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메타과학』 (장회익, 2012) – 1장. 자연과학의 연구 방법


녹색아카데미 웹진을 통해 장회익선생님의 글들을 소개합니다. 가능하면 녹색아카데미에서 진행하는 자연철학세미나의 주제에 맞추어 관련되는 책이나 논문, 칼럼과 강연 등을 찾아 알리고 내용을 요약해 이곳에서 읽고 보실 수 있게 할 계획입니다.

『과학과 메타과학』(2012, 현암사) 시리즈 두 번째이며, 1장인 자연과학의 연구 방법을 소개합니다. 1장은 과학적 연구방법론, 즉 과학적 지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논하고 있습니다. 먼저 연구방법론을 규범적 측면과 현실적 측면으로 나누어 고찰하고, 이 두 측면 사이의 관계를 검토한 후, 가능한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합니다.

규범적 측면은 근대과학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갈릴레이의 낙하법칙을 사례로 고찰한 후, 이렇게 만들어진 과학적 지식을 수용하는 과정에 대해 살펴봅니다. 연구방법론의 현실적 측면은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과 정상 과학 논의를 고찰합니다. 이 두가지 측면의 연구방법론을 통합하고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새로운 방법론을 도모하기 위해, 두 가지가 제안됩니다.

첫째, 과학 발전보다 방법론의 발전을 앞세워야 한다. 둘째, 과학적 지식에서 패러다임과 관련이 없는 본질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찾아내기 위해 전(前)과학적 지식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지식 패턴을 동일한 평면 위에 올려 놓고 고찰해야 한다. 이 작업이 우리 세대가 해야할 가장 큰 학문적 도전이라는 말로 논문은 마무리됩니다.

(대문 그림 : “Still Life with Spherical Mirror” M. C. Escher. 1934. 출처 : M. C. Escher Foundation)


1. 여는 말

인간이 만드는 지식은 일상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으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적 지식을 습득하고 창출하는 과정은 그동안 전(前)과학적인 방법에 의존해왔습니다. 그렇다면 과학을 학습하고 연구하는 과학적 방법은 없을까요? 아직은 어떤 공인된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과학 연구 방법과 관련된 논의들이 계속 고민되어 왔고 공개적으로 논의된 것들도 있으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 연구방법론의 두 가지 측면

과학적 지식을 연구하는 방법론은 규범적 측면과 현실적 측면이 있습니다.

  • 규범적 측면에서의 고찰 :  어떠한 방법으로 학문 연구를 해야 하는가.
  • 현실적 측면에서의 고찰 : 실제로 학자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학문 연구를 하는가.

학문을 연구하고 있는 당사자로서는 규범적 의미의 방법론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학문이 발전해나가는 양상 자체에 관심이 있다면 연구 당사자들이 어떻게 연구를 하는지 비중있게 다룰 것이며 현실적 측면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만일 두 가지 측면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면 이는 기존의 방법론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 되며, 더 고차적인 방법론이 필요해지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20세기 전반기에는 이른바 ‘비엔나 모임'(Vienna Circle)으로 대표되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규범적 방법론이 자연과학 방법론 논의의 주류였습니다.

1960년대 이후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 이론은 과학사적 논의를 중심으로, 현실적 측면을 크게 부각시켰습니다. 쿤은 실제 연구 현장에서의 연구 방식이 종래의 규범적 방법론과 전혀 다른 양상이라고 주장하여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쿤이 옳다면 자연과학 방법론 자체에 대해 새롭게 검토해보아야 하는데, 여기서는 다음 차례로 살펴봅니다.

  • 과학적 지식은 어떤 특성이 있는지 규범적 측면에서 보고,
  • 쿤의 관점에서 현실적 측면을 고찰하고,
  • 두 측면 사이의 관계를 검토하고,
  • 가능한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한다.

논의를 진행하기 위해 자연과학의 연구 과정을 (1)탐색 과정과 (2)수용 과정 두 가지로 분리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탐색 과정은 새로운 지식의 실마리를 찾아나가는 과정이고, 수용 과정은 찾아낸 지식의 단편이나 체계를 신빙성 있는 지식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 결정짓는 과정입니다.

