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시대의 좋은 집] 1. ‘좋은 집’이란 어떤 집일까?

최우석 (녹색아카데미/무위기술연구소)


파시브하우스, 또는 에너지효율 높은 건축물을 계획하고, 짓고, 검증하는 일에 발을 담근 지 10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아서 이룬 바는 미미하기 짝이 없습니다만 그래도 구체적인 기술 영역에서 에너지전환의 한 몫을 맡아야 한다는 소명 의식만큼은 늘 날이 서있습니다.

몇 해 전부터 제가 그동안 공부하고 익혔던 바들을 닥닥 긁어모아서 책 한 권으로 묶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올해 녹색문명공부모임 2월 모임에서 발표를 하게 되었는데 이 참에 토막 연재글부터 써보려고 합니다. 지난 번 서설에 이어서 1장에서는 전체 이야기의 핵심이자 결론인 ‘좋은 집’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좋은 집’을 찾기 위한 질문

‘좋은 집’이란 어떤 집을 말하는 걸까요? 그럴 듯한 답을 얻기 위해서 먼저 괜찮은 질문부터 만들어 보겠습니다. 질문을 잘 만들면 질문에서 절로 답이 이끌어져 나오기도 하니까요.

우선 ‘무엇’이 좋아야 좋은 집인가부터 물을 수 있을 겁니다. 집이 갖게 되는 여러 갈래의 요소와 성질이 있을텐데 이 가운데 좋은 집을 말할 때 핵심이 되는 점이 무엇일지 따져보면 좋은 집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좋은 집의 요건이라고 할까요? 

“무엇이 좋으면 ‘좋은 집’일까?”

이렇게 질문을 만들고 보니 그 뒤에는 그것이 ‘얼마나’ 좋아야 좋은 집인가 따라 묻게 됩니다. 어떤 요소를 가진다거나 어떤 성질을 띤다더라도 거기에 정도 차이가 있다면 어느 정도가 되어야 좋다고 할 수 있을지 범위를 정해야 합니다.

“무엇이 얼마나 좋으면 ‘좋은 집’일까?”

이 질문을 들고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헌데 혹시 빠진 것은 없을까요? 이것으로 충분한 걸까요? 보통 어떤 사물을 두고 좋다 나쁘다 평가를 할 때면 평가를 하는 주체인 나의 입장에서 판단하기 때문에 누구에게 좋다는 것인지는 굳이 따지지 않게 됩니다. 당연히 소유주나 사용자에게, 달리 말하면 나에게 좋거나 나쁘겠죠. 하지만 세상에 크건 작건 영향을 미치는 사물이라면 나의 입장에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한 사람의 성숙이 시야의 확대와 불가분의 관계라면 집에 대한 우리의 식견이 성숙할수록 내 집과 나 사이의 관계만이 아니라 나의 집과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는 넓은 시각 또한 따라와야 마땅합니다. 이런 점에서 ‘누구에게’ 좋아야 좋은 집이겠는지도 질문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 질문이야말로 ‘좋은 집’ 규정의 출발점일지 모르겠습니다.

“누구에게 무엇이 얼마나 좋아야 ‘좋은 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제 ‘좋은 집’을 생각하며 물어야 할 사항들이 모두 정리되었습니다. 저는 이 질문이 우리가 ‘좋은 집’을 찾아가는 길잡이가 될 거라 믿습니다. 그럼 이제 이 질문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좋은 집 나쁜 집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예를 비교적 잘 알려진 영화와 소설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영화와 소설 속의 ‘좋지 않은 집’

무언가 똑부러지게 말하기 어려울 때에는 ‘아닌 것’, ‘반대되는 것’부터 떠올려 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비교적 최근에 영화와 소설 속에 나와 사람들 입길에 오른 두 개의 집을 떠올리면서 ‘좋지 않은 집’은 무엇일지 생각해 보죠.

