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브 고시 『대혼란의 시대』 – 정치


이 글은 아미타브 고시의 책 『대혼란의 시대』(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21) 3부의 일부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과학이나 사회학이 아니라 예술이나 문학의 영역에서 기후위기를 조망하는 통찰력 있는 글을 찾던 중에, 최근에 번역된 아미타브 고시의 책이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되어 녹색아카데미 웹진에 소개합니다.

아미타브 고시는 2015년 가을 시카고 대학에서 “거대한 혼란: 지구온난화 시대의 문학, 역사 그리고 정치”(The Great Derangement: Fiction, History, and Politics in the Age of Gobal Warming)라는 제목으로 네 차례 강연을 했습니다. 그 내용을 담은 책이 『대혼란의 시대』입니다. 1부는 문학, 2부는 역사, 3부는 정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미타브 고시는 소설가입니다. 사회인류학과 비교문학이라는 학문적 배경을 가지고 있고, 문학과 실제 삶에서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작품으로는 『굶주린 조수』, 『섀도 라인스』, 『캘커타 염색체』, 『유리 궁전』 등 다수가 있습니다. 최고의 문학상들을 받고 있으며, 현대 문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주는 우리 시대의 작가이자 학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문사진 출처 : The University of Chicago)

” 아미타브 고시 『대혼란의 시대』 – 문학, 역사” 바로가기 링크 (1, 2부)


1. 정치적 이념으로서의 자유

『대혼란의 시대』 3부는 정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근대 이후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이념이 자유이고, 기후변화는 바로 이 이념에 대해 강력하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 환경, 비인간의 족쇄에서 벗어나 역사적인 행위 주체가 되면서 점점 더 ‘비인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동시에 멀어지게 되었고, 이것이 근대성의 중요한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후변화로 인해 요동치는 지구는 인간이 비인간의 구속에서 여전히 혹은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역사와 행위 주체성 개념에 대해 재고해볼 수 있을까요. 이 책에서는 우선 문학과 예술에 대해서 논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20세기 문학과 예술은 구체적 차원에서 추상적 차원으로 급격하게 전환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미학적인 이유 뿐만 아니라 냉전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소련의 사회적 사실주의에 맞서는 추상적 표현주의를 미국의 정보기관이 직접 나서서 조장했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냉전 훨씬 이전부터 20세기 내내 예술은 자기 성찰적으로 변해갔습니다. 아시아 지역의 작가와 예술가들은 특히 근대성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기 지역의 문학, 예술, 건축 등과 단절하면서 급격하게 변해갔습니다. 즉 비인간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지역의 전통들이 무시되어갔다는 뜻입니다.

자유는 “물리적 삶의 제약을 ‘초월하는’, 그리고 인간의 정신, 기상, 정서, 의식, 내면성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탐구하는 방법으로” 여겨져갔고, “철저히 마음 속에, 신체에, 인간의 욕망 속에 거주하는 특성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기 드보르는 오래전에(『The Society of the Spectacle』, Guy Dbord, 1967) “스펙터클한 형태의 반란은 ‘별스레 시치미 떼면서 현재의 질서를 슬그머니 수용하는 태도’와 결코 양립 불가능한 게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예술과 문학이 대항이 아니라 현재의 ‘대혼란’에 가담하고 공모했다고, 인류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렇게 판단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3부에서는 온실가스 배출량과 작가, 예술가들의 정치 참여 정도에 대한 가상의 그래프를 상상해보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살피고 있습니다. 이곳 요약에서는 생략하겠습니다.


2. 기후변화가 ‘도덕적 이슈’가 되면 일어나는 일

기후변화를 ‘도덕적 이슈’로 틀 지우게 되면 국제적 기후변화 관료주의가 기후변화에 부과해온 경제적 언어(비용과 이익의 언어)를 단호하게 배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접근법은 그와 동시에 ‘진지함의 정치’를 소환하게 되고 결국 반대편의 사람들에게 이롭게 작용할 소지를 만들어냅니다.

기후변화라는 위기를 개인의 양심에 대한 문제로 바라보게 되면, 진지함이나 일관성이 정치적 입장을 판단해주는 시금석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부인론자들로 하여금 활동가들의 개인적인 생활 방식을 공격할 수 있게 하고 그들을 위선자로 몰아붙일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틀이 짜여지면 진정성과 희생같은 것이 기후변화 이슈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예로 앨 고어가 집에서 전구를 몇 개 쓰는지, 기후변화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시위 장소에 오면서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했는지 등으로 이슈가 변질되는 것입니다.

어느 저명한 활동가 한 사람이 2014년 9월 뉴욕에서 기후변화 시위에 참가한 후 텔레비전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인터뷰 진행자는 그에게 기후변화 때문에 당신은 무엇을 포기했느냐, 당신이 감수한 희생은 무엇이냐, 이런 식의 심문하는 듯한 질문을 퍼부었습니다. 그는 당황하며 분명한 것조차 말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 순간 정치와 도덕이 결합했기 때문입니다.

