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과학의 철학적 수용은 어떻게 가능한가? – ‘새 자연철학’을 제안하며 (1)

「현대과학의 철학적 수용은 어떻게 가능한가?」 장회익 2021. 『현대과학과 철학의 대화-적극적 소통을 위한 길 찾기』 한국철학회 엮음. 한울(2021) p.20~55. [이 글은 2021.5.29. 한국철학회 발표자료이며, 저자의 동의를 구하여 이곳에 소개합니다.]


현대과학의 철학적 수용은 어떻게 가능한가? – ‘새 자연철학’을 제안하며 (1)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

목차

1. 들어가는 말
2. 일상적 관념의 틀을 통한 현대과학의 수용
3. 보편적 관념의 틀: 뫼비우스의 띠
4. 자연의 기본 원리
5. 우주의 보편적 존재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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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현대과학은 우주와 인간에 대해 많은 새로운 앎을 제공하고 있으나, 이것이 곧바로 현대인의 집합적 지성 안에 수용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앎을 수용한다는 것은 새로 접수되는 정보를 이미 우리 안에 마련되어 있는 관념의 틀 위에 적절히 정착시키게 됨을 의미 한다.

따라서 과학이 밝혀낸 내용을 자기 안에 수용하여 그 내용을 파악하는 것도 각자가 지닌 기존 관념의 틀이 어떠하냐에 따라 모두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실 이런 관념의 틀은 누구나 지니고 있으며 모든 사고가 이를 통해 진행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명시적으로 파악하여 의식적으로 검토하는 일은 많지 않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이미 지니고 있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생명 개념이 우리 관념의 틀을 이루는 대표적 바탕 관념에 해당하는 것인데, 우리의 사고 속에서 이들이 어떻게 형성되며 또 구체적으로 어떠한 내용을 지니는지를 먼저 검토하고 사고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칸트가 이미 오래 전에 지적했듯이, 이러한 것들은 대부분 암묵적으로 전제되는 가운데 이들로 이루어진 관념의 틀 안에서 사고가 이루어진다.

이처럼 과학의 앎이 특정인의 지성에 수용되기 위해서는 수용자가 기왕에 지닌 관념의 틀을 경과해야 하는데, 이러한 관념의 틀은 수용자 개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제 이 관념의 틀을 편의상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본다면, 분절적 형태의 관념의 틀통합적 형태의 관념의 틀로 구분할 수 있다.

우리의 일상적 사물 이해는 대체로 분절적 형태의 관념의 틀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통합적 이해를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우리는 현대과학이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앎을 오직 분절된 형태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분절된 지식은 많은 경우 인간의 생존 여건 향상이나 인간 자신의 건강관리 등을 위해 유용한 측면을 가지지만, 이를 통해 우주와 생명 그리고 인간에 대한 총체적 이해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오직 통합적인 관념의 틀을 통해 과학의 내용을 천착할 경우, 우리는 우주와 생명 그리고 인간에 대해 기존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심층적 통찰과 함께 삶의 바른 방향의 모색에 임할 수 있다.

