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란 무엇인가?

* 이 글은 장회익선생님의 다음 글을 요약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녹색아카데미에서는 새자연철학세미나 등 모임 진행에 맞추어 장회익선생님의 책, 논문, 칼럼, 강연 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요약한 것이오니, 원문은 아래 세부사항을 참고해주세요.


“시간”. 장회익. 2002. <우리말 철학사전 2> 우리사상연구소 엮음. 지식산업사. pp.137-165.

1. 시간이란 무엇인가?
2. 인간의 시간의식
3. 시간에 대한 적재적 관점과 공백적 관점
4. 시간의 서술 및 측정 문제
5. 상대성이론에서의 시간
6. 인간과 시간


1. 시간이란 무엇인가?

누구나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규정하기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시간이다. 시간은 우리 삶의 여러 측면과 닿아 있고,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들이 시간이라는 말 속에 섞여 들어간다. 따라서 시간이라는 말 자체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전에 그 의미들을 가려내고 쓰임새를 명료하게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 현대인은 시간을 ‘지속되고 있는 정도’, 곧 시간간격의 뜻으로 가장 많이 사용한다. 이것은 ‘기간’이라고도 쓰고, 짧을 때는 ‘순간’이라고도 쓴다. 이와 달리 시간 축 위에서의 한 위치를 말할 때의 시간은 어떤 사건이 발생한 ‘시점’ 혹은 ‘시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은 ‘언제’라고 물었을 때 그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질 수 있는 시간개념이다.

‘시기’라는 시간개념도 있다. 시간 자체에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때 말하는 시간개념이다. 어떤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시간영역을 나타내며, 여름과 겨울, 아침과 저녁, 고대와 현대, 국경일과 크리스마스 등이 해당된다. 동양에서 말하는 ‘시(時)’가 여기에 해당된다.

시기, 시각, 기간 등의 시간개념을 공간개념과 비교해보자. 시간간격으로서 시간은 물체간의 간격이나 한 물체가 점유하고 있는 길이에 해당한다. 시각, 시점은 공간 위에 놓인 위치에 대응되며, 시(時)나 시기는 공간개념에서 영역이나 구역에 비교적 가까운 의미이다. 시간과 공간 사이의 유사점은 특히 상대성이론에서 확고한 이론적 기반을 얻는다.

시간과 공간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공간은 방향에 있어서 본질적인 차이가 없으나 시간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공간적으로 앞이나 뒤는 당사자의 방향에 의해 지정되지만, 과거와 미래라는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선정할 수 없다. 과거와 미래가 정말 존재하는지조차 분명히 알 수 없다. 현재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면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과거와 미래가 우리의 상상 속에만 있고 현실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시간은 현재라는 하나의 점으로만 존재하게 되는데, 과연 이것을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시간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있다면 우리 밖에 있는가, 우리 안에 있는가?

이러한 시간에 관한 질문들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해왔는지 먼저 살펴보자.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우리 밖에 시간이 있고 우리가 그 시간 안에서 태어나 살다가 죽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많은 사람들은 시간이 우리의 주체적인 경험과 직결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칸트, 베르그송, 현상학자들과 실존철학자 등이 그렇다. 이들의 생각을 잠시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세계를 실재론적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했음에도 시간의 존재성에 깊은 의문을 가졌다. “영혼(정신)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시간이 과연 존재할 것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것은 정말 깊이 살펴보아야 할 문제이다”라고 그는 말했다.(책 p.139)

