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회익의 자연철학이야기 8-2. 생명이란 무엇인가 : 이차질서와 생명의 이해

이 자료는 녹색아카데미 유튜브 ‘자연철학이야기’에서 나눈 대담 8-2를 녹취, 정리한 것입니다. 대담은 책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의 이해를 돕기 위해 2020년에 제작되었습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이야기” 8-2편에서는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의 ’제7장. 집에 도착해 소를 잊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중 바탕질서와 자체촉매적 국소질서, 이차질서와 온생명에 대해서 다룹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이야기 8-2. 생명이란 무엇인가 : 이차질서와 생명의 이해

1.생명이란 무엇인가? : 이차질서와 생명의 이해
1.1. 진행형 복합질서
1.2. 바탕질서와 자체촉매적 국소질서

2. 이차질서의 통합적 성격 1 : 먹이사슬 (자유에너지를 얻는 과정)

3. 이차질서의 통합적 성격 2 : 바탕질서
3.1. 태양계 행성들 대기의 구성
3.2. 지구의 바탕질서 변화

4. 이차질서의 존재론적 성격 : 낱생명

5. 이차질서의 존재론적 성격 : 온생명

6. 생명의 여러 정의들

7. 생명이란 무엇인가? : 온생명, 낱생명, 보생명
7.1. 온생명의 구조
7.2. 황대권선생님의 개구리와 온생명
7.3. 기후위기와 온생명

8. 심학 제7도. 생명이란 무엇인가?
8.1. 이차질서의 생성원리
8.2. 온생명, 1977년


1. 생명이란 무엇인가? : 이차질서와 생명의 이해

1.1. 진행형 복합질서

장회익   생명을 설명하면서 ‘진행형 복합질서’라는 말을 내가 썼어요. 그리고 그것을 ‘이차질서’라고 얘기를 했는데, 이게 뭐냐? 지금까지 나온 비-자체촉매적 국소질서들은 아무리 올라가봤자 그 질서의 한계가 뻔해요. 예를 들어서 화성의 구조가 꽤 희한하게 돼 있다고 해도 변수라는 것이 그렇게 크지를 않아. 비슷비슷한 것들끼리 있게 돼요.

그런데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계속 진행이 돼서 엄청나게 긴 시간 동안 누적이 되면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질서 체계가 생기는데, 이것을 이차질서라고 해요.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아닌 데에서 처음으로 생길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질서를 일차질서라고 하면, 그것보다 한 차원 높은 것이 있는데 여기에 이차질서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진행형 복합질서’다라고 얘기를 해놨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 여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탕질서라는 거예요. 바탕질서, 즉 질서를 만들어주는 물질적인 원소들이 있어야 되고 그 바탕질서에 공급되는 자유에너지가 필수적으로 있어야 돼요. 그리고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있어서 이것이 바탕질서와 결합되어야 ‘진행형 복합질서’가 되는 거예요.

[그림 1] 진행형 복합질서로의 이차질서

1.2. 바탕질서와 자체촉매적 국소질서

장회익   그런데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는 처음 시작할 때는 𝝮I(오메가 I)이라고 하는 바탕질서 속에서 출발해요(그림 1). 𝝮I이라고 하는 바탕질서에 있을 때 θ1이라는 것들 하나하나가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돼요. 처음 자체촉매적 국소질서 θ1이 하나 생기는 데 백만 년이 걸렸다고 앞 시간에 말했죠. { θ1 } 이렇게 중괄호를 해놓은 것은 θ1같은 것이 10만 개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 거예요. 충분히 시간이 지나서 θ1 형태로 계속 유지가 되는 것을 뜻하고, 생물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생물 종’이라고 부를 수 있어요. 여기서 우리는 생명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생물학적인 용어는 안 쓰려고 이렇게 표시했어요.

그런데 거기서 θ1를 바탕으로 해서 두 번째 자체촉매적 국소질서 θ2가 생길 수 있죠. 그래서 10년 후에 θ2가 생기면 그 다음에 또 한 단계 더 높은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생길 수 있고, 시간이 많이 지나면 이런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들이 상당히 많이 누적이 돼요. 이렇게 해서 시간이 흘러가면서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들이 만들어져 간다는 의미에서 ‘진행형’이라는 말을 썼어요. 어느 시기에 가면 θm이 만들어지고 또 어느 시기에 가면 θn이 만들어져서 현재까지 왔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림 1]에서 녹색 상자 𝝮II는 현존하고 있는 질서라는 의미에서 구분해놓은 거예요. 지금 현 시점에서는 녹색 상자 이전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는 이미 사라진 국소질서들이에요. 사라진 질서들은 𝝮I라는 바탕질서가 있을 때 가능했던 질서, 즉 𝝮I라는 바탕질서 아래에서만 생길 수 있었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들이에요.