기후변화의 규모는 너무나 커서 집단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행동화 해야지, 그저 개인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거의 무용지물에 가깝습니다. 현재 미국 서부에서 일어나는 가뭄과 산불같은 문제는 개인의 양심에 맡길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진지함같은 것으로 해결될 수도 없습니다. 이런 관점의 사고는 신자유주의적 전제를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3. 영어 사용국들에서 기후 부인이 강한 이유

영어 사용국들이 맡고 있는 역할은 현재 전 지구적 기후변화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입니다. 이들은 그저 추상적인 실체가 아니라 ‘UK-USA 안보협정'(UK-USA Security Agreement)이라는 구체적인 조직입니다. 이들은 ‘다섯 개의 눈'(Five Eyes)이라는 공식적인 표현으로 불리며 미국,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5개국의 정보 수집 및 감시체제를 하나로 묶은 동맹체입니다.

영어 사용국들은 여전히 자유방임주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회입니다. 지구온난화는 개인의 사익 추구가 언제나 공공의 이익이 된다는 자유방임주의를 곤란하게 하고 있으며, 지난 200년 동안 성공적으로 일궈온 이들의 문화적 정체성과 신념에도 의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영어 사용국들에서 기후변화에 저항하고 부인하는 경향이 높은 것도 이러한 사상적, 역사적 배경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후변화와 관련된 과학적 결과물들을 내놓은 나라들도 이들 5개국입니다. 영어 사용국들, 특히 미국에서 기후변화의 공적 정치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양극단 사이의 팽팽한 긴장입니다. 북유럽 국가들은 지구온난화를 주로 실질적인 대응이 필요한 현상으로 보고, 몰디브제도나 방글라데시같은 나라들은 실존적인 위험으로 이 문제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영어 사용국들은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정치노선 상에 놓인 여러 이슈들 가운데 하나로 기후변화를 보고 있습니다.

이 노선의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은 기후과학을 음모론으로 보고 사회주의, 공산주의같은 것들과 연관시키려고 합니다. 이렇게 연결지음으로써 일부 기후과학자들에게 엄청난 반감이 쏟아지게 만들었습니다. 마이클 만(Michael E. Mann)같은 기후과학자들은 온갖 위협, 괴롭힘, 협박에 시달려가며 자신의 연구를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기후과학에 대한 반대는 저절로 생겨난 독자적 현상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현상 뒤에는 기업과 에너지 거부들이 돈을 대며 부추기고 있습니다.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이들 이익 집단들은 단체를 지원하거나 직접 만들어 유권자들에게 거짓 정보를 퍼뜨리고 혼란을 만들어내도록 배후에서 일을 합니다.

루퍼트 머독(Rupert Murdoch)같은 기후 회의주의자들과 탄소 경제로 먹고 사는 기업들이 오늘날 미디어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결국 영어 사용국들에서 기후 정치는 과학적 조사결과에 대한 부인과 논박이 채우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다고 영어 사용국들에서 나타나는 기후변화 부인론의 원인이 금전과 조작 뿐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부인론자들은 기후위기가 뭔가 더 깊은 것을 건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기후위기는 근대성에 대한 믿음을 깨고 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몽상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disenchantment)는 막스 베버의 주장이 거짓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케인스도 알고 있었지만 ’19세기의 일상적 정치철학’ 또한 다른 신화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몽상”(enchantment)입니다. 이것을 부인하기 훨씬 더 어려운 이유는 환상이 아니라 사실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 사용국들의 공적 영역에서 기후변화 이슈에 대해 심각하게 분열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4. 미국의 안보 기관들은 왜 기후변화와 관련한 첩보 활동에 열심인가?

그런데 이상한 점은 미국의 안보 관련 기관들에서 나타납니다. 안보 기관과 같은 미국 정부의 영역에는 어떠한 부인이나 혼란의 기미도 찾을 수 없습니다. 미국 국방부에서는 기후변화 연구에 다른 어느 부처보다 많은 예산과 자원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조지 마셜(작가, 기후 활동가)는 “기후변화의 불확실성에 대한 가장 이성적이고 사려 깊은 대응은 군사 전략가들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다. … 미 유럽사령부의 전직 부사령관 찰스 ‘척’ 월드 장군은 ‘문제가 있으면 군부가 그 해결책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고 말했습니다.

해군 제독 새뮤얼 로클리어 3세는 2013년 당시 미 태평양사령부 사령관일 때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안보에 가장 커다란 장기적 위협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지체없이 기후변화라고 지목하며 “안보 환경에 심각한 손상을 끼칠 가능성”이 매우 큰 요소라고 말했습니다.

