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과학의 철학적 수용은 어떻게 가능한가? – ‘새 자연철학’을 제안하며 (2)

「현대과학의 철학적 수용은 어떻게 가능한가?」 장회익 2021. 『현대과학과 철학의 대화-적극적 소통을 위한 길 찾기』 한국철학회 엮음. 한울(2021) p.20~55. [이 글은 2021.5.29. 한국철학회 발표자료이며, 저자의 동의를 구하여 이곳에 소개합니다.]

(대문그림 : M. C. Escher. 1951. “Predestination”. 출처 : M. C. Escher Foundation)


현대과학의 철학적 수용은 어떻게 가능한가? – ‘새 자연철학’을 제안하며 (2)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

목차

6. 자체촉매적 국소질서와 이차질서의 형성
7. 생명의 이해: 온생명과 낱생명
8. 객체와 주체
9. 인간의 집합적 주체와 문명
10. ‘뫼비우스의 띠’를 완결시킨다는 것
11. 맺는 말

“현대과학의 철학적 수용은 어떻게 가능한가? – ‘새 자연철학’을 제안하며 (1)” 읽기 바로가기


6. 자체촉매적 국소질서와 이차질서의 형성

여기서 우리는 ‘살아있는 존재’라 불리는 지극히 높은 정교성을 지닌 존재들이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으며 또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중요한 새 개념 곧 ‘자체촉매적 국소질서auto-catalytic local order’라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자신이 ‘촉매’ 역할을 하여 자신과 닮은 새 국소질서가 생겨나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는 국소질서를 의미한다.

일단 이런 성격을 지닌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우연히 하나 만들어지고 나면, (그리고 이것의 기대 수명 안에 이런 국소질서를 적어도 하나 이상 생성하는 데에 기여한다고 하면) 이러한 국소질서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그러다가 이러한 것들을 생성할 소재가 모두 소진되든가 혹은 이들이 놓일 공간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때 비로소 증가가 그치게 되는데, 그때부터는 대략 소멸되는 만큼만 새로 생겨나게 되어 이후 그 수는 대체로 큰 변화 없이 유지된다.

하나의 가상적 사례로 이러한 자체촉매적 국소질서 하나가 지구 위에 나타났다고 생각해 보자. 편의상 이 국소 질서의 크기가 우리가 흔히 보는 미생물 정도라 가정하고 이것의 평균 수명이 대략 3.65일(100분의 1년)이라 생각하자. 그리고 이 수명 안에 평균 2회에 걸쳐 복제가 이루어지고, 주변의 여건으로 인해 개체 수가 대략 10만 개에 이르면 더 이상 증가하지 않고 일정하게 유지된다고 가정하자. 이럴 경우 포화 상태에 이르기까지 대략 17세대(217 = 131,072)를 거치게 되고, 시간은 대략 2개월 정도가 소요된다. 이는 곧 대략 2개월 정도가 지나면 이러한 국소질서가 10만 개 정도로 불어나고 그 후에는 이 정도의 숫자가 지속된다는 의미이다.

최초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 하나가 우연히 생겨나는 일은 쉽지 않다. 물질과 에너지의 흐름과 분포가 어떠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예컨대 100만 년 정도의 시행착오 끝에 우연히 이러한 국소 질서 하나가 형성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위에서 본 바와 같이 2개월 이내에 이러한 것 10만 개 정도가 생겨날 것이고, 이후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면서 거의 무제한의 기간 동안 지속하게 된다.(여기서 거의 무제한의 기간이라고 한 것은 개별 자체촉매적 국소질서의 수명에 대한 상대적 개념이며, 현실적으로는 바탕 질서의 여건 변화에 따라 유한한 기간 이후에는 자체촉매적 기능을 상실하여 소멸될 수 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일단 한 종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발생하여 예컨대 10만 개 정도의 개체군이 형성되면, 이는 새로운 변이가 일어날 수 있는 아주 좋은 토대가 된다는 사실이다. 즉 이들 가운데 하나에서 우연한 변이가 일어나 이보다 한층 높은 정교성을 지닌 새로운 형태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출현할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변이된 새로운 종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나타나 본래의 종과 공존하면서 일종의 변화된 ‘생태계’를 형성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종에 속한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들끼리 결합함으로써 한층 높은 정교성을 지닌 복합적 형태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도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결합체 또한 변이의 일종으로 볼 수 있으며, 새로운 종이 만들어지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된다. 그리하여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리고 생태계가 복잡해짐에 따라 여러 유형의 변이들이 자주 그리고 끊임없이 나타날 수 있으며, 그리하여 점점 더 높은 질서를 지닌 다양한 종들이 출현하게 된다.

