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나는 이렇게 읽었다

녹색아카데미 최우석

서평을 목표로 시작했지만 겨우 아이디어만 늘어놓고 세미나 발표를 했습니다. 8월 19일 자연철학세미나에서 발표했던 글을 약간 손보아서 올립니다. 책 읽는 분들께 약간 도움이 되는 면이 있을 것 같습니다. 후에 서평글을 완성하면 바꾸어 올리겠습니다. 글은 아래와 같은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1. 책의 내용 요약 정리
  2. 장회익 자연철학이 하고 있는 일 1 – 앎을 통합하기
  3. 장회익 자연철학이 하고 있는 일 2 – 몇 가지 철학적 물음에 답하기
  4. 몇 가지 아쉬운 점들

1.『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의 내용  요약 정리

이 책에서는 저자가 목표했던 지식을 종합하고 통합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장회익 스스로의 말처럼 통합적인 앎을 이룬다는 것은 쥘부채의 부채살 둥치를 그러쥐는 것에 비유해볼 수 있습니다. 여러 갈래로 뻗은 분야들이 끝에서는 떨어져 있지만 둥치에서는 모두 꿰미에 꿰여 하나로 엮여 있습니다. 살들을 관통하는 꿰미가 기본원리라고 한다면 각각의 부채살들은 분과학문들이나 전문분야 학문들에 해당합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앞으로 『자연철학 강의』)는 예측적 앎의 일반적인 틀을 확립한 뒤에 자연의 기본원리에 대한 이해를 정비하고, 이를 바탕으로 물질과 생명, 주체와 앎에 대한 앎을 끌어내는 흐름으로 되어 있습니다. 개별 대상에 대한 앎들이 기본원리와 조화를 이루게 정리를 하고, 서로 연속되도록 잘 엮으면 그러한 작업만으로도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이 있는지 모험을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래에 책 전체의 구성과 내용을 요약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좋은 앎의 일반적인 틀 찾기 – 앎의 바탕 구도와 바탕 관념

여헌 장현광의 학문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지난 만고의 일들을 가히 알 수 있으며, … 다가올 만세의 일들”을 내다볼 수 있는 예측적 앎은 공통된 바탕 구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의 이치, 즉 변화의 원리를 알고 현재의 상태를 알면 나중의 상태나 과거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짜임입니다. 앎의 바탕 구도 아래에는 암묵적인 지식으로 작용하는 바탕 관념이 있어서 바탕 구도를 떠받치고 있습니다. 누구나 당연하게 여기는 시간이나 공간에 대한 상식이 바탕 관념의 한 예입니다.

2) 자연의 기본원리를 이해하기 – 고전역학,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통계역학

지성사 최초로 자연계의 보편적인 변화의 원리를 발견하여 앎의 틀을 다 갖춘 예가 바로 고전역학입니다. 뉴턴은 3차원 공간과 별도의 1차원 시간이라는 바탕 관념 위에서 “단위 시간에 변하는 운동량의 크기(운동량의 시간적 변화율)는 이 물체가 받는 힘과 같다”는 변화의 원리를 가정하여 위치와 운동량으로 규정되는 존재물의 상태 변화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바탕 구도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고전역학의 앎의 틀은 20세기 초반 두 방향에서 혁신됩니다.

상대성이론은 바탕 관념을 혁신하여 바탕 구도까지 변화시켰습니다. 공간과 시간은 서로 독립적이라는 3+1차원 시간 공간 관념을 시공간 4차원 이론으로 대체하였습니다. 기존의 시간(t)에 허수항(i)과 c라는 상수항을 곱한 것이 공간 벡터의 네 번째 항이 되었습니다. 공간과 시간이 4차원을 이루므로 자연스럽게 기존의 3차원 속도 벡터나 3차원 운동량 벡터도 4차원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 때 이전까지 서로 독립적인 것이라 여겼던 운동량과 에너지도 4차원 운동량-에너지로 대체되었습니다. 4차원 운동량의 네 번째 항은 에너지(E)에 허수항(i)과 1/c 상수항을 곱한 것이었습니다. 특수상대성이론에 이어 일반상대성이론은 힘이라 여겼던 중력을 4차원 시공간의 효과로 재서술하였습니다. 이러한 바탕 관념의 변화가 바탕 구도의 요소인 상태와 변화의 원리 모두 4차원 상태와 4차원 변화의 원리로 다시 쓰게 하였습니다.