시간이 지나면서 바탕질서가 𝝮I에서 𝝮II로 바뀌어버렸어. 바탕질서 𝝮II 속에서는 θ1이나 θ2같은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는 생겨날 수 없어요. 그래서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들이 θ1n까지 연속적으로 내려오기는 하지만, 현재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들과 초기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들은 그것들이 생겨날 수 있는 바탕질서가 서로 달라서 공존할 수 없어요.

현재의 바탕질서 𝝮II 하에서는 θ1이나 θ2같은 것들은 자체촉매적 국소질서 노릇을 못할뿐만 아니라, 생겼더라도 존속이 안 돼요. 아까 θ1이 10만 개가 계속 존속된다고 한 것은 상대적인 의미로 한 이야기이고 실제로는 짧은 기간 존속된다는 뜻이에요. 몇 억 년 지나서 바탕질서가 𝝮II로 바뀌면 θ1이 10만 개 보존된다는 보장이 없어.

바탕질서도 연속적으로 변하기는 하지만, 여기서 𝝮I에서 𝝮II로 바뀌었다고 하는 것은 바탕질서가 상당히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리고 바탕질서 𝝮II 아래에서는  θ1이나 θ2같은 것은 이미 사라지고 없어. 그래서 바탕질서 𝝮I과 θ1이나 θ2같은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는 과거의 질서가 돼요.

바탕질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겠지만, 현재의 질서는 바탕질서 𝝮II에서 자체촉매적 국소질서 θm … θn가 공존하는 질서예요. 바탕질서와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서로 짝이 맞아야 되고 θm … θn 들끼리는 서로 도움을 주고 받아요. θm …θn이 서로 상쇄해서 없애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도 있어요.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θm …θn이 없겠죠. 만약 존속한다면 서로 도와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녹색 상자 전체는 현 시점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현존 질서예요. 𝝮II는 현 시점의 바탕질서이고, θm … θn는 바탕질서 𝝮II 안에 있는 종류들의 집합이에요. 각각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들은 서로의 생존에 유리하게 상호작용해야 존속할 수 있어요. 따라서 각각을 떼어놓으면 생존이 안 돼요. 물론 부분적으로 하나가 떨어져나가도 ‘현존 질서’ 전체는 유지될 수 있지만, 자체촉매적 국소질서 하나가 전체 질서로부터 분리돼서 존속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래서 복합질서라고 하는 것은 시간적으로는 최초의 바탕질서 그리고 과거 질서와 연결되어 있고, 공간적으로는 현존하는 바탕질서와 그 안의 다른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들과 연결되어야만 존속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 따로따로 분리되어 있어서는 자체촉매 역할도 못해요. 자체촉매적 역할이라는 것은 이미 있는 프로세스 안에 자신이 들어가는 것이지, 혼자 허공에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자체촉매적 기능을 하기 위해서도 현존 질서 전체 안에서 함께 있어야 된다, 𝝮가 기본 단위다! 이것이 현재 존속할 수 있는 이차질서, 우리 지구상에서 존속할 수 있는 그리고 실제로 존속하는 이차질서예요. 그런데 이러한 이차질서의 실체가 무엇이냐, 이것을 뭐라고 부르느냐하는 문제가 발생해요.

2. 이차질서의 통합적 성격 1 : 먹이사슬 (자유에너지를 얻는 과정)

[그림 2] 이차질서의 통합적 성격 1 : 먹이사슬

장회익  자유에너지를 받아야되는데, 각각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모두 스스로 태양으로부터 자유에너지를 받느냐? 그건 너무 어렵고, 또 할 필요가 없어서 안 하죠. 예를 들어서 사람도 하나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예요. 굉장히 수준 높은 자체촉매적 국소질서예요. 그런데 우리가 햇빛에 나가서 혓바닥 내밀고 있으면 자유에너지가 공급되느냐? 안 된단 말이야.(웃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녹색식물 혹은 녹색 플랑크톤같이 광합성을 할 수 있는 종류가 상당히 많이 있어요. 이것들이 태양으로부터 오는 자유에너지를 양을 더 많게 만들 수는 없지만, [그림 2]에서 보는 것처럼 물과 이산화탄소를 이용해서 더 높은 분자 구조를 가지는 고분자 형태로 만들 수 있어요.(그림 2에서 왼쪽의 녹색 화살표) 태양으로부터 온 자유에너지를 끼워넣는 거죠. 녹색식물이 만든 고분자 물질을 분해시키면 다시 자유에너지가 나오도록 만드는 거예요.(그림 2에서 오른쪽의 빨강색 화살표) 이런 고분자 물질(그림 2에서 [CH2O]n)은 유기물이라고 하는데, 영양물질이라고 보면 되죠.