현대문명이 당면한 가장 큰 위험은 현대인이 일상적 관념의 틀에만 매여 우주와 자신에 대한 심층적 이해에 이르지 못하고 문명의 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이르게 된 데에는 현대철학에 그 일말의 책임이 있다. 한 시대에 통용되는 다양한 앎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 내용을 심층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바른 삶을 위한 지혜를 제공하는 것이 철학 본연의 자세라고 한다면, 현대철학이 추구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바로 이러한 통합적 관념의 틀을 마련하고 이를 바탕으로 현대과학의 성과를 심층적으로 재구성해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현대의 과학과 철학은 실질적으로 그 연계를 상실하고 각자 별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현대과학의 내용이 너무도 방대하여 철학이 미처 이것을 자체 내에서 소화해내기 어려운 상황이 그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지만, 이에 못지않게 현대의 과학과 철학이 이 문제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이 문제에 대한 현명한 방법론을 마련해내지 못한 데에도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하나의 시론으로서 통합적 관념의 틀이 무엇이며 이를 통해 마련된 우주와 인간의 진정한 모습은 과연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그러나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그 주된 논지를 간략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주내의 사물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기본원리를 바탕으로 우주의 보편적 존재양상을 하나의 일관된 관념의 틀 안에 정합적으로 파악해내어야 한다. 그리고 특히 이 보편적 존재양상의 일환으로 생명이라고 하는 매우 특이한 현상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으며 그 안에 놓인 인간의 위상 그리고 주체로서의 ‘나’가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생명과 인간에 대해 일상적 관념의 틀로 파악된 내용과는 크게 다른 생명과 인간 본연의 모습에 접하게 된다. 즉 생명의 가장 본질적인 단위는 그 안에 각종 생명체들을 담고 있는 ‘온생명’이며, 이것이야말로 더 이상 외부로부터의 결정적 도움 없이도 존속해나가게 되는 생명의 자족적 단위에 해당한다. 한편 그 안에 “생명을 담고 있다”고 여겨져 온 각종 생명체들은 온생명과의 연결을 통해서만 생명으로의 기능을 하게 되는 조건부적 단위에 해당한다. 한 개체로서의 인간, 그리고 한 생물종으로서의 인류 또한 이러한 단위이며, 따라서 이들은 모두 온생명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생명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은 독자적 존재이기에 앞서 온생명의 한 부분이며 집합적 의미의 인간 곧 인류는 굳이 말하면 온생명의 ‘두뇌’에 해당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나’는 온생명으로서의 ‘나’ 곧 ‘큰 나’에 해당하며 개체를 지칭하는 일상적 의미의 ‘나’는 제한된 의미의 ‘나’ 곧 ‘작은 나’에 해당한다. ‘나’와 ‘내 몸’의 정체성을 이렇게 규정할 때, 우리가 진정으로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지향할 문명의 방향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

2. 일상적 관념의 틀을 통한 현대과학의 수용

현대과학은 우주와 인간에 대해 종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많은 새로운 앎에 도달하고 있으나 그 분량이 광대하고 그 내용 또한 심오하여 설혹 전문 과학자라 하더라도 그 내용을 모두 파악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더구나 전문적인 학습을 거치지 않은 일반 대중에게는 그 개략적인 이해조차 쉽지 않다.

하지만 관심을 가진 일반인들에게는 이에 접근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이 열려있다. 유능한 해설가들에 의한 과학 관련 해설서들과 과학 관련 강연들이 그것이다. 이들은 과학이 성취한 새로운 앎의 일정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우주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넘어설 수 없는 중요한 한계가 있다. 이것은 오직 일상적인 관념의 틀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과학의 해설이란 과학의 내용을 분해하여 수용자가 지닌 일상적 관념의 틀에 담아냄을 의미하는데, 이 과정에서 이에 담기지 않는 많은 본질적 내용들이 부득이하게 제외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왜곡될 가능성조차 없지 않다. 

하나의 사례로 최근 많이 읽히고 있는 한 문헌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생각해보자.

지금으로부터 38억 년 전 어느 날 최초의 생명이 등장했다. 그리고 점진적인 진화과정 속에서 수많은 생명체가 발생했다… 지구는 단세포 생물부터 어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종과 형태의 생명체로 뒤덮였다.

다채로운 생명들 속에서 모든 인류의 조상이 등장했다… 4만 년 전, 인류 진화의 최종 형태로서 사피엔스가 등장했다. 이들은 지구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구인류를 몰아내고 지구상의 유일한 인간 종이 되었다. 그리고 7천 전 문명이 탄생했다.

– 채사장,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 whale books (2019), 167~168쪽. 

이 문장은 현대과학이 일반 지성인에게 알리는 매우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말하는 ‘생명’과 ‘인간’에 관한 서술 안에는 이미 중요한 한계가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생명이 38억 년 전 어느 날 등장하여 점진적인 진화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고, 또 이 생명들 속에서 인류의 조상이 등장했다고 하면서, 생명 그리고 인간의 개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 설명을 제시하지 않는다.

즉 이 서술이 전제로 하는 관념의 틀 안에는 이미 ‘생명’과 ‘인간’(인류)이라는 우리의 일상적 개념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과학은 단지 이들이 역사의 어느 시점에 어떠한 과정을 거쳐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말해줄 뿐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점은 이들이 어떠한 합법칙적 연관을 통해 등장하게 되었는지도 말해주지 않는다.

