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상호부조주의인가?

이 글은 저널 Resilience에 실린 다음 글을 번역해 옮긴 것입니다. 녹색아카데미 온라인 책읽기 모임 ‘책밤’에서 읽고 있는 프루동의 <소유란 무엇인가>와 상호부조주의에 대한 배경 지식을 얻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옮겨보았습니다. 가독성을 위해 의역한 부분이 있으니 더 정확한 내용은 원문을 참고해주세요.
(대문 그림 출처 : wikipedia)

원문 보기 : “Why Mutualism and not Communism?” by This Bear. Resilience. 2021. 8. 11.
*이 칼럼의 글쓴이(This Bear)에 대한 소개와 다른 글들을 보시려면 이곳으로 가시면 됩니다.


상호부조주의*(mutualism)가 무엇인지 많은 사람들이 잘 모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와 국가를 반대하는 사람이 왜 공산주의나 민주주의적 사회주의가 아니라 상호부조주의를 선택하는지 그 이유를 모릅니다. 이 문제를 다루는 곳이 많기는 하지만, 이 글에서는 기본적인 사항들을 심도 있게 설명하려고 합니다. 이제 상호부조주의란 무엇인지 본격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상호부조주의라는 말은 진화생물학에서도 기본 원리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둘 혹은 그 이상의 유기체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주장과도 잘 부합하는 것 같습니다.

상호부조주의란 무엇인가?

상호부조주의는 근본적으로 탈중심화된 시장 기반 형태의 사회주의입니다. 상호부조주의적 경제에서는 법인 회사(corporation)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그 기업을 집단적으로 소유하고, 공동체가 공공서비스(물, 전기, 인터넷 등)를 소유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일하기를 원하고 기업공동체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유롭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기업과 공공서비스는 노동자들이 개인 경영(peer management; 협동조합 모델로 집단 경영이라고도 함)에 기반하여 민주적으로 운영합니다. 공공서비스의 경우 서비스를 받는 공동체가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는 노동자들이 결정합니다.

사실 미국의 상호부조주의는 노동자가 소유하는 협동조합 기업 운동의 초창기 활동을 이끌었습니다. 이들 기업이 성공한다는 것, 즉 지속적으로 임금을 높이고,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 수익을 공동체로 환원하는 것은 상호부조주의의 원칙들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수백만 명의 노동자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이러한 상호부조주의 전통 덕분에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장도 주주도 없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이 만들어내는 가치를 온전히 가져갈 수 있습니다. 코널리(James Connolly)가 말했듯이 “이익이라는 것은 노동 계급에게 지불되지 않은 임금”입니다. 상호부조주의에서는, 자본가들이 잉여 가치를 체제 내에서 훔쳐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상호부조주의자들은 새로운 기업을 시작할 때 자금을 구하기 위해 자본가들에게 가지 않고, 전통적으로 신용조합(credit union)에 의존해왔습니다. 실제로 푸르동(Pierre Joseph Proudhon. 1809-1864)이 최초의 신용조합을 발명했고, 다른 상호부조주의자들이 푸르동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상당히 다듬어 사용했습니다. 

사실 미국에 신용조합이 널리 퍼져 있는 것도 상호부조주의의 유산 중 하나입니다.(미국은 상호부조주의가 전통적으로 가장 강했습니다.) 가장 큰 신용조합들 중 다수를 노동조합이 소유하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그림 1]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1865. 귀스타브 쿠르베 작. (출처 : wikipedia)

그러나 가장 현대적인 신용조합들과는 달리, 원래의 아이디어는 노동자들과 기술공들이 자신들의 자금을 모아두고 노동자가 새로 기업을 시작하거나 사거나 기존의 기업을 전환할 수 있도록 자금을 제공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초창기 상호부조주의자들은 문자그대로 자본가들로부터 생산 수단을 사들일 수 있었고 자본가들을 대체했습니다. 총 한 발 쏘지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말입니다.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를 띠는 모든 방식들과 마찬가지로, 상호부조주의 경제도 저작권 보호를 받는 기술 시스템이 없습니다. 토지나 전세계의 자연자원과 마찬가지로 축적된 인류의 지식은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 1842-1921)이 말했듯이 “인류의 공동 유산”의 일부이며 모두의 소유입니다. 본질적으로 기술도 모두 오픈-소스입니다.

