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생명 – (4) 인지과학의 기연적 접근


“인공생명”

1. 글머리: 생명과 기계의 경계, 몸-마음 문제. 2020. 1. 21.
2. 인공생명과 생명의 철학. 2020. 1. 28.
3. 야콥 폰 윅스퀼의 둘레세계. 2020. 2. 4.
4. 인지과학의 기연적 접근. 2020. 2.11.
5. 생명을 물리학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2020. 2. 18.
6. 온생명과 인간의 관계 & 결론 2020. 2. 25.

글: 김재영 (녹색아카데미)


의식과 인지 과정 일반에 대한 논의는 전통적으로 심리학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심리학의 역사를 보면 애초에 철학의 한 분과로서 출발했던 심리철학이 행동주의 심리학과 분리되면서 의식과 인지 과정 자체에 대한 의미 있는 철학적 논의는 심리학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여겨져 왔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인지과학이다. 인지과학은 심리철학, 인공지능, 언어학, 신경과학, 인지심리학 등 다양한 요소들이 통합된 새로운 학문분야로서 의식과 인지 과정을 다룬다.

인지과학의 기반 중 하나는 1950년대에 시작된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이다. 인공지능은 튜링 기계의 구현으로서의 컴퓨터에서 자극을 받아 현실에 존재하는 지능을 재현하고자 하는 노력을 통틀어 가리킨다. 인공지능은 비단 컴퓨터 과학의 한 조류일 뿐 아니라 지능과 인지과정을 꼼꼼하게 살펴본다는 점에서 인지과학과 심리철학에서도 중요한 자원이다.

[그림 1] 인지과학의 개념적 분포 (Varela et al. 1991, p.7) (그림 출처: ResearchGate)


잘 알려져 있듯이, 인공지능에 대한 접근은 크게 세 가지로 구별된다. 먼저, 소위 ‘물리적 기호체계 가설’에 기반을 둔 계산주의가 있다. 물리적 기호체계 가설은 “물리적 기호체계가 인지 작용의 필요충분조건이다.”라는 믿음을 가리킨다. 이에 따르면 마음은 튜링 기계 또는 컴퓨터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계산주의는 인지주의로 부르기도 한다.

1970년대에 상식적인 지식을 자연언어로 구현하는 문제에서 계산주의 접근이 근본적인 한계가 있음이 밝혀지면서, 계산주의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 제기된 것이 연결주의 또는 창발주의이다. 이에 따르면 인지적 학습은 뉴런 사이의 연결이 변형되는 것이며, 인지과정은 뉴런들의 창발적 연결로 이해해야 한다.

[그림 2] 앨런 튜링(1912~1954). 1936년, 수학적인 계산 기계인 튜링 기계를 만들었다.(출처: wikipedia)


이 접근은 뉴런들이 같은 자극에 함께 발화되면 그 연결이 강화되며, 그렇지 않으면 연결이 약화된다는 헵 가소성 규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연결주의의 접근은 대개 신경망 이론을 통해 전개되었기 때문에 이를 단순히 신경망 접근이라고도 부르며, ‘신경망의 정보 병렬분산처리’(PDP)가 핵심이 되었다. 인지과학 안에서는 신경망을 마음의 중심 은유로 보는 연결주의가 1980년대 이후에 널리 퍼졌다.

연결주의에서는 뉴런과 같은 하부 단계의 요소들로부터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속성들이 상부 단계에서 나타난다는 창발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계산주의와 연결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로봇공학에 기반을 둔 로드니 브룩 등의 ‘행동기반 상향접근’은 새로운 AI로 자처하면서 현재의 AI를 주도하고 있다.