양자역학은 상태와 변화의 원리를 모두 새로이 규정하는데 전자의 에너지 흡수와 방출이 특정한 값으로만 일어나는 현상을 기술하기 위한 혁신이었습니다. 상태는 위치와 운동량이 아니라 상태함수로 규정되었고, 변화의 원리는 슈뢰딩거 방정식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위치와 운동량은 상태함수의 기대치로 얻어지는 물리량이 됩니다. 이러한 바탕 구도의 혁신과 아울러 바탕 관념에도 큰 혁신이 일어났습니다. 시간-공간 4차원과 운동량-에너지 4차원은 서로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었는데 이 둘이 서로 변환 가능한 맞공간 관계를 가지는 4차원 복합공간을 이룬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부터 위치를 알면 이를 변환한 뒤 ℏ라는 상수항을 곱해 운동량을 구할 수 있고, 그 역도 가능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상태변화를 일으키는 변화의 원리가 한 가지 더 있다는 점도 포함되었습니다.

통계역학은 양자역학과 짝을 이루어 많은 수의 입자로 구성된 계(뭇알갱이계), 즉 거시세계의 변화를 기술하는 자연의 기본원리입니다. 통계역학이 다루는 대상의 상태는 계를 이루는 입자들의 양자역학적 상태의 조합이 나타내는 계의 형상입니다. 앞의 것을 미시상태(개별상태)라 하고 뒤의 것을 거시상태(개괄상태)라 합니다. 거시적으로 구분이 되는 형상마다 그러한 형상을 나타내는 입자들의 양자역학적 상태의 조합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 조합의 숫자가 적은 형상과 많은 형상이 있다면 대상의 상태는 확률이 더 큰 형상으로 변화한다는 것이 열역학 제2법칙입니다. 통계역학에서는 뭇알갱이계의 형상과 관련하여 엔트로피, 온도, 자유에너지 등의 개념들이 새롭게 정의되어 바탕 관념을 이룹니다. 열역학 제2법칙은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인데 이것을 고립계 안의 부분계에 적용할 때에는 자유에너지 개념으로 다시 쓸 수 있습니다. 부분계의 형상은 자유에너지가 감소하는 방향으로 변화한다는 것이 거시상태 변화의 원리가 됩니다.

3) 자연의 기본원리 위에서 세계를 이해하기 – 물질, 생명, 나, 앎

이제『자연철학 강의』는 오늘날 자연의 기본원리로 자리잡은 양자역학과 통계역학을 꿰미로 삼아서 우리의 세계 인식을 이 기본원리에 탄탄하게 기초하도록 만드는 작업으로 들어갑니다. 세계의 골간이 되는 물질과 생명, 나 그리고 앎이 그 대상입니다.

양자역학과 통계역학, 그리고 상대성이론에 입각하여 우주와 물질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20세기에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우주방정식을 변화의 원리로 하여 시공간 변화를 이해하는 앎의 틀이 마련되고 이로부터 우주의 초기 상태를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 앎의 틀은 자연의 기본원리에 입각하여 약 138억년 전의 빅뱅에서 우리의 시공간이 비롯되고 기본입자가 출현하여 원자핵과 원자를 형성하는 과정, 별과 떠돌이별이 만들어지고 무거운 물질까지 생겨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우주와 물질에 대한 성공적인 이해에 비하여 생명에 대한 이해는 그 사이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이 이해의 지체를 극복하고자 저자는 양자역학 및 통계역학에 기반하여 ‘어떻게 물질에서 저절로 생명이 생겨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합니다. 우주의 물질적 분포가 별-떠돌이별 체계를 만들었을 때 이를 기초로 자유에너지의 안정적인 흐름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를 토대로 국소질서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 중 자신이 촉매 역할을 하여 자신과 똑같은 국소질서가 생겨나게 하는 자체촉매적 국소질서(자촉질서)가 우연히 생겨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1 이상의 비율로 존속하게 되면 자촉질서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늘어나며 변이가 생겨나서 다양해질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소재와 조건이 되는 바탕질서와 이를 기반으로 한 자촉질서 및 그 계열 전체를 단순 국소질서에 대비해 이차질서라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바로 생명이라는 것이 저자가 제시하는 새로운 생명 이해입니다. 이 새로운 생명 이론은 생명에 관한 바탕 관념을 대체하는 것으로서 기존에 생명이라 생각하던 것은 낱생명으로, 새로운 생명 이론이 말하는 생명의 단위는 온생명으로 정의합니다. 어떤 낱생명의 입장에서 본 나머지 온생명은 보생명이라 합니다.

