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시대의 사회 계약


이 글은 기후위기의 시대에는 새로운 사회 계약이 필요함을 주제로 한 레베카 윌리스의 글입니다. 레베카 윌리스(Rebecca Willis)는 랭캐스터 환경 센터(Lancaster Environment Centre)의 교수이며, 『Too Hot To Handle?: The democratic challenge of climate change』의 저자입니다.

윌리스는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될 무렵인 당시 영국에서 이루어진 ‘기후 회의’ 실험에 참여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시민들이 참여하는 ‘탄소중립시민회의’가 2021년에 출범했지만 비민주적인 논의와 운영 등으로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저자는 기후변화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사회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과 반성 없이 곧바로 구체적인 정책으로 들어가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정치인들, 통치자들이 시민들에게 더 많이 정보를 제공하고 시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발언할 기회를 만들어 모두 함께 지혜를 만들어내고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는 일종의 재협상을 해야 하며 ‘새로운 사회 계약’을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글의 원문은 아래 링크로 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가독성을 위해 의역한 부분이 많으니, 정확한 내용은 원문을 확인해주세요.

원문 보기 : “A social contract for the climate crisis” Rebecca Willis. 2020. 8. 18. IPPR Progressive Review. Vol 27, Issue 2. p.156-164. https://doi.org/10.1111/newe.12202

사진 출처 : UK Parliament.


여기 펜리스라는 작은 마을 교회당에 15명이 모여 있습니다. 펜리스는 잉글랜드 최북단에 위치한 영국 의회 선거구로, 레이크디스트릭트 국립공원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15명의 사람들은 나이, 사회적 배경, 정치적 성향 등 선구구 구민 전체의 구성을 반영해 뽑혔습니다. 이들은 어떤 연구에 참여하게 될 거라는 말을 듣고 모였는데, 어떤 연구인지는 이날 아침 교회당에 와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기후변화에 대한, 특히 기후위기를 관리하는 데 있어 정부의 역할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밝히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기후변화에 대한 과학과 영향을 주제로 토론이 진행되자, 참여자들  대부분은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바로 당혹감입니다.

참여자들은 이날 기후변화에 대해 설명을 듣고 걱정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당혹스러워합니다. 과학자, 언론, 데이비드 아텐보로의 최근 TV 다큐멘터리 같은 프로그램에서 기후변화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이 문제에 대해 왜 정치인들은 관심을 더 많이 가지지 않는 건가 하는 것입니다. 기후변화가 이렇게 심각하다면 왜 정부는 앞장 서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지 이들은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각자 재활용을 하고 자동차를 덜 타는 등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도 이들은 압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정치인들이 수행하는 일관된 전략으로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하찮은 수준으로 그치게 될 뿐입니다. “정부가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두가 자기 역할을 해야 해요.”라고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펜리스 토론을 보면서 저는 가장 근본적인 정치적 개념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바로 ‘사회 계약’입니다. 수없이 토의되고 분석된 개념이죠. 그러나 그 기본적인 형식은 가장 단순하고 강력한 개념입니다. 그 개념이란 바로, 통치 받는 것에 동의한다, 대신 통치자들은 우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생각해보면 기후위기와 관련해 우리의 통치자들이 얼마나 실패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제 기후변화가 불러올 위험이 얼마나 심각한지 표현하는 데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잦은 홍수와 가뭄, 산불 등 수많은 기후변화 영향과 피해는 이미 우리 곁에 있습니다.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는 재앙과 같은 기후 시스템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2030년 이전에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크게 줄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기후변화가 경제와 사회에 미칠 영향은 더 추정적이기는 하지만 조금도 덜 중요하지 않습니다. 식량은 부족하고, 극한 기상 현상은 더 자주 일어나고, 생계에 대한 위협은 더 커진 그런 세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대응해 나갈 수 있을까요? 사회가 작동하고 공동체 내에서 함께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경제 시스템과 정치시스템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될까요? 아직 알 수는 없지만 위험이 더 커질 거라는 건 알 수 있습니다.

펜리스의 시민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우리는 안전을 국가에 의탁합니다. 그런데 무시무시한 기후변화라는 곤경에 우리가 빠져 있는데도, 정치인들은 그다지 신경을 쓰는 것 같지도 않다는 얘기를 지금 막 들은 겁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걸까요?