여기서 전제로 하는 일상적 관념의 틀 안에는 이미 설정된 ‘생명’, ‘인간’, ‘등장’(출현)에 해당하는 개념과 상치되는 다른 무엇이 담겨있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의 내용 안에 이들 개념만으로 서술할 수 없는 좀 더 포괄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하더라도 이를 일반인들에게 ‘해설’하기 위해서는 결국 그들이 알아들을 언어 즉 그들이 지닌 관념의 틀 안에 이미 들어있는 일상적 개념들로 분절시켜 서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물론 이러한 해설들 그리고 이를 통해 전달되는 내용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만으로도 기왕에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던 많은 것들을 새로 깨닫거나 시정해주는 효과가 있다. 생명과 인간이 몇 천 년 전에 생겨났다거나 또는 무한히 먼 과거부터 같은 모습으로 존재해 왔으리라고 하는 그릇된 생각에서 벗어나게 하며, 또 자연의 질서를 벗어나는 어떤 초자연적인 주술에 의해 빚어졌다고 하는 믿음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같은 맥락에서, 인간의 유전정보가 신체내의 일정한 물질적 구조 속에 각인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또 신체와 정신 사이에 분리될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 등도 신경생리학 등의 발전을 통해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특히 여기서 괄목할 점은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질병의 퇴치를 비롯해 현대인의 신체적 건강을 향상시키는 일에 엄청난 진전을 가져오고 있으며, 그 결과로 인간의 기대수명도 크게 높아지고 있다. 심지어는 인공장기의 발전과 더불어 무제한의 수명연장 가능성마저 지닌 이른바 트랜스휴먼 개념이 등장하면서 인간의 존재 의미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논의까지 제기되고 있다.(이브 헤롤드. 김병철 옮김.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 트랜스휴머니즘의 현재 와 미래』. 꿈꿀자유. 2020)

문제는 이러한 인간 이해가 현대과학에 바탕을 둔 인간 이해의 전모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이 지닌 개념적 한계로 인해 현대 문명을 이끌어가는 주류 사상이 이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좀 더 힘들더라도 통합적 관념의 틀에 바탕을 둔 심층적 이해를 도모함으로써 문명의 방향이 오도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3. 보편적 관념의 틀 : 뫼비우스의 띠

근대과학 특히 현대 물리학에서는 기존의 관념 틀로는 파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종종 발생하기에 마지못해서라도 이 관념의 틀을 넓혀나가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이 관념의 틀이 가지는 중요성이 점차 부각되고 있음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적지 않은 전문 과학자들조차도 과학이 말해주는 내용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이 관념의 틀 자체를 의식적으로 수용해내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우주와 인간에 대해 과학이 전해주는 포괄적 이해를 위해서는 과학 자체가 바탕으로 삼고 있는 관념의 틀 뿐 아니라 여러 학문 분야들을 그 근간에서 연결하고 있는 더욱 포괄적인 관념의 틀을 의식적으로 마련하고 이를 바탕으로 과학이 말해주는 내용들을 재해석하는 심층적 작업이 요청된다. 이렇게 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우주와 그리고 그 안에 놓인 자신의 참 모습을 그려볼 수 있고 이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이르게 된다.