[그림 2]에서 오른쪽 노란색 화살표는 동물처럼 광합성을 하지 않는 거의 모든 생명체, 즉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들이 자유에너지를 얻는 과정이에요. 이들은 녹색식물이 만든 고분자 물질을 활용하는데, 이 물질을 물과 이산화탄소로 분리시키면서 나오는 자유에너지(𝛥F′)를 가지고 활동을 해요. 이 구조가 성립이 돼야 태양으로부터 오는 자유에너지를 지구상의 생명 시스템이 활용할 수 있어요. 자유에너지를 활용을 해야 뭔가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려면 [그림 2]와 같은 전체 네트워크가 협동을 해야 돼요. 전체가 서로 연계를 해서 협동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거지. 이런 것이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먹이사슬이라고도 하고 먹이망, 생태계라고 부르죠. 각각의 개체가 서로 다른, 그럼으로써 각각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분업적으로 기여하는 상태가 되는 거죠.

3. 이차질서의 통합적 성격 2 : 바탕질서

3.1. 태양계 행성들 대기의 구성

[그림 3] 행성대기의 구성성분

장회익   금성, 지구, 화성이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행성들인데, 금성과 화성의 대기 구성이 지구와 너무 달라. 이산화탄소 농도를 보면 금성과 화성은 98%, 95%이고 지구는 0.03%(현재 이산화탄소 농도는 2022년 6월 1일 기준 0.0421%. 인류가 연소시킨 화석연료 때문)예요. 질소 농도는 금성과 화성이 1.7%, 2.7%이고 지구는 79%, 그리고 산소 농도는 금성에는 거의 흔적만 있고 화성은 0.13% 이하인데, 지구는 21%나 돼요. 물도 금성은 0.0003미터, 화성은 0.00001미터인데 지구는 3000미터예요.

지구의 대기 구성은 굉장히 특별해요. 금성이나 화성과는 매우 다르죠. 지구에서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생길 여건이 더 좋았다고 볼 수 있어요. 물론 이것으로 생명 발생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대기 구성 성분이 달랐는데, 문제는 산소의 농도예요. 초기에는 지구에서도 산소 농도가 거의 0이었어요. 산소 원자가 없었다는 말이 아니에요. 산소 원자는 광물 속에 다 들어있죠.

대기 중에서 산소가 기체로 존재하기 굉장히 어려워요. 산소는 화학적인 결합을 너무나 잘 하기 때문에 대기 속에 있으면 어떤 물질을 만나도 금방 화합물을 만들어버려요. 화합물을 깨서 그 안에 포함되어 있던 산소를 지속적으로 내보내주는 과정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대기 중의 산소는 화합물이 돼버리고 없어져요. 예를 들어서 산소가 쇠하고도 결합하는데 이걸 녹슨다고 하죠. 대기 중의 산소를 써서 쇠를 녹슬게 하는 거예요.

3.2. 지구의 바탕질서 변화

장회익   그런데 현재 지구에서는 대기 중에 산소 농도가 21%로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어요. 이것은 [그림 1]에서 봤던 바탕질서 𝝮I과 𝝮II의 차이예요. 𝝮I에서는 산소 농도가 0이었는데 𝝮II에서는 21%가 된 거예요. 과거 질서와 현존 질서에서 바탕질서의 대표적인 큰 차이가 바로 산소 농도라고 할 수 있어요. 나머지 조건은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초기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는 산소가 없는 상태에서 생겼고 산소가 없어야 생기는 거예요. 산소를 만나면 화학 결합을 해버리기 때문에 어려워져. 그런데 현재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는 산소가 있어야 존속할 수 있어요. 없으면 또 문제가 생겨. 그러니까 𝝮I과 𝝮II의 바탕질서가 극에서 극으로 바뀐 거예요. 𝝮I 과 𝝮II가 동시에 같이 공존하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림 4] 이차질서의 통합적 성격 2 : 바탕질서

장회익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θ1, θ2…θm, θn으로 바뀌어가면서 바탕질서 𝝮도 같이 따라가면서 달라져. 바탕질서와 자체촉매적 국소질서 전체가 함께 변해나가는 거예요. 만약 𝝮I과 𝝮II가 항상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𝝮는 제외하고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만 따로 생각해도 되죠.

그런데 바탕질서와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함께 가는 것이기 때문에 바탕질서와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를 따로 떼어내서 볼 수 없고(그림 4에서 녹색 상자) 항상 붙어 있어야 돼요.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들끼리도 서로 관계(예: 광합성에서 시작되는 자유에너지 전달 시스템)를 가지고 있어서 뗄 수 없고, 또 역사적으로는 과거의 질서 없이는 현존 질서가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전체를(검은색 상자) 또 하나로 봐야 돼요. 따라서 [그림 4]에서 검은색상자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실체다! 이렇게 이해를 해야 되는 거죠.

그래서 이제 우리는 이런 시스템에 이름을 붙여야 하는 상황에 있어요. 틀림없이 우리 우주 속에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우리 지구상에 이미 있는 것인데, 이게 뭐냐? 뭐라고 해야 할까? 내가 이것을 생각하기 전에 아무도 이것을 주목한 사람이 없었고, 더구나 이름을 붙인 사람도 없어요. 이것에 주목을 안 했으니 눈에 보이지를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름을 붙일 수가 없죠.

