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메타과학』 – 2장. 지식 진화와 학문의 전개 양식


녹색아카데미에서는 웹진을 통해 장회익선생님의 글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녹색아카데미에서 진행하는 자연철학세미나의 주제에 맞추어 관련된 책, 논문, 칼럼과 강연 등을 찾아 알리고 내용을 요약해 이곳에서 읽고 보실 수 있게 할 계획입니다.

오늘은 『과학과 메타과학』(2012, 현암사) 시리즈 세 번째이며, “2장. 지식 진화와 학문의 전개 양식”을 정리해보았습니다. 2장에서는 과학 지식 자체가 어떻게 발전되어 가는지, 지식 진화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통합학문의 가능성을 탐색합니다.

먼저 생명 진화의 메커니즘이 지식 진화 과정에 적용될 수 있을지,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 살펴봅니다. 그리고 현재 고도로 분화되고 전문화된 과학 지식이 진화론적 관점에서 어떤 문제가 있는지 보고, 이러한 과학 지식이 현대 문명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지, 이들을 통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 등을 고찰합니다.

(대문 그림 : 천하전여총도. 그림 4의 설명 참조)


1. 여는 말

『과학과 메타과학』의 2장에서는 지식 진화의 관점에서 과학 지식 자체가 어떻게 발전되어가는지 살펴봅니다. 앞장(1장)에서는 연구자가 과학 연구를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규범적 측면)와 실제 연구자들이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가(현실적 측면)를 고찰했는데, 이는 인간의 활동을 중심으로 본 것입니다.

동일한 내용을 인간 활동 중심으로 보는가, 지식 자체를 중심으로 보는가의 차이이며, 두 시각을 모두 살펴봄으로써 각각의 부족한 지점을 상호보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과학 지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해가는가를 지식 진화의 관점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진화 개념은 원래 생명 현상의 변화 메커니즘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메커니즘을 생명에 국한해서만 쓸 필요는 없습니다. 진화는 “변이 가능한 자체촉매적(auto-catalytic) 작용체가 주변 보작용자의 여건에 맞추어 시간에 따라 그 형태와 개체군에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보편적 메커니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책 p.46).

따라서 과학 지식의 발전도 진화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지식도 고정된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 안의 다양한 현상들처럼 역사의 진행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고 성장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의 발전을 진화 메커니즘으로 보는 시도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이미 많은 노력이 있어 왔습니다.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 1902-1994)는 그의 저서 『객관적 지식』(Objective Knowledge)에 ‘진화론적 접근'(An Evolutionary Approach)라는 부제를 붙이고, 진화론적 발전 과정 속에서 지식 자체를 이해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포퍼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경우 지식 발전의 개략적인 형태를 진화론적 관념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데 그쳤습니다. 여기서는 “지식 진화 과정을 생물 진화 과정과 일대일로 대비시켜 상응하는 개념들을 구체적으로 검토“할 것입니다(책 p.46).

2. 생물 진화와 지식 진화

지식의 발전 과정을 생물 진화에 대비해보기 위해 생물 진화 이론의 핵심 내용을 먼저 검토해보겠습니다. 진화론의 내용이 방대하므로 여기서는 현대 진화 사상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콘래드 워딩턴(C. H. Waddington. 1905-1975)의 견해에 따라 논의를 진행하였습니다.

생물 진화 이론은 다윈 이후 여러 차례 크고 작은 발전 과정을 거쳐왔지만, 그 이론의 핵심은 “각 개체들이 어떤 불규칙적인 변이(random variation)를 겪게 되며 이 변이는 생물체를 통해 외형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유전을 통해 후대에 전해지기도 한다 … 이러한 변이가 생존에 유리하게 나타나는 경우에 그 변이를 지닌 개체 및 그 후손이 적자로 살아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규칙적인 변이가 어떻게 후대로 전달되는지 다윈 당시에는 알려진 바가 없었습니다. 이후 멘델의 유전법칙이 나오고 돌연변이(mutation)에 대한 수학적 이론이 형성되었고, 1930년경에는 “진화 현상을 대체로 우연에 의한 돌연변이와 필연적인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라는 두 가지 과정이 반복되면서 진행되는 현상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책 p.48).