코로나-19 : 새로운 사회 계약이 쓰여지다

시민과 국가 간에 이루어지는 ‘계약’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이론화한 사람은 아마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일 겁니다. 영국에서 내전 시기였던 17세기, 홉스는 사람들이 통치에 동의하는 댓가로 걱정없이 살 수 있도록 안전을 제공받게 될 것이라고 썼습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적인 시각이 아닙니다. 사실 이것은 계약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통치자와 계약 조건을 협상해야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항목들을 일일이 확인하는 과정도 없습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이라고 홉스가 불렀던 것보다는 통치받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 그 기본적인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 수 세기 동안 홉스의 근본적인 개념은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그 개념인 즉슨, 우리의 자유 일부를 통치자에게 맡기면 각 개인과 사회 전체에 이득이 된다는 개념입니다. 사회 계약 개념에는 여러 이형들이 있습니다. 대의제 민주주의도 그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주기적으로 통치자를 뽑고, 만일 그 통치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쫓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이형들은 모두 기본적인 사회 계약 개념이 너무도 철저하게 내면화되어 있어서, 명시적으로 그 개념을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내전으로 갈라진 나라가 아니라면 제대로 기능을 하고 있는 국가, 그리고 법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국가에서는 이러한 사회 계약을 아주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팬데믹이 왔고 갑자기 우리는 기본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위기의 시대가 되자 시민의 기본적인 안전과 복지를 제공하는 국가의 역할이 갑자기 극명한 대조를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얼마나 빨리 일어나는지 너무나 놀랍습니다. 2020년 3월 12일, 전 하원의원이자 런던시장 후보였던 로리 스튜어트는 한 인터뷰에서 학교 문을 닫고 재택 근무를 하며 자가 격리하는 데 경찰력을 이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진행자는 그런 일은 중국처럼 권위주의 국가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지 않겠냐고 반문했습니다. 또 다른 시장 후보였던 스티브 베이커는 더 나아가 스튜어트가 코로나바이러스 상황을 “선정적”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2주도 지나기 전에 스스로 자유주의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보리스 존슨 총리는 이보다 더한 조치를 도입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 국가가 더 간섭하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언제 집에서 나갈 수 있고, 누구와 만날 수 있는지 국가가 결정했습니다. 일할 수 없는 수백 만 명의 사람들에게 국가가 임금을 지불했습니다. 국가와 시민들간의 이러한 거래(사회 계약)가 빛의 속도로 재협상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2020년 3월 이후 몇 주 만에, 필요하다면 그리고 충분한 정보가 주어진다면 이러한 혹독한 조치들조차 사람들은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상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팬데믹) 규정을 준수했습니다. 영국 정부가 봉쇄 조치를 계획하면서 약물을 사용하지 않는 개입 모델링(임페리얼 칼리지)을 미리 수행해 본 결과 준수 비율이 50~75% 정도였는데, 2020년 4월 조사해보니 실제 사회 격리 준수 비율은 80% 이상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로리 스튜어트의 인터뷰를 다시 들어보면 나는 어떤 불편한 친숙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는 과학에 귀기울여야 하며 빨리 행동해야한다고 얘기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불가능하거나 사회적으로 어렵더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그는 기후위기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시간 규모가 다르기는 하지만 기본은 같습니다. 전례없는 위협에 맞서는 데 과감하고 긴급한 행동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코로나19에 대해 대응했던 것처럼 기후 문제에서는 그렇게 하려고 나서지 않습니다.

영국 정치인들에 대한 내 연구에 따르면 정치인들은 기후변화에 대해 나서기를 꺼려합니다. 내 말이 아니라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자신들이 ‘괴짜’나 ‘광신도’로 낙인 찍히게 될까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말하면 댓가가 따릅니다. 스튜어트 의원처럼 종종 나서서 말하는 의원들은 ‘선정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게 됩니다. 기후변화 위협이 얼마나 큰지 과장하기도 힘든데 말입니다.

사회 계약과 기후변화

소설가 아미타브 고시(Amitav Ghosh)의 논픽션 『대혼란의 시대(The Great Derangement)』(2016)에는 고시 자신의 어머니와 나눈 대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어머니가 살고 있는 인도 콜카타는 홍수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지역이라 고시는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게 어떻겠냐고 어머니에게 말합니다.

“나는 그 주제를 설득력 있게 들려드리고자 노력했지만 거의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는 지금 제정신이냐,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그런 어머니를 탓하기는 어려웠다. 고작 세계은행의 보고서에 개략적으로 언급된 위험 때문에 갖은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사랑스러운 집을 떠나라니, 필시 미친소리처럼 들렸을 것이다. 신선하고 햇살이 내리쬐는 화창한 날이었다. 나는 어머니를 설득하는 일을 관두었다.”