[그림 2] 표트르 크로포트킨. 1910. (출처 : wikipedia)

상호부조주의는 시장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생산할 것인지를 공급과 수요 메커니즘이 결정합니다. 공산주의 경제에서처럼 중앙에서 계획하는 사람이 있어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급과 수요 메커니즘에서는 생태적 비용을 포함한 일체의 제조 비용을 비용 공식(cost equation)에 넣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적 사회주의에서는 이런 일체의 비용을 계산해 넣는 데 실패해왔습니다. 자본주의와 달리 상호부조주의 경제에서는 국가나 기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이 상시 조작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현재 시점에 아나르코생디칼리슴(Anarcho-syndicalisme)의 일부 요소들을 도입하는 것이 가치있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자가 기업 전체를 운영하고 직업 훈련과 인증을 직접 민주주의 노동 조직이 하게 된다면 최상의 기업 운영, 최상의 안전 가이드라인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며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었을 때 노동자들을 훈련시킬 수 있다는 이런 생각을 나는 아주 좋아합니다.

이러한 기업 조합(syndicate)은 또한 해당 분야를 발전시키기 위해 일하는 과학자들이나 연구자들에게 연구비를 지원해줄 수 있고, 새로운 기업이나 공공 일자리를 위한 자금을 제공하는 신용 조합을 위해 후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회주의인가?

어떤 사람들은 “시장”이라는 말을 들으면 바로 “그건 사회주의가 아니잖아!”라는 생각으로 즉각 넘어가버립니다. 왜냐하면 수십 년의 냉전 기간 동안 펼쳐진 과장 선전이 미국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주의란 “정부가 모든 것을 한다”는 생각을 심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건 바보같은 생각입니다.

사실 상호부조주의는 마르크시즘이나 아나코-코뮨주의(anarcho-communism)보다 시간적으로 앞서며 사회주의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사회주의 중 하나입니다. 상호부조주의의 핵심 원리들은 “무정부주의”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발명한 프루동이 개발했습니다. 

아나코-코뮨주의는 후에 바쿠닌(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바쿠닌. 1814-1876)과 크로포트킨이, 마르크스의 “순수 공산주의”를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라는 프루동의 이상’과 접목시키고 한편으로 마르크스의 권위주의적 변화 이론은 거부하면서 등장한 주의입니다.

[그림 3] 젊은 시절의 바쿠닌. 1843. Heinrich Ditlev Mitreuter 작. 1920. (출처 : wikipedia)

물론 벤자민 터커(Benjamin Tucker. 1854-1939. 미국의 상호부조주의자)가 국제적으로도 전세계적으로도 최초의 사회주의자 조직의 설립 멤버입니다.(프루동은 마르크스로부터 초대를 받았지만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마르크스의 권위주의적인 사회주의(authoritarian version of socialism)에 조금도 관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분란을 일으키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맞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은 마르크스 이전부터 전세계적인 사회주의 운동의 일부였습니다. 이 문제를 이제 들여다봅시다.

왜 공산주의가 아니고 상호부조주의인가?

경제를 계획할 국가가 없으면 공산주의는 전체 경제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부족 사회들도 마르크스가 “원시 공산주의’라고 불렀던 그런 것을 행했습니다. 마르크스와 초기 공산주의자들이 놓친 것은 사회적 통화(social currency)라는 개념입니다.

엄청난 인종주의자이자 본질적으로 제국주의자인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역사관이 완전히 만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지구를 파괴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산업 자본주의자들이나 마르크스주의 사회들보다 선주민들(indegenous people)이 덜 “선진화”된 게 아닙니다.  

변증법은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 본질적으로 유럽중심적이며 인종차별주의적입니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앞으로 향한 진보, 유럽의 경제 형태와 지배방식이 더 선진화됐다는 것을 가정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통화 개념으로 돌아가봅시다. 인류학에서 사회적 통화라는 용어는 교환될 수 있는 물리적인 통화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부족이나 마을같이 상호 부조(mutual aid)에 기반한 작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가 도움을 주는 사람이고 누가 무임승차자인지 늘 챙깁니다. 이 방식이 사회적 통화입니다.

무임승차자는 단기적으로는 용인될 수 있겠지만, 머지않아 전체의 복지에 기여하라고 부추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의 바르게 알려주어도 바뀌지 않는다면 그 무임승차자는 점점 더 강력한 주의를 받게 될 것입니다. 결국에는 쫓겨날 수 있습니다.(자원이 극단적으로 부족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부족 선물 경제(tribal gift economy)에서는 대부분 노약자를 무임승차자로 생각하지 않으며 그들을 보살핍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사회적 통화는 소위 “원시적인”(primitive) 공산주의 선물 경제(the gift economies)가 작동하는 데 필요한데, 모두가 서로 잘 알고 누가 무엇에 기여하는지 쉽게 알 수 있는 작은 공동체에서만 가능합니다. 마을이나 도시 규모로 커지면 선물 경제는 무너져 버립니다.