그러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저 밖에 존재하는 세계질서’가 우리의 시간 지각, 시간 측정, 시간 산출 과정까지 모두 조정한다고 보았다. 시간의 속성은 운동과 연관하여 나타나며, “시간의 속성에 관한 한 모든 운동은 궁극적으로 천구의 균일한 원운동에 견주어야 할 것”(책 p.139)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의 본성을 한층 더 마음 속에서 찾으려고 시도했다.  그는 운동보다는 시간현상, 즉 시(詩)의 낭독이나 소리의 길고 짧음같은 것 속에서 시간의 측정을 찾으려고 했다. 그는 “내 마음이여, 내가 시간을 측정하는 것은 바로 그대 안에서이다”라고 했는데, 시간의 지속을 마음이 알아볼 수 있을 때에만 시간의 단편을 알아볼 수 있다고 그는 보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시간을 “주체가 세계와 인식적인 관계를 맺게 하는, 인간에게 내재된 관념의 틀”로 보았다.(책 p.140) 시간은 공간과 함께 인간의 직관을 가능하게 하는 선천적인 근간이며, 이러한 직관에서 개념으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인간의 인식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칸트가 보는 시간은 인간의 내적 감성의 형식이지, 사물의 객관적 성질이 아니다.

베르그송은 인간이 체험하는 시간과 과학으로 인식되는 시간은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고 본다. 인간이 체험하는 ‘지속의 내면적 느낌’으로 나타나는 시간은, 삶의 의식적 경과나 심리상태 등 내적 의식의 수준에 따라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 있고 강화 또는 약화될 수도 있다. 주관적이고 질적인 체험된 시간과 달리 과학에서 말하는 시간은 균일, 불변, 반복된다.

현상학자들과 실존철학자들로 이러한 시간이해가 이어지면서 시간은 인간 삶의 문제와 직결된다. ‘시간성’이라고 하는 존재론적 특성이 부여되면서 인간은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존재”로 규정되었다. 인간은 시간 속에 있고, 과거에서 벗어날 수도 기댈 수도 없고, 오로지 미래로만 열려 있기 때문에 미래를 향해서만 자신을 투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간에 대한 주체적 경험 내용 자체를 시간의 성격이라고 볼 수 있을까? 우리의 경험을 거치지 않은 시간 그 자체를 생각해볼 수는 없을까? 주관적 요소를 가능한 제거하지만 경험과의 연관은 유지하고, 시간 그 자체의 존재성을 최대화할 수 있는 형태의 개념화를 시도하는 것, 이것이 대체로 과학이 취하는 시간에 대한 접근 방식이다.

이제 이 글에서 살펴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인간의 이러한 시간의식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마련되는가.
  • 인간은 시간 안에서 생존을 위해 어떻게 시간개념을 다듬어 나갔는가.
  • 시간의 측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 상대성이론에서는 우리의 시간개념을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가.
  • 이러한 시간의식이 인간의 주체성 형성과 어떠한 관련을 갖는가.
  • 인간은 ‘시간성’이라는 숙명의 과제를 넘어서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가.

2. 인간의 시간의식

시간은 사물을 인식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관념의 틀을 이룬다는 것이 시간에 대한 칸트의 인식론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 틀이 어떻게 얻어지고 어떻게 변형되어 나가는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다른 모든 관념과 마찬가지로 시간관념도 인간의 신경생리학적 인식기구에 의한 지적 구성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지적활동이 전개됨에 따라 변천될 수 밖에 없다.

칸트는 사람이 다섯 가지 감각을 가진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감각과 연계하여 시간을 직접 감지할 수 있는 독자적 감각기구가 존재하는지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의 의식기구 안에 컴퓨터 속의 시계같은 것이 있어서 시간의 흐름을 측정하고 있을까? 칸트처럼 외적 경험과 무관하게 우리의 시간 의식이 조건지어진다고 보면 우리 안에 어떤 기구가 있어서 시간을 측정하는 기능을 담당한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는 귀가 바로 시간을 감지하는 감각기관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 기관이 집중도나 피로도처럼 사람의 신체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하였다. 우리의 몸에 특정한 생체 리듬이 있기는 하지만 그와 관련된 시간감각도 지닌다고는 대부분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이 원초적으로 시간 그 자체를 감지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오늘날 대체로 합의되고 있다. “우리의 직접경험은 언제나 현재의 것이며 우리의 시간관념은 이러한 경험에 대한 반사적 성찰에서 오는 것”이다.(책 p.143) 인간 이외의 동물들이나 원시사회에서는 시간관념이 없거나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다.