내가 내 눈으로 처음 본 실체이기때문에 이름을 내가 지을 수 밖에 없지. 그래서 나는 이것을 ‘온생명’이라고 지었다. 잘 지었죠.(웃음) 생명은 생명인데 전체가 하나인 생명, 그래서 ‘온생명’이에요. 그리고 이것이 생명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이라고 강조하는 거예요.

4. 이차질서의 존재론적 성격 : 낱생명

[그림 5] 이차질서의 존재론적 성격 : 낱생명

장회익   지금까지 우리는 어떻게 생명을 생각해왔나? 과거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θ1 … θ2)에는 거의 관심도 없었죠. 지금 보이는 것은 현재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들(θm … θn) 뿐인데, θm … θn 이것들 하나하나가 생명체이고, 그 생명체 안에 생명이 하나씩 있다고 봤지. 우리는 보통 생명이라고 하면 ‘내 몸 안에 생명이 있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죠. 이 전체(그림 4의 녹색 상자)가 생명이다 혹은 녹색 상자 안에 생명이 있다라고 말하는 경우는 본 일이 없어요.

그런데 지금 보니까 녹색 상자 전체가 실제로 존재하는 기본적이고 존재론적인 실체인 것이지, θ 하나하나는 𝝮라는 바탕질서가 있다는 전제 아래 존재할 수 있는 부분 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θ도 우리한테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존재예요. 온생명이 중요하다고 해서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온생명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할 수 없죠. 각자가 중요해요. θ의 중요성은 그대로 있고 θ도 생명의 중요한 성격을 대변하고 있지만, θ 혼자서는 생명은 안 되기  때문에 ‘낱생명’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적합하다는 거죠.

지금까지는 낱생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주류의 생명 관념이었어요. 이제는 낱생명만 가지고 생명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 심지어 낱생명을 생명이라고 한다면 생명을 정의할 수도 없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어요.

5. 이차질서의 존재론적 성격 : 온생명

장회익   시간적으로 보면 그림 6에서 빨간 상자 전체를 온생명이라고 해야 되고, 현시점에서 볼 때는 녹색 상자를 온생명의 현재 상황이라고 봐야 한다, 이렇게 이해를 할 수 있죠.

[그림 6] 이차질서의 존재론적 성격 : 온생명

최우석   우리가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낱생명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온생명 개념과 비교해볼 때 이런 일상적인 생명 개념은 문제가 있는 건가요?

장회익   문제가 있죠. 예를 들어서 꺽어진 나뭇가지는 생명이 있냐, 없냐? 대답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요. 잘 심으면 살아있는 나무가 될 수 있지만, 하루 이틀만 지나면 마른 나무가지가 되죠. 그러면 현재 이 나뭇가지는 생명이 있다고 해야하나 없다고 해야하나? 그냥은 말할 수 없죠. 그래서 조건이 필요해요.

[그림 7] 일상적 생명 개념의 문제점

꺽인 나뭇가지의 예 : 이 안에 생명이 있나? 현재 덜 마른 상태여서 땅에 나뭇가지를 잘 심어서 살 수 있으면 생명이고, 만약에 이미 너무 말라서 그렇게 할 수 없거나 사람들이 관심을 안 두고 있어서 버려져 있으면 생명이 아니다라고 할 수 있을까? 생명이냐 아니냐하는 그 중요한 경계를 이렇게 엉성하게 얘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생명의 단위 문제 : 세포냐 유기체냐? 그리고 예를 들어서 토끼는 하나의 세포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수천 억 개 혹은 수 조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겠죠. 그렇다면 토끼의 세포 하나하나가 생명이냐, 토끼가 생명이냐? 이것도 난해해요. 토끼 한 마리가 생명이라는 것은 누구나 상식적으로 얘기하지만, 토끼 안에 있는 세포 하나만을 두고 그게 생명이냐라고 물으면? 그게 생명이 아니라고 할 수 없어요. 박테리아도 생명인데, 토끼 세포가 왜 박테리아만 못하냐? 토끼는 그러면 몇 십억 개의 생명이냐? 하나의 생명이냐? 이런 문제가 발생하죠.

생명의 정의 문제 : 무엇이 생명인가?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생명이라고 할 거냐? 도대체 생명을 제대로 정의를 할 수나 있는 것이냐? 당연히 어렵죠.

6. 생명의 여러 정의들

[그림 8] 생명의 여러 정의들 (브리타니카)

장회익   브리타니카 백과사전에서 생명의 정의를 이렇게 여섯 가지로 하고 있어요.(그림 8) 브리타니카에서도 어느 하나로 정의를 내세우지 못하고 있는 거죠. 간단한 정의와 문제점을 뒤에 정리해뒀는데 한번 읽어봅시다.