물질과 생명에 대한 이해 이후의 중요한 해명 과제는 ‘나’입니다. 저자는 이 ‘나’라는 탐구 대상이 물리학의 영역을 벗어난다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나’라고 인식하고 느끼는 존재물이 실존하는지는 그 자신 밖에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가 물질과 생명이 깊어지면 필연적으로 나타나는지는 자연의 기본원리로 따져볼 수 없지만 나의 경험과 다른 사람들의 주장으로 볼 때 ‘나’가 엄연히 존재함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물질과 ‘나’ 사이의 관계, 데카르트 식으로 물질과 정신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가 문제가 됩니다. 여기에서 장회익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인과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두 측면을 이루고 있다는 ‘일원이측면’론을 펼칩니다. 또한 생명이 개별 낱생명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온생명이라는 이차질서 자체의 현상인 것처럼 ‘나’ 역시 개별 주체들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표현되는 집합적 주체를 이루면서 ‘큰 나’에 이르기도 합니다. 아울러 ‘나’는 ‘삶’이라는 생명의 새로운 국면도 엽니다. ‘생명의 주체적 운영’이 곧 ‘삶’이기 때문입니다.

저자 장회익은 앎의 더 넓게, 그리고 다층적으로 이해하려 합니다. 먼저 앎은 꼭 의식이 있는 의식주체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 이전에도 앎은 있습니다. 일정한 조직을 가진 계가 외부 정보에 선택적 반응을 일으키도록 하는 변별구조를 가질 수 있습니다. 물질 변화 맥락에서는 역학적인 과정이지만 정보적 맥락에서는 정보의 연산과정이 됩니다. 이를 각각 역학모드와 서술모드라고 하는데 이 두 모드 다 물리적인 것이라 서술모드는 의식이나 생명 이전에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식을 가진 주체에게는 같은 과정이 의식모드로도 나타납니다.
앎의 대상과 주체 사이의 관계에서 보자면 존재 세계는 대상층과 사건층, 상태층 셋으로 구분해야 합니다. 대상층은 우리가 접할 수 없는 층위입니다. 존재물이 변별체와 조우하여 사건이나 공사건을 일으키면 비로소 사건층에서 우리는 대상의 정보를 만나게 됩니다. 양자역학의 앎의 틀에 따라서 사건을 통해 얻게 되는 위치나 운동량이라는 물리량을 통해서 대상의 상태함수를 찾아내게 되는데 이것이 대상이 상태함수로서 존재하는 상태층입니다. 양자역학을 통해서 비로소 사건측과 상태층이 구분되고 이 두 층 모두 실재의 세계를 이룬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앎의 대상과 앎의 주체는 사건층의 변별체를 경계로 나뉘는데 변별체에 사건을 일으키는 사건야기성향을 가진 존재물이 앎의 대상이라면 변별체로부터 개별 인식 주체까지 정보적으로 연결된 전체가 앎의 주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입니다. 우리의 정보와 앎이 개별 자연인을 뛰어넘어 여러 개별 주체들 간의 정보 교환과 공동 활동, 그리고 각종의 측정 장치나 도구 등등 정보적으로 연결된 집합적인 주체 안에 얻어지는 것이고 이 앎의 집합적 주체의 범위는 온생명이라는 물질적 외연까지 확대될 수 있고 실상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온생명은 생명의 최소 단위이자 앎의 최대 주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의 탐구를 종합하건대 여러 가지의 앎들을 하나의 모형 안에 위치지워서 하나의 연관성 안에 통합시키고자 한다면 앞서 나온 일원이측면에 입각하여 뫼비우스의 띠를 온전한 앎을 위한 모형으로 세워볼 수 있지 않은가 하는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물질과 생명과 인간을 대상으로 이해하는 앎과 ‘나’로서 이해하는 앎 모두를 얹기 위해서는 물질과 정신의 내외면이 다 있되 한 차례 꼬여서 안이 밖이 되고 밖이 안이 되는 국면 변화가 있는 모형이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2. 장회익 자연철학이 하고 있는 일 1 – 앎을 통합하기