우리는 현재 일에 집중할 때 그리고 재미있을 때 시간을 거의 의식하지 않거나 짧게 느낀다. 또한 과거의 경험이나 앞으로의 기대에 지금의 상황을 연관시킬 때 시간의 지속(duration)을 느낀다. 그리고 상황들 사이의 간격을 의식할수록 시간을 길게 느낀다. 또한 연령에 따라서도 시간의 흐름을 다르게 느낀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생체리듬의 빠르고 느림이 시간의식의 바탕이 되는 감지기구들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공간개념에 대한 지각과 비교함으로써 시간개념에 대한 지각을 좀 더 분명히 살펴볼 수 있다. 공간에 대한 의식은 움직임에 대해 즉각적인 반사작용으로 지각되지만, 시간을 의식하는 데에는 더 많은 사고 단계가 필요하다. 공간 안에 놓인 물체까지의 거리나 크기 등의 정보는 모든 동물들의 생존에 필수적이며, 이러한 공간의식은 시각적인 지각을 통해 쉽게 이루어진다.

이와 달리 시간은 더 복잡하다. 우선 시각적인 지각을 통해 바로 시간을 의식할 수는 없다.  19세기 심리학자 구요(M. J. Guyau)는 “인간의 시간개념은 시간적 서열에 대한 원초적 파악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욕구와 만족 사이의 반복적인 연계를 경험하는 가운데 얻어진다”고 주장했다.(책 p.144) 욕구로 촉발된 의식작용이 끊임없이 미래지향적인 행위로 연결되며, 이러한 미래지향성을 기억 속에 담을 수 있기 때문에 시간개념이 결정적으로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리해보면, 우리는 시간경험을 관장하는 특수한 기관을 통해 시간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적인 시간감각은 여러 다양한 과정을 통해 입수된 정보가 두뇌 안에서 구성되고 저장되면서 얻어진다. 시간감각은 지적 구조물이다. 시간개념은 우리 몸의 상태, 주변 상황, 문화적인 상황에 의존하며, 공간개념보다 한층 더 높은 지적 작업에 의해 이루어진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공간개념보다 더 늦게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현상을 직접 지각하는 공간개념과 달리, 받아들인 현상적 지각에 대해 이차적인 지적 작업을 수행하는 데 시간개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3. 시간에 대한 적재적 관점과 공백적 관점

“인간이 시간의식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곧 인간이 주체적 삶의 영위자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책 p.145-146) 인간이 주체적으로 미래의 일을 결정해나가기 위해서는 미래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즉 미래에 대한 예측가능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나의 행위 유무, 행위의 내용에 따라 미래가 어떻게 바뀔 것인가? 내가 원하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은 다시 시간의 성격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초기 인류는 시간과 계절변화를 뚜렷하게 구분하지 않고 경험했다. 시간의 개념 안에 우주적 변화의 계기가 담겨 있었고, 이에 잘 순응하는 것이 중요한 삶의 지혜였다. 신성한 우주적 변화에 순응하는 행위로서 의식(儀式) 행위를 했는데 이는 적정한 시간에 수행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이들의 사고체계에서는 사건이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사건을 불러일으킨다고 대체로 보았다.

시간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최근까지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동서양의 어느 문명이나 근대과학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시간의 본질 안에 이미 길흉화복의 성향이 들어있다고 보았다. 11세기경 중국 소옹이 집대성했다고 전해지는 <원회운세설>(元會運歲說)이 바로 그 예이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문명권 일부에서는 시간 속의 성향을 체계화하여 이러한 거대한 이론체계를 만들었다.