[그림 9] 생명의 대사적 정의 (브리타니카)
[그림 10] 생명의 생리적 정의 (브리타니카)
[그림 11] 생명의 생화학적 정의 (브리타니카)
[그림 12] 생명의 유전적 정의 (브리타니카)
[그림 13] 생명의 열역학적 정의 (브리타니카)
[그림 14] 생명의 자체생성적 정의 (브리타니카)

7. 생명이란 무엇인가? : 온생명, 낱생명, 보생명

7.1. 온생명의 구조

[그림 15] 생명이란 무엇인가?

장회익   여기 마침 여섯 사람이 있죠. 생명에 대한 여섯 가지 다른 정의처럼. (웃음) 전부 자기 손에 잡히는 것만 얘기하고 있어요. 그러면 생명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 생명이란 온생명이다!(그림 16) 온생명으로 보면 다 풀리는 거야. 앞에서는 온생명의 부분들을 분리시켜 놓고, 즉 낱생명 하나하나를 두고 그것을 굳이 생명이라고 하다보니 문제들이 발생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전체를 하나로 보면 문제가 풀려요. 생명은 온생명이고, 낱생명은 온생명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이해를 하면 되는 거죠.

[그림 16] 생명이란 온생명이다.
[그림 17] 낱생명과 보생명의 동심원 구조

장회익   무엇이 생명이냐 하는 물음에 대해서, 이게 생명이다하고 정의를 내릴 수도 있어요. 이 책에 내가 생명의 정의를 내렸는지 잘 모르겠는데, 적어도 내 책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에서는 앞에 나온 다른 정의들에 맞춰서 정의를 한 일이 있어요.

중요한 것은 정의를 어떻게 하느냐보다는, 생명의 성격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예요. 생명은 온생명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안에 우리가 중시하고 있는 하나하나의 개체들로 구분이 가능한 존재가 있어요. 그것을 우리는 낱생명이라고 부르죠. 이 낱생명은 혼자 떨어져서 독립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고 함께 하는 보생명, 다시 말하면 온생명의 나머지 부분이 같이 할 때에만 생명이 된다! 이러한 낱생명, 보생명, 온생명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해요.

온생명이 생명이냐 아니냐는 그저 정의의 문제일 뿐이에요. 그러나 온생명으로 표시되는 어떤 현상, 이것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이 중요해요. 생명은 온생명과 관계가 되는데, 우리는 온생명의 부분에 해당하는 낱생명을 보통 ‘생명’으로 부르지만, 그 낱생명만 가지고는 생명을 정의할 수도 없고 더구나 이해할 수도 없다는 얘기를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황승미   책에 나오는 내용인데 중학교 선생님 얘기가 재밌었습니다(pp.386-387). 우주 여행을 가는데 꼭 가지고 가야하는 게 뭔지 학생들한테 질문을 했더니 학생들이 여러 가지를 써냈고, 그걸 다 합하면 온생명이다하는 얘기인데, 그 선생님께서 온생명 개념을 아주 잘 적용해서 질문을 한 것 같아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장회익   그렇게 이해해도 되죠. 중학생들도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에요. 여기서 한 가지, 이런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우리 눈에 낱생명은 보이는데 왜 온생명은 안 보이나? 온생명이 중요한 건데. 온생명을 그동안 생각 못한 이유는 눈에 안 보이기 때문이에요. 낱생명은 눈에 다 보이는데. 그러면 그렇게 중요한 게 어떻게 눈에 안 보였을까? 그런 생각을 우리가 한번 해볼 수 있죠.

*온생명에는 항성인 태양도 포함됩니다. ‘B612+태양’, ‘지구+태양’이 각각 온생명입니다. 그림에서는 편의상 B612와 지구를 온생명이라고 표현했습니다.(편집자 주)

황승미   그런데 고대 문명이나 신화같은 데서는 신이나 자연의 모습으로 온생명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장회익   그런 면도 있어요. 그러니까 직관에 의해서 혹은 생명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면, 하나하나 낱생명만으로 생명을 규정할 수 없다하는 직관에 이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비교적 소수죠.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생명이 뭐냐 하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답할 수 있을까? 생명이라는 말을 언제부터 이해했나? 기억이 없지. 몇 살 때부터 생명이라는 말을 이해했는지 기억이 없어요.

생명이라는 개념은 물론 삶과 죽음과도 관계가 있는 거지만, 생명이라는 말로서 머리 속에 어떤 그림을 그릴 때 그것이 언제부터 그리고 어떤 그림으로 그려지는가하는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어요. 각자가 어느 시점에 그런 단계를 지나왔을 거예요. 어느 시점부터는 생명이라는 말도 알게 되고, 그것이 어떤 것이다하고 어렴풋이나마 알고 다른 사람이 ‘생명’이라고 할 때 나도 안다고 끄덕끄덕 하기 시작하는 시점이 있었을텐데, 사실은 나 자신도 그렇고 거의 대부분 기억을 못해요.