그 후에도 진화 이론은 계속 진전되어, 진화 과정이 단순히 ‘우연과 필연'(chance and necessity)의 반복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복잡한 과정이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 중 중요한 두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먼저 유전자에 대한 것입니다. 한 생물의 개체군(population) 내에는 유전자들이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를까요? 종래에는 일부 예외가 있을뿐 거의 동일한 유전자를 가지는 개체들이 개체군을 이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의 유전학자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Theodosius Dobzhansky. 1900-1975)가 실험과 현장 연구를 통해 그렇지 않음을 밝혀냈습니다. 한 생물종의 개체군 내에는 서로 조금씩 다른 유전자들이 이미 무수하게 섞여 있었던 것입니다.

종래에는 변화에 알맞은 돌연변이가 우연히 나타남으로써 진화적 변이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변화에 적합한 변형 유전자를 그 개체군 내의 개체들이 이미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선택 과정에 의해 변형된 유전자를 가진 개체들이 선발돼 나옴으로써 돌연변이가 출현합니다.

(2) 또 한 가지 중요한 진화 이론의 진전은, 돌연변이는 유전자(gene)를 통해 발생하지만 자연선택은 유전자 자체가 아니라 그 유전자를 지니고 있는 생물체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유전에 의해서 전해지는 유전형(genotype)과 자연선택에 의해서 선별되는 표현형(phenotype) 사이에는 하나의 단순한 대응 관계가 성립하지 않으며, 유전형, 표현형 그리고 환경의 삼자 사이에 복잡한 상관관계가 형성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 1] 표현형(phenotype)과 유전형(genotype). 같은 보라색 꽃이어도 유전자가 다를 수 있다. (출처 : bioolgydictionary.net)

생물 진화 이론을 살펴보았으니, 이제 이 이론을 지식 진화 과정에 적용시켜 과학적 지식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하려면 어떠한 요건들이 필요한 지 찾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생물 진화 이론이 지식 발달 과정에 적용될 수 있을지 고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의 논의를 다시 되새겨 봅시다. “유전에 의해 보전되고 돌연변이에 의해 변화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유전형”과 “외형적으로 나타나고 자연선택 과정에 의해 선발될 수 있는 어떤 형태의 표현형”만 정의될 수 있다면 진화 현상은 그 대상이 생물체건 아니건 상관없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책 p.49).

따라서 우리가 고찰하고자 하는 대상, 여기서는 과학적 지식에 대해 유전형과 표현형에 해당하는 개념들만 명백히 규정하면 자동적으로 진화 이론을 적용할 수 있게 됩니다.

3. 진화의 관점에서 보는 과학 지식

과학적 지식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진화론적 개념들, 즉 유전형과 표현형이 어떻게 설정될 수 있는지 고찰해보겠습니다. 우선 논의의 편의를 위해 과학적 지식의 내용을 이루는 모든 것을 ‘이론’이라 통틀어 부르기로 하고 이 ‘이론’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인정하기로 합니다.

이것은 포퍼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우리 인간이 정신 활동을 수행해 ‘이론’을 만들어내지만, 그 이후에는 이론을 만들어낸 당사자나 과정과 상관없이 해당 ‘이론’을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론’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필요합니다. 생명체들이 주변 환경 속에서만 생존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론’ 자체는 추상적인 것입니다. 외형적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언어로 표현된 구체적인 논문이나 저서 등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식 진화 이론을 고찰하기 위해 유전형과 표현형을 설정하는 데에는 두 가지 다른 관점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생물 진화에서 유전형인 유전자 기록을 문화 진화에서의 언어적 기록과 유사하게 보는 관점입니다. 과학 진화를 문화 진화 혹은 생물 진화의 연장선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여기서 유전형에 해당하는 것은 “과학적 지식에 관해 언어적으로 표현된 모든 기록”이며, 표현형은 “그 내용을 인간이 판독하여 이를 생활 속에서 나타낸 모든 결과들”입니다(책 p.51).