영화 <기생충> 중 기택이 사는 반지하방을 보여주는 장면 (<기생충> 영화 스틸컷 중에서)
아파트 층간소음 갈등을 배경으로 한 소설 <가해자들>

널리 알려진 영화 <기생충>에는 서로 상반되는 두 집이 나옵니다. 이 두 집은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상징입니다. 주인공 가족은 반지하방에 삽니다. 반지하방은 옥탑방, 고시원 등과 함께 우리가 살고 싶지 않은 집을 대표하는 열악하기 짝이 없는 주거 형태입니다. 이 셋을 합쳐 ‘지옥고’라고도 부르죠. 해가 잘 들지 않고, 습하고 눅눅해서 곰팡이 잘 피고, 퀴퀴한 냄새가 배어 있고, 하수 역시 잘 안 빠지고, 심한 경우에는 영화에서처럼 장마철 호우에 물이 들어와 집이 잠기기까지 하는, 탈출할 수 없어 사는 집이 바로 반지하방입니다. 저 또한 아주 오랫동안 반지하방에 살았습니다. 제 경험에 비춰보면 반지하방 사람들의 희망사항은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서 해 잘 드는 아파트로 이사가는 것이었습니다. 제 어머니가 십수 년만에 겨우 그 희망을 이루셨을 때 꽤나 감격해하던 기억이 흐리게나마 남아 있습니다.

저희 가족의 아파트 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아서 저는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우리나라 가구 절반 이상이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1] 요사이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 층간소음 문제를 겪는 것 같습니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층간소음 다툼 끝에 살인까지 벌어진 경우도 왕왕 보도가 되고[2], 층간소음 보복용 우퍼 스피커나 골전도 스피커가 인터넷에서 인기리에 판매된다는 소식[3]은 이 갈등이 아주 널리, 그리고 깊게 퍼져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찾아보니 이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소설과 다큐멘터리[4]도 있더군요. 소설은 정소현 작가의 <가해자들>이라는 작품인데요, 이 소설에서는 층간소음을 둘러싼 이웃 간의 고통과 갈등, 다툼 끝에 망가져가는 삶이 그려진다고 합니다. 이 작품을 권하는 한 신문 칼럼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5].

정소현 장편소설 ‘가해자들’(현대문학 펴냄)은 도시 정신병이자 전염병인 층간소음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소리는 1211호에서 시작된다. 이들의 일상은 ‘귀가 뜨인’ 1111호 윤서 엄마의 신경을 자극한다. 산후풍 탓에 환기도 못 한 채 집 안에 갇혀 있는 그녀는 “명확하게 들려오는 것들을 못 들은 척하며 살지 않으리라 결심”한 후 분쟁을 일으킨다. 위층에서 신발을 벗을 때, 밥 먹으러 주방으로 이동할 때 등 소리가 들릴 때마다 항의하고, 나중엔 발걸음 따라 천장을 두드리고 우퍼 달아 공격까지 한다.

아래층 1011호 갓난아기 성빈의 울음소리도, 옆집 1112호 지안의 물 내리는 소리도 예외 없다. 발을 구르고 벽을 두드리는 등 보복을 서슴지 않는다. 처음에는 사과하던 이웃도 같이 신경증과 강박증에 감염된다. 천장에 청소기를 돌리고 벽을 차는 등 맞대응을 시작한다. 정신이 무너진 윤서 엄마는 끝내 입원했으나, 그 와중에 직장 잃고 이혼당하고 아이도 빼앗긴 1112호 지안 엄마가 1212호의 소리를 듣고, 위층을 찾아가 살인까지 저지른다. 소음이 분쟁을, 분쟁이 살인을 낳는 과정이 무섭고 끔찍하다.

“[장은수의이책만은꼭] 층간소음, 사회적 해결책이 필요하다”. 2021년 12월 13일자 <세계일보> 칼럼글. 

많은 사람들이 지금 현재 일상에서 겪고 있는 일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물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일 겁니다. 하지만 집에 관심을 두고 보면 이 소설은 ‘좋지 않은 집’에 대한 보고서이기도 합니다. 반지하방에 비해 지내기 좋을지는 몰라도 남에게 미치는 영향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다툼의 수에 빠지는 집이 좋은 집일 수는 없을 겁니다.

누구에게 좋아야 ‘좋은 집’인가?