인지과학에서의 이러한 세 가지 흐름, 즉 계산주의(인지주의), 연결주의(창발주의), 행동기반 상향접근은 인지라는 것을 일단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고 대체로 심리상태의 하나로서 다루기 때문에, 많은 한계를 보인다. 이에 대한 비판적 대안 중 하나가 바로 ‘기연적 관점’(起緣的 enactive perspective)이다.*

[그림 3] 바렐라, 1999. Ethical Know-how: Action, Wisdom, and Cognition. (출처: amazon)


신경생리학자이자 면역학자인 프란시스코 바렐라가 철학자 에반 톰슨과 심리학자 일리너 로슈와 함께 쓴 저서(Varela et al. 1991)에서 제안된 ‘기연적 관점’은 계산주의(인지주의)와 연결주의(창발주의)를 넘어서는 제3의 접근이다.**

‘기연적 관점’은 인지를 외부세계와 연결된 구조적 결합의 역사로 보면, 나아가 상호연결된 신경망들의 다양한 층위로 이루어진 네트워크를 통해 인지작용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 주장의 핵심은 불교의 명상전통과 메를로-퐁티의 몸의 현상학을 대안으로 삼아 인지과학의 오래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잘 요약하는 용어가 ‘체현된 마음’(embodied mind)이다.*** 이는 몸과 마음이 분리불가능한 하나를 이루고 있음을 말한다. 체현된 마음은 기연적 접근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기연적 접근은 더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연구프로그램이다.  

[그림 4] 톰슨, 2007. Mind in Life. (출처: amazon)


기연적 관점은 다음의 여러 아이디어들이 체계적으로 종합된 것이다(Thompson 2007: 13).

  • 첫째, 살아 있는 존재는 스스로를 능동적으로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자율적 행위자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인지영역을 직접 만들어 내거나 일으킬 수 있다.
  • 둘째, 신경계는 자율적인 동역학계로서 외부에서 입력된 신호를 처리하는 일종의 정보처리장치가 결코 아니라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낸다. 
  • 셋째, 인지는 상황적인 체현된 행위에 대한 숙련된 노하우이다. 인지구조와 인지과정은 감각과 행동의 반복적인 감각-운동 유형(sensorimotor pattern)에서 생겨난다. 생명체와 외부 환경 사이의 감각-행위 결합은 신경활동의 동적 유형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조절하지만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 넷째, 살아있는 존재가 인지하는 세계는 뇌가 재현(표상)하는 애초부터 미리 규정된 영구적인 외부 영역이 아니라 그 존재와 환경 사이의 결합양식으로서 일으켜지는 관계영역이다.
  • 다섯째, 마음과 경험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경험은 마음과 동떨어져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마음은 경험을 통해 다듬어지고 형성된다.


에메케의 생명기호학적(biosemiotic) 정의에 따르면 “생명은 스스로의 ‘둘레세계’를 만드는 스스로 짜인 물질적 코드계에서 일어나는 기호들의 기능적인 해석”이다(Emmeche 1991). 움베르토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는 자체생성성(autopoiesis)이란 개념을 통해 생명을 이해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바렐라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의미 만들기’(sense-making)란 개념을 논의했다. 첫째, 생명체는 근본적으로 자체생성성에 기초를 둔 자기긍정적이며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이다. 둘째, 이 자기긍정적 정체성은 논리적으로 조작적으로 의미 만들기와 상호작용 영역의 준거점 또는 관점을 수립한다.

바렐라가 말하는 의미 만들기는 물리화학적 세계를 의미와 가치를 갖는 환경으로 바꾸며 그 계에 대한 둘레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의미 만들기는 규범적이지만, 자체생성성이 자기연속성의 전체 아니면 없음이라는 이분법적 규준일 뿐, 순차적인 규준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바렐라의 관점은 자체생성성을 조직화의 보존에 국한시키는 마투라나와 다르다. 

바렐라는 자체생성과정을 보충하기 위해 의미만들기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바렐라의 의미만들기 과정은 다음과 같은 다섯 단계로 이루어진다. 첫째, 생명은 자체생성성과 인지로 규정된다. 둘째, 자체생성성에 따라 신체적 자기가 창발하게 된다. 셋째, 자기의 창발에 따라 세계가 창발한다. 넷째, 자기와 세계의 창발하여 둘이 만나면서 의미 만들기가 이루어진다. 다섯째, 의미 만들기는 곧 행위하기(enaction)이며 자기와 세계의 만남이다. 바렐라의 논의는 에메케의 생명기호학적 정의를 가장 일반적인 수준으로 확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5)편, 생명을 물리학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2020. 2. 18)로 이어집니다.