이러한 변이과정의 효율성을 실감하기 위해 하나의 변이가 발생하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를 추산해 보자. 우선 한 국소질서 LO1이 순전히 우연에 의해 발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100만 년이라 하자. 그런데 이것이 변이를 일으켜 새로운 종의 국소질서 LO2가 우연에 의해 나타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변이의 모체가 되는 LO1의 개수가 몇이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예를 들어 LO1이 지속적으로 하나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이것이 변이를 일으켜 새로운 종 LO2가 나타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다시 100만 년이라 해보자.

만일 LO1이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아니라면 매 100만 년마다 이것이 한 번씩 출현하여 그 수명 예컨대 3.65일(100분의 1년)만큼 존속하다가 사라진다. 그러니까 매 100만년마다 나타나는 3.65일들이 쌓여 다시 100만년을 이룰 만큼의 긴 시간이 소요된 이후에야 비로소 새로운 종 LO2가 나타나게 된다. 이제 이 시간을 모두 합쳐보면 100조년(1014년)이 된다. 즉 100조년 이후에야 새로운 종 LO2가 나타난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우주가 출현한 이후 지금까지 지나온 전체 시간인 138억년의 7000배에 해당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만일 LO1이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라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위에 제시한 사례에서처럼 이것이 대략 2개월 이후 10만개 정도가 유지된다고 해보자. 그러면 LO1의 개수가 항상 10만개가 있으므로 이를 통해 변종을 일으킬 확률은 한 개만 있을 때의 것에 비해 10만 배로 커질 것이고 따라서 하나의 변종이 출현하는 데에 요구되는 시간은 10만 분의 1로 줄어들 것이다. 이는 곧 100만 년을 10만으로 나눈 값 즉 10년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LO1이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아닐 경우 이러한 질서가 순수한 우연에 의해 나타나는 것은 우리 우주가 7000번이나 되풀이되어야 한 번 나타날 정도의 기적인데,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를 경유할 경우에는 이것이 불과 매 10년마다 나타난다는 이야기다.

이제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출현하여 하나의 개체군을 이루고, 이것이 변이를 일으켜 다시 한 차원 높은 질서를 가진 새로운 개체군을 이루는 과정이 거듭거듭 반복된다고 생각해 보자. 위의 사례가 보여 주듯이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아니었으면 100조 년에 한 번 나타날까 말까 한 기적 같은 질서가 매 10년마다 나타나 지속적으로 축적되어 나간다면, 예를 들어 40억 년 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현상이 가능하며,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 있는 존재’라 부르고 있는, 예컨대 다람쥐, 민들레와 같은, 지극히 정교한 대상들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국소질서 자체만을 중심으로 생각했지만, 이러한 국소질서들이 허공에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오직 ‘바탕질서’ 곧 이를 가능케 하는 배경 물질과 자유에너지의 지속적 공급이 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히 이들이 단순 국소질서에 그치느냐 혹은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되느냐 하는 것은 이 바탕질서를 구성하는 배경 물질과 자유에너지의 공급이 얼마나 풍요로우냐 하는 점과 밀접히 연관된다.

예를 들어 태양-지구계 안에는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존재하지만, 대다수의 다른 항성-행성계 안에는 이러한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가 이제 단순 국소질서들만이 형성되어 있는 (바탕질서 및 국소질서) 체계를 ‘일차질서’라 부르고, 단순 국소질서들에 더하여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들까지 형성되고 있는 (바탕질서 및 국소질서) 체계를 ‘이차질서’라 부르기로 한다면, 대부분의 천체들 안에는 일차질서만 형성되어 있음에 반해 우리 태양-지구계와 같이 극히 예외적인 여건을 갖춘 곳에서만 이차질서가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여건 아래 있는 어떤 국소질서가 형성될 때 이것이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는가? 이 점을 살피기 위해 이를 가능케 하는 아주 간단한 모형 체계 하나를 생각해 봄이 유용하다. <그림 3>에 보인 것이 바로 그러한 모형 체계이다.

<그림 3a>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를 이룰 바탕질서

<그림 3a>는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를 이룰 소재로서의 바탕질서를 표시한 것이다. 이 안에는 다섯 종류의 구성성분들이 풍부하게 마련되어 넓은 공간 안에 흩어져 떠돌고 있다. 그리고 <그림 3b>에 보인 바와 같이 이들 구성성분 가운데 A형과 B형 사이, 그리고 C형과 D형 사이에는 특별한 친화력이 있어서 잠정적인 결합을 가능케 하는 공액共軛관계가 형성된다.

이러한 바탕질서 안에서 우연히 <그림 3c>에 보인 것과 같이 일정한 배열을 지닌 구조물 α와 그것과 공액배열을 지닌 구조물 β가 형성되고 또 약간의 간단한 기능(예: α와 β 사이의 간격 조정)을 지닌 특별한 구조물 γ가 만들어져 이 전체가 높은 정교성을 지닌 하나의 국소질서(준안정 단위 구성체) α∘β∘γ를 이룬다고 생각하자. 만일 이러한 성격의 구성체가 형성되면 이는 <그림 3d>, <그림 3e>, <그림 3f>에 나타난 과정에 따라 자신과 닮은 또 하나의 구조물이 출현하는 데에 결정적 기능을 하게 된다.

