러나 아까 얘기했던 철학적인 정신과는 조금 다른 각도로 이해가 되는 면이 있어요. 철학이면서 자연 전체를 아우르는 그런 의미인 거죠.

그러면 나머지 다른 철학과는 어떻게 연결이 되느냐? 그 연결은 여기서 강조는 하지 않지만 철학인 이상 그건 연결 꼭지를 다 가지고 있다고 보는 거죠. 자연 만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자연만 하는 것은 자연과학의 입장이지만, 자연철학이 되면 그걸 통해서 우리 삶과 어떻게 연결 되느냐, 내 삶과 어떻게 연결 되느냐 까지를 생각하는 그런 틀이다, 그렇게 보면 돼요.

내가 이 책에서도 중간 이후에는 생명, 인간, 의식 문제, 앎이란 게 뭐냐, 이런 것까지 통합을 시도했는데, 그런 내용들을 내가 ‘자연철학’이라는 말 속에 같이 묶었어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과 (자연철학이) 분리되는 게 아니다 이거죠. 자연철학을 바탕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나머지 많은 것들과 연계를 짓지만, 거기서 바탕은 자연에 두고 이해를 해서 올라가는, 모든 걸 다 포괄한다는 의미는 아니고, 바탕에서 위로 연결할 수 있는 꼭지를 남기면서 나아가는 정도의 개념이라고 보면 되겠어요.

최우석 자연철학이 자연이라는 대상 혹은 탐구의 중핵을 자연에 두고 연결을 해나가는 것이라고 하면, 그와는 달리 인간, 사회, 법 이런 식으로 주된 초점 내지는 주된 발판이 자연이 아닌 다른 분야들로 연결망을 뻗쳐나가는 것도 될 수 있을까요?

장회익 있을 수 있죠. 아까 얘기한 것처럼 윤리 철학, 사회 철학 등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물론 그런 것을 또 철학적으로 연결하는 거지만. 그 중의 하나라고 볼 수는 있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자연이 중추적인 바탕을 이루어야 된다는 거예요. 자연이라는 바탕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조차도.

그래서 거기서 바탕이 되는 부분을 제대로 받쳐줘야 연결이 제대로 돼요. 허공에 띄울 수는 없는 거니까. 그래서 다른 여러가지가 있지만 특히 자연철학은 원래 역사적인 출발도 그랬고, 지금도 각 학문의 바탕에서 자연과 연결을 해야 전체가 보이는 그런 구실을 한다, 이 정도로 차별을 둘 수 있겠죠.

1-4. 자연철학과 메타과학?

최우석 뒤의 질문과 연결시켜서 다른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자연과학과 자연철학을 선생님께서는 구분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선생님의 앞서 나온 저서들을 안 읽은 사람들에게는 좀 섭섭한 질문이기는 한데, 제가 읽은 선생님 책 『과학과 메타과학』(현암사, 2012)에서는 ‘과학’과 ‘메타과학’을 구분하셨습니다.

메타과학은 문자 그대로 과학자체를 대상으로 한 과학, 과학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으로 볼 수 있지만, 조금 더 넓게 보면 과학의 성과와 과학의 한계를 반성적으로 고찰하고, 과학 자체의 어떤 구조나 과학 자체의 내부 질서같은 것을 한 차원 위에서 조망한다는 의미도 있고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요. 혹시 그 메타과학에 ‘자연철학’이라는 다른 이름을 지어주신 것은 아닌가요?

장회익 상당부분 중첩이 되죠. 상당히 겹치는 부분이 있는데, 그 정신에 조금 차이가 있어요. 자연철학을 하려면 메타과학적인 이해도 거기에 넣어야 된다는 의미도 되고, 자연철학은 조금 더 폭넓은 개념이에요. 반면에, 이미 과학이라는 것이 만들어졌는데 과학 자체는 어떤 구조와 성격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부분을 중점적으로 조명하고, 그 구조와 성격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이냐를 밝히는 것이 메타과학이에요.

그래서 메타과학과 자연철학이 겹치는 부분은 상당히 많다고는 봐요. 그런데 본래 성격 자체는 똑같은 것은 아니고. 굳이 얘기하자면 자연철학이 좀 더 폭 넓은 내용을 가지고 있고, 그 중에 메타과학은 자연철학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작용한다, 그 정도로 이해하면 될 거예요.

1-5. 자연철학과 과학철학?