우리의 일상적 관념의 틀이 지닌 가장 큰 약점은 이것이 전체를 통괄하지 못하고 각각의 부분들에 주목하면서 이들 사이의 관계를 오직 피상적으로만 파악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통합적 관념의 틀은 전체의 얼개를 한 눈에 담아낼 수 있는 틀을 말하게 되는데, 이 두 가지 바탕 틀을 구분해 줄 적절한 비유로, 평면 위에 그려진 지도와 지구본 위에 그려진 지도의 차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부분적인 지도들은 하나의 평면 위에 얼마든지 자세히 그릴 수 있지만 전체를 담을 수 없으며, 무리하게 전체를 담으려 하면 서로 인접한 두 지점이 왼쪽 끝과 오른 쪽으로 나누어져야 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반면 하나의 평면이 아닌 구형의 바탕 즉 지구본을 바탕 틀로 지도를 그리면 이런 어려움을 피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지도의 경우 지구의 참 모습이 구형이라고 하는 것을 알기에 이것이 가능하지만, 앎의 경우에는 앎의 참 모습이 어떠한 기하학적 구조를 지니는지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초기의 지도 제작자들도 지구가 둥근 모습을 지녔다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어느 시기부터 지구가 둥글다는 가설을 세우고 여러 증거들을 통해 이를 검증해가며 평면이 아닌 지구본 위에 지도를 그려 이를 들고 지구상의 모든 지역으로 다녀보면서 이를 확인해 나갔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지금 앎의 기하학적 구조를 직접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이에 대한 적절한 가설을 설정하고 이를 검증해나가면서 잠정적으로나마 앎의 ‘온전한 지도’ 곧 ‘온전한 앎’을 그려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가 먼저 온전한 앎의 구조가 지닐 것으로 예상되는 몇 가지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그 안에 논리적 모순이나 단절이 있어서는 안 되리란 점이다. 그런데 단절이 없는 위상학적 구조로 우리가 잘 아는 것은 원이나 구와 같이 모든 지점이 서로 연결되는 구조이다. 대표적 사례로 지구상의 모든 위치가 반드시 이웃을 지녀야 하며 구球라고 하는 기하학적 구조가 이를 만족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둘째로 ‘온전한 앎’은 앎을 담는 체계이기에 이것은 앎이 지닌 본질적 성격, 즉 앎의 객체와 주체를 함께 반영해야 하리라는 것이다. 앎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앎의 대상이 있고 이를 알아내는 주체가 있기 마련인데, 성격상 대비되는 그러면서도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는 이 두 가지 양상을 함께 담아내면서 이 둘 사이의 관계가 적절히 반영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 특성들을 간결한 기하학적 구조 속에 반영하고 있는 한 단순한 모형으로 우리는 ‘뫼비우스의 띠’를 생각해볼 수 있다.(장회익. 「‘뫼비우스의 띠’로 엮인 주체와 객체」. 이정전 외. 2014. 『인간 문명과 자연 세계』. 민음사. p.63-101) 뫼비우스의 띠는 우선 전체적으로 하나의 원형을 이룸으로써 전체를 정합적 관계로 연결하는 것이 가능하고, 표면과 이면을 지님으로써 이를 각각 객체와 주체에 대응시킬 수 있다. 이 띠는 또 표면과 이면이 서로 교체되는 형태를 가지는데, 이것은 객체와 주체의 기능적 역할이 전환되는 관계를 표현하기에 매우 적절하다. 이 모형의 개략적인 모습을 하나의 도식으로 나타낸 것이 <그림 1>이다.

<그림 1> 온전한 앎의 뫼비우스의 띠 모형

<그림 1> 안에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앎의 주요 구성 요소들이 뫼비우스의 띠 형태로 배열되어 있다. 이 각 요소들은 띠 형태로 서로 맞물려 있기에 그 시작과 끝이 따로 없지만, 그 가운데서도 ‘자연의 기본원리’를 출발점으로 택하여 이들 사이의 관계를 살펴나가는 것이 논리의 흐름으로 볼 때 가장 자연스럽다.

우리가 일단 ‘자연의 기본원리’를 파악하고 나면 이를 통해 우주의 보편적인 존재양상을 찾아낼 수 있고, 이 존재양상 가운데 한 특수한 사례인 ‘생명’을 이해할 수 있으며, 다시 그 중요한 한 구성원인 ‘인간’의 위치를 이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인간’이 지닌 매우 놀라운 성격은 이것이 물질적 구성을 지닌 ‘객체’인 동시에 정신을 지닌 ‘주체’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 둘이 서로 어떻게 관련 되는가하는 문제는 이른바 ‘몸/마음 문제body/mind problem’라 하여 오랜 기간 동안 철학적 논란의 초점이 되어왔다. 그러나 근래에 이르러 신체의 신경생리학적 기능에 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몸과 마음은 서로 분리된 두 개의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실체가 나타내는 두 측면이라는 관점이 큰 신빙성을 얻고 있다. 이는 바로 “이들이 둘이 아닌 하나이면서, 두 측면 곧 밖과 안을 지녔다”고 하는 ‘일원이측면론一元二側面論’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표면과 이면의 양 속성을 지닌 ‘뫼비우스의 띠’ 모형에 잘 부합되고 있다.