과학계의 새로운 법칙이나 발견은 대체로 내부적인 탐색과 검토 과정을 거쳐서 발표되기 때문에, 그 내용이 특별히 수용상의 문제가 없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원칙적으로 독립적인 연구자들에 의해 확인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3. 과학적 지식의 추구 및 검증

새로운 지식 탐색을 위한 방법으로서 네 가지 방법론적 명제

자연과학의 연구 방법을 논하기 위해, 이 논문에서는 과학적 지식의 전형이라 할 만한 사례를 대상으로 삼아, 이 지식이 우리의 일상적인 지식과 어떻게 다른지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여기서는 현대 과학의 효시라 불리는 갈릴레이의 낙하 법칙을 사례로 보겠습니다.

이러한 전형적인 과학적 지식을 찾아나가는 데에는 네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기존 지식에 대한 반성적 사고, 둘째는 계량적 개념의 도입, 셋째는 실증적인 검토, 넷째는 합리적 체계 안에서 지식을 이해하는 것입니다.(p.31-32)

(1) 반성적 사고
과학적 지식을 추구하는 일은 기존의 지식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합니다. 만일 “무거운 물체는 가벼운 물체보다 더 빨리 떨어진다”는 상식적인 지식에 대해 조금의 의혹만 가질 수 있었다면 갈릴레이가 아닌 누구라도 낙하법칙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2) 계량적 개념
과학적 지식을 추구하는 방식은 계량적 개념을 통해 지식을 정밀화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근대 과학 이전에는 무겁다, 가볍다, 더 빠르다 등과 같은 정성적인 술어에 의존해 정도의 차이로 지식을 표현했습니다. 갈릴레이는 이러한 정도의 차이를 정량적으로 실측하고 고찰함으로써 새 지식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3) 실증적 검토
과학적 지식은 실증적 검토를 수행함으로써 추구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는 과학적 지식이 경험으로부터 도출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과학적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실증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실증 과정을 거쳤다고 해서 모두 과학적으로 신뢰할만한 지식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지식의 수용 문제에서 다시 논의합니다.

(4) 합리적인 체계
하나의 합리적인 체계 속에서 여러 단편적인 지식들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바로 과학적 지식을 추구하는 방법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물체는 모두 동일한 가속도를 지니고 낙하한다”는 갈릴레이의 낙하법칙은  왜 그런가하는 질문을 끌고 나옵니다. 이는 이 법칙이 단편적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뉴턴의 고전역학이라는 더 포괄적인 이론 체계가 도출될 것임을 예상한다는 것입니다.

지식 수용의 문제 : 과학적 지식으로 수용되기 위해 필요한 요건

위의 네 가지 방식 혹은 다른 방식으로 어떠한 지식을 얻었다고 할 경우, 그것이 올바른 지식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가하는 지식 수용의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지식이 과학적 지식으로 수용되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 요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 자연현상과 연결지을 수 있는 명확한 의미가 있어야 한다.
  • 현실과 부합되는 참된 내용을 지녀야 한다.

예를 들어 “만물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때 이것이 과학적 지식이 되려면 ‘원자’의 의미도 명확해야 하고, 실제로 만물이 그러한 원자로 구성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거짓된 지식이 됩니다.

수용 요건을 만족하는지 여부는 어떻게 확인? / 가설연역적 입장

과학적 지식이 위의 두 가지 수용 요건을 만족하는지 확인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연법칙을 나타내는 보편적인 기본원리들은 대부분 일차적인 경험 사실에 대응하는 용어, 즉 일상적인 용어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에너지 보존 법칙’에서 ‘에너지’라는 용어는 어떠한 구체적인 자연현상이나 경험한 사실에 대응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경험 사실들과 더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다른 용어들을 이용해서 ‘에너지’의 의미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 한 가지 어려운 점은 진리성 여부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원리 자체를 직접 실증하기 어렵기도 하고, 설혹 실증된다해도 실증 과정은 유한한 수로 이루어지 때문에 보편성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연법칙의 기본 원리들에 대해서 ‘가설연역적'(hypothetico-deductive)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기본 원리 자체를 직접 입증할 수는 없지만, 그 원리로부터 연역되는 구체적 명제들 다수를 실증적으로 검토해볼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반증되지 않는다면 이 원리는 잠정적으로 유효한 것으로 인정된다는 입장이 가설연역적 입장입니다.