둘째는 인간의 정신 활동을, 과학 지식의 자연선택을 담당하는 환경 여건으로 여기는 관점입니다. 여기서 유전형은 ‘이론’ 자체이며, 표현형은 “그 이론을 외형적으로 나타낸 각종 표현 형태들”입니다(책 p.51).

여기서는 두 번째 관점을 취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과학 발전 자체를 주체로 보고, 이것이 인간 활동이라는 매개를 통해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보아 그 바람직한 발전 방향을 모색”하려고 하기 때문에 두 번째 관점이 더 적합합니다.

다시 정리해보면, ‘이론’은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지식의 진화 과정에서 이 ‘이론’이 유전형의 역할을 하며, 인간활동에 의해 ‘이론’이라는 유전형이 문헌 등 여러 표현 장치를 통해 외형적 형태를 가지게 되는데 이것이 표현형입니다.

이 표현형들은 인간의 학문 활동을 통해 끊임없이 검토받으며 생존 여부가 결정되고, 우리는 이것을 지식의 “진화론적 자연선택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학적 지식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돌연변이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 역할은 무엇일까요? 과학 이론이 어느 개인에게 전수되는 경우 스스로 이해한 후에 그 이론을 새로운 표현형으로 재생하게 되는데, 이때 해당 이론이 크게 달라진다면 이것을 돌연변이에 비교될 수 있습니다.

전수된 이론은 상당수 왜곡되거나, 의미 있는 표현형 즉 책이나 논문으로 재생되지 못하거나, 재생되었다 해도 곧 존재 가치를 잃고 사장될 수 있습니다. 혹은 당시의 학문 풍토 등 환경 여건에 의해 강한 선택 압력이 작동해 학문적 적자(適者)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변종으로서 더 좋은 여건이 마련될 때까지 잠재하거나 다른 경쟁 이론들과 공존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쿤(Thomas Kuhn. 1922-1996)의 ‘과학혁명의 구조’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쿤에 의하면 과학혁명은 위대한 발견이나 천재적인 이론에 의해서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기존의 패러다임과 공존하다가 결국 더 우세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일종의 게슈탈트 변환이 일어나고 그를 통해 과학혁명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새로운 ‘이론’은 새로운 표현형이고 기존의 ‘이론’은 기존의 지배적인 표현형이 됩니다. 이 두 가지 표현형이 서로 공존, 양립하다가 어느 시기에 이르러서는 선택압력에 의해 더 우수한 새로운 표현형이 우세한 패러다임이 되어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게 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4. 학문 간 분화와 통합 문제

지식 진화론적인 입장에서 살펴본 현대 학문 특히 현대 과학의 상황

현대 과학은 지금 각 전문 분야로 나뉘어 거의 완벽하게 격리되어 있습니다. 진화 과정에서의 선택압력이 과도하게 전문화 방향으로 기울어져 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학 발전을 지식 축적과 이해 증진이라는 두 가지 측면으로 볼 때, 이러한 전문화 경향은 후자보다는 전자, 즉 지식 축적을 위한 것이며 즉각적으로 응용할 수 있는 과학을 추구하다보니 생겨난 결과라고 봅니다.

지식 축적과 응용 가능성만 도모하고, 그에 상응하는 이해 증진은 소홀히 할 경우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가 따릅니다.

첫째, 과학 자체가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축소됩니다. 앞서 살펴 보았듯이, 과학 진화 과정이 발전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다양한 유전자 풀(pool)이 필요합니다. 그 속에서 환경의 압력에 따라 새로운 변종이 결합되고 선발되는 과정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유전형들이 너무 전문화되면 풀의 다양성도 유전자들의 결합 가능성도 감소하게 됩니다.