<그림 3b> 구성성분들 사이의 공액관계
<그림 3c> 자체촉매적 국소질서의 단위 구성체

위의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그 기능을 수행하고 또 존속되어 나가기 위해서는 그 주변을 구성하는 바탕질서와 정교한 관계가 유지되어 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같은 구조를 가진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라도 이것이 놓인 바탕 질서가 어느 정도 이상 달라지면 자체촉매적 기능을 수행할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다수의 그리고 다종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들이 이루어졌을 경우에는 이들 간의 상호작용 또한 그 기능과 존속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특히 이차질서의 구성 체계는 각종 국소질서들과 바탕질서가 합쳐져서 하나의 정교한 진행형 복합질서 체계를 이루게 된다.

<그림 3d> 성분물질의 흐름 안에 놓임
<그림 3e> 자체촉매 작업의 완료
<그림 3f> 다음 세대 자체촉매 작업 개시

이와 함께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이 진행형 복합질서 안에 자유에너지가 어떻게 공급되고 축적되느냐 하는 점이다. 이 전체를 하나의 독자적 체계로 볼 때, 여기에 어떤 지속적 움직임이 발생한다는 것은 자유에너지가 끊임없이 소모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점점 더 정교한 체계로 진행해나간다는 것은 자유에너지가 그 만큼 더 높은 상태로 바뀌어 나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유에너지는 어떠한 방식으로 충당되는가? 그 해답은 이 전체 체계가 항성-행성계를 이루고 있을 때, 항성 쪽에서 전해지는 에너지 흐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상대적으로 뜨거운 항성에서 상대적으로 차가운 행성 부분으로 빛 에너지가 전달될 때 이 빛의 일정 비율이 행성에서 활용될 자유에너지가 됨을 입증할 수 있다.(장회익.『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추수밭. 2019. p.540-555쪽) 이는 항성에서의 정교성이 줄어든 정도 이내의 범위에서 행성에서의 정교성이 증가하는 것이 열역학 제2법칙의 테두리 안에서 허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만들어진 복합질서 안에 이를 수용해낼 정교한 구조가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차질서 곧 하나의 복합질서가 형성되고 유지된다고 하는 것은 그 안에 이러한 자유에너지 원천과 함께 이를 변형시키고 분배하여 각각의 부위에서 활용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정교한 협동체계가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7. 생명의 이해 : 온생명과 낱생명

여기서 우리가 확인하게 될 중요한 사실 하나는 생명에 대해 우리가 지금까지 가져온 관념이 하나의 허상이며, 따라서 실제 자연 속에서 이에 해당하는 실체를 발견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위에 소개한 이차질서가 형성되고 유지될 수 있다는 점인데, 이것이 곧바로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명 개념과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보고 자연 속에서 이에 해당하는 것을 찾으려하는 대신, 자연 속에 구현될 수 있는 질서들을 먼저 살펴보고, 그 가운데 의미 있는 존재론적 실체를 확인하여 이것이 기왕에 우리가 지녀온 생명 개념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우리는 ‘이차질서’라는 지극히 높은 정교성을 가진 존재를 발견했기에 이것이 우리가 그간 생명이라 생각해온 것과 동일한 것인지 혹은 아닌지를 검토해보아야 한다.

이렇게 검토해본 결과 이것이 지금까지 사람들이 ‘생명’이라 불러 온 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이라면 이를 일러 ‘생명’이라 불러 큰 문제가 없을 것이지만, 이렇게 발견된 실체가 기왕에 우리가 지녔던 생명 관념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면, 이를 그냥 ‘생명’이라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러한 논의를 위해 앞에서 살펴본 이차질서의 모습을 <그림 4>에 나타낸 바와 같이 간략히 요약해보자.

<그림 4> 진행형 복합질서로의 이차질서

<그림 4>에서 ΩI 과 ΩII 는 각각 과거의 바탕질서와 현재의 바탕질서를 나타내고 있으며, θ1, θ2 …등은 과거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들, 그리고 θm, … θn 은 현존하는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를 나타낸다. 그리고 {θ1}와 같이 이들을 괄호 { }속에 표시한 것은 이들이 일정한 개체군을 지니는 종species을 이룸을 나타낸다. 특히 <그림 4>의 아래쪽 작은 상자로 둘러싸인 내용은 현재 존속되고 있는 현존 질서를 나타내며, 더 큰 상자로 둘러싸인 전체 내용은 과거에 있었던(있어야만 했던) 존재들을 포함한 진행형 복합질서를 나타내고 있다. 