최우석 또 과학철학, 물리철학은 말이 비슷해서 대비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여쭤보겠습니다. 꽤 많은 사람들한테 알려져있는 분야로서 ‘과학철학’이라고 하는 분야도 있고요. 잘 알려지지 않은 분야로는 ‘물리학의 철학’ 혹은 ‘물리철학’이 있습니다. 이런 분야는 선생님께서 쓰시는 ‘철학’의 의미보다는 철학의 세부 분과, 철학의 새로운 분과같은 의미가 더 강한 것 같습니다. 그런 과학철학, 물리철학과는 자연철학이 완전히 궤를 달리 하는 분야인지 궁금합니다.

장회익 완전히 궤를 달리 한다고 보기보다는, 과학이 일단 성립하고 또 물리학이라는 것이 성립하고 그런 다음에 이것을 다시 철학적으로 보자, 그 바탕을 철학적으로 해보자 하는 것이 과학철학, 물리철학이에요. 자연철학의 입장에서는 철학이 먼저 있고 그것이 이루어낸 성과를 다 연결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과학철학과 물리철학은 이미 나온 성과 중의 일부를 중심으로 다시 그것을 철학적으로 검토하는 것, 이런 뉘앙스의 차이가 있겠죠.

그리고 내가 이 책에 담고 있는 자연철학과, 과학철학 또는 물리철학을 서로 비교를 해본다면, 과학철학과 물리철학은 그 나름대로 또 전문화가 되어 있어요. 그래서 과학철학이라고 한다면 현재 과학철학에서 다루는 분야가 뭐다 이렇게 있고, 물리철학에서는 이것이 물리철학의 분야라고 해서 꽤 특수화된 어떤 성격을 많이 담고 있어요.

나는 그런 것을 되도록이면 넘어서고 싶은 입장이고,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나는 ‘자연철학’을 했고. 또 한 가지는 자연철학 속에는 물리학의 내용 그 자체를 중점적으로 담고 있는데, 과학철학이나 물리철학에서는 또 물리학의 내용 중에서 일부는 빼버리고 그 분야의 특수한 성격만을 다뤄요.

내가 과학철학자냐 물리철학자냐 묻는다면, 아니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나는 오히려 자연철학자다,라고 얘기하고 싶죠, 내 입장에서 볼 때는. 과학철학, 물리철학과 자연철학 사이에 역시 상당한 중첩은 있지만 기본적인 방향성에서는 좀 차이가 있다, 이렇게 보고 싶어요.

2. 책의 형식에 대한 이야

2-1. 수학적 이해는 자연철학의 본령?

최우석 이 책에 수학이 많이 나옵니다. 초급 수학이 아니라 고급 수학이 많이 나오는데, 수학을 넣으신 이유에서부터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소화를 해야하는지, 저를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궁금해할 것 같습니다. 왜 굳이 수식을 빼지 않으셨는지, 책을 보다보면 굳이 뺄 필요가 있겠나하는 말씀도 하시는데, 그것만인지 아니면 수학이 빠지면 도저히 안되는 골간이 있기 때문인지 여쭤보고 싶고요. 저희들이 다 따라가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어느 정도까지 따라가면 그래도 해볼 만한 거라고 볼 수 있는지, 수학 얘기를 간단히 여쭤보고 싶습니다.

장회익 사실 우리가 수학을 모르는 게 아니야. 중고등학교에서 우리가 수학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냐고. 그렇게 해 놓고 대학 들어가고 나서는 싹 잊어버리고 난 수학 모르는 사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그건 참 낭비고 안타까운 일이거든.

그 수학을 살리자 하는 측면도 있어요. 이렇게 하면 수학이 이렇게 쓰이는구나, 수학을 썼더니 자연이 이렇게 보이는구나 하는 것을 봄으로써, 그동안 고생한 보답을 받는 거지.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수학 지식이 다시 산 지식으로 가는, 그런 취지가 하나 있어요.

더 중요한 것은 역시 자연은 수학을 통하지 않고는 제대로 이해가 안 돼. 그래서 갈릴레오의 말도 인용했지만 자연은 수학으로 써있다, 지금은 갈릴레오 당시의 수학보다 더 깊은 수학으로 자연이 쓰여있어요. 그리고 그 수학의 상당 부분, 거의 절반 이상은 자연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그 수학이 만들어진 거예요. 분리할 수가 없어요. 미적분도 뉴턴이 고전역학을 만들면서 같이 만들었어. 고전역학을 이해하려면 미적분을 써야하는 거다,해서 그렇게 만든 거예요. 그래서 분리시킬 수가 없다.