둘째, 과도하게 전문화됨으로써 학문 간의 균형 잡힌 발전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미 불균형인 상태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여러 학문 분야는 당시의 상황에 따라 발전의 속도가 빠르거나 늦을 수 있는데, 전문화가 강해지면 학문들간의 격차가 더 커져 불균형이 심화됩니다. 특정한 방향으로 발전한 학문은 현실 세계를 왜곡하여 우리에게 전달할 수 있으며, 이는 우리의 삶의 방식뿐만 아니라 문명의 향방까지 잘못 이끌 수 있습니다.

학문의 장기적이고 균형 잡힌 발전을 위해 필요한 일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과학 지식 진화 과정에서의 선택 압력을 가능한 한 보편화 방향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현재의 과도한 전문화 방향을 수정할 수 있을까요?

과학 진화 과정에서 자연선택을 수행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 활동이고 자연선택은 각종 문헌 같은 표현물(과학 지식의 표현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 지식이 드러나는 각종 표현물이 새로운 방향으로 향할 수 있도록 선택압력을 행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이러한 선택압력을 조정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현대 학문에서 대표적인 표현형이라고 할 수 있는 학술지의 성격을 먼저 고찰해보겠습니다.

첫째, 학술지들은 대부분 매우 좁은 전문 분야를 다루며 게재 대상도 매우 한정되어 있습니다. 최근에는 학문 간(interdisciplinary) 연구를 대상으로 하는 학술지들도 소수 생겨나고 있지만 일반적인 학술지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둘째, 전문적인 학술지들이 중요하게 삼고 있는 논문 심사 기준은 이해 증진보다 새 지식을 발굴하는 것입니다. 이들 학술지는 신빙성이 우려되는 연구에 대해서 강력한 규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규제는 학술지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전문화 경향을 강화하고 학문의 폭을 좁히는 방식으로 작동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어느 분야든 전문가 외에는 읽고 해독하는 것이 불가능할만큼 학술지의 표현 방식이 전문화되었습니다. 내용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중복을 피하고 학술지의 분량도 조정해야하는 등 현실적인 이유가 있지만, 학문을 더욱 전문화되는 방향으로 이끄는 중요한 이유가 바로 과도하게 전문화된 표현방식 때문입니다.

학술지뿐만 아니라 교육 제도, 전문성을 중시하는 취업 제도와 문화 등도 학문을 전문화의 방향으로 이끄는 선택압력 요소입니다. 그러나 학문이 전문화되는 현상이 사회적 제도, 사회적 여건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현대의 학문은 그 특성상 전문화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오늘날의 학문은 그 규모가 커져 한 사람의 학자가 다룰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설혹 어떤 특출한 학자가 학문 세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지적 역량을 지녔다 하더라도 그 전체를 통합해 그려낼 현실적인 방법이 없으며, 이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지적 역량은 협동 작업이나 인공지능을 이용할 수도 있지만, 통합할 방법이 없다면 역량이 있어도 통합해낼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학문의 구조 자체가 과연 정합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통합적인 전체를 이루어낼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학문의 영역 사이에는 메우기 어려운 괴리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설혹 인접한 학문들 사이에서 이를 어렵사리 봉합해낸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엮인 전체 학문이 과연 하나의 유기적 틀 안에서 정합적 체계를 이루어낼 수 있을지 도무지 가늠하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책 p.57)

오늘날 우리의 문명은 과연 지속될 수 있을지 매우 걱정스러운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문이 앞을 내다볼 수 있게 해주어야 할 텐데, 우리는 오히려 학문의 도구로 전락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채 이끌려 가고 있는 형국입니다. 어떻게 해야 학문에게 제 역할을 찾아줄 수 있을까요?

5. 통합학문의 가능성

통합 학문을 위해 우리가 해야할 일은?

현재 우리가 해야할 일은 “기왕에 알고 있는 지식들을 전부 결합하여 지식 전체를 하나의 틀 속에 묶어”보는 작업입니다. 이는 한 장의 종이 위에 세계 각 지역의 지도들을 결합해 하나의 세계지도를 그려보려고 했던 초기 지도제작자와 비슷한 처지입니다.