1) 앎과 앎에 대한 이해의 충돌을 바로잡기

『자연철학 강의』는 자연의 기본원리와 물질, 생명, 나, 앎 등 우리의 중요한 세계 이해 사이에 충돌이 생기지 않도록 다듬고 조정하는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각각의 분과학문별로 다른 개념과 방법, 경로를 밟아 발전해온 인류의 앎들은 이 앎들이 하나로 어우러지게 하는 노력이 없으면 각각 별개의 것으로 존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면 이 분야의 앎과 저 분야의 앎 간의 관계도 알 수 없고 충돌 여부도 알 수 없으며 상황별로 번갈아 뒤집어 쓰는 여러 개 탈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천체물리학자가 연구실에서는 138억년 전의 빅뱅의 증거를 찾는 연구를 하다가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서 6천년 전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이야기를 아무런 갈등을 느끼지 않고 듣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연구실에서 통용되는 앎과 교회에서 통용되는 앎이 별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하다면 여러 분야마다의 앎의 발전이 커다란 통찰로 이어질 가능성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불편하게라도 여겨야 앎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할텐데 그러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봅니다.

물리학은 이전까지 서로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여기던 것이 알고 보니 하나였다고 깨닫는 통합과 환원의 역사적 사례로 가득합니다. 고대부터 전기 현상과 자기 현상은 꽤 많이 알려져 있었지만 이 둘이 하나라는 점을 깨달아 전자기학으로 통합된 예는 대표적입니다. 열과 운동이 서로 변환될 수 있다는 실험 결과로부터 출발하여 빛, 전기, 소리 등등이 모두 에너지로 환원될 수 있는 현상으로 이해되는 과정도 매우 극적입니다. 물리학은 의도했건 아니건 줄곧 서로 다른 앎을 통합하고 환원가능한 것으로 이해해 온 역사를 걸어왔습니다. 자연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역사와 전통이 달랐던 천문학이나 화학도 물리학으로 환원되었습니다. 이 역사로보면 물리학은 여러 앎들을 두루 통합해 온 대표적인 통합적 앎이라 할 수 있겠는데 물리학자 장회익은 이러한 역사적 학문 경험을 우리의 앎 전반으로 넓히고자 하는 것입니다. 현재까지 우리가 마련한 자연의 기본원리가 설득력있는 것이라면 자연계 안의 여러 현상이 적어도 이 기본원리와 상충해서는 안 되고 나아가 환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분과학문들이 다른 바탕에 서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문제의식입니다.

하지만 물리학이 세운 자연의 기본원리가 충분히 무르익지 않아서 도리어 앎의 통합을 저해할 수도 있습니다. 19세기 말 자연의 기본원리와 다른 분야의 앎이 첨예하게 부딪힌 사례는 유명한 물리학자 윌리엄 톰슨, 훗날 켈빈 경의 지구 나이 주장이었습니다. 열역학에 지대하게 공헌을 했던 켈빈경은 1862년 지구가 뜨거운 암석이었다가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가정하고 지구 형성 시기의 온도로부터 현재와 같은 온도로 식는 데에 1억년 정도 걸리는 것으로 계산하여 지구의 나이가 1억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단순한 가정에 따른 계산이라 넓게 2천만년에서 4억년 사이로 여지를 두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톰슨의 이 주장은 비슷한 시기의 지질학계나 찰스 다윈의 추정과 아주 차이가 컸습니다. 지질학자들은 지형 형성의 원리로 볼 때 지구의 나이가 수십억 년은 될 것이라 보았고, 찰스 다윈 역시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통해서 현재의 상태에 이르려면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톰슨은 자신의 계산 결과를 신뢰하여 진화론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명성이 높은 물리학자 켈빈경의 추정치에 근거를 두고 진화론을 공격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진화론을 배격하는 소위 ‘창조과학’론자들은 켈빈의 주장을 근거로 삼습니다. 노년의 켈빈 경도 자리에 있었다고 하지만 방사능과 원자핵 구조를 밝히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러더포드는 새로운 발견에 따라 켈빈 경의 계산은 옳지 않다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켈빈 경이 마음 상하지 않도록 그가 ‘새로운 열원이 밝혀지지 않는 한’이라는 전제를 달아서 그가 핵에너지를 예견했다고 추켜세워주었다는 일화가 남아있습니다.

장회익의 앎의 통합 작업은 오늘날 자연의 기본원리에 대한 이론인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그리고 통계역학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물론 이 이론들은 그간 100여년 이상 검증된 매우 확고부동한 지위의 앎들입니다. 하지만 앎 그 자체와 앎에 대한 이해가 상충할 수도 있습니다. 양자역학은 존재 세계의 기본원리를 알려주는 우리 시대의 가장 근간이 되는 지식 체계입니다. 양자역학의 응용을 통해서 많은 첨단 분야들이 생겨나고 발전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는 도리어 신비주의의 도피처처럼 혼돈 가운데에 빠져있습니다.