과학적 지식을 수용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는 단편적인 지식보다는 하나의 보편 원리 혹은 이론 체계에 대해서 더 심각하게 나타납니다. 특히 새로운 체계가 등장하는 과학 혁명기에 이런 과학적 지식의 수용 문제가 크게 부각됩니다.

4. 논리실증주의와 규범적 방법론

논리실증주의는 새 과학을 위해 어떠한 규범적 방법론을 모색했나?

20세기 전반기에 고전역학체계의 불완전성이 드러나고 상대성이론, 양자이론이 등장하면서 과학적 지식의 수용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었는데, 그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는 20세기 전반기 과학철학을 대표하는 사상이었으며, ‘비엔나 모임’과 ‘베를린 협회’를 중심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17세기 제1혁명을 통해 탄생한 근대 과학은 경험적, 합리적 방법론이 종래의 형이상학적 독단보다 우월함을 충분히 입증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전역학 체계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으로 대체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모두 충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20세기 전반기 이론과학의 제2혁명입니다.

새 이론들을 ‘옳은’ 이론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무엇이며 고전이론 체계에서 ‘잘못’된 것은 무엇이었는지 반성하는 것이 긴급한 과제였습니다. 근대 과학 이전의 형이상학적 독단만이 아니라 근대 과학 이후의 경험적, 합리적 방법도 얼마든지 ‘그릇된’ 과학이 될 수 있음이 드러나면서 과학적 방법론 자체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1) 과학 언어의 통일

고전이론 체계를 불완전하게 만든 일차적인 주범으로 먼저 ‘불투명한 개념의 사용’이 지목되었습니다. 가령 ‘시간’, ‘공간’은 일상생활 속에서 관념화된 개념이며, 이것이 그대로 과학의 개념으로 전용될 수는 없습니다. ‘입자’와 ‘파동’도 우리의 경험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개념이어서 이들이 물리적 대상의 본성을 반드시 대표해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비엔나학파와 베를린학파의 학자들은 첫 번째 과제로 언어 분석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의미와 논리가 투명하지 않은 일상적이고 유사과학적인 언어는 배제하고, 의미와 논리가 명확하고 보편적인 과학 언어를 모색했습니다. 이러한 과학 언어는 최종적으로는 실험적 관측에 의한 물리량과 명확하게 관련을 맺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경험주의적 전제가 그 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2) 가설연역 체계

20세기 전반기의 학자들은 과학 이론의 논리 구조로서 ‘가설연역적’ 체계를 다듬어 나갔고, 이 체계는 포퍼의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 명제와 연결되어 경험과학의 논리 체계를 명백히 밝혀낼 수 있었습니다.

(3) 과학 이론의 통일 가능성 모색

19세기에는 광학이 전기자기학으로 환원되었고, 20세기가 되면서 화학이 양자역학과 통계역학 이론으로 환원되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물학과 심리학, 사회학 등 고차적인 현상을 취급하는 학문들이 더 기초적인 과학이론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과학 이론의 통일을 통한 학문의 발전을 모색해나갔습니다.

논리실증주의의 규범적 방법론에 대한 비판

엄격한 논리성에 입각하고 있는 논리실증주의적 규범적 방법론은 여러 곳에서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는데, 먼저 과학철학 내부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엄격한 과학 언어의 가능성 자체를 의심했습니다.

노우드 핸슨(Norwood R. Hanson)과 파울 파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는 관찰이 이론에 의존(theory-laden)한다고 강력히 문제 제기했는데, 이는 관찰이 차지하고 있던 이론중립적 심판자로서의 위치를 크게 동요시켰습니다.

또한 피에르 뒤앙(Pierre Duhem)과 월러드 콰인(Willard V. O. Quine)은 ‘이론의 미확정성'(underdetermination of theory)을 제기했습니다. 이는 동일한 관찰 데이터에 대해 다수의 이론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하는데, 과학의 경험주의적 바탕에 대한 문제 제기입니다.