원회운세설은 “기본적으로 천체의 운동에 따른 시간의 자연단위 곧 년, 월, 일 사이의 관계를 일반화한 체계”이다.(자세한 설명은 책 p.147 참조) 여기서 설정된 시간 단위는 편의상 구획한 것이 아니라 각각이 개체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유기적 실체이다.  각 시간단위가 천지나 만물의 수명과 실제로 대응되며, 생성과 소멸에 관련된 부분들을 지배하는 요인이 된다고 본다.

이와 같이 시간 자체 안에 여러 가지 성질이 포함되어 있어서 각 시점들의 성질이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다고 보는 관점을 시간에 대한 적재적(積載的) 관점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많은 문명권에서 많은 사람들이 취해온 관점이며 지금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

그와는 달리 시간을 균일한 빈 그릇처럼 보는 관점이 있는데 이를 시간에 대한 공백적(空白的) 관점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근대 자연과학이 취하는 관점이 대체로 공백적 관점이다. “시간은 현상 아래 놓여있는 빈 그릇과 같아서 어떤 내용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경과만을 나타내는 일종의 연속적인 파라미터와 같다”(책 p.147-148)는 생각이 이 관점에 깔려 있다. 시간의 어느 시점도 다른 어느 시점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즉 시간 자체가 균질한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다.

시간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관점 중에서 우리는 어느 쪽을 취해야 할까? 현대과학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시간의 공백성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현대과학에서는 하나의 실수축에 시간을 대응시키고 연속적인 변수로 삼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는 중력 효과가 시공간에 일종의 적재성을 가져오는 듯한 측면이 있지만, 이것은 주변의 물질 분포로 인한 상황적 적재성이라고 볼 수 있으며 시간의 본질적 적재성은 아니다.

시간에 대한 적재적 관점은 지금까지 여러 문명권에서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 이는 현상에 대한 인과관계 파악이 잘못되었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서 편의성은 월등히 높다. 예를 들어 계절 변화를 천체들의 주기적 운동때문이라고 보고 천체들의 위치와 계절현상의 관계를 일일이 계산해서 기후를 예상하려고 한다면 엄청나게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반대로 특정한 시기는 그 시기 자체의 특성이 있어서 특정한 계절현상이 나타난다고 보면 아주 간편하다.

그러나 실용적인 측면을 넘어서 시간 자체의 본질적인 성격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시간의 적재적 관점을 취할 경우 달을 제거해버려도 시간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우리에게 그런 능력은 없지만 대신 시간에 대한 각종 미신이 생길 것이다. 특히 동양에서는 연월일시(年月日時)마다 그 성격을 규정해 놓은 간지(干支)가 있어서 이와 결부된 수많은 미신들이 있다. 무엇 무엇을 하기 좋은 날이 있고 나쁜 날이 있고, 각각의 해에 특별한 띠가 있어서 어느 해에는 출산하기 좋지 않다고 규정한 해도 있어서 피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시간의 적재성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사람의 운명을 예측할 수 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사주점’이 그 대표적인 예다. 사주란 사람이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 어느 시에 태어났는가 하는 네 가지 데이터를 간지에 따라 표현한 것이다. ‘사주를 본다’는 것은 사주에 따라 어떤 사람이 타고난 신수, 즉 운명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한 사람의 운명이 태어나는 순간에 결정되며, 같은 사주를 가진 사람은 같은 운명을 지닌다는 말이 된다.

사주가 다르다는 것은 지구에 대해 해와 달의 상대적 위치가 조금씩 다른 것에 불과하다. 이 위치가 다른 것이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고 우리 몸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없다. 그런데 아직도 시간에 대한 적재적 관점에 따른 여러 관행들이 이루어지고 이유는 심리적 안정을 주는 것과 같이 나름의 사회적 효용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술의 역기능에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근거 없는 맹신은 우리의 운명을 이른바 ‘사주팔자’의 탓으로 돌리는 숙명론의 원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미래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시간의 적재적 관점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공백적 관점을 전제로, 시간변수를 파라미터로 하여 신뢰할 수 있는 변화의 법칙을 구축할 수 있다.