『자연철학 강의』에서는 상대성이론의 골간이 앎의 바탕 관념의 한 요소인 시간과 공간이 복소수 공간에서 4차원을 이루는 것이라는 이해를 확립합니다. 양자역학은 존재물의 상태가 위치와 운동량이 아니라 ‘상태함수’로 규정된다는 공리 1을 포함하여 4개의 공리로부터 모든 내용이 연역되는 앎의 체계라는 새로운 이해를 제시합니다. 이 이해에 입각하면 유명한 불확정성원리도 자리를 찾아 신비적 요소를 갖지 않으며, 겹실틈 실험 등 신비주의적 해석을 일으켰던 몇몇 실험도 공리 체계 내에서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통계역학 역시 엔트로피 법칙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오가는 가운데 볼츠만 이론에 입각한 명확한 상태 규정과 자유에너지 개념 중심의 합리적 이해를 마련하였습니다. 『자연철학 강의』에 나오는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통계역학에 대한 이해와 서술이 흔히 보기 어려운 새로운 것인 이유는 자연 세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예측하는 가장 발전한 기본원리에 대한 앎이 나왔으되 이 앎에 대한 이해가 낡고 부적절하여 이해를 혁신하는 작업을 했기 때문입니다.

2) 자연의 기본원리에 입각하여 물질, 생명, 나, 앎 이해를 통합하기

앞에서 보았듯이 우주와 물질에 대한 이해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과 그리고 통계역학을 응용하여 20세기 내내 엄청난 성과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에 대한 이해, 적어도 그 출현에 대한 이해는 자연의 기본원리와 조화되지 못하였기에 장회익은 물질에 대한 이해와 생명에 대한 이해가 연속되도록 앎을 통합하는 작업을 해왔고, 그 결과가 온생명 개념입니다. 앎에 대한 이해 역시 자연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앎인 양자역학의 인식 구조를 포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실상 그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양자역학에 대한 연구를 앎 일반에 대한 이해로 확장해 나갔습니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통계역학 등에 기반을 둔 20세기 우주론과 분자생물학 등의 개별 분과학문들은 20세기 후반부터 ‘빅히스토리’ 논의나 ‘가이아’ 이론과 같은 앎을 종합하는 차원의 이론들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이 이론들은 다분히 평면적이고 병렬적인 느낌을 주는데 어쩌면 이런 차이점이 바로 ‘통합’을 지향하는지 아닌지의 차이는 아닐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3) 장회익의 여러 이론들을 꿰어 엮기

장회익의 이론은 양자역학의 장회익 해석(또는 서울해석), 메타과학, 온생명 이론, 일반화된 자유에너지 이론 등 굵직한 것만도 여러 개이고 그 밖에도 여러 독창적인 이론 및 해석들이 있습니다. 그 중 메타과학과 온생명 이론, 또 양자역학의 해석과 온생명 이론은 연계가 없지는 않지만 별개의 이론이라고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지 않나 싶습니다.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한 작업이 아마도 2000년대 중반에서부터 『자연철학 강의』가 나오기까지 십수 년의 작업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덕분에 『자연철학 강의』에서는 온생명 이론과 ‘나’에 대한 논의, ‘앎’의 여러 층 구조 이론은 하나로 통합되여 몸의 측면인 온생명과 정신의 측면인 온우리가 하나의 두 측면을 이루는 일원이측면 사상 안에 단단하게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로부터 ‘앎’의 문제와 ‘삶’의 문제 사이에도 다리가 놓여서 『삶과 온생명』에 나왔던 대생지식의 지향을 가진 대물지식의 성숙을 ‘온전한 앎’이라는 주제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3. 자연철학이 하고 있는 일 2 – 몇 가지 철학적 물음에 답하기

1) ‘물자체’를 대면할 수 없는 한계 가운데에서 우리는 어떻게 존재 세계를 알 수 있는가?