영화 <기생충>의 반지하방과 소설 <가해자들>의 아파트, 이 두 개의 ‘좋지 않은 집’들은 ‘좋은 집’을 규정하기 위한 질문의 첫 번째 항에 답을 줍니다. 반지하방은 나에게 매우 좋지 않은 생활 환경입니다. 나의 집은 내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환경이므로 당연히 ‘나에게’ 좋아야 좋은 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웃과 극한의 다툼이 벌어지는 아파트의 사례로부터 이웃에게, 남에게 고통을 주는 집이 결코 좋은 집일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남에게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혀 원한을 사는 집은 최종적으로 나에게까지 그 화를 입힐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에게만’ 좋은 집은 ‘좋은 집’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남에게도’ 좋은 집이어야 합니다. 이 점을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지만 사실 누구도 모르지는 않죠. 누구나 알지만 굳이 명시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 이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좋은 집’을 똑부러지게 규정하고자 한다면 말입니다. 이제 이렇게 써보겠습니다.

“좋은 집이란 나에게 좋고, 남에게도 좋은 집이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그동안 이 점을 대부분 지나쳤기 때문에 우리의 ‘좋은 집’ 관념은 매우 개인적이고 사적인 데 머물러 있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이 관점에서 ‘좋은 집’에 대한 논의를 해보겠습니다.

무엇이 좋아야 ‘좋은 집’인가?

그렇다면 나에게는 무엇이 좋아야 ‘좋은 집’이고, 남에게는 또 무엇이 좋아야 ‘좋은 집’이라 할 수 있을까요? 먼저 나에게 좋은 집에 대해 생각해 보죠.

보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싶은 집은 해가 잘 들어 겨울에 따뜻하고 빨래 잘 마르며 집안이 습하지 않은 집일 겁니다. 여름에는 직사광선도 막을 수 있고 바람도 잘 통해서 서늘하길 바랍니다. 시끄러운 소리도 없고 전망도 좋았으면 하고, 나아가 주변에 좋은 산책로와 값싼 시장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처럼 원하는 바를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겁니다. 이처럼 우리는 ‘좋은 집’의 최대, 또는 최선은 말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좋은 집’이라면 이것만큼은 갖춰야 한다, 이것을 결여하고는 ‘좋은 집’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좋은 집’의 최소한은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다른 좋은 것들 하나도 없어도 이것만 갖춰지면 좋은 집의 기본은 되었다고 할만한 것, 세상 좋은 것들을 다 갖추었어도 이것이 없다면 좋다고 하기 힘든 것, 그 최소한은 무엇일까요? 상식적인 수준에서 말하자면 살기 좋은 집, 편안한 집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의미를 조금 더 분명하게 하자면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하며 일년 내내 숨쉬기 편한 집”이라고 더 구체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항온동물이며 허파 호흡을 하는 인간의 신체 조건에 가장 적합한 환경을 말합니다. 적어도 인간이 거주하고 생활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집’이라는 사물의 최소한의 미덕은 그 기본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남에게도 좋으려면 무엇이 좋아야 할까요? 이웃한 바로 옆 집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 대목에서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우리 인류가 마주한 가장 심각한 위기가 기후위기라는 점은 이제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아직도 이를 부인하는 사람이나 기업이 더러 있는 것 같지만 각국의 정부 기관과 국제사회는 IPCC 보고서의 내용을 인정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이전에 비하면 매우 급진적인 대책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2050년까지 소위 ‘탄소중립’을 이루자는 국제사회의 합의나 2030년까지 탄소 배출을 (나라마다 기준년도가 다르지만 그 기준년도의) 절반 이하로 줄여야 한다는 권고는 이전에는 소수의 선각자들이나 이야기하던 대응방안입니다. 물론 이것이 충분한 목표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언명으로는 각국 정부들과 국제기구 모두 매우 빠르게 탄소 배출을 줄여 지난 세기말 대비 지구 평균 기온이 1.5 ℃ 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부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좋은 집, 나 뿐만 아니라 내 이웃과 이 세계와 앞으로 문명을 이어나갈 미래 세대, 나아가 이 떠돌이별에서 삶을 함께 하고 있는 뭇 생명들에게 ‘좋은 집’은 바로 이 기후위기를 돌파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남에게 좋은 바의 최소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탄소’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기후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이 이산화탄소와 메탄 등의 온실기체가 급격하게 증가한 탓이므로 기후변화를 완화하기 위해서 대기 중 온실기체의 농도가 더는 증가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온실기체, 탄소는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입니다. 바로 인류문명이 화석연료에 기반한 문명으로 에너지전환을 하고, 이 새로운 화석연료 기반 문명이 땅 속에 갖혔던 과거의 햇빛에너지를 엄청난 속도로 꺼내어 이용한 결과가 바로 온실기체의 증가이고, 플라스틱의 창궐이며, 대규모 생물종 멸종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처한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우리 앞에 떨어지는 당대의 햇빛만으로 문명의 살림을 꾸리는 방향으로 다시 에너지전환을 하는 것이고 그 에너지전환의 과정이자 결과로서 탄소를 줄이는 것입니다. 탄소가 문제라서 탄소를 없앤다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화석연료 기반 문명의 핵심적 성격은 바로 화석연료라는 고밀도에너지원에 기반한 문명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다시 당대의 햇빛이라는 저밀도에너지원 기반 문명으로 전환하는 것이 에너지전환의 요체입니다. 물론 과거로 되돌아가서는 안 되죠. 화석연료 문명 이전의 햇빛 문명이 원시적, 또는 고전적 햇빛 문명이었다면 화석연료 문명 시기에 폭발했던 지식과 기술, 창조성의 보고를 안고 현대적 햇빛 문명으로 성공적으로 전환을 이룰 때 기후위기를 기회로 삼은 새 시대가 열릴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논의를 가지고 정리를 해보죠. 기후위기 시대, 남에게도 좋은 집은 최소한 무엇이 좋아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난방이나 냉방, 환기 등 집 안에서 쓰는 에너지의 효율이 매우 높아서, 즉 아주 적은 에너지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하고 시원하며 연중 숨쉬기 편한 환경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쉽게 말해서 “에너지를 적게 써서 화석연료와 같은 고밀도에너지원이 필요 없는 집”이 바로 기후위기 시대에 남에게도 좋은 집의 최소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보다 압축적으로 표현하면 나에게 좋은 집의 최소 요건은 ‘물리적 쾌적성’을 갖춘 집이라고 표현할 수 있고, 기후위기 시대 남에게도 좋은 집의 최소 요건은 ‘에너지 생태성’을 갖춘 집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물리적 쾌적성’과 ‘에너지 생태성’ 이 둘을 다 갖춘 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좋은 집이란 물리적 쾌적성과 에너지 생태성을 갖춘 집이다.”