각주

*  여기에서 ‘기연’(起緣)으로 번역한 enactive는 “행동을 하게 만드는” 또는 “행위를 일으키는”의 의미로 사용된다. 이 접근에서는 동역학적 상호작용 모형이 큰 역할을 하며, 행위주체와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이 핵심적이란 점에서 enaction은 불교용어로서의 ‘연기’(緣起)와 상당히 가깝다. 연기는 모든 현상이 생기 소멸하는 법칙을 의미한다. 현상은 무수한 원인과 조건이 서로 관계해서 성립하는 것으로, 인연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 그런 맥락에서 enactive는 이러한 “연(緣)을 일으키는”이란 의미에서 ‘기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석봉래 1997은 enactive를 ‘발제적’이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법률이나 규약을 제정한다”(發制)라는 enaction의 사전적인 의미를 그대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인지심리학자 브루너(Jerome Bruner)가 어린 아이의 인지가 발전하는 세 단계 중 하나로 제안한 enactive stage 또는 enactive representation은 ‘작동적 단계’ 또는 ‘작동적 표상’으로 번역된다. 여기에서 enactive의 의미는 어린 아이가 만지고, 잡고, 씹는 것과 같은 운동적 반응을 통해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作動’은 문자로만 보면 기계나 장치를 조작하여 실행시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브루너가 의도한 개념도 잘 반영하지 못하는 번역어라 할 수 있다. 이기흥 2007에서는 enactivism을 ‘활동주의’라고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 유권종 & 박충식 2009은 Varela 1999의 한국어판 번역에서 enaction의 한국어 용어로 ‘구성’(構成)을 택했다. 그 이유는 더 많은 구성주의 연구자와 구성주의적 입장을 포괄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구성주의의 ‘구성’은 construction과 대응하며, 이러한 용어는 “개체가 스스로 자신의 규칙을 만드는”이나 “행동을 통해 만들어지는”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바렐라 등의 관점과 접근은 구성주의와 다르다. 이와 관련하여 Proulx 2008, Kenny 2007 등 참조. 한편, 인지철학에서 이 용어를 처음 제안한 바렐라, 톰슨, 로슈는 불교의 명상 전통과의 연관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맹자와 도덕경뿐 아니라 티벳불교를 강조하는 Varela 1999의 논의에서도 명료하게 드러난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enaction과 enactive의 번역어로 ‘기연’과 ‘기연적’이 적절할 것이다.

** Varela et al. 1991에서 행동기반 상향접근은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다.

*** 국내 연구에서는 바렐라 등의 논의 자체보다는 그와 연관성을 지닌다고 여겨지는 ‘확장된 마음’ 또는 ‘분산된 인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다. 이기흥 2007, 윤보석 2008, 이영의 2008, 이정모 2010 등 참조.


참고문헌

  • 김재영 (2017). “사이버네틱스에서 바라본 생명: 비인간전환의 관점”. 『정보혁명 – 정보혁명 시대, 문화와 생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다』. 한울아카데미.
  • 이기흥 (2007). “현대에서의 구현주의적 전회: “구현” 개념의 한 정의”, 「철학연구」, 제79집 219-239.
  • 이정모 (2010). “”체화된 인지” 접근과 학문간 융합: 인지과학 새 패러다임과 철학의 연결이 주는 시사”, 「철학사상󰡕 제38집 27-66.
  • Emmeche, C. (1991). Det Levende Spil. The garden in the machine: The emerging science of Artificial Life, Princeton University Press; 오은아 (2004). 『기계 속의 생명 – 생명의 개념을 바꾸는 새로운 생물학의 탄생』 이제이북스.
  • Thompson, E. (2007). Mind in Life: Biology, Phenomology, and the Sciences of Mind, Harvard University Press.
  • Varela, F., E. Thompson, and E. Rosch. (1991). The Embodied Mind: Cognitive Science and Human Experience, MIT Press. 석봉래 (1997). 『인지과학의 철학적 이해』, 도서출판 옥토.
  • Varela, F.J. (1999). Ethical Know-How: Action, Wisdom, and Cognition, Stanford University Press. 유권종, 박충식 (2009). 『윤리적 노하우: 윤리의 본질에 관한 인지과학적 성찰』, 갈무리.


“인공생명” 시리즈는 김재영(2017)을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과학칼럼은 매주 화요일에 업로드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