칸트의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라는 개념은 저처럼 칸트를 읽어보지 못한 사람도 익히 알 정도로 유명합니다. 인간의 인식은 우리의 감각 너머에 있는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를 만날 수 없다는 점이 이 개념이 말해주는 바입니다.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감각 현상 뿐이지 그 감각을 일으킨 존재물을 감각의 매개 없이 직접 파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위 ‘객관적(客觀的)’ 앎이라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앎의 주체를 뛰어넘는 어떠한 앎도 가능하지 않기에 우리는 ‘주관(主觀)을 넘어서는 앎’이 어떻게 설 수 있는지 해명해야 할 숙제를 안게 됩니다. 이에 대해 ‘간주관성(間主觀性)’이니 ‘상호주관성(相互主觀性)’이니 하는 등의 집합적인 앎으로 개별 인식 주체의 주관성과 불완전성을 뛰어넘어 보려는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우리 앎의 한계에 대한 지적 자체는 정당한 것이었지만 이에 대한 응답이 지지부진한 만큼 불가지론과 상대주의, 반지성주의가 독버섯처럼 피어날 수 있어 우려가 됩니다. 이러한 흐름은 ‘어차피’라는 부사를 늘 달고 다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두고 ‘어차피론’이라고 이름 짓고 가상적인 생각을 한 번 펼쳐 보겠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객관적으로 세계를 알 수 없는 것 아니냐.”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어차피 우리 모두 알 수 없는 것 아니냐.”
“다 모르는 마당에 과학은 무엇이고 미신은 또 무엇이냐, 어차피 이 모든 것이 나름의 세계 해석 아니냐, 뉴턴의 법칙도 하나의 세계 해석이고 사주나 별자리점도 하나의 세계 해석이다.”
“근대의 특별한 세계 해석인 과학만이 진리인 것처럼 여기면서 진리의 담지자 서구유럽이 미개한 다른 문명을 지배하고 복속시키고 개종시키는 것을 정당화했지만, 아메리카 원주민의 세계 해석과 지혜나 아프리카 흑인들의 세계 해석과 지식, 그리고 세계 곳곳 토착민들의 오래된 삶의 지혜들도 모두 가치있는 것들이었다.”
“과학이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 해석임이 드러난 만큼 우리는 과학의 지배, 전문가의 지배를 거부하고 ‘오래된 미래’라 할 수 있는 각 지역마다의 토착적 지식과 세계관들을 재발견하고 다시 평가하여 세계 단일 문명을 지역마다의 고유하고 다양한 문명의 병존으로 되돌려야 한다.”

직접 존재 세계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닌만큼 모든 앎이 상상이자 해석, 관(觀)에 불과하다, 어느 것 하나 ‘객관적으로 입증’되지 못하는 만큼 모두 다 진리가 아니거나 모두 다 진리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현대의 과학만이 진리의 자리를 독차지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이 이러한 반지성주의 흐름의 골간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의 모든 앎들을 다 평평하게 만든다고나 할까요.

장회익은 『과학과 메타과학』의 ‘모형론’을 통해서 이 물음에 답한 바 있습니다. 우리의 세계 인식은 우리가 우리 내면에 창의적으로 창조한 세계에 대한 모형인데 이 모형의 진위 여부는 세계와의 직접 비교를 통해서 가려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형을 검증할 수 있는 수단은 감각 지각을 통해서 우리 내면으로 들어오는 비교적 단편적인 신호 정보들과 모형의 짜임새 자체에 대한 판단 능력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다양하게 세계에 대한 모형을 세울 수 있습니다. 어떤 앎이건 본질적으로 모사가 아니라 모형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형과 모형을 비교하여 모형 간의 우월을 가리고 더 나은 모형으로 전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계를 원천적으로 모사할 수 없는데도 우리가 이토록 탁월한 앎을 갖게 된 이유입니다.

 『자연철학 강의』에서는 ‘모형’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지만 앎의 틀이라고 하는 성공한 모형의 전범을 통하여 우리가 자연 세계의 기본원리를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그 앎의 틀은 어떻게 발전, 대체되었는지, 또 앎의 틀은 어떻게 바탕 구도와 바탕 관념으로 구조화되어 있고 과학은 어떻게 바탕 구도 뿐 아니라 바탕 관념까지 혁신하여 왔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종합하건대 장회익은 『과학과 메타과학』에서부터 『자연철학 강의』에 이르는 저서들에서 우리의 인식은 우리 피부 밖으로 나갈 수 없으나 세계에 대한 모형을 세워 우리 안에 존재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에 대한 모형은 반드시 우리 밖에서 오는 감각 지각 정보를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구조를 가져야 하므로 우리의 세계 이해는 우리의 창조물이되 존재 세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감각 지각 정보를 더 잘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짜임을 갖춘 모형이 그렇지 못한 모형보다 더 나은 이해와 결과를 주기 때문에 우리가 창조한 모형들은 동등하지 않습니다. 모형과 모형의 비교를 통해 우리의 앎은 더 나은 세계 이해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왔습니다. 인간의 상상을 통해 세계에 대한 모형이 창조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세계 곳곳의 여러 가지 토착적 앎들을 모두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가 간과했지만 앞으로의 좋은 씨앗이 될 발상과 접근법이 얼마든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현대 과학과 미아리 무당의 이야기를 똑같이 놓고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은 앎의 모형론을 통해서 이성을 수호하고 있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2) 과학혁명은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한계 위에서 어떻게 우리의 앎이 더 나아지고 있다 할 수 있는가?

