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읽는 문명이야기 (10) 식민지와 노예제도, 불평등의 기초가 되다


[그림 1] 바베이도스 ‘부사 봉기’. 1816년. 노예 부사(Bussa) 등이 사용한 깃발이 그려져 있다. 이들은 영국의 지배를 인정했으며, 자신들이 요구하는 것은 자유임을 밝혔다. 그림의 위쪽과 아래쪽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행복은 언제나 노력과 함께 한다. 브리태니아는 그녀의 자손들이 노력하도록 기꺼이 이끌 것이다. 그리고 신은 우리의 노력에 부응하실 것이다.” (출처: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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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1500년까지만 해도 경제적으로 뒤떨어진 지역이었다. 그랬던 유럽이 이후 수 백 년 동안 세계 곳곳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지구 전체의 생태계에는 엄청난 파괴와 자원 고갈, 오염이 남았고 사회경제적으로는 세계적인 불평등의 기초가 형성되었다. 

유럽을 위한 자원과 노동력의 보고가 된 지역들은 아메리카 대륙과 오스트레일리아, 태평양과 아프리카 지역 등이다. 이러한 서유럽 국가들의 부 축적 과정에는 식민지의 재식농업(플랜테이션. 판매를 위해 한 가지 작물을 대규모로 재배하는 방식)과 노예노동이 있었다. 농작물은 설탕의 재료인 사탕수수와 면화, 담배, 인디고, 쌀 등이었다.

노예노동은 서유럽인들이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너가기 이전부터 나타났다. 마데이라는 원래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었다. 1420년 포르투갈 사람들이 건너와 숲에 불을 질러 밭을 만들고 아프리카 사람들을 끌고와 노예로 부리며 설탕농장을 운영했다. 15세기 말까지 포르투갈 사람들이 노예로 쓰기 위해 대서양 식민지로 데려온 아프리카 사람들은 14만 명에 달한다.

1820년이 되면 대규모의 노예무역은 종결되는데, 이때까지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고간 아프리카 사람들의 수는 840만 명이다. 아메리카로 건너간 유럽 이민자들의 수 240만 명의 3.5배이다. 그러나 실제 수는 더 많다. 노예가 된 후에도 계속 죽어갔고, 노예선을 타고 최종목적지까기 가능 동안에도 5분의 1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노예가 된 사람들은 거의 2천 만 명일 것으로 추정된다.

1820년대까지 아메리카 대륙의 인구 구성은 유럽이민자와 흑인노예의 비율이 1:1일 정도로 많았다. 노예제도는 1800년대 중반을 전후해서 폐지된다. 영국의 식민지에서는 1833년에 폐지되었고, 미국은 1863~65년에, 쿠바는 1886년에, 브라질에서는 1888년에 폐지되었다. 노예들은 이미 1500년대부터 노예제 폐지와 자유를 위해 봉기를 일으켰다.

가장 마지막에 일어났던 세 건의 대규모 노예 봉기(the Late rebellions)는 바베이도스(1816), 가이아나(1823), 자메이카(1831)에서 일어났다.

바베이도스 섬은 1532년 포르투갈 식민지였다가 1625년 영국식민지로 넘어가 1966년에야 독립했다. 이곳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은 1640년부터 시작되었는데, 7년이 지나면 섬 전체(면적 439 평방 킬로미터)의 절반이 사탕수수밭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에서 소비하는 설탕의 3분의 2를 생산하게 된다. 당시 바베이도스 인구 5만 명 중 75%가 노예였다.

1816년의 부사(Bussa)의 주도로 일어난 봉기는 바베이도스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다. 당시 영국 의회에서는 노예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는 법안을 검토되고 있었으나 부결되었는데, 노예들은 이를 노예제 폐지 법안으로 이해하고 봉기를 계획한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실패했지만 부사의 봉기는 대서양에서 일어난 가장 큰 세 개 봉기 중 첫 번째였기 때문에 영국인들을 크게 놀라게 했다.