얼마나 좋아야 ‘좋은 집’인가?

이제 정도의 문제도 생각해보겠습니다. 나에게 물리적으로 쾌적한 집이 말하는 정도를 구체화하고  하고, 남에게 에너지면에서 생태적인 집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에너지를 써야 생태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정의되어야 합니다.

물리적 쾌적성와 에너지 생태성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장에서 더 자세히 풀어볼테니 결론에 해당하는 점만 간단히 말해보겠습니다. 실내 환경에서 인체는 어떤 조건에서 쾌적함을 느끼고 어떤 조건에서 불쾌함을 느끼는가 하는 점에 대한 연구가 많이 되어 있습니다. 연구자나 기관, 표준 등에 따라서 실내 환경의 질을 몇 가지로 논하는지는 통일되어 있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바로 ‘열적 쾌적성(thermal comfort)’과 ‘실내 공기질(indoor air quality; IAQ)’입니다. 이 밖에 ‘소리환경(acoustics)’과 ‘밝기환경(lighting)’ 등을 더 하여 ‘실내 환경의 질(Indoor Environmental Quality; IEQ)’ 지수를 논하기도 하지만 이 가운데에서 최소한을 다시 가려본다면 앞의 두 가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건축물을 짓거나 고친다는 입장에서 본다면 설계와 시공 당시에 기준에 맞게 짓고 설비를 갖추지 않으면 열적 쾌적성과 실내 공기질은 완공 후에 개선하기 매우 어렵다는 점에서도 경중의 차이가 큽니다. 쾌적성 연구의 결과 이미 열적 쾌적성의 범위와 좋은 공기질의 기준이 국제적 표준으로 확립되어 있습니다. 이에 따라서 나에게 물리적으로 쾌적한 집은  “열적으로 쾌적하고 좋은 공기질이 유지되는 집”이라는 정의로 그 정도까지 나타낼 수 있습니다.