보편적 과학 언어, 객관적 관찰을 통한 진리성 확인이라는 방법론적 원칙들은 결국 그 타당성의 근거를 모두 잃게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규범적 방법론 또한 신빙성이 약화되었습니다.

그러나 규범적 방법론에 대한 가장 심각한 도전은 전통적 과학철학 밖으로부터 왔는데, 그곳은 바로 연구 현장이었습니다. 자연 과학의 연구 현장에서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방법들은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제시하는 것과 같은 엄격한 논리적 패턴을 따르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제시하는 규범적 방법론은 하나의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방법론일 뿐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의미는 크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5. 과학사적 고찰과 쿤의 과학혁명 이론

쿤의 패러다임과 정상 과학

이제 방법론적 관심은 학문 연구의 현장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그동안 등한시되어왔던 사회적, 심리적 맥락이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관심이 전환되는 데에는 쿤의 연구의 영향이 크며 이후 과학사에 대한 연구가 뜨겁게 진행되어 오고 있습니다.

쿤에 따르면 이른바 ‘패러다임‘(paradigm)이라고 하는 것이 과학 활동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패러다임의 원래 뜻은 ‘전형’, ‘활용 예’인데, 쿤은 “과학에서의 뛰어난 업적과 이를 중심으로 과학자 사회에 형성된 사고 및 탐구의 전형“이란 뜻으로 바꾸어 사용하였습니다.

여기에 의미를 더 확대하여 “과학자들의 사물 인식 및 연구 활동의 바탕이 될 가치 이념과 관념 체계“, “연구 및 교육 활동에 부수되는 유형, 무형의 각종 도구, 수련과정, 수련 내용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의미“로 쿤은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p.38-39).

쿤의 관점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패러다임 테두리 안에서 문제를 설정하고 해결하며, 방법론 또한 패러다임에 의해 결정됩니다. 어떤 과학적 업적이 새 패러다임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여건은 쿤에 따르면 두 가지입니다.

  • 그 업적이 충분히 뛰어나서 추종자들을 상당수 끌어들일 수 있어야 한다.
  • 이 업적에 미해결 문제가 많이 내포돼있어서 관련된 연구 활동들이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어떤 패러다임이 존재한다는 것은 해결해야할 문제들과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이 제시되어 있는 일종의 ‘수수께끼 풀이’와 비슷한 꼴이며, 그 틀 안에서 정상적인 과학 활동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뉴턴의 고전역학이 이러한 쿤의 패러다임 여건을 충족시키고 있습니다. 고전역학은 그만의 풀이 방식이 있고, 수많은 현상들을 이론적으로 도출할 수 있으며, 또한 실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수많은 문제들이 실제로 존재합니다.

패러다임 전환

과학자들의 연구 활동을 패러다임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 즉 ‘정상과학’의 활동으로만 국한시켜버리면, 과학 지식의 탐색 및 수용과 관련된 방법론상의 모든 문제들이 패러다임 내적인 문제로 환원되어버립니다. 그러나 과학 연구 활동을 하나의 패러다임 안에 가두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쿤도 지적했지만, 패러다임 내에서 해결할 수 없는 ‘변칙사례'(anomaly)들이 나타날 수 있으며, 이들에 의해 기존의 패러다임은 위기를 맞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때 과학 지식을 수용하는 문제는 곧 패러다임 전환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이에 대해 쿤은 대단히 새로운 의견을 제시합니다. 서로 다른 패러다임은 사물을 보는 기본적인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두 개의 패러다임을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데에는 어떤 논리적 귀결이나 중립적 경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마치 게슈탈트(Gestalt, 형태) 전환 혹은 종교적 개종과 흡사한 과정이라는 것이 쿤의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과학적 지식을 수용하기 위한 어떠한 규범적 방법론도 인정할 수 없게 되는 것일까요? 이를 논의하기 위해 규범적 방법론을 다음과 같이 세 부류로 나누어 고찰해보겠습니다.