(『대혼란의 시대』. 아미타브 고시. 2021(2016). 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p.75-76)

미래의 인류는 아마 현재를 우리 행성이 비교적 저항할 수 없었던 짧은 시대로 되돌아보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 발 밑의 깔개가 미끄러져 빠져나가고 있는데, 우리 모두는 고시의 어머니처럼 변화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후위기 상황에서 국가의 역할이 무엇인지 기후 전문가에게 물어보면, 이들은 ‘기준 만들기’, ‘탄소세 매기기’ 혹은 ‘투자 촉진’과 같은 것들을 말합니다. 전문가들은 곧바로 세부적인 정책으로 들어가버립니다. 한 걸음 물러서서 가장 기본적인 핵심, 즉 국민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다시 펜리스의 시민들로 연결됩니다. 물론 이들도 정책에 대해 의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이들은 국가가 시민들에게 등을 돌린 건 아닌지 알고 싶었습니다. 이들은 고시의 어머니처럼 익숙하지만 낡은 현실에 집착하지 않고, 엄청난 문제를 똑바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을 거치면서, 정치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시민들이 놀랍도록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것은 즉각적이고 개인적인 봉쇄, 고립 그리고 경제적인 분투와는 매우 다릅니다. 기후 행동은 각 개인이 헤쳐나가야 하는 어려운 일이라기 보다는 변화, 아주 급진적인 변화를 요구합니다.

그것은 전환입니다. 화석연료를 이용해 동력을 공급받는 경제와 사회로부터 벗어나는 것, 온실가스 감축에 값을 매기는 것, 경제적인 동시에 도덕적인 것, 노동자들이 기술을 새로 배우는 것, 기후 목표에 맞게 소비 방식과 투자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후변화는 코로나19처럼 즉각적인 위협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 해결에 필요한 급진적인 기후행동을 시작하기가 어렵습니다. 코로나와는 달리 기후변화는 언제나 내일의 일이라 여기게 되는 겁니다.

정치인들도 즉시 행동하기 보다는 부정하고 얼버무리기가 더 쉽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코로나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기후변화와 관련해서 사회 계약을 새롭게 한다면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요?

저는 두 가지 교훈을 얻었습니다. 첫째, 굴하지 말고 정직하라. 둘째, 민주주의를 피할 수 있는 어떤 불편함 같은 것이 아니라 해결책의 일부로 보라.

정직 : 기후위기를 솔직하게 인정하기

가장 우선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과제는 정치인들이 기후변화가 중대한 문제임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펜리스의 시민들이 원하는 것은, 정부가 기후위기를 인정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부서지기 쉽고 점점 더 변덕스러워지는 지구 시스템에 우리 사회가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치인들이 직면하고자 한다면 흔들림없이 정직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해내기 어려운 일입니다. 정치인들은 기후변화가 덜 중요한 문제이고 우리가 감당해낼 수 있고, 과학적인 증거들을 깍아내리고, 기후변화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이라는듯 간단히 설명해버리려고 합니다.(Willis R (2017) ‘Taming the climate? Corpus analysis of politicians’ speech on climate change’, Environmental Politics 26: 212–231)

작년에는 한 가지 중요한 진전이 있었습니다. 등교 거부(school strikers)와 항의 시위가 거리에서 일어났고, 웨일스와 스코틀랜드 등 여러 지역의 정치인들과 영국 의회에서 ‘기후 비상사태'(climate emergency)를 선언했습니다. 본질적으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기후변화 문제의 심각성과 긴급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후 비상사태 선언이, 적어도 지금까지는, 정책과 전략에까지 그런 선언에 상응하는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습니다. 정치인들이 기후위기를 인정하고는 있지만, 동시에 이들은 정책과 전략을 선언과는 다른 것으로 구분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언을 통해 만들어진 광범위한 의미도 거의 논의되지 않았습니다.

기후 비상사태 선언이 이루어진 바로 그날, 캐나다의 저스틴 트뤼도 정부는 산을 관통하는 송유관 확장 계획을 승인해, 전국으로 석유를 공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니콜라 스터전(스코틀랜드 행정수반)은 기후 문제에 있어서 대단한 리더쉽을 보여주었지만, 놀랍게도 스터전 정부는 북해가 “세계 최초의 탄소 넷제로 천연가스 채굴지”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Scottish Government (2019) The Government’s Programme for Scotland 2019–20, p 162) 이 주장에 대한 어떠한 정당화도, 어떠한 설명이나 계산치도 제시하지 않고 말입니다. 스터전과 그의 정부는 기후변화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는 동시에 석유도 적극적으로 뽑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정직한 토론, 즉 기후위기의 시급성을 인정하고 또한 기후 행동이 우리 경제와 사회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의 경우와는 달리, 우리는 희생이 아니라 변화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정직한 토론에서는 권력 문제, 고탄소 사회가 유지될 경우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 즉 국가와 화석연료에 의존하고 있는 회사들이 사용하는 아주 의도적인 전략들도 다루어질 것입니다. 