이제 이러한 복합적 구조를 가진 이차질서에 대해 의미 있는 명칭을 부여하기 위해 이것이 지닌 존재론적 성격을 검토해보자. 우선 이 안에는 존재론적 지위가 서로 다른 세 가지 종류의 존재자entity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 존재자는 개별적으로 본 하나하나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들(θ1 등)이다. 이는 분명히 우리가 그간 ‘생명’ 혹은 ‘생명체’라 불러 온 것과 가장 가깝게 대응한다. 예를 들어 앞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라는 책에서 인용한 문장 “지금으로부터 38억 년 전 어느 날 최초의 생명이 등장했다”에 보이는 ‘최초의 생명’이라는 용어는 바로 θ1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이라는 이름을 이러한 존재들에 국한해 적용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첫째로 이것은 사람들이 ‘생명’이라는 개념 안에 담고자 했던 내용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 예컨대 θ1과 같은 초기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들은 통상 생명이라는 개념에 연관해 상정되는 질적 성격을 거의 보여 주지 않는다. 둘째로는, 자체촉매적 국소질서의 개체들은 복합질서의 한 성분이므로 이 복합질서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존재론적 의존성이 매우 강하다는 사실이다. 만일 한 개체가 이 복합질서로부터 유리된다면 이는 거의 순간적으로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로서의 정상적 활동이 정지된다. 따라서 이것에 생명이라는 칭호를 배타적으로 부여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며, 오직 “제한된 의미의 생명”이라는 뜻을 함축하는 개념으로 ‘낱생명’(혹은 ‘개체생명’)이라는 별도의 명칭으로 부름이 적절할 것이다.

위에 언급한 이차질서에서 살펴볼 두 번째 존재자는 바탕에 놓인 바탕질서를 제외한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들만의 네트워크’이다. 실제로 이 네트워크 자체를 생명이라 정의하는 학자들도 있다.(K. Ruiz-Mirazo, and A. Moreno, “The Need for a Universal Definition of Life in Twenty-first-century Biology”, Terzis, G. and Arp, R. (eds.) Information and Living systems, MIT Press. 2011) 이것을 생명에 대한 정의로 보는 것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들 사이의 관계를 잘 반영하면서도, ‘물리학적’ 성격의 바탕질서와 ‘생물학적’ 성격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를 개념적으로 구분하고 싶은 마음에서라고 보인다.

그러나 이 관점은 이 네트워크가 이를 가능케 하는 바탕질서와 실체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결정적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엄격하게 말해 바탕질서는 심지어 동물의 몸속을 포함해 네트워크 어디에나 함께하고 있는 것이어서 이를 개념적으로 제외할 경우 그 정의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에 대응시킬 수 없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바탕질서와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는 서로 간에 너무도 밀접히 연관되어 그 어느 한 쪽이 조금만 달라져도 복합질서로서의 전체 체계는 유지될 수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초기 지구의 바탕질서 ΩI에는 현존 생명체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산소가 거의 없었으며, 반대로 현존 바탕질서 ΩII는 상당량의 산소를 포함하고 있어서 초기 생명체들은 이 안에서 생존할 수 없는 여건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런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 상황에서 그 한 쪽을 제외하고 나머지만을 독자적 존재자로 규정하는 것은 그리 적절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존재론적 의미가 분명한 또 하나의 존재자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는 곧 분리 불가능한 복합질서로서의 이차질서 전체를 하나의 실체로 보는 관점이다. 이것은 바탕질서 안에 출현한 최초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 이후 긴 시간적 과정을 거쳐 형성되는 것으로, 그간 변형된 바탕질서와 현존하는 다양한 자체촉매적 국소질서 전체로 이루어진 복합질서를 말한다.

이것은 자체의 유지를 위해 더 이상 외부로부터 어떤 지원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족적 실체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이것은 생명이라는 관념이 내포하고 있는 모든 속성을 갖춘 가장 포괄적인 존재자라 할 수 있다. 단지 이것은 생명에 관한 우리의 기존 관념과 크게 동떨어진 것이어서, 이를 생명의 정의로 받아들이게 되면 기존의 생명 개념과의 사이에서 오는 엄청난 괴리를 감수해야 한다.

이 세 번째 존재자의 중요성은 이것 안에 생명이 생명이기 위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이 더도 덜도 아니도록 담겨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선 이것에 못 미치는 그 어떤 것도 우주 안에서 독자적인 생명노릇을 할 수가 없다. 흔히 이것을 다 갖추지 않은 낱생명이 생명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 나머지에 해당하는 부분이 주변 어디에 있음을 당연히 여기기 때문이다. 이들이 모두 갖추어진 우리 지구상에서는 이점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우주의 다른 곳에 이러한 것이 있다면 이는 기적에 해당한다.