물리적인 통화, 투표, 지도자, 왕, 국가는 모두 그런 공백을 다양한 방식으로 채워주는 것들입니다. 도시에 사는 수백만 명의 다른 사람들과 나 사이에 일어나는 사회적 통화 교환을 추적하는 것은 어렵지만, 선출된 공직자나 왕, 정부 등과 나의 사회적 통화 교환은 추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정부의 정당성(Legitimacy)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통화라는 형태를 띱니다. 사회 구성원들이 내는 유지관리 비용(세금이나 의무 등)이, 자신들이 받고 있는 안전보장 혹은 서비스같은 것들에 가치 있게 쓰이고 있다고 다수가 여길 때 “정당한” 지배구조 체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회적 통화가 필요하지 않게 되는 유일한 시나리오는 탈희소성 경제(post-scarcity economy)에서 일어납니다. 크로포트킨과 다른 초기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우리가 빠르게 탈희소성 사회로 접근해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책 <빵의 쟁취>(The Conquest of Bread)에서 크로포트킨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일단 탈희소성에 도달하면 자연스러운 결과로 국가 없는 공산주의가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림 4] <빵의 쟁취>(La Conquête du Pain). 크로포트킨. 1892. (출처 : wikipedia)

크로포트킨은 매우 영리한 사람이었고 옳게 본 것(상호 부조가 진화에서 기본원리로 작동한다는 것)도 많지만, 탈희소성 사회가 실제로 가능하다고 믿은 것은 틀렸습니다. 우리는 유한한 행성에 살고 있고 따라서 항상 희소성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동물 개체군들은 자원이 풍성한 조건에서 번성하지만 자원이 희소해지면 다시 개체군 크기가 작아집니다. 

녹색 혁명 이후 인류의 인구 증가를 봅시다. 우리는 결코 완전한 탈희소성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무언가 없을 때 우리는 거래해야 합니다. 거래를 하려면 시장이 있어야 합니다. 시장이 있다는 것은 통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부가 지원하는 통화일 필요는 없지만 조개껍데기일지라도 통화는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역사 속에서 계획 경제를 만들고자 하는 모든 시도에서 시장이라는 것이 결정적인 부분으로 작동하는 이유입니다.

계획 경제와 국가

여러분이 기차 공장에서 일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기차 부품 전부를 집에서 만들어내지 않는 한 다른 제조업자들로부터 부품을 구해야 합니다. 그런 공급망은 길고 복잡합니다. 상호부조주의에서는 공급과 수요가 이런 문제를 해결합니다. 공산주의에서는 어떤 사람이 (전체) 지도를 그려야 하고 모든 것을 계획해야 합니다. 

만약 공급자를 쉽게 만날 수 있고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 사회라서 수요공급망이 없고 누구나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부품들을 잔뜩 구해오는 애호가들을 여럿 데리고 있다면, 여러분의 공장 전체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기차도 납품할 수 없고 도시 전체도 멈출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누가 언제 무엇을 가져가는가를 제어하는 메커니즘 없이는 산업 사회가 유지될 수 없습니다.

이런 사항들은 장인 기반 경제(모든 사람들이 집에서 모든 것을 만드는 경제)에서는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크로포트킨이 책을 쓸 당시에는 장인 기반 경제가 존재했습니다. 지금은 이런 문제가 아주 핵심적입니다.

현대 경제에서 공산주의는 계획 경제를 필요로 합니다. 계획 경제는 명목상은 아닐지라도 사실상 국가를 의미합니다. 계획 경제를 하는 국가주의적 사회주의는 지금까지 시도되어온 모든 형태에서, 다수에게는 자원의 희소성을 정당 엘리트에게는 특권을 주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부패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경제를 계획하는 것이 올바르게 해내기가 극도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 작은 실수일지라도 예상치 못한 파급 효과를 만들어내 대량 기아 사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정부주의에서조차도 계획 경제는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예를 들어 아나르코생디칼리즘은 이런 계획을 노동자 의회에 넘겨 수행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경제를 계획하고 누가 무엇을 어디에서 언제 얻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노동자 의회는 빠르게 기술관료제(technocracy)로 넘어갑니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보다는 덜 하지만 기술관료제는 경제적 독재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회가 기술관료들의 결정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대체로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자원이 유한한 사회에서 공산주의 규모를 키우는 유일한 방법은 계획 경제를 도입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국가를 다시 만들어내고 경제적 독재를 탄생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산주의는 따라서 본질적으로 권위주의적(authoritarian)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거래, 통화 그리고 시장이 항상 존재하는 세계에서 무국가 사회주의를 원한다면(역사 속에서 표면상으로는 “공산주의” 국가였던 모든 경우를 포함해서 거래, 통화, 시장은 항상 존재할 것이다), 유일하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선택은 상호부조주의입니다.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수십 년 동안 연구를 하고서 아나르코생디칼리즘과 생디칼리즘으로부터는 점차 멀어지고 상호부조주의자가 된 이유입니다.

번역 : 황승미 (녹색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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