지난 수 년 동안, 석유 메이저들과 항공회사들 그리고 고탄소 사회에서 이익을 얻는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과학에 의문을 제기하고 부적절한 해결책을 내놓고 대중적 토론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의도적으로 기후 행동을 지연시키고 무산시켜왔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습니다.(Oreskes N and Conway EM (2012) Merchants of Doubt: How a handful of scientists obscured the truth on issues from tobacco smoke to global warming, Bloomsbury)

‘지연 담론들’, 즉 왜 기후 행동이 긴급해보여서는 안 되는지를 주장하는 담론들을 더욱 폭넓게 조사한 뛰어난 새로운 연구들이 있습니다. 이런 담론들 중 일부, 즉 어떤 기후 조치들은 너무 비용이 많이 든다, 혹은 다른 곳에 돈을 쓰는 것이 더 낫다 등과 같은 이야기들은 옳은 주장으로 내세워질 수도 있습니다.

“높은 수준의 대중적 숙고가 없다면 그리고 규제에 반대하는 이익 단체들이 좌지우지 하게 된다면, 이러한 지연 담론때문에 대규모 기후 행동이 방향을 잃을 것이고 좌절 될 우려가 있다”고 연구자들은 말합니다.(Lamb WF, Mattioli G, Levi S et al (2020) ‘Discourses of climate delay’, Global Sustainability, 3, e17: 1–5)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나은 민주주의

정치인들이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할까봐 긴급한 기후 행동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봐왔습니다. 이것은 예언한 대로 되는 예언이 될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길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리고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 만큼 심각한 전략을 제시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지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후 정책은 시민도 대표자들도 먼저 움직이려 하지 않는, 일종의 조용한 교착상태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교착 상태라고 해도 그 안에 해결의 씨앗은 들어있습니다. 만일 정치인들이 앞장서 이끌어가고 기후 행동을 시민과 정치인 간의 사회계약이라고 볼 수 있는 그런 자신감을 가진다면, 그들은 시민들로부터 지지받을 것입니다.

한 번 상상해봅시다. 긴급한 기후 행동이 필요하다, 정부가 앞장서겠다,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모든 일을 다 하겠다고 정치인들은 분명하게 말은 합니다. 하지만 이 일을 법령에 따라 할 수는 없다고 그들은 말할 겁니다.

배출량을 줄일 수 있는 효과적인 기후 전략이 있어야 합니다. (배출량을 줄일 수 있도록)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뭔가를 정치인들이 만들어내고, 이것이 도덕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공정하고 정의롭다고 시민들이 볼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본질적으로 말해, 시민들과 국가 간의 협상을 드러내놓고 다시 해야하며, 이를 통해 정치인들은 사회 계약을 다시 써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형편없이 이상주의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바로 이 일이 영국 기후회의(Climate Assembly UK)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영국 기후회의는 하원에서 설립한 기후변화에 관한 시민 회의입니다.

네 번에 걸쳐 주말 토론을 하는 동안, 100명이 넘는 시민 대표 그룹은 전문가들의 설명을 듣고, 기후 과학과 기후변화의 영향 그리고 기후 행동에 대해 배우고, 토론하고 숙고한 다음 이 그룹이 만든 권고 사항들을 놓고 투표했습니다.

나도 이 놀라운 실험에 참여했는데, 정말 대단한 경험이었습니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실행하는 또 따른 방법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책임이 주어지고, 함께 배우고 생각하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다면 이들은 어려운 문제에 대해 매우 분별있는 답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이 실험을 통해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우리의 대의 민주주의 시스템을 이런 방식의 직접적인 숙고 제도로 완전히 바꾸자고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기후 회의 같은 과정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더 잘 작동되도록 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정치인들과 시민들로 하여금 공동의 노력에 각자의 전문 지식을 동등하게 기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하자는 것입니다.

시민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숙고 과정이 이렇게 한 번 하고 끝나는 방식일 필요는 없습니다. 정책 결정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시민들의 숙고가 짜여들어갈 수 있습니다. 제대로 시행되기만 한다면 현재 시스템에서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기득권에 대항하는 균형추 역할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최근 발표된 기후 회의의 첫 결과(2020)를 보면 이러한 과정이 얼마나 유용한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에 대한 질문에 참여자들은 영국의 경제 복구 계획이 기후 목표에 부합해야 한다고 확고하게 말했습니다.

한 시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변화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겁니다. … 우리는 변화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실업 급여를 주는 게 아니라 새로운 일을 가질 수 있도록 사람들을 훈련하고,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일을 할 때입니다. 다른 선택은 없어요.”

이 결과가 보여주듯이, 기후에 대해 침묵하게 하고 시민들과 유권자들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가려고 하는 것은 매우 근시안적인 행위입니다. 토의 과정에서 증거와 책임 그리고 이해관계가 주어진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행성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을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할 기회가 충분히 주어진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들 앞에 펼쳐지고 있는 기후 붕괴라는 현실 앞에서 행동하는 것이 옳다고 지지를 보낼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민주주의 형식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기회를 제공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계약을 재협상 해야할 때가 되었습니다.

번역 : 황승미 (녹색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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