반대로 이 개념 안에 포함되지 않은 것까지 끌어들여 (예컨대 우주 전체로까지) 생명 개념을 넓히려고 하는 것 또한 부적절하다. 우리가 생명 개념을 적절히 규정하기 위해서는 이 안에 생명의 출현을 위해 불가피하게 요청되는 모든 것을 포함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들은 최대한 배제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이차질서로의 생명 개념은 언뜻 지나치게 포괄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이것은 생명을 나타내기 위해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최소치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한편 이러한 논의가 형이상학적 논의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실증과학적 논의가 되기 위해서는 이것이 현대 과학을 포함한 우리의 최선의 지식과 부합하는 것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이렇게 규정된 생명의 경계가 어디까지 미치는가 하는 점은 생명을 구성할 인과 관계에 대한 우리의 과학적 이해가 진전됨에 따라 얼마든지 수정될 수 있다. 현재 우리가 가진 최선의 지식을 통해 보자면, 생명이라 칭할 수 있는 이러한 존재자는 우주 안에서 비교적 드문 현상일 것으로 추측되며, 공간적 차원에서는 우리에게 알려진 우주의 규모에 비해 매우 좁은 영역을 점유하고 있다.

이제까지는 오직 하나의 이러한 생명만이 알려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태양-지구계 위에 형성되어 약 40억 년 간 생존을 유지해 가고 있는 ‘우리 생명’이다. 이것은 지구상에 형성된 최초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에서 현재 우리들 자신에 이르기까지 우리와 계통적으로 연계된 모든 조상을 비롯해 지금 살아 있거나 지구 위에 살았던 적이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이는 태양을 비롯해 무기물이든 유기물이든 이 복합질서를 가능케 하는 모든 필수적인 요소들을 기능적 전체로 포괄하고 있으며, 이 복합질서에 속하는 것들과 현실적인 연계가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이러한 논의를 종합해 볼 때, 어떤 존재자에 대해 ‘생명’ 혹은 ‘생명을 지닌 존재’라는 자격을 굳이 부여해야 한다면, 위에 논의한 세 가지 존재자 가운데 세 번째가 가장 적합하다. 그러나 이에 대해 ‘생명’이라는 호칭을 명시적으로 사용하기보다는 ‘온생명global life’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리라 생각된다. 그 하나의 이유는 이를 ‘낱생명’(혹은 ‘개체생명’)의 개념과 대비시키기 위해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낱생명’은 그 자체로는 생명 개념으로 부적절하지만 나름대로 생명의 많은 흥미로운 면모들을 함축하고 있기에 이를 온생명과 대비시켜 생각해보는 것이 여러 모로 유용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간 ‘생명의 정의’가 왜 그리 어려웠던가를 이해할 수 있다.(장회익.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 한울. 2011. 제3장.) 이는 곧 우리의 생명 관념이 ‘조건부 생명’으로서의 ‘낱생명’에 머물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관념의 틀 안에 ‘생명’의 본질적 성격 곧 그 ‘온생명’이 보여주는 성격마저 담아보려 했던 시도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생명에 대한 개념을 이렇게 정리할 때, 그간 우리가 ‘생명’이라 여겨 왔던 낱생명은 온생명의 나머지 부분과 적절한 관계를 맺음으로써만 생명의 기능을 하게 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정된 한 낱생명에 대해, 이와 함께 함으로써 생명을 이루는 이 나머지 부분’을 별도로 개념화하여 이 낱생명의 ‘보생명’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이렇게 할 경우 모든 낱생명은 그것의 보생명과 더불어 진정한 생명 곧 온생명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8. 객체와 주체

우리는 지금까지 생명 현상을 포함한 우주내의 모든 물질적 구성체들이 자연의 기본원리를 통해 모두 이해될 수 있다는 관점을 취해왔다. 이 관점은 적어도 물질적 구성체로서의 현상들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성공적이며 따라서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이것에서 벗어나는 새 관점을 취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인간의 경험세계 안에는 이 방식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양상, 즉 (인간의) ‘주체 의식’이라고 하는 전혀 다른 양상이 자리하고 있다.

흔히 ‘나’라는 말로 표현되는 이 주체 의식은 기존의 현상들과 동일한 반열에 놓을 수 있는 또 하나의 현상이 아니라 기존 현상의 이면을 구성하는 ‘숨겨진’ 속성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파악한 모든 현상의 모습을 이것이 지닌 외적 혹은 물적 속성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현상의 내부에서 파악의 주체가 나타나 자기 스스로를 파악하게 되는 내적 혹은 심적 속성이다. 그러니까 이 둘은 실체적으로 구분되는 두 개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실체가 나타내는 두 가지 양상, 곧 ‘객체적 양상’과 ‘주체적 양상’에 해당하는 것이다. 마치 실체로서의 뫼비우스의 띠는 하나이지만 표면이 있고 이면이 있는 것과 같이, 현상은 하나임에도 이것의 표면적 양상이 있고 또 이면적 양상이 있는 것이다.