이것을 나는 생명에 대한 ‘자득적 개념’이라고 표현했어요. 우리가 경험하고 살아가면서 사람들 얘기를 들으면서, 누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아, 이런 게 생명이다하고 그냥 가지게 되는 거야. 그 내용이 뭐냐? 그것은 분류하는 거예요. 세상에 있는 사물을 두 가지로 분류하자, 그러면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지 않는 것 하고 딱 분류를 하는 거지. 예를 들어 살아있는 것은 움직인다! 아까 여러 정의들이 나왔지만 이것은 살아있는 것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 있다, 살아있지 않은 것은 그런 특징이 없다 이렇게 알아보는 거예요. 그 특징이 뭐냐, 그 특징의 공통적인 것이 바로 생명이다, 이렇게 꼭 꼬집어서 말은 안하지만 대략 그 관념이 머리 속에 박힌 거예요.

그러니까 낱생명을 생명이라고 보게 되는 거죠. 더구나 온생명이라고 하면 태양에서부터 자유에너지가 오고 전체 생태계, 그리고 30-40억 년의 역사 과정이 그려져야 하는데, 이것을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는 경험을 못하니까 온생명은 우리 눈에 안 들어오는 거죠.

우리는 ‘생명’이라고 하면 낱생명이 곧 생명이다하고 생각이 딱 굳어져 있어요. 온생명 개념을 통해서만 생명이 제대로 ‘이해’가 되는 거예요. 낱생명만 가지고도 생명은 친숙하게 알 수 있어요. 그러나 이것이 ‘이해’하는 것은 아니에요. 우주의 다른 기본 원리와 생명 개념이 어떻게 접합되느냐 하는 문제는 단절시켜 놓은 채 그건 뭐 그냥 알 수 없는 것, 알 필요 없는 것이라고 해놓고 그냥 눈에 보이는 살아있는 것만 생각하는 것일 뿐이에요. 이것도 생명을 안다고 할 수는 있지만, 이해의 단계까지 가기 이전의 앎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렇더라도 우리 눈에 보이면, 그러니까 온생명의 경계가 눈에 보이면 얘기가 달라지겠죠. 그런데 우리는 그런 눈을 못 가지고 있어요.

7.2. 황대권선생님의 개구리와 온생명

장회익   황대권선생께서 어려운 시절을 겪은 적이 있어요.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꽤 오래 갇혀 계셨고 독방 생활을 했는데 너무 심심했던 거예요. 그런데 잠깐 뜰에 나갔다가 생명 하나를 만났어. 그 생명이 개구리였어요. 어떻게 잘 잡아서 같이 살자고 방에 데리고 들어왔어요. 두 식구가 됐죠. 이제 개구리를 먹여 살려야되는데, 그래서 그 아까운 밥을 좀 덜 먹고 개구리랑 나눠 먹는 거지. 개구리로서는 진수성찬을 만난 거죠. 그런데 안 먹는 거야.

그래서, 아, 개구리는 밥을 안 먹고 파리를 먹는구나 깨닫고, 그래서 이번에는 파리를 어떻게 잡아서 먹으라고 줬는데 또 안 먹는 거야. 그러다가 우연히 그 중의 안 죽은 파리 한 마리가 휙 날아가니까 개구리가 혀를 내밀어서 탁 먹더라는 거야. 그래서 황대권선생 얘기가, 개구리가 영물이구나, 죽은 파리는 안 먹고 산 것만 먹는구나 하고 감탄을 했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런데 황대권선생께서 한 가지 파악 못 하신 게 있지.(웃음) 개구리 눈에는 정지한 것은 안 보이고 움직이는 것만 보이는 거야. 왜냐? 개구리는 정지한 것은 볼 필요가 없어요, 정지한 건 먹는 게 아니니까. 날라다니는 것만 보이는 거야. 개구리 눈과 사람의 눈을 비교해보면 우리 눈에는 정지한 나무 전체가 보이죠. 그리고 흔들리는 나뭇잎도 보이고. 개구리 눈에는 큰 나무는 안 보이고 움직이는 나뭇잎만 보이는 거예요. 움직이는 것만 보이니까.

나무 전체가 온생명이라면 개구리 눈에는 나뭇잎, 그러니까 낱생명만 보이고 온생명은 안 보이는 거지. 우리가 딱 그 처지야. 큰 온생명이라는 나무 전체가 다 엮어져서 살아있는 것인데, 거기서 살아움직이는 낱생명만 보고 그게 생명이다, 나뭇잎만 생명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무는 못 보고 있는 거죠. 물론 개구리보다 사람이 한 차원 높지. 움직이는 것도 보고 정지한 것도 보지만, 그러나 역시 또 한 단계 올라가면 온생명은 못 보고 낱생명만 보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비유가 재미있어요.

생명체가 뭘 본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보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내가 다 보고 있는 것같지만, 사실은 꼭 나한테 필요한 것만 보고 있는 거예요. 사실 개구리는 움직이는 것만 봐도 살아가니까 움직이는 것만 보이고, 우리도 일상생활 속에서 낱생명만 보고도 살아갈 수 있으니까 낱생명만 보이는 거예요.