우리가 이제 자연의 기본원리에서 우주와 생명 그리고 인간의 몸에 이르기까지의 객체적 양상들이 ‘뫼비우스의 띠’의 표면층에 해당한다고 할 때, 인간에 이르러 그 이면에 있던 주체가 드러나면서 주체로서의 활동이 현격해지는 현상이 바로 뫼비우스의 띠가 이 지점에서 뒤집혀 이면이 표층으로 노출되는 구조에 해당된다. 이렇게 하여 ‘나’ 그리고 나의 의식적 활동으로서의 ‘삶’이라고 하는 주체적 양상들이 새로운 표면층에 자리 잡고 가시화되며, 이러한 인간의 주체적 활동에 의해 조성되는 모든 결과물이 바로 우리가 통칭 ‘문명’이라 부르는 것에 해당한다.

한편 이 문명이 이루어내는 중요한 한 요소가 ‘앎’ 곧 사물의 인식 활동이 이루어낸 체계적 지식이다. 이 가운데 특히 ‘자연에 대한 사고’를 통해 자연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이러한 이해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 바로 ‘자연의 기본 원리’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뫼비우스의 띠를 한 바퀴 돌면서 최초의 출발점이던 ‘자연의 기본 원리’로 되돌아오게 된다. 여기서 특히 주체의 측면에 해당하는 인간의 의식적 사고 활동이 객체의 측면에 해당하는 ‘자연의 기본 원리’에 연결된다는 점은 그 사이에 ‘뫼비우스의 띠’가 한번 꼬임으로써 그 내면과 외면이 서로 연결되는 구조와 잘 부합한다.

이처럼 앎의 주된 내용들이 ‘뫼비우스의 띠’ 위에 자리를 잡게 되면 이들 사이의 논리적 연관관계가 명료해지며, 따라서 어느 하나의 진리성은 다른 모든 것의 진리성에 맞물려 서로가 서로를 입증해주는 정합적 진리 체계를 이루게 된다. 물론 이러한 체계의 얼개가 구성되었다고 하여 이것이 곧 앎의 완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안에 담길 하나하나의 세부 사항들은 계속해서 탐색되고 검증되어야 하며, 이러한 점에서 뫼비우스의 띠는 돌고 돌면서 자체 안에 담을 내용을 더욱 풍요롭고 정교하게 다듬어 나갈 틀거지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같은 지구본 위에 담긴 지도라 하더라도 지리적 지식이 증진됨에 따라 그 내용이 풍요롭고 정교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다소 성근 내용을 지닌 앎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일단 뫼비우스의 띠 안에서 바른 위치에 자리를 잡을 수만 있다면, 그 신뢰성은 그렇지 못한 앎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향상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틀지어진 앎을 여타의 파편적 앎들과 구분하여 ‘온전한 앎’이라 부르기로 한다.

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이 ‘뫼비우스의 띠’를 구성하는 이들 각 요소들과 이들 사이의 연결 과정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추적함으로써 우리가 현재 생각할 수 있는 ‘온전한 앎’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살펴보고, 특히 이를 통해서 인간의 자기이해를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 이것이 바로 통합적 관념의 틀을 바탕으로 과학이 말해주는 내용들을 재해석하는 심층적 작업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최근 저서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앞으로는 ‘자연철학 강의‘로 약칭)에서 찾아볼 수 있다.(장회익.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추수밭. 2019.)

4. 자연의 기본 원리

현대과학에서 통용되고 있는 자연의 기본 원리는 크게 두 가지 부류로 구성된다. 그 하나가 ‘존재의 원리’라 할 수 있는 동역학이고, 다른 하나가 ‘변화의 원리’라 할 수 있는 통계역학이다. 동역학에서는 “우주 안의 물체들이 놓일 수 있는 가능한 상태(미시상태)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다루며, 통계역학에서는 “이러한 미시상태들과의 관계 속에서 관측 가능한 형상(거시상태)들이 어떻게 서로 다른 형상들로 변화해 나가는가?”하는 점을 다룬다. 이들의 내용에 대해서는 ‘자연철학 강의’에 상세히 서술했으므로 여기서는 오직 이들의 개략적인 줄거리와 함께 우주 내에 발생하는 많은 중요한 현상들이 이들을 통해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는지에 대해서만 살려보기로 한다.