이 둘이 하나라고 하는 사실은 우리가 설혹 주체적 양상 아래 주체적 삶을 영위하더라도 이로 인해 이의 외면에 해당하는 객체적 세계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의 모든 행동과 그 결과는 객체적 세계를 통해 나타나며 객체적 세계를 지배하는 자연의 법칙에 한 점의 어긋남도 없이 부합된다. 내가 어떤 생각을 떠올리고 이를 누구에게 전달하려 해도 내 두뇌 속에 있는 신경 세포 조직이 이를 수행해 내고 이를 다시 내 발성기관이 주변의 공기를 진동시켜 상대방이 감지할 수 있는 음파를 만들어 내야 한다.

이러한 제약 아래 있기는 하나, 우주 내의 한 사물에 해당하는 우리가 ‘삶의 주체가 되어 우리의 의지에 따라 삶을 영위해 나가게 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설혹 이러한 의지 자체가 이미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 질서 안에서 형성되는 것이라 해도, 일단 이것을 ‘나’라고 느끼며 나로서 살아가는 한, 나는 내가 원하는 바에 따라 살아가게 된다. 사물을 물리학적으로 이해해 나가는 입장에서 보면 우주 안에 물리적 법칙에 따르지 않는 그 무엇도 없으며, 따라서 물질 차원의 일원론이 성립하지만,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 주체로 행세하는 입장에서 보면 우주의 일부를 내 의지에 따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물의 이면에 주체적 양상이 존재한다는 이 놀라운 사실은 어떻게 입증하는가? 실제로 주체적 양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주체의 당사자가 되어 이를 직접 느끼는 방법 이외에 알 길이 없다. 예를 들어 외계의 어떤 지적 존재가 지구를 방문하여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심지어 이들과 대화를 나눈다하더라도 그가 이 지구 사람들이 실제 주체적 양상 아래 놓여 있는지 혹은 아주 정교한 로봇들인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런데도 우리가 어렵지 않게 주체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이를 직접 경험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나 이외의 다른 참여자들도 내가 주체적 양상을 경험하듯이 그들 나름의 주체적 양상을 경험하리라는 점을 받아들인다. 이리하여 우리는 주체로서의 ‘나’ 뿐 아니라 주체로서의 ‘너’도 인정하게 된다.

9. 인간의 집합적 주체와 문명

우리 온생명 안에 있는 다른 모든 동물이나 식물처럼 인간도 온생명의 참여자로 행동하며, 복합질서의 유지를 위해 다른 참여자들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온생명 안의 이러한 여러 존재들 가운데서도 주체성을 지닌 대표적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이다. 인간 이외의 다른 낱생명들 또한 나름의 주체성을 지니지 않으리라 보기는 어려우며, 그렇기에 인간과 여타 존재들의 주체성 또한 정도의 차이이지 본질의 차이는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일단 인간이 되고난 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의 주체성’이 가지는 의미는 각별하다.

주체성의 의미 자체가 ‘나’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남의 주체성을 존중하고 이해하려 해도, 이는 불가피하게 내 주체 안에서 생각하는 일이며 내가 남의 주체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이에 반해 나는 남을 내 주체 안으로 끌어들여 내 주체를 확장할 수는 있다. 우리는 ‘나’와 대등한 ‘너’를 인정할 뿐 아니라 ‘나’와 ‘너’를 아울러 확대된 ‘나’ 곧 ‘우리’를 형성하기도 한다. 이는 곧 자신의 주체성을 확장하여 다른 참여자를 더 큰 ‘나’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우리의 주체 곧 ‘나’라는 것은 하나의 고정된 ‘작은 나’에 국한되지 않고 주변과의 관계를 인식함에 따라 ‘더 큰 나’로 그리고 ‘더욱 더 큰 나’로 내 주체성을 계속 확대해 나갈 수도 있는 성격을 지닌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너’를 중심으로 형성된(‘나’가 제외된) 또 하나의 외부 주체가 있음도 이해한다. 이 경우 인간 각자의 주체는 자기들의 작은 ‘나’를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모두 다르지만, 서로 의사를 소통함으로써 각자가 서로를 각기 자기의 주체 안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상호 주체적 연결을 통한 하나의 집합적 주체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이 마련하고 또 인간이면 누구나 숙명처럼 속할 수밖에 없는 ‘집합적 의미의 인간’으로서의 주체이다. 이러한 주체가 형성되는 사회적 공간이 바로 인간의 문화공동체이며, 이러한 주체를 일러 ‘문화 공동체로서의 자아’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오래 전부터 인간은 집합적 주체를 통해 문화 공동체를 이루면서 삶의 여건과 삶의 내용을 의식적으로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인간의 문명이며, 이러한 문명을 통해 인간은 다시 자신의 집합적 주체를 심화하고 확장해 왔다. 하지만 최근에 이르기까지도 인간의 집합적 주체 안에 담겨 있던 자아의 내용은 많은 경우 분할된 사회적 집단으로서의 ‘우리’ 의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국가와 민족 단위의 분쟁으로 세계가 평화롭지 못한 것이 그 직접적인 증거이다. 그러면서도 이념적으로는 이미 오래 전에 인간의 집합적 자아의 내용이 ‘인류’에 이르면서 인류의 공영을 가치의 중요한 척도로 삼아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안에는 여전히 인간을 제외한 온생명의 나머지 부분은 포함되지 않고 있었다. 오랜 기간 인간은 이를 ‘자연’이라 부르면서 인간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생각했고 이를 극복하고 활용하는 것을 문명이 마땅히 지향할 바른 방향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자연’은 인간과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이들이 합쳐 비로소 생명이 이루어지는 온생명의 한 부분이며, 이에 따라 인간의 생존은 온생명 안에서 온생명의 정상적인 생리에 맞추어 이루어져야 함이 분명해졌다. 이럴 경우 인간의 집합적 주체성 속에는 온생명으로서의 주체가 포함되어 마땅하다. 진정 살아 있는 존재는 온생명이며,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내 몸이 내 온생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점을 지적으로 분명히 확인하고 나더라도 이것이 진정 ‘나’라고 느끼게 되기까지는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장벽이 있다. 곧 심정적 장벽이다. 우리가 나 아닌 너를 내 주체 속에 끌어들여 더 큰 나 곧 ‘우리’를 이루기는 비교적 쉽지만, 온생명을 구성하는 그 많은 것들을 모두 끌어들여 좀 더 큰 나에 이르는 것은 우리의 심정이 쉽게 허용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깊은 내면에는 이마저도 넘어설 수 있는 바탕 심성이 깔려있음을 종종 경험한다. 우리가 흔히 온몸이 건강하고 조화로울 때 평온을 느끼고, 어딘가 조화가 깨지고 무리가 생길 때 아픔을 느끼듯이, 온생명 어느 부분이 상해를 입는 것을 볼 때 마음속 깊이 아픔을 느끼는 일을 경험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곧 내가 온생명을 내 몸으로 느끼고 있다는 하나의 징표에 해당한다.