우리가 현재의 상황을 알고 상황변화의 법칙을 알 수 있다면 이를 통해 미래의 상황도 산출해낼 수 있다. 천체의 운동을 예측하는 것이 바로 그렇다. 천체들의 현재 위치와 속도를 알고 이 속도가 앞으로 어떻게 변하는지에 대한 기본법칙을 알면 천체들의 위치를 수백 년, 수천 년 후까지도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우주 내 모든 대상과 모든 운동을 완전하게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양자이론의 입장에서는 원자 규모의 작은 대상에 대해 이러한 방식의 서술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현재 ‘상태’에 대한 관측을 해내고 ‘상태변화’의 법칙을 적용하면 미래의 ‘상태’를 산출해낼 수 있으며, 이 ‘상태’로부터 이것이 일으키게 될 관측가능한 ‘사건’들에 대한 최소한의 확률적 예측을 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와 같은 예측은 본질적 이해와 깊은 관련을 가진다는 것이다. 시간에 대한 적재적 관점이 실용적인 측면에서 많은 도움을 주지만, 현상을 정교하고 치밀하게 서술하고 신뢰할 수 있는 예측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의 공백적 성격을 전제해야 한다. 따라서 시간개념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고, 측정 방식을 정밀하게 만들고,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하학적 구조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를 해나가야 한다.

4. 시간의 서술 및 측정 문제

미래에 대해 적정하게 예측을 하고 대처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서술하고 측정해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달력과 시계가 그 대표적인 장치라고 할 수 있다. 태양과 달의 위치를 한 해와 한 달 안의 날짜 형태로 만들어 각각의 날을 파악하게 해주는 장치가 달력이다. 시계는 하루 안에서 특정한 시각을 알려주고 또한 두 시점 사이의 간격을 측정할 수 있게 해준다.

“원칙적으로 우리는 하나의 보편적인 우주시간 안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책 p.152) 우주시간의 흐름을 하나의 기준에 따라 나타내고 인간사를 이 기준에 맞추어 서술할 수 있는데, 세계 표준시간이 바로 그러한 기준의 하나다. 표준시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준이 되는 표준시계를 하나 설정해야 한다. 그 다음 기점과 단위를 정해서, 표준시간이 지시하는 시간을 하나의 실수축에 대응시킨다. 이렇게 하면 지구를 포함한 주변 천체들의 운동 등 모든 사건들의 발생시각이 이 시간 축 위의 점들 위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이상적인 시간기준이 처음부터 설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진전됨에 따라 조금씩 만들어질 수 밖에 없다. 근대적인 표준시계가 등장하기 전까지 가장 중요한 시간 표준은 지구의 자전주기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하루를 24시간, 한 시간을 60분, 일분을 60초로 설정하고 1초를 시간의 기본단위로 사용해왔다.

1초는 하루, 즉 태양이 남중하는 시각부터 다음 남중하는 시각까지의 시간간격을 86,400(24×60×60)으로 나눈 것이다. 그런데 하루의 길이는 계절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래서 1957년에는 1년에 대해 평균한 ‘평균 태양일’을 하루로 삼았다. 이것도 일정치 않아 1967년에는  지구의 공전주기로 새 시간기준을 만들었다.

1976년에는 시간 기준에 획기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다. 기존에 사용하던 천체 운동주기에서 원자의 진동주기로 기준을 바꾼 것이다. 이 기준은 1초를 “세슘 133원자(133Cs)의 바닥 상태에 있는 두 초미세 준위간의 전이에 대응하는 복사선의 9,192,631,770주기의 지속시간”으로 규정한다.(책 p.153)