7.3. 기후위기와 온생명

장회익   그러나 이제는 우리 온생명 전체가 하나가 되고 인류가 온생명을 움직일만한 능력을 소유하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온생명 자체는 못 본다는 것은 큰 문제예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온생명을 제대로 보는 거예요. 온생명의 생리가 어떠한지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서 온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우리도 살아야 돼요.

그런데 온생명은 안 보고, 낱생명이 살아가는 것만 보고 거기에 엄청난 변화를 가하면 온생명의 생리가 깨질 수 밖에 없어요. 이것을 우리는 환경문제라고 부르죠. 심지어 기후변화까지도 있어요. 기후변화 문제는 사람이 몸을 유지하는 생리와도 굉장히 흥미로운 관계가 있어요. 사람 몸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 체온이에요. 요즘 특히 코로나19때문에 체온을 많이 재는데, 조금만 변해도 생명 유지에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

앞에서 이미 봤지만 자유에너지는 온도와 관계 있죠. 상태 변화는 자유에너지가 가장 낮은 쪽으로 일어나는데, 자유에너지가 달라지면 화학변화가 오른쪽으로 갈 것이 왼쪽으로 가버릴 수 있어요. 우리 몸 속에서도 화학변화가 일정한 방향으로 가야 생리가 유지되는데, 갑자기 화학변화가 거꾸로 가버리면 생리에 역행해서 생존이 어려워지죠. 그만큼 몸이 온도에 민감하기 때문에 우리 온몸이 온도를 잘 느끼게 되어 있어요.

지구의 온도가 사람으로 치면 체온에 해당해요. 그러면 지구 온도에 따라서 모든 생태계의 변화 방향이 정해질 수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동식물의 생육 조건이 달라지고 거기에 맞춰서 생태계의 변화가 일어날 뿐만 아니라 같은 지형 아래에서도 대기의 온도에 따라서 바람이 이쪽으로 안 불고 저쪽으로 불게 되고 결국 기후 패턴에 변화가 와요.

기후 패턴의 변화가 일어나면 또 무슨 문제가 생기느냐? 우리는 그 기후 패턴에 맞춰서 모든 농업활동을 해왔어요. 어느 시기에 비가 어떻게 얼마나 오니까 무엇을 심고 어떻게 하고 그렇게 기후 패턴에 맞춰서 몇 천 년을 살아왔는데, 이게 확 바뀌면 옥토에 비가 안 오고 엉뚱하게 사하라 사막에 비가 쏟아질 수 있어요. 사하라 사막에 사는 몇 사람은 좋겠지만, 그게 하루 이틀 만에 모래가 있던 곳을 농토로 바꿀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 필요한 식량이 100인데 50 정도가 없어지면, 나머지 50을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이런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

온생명을 우리가 못 봤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죠. 온생명의 생리를 미리 알았으면, 우리가 이렇게 하면 기후변화가 오고 그러면 온생명의 생리가 이렇게 깨지니까 그래서 화석연료를 쓰면 안된다는 것을 알았을텐데, 우리는 그걸 잘 몰랐기 때문에 지금까지 온 거예요.

그래서 너무 늦지 않았나하는 걱정도 들지만, 어쨌든 늦었든 안 늦었든 지금이라도 빨리 관심을 가져야 돼요. 우리한테 가장 중요한 의사는 온생명 의사다 이렇게 나는 보고 있어요. 사람 살리는 의사는 참 많지만, 온생명을 살리는 의사는 배출한 일이 없어요. 물론 명칭이 달라서 그렇지 학자들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사람 몸을 보살피는 정도로 진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온생명을 살피는 의사는 없어요.

이것이 지금 현재 우리가 당면한 문제예요. 생명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하냐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수 있겠죠. 그래서 우리는 생명을 제대로 알자, 제대로 알려면 온생명 구조를 통해서 이해를 하자, 이것이 내가 여기서 얘기하고 싶은 중요한 줄거리예요.

8. 심학 제7도. 생명이란 무엇인가?

8.1. 이차질서의 생성원리

[그림 18] 심학 제7도. 생명이란 무엇인가?

최우석   저는 책 앞부분에서 심학십도를 차례대로 보면서 심학7도는 어떻게 그리셨을지 대단히 궁금했었는데요. 이렇게(그림 18) 그리셨습니다.

장회익   여전히 ‘처음 상태 ==> 나중 상태’의 틀 안에서 그렸고, 이차질서 생성원리를 표현했어요. 초기의 이차질서가 현재의 이차질서로 변화하는 거죠. 지금 현재의 이차질서는 과거의 이차질서가 있어야 생겨날 수 있어요. 앞의 [그림 6]에서는 위에서 아래로 변화하는 모양으로 그렸는데 여기서는 앞의 다른 십학십도 그림들과 패턴을 맞추기 위해서 옆으로 그렸어요. 시간에 따른 생명의 변화의 원리를 표현한 것이 심학 제7도예요. 