하지만 설혹 나 자신 그리고 또 다른 소수의 개인들이 온생명을 인식하고 이를 통해 온생명을 나 자신으로 느낀다 하더라도 이것만으로 우리 온생명이 이미 하나의 진정한 주체로 부상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아직 대다수의 사람들, 특히 온생명의 신체에 큰 영향을 줄 정치, 경제를 현실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은 아직 여기에 크게 못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 온생명이 스스로 깨어나 명실 공히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영위하는 단계에 도달한다는 것은 몇몇 개별적 인간의 주체만이 아닌 인간의 집합적 주체가 온생명 그 자체를 자아로 삼고 진정 온생명적 삶을 영위해나가게 됨을 의미한다. 이렇게 된다면, 마치도 인간 신체 안에서 인간의 정신기능을 두뇌가 담당하고 있듯이, 인간은 온생명 신체 안에서 온생명의 두뇌가 되어 온생명의 정신기능을 담당해 나가는 존재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10. ‘뫼비우스의 띠’를 완결시킨다는 것

지금까지 우리는 자연의 기본 원리에서 출발해 우주 안에 형성된 보편적 존재양상과 그것의 일환으로 생명이 지닌 모습을 고찰했고, 다시 이 안에 출현한 인간에 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 생명 안에는 객체적 양상과 주체적 양상이 함께 나타나게 되는데, 특히 인간의 경우 이러한 주체적 양상이 의식의 표면에 떠오르면서 의식적 삶을 이루고 집합적 주체를 형성하여 문화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이러한 문화 공동체의 주된 기능 가운데 하나가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며, 이 인식의 일환으로 ‘자연에 대한 사고’가 이루어질 것임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이러한 사고가 우리가 출발점에서 전제했던 ‘자연의 기본 원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밝히기만 하면 적어도 하나의 굵은 가닥에서 ‘뫼비우스의 띠’가 완결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매우 단순해 보이는 이 마지막 연결과제가 사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것은 예컨대 20세기 초부터 물리학자들과 철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을 일으킨 ‘양자역학의 해석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우리가 자연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은 물리학을 통해서이지만, 막상 ‘물리학 자체’를 이해하려면 이를 수행하고 있는 인식의 주체를 함께 논의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물리학만이 아니라 주체적 양상마저 품고 있는 좀 더 큰 관념의 틀이 요구되는데, 이것이 바로 ‘뫼비우스의 띠’ 구조에서 내면(주체적 양상)을 외면(객체적 양상)과 접합시키는 작업에 해당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인식 주체의 ‘자연에 대한 사고’를 인식 대상에 적용되는 ‘자연의 기본 원리’와 연결시킬 수 있으며, 이로써 ‘온전한 앎’의 위상학적 구도 곧 ‘뫼비우스의 띠’가 일단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 앎의 주된 내용을 뫼비우스의 띠 형태로 완결시키고 나면, 이 안에서 우리는 인간과 우주의 관계가 어떻게 서로 맞물려 있는지를 보게 된다. 이 속에 비친 인간은 하나로 연결된 우주의 한 부분이며, 우주의 한 부분인 자신이 다시 그 우주를 파악하게 되는 신비한 순환관계에 놓이게 된다. 인간에 의한 이러한 우주 이해 속에는, 우주가 인간을 창출하는 모습이 담겨 있으며, 창출된 그 인간이 다시 자신을 창출하는 그 우주를 이해해나가는 과정이 서로 돌고 돌아가는 경이로운 형태로 펼쳐진다.