여기서 우리는 시간기준 설정과 관련하여 아주 기본적인 질문을 할 수 있다. 어떤 주기적 현상에 대한 신뢰성 문제이다. 특정한 주기적 현상이 다른 것보다 더 신뢰할만한 주기성을 지녔는지 우리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무엇을 근거로 한 쪽의 주기성이 다른 쪽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원자시계를 기준으로 보면 천체의 운동이 주기적이지 않게 되고, 천체의 운동주기를 기준으로 보면 이제는 반대로 원자의 진동이 주기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두 가지 방향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다양한 주기적인 현상들을 비교해서 상대적인 차이가 가장 작은 것의 신뢰가 가장 높다고 보는 방식이다. 그러나 처음에 어떤 것을 주기현상으로 볼 것인가하는 문제가 있고, 또 여러 주기현상을 모두 일일이 비교해보아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좀 더 신뢰할만한 방법은 과학이론을 이용하는 것이다. 시간변수를 포함하고 신뢰할 수 있는 과학이론을 우리가 가졌다고 할 때, 이 이론을 이용하여 가장 주기성이 높은 현상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시간의 기준을 미리 정해 놓아야 하고 이론 자체를 검증해야하기 때문에 순환논리의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 순환은 완전 순환이 아니라 발전적 순환이다.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발전해가는 순환이기 때문에 더 나은 이론으로 수렴해가는 유용한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과학이론에 의하면 원자의 운동주기가 천체의 운동주기보다 더 정확한 주기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원자시간기준을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표준적인 정교한 시간측정장치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세계표준시간의 기점과 그 표현양식에 있어서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역사적, 실용적인 이유때문에 그렇다. 현재 가장 널리 채용하고 있는 시간 기점은 서력 기원 원점, 즉 기원 원년(1년) 1월 1일 0시 0분 0초이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시, 분, 초는 기점이 0인데 연, 월, 일은 기점이 1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시, 분, 초는 실수체계를 따르는데 연, 월, 일은 자연수체계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른 혼란의 한 예가 한 세기를 나누는 기준이다. 한 세기의 끝은 00년 말에 끝난다. 역사 기록 속에서 −1년(기원전 1년)과 +1년(기원 후 1년)은 존재하지만 0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기원 원년을 전후한 햇수를 세는 데 혼란이 있을 수 있다. 지금 바꿀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지금까지 사용했던 기원전 햇수 표기 전부를 바꾸어야 하고, 기원전 1년이 기원 원년으로 바뀌게 된다는 문제가 있다.

달력을 만드는 데 있어서 발생하는 현실적인 문제는 위의 문제보다 훨씬 더 어렵다. 태양과 달의 움직임, 지구의 자전주기 등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기준이다. 이들의 움직임을 시간의 축 위에 적절하게 배열해야 하는데, 이러한 세 가지의 시간 단위는 서로 정수 배로 맞아떨어지지 않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주기성도 변하기 때문에 고정된 달력으로 만들기 매우 어렵다.

그래서 인류는 이러한 문제를 조정하기 위해 어려운 작업들을 수행해왔고, 결국 달력 속에는 천체 운동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다양한 역사적 측면도 함께 녹아들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에 불합리해보이는 점들이 섞여있는 이유가 바로 달력이 역사의 한 산물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5. 상대성이론에서의 시간

* 상대성이론에서의 시간에 대해서는 근년에 출간된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2019, 추수밭)의 제 3장을 참조해주세요. 이 글 후반부 내용 이해를 위해 5절의 마지막 단락만 가져왔습니다.

“시간공간의 성격에 대해 상대성이론이 말해주는 이러한 사실들은 더 이상 우리의 단순한 직관을 통해서는 접근할 수 없는 정교한 수학적 구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당연히 우리는 여기서 시간과 공간이 왜 하필 이러한 수학적 구조를 이루게 되는가 하는 의문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대답할 만큼 우리가 자연과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에 접근해 있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시공간의 개념이 우리의 정교한 지적 구성물이면서도 동시에 이를 통해 우리의 우주를 놀랄 만큼 선명히 들여다볼 수 있는 오묘한 성격을 지녔다는 것이다.”(책 p.162)