[그림 2] 마르텔루스(Henricus Martellus Germanus)의 세계 지도. 독일. 1490년. 베하임의 “에르답펠”과 매우 유사하며 아메리카 대륙은 이 지도에 포함되지 않았다. (출처 : wikipedia)

지도제작자들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모르고 세계 각 지역들의 상대적인 위치를 모른다면 결코 세계지도를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평면 지도를 이어붙이는 것처럼 우리가 가진 지식들을 전부 잘 결합하고 연결하여 봉합하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도제작자가 제대로 된 세계지도를 만들기 위해 지구본이라는 구 모형이 필요하듯이 학문의 대상들을 담아내려면 마땅한 그릇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학문의 대상 자체는 그 구도가 매우 복잡하고 다차원적이어서 이를 모두 담아낼 그릇을 찾아내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림 3] “에르답펠”(Erdapfel; 지구의 사과라는 뜻).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구의. 독일의 마르틴 베하임 제작. 1491-1493년. 이 지구본에는 아직 아메리카 대륙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출처 : wikipedia)

학문의 경우도 지도 제작 과정과 흡사한 면이 있습니다. 하나의 개별 학문의 서술 틀 안에 모든 것을 밀어 넣거나, 여러 학문들 사이의 경계를 그저 봉합한다고 해서 전체 그림이 그려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된 세계지도를 그리기 위해서는 세계가 2차원 평면 위에 놓인 존재가 아님을 알아야 하고, 지구의라는 3차원의 바탕 소재를 마련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통합적인 학문을 시도하기 위해서도 우리가 학문적으로 서술하려는 전체 세계가 지닌 존재 양상을 먼저 확인하고 이에 적절한 바탕 소재를 마련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책 p.60).

“그렇다면 우리가 학문적으로 서술해나가는 전체 세계는 도대체 어떠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를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앎의 기본 구도는 어떠한 것일지 생각해봅시다.

우선 인간의 앎이라는 세계는 어쩌면 지구의와 같은 간단한 기하학적 구조로 표현해내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내재적 구조가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 안에는 앎의 ‘대상’만이 아니라 앎의 ‘주체’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체이면서 대상이 되고, 대상이면서 다시 주체가 되는 이 수수께끼 같은 연결고리를 잘 풀어내지 않는 한 앎의 세계를 하나의 틀로 정연하게 담아내기란 매우 어렵습니다.”(책 p.60) 따라서 우리는 어렵더라도 ‘주체’에 먼저 초점을 두고 이 주체가 세계와 어떻게 관련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논의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물질, 생명, 인간』(2009)에 더 자세히 다루고 있으며, 여기서는 성공적인 학문적 전개를 위해 필요한 지식 진화론적 여건에 대해서만 다루겠습니다.

성공적인 통합 학문을 위해 필요한 지식 진화론적 여건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유럽에서는 콜럼버스가 인도를 찾아 떠날 당시만 해도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몰랐고, 당연히 평면지도에도 지구의에도 아메리카 대륙이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이미 1418년에 아메리카 대륙과 오스트레일리아 등을 포함한 세계 지도가 제작된 바 있었습니다. 그 지도의 이름은 ‘천하제번식공도’입니다(『고지도의 비밀』(2011, 이재훈 옮김, 글항아리).

이 지도가 실제로 전해지지는 않고, 그 지도를 모사해 그렸다고 하는 ‘천하전여총도'(1763)만이 남아 있어 주장의 진위에 대한 의혹은 일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단 이것이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지식 진화의 관점에서 어떻게 볼 것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림 4] 위 그림의 ‘천하전여총도'(1763)는 1418년의 ‘천하제번식공도’를 모사해 그린 지도이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이 드러나 있으며, 당시 유럽에 알려지지 않았던 아메리카 대륙과 오스트레일리아 등 지역도 비교적 정확히 그려져 있다. 출처 : <고지도의 비밀> 류강. 2011. 이재훈 옮김, 정인철 감수. 글항아리. (그림 출처 : khan.co.kr)