(1) 단일 패러다임 안에 한정되는 방법론
이 방법론은 쿤의 패러다임 개념에 포함됩니다. 하나의 패러다임을 중심으로 과학자들이 집단을 이루게 되면 이들은 관념 체계와 문제 해결 방식을 공유하게 되며, 의식하든 않든 이들 사이에 하나의 규범적 방법론이 존재하게 됩니다.

(2) 다수 패러다임 사이에 공통으로 통용되는 방법론
서로 상반되는 패러다임이라 하더라도 양쪽에서 모두 인정하는 어떤 규범적 방법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전역학과 상대성이론은 대치되지만, “어떠한 이론이든 실험적 검증을 받아야 하며, 실험 사실에 배치되는 이론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규범은 양측에서 모두 인정합니다. 여기에 대해 쿤이 언급한 바는 없지만, 이러한 방법론이 존재함은 사실입니다.

(3) 패러다임 선택에 활용되는 방법론
두 개 이상의 패러다임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어느 것이 ‘옳은’ 패러다임인지 찾아내는 데 활용될 수 있는 규범적 방법론입니다. 쿤은 이러한 규범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만일 패러다임 자체의 장단점을 논할 수 있도록 해주는 어떠한 규범적 방법론이 존재한다면, 쿤이 말하는 게슈탈트 전환이나 개종같은 형태가 아니라 다른 합리적 방식으로 패러다임 간의 대립이 해소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쿤의 말대로 패러다임 선택에 활용될 수 있는 방법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6.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방법론

20세기 초 이론과학의 제2혁명이 일어나면서, 고전역학이 가지고 있던 보편적 이론으로서의 지위가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에 의해 박탈 당했습니다. 이 사례를 통해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방법론이 가능할지 모색 해보겠습니다.

오늘날의 과학자들 다수는 이론과학의 제2혁명과정에서 패러다임 간의 우열을 가려줄 수 있는 규범적 방법론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고, 패러다임 간의 선택이 극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과정 속에 있던 과학자들은 그러한 방법론을 활용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존재조차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패러다임 선택을 위한 방법론이 존재하는가 아닌가는 그 방법론을 말하는 시기에 따라 달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혁명 당시에는 패러다임 선택을 위한 방법론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과학혁명이 끝난 후에 그 과정을 되돌아보니 그러한 방법론이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 세련된 방법론이 있었다면 패러다임들이 대립하는 혁명적 상황 없이, 혼란 없는 발전적 상황만 나타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결국 쿤이 말하는 혁명적 상황은 방법론 자체가 없어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과정을 보면 과학 발전은 방법론과 함께 진행되어 왔습니다. 때로는 방법론이 앞서서 과학 발전을 이끌었고, 때로는 과학이 혁명을 이룬 다음 방법론이 재정비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을 더 순조롭게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방법론 자체에 의식적으로 더 관심을 기울이고, 방법론의 발전을 과학 발전보다 앞세워야 합니다.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적인 과제는 어떻게 하면 패러다임에 예속되지 않고 더 보편적인 방법론을 추구할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패러다임에 대한 자각이 먼저 필요합니다. 기존에 보편적 방법론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보이지 않는 패러다임의 틀 속에 속박된 내용이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면 마치 이제는 보편적 이해에 도달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패러다임으로 옮겨간 것일 뿐인데 그것을 보편적 규범인양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떠한 객관적인 보장이나 기준은 없습니다. 그러나 더 보편적인 규범을 탐색해가고자 한다면 이러한 함정이 언제나 존재함을 자각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자각은 중요한 각성제가 됩니다.

이러한 탐색을 위한 더 적극적인 방안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비과학적인 사고라고 생각하는 이른바 전(前)과학적 지식을 포함해 인간의 모든 지식 패턴을 동일한 평면 위에 올려놓고 고찰하는 것입니다. 이 중 패러다임과 관련이 없는 본질적인 요소가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 찾아내 인간 사고의 기본적 구조를 밝혀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우리 세대가 당면한 그리고 성취해내야할 가장 큰 학문적 도전이 바로 이 작업입니다.


위 내용은 『과학과 메타과학』 2012, 현암사)의 ‘1장.자연과학의 연구 방법'(p.27-33)을 요약한 것입니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합니다’체를 사용하였습니다.

요약, 정리 : 황승미 (녹색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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