20세기의 인식론은 과학철학의 영역에서 격변을 겪어 왔습니다. 근대과학과 이성의 빛으로 모든 앎을 재정비하고자 했던 논리실증주의는 ‘객관적으로 검증된 앎’만을 남기고 그렇지 못한 앎들을 제거함으로써 인류를 앞으로 전진시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 논리실증주의의 기획을 좌절시켰습니다. 포퍼는 이에 ‘반증주의’를 들고 나와서 위기에 처한 이성을 구원하고자 했습니다. 어떠한 이론은 입증될 수 없으나 반증은 될 수 있으므로 손쉽게 반증이 가능하도록 구성이 되어 있으나 반증이 되지 않은 앎은 잠정적 진리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강력한 이론이었지만 토마스 쿤은 역사상의 과학혁명이 앞선 이론을 새로운 이론이 반증함으로써 합리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서로 통약불가능한 패러다임과 패러다임이 맞서다가 세대 교체 등과 같은 ‘비합리적인’ 과정을 거쳐서 일어났음을 보여 반증주의를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쿤은 그렇다고 자신이 상대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패러다임론은 과학, 더 나아가 앎의 진보를 의심케 하였습니다.

장회익 자연철학은 이론의 반증 및 패러다임의 교체를 모두 아울러서 앎의 진전 과정을 이해하고자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실이 바탕 구도와 바탕 관념으로 짜여져있는 앎의 틀에 대한 이해입니다. 서로 다른 이론과 서로 다른 패러다임마저도 함께 가지고 있는 구조가 있다면 우리는 과학혁명이나 앎의 크고 작은 변화를 공통의 구조 안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모든 앎이 장회익이 말하는 앎의 바탕 구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미래 예측이 가능한 형태의 앎이라면, 그리고 존재 세계에 대해 말하는 앎이라면 이 틀을 갖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앎의 틀 위에서 바탕 구도의 변화, 또는 바탕 관념의 변화로 역사상 굵직한 기본원리에 대한 앎의 변화를 이해하게 되면 그 변화의 핵심 내용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 변화의 방향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장회익은 더 보편적이고, 앞선 이해를 포괄하면서 더 높은 설명력을 가지는 방향으로 앎의 바탕 구도와 바탕 관념이 혁신되어 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대체로 과학혁명에 해당하는 예들은 바탕 관념의 혁신의 사례이거나 적어도 바탕 관념의 혁신을 동반하는데 성공한 혁신은 언제나 앞선 성공을 포괄하면서도 더 넓은 설명이나 이해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2+1차원 공간 관념에서 3차원 공간 관념으로, 3+1차원 공간-시간 관념에서 4차원 시공간 관념으로 바탕 관념이 혁신할 때 세계에 대한 질문 자체가 달라지는 토대의 변화가 일어난 셈인데 이 변화는 보통 새로운 바탕 관념이 있을지 상상도 하기 어려울만큼 어렵게 일어났지만 변화 후에는 유익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과거에는 그러한 변화가 바탕 관념의 변화인지도 몰랐고 그러한 바탕 관념을 의식적으로 검토하고 비판하는 작업이 가능할지도 몰랐지만 앞으로 우리는 여러 분야의 다양한 바탕 관념들을 찾아내어 의식적으로 검토함으로써 더 나은 앎을 향한 혁명적인 전진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장회익의 앎의 틀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3) 사실명제로부터 당위명제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자연주의적 오류’의 한계 위에서 우리의 가치 판단은 어떻게 앎에 기반할 수 있는가?

무어는 “~이 어떠하다”는 사실명제로부터 “~을 해야 한다”는 당위명제를 이끌어내는 것은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정리하였습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는 정리이지만 현실적으로 수용하기도 사뭇 곤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사실에 대한 앎과 전혀 무관하게 가치 판단을 하고 도덕적 당위를 설정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장회익은 『삶과 온생명』이란 책에서 동아시아의 고전적 지식들을 탐구하기도 하였습니다. 동아시아의 근대 이전의 지식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사실로부터 당위를 이끌어내고 이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 까닭이었습니다. 그 결과 동아시아 및 근대 이전의 지식들 상당수가 ‘대생(對生) 지식’으로 분류되는 지식이고 이를 현대 과학과 같은 ‘대물(對物) 지식’의 잣대로 평가할 수 없다는 점을 밝힌 바 있습니다.