지도 제작에서 대지의 기하학적 구조를 지구의라는 3차원의 형태로 삼은 것은 가장 중요한 혁명적 진전이었습니다. 게다가 유럽도 아닌 아시아의 중국에서 이를 알고 지도로 표현해냈다는 것은 인류지성사에서 대단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생명력을 지니지 못하고 사라져버렸습니다. 잠시 존재했던 일종의 돌연변이에 불과했던 것이며, 그 흔적을 이제야 찾아내 과거에 이런 것이 존재했구나하고 확인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우리는, 위대한 발견이나 창조물에 대한 공적을 특정 개인에게 돌리는 것은 공정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등장하자마자 인정을 받고 세상을 놀라게 할 업적이 되려면 당시 사회와 시대가 그것을 알아볼만큼 진전되어 있어야 하며, 해당 업적은 어떤 면에서 뒤늦은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대를 앞서 가는 일은 그것이 성과로 인식되기 어렵습니다.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으므로 그 일을 해낸 사람 외에는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천하제번식공도’같은 표현형은 당시의 지적 여건이 받쳐주지 못했기 때문에 지적 진화를 계속하지 못하고 단종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한 사회에서 지적 도약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몇 사람의 우수한 천재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지적 성숙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 전체의 지적 성숙이 이루어지려면 “다양한 사고의 물줄기를 열어놓고 서로 상호작용하도록 허용”하는 사회적 지적 풍토가 만들어져야 합니다(p.63)

지도 제작 과정을 예로 들자면, 대지의 기하학적 구조를 탐색하는 지적 흐름과 지리적 탐색을 하는 지적 흐름이 공존하면서 서로 활발하게 소통하는 길이 열려있는 풍토가 필요할 것입니다.

따라서 통합학문이 가능하려면, “개별 학문들 안에 갇힌 사고의 유형뿐 아니라 사고의 총체적 구조, 그리고 사고 형성의 주체와 객체 등 메타적 관점에 대한 지적 관심들이 무르익으면서 서로 생산적인 소통이 이루어질 학문적 여건의 조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책 p.63).

6. 맺는 말

지식 진화의 관점에서 학문의 발전을 살펴보면서, 내가 아는 것 혹은 내가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은 나의 사멸과 함께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에 더 긴 수명을 가지려면 사회적 문화적 맥락 안에 자리잡아야 합니다.

지식은 어떤 형태로든 ‘표현된 것’이 되어야 하며, 그 ‘표현된 것’의 사회적 생존력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된 것’이라는 표현형도 물리적으로 생존력이 유한하며 시대가 바뀌면서 시간이 갈수록 해독 가능성이 떨어집니다. 따라서 누군가에 의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거나 개조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학문적 성과를 창조해낸 사람과 이를 받아들이는 학문 사회가 유의해야할 점을 짚어볼 수 있습니다.

먼저 학문적 성과의 창조자는 “자신이 만들어낸 학문적 결실을 자신이 이해하는 정도에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이것이 충분한 생존력을 지닌 ‘표현형’이 되도록 하는 데에도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업적 위주의 현대 사회에서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기는 하지만, 쏟아지는 연구 업적과 출판물 속에서 주목을 받고 생존하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학문 사회가 해야할 일은 “주목받지 못하고 사멸되어버릴 혹은 창조자의 머릿속에 갇혀 미처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는 지적 보물들이 응분의 생존력을 갖도록 제도적 그리고 물질적 여건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에는 특정 학문이 지나치게 전문화되는 경향이나 학문 분야 간 불균형을 바로 잡는 일도 포함될 것입니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는데, 학문의 지적 발전을 위해 우리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야 할 것입니다. “아침에 도를 깨닫고 낮에 이를 기록해두었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그림 5] 공자(왼쪽에서 두 번째)와 노자(맨 왼쪽). 산둥지역의 한 묘에서 발견된 전한 시대(기원전 202-기원후 8년)의 프레스코화. 작자 미상. (출처 : wikipedia)

요약, 정리 : 황승미 (녹색아카데미)


위 내용은 『과학과 메타과학』 2012, 현암사)의 ‘2장. 지식 진화와 학문의 전개 양식(p.45-65)을 요약한 것입니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합니다’체를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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