에너지 생태성 차원에서는 쾌적성을 달성하는 데에 필요로 하는 에너지의 양과 부하의 크기가 모두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부하가 작을 경우 통상의 열공급설비 대신 아주 경제적인 수준의 열푸개(히트펌프)[6]를 써서 필요로 하는 온기와 냉기를 공급할 수가 있는데 통상의 열공급설비(보일러 등) 에너지효율은 아무리 좋아도 원리상 100% 미만이 될 수밖에 없는 반면 열푸개(히트펌프)는 최근 제품 성능으로 볼 때 난방의 경우 200~300%, 냉방의 경우 400~500% 이상의 에너지효율을 갖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양의 난방열, 냉방열을 공급하더라도 열푸개(히트펌프)를 이용하면 3분의 1의 에너지만으로 같은 양을 공급할 수 있기 때문에 열푸개(히트펌프)를 쓸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 에야 비로소 에너지 요구량을 합리적인 수준까지 낮추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열푸개(히트펌프)는 미미한 열원에서 열을 퍼올려서 실내에 난방열을 공급하거나 냉기를 공급하는 기계입니다. 흔히 에어컨이라고 부르는 냉방기기가 바로 열푸개(히트펌프)입니다. 하나의 열푸개(히트펌프)가 실외의 열을 퍼다가 실내에 공급하면 난방기 역할을 하고, 반대 방향으로 작동하여 실내의 열을 퍼다가 실외에 버리면 냉방기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양방향 작동이 가능하도록 구성하면 열푸개(히트펌프)는 냉난방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상업용 건물이 아닌 가정에서 열푸개(히트펌프) 난방을 잘 하지 않는 이유는 난방 부하 때문입니다. 뒤에 자세히 설명을 하겠지만 열푸개(히트펌프) 난방 때에는 난방열이 공급되지 않고 도리어 냉기가 나올 수 있는 제상모드 운전이 난방 중에 있게 마련입니다. 난방 부하가 작은, 즉 실내열이 바깥으로 잘 빠져나가지 않는 집이라면 온도 설정을 해둘 경우 이따금만 난방 장치가 가동되기 때문에 난방이 중지되고 제상모드에 들어가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알아채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난방 부하가 큰 집, 즉 쉽게 식어서 강력한 난방이 쉼없이 돌아가야 하는 집에서는 얼음을 제거하기 위해서 난방이 중지되면 금새 추위를 느끼게 됩니다. 집의 냉난방 부하가 충분히 낮아서 작은 용량의 열푸개(히트펌프) 냉난방기로도 감당할 수 있게 되면 훨씬 더 적은 에너지로 열적으로 쾌적하고 좋은 공기질이 유지되는 환경을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즉, “냉난방 부하가 작아서 작은 용량의 열푸개(히트펌프)로 냉난방을 할 수 있는 집”이 기후위기 시대에 맞는 수준의 좋은 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기후위기 시대에 ‘좋은 집’은 나에게도 좋고 남에게도 좋은 집이어야 하는데 나에게 좋다는 것의 최소한은 “열적으로 쾌적하고 좋은 공기질이 유지되는 집”이라 규정할 수 있고, 남에게도 좋다는 것의 최소한은 “냉난방 부하가 작아서 작은 용량의 열푸개(히트펌프)로 냉난방을 할 수 있는 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을 모두 만족하는 집은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기계식 환기를 하고 소용량 열푸개(히트펌프)로 냉난방을 하는(할 수 있는) 집”

뒤에서 자세히 설명을 하겠지만 열적 쾌적성은 높은 수준의 단열과 수준 높은 성능의 창을 써서 집의 껍데기, 즉 외피의 열적 성능을 높이면 달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냉난방 부하를 낮추고 냉난방 에너지 요구량도 낮추는 효과를 냅니다. 하지만 일년 내내, 하루 왼종일 좋은 공기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계식 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나에게 물리적으로 쾌적한 집은 기계식 환기를 반드시 해야 합니다. 기계식 환기를 하여 좋은 공기질을 유지하면서 소용량 열푸개(히트펌프)로 냉난방이 가능한 집은 열적으로도 쾌적하고 화석연료와 같은 고밀도에너지원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기후위기 시대가 요구하는 수준의 물리적 쾌적성과 에너지 생태성을 모두 만족한다면 기계식 환기와 소용량 열푸개 냉난방이 가능한 것입니다.