그런데 독자들은 수학이 몸에 체질화가 안 돼있기 때문에 일종의 거부감을 느끼죠. 수학없이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고 거기에 영합한 책들이 많이 있기는 한데, 그렇게 하면 왜곡될 가능성이 상당히 많아요. 자연을 제대로 보려면 수학을 통해서 봐야 한다.

누가 수학을 안 쓰고 말로만 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얘기해요. 수학을 써도 어려운데 그걸 어떻게 말로 하느냐. (웃음) 말로 하는 것은 수학을 쓰는 것보다 몇 배 더 어려운 거야, 제대로 하려면. 그러니까 자연철학을 이해하려면 수학을 쓰는 것이 제일 쉽게 접근하는 길이다.

최우석 이 책이 제일 쉽게 쓰신 건가요? (웃음)

장회익 어렵다는 것을 내가 부정하는 것은 아니에요. (웃음) 나한테도 어려운 내용도 많이 있었고. 내가 예전에 공부할 때는 특히 더 그랬고. 그래서 이런 수학을 어떻게 넘어갈 수 있느냐에 대한 일종의 지혜가 있어야 돼요. 피하면 안 돼, 일단 읽어. 도저히 기호를 모르겠다하는 사람들은 뒤에 부록에 설명해놨으니까 거기서 기호를 먼저 확인을 하고, 이 내용 자체만으로 무슨 뜻이다하는 것만이라도 판독을 하면서  읽어나가요.

물론 여기서 이게 나오고 저기서 저게 나오고 하는 과정을 일일이 자기가 다 메우려면 힘든 점이 있어요. 내가 자세히 메워주고 싶지만 그러면 너무 내용이 방대해지기 때문에 껑충껑충 뛰어넘은 게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왜 여기서 이게 나와하고 턱턱 막히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때는, 이 사람이 거짓말은 안 했겠지하고 믿고 넘어가도 돼요. (웃음) 그런데 이건 꼭 알아야겠다 하는 부분은, 자기가 고생해서 하면 할 수 있거든. 하려면 할 수 있지만 지금 바쁘니까 뒤로 미루겠다, 이 정도로 생각을 하는 게 좋아.

이거 내가 못 하는 거다, 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접근이 안 돼요. 이거 내가 할 수 있다, 그래서 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한 2장, 3장 정도에서 기본적인 것 몇 가지 해봐요, 아! 수학을 썼더니 이게 이렇게 이해가 되는구나 하는 것 몇 가지만 제대로 이해하고 나면 그 다음에 수학이 나올 때는 아, 그렇지, 그런 식으로 어떻게 되겠지 하고 믿고 나가도 돼요.

그러나 뛰어넘지는 말고. 그렇게 하면 수학적으로 하면 이게 이렇게 된다는데, 이게 수학적으로 이런 의미가 담겨 있구나하고 넘어가도 돼요. 그러나 포기하지 말고, 언젠가는 내가 이걸 하겠다, 일단은 뒤에 부록을 보면서 찾아서 확인해보고. 그거 안 된다고 해서 『수학의 정석』 이만한 책 살 필요는 없어요. (웃음) 그건 전혀 권장하진 않아. 최대한 이 책에서 이해하는 데까지 해보고, 정 안되면 차라리 고등학교 다니는 동생한테 물어보든가. 이렇게 해서 알아도 돼요.

그러니 겁먹지 말고.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할 수 있다는 것. 수학도 지금 당장은 어렵다는 것은 인정해요. 당장 수학까지 다 연결해서 이걸 이해하려면 몇 년 정도 걸려요. 그러니까 내가 그걸 부정하는 게 아니고, 희망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렇지만 이건 수학적으로 이러이러하게 표시되고 이런 것이 이런 결과가 나온다 하는 것 까지만 연결해서 읽으면, 그것만으로도 아주 유익하다는 거죠. 수학을 빼고는 전혀 파악할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 정도의 지혜를 가지고 읽어달라, 그렇게 얘기하고 싶어요. 