예를 들어 우리의 주된 관심사가 우주 내에 존재하는 물 1kg (H2O 분자 3×1025개)이라고 해보자. 여기서 이것은 고체 형상(얼음)으로 있을 수도, 액체 형상(물)으로 있을 수도, 기체 형상(수증기)으로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그런데 각각의 가능한 형상을 결정해주는 것이 양자역학으로 대표되는 동역학 이론이며, 이들이 어떤 경우에 어떤 형상에 있으며 또 어떤 조건 아래 어떤 형상으로 바뀌는가를 말해주는 것이 통계역학 이론이다.

그리고 이러한 형상의 변화를 서술하기 위해 요구되는 중요한 두 개념이 바로 그 대상이 지닌 에너지(energy: U) 엔트로피(entropy: S)이다. 여기서 엔트로피는 한 형상(거시상태)에 대응하는 미시상태의 수와 관련된 개념으로, 개략적으로 말해 대상의 짜임새가 ‘정교하지 못한 정도’ 즉 이것이 ‘흐트러진’ 정도를 나타낸다. 한 고립계, 예를 들어, 외부와 고립된 물 1kg의 경우 이것의 형상이 내부적 요인 만에 의해 변할 수 있는 방향은 그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 즉 점점 더 흐트러지는 방향이다. 그러다가 그 엔트로피 값이 최대에 이르는 형상(가장 크게 흐트러진 형상)에 이르면 더 이상 아무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이 일정한 온도를 지닌 주변 예컨대 실내에 있는 공기와 에너지를 주고받을 상황에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주변 온도가 내려가면 물이 얼기도 하는데, 이는 엔트로피가 낮아지는 방향으로의 변화이다. 이는 주변과의 에너지 교환이 있기에 가능한 현상이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관심 대상(예: 물 1 kg)의 변화를 서술하기 위해 요구되는 가장 적절한 개념이 바로 F=U-TS 로 정의되는 이 대상의 자유에너지(F)이다. 여기서 U와 S는 각각 이 대상의 에너지와 엔트로피이고 T는 주변의 온도(엄격히 말하면 영하 273℃를 기준으로 하는 절대온도)이다. 대상의 자유에너지를 이렇게 정의할 때 대상의 형상 변화에 대한 기본원리는 “자유에너지가 감소하는 방향으로만 변한다.”고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은 확률적 법칙이다.

미시적으로는 그 반대 쪽 변화도 가능하나 그 확률에 큰 차이가 있어서 이 방향의 변화가 월등하게 우세하다. 이 원리를 활용하면, 물은 왜 상온에서는 액체로 있고, 또 0℃(절대온도 273°K) 이하가 되면 고체가 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물의 경우, 상온에서는 액체 형상의 자유에너지가 최소로 되며, 영하의 온도가 되면 고체 형상의 자유에너지가 최소로 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자연계에 정교성을 지닌 여러 형상들이 어떻게 발생하고 변화하는지를 이해할 기본 이론을 갖추었다. 즉 어떤 대상 계의 자유에너지를 몇몇 변수들의 함수로 표현해내기만 하면, 이 변수 공간에서 자유에너지 값이 가장 작아지는 상황을 찾아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대상 계가 지니게 될 형상에 해당한다.

5. 우주의 보편적 존재양상

이러한 자연의 기본원리를 바탕으로 우리는 이제 우주의 다양한 존재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현대 우주론에 따르면 우리 우주는 대략 138억 년 전에 빅뱅big bang이라고 하는 특이한 상황과 함께 출현했다. 이 최초의 상황에서는 시공간을 포함한 모든 것이 극히 작은 영역에 집결되어 있어서 그것의 온도는 극도로 높았고, 따라서 당시 우주의 자유에너지는 엔트로피가 최대로 되는 지점에서 최소치를 가지게 되어 그 안에는 구분 가능한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F=U-TS에서 온도 T가 매우 큰 경우, 엔트로피 S가 조금이라도 더 큰 경우 (에너지 U 값에 무관하게) 자유에너지 F의 값이 최소가 된다.)