『삶과 온생명』의 논의를 따르자면 대생지식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가치는 무엇인지를 깨우치는 것을 앎의 주된 목표로 보고 그것을 위해 세계를 탐구하고 통찰을 얻으려 하였습니다. 반면 대물지식은 대상에 대한 정확하고 엄밀한 앎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하는 지식이었습니다. 장회익 자연철학은 대상지식의 지향을 신뢰할 수 있는 앎을 얻어내는 대물지식에 담아내고자 합니다. ‘대생지식의 정신을 가진 대물지식’이 장회익 자연철학이 추구하는 하나의 방향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실적인 앎인 대물지식으로부터 당위적인 방향을 얻을 수 있을까요? 장회익 자연철학은 『과학과 메타과학』에서 이 논리적인 단절을 돌파하는 지점을 ‘결속점’이라고 부르면서 논의를 하고 있는데 물질로부터 생명이 출현하여 그 자신을 존속시키고 있다는 점이 바로 사실로부터 당위가 도출되는 중요한 지점이 되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안정된 자유에너지 흐름 속에서 바탕질서와 다양한 국소질서가 형성되어 있는 일차질서에서 자체촉매적 국소질서의 존속율이 1을 넘길 때 생명이라는 질서가 물질 세계 속에 유지됩니다. 역사적으로 존속율 1 이상을 유지하지 못해 명멸한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들이 무수히 많았겠는데 이 때 외부의 자극에 대해 선택적 반응을 일으키는 변별 구조는 낱생명 층위에 서술모드로 작용하여 외부 상황을 정확히 반영하고 그에 대해 존속율을 유지하거나 높이는 방향으로의 반응을 하는 변별구조가 그러한 변별구조 덕에 번성한 낱생명들과 함께 남았을 거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우연히 자기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에 해당하는 구조라 생긴 낱생명들은 더 번성하고, 그러한 의지를 가진 낱생명들에 어떤 변별구조는 외부 상황에 대한 사실적 반영에서 존속 의지를 반영하는 방향이나 당위의 지위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생명의 자기 유지 지향은 사실로부터 가치를 끌어내고 당위를 끌어내는 통과지점이 됩니다. 더 나아가 물질의 측면과 나, 그리고 정신의 측면이 하나를 이루면서 서로 번갈아 전면에 등장하는 뫼비우스의 띠 모형은 사실과 당위의 연결을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장회익 자연철학의 ‘온전한 앎’은 바로 사실과 당위, 과학과 윤리가 함께 담기는 틀이 되는 것 같습니다.

4. 몇 가지 아쉬운 점들

마지막으로 앞으로 보완했으면 하는 아쉬운 점 몇 가지도 적어 봅니다.

첫째, 이 이론은 존재 세계의 결정론적 구조를 강하게 함축하는데 상태 변화의 원리에 따라 나중 상태가 결정되는 세계 속에서 어떻게 선택이 가능하게 되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예측을 한다는 것은 변화의 원리에 따라 ‘필연’이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선택’을 하려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우연’의 여지가 있어야만 합니다. 이 둘 모두가 어떻게 다 가능한지 ‘우연과 필연’에 대한 이야기를 앞으로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둘째, ‘나’가 왜 출현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더 풍성한 논의가 뒤따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귀류법에 근거하여 ‘나’가 없는 세계가 있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은 논리학에 숙달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큰 의구심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다른 대목들의 풍성한 과학적 논의에 비하면 ‘나’의 출현에 대한 논의는 왜소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려운 과제이겠지만 이 세계에 어떻게 ‘나’가 나오게 되었고 나올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더 살을 찌워야 하겠습니다.

셋째, 양자역학의 <공리 4>에 대해서도 설명이 더 많아지기를 희망합니다. <공리 4>가 요청된 역사적 사실과 배경은 무엇인지, <공리 4>를 공리로 놓지 않고 이해를 해보려던 기존의 시도들이 왜 성공하지 못했는지, <공리 4>를 비로소 공리에 놓고 풀어갔을 때의 장점이 무엇인지 더 풍부한 서술이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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