최우석 중요한 것은, 자연에 대해서 우리가 축적한 심오한 앎은 수학을 개발해가면서까지 만들어낸 앎이기 때문에 수학을 제외하고는 그 심오한 본체에 접근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니 용기를 잃지 말고, 당장은 아니어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당분간은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보자,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장회익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 책에 다 담겨 있다, 다른 거 볼 것 없이 이 책만 보면 다 된다, 그 책을 내가 가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이 생기죠.

2-2. 동아시아 학문 전통과 장회익의 자연철학?

최우석 마지막으로 이 책에 대해서 한 가지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우선 책의 구성이 상당히 흥미로운데요. 제1장에서 장현광선생을 소개하시면서 책이 시작됩니다. 장현광선생은 한국의 유학자 중의 한 사람이고, 선생님께서 평가하시기로는 우리 풍토에서 근대 학문의 시초가 될 만한 그런 분이라고 소개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시작은 우리 학문에서 했는데, 2장부터는 다시 서구로 넘어가서 서구에서 지금까지 해왔던 유구한 과학, 자연에 대한 앎이 축적된 역사를 쭉 훑고 그리고 거기로부터 많은 것들을 끌어낸 다음에, 맨 마지막에 온전한 앎을 찾는 과정에서 다시 또 동아시아 전통으로 돌아오는 구조를 택하셨습니다.

설득을 위한 책의 구조 말고, 왜 굳이 자연철학을 논하는데 동아시아적인 학문 전통이 거론되어야 하는지, 왜 그것이 출발이자 도착점이 되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우리가 흔히 과학을 얘기할 때는 좀 아쉽기는 하지만 다 서구의 성과였고 굳이 우리가 학문에 국경과 경계를 둘 필요가 있나, 앎이 중요한 것이지, 이러면서 받아들이고 있는데요. 선생님의 접근은 굉장히 독특한 것 같습니다. 그래야 될 만한 필연성이라든가 그런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장회익 우리가 학문을 하고 공부를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물음을 내가 묻는 거예요. 내가 물음을 찾고 내가 뭘 알고 싶다,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내 물음이 아닌 남의 물음을 가지고 답을 찾아주는 게 아니야. 나한테서 물음이 나와야 돼요.

제일 가깝게는 지금 현재 내가 뭘 알고 싶으냐에서 출발하는 게 제일 좋죠. 그런데 각자 개인이 전부 다 물음을 가지기 어려우니까, 그러면 그 중에서 제일 가까운 것은 우리 풍토 안에서 발생한 물음이죠. 그리고 과거로 올라가면 우리 선조들이 물었던 물음에서 출발하는 것이 내 물음에 가장 가까운 출발점이에요.

그래서 ‘그 물음이 무엇인가’에서부터 출발을 해야 거기에 맞는 답을 얻어낼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답은 지난 몇 백 년 역사 안에서 우리 풍토에서 우리가 다 찾아낸 게 아니고, 오히려 거의 대부분은 서구 쪽에서 답을 찾았죠. 하지만 서구의 물음이 아니라, 우리가 내 물음에 대한 답을 거기서(서구의 학문 성과에서) 가져와서 여기다가(내 물음에) 얹어야 되는 거예요. 이런 자세를 가져야 되겠다 이거죠. 개인으로 말하면, 내 물음을 가지고 내가 공부하는 것은 그 앎을 나한테 이해가 되도록, 나한테 납득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공부예요. 다른 데서 정리된 것을 외워서 그대로 내뱉는 게 공부가 아니고.

그래서 서구의 물음과 답을 참고로 해서, 우리의 물음을 가지고 우리의 답을 쌓아나가자는 거죠. 이 책은 서구의 것을 소재로 했지만, 책에 있는중요한 내용은 현재 내가, 개인적으로 말하면 나 자신의 물음에 대해 얻은 답을 이 책에 쓴 거예요. 나는 우리(의 문화, 학문)에 속하니까. 내가 얻은, 그러니까 이 책에 있는 내용은 서구 어느 문화에도 없는 것이 대부분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찾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 물음을 가지고 내가 찾고, 그리고 내가 원하던 결론을 찾은 거예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우리 동아시아 전통 학문 중에서 가장 소중히 여겨야할 것은 통합적인 이해고, 동아시아에서는 그것을 끝까지 시도했어요. 그런데 그 통합적인 이해를 우리 식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이거지. 그래서 통합적인 이해의 대표적인 것이 마지막 10장에 들어가있는 ‘태극도설’이에요. ‘태극도설’에 나오는 내용을 다시 한번 요약을 하고, 그것에 해당하는 지금 현재의 우리의 답을 구성해보자. 이렇게 해서 내 물음에서 출발해서 내가 생각한 것을 나 식으로, 지금 나 개인을 얘기했지만, 우리, 가까이는 우리 한국의 학문 풍토에서 마무리 해야 진정한 우리 학문이 된다, 그런 정신을 반영해본 거예요.