[그림 2] 가이아나 ‘데메라라 봉기’. 1823년. 노예들은 유럽 군대의 철수, 모든 유럽의 물자들도 철수하기를 요구했다. (출처: wikipedia)


남아메리카의 가이아나에서 1823년 일어난 데메라라 봉기(Demerara rebellion)에는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했으며 이틀 동안 지속됐다. 이 봉기는 비교적 신분이 높은 노예들에 의해 계획되었으며, 이들은 처우에 대한 불만과 자유를 원했다. 또한 이때도 노예제 폐지 법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통치자가 이를 거부했다는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노예들의 대규모 평화 시위는 잔혹하게 진압되었고 살해되었다. 현장에서 100~250명이 사망했고, 이후 45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이 중 27명에 대해 집행되었다. 이 봉기에 관여한 영국인 목사 존 스미스도 재판을 받던 중 감옥에서 사망했는데, 그의 순교 소식은 영국으로 전해져 노예제 폐지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림 3] 자메이카. 밥티스트 전쟁. 1831년. 불타는 로햄튼 영지. (출처: wikipedia)


1831년 자메이카에서 일어난 밥티스트 전쟁(Baptist War)은 노예제가 폐지되기 전에 일어난 가장 규모가 큰 마지막 봉기였다. 이 전쟁은 크리스마스에 일어났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전쟁’이라고도 불리며, 침례교 전도사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끌었기 때문에 밥티스트 전쟁이라고 부른다.

이 봉기는 현지 출생의 침례교 전도사였던 사무엘 샤프가 이끌었는데, 당시 30만 명이었던 노예들 중 6만 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일종의 파업을 하고, 봉급 인상과 자유를 좀 더 달라고 요구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요구가 수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이들은 생각했으며, 폭력 진압을 하지 않는 한 자신들도 폭력을 행사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전쟁은 일어났고 영국군대에 의해 노예 207명, 노예군대에 의해 백인 14명이 사망했다. 봉기가 진압된 후에는 노예 310~340명이 사형되었고, 사형 방법과 사후 대우도 폭력적이고 비인권적이었다. 종교인들에 대한 의심도 높아져 교회가 파괴되었고 사제들이 체포되기도 했다.

밥티스트 전쟁 동안 일어난 폭력적인 과정으로 영국에서는 노예제 폐지에 대한 논의가 가속되었다. 1833년 노예제 폐지 법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어 다음 해인 1834년부터 시행되기 시작했다. 6살 이하의 아이들은 바로 해방되었고, 그 이상은 6년 동안의 견습기간 후 자유를 얻었다. 1838년 후에는 조건없이 해방되었다.

그러나 노예제도가 없어진 후 노예들이 하던 노동은 ‘계약 노동’이 채우게 되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값싼 임금을 받으며 고강도의 노동을 해낸 계약 노동자들은 주로 인도, 중국, 태평양의 군도들과 같은 당시 저개발국가들로부터 온 사람들이었다.

1834년부터 100년 동안 아메리카 대륙과 섬으로 계약 노동을 하기 위해 떠난 인도인은 3천 만 명에 달한다. 중국인의 이주 계약 노동자 수도 인도의 경우와 비슷하다. 19세기 마지막 40년 동안에는 늘 1만 명 정도의 플랜테이션 노동자가 있었다. 계약 노동자들 중 4분의 1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참고문헌

  • <녹색세계사>, 클라이브 폰팅 지음. 1991; 이진아/김정민 옮김. 2007. 그물코. (9장)

“그림으로 읽는 문명이야기”에서는 인류 문명의 흥망성쇠와 녹색문명을 고민해봅니다. 클라이브 폰팅의 <녹색세계사>를 읽어가면서, 현재의 환경문제와 기후위기 상황 그리고 석유에 기반한 현대도시문명을 다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그림으로 읽는 문명 이야기’는 매주 수요일 업로드됩니다.



글 : 황승미 (녹색아카데미). 2020년 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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