기후위기 시대의 ‘좋은 집’

지금까지 기후위기 시대의 ‘좋은 집’이 어떤 집인지 말하기 위하여 “누구에게 무엇이 얼마나 좋아야 ‘좋은 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해 “물리적 쾌적성과 에너지 생태성을 갖춘 집”이라는 원리적인 답과 “기계식 환기를 하고 소용량 열푸개(히트펌프)로 냉난방을 하는(할 수 있는) 집”이라는 현실적인 답을 도출해 보았습니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물리적 쾌적성’과 ‘에너지 생태성’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논하면서 정말 원리적으로 이 둘이 ‘좋은 집’의 기준이 될 수 있겠는지, 또 ‘기계식 환기 + 소용량 열푸개(히트펌프) 냉난방’이 현실적인 ‘좋은 집’의 기준이 될 수 있겠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리고 파시브하우스 표준과 이 글에서 도출한 ‘좋은 집’의 기준을 비교하면서 좋은 집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석

[1] 국토교통부 2020년도 주거실태조사. 이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주택유형별 가구 비율은 단독주택 31%, 아파트 51.1%, 연립주택 2.1%, 다세대주택 9.4%, 비거주용 건물 내 주택 1.6%, 주택 이외의 거처 4.8%로 집계된다. www.korea.kr/archive/expDocView.do?docId=39551 (2022년 2월 11일 접속) (→ 본문으로)

[2] 가장 최근 보도는 2021년 9월 27일 보도된 여수의 살인 사건입니다. “”층간 소음 못 참겠다” 흉기 휘둘러… 윗집 부부 사망”. 2021년 9월 27일 MBC 뉴스 기사. (2022년 2월 11일 접속) (→ 본문으로)

[3] “층간소음 윗집도 한번 당해봐라… ‘골전도 스피커’가 해결사 될까”. 2019년 11월 23일 조선일보 기사. (2022년 2월 11일 접속) (→ 본문으로)

[4] 스튜디오 그루(2021). <데시벨 전쟁 I~IV>. (→ 본문으로)

[5] “[장은수의이책만은꼭] 층간소음, 사회적 해결책이 필요하다”. 2021년 12월 13일자 <세계일보> 칼럼글. (2022년 2월 11일 접속) (→ 본문으로)

[6] 이 글에서는 히트펌프(heat pump)를 대체하는 우리말로 ‘열푸개’라는 말을 쓰겠습니다. 영어의 펌프(pump)에 해당하는 우리말은 ‘물푸개’와 ‘무자위’입니다. 이 중 물푸개의 조어 원리를 활용하여 열푸개로 말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말이라 괄호 안에 기존 외래어를 함께 쓰겠습니다. (→ 본문으로)

2 댓글

  1. ondollife

    안녕하세요?
    무전자파 저전력으로 오랜시간 동안 난방시스템을 연구 개발해온 온돌라이프 대표이사 박명숙입니다.
    ‘좋은집”에 대한 글에 모두 충분히 공감하며 좋은 집에 대한 난방분야의 일부분은 저희 회사 기술이 역할을 할 수 있을것 같아 댓글로 인사드립니다.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난방은 신재생에너지를 극소량 이용해 국부적으로 축열된 바닥난방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보고있습니다.
    또한 신체밀착형 난방시스템을 통해 ‘난방이 아닌 난인’에 촛점을 둔다면 에너지소비를 최소화 하면서도 쾌적성을 살린 공간이 만들어질수 있다고 봅니다. (자체 기업부설연구소에서는 모두 실현하고 있습니다만^^)

    녹색아카데미에 회원가입했습니다.
    차근차근 내용들을 읽어가며 제게 부족한 부분 공부하고 저희 회사 방향성도 다잡는데 큰 도움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 시인처럼 글쓴이

    말씀 감사합니다. 파시브하우스처럼 난방부하가 작은 건축물에는 뭉근할 정도의 낮은 세기 국부 난방이 잘 어울립니다. 저는 녹색아카데미의 일원이기도 하지만 무위기술연구소라는 1인 연구소 간판을 걸고 파시브하우스 운동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반기까지 ‘파시브하우스 센터’라는 웹사이트를 열어서 파시브하우스에 관한 정보, 교육, 자문, 지원 등을 하려고 하니 그러한 장에서 서로 공부하면서 토론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 무위기술연구소 최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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