최우석 ‘질문’이라는 말씀을 하시니까 이런 생각도 드는데요. 종합적, 통합적인 앎에서는 중요한 것들을 골라내고 얽는 묘법이 필요할 것이라고 봤는데, 그렇다면 (나의) 질문이 어떤 기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의 질문에 비추어볼 때 이것은 중요하고, 이것은 내 질문에 대한 해답의 중요한 요소가 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배제하고, 그런 식으로 어떤 것을 쌓아간다고 한다면, 자연에 대한 이해와 과학적 성과들이 우리의 질문으로부터 출발해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함께 쭉 얽어서 우리의 답으로 가지고 오는 일이 새로운 어떤 전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장회익 그래서 내가 아까 잠깐 얘기했지만, 지금 우리 과목에서의 공부 방법도 마찬가지에요. 학생들마다 질문이 다 달라, 각자 자기 질문에서 출발해달라, 자기 질문을 이 과목에서 공부한 걸로 채워라, 그리고 자기 결론을 만들어라, 그걸 내가 권하는 거예요. 사람들마다 다 다를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 질문이니까. 그것이 제일 중요한 거예요.

조금 빗나가지만 재밌는 사례를 들면, 작년에 노벨화학상 탄 사람 이름이 John B. Goodenough(1922-)에요. 존, 너는 B만 받아도 충분히 좋다는 뜻이지. (웃음) 이름이 John이고, 성이 Goodenough. 이름이 재밌어서 한번 들으면 잊어버리지를 않아요.

그 사람이 공부한 폭이 또 꽤 재밌어요. 이 사람은 예일대학에서 수학으로 공부를 시작했어. 수학과에서 최우등생으로 졸업을 했어요. 그 다음에는 시카고대학에서 물리학박사를 하고, 그 다음에는 노벨상은 노벨화학상을 받고, 그리고 현재는 텍사스대학 공과대학 교수로 있어. 나이 아흔 여덟에 지금도 공과대학 현직 교수로 있어요. 물론 석좌교수고. 수학에서 출발해서 물리학으로 다지고 그 다음에 화학으로 성과를 거둬서 노벨상을 받고 그리고 지금은 공과대학 교수를 하고 있어요.

그것도 재밌지만, 여기서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 사람이 시카고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을 때 지도교수(Clarence Zener, 1905-1993)가 고체물리학을 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그분한테 가서 지도를 받으러 왔습니다 하니까, 그분이 내가 너한테 두 가지 문제를 준다하면서, 첫째는 문제를 찾아라, 둘째는 그 문제를 풀어라, 그 다음 말은 이제 나가봐. (웃음) 거기서 중요한 것은 문제를 찾으라는 거예요. 박사학위를 받을 때, 보통 의례히 지도교수가 이런 문제를 풀어봐라하고 주는 것으로 대개 기대를 하는데, 문제를 니가 찾으라고 했고, 그래서 결국 노벨상까지 받은 거야, 자기가 문제를 찾았기 때문에.

그것이 중요해요. 문제를 내가 가졌다는 것, 그리고 그 문제를 내가 푼다는 것. 그러면 박사가 되는 거지. 그런 박사가 아니면 쓸모가 없는 박사가 되는 거예요. 그런 박사니까 이 사람이 노벨상까지 받게 됐죠. 뭐 약간 억지가 있기는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배울 점이 있다는 거지. 내 문제! 그러니까 그 정신, 문제를 우리한테서 적어도 내가 찾자, 그리고 내 힘으로 풀자, 나머지는 참고로 하자. 책에 있는 그대로 배우는 게 아니라, 내가 푸는 과정에서 그걸 보고 내가 답을 찾는 자세로 내가 책을 썼고, 그 자세로 이번 학기에 공부를 하자. 그런 취지에요.

‘장회익의 자연철학이야기 1-2’ 끝.

녹취, 편집 : 황승미(녹색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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