6. 인간과 시간

우리는 지금까지 시간의 관념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살펴보았다. 시간은 인간의 의식 속에서 형성될 뿐만 아니라 복잡 다단한 지적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정교해진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을 통해 시간 관념이 창출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임의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우주적 실재를 더 정교하게 이해해가면서 마련된 것이 시간 관념이며, 바로 그러할 때 유용한 관념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시간관념이 우리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이 다시 이 시간 속에 존재한다고 하는, 모순되는 듯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마치 자신이 보고 있는 거울을 잘 다듬는 일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시간 개념을 더 분명하게 다듬어 자신이 놓인 상황을 더 선명하게 밝히는 일인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거울 안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주체적으로 의식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실체임을 확인하는 일”이다.(책 p.163)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시간이라고 하는 거울’이 밖으로는 세계를 비추고 안으로는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파악하는 거울이 되는 이중기능’을 지닌다는 것이다.  밖의 세계를 비추는 거울, 즉 자연법칙을 바로 이해하는 거울로서의 시간개념은 앞에서 다루었다. 이제 안을 비추는 거울, 즉 인간의 주체성 그 자체를 파악하는 거울로서의 시간 개념을 살펴보자.

우리는 주체성, 즉 자기주체성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시간에 대한 의식이 없어도 과거에 경험한 것들을 담을 그릇을 만들 수 있을까? 만일 우리가 경험한 사실들과 연관된 시간정보, 즉 발생한 사건들의 선후관계에 대한 정보가 없다면 기억한 내용이 있다해도 이들의 선후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자신의 경험을 주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시간 의식이 반드시 필요하며, 그래야 경험적 연계를 통해 자기 정체성에 이를 수 있다.

인간의 자아의식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우리는 아직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자아의식이 출현하기 위해서는 시간의식을 축으로 과거의 경험을 정리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자신의 의지대로 미래 행위에 연계시킬 수 있는 지적활동이 필요하다. 자기정체성이라는 것이 바로 이러한 지적 활동의 내적 의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의 자아의식은 인간의 시간의식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에 틀림없으며 따라서 시간에 대한 의식적 파악은 틀림없이 인간의 주체성을 확보하는 불가결한 요건이 되고 있다.” (책 p.164)

한편 시간의식을 통해 자기정체성을 획득하게 된 인간은 ‘주체적 삶의 영위자’가 되며, 이에 따라 인간에게는 두 가지 문제가 동시에 부여된다. 첫째, 허용된 시간 안에서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결정해나가야 한다. 둘째, 허용되지 않는 시간에 대해서는 그 한계를 수용해야 한다. 전자가 삶의 문제이고 후자가 죽음의 문제이다.

생존본능은 모든 생물들이 가지고 있지만 생존의 본질적인 한계를 의식하고 이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존재는 인간 뿐이다. 문명이 시작되면서 함께 발생한 이 현상은 역사적으로 문명권에 따라 다양하게 추구되어왔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후 세계에 대한 바람, 시간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시도 등이다. 사후 세계를 믿고자 하는 쪽에서는 사후를 위해 준비하기를 권장하고, 시간의 굴레를 벗으려는 쪽은 시간이 끊임없이 회귀하는 순환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고 일회적 종말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유한한 시간간격이지만 그 안에서 주체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생존 기회가 인간에게 확실하게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시간을 연장하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초시간적인 가치를 구현해내기 위해 이 소중한 삶의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관심을 기울이는 편이 훨씬 더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시간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소중한 선물이며, 이것이 지닌 가치는 그 물리적 길이로만 판정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책 p.165)


* 이 글은 장회익선생님의 다음 글을 요약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녹색아카데미에서는 새자연철학세미나 등 모임 진행에 맞추어 장회익선생님의 책, 논문, 칼럼, 강연 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요약한 것이오니, 원문은 아래 세부사항을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시간”. 장회익. 2002. <우리말 철학사전> 우리사상연구소 엮음. 지식산업사. pp.137-165.

요약, 정리 : 황승미 (녹색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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