이후 우주 공간이 이른바 급팽창inflation이라는 특별한 과정까지 동반하며 시급히 팽창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그 온도가 급격히 낮아지면서 자유에너지의 최소점은 점점 정교성이 큰 형상에 대응하는 쪽으로 옮겨졌다. 이는 곧 혼돈에서 벗어나 일정한 질서가 나타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리하여 극히 짧은 시간 이내에 초기의 기본입자들과 기본 상호작용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고, 대폭발 이후 불과 2~3분 이내에는 이미 양성자와 중성자 같은 핵자들이 나타나, 수소, 그리고 헬륨 등 일부 가벼운 원소들의 원자핵들이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아직도 온도가 너무 높아 이 원자핵들이 주위의 전자들을 끌어들여 우리가 오늘날 보고 있는 수소원자, 헬륨원자 등 중성원자를 이룰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빅뱅 이후 대략 38만 년이 지난 시기가 되자 온도가 훨씬 더 낮아지면서, 이들 원자핵이 전자와 결합하여 수소원자 등 가벼운 중성원자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는 곧 이 온도에서는 자유에너지의 최소점이 이들 중성원자들을 구성할 거시상태에 해당하는 것이었음을 말한다.)

그 후 수억 년의 시간이 더 지나면서 우주의 온도는 지속적으로 더 낮아졌고, 우주 공간에 떠돌던 수소 원자와 약간의 헬륨 원자들이 요동에 의해 약간의 불규칙한 공간 분포를 이루면서 상대적으로 밀도가 높았던 지역을 중심으로 중력에 의해 서서히 뭉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뭉쳐진 수소원자 등의 집단은 그 크기가 점점 커지고 그 중심부분에서는 강한 압력을 받아 온도가 크게 오르게 된다.

이러한 온도와 압력으로 인해 핵융합 반응이 촉진되어 무거운 원자핵들이 형성되는데, 이 때 발생하는 여분의 에너지가 주변으로 뿜어 나오는 현상을 우리는 별이라 부른다. 지구를 비롯하여 우주 안에 떠도는 대부분의 물질 원소들은 이러한 과정에서 조성된 것이며, 이들은 다시 지구를 비롯한 여러 천체들 위에서 다양한 형태의 물질적 구조물들을 이루게 된다. 

이처럼 우주 안에서는 빅뱅이라 불리는 최초의 시점 이래, 우주의 온도가 낮아지면서 여러 형태의 물질적 대상들이 형성되어 왔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변화의 원리 특히 온도의 변화에 따른 자유에너지 최소화 효과에 의해 나타난 것들이다. 이렇게 일단 자유에너지 최소 점에 도달한 대상들은, 더 이상 자유에너지에 어떤 변화를 줄 영향이 나타나지 않는 한, 비교적 안정하여 그 형상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제한된 공간을 점유하는 물체들 가운데에는, <그림 2>에 보인 바와 같이, 주변의 요동으로 인해 우연히 자유에너지 최소 점에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자유에너지의 값이 더 큰 우물 형태의 준안정 상태로 뛰어오를 수도 있다. 

<그림 2> 준안정 상태에 놓인 대상

이들은 대부분 또 다른 요동으로 인해 짧은 시간 안에 안정된 최소점으로 복귀하게 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준안정 상태의 우물이 깊어 비교적 오랜 기간 준안정 상태에 묶여 있기도 한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높은 자유에너지 값을 지니고 비교적 작은 공간 안에서 그 정교성을 준-안정적으로 유지하게 되는 대상을 ‘국소질서local order(LO)’라 부른다.

그런데 우리가 지구상에서 흔히 보듯이 이러한 국소질서들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 해볼 수 있는데, 그 하나는 비교적 낮은 정교성을 띤 것들이며, 다른 하나는 이에 비해 월등히 높은 정교성을 띤 것들이다. 앞의 것의 사례로는 돌 조각, 눈송이 등이 있으며, 뒤의 것의 사례로는 우리가 흔히 살아 있는 것이라 말하는 다람쥐, 민들레 등이 있다.


현대과학의 철학적 수용은 어떻게 가능한가? – ‘새 자연철학’을 제안하며 (2)” 읽기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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