최우석   심학 제7도를 보면 제6도까지와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제6도까지는 그야말로 대상의 현재 상태에 따라서 미래 상태는 어떻게 되는가 그 자체가 관심의 촛점이었고 그것에 맞춰서 쭉 그림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심학7도에서는 지금 우리의 관심의 포커스가 138억 년이 된 우주에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태어났는가라는 질적인 비약이라고 한다면, 심학 제7도는 그런 면에서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처음 상태에서 나중 상태로의 변화의 원리를 적용하는 일반적인 포맷과 7도의 포맷은 관심의 포커스가 조금 어긋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장회익   그런 면은 있죠. 그래도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차질서가 생겨나는 틀이에요. 우리는 보통 생명을 현재 시점으로 보려고 하지만 현재의 단계만으로는 생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과거 질서로부터 현존 질서로 연결되는 과정을 봐야 현재의 생명을 알 수 있다, 그런 면도 7도에서 강조되고 있죠. 물론 지적한 내용도 일리가 있어요.

동역학이나 통계역학에서 봤던 그림들에서 나오는 시간의 흐름과는 좀 다르죠. 우주의 변천하고도 조금 다르지만, 생명 역시 시간의 틀과 이차질서라고 하는 통합적인 것을 같이 봐야 된다는 거예요. [그림 6]에 비해서 [그림 18]의 심학 제7도에서는 통합적으로 봐야한다는 의미가 덜 드러나지만, 처음 상태(𝝮I : θ1 … θ2)와 나중 상태(𝝮I : θm … θn)를 묶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둘 수 있어요. 이 그림만 제대로 파악을 하면 오늘 얘기한 내용을 거의 이해했다고 볼 수 있어요.

최우석   온생명론에서도 심학 제7도가 새로 나온 것은 또 한번의 진전이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장회익   진전이라기보다는 이 그림은 우리 책의 흐름, 패턴에 연결시켜서 그린 거죠. 그전까지는 이걸 그냥 수직적으로만 그렸어요.

황승미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에서 선생님께서 거의 다 하신 것을 이번에 조금 더 간결하게 정리하신 것 같습니다.

장회익   그렇지. 그리고 사실은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에서 상세하게 썼던 내용은 줄였어요.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의 앞 장에서 상당히 설명을 했기 때문에, 7장 자체를 상당히 압축시킬 수 있었던 거예요.

8.2. 온생명, 1977년

최우석   1977년에 이런 (온생명에 대한) 어렴풋한 느낌을 받으셨을 때(책 p.382 참조) 기쁘셨는지 궁금합니다. (웃음)

장회익   지금 내 기억으로는, 당시에는 생명을 낱생명 중심으로 생각했어요. 되도록이면 제일 작은 낱생명을 미니멈으로 그려보자, 생명이 되는 기본 조건은 가지고 있으면서 가장 간단한 것을 찾아보자하고 상당히 고민하고 모형도 그려보고 여러 가지를 했어요.

그러다가 어느날 저녁이었던 것 같은데,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데 어떤 이미지가 떠올랐어요. 지구 전체가 있고, 햇빛이 쫙 비치는데 땅에서 뭔가 초목같은 것이 솟아오르는 모양이 보였어요. 필름을 빨리 돌리면 초목이 빠르게 자라는 모양이 보이는 것처럼. 그런 뭔가가 지구 전체에서 솟아오는 모양이었어요. 아, 이거구나! 생명은 이 전체 안에 있는 것이지, 어떻게 낱생명 속에 있나하는 그런 그림이 머리 속에 그려지면서, 생명은 근본적으로 달리 봐야한다하고 생각을 한 거죠.

최우석   그때가 생명에 대한 접근 방향을 대전환하신 때인가요?

장회익   그렇지. 그전까지는 당연히 낱생명 중심으로, 그것도 되도록이면 작은 것들, 아메바같은 단세포처럼 아주 작은 것을 중심으로 생각했죠. 그런데 이게 어떻게 생명이 되느냐 고민도 하고 모델을 여러가지 만들어보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때 내가 어떤 책을 하나 읽었는데 아마 『History of Life』라는 책인 것 같아요. 생명의 출발부터 지금까지의 진화 과정을 비교적 간략하게 요약 해놓은 책이에요. 온생명에 대한 생각을 한 게 그 책을 읽은 후가 아니었나 싶어요. 그 책을 한번 읽고 나니까, 생명은 하나의 개체 중심으로 볼 게 아니다하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책을 읽은 시기와 온생명에 대한 아이디어를 처음 생각한 시기가 비슷한 때인지 정확히는 잘 모르겠어요.

(대담 8-2 녹취 끝.)

대담 : 장회익, 최우석, 황승미
영상 편집 : 최우석
녹취, 글 편집 : 황승미
전체 제작 : 녹색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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