그렇기에 우리가 만일 이 관계를 우리의 지적 공간 안에 충실히 담아낼 수 있게 된다면, 이로써 인간과 우주 사이의 내적 연관이 완결되는 것이며, 이는 곧 인간의 자기 이해인 동시에 우주의 자기 이해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될 경우, 인간은 온생명의 주체일 뿐 아니라 명실상부한 우주의 한 주체로 부상할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11. 맺는 말

위에서 우리는 뫼비우스의 띠를 모형으로 삼아 통합적 관념의 틀이 무엇이며 이를 통해 마련된 우주와 인간의 진정한 모습은 과연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시론으로 제시된 것이며 결코 완성된 작업은 아니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첫째로 이러한 작업은 단순한 사변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난 수 세기에 걸쳐 인류가 이루어낸 현대과학의 성과를 통해서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이를 위해서는 자연의 기본원리와 그 활용에 대한 심층적 이해가 요청되는데, 이것은 특히 지난 몇 세기에 걸친 현대과학의 근간에 해당하는 내용들이다.

둘째로는 이러한 내용들을 하나의 통합적 관념의 틀 안에 묶어내는 작업이 요청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관행적 의미의 과학에서 수행하는 작업이 아니라 과학의 성과들을 바탕에 놓고 이를 다시 심층적으로 연결하고 재구성해내는 메타적 작업에 해당한다. 이 작업은 그 성격상 철학의 과제에 해당한다고 보아야겠으나 아직 관행적 철학에서 이를 진지하게 추구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셋째로, 이 작업이 설득력 있게 수행될 수 있다면, 이것은 인류문명의 바른 방향을 제시해줄만한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만일 자신의 삶을 가장 온전한 방향으로 이끌어낼 지혜를 추구하려 한다면,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최선의 길잡이를 찾아보려 한다면, 우리는 결국 앞서 언급된 ‘온전한 앎’에 도달할 것이고, 이 안에 반영된 우주와 자신의 모습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작업을 현실적으로 어떻게 수행해낼 것이냐 하는 점이다. 이는 한 마디로 현대 과학만의 과제도 아니고 현대 철학만의 과제도 아닌 이들 사이의 적극적인 협동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현대 과학 쪽에서는 전문가들을 위한 학술지나 분야별 학술서적에 수록될 전문적인 연구를 넘어서서 그 본질적이고 심층적인 내용을 철학자들을 포함한 일반 지성인들이 파악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해내는 작업을 해내어야 한다.

이는 결코 일반인들을 위한 과학의 해설 작업이 아니라 자신들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심층적 이해 작업에 해당하는 일이다.(필자가 최근 출간한 『자연철학 강의』가 바로 이러한 취지의 책이며, 실제로 필자는 이 책을 교재로 하여 “철학자를 위한 물리학”이라는 명칭의 강의를 수행한 바 있다.) 한편 철학 쪽에서는 자기들의 기존 전문영역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현대과학의 심층적이고 핵심적인 내용을 (과학 쪽의 도움을 얻어) 파악한 후 이를 철학적으로 재구성해내는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굳이 이러한 작업에 대한 학문적 명칭이 필요하다면 필자는 이를 “새 자연철학”이라 명명하고 싶다. 사실 근대과학이 하나의 독자적 전문분야로 분가해 나오기 이전까지는 자연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려는 학문적 시도를 철학의 영역으로 보았으며 특히 뉴턴이 자신의 주저인 프린키피아를 명명했듯이 이를 “자연철학”이라 불렀다. 따라서 이러한 정신을 계승하고 특히 이 안에 현대과학의 성과를 포함시킨다는 점에서 이를 “새 자연철학”이라 불러도 좋으리라는 생각이다.


“현대과학의 철학적 수용은 어떻게 가능한가? – ‘새 자연철학’을 제안하며 (1)” 읽기 바로가기


알림

* 본문 중 강조는 편집자가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굵게 표시한 것입니다.

* 스킨 문제로 이곳에서는 댓글 달기가 되지 않습니다. 댓글이나 의견은 녹색아카데미 페이스북 그룹트위터인스타그램 등을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연철학 세미나 게시판과 공부모임 게시판에서 글을 쓰실 수 있습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