미국 정보기관들 또한 이미 오래전부터 환경주의자와 기후 활동가들을 최우선적으로 감시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감시 활동은 9.11 이후 ‘항구적 비상사태’가 되면서 안보 기관의 권한이 늘어나 더 쉬워졌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정보 수집이 민영화된 것도 감시를 용이하게 한 원인입니다.

정보 수집이 민영화되면서 첩보 활동의 공적 사적 경계가 흐릿하게 되었고 “회색 정보 산업”(gray intelligence industry)이 탄생했습니다. 이들 산업 덕분에 정부 기관과 기업들은 더 쉽게 수많은 다양한 환경 단체에 침투하고 첩보 활동을 벌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미국 정부가 기후변화를 부인한다면 이런 일을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영국 군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오스트레일리아 군부 싱크탱크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이렇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영국과 미국 정부는 기후변화 이슈를 국가적 기획에 포함하는 데서 방위군 내에 기후변화 이슈를 챙길 고위급 군사 관계자를 임명하는 데 이르기까지, 자국 군부가 기후변화와 그 파급 효과에 발 빠르게 대처하도록 지휘해왔다.”

또한 기후위기는 전 세계의 부와 권력을 극적으로 재 분배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탄소 경제 하에서는 부도 권력도 화석연료의 소비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탄소 민주주의』를 쓴 티머시 미첼은, 오늘날의 정치경제적 생존 형태는 석유 에너지 덕분이며, 현재의 지위를 언제까지나 계속 누리지는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결국 기후위기 상황에서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해 어떤 나라에 대해서는 탄소 배출을 허락하고 다른 나라는 탄소 배출을 억제한다면 전 지구적 차원의 권력 재분배가 이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중국과 인도의 화석연료 사용량과 국제적 영향력이 함께 올라간 사례를 보아도,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 정의의 문제 : 무장한 구명보트 정치와 제국, 제국주의

정의는 오늘날 정치적 정당성에서 핵심입니다. 기후 정의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감축과 수렴'(contraction and convergence), ‘1인당 기후 협약'(per capita climate accord), 남아 있는 세계 ‘기후 예산'(climate budget) 등을 통해 배출 제도를 공정하게 구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출 제도는 부의 재분배와 동시에 전 세계적인 권력 재편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지배 세력들과 그들의 안보 기관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들에게는 현재의 지속, 현상 유지가 가장 바람직하기 때문입니다.

기후변화는 그 자체로서 위험한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분열이 심화되고 갈등 상황이 증가하는 것과 같이 위협을 가중시키는 요인이기 때문에 위험한 것입니다. 서구의 안보 기관들이 기후변화가 가져오는 이러한 위협 요인들에 대처하는 방법은 바로 ‘무장한 구명보트 정치'(politics of the armed lifeboat) 전략입니다.

‘무장한 구명보트 정치’란 대대적인 반란 진압, 국경 무장, 적극적인 반이민 정책 등으로 이루어지는 전략을 말합니다. 즉 기후 난민의 유입을 저지하고 자국의 자원은 보호하는 정책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리아 난민 위기 때 미국, 영국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의 대처 방식이 바로 이러했습니다. 이들 국가는 극소수의 이주자만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스스로가 시리아 사태의 일부 원인이기도 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국경을 강화함으로써 자국을 보호하는 이러한 근대 국민 국가적인 전략으로는 기후위기 시대를 헤쳐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국가를 “영토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로만 구성된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시대”에 접어들었고, “국가라는 몸을 이루는 힘줄들이 국경으로 한정할 수 없는 힘들과 서로 얽히고설켜” 있기 때문입니다.

19~20세기 초 약 4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던 엘니뇨 현상으로 인도와 필리핀 등 지역이 엄청나게 파괴되었는데(마이크 데이비스, 『엘니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 이때 영국과 미국의 관료 집단이 보여준 것도 ‘무장한 구명보트 정치’였습니다. 영국과 미국에게는 자유 시장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마오쩌둥 치하 중국과 스탈린 치하 소련에서 일어났던 대기근의 경우에도 생명보다 이데올로기가 먼저였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기후변화에 대해 전 지구적으로 나타나는 무관심은 혼란 때문도 부인론 때문도 아니고, 계획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그들의 계획입니다. 점점 더 거세지고 증가하는 지정학적, 군사적 장소에 대해 군대가 들어가 침략할 수 있는 알리바이를 기후변화가 제공해주고 있고 이들은 자연스럽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제국과 그 제국이 만들어온 불공정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국가들 간에 그리고 한 국가 내에서 권력 격차는 과거보다 훨씬 더 크게 벌어졌을 것이며, 이 격차는 탄소 배출량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기후위기의 중심에는 그러한 세계 차원의 권력 분배가 놓여 있습니다.

경제적 격차나 보상, 탄소 예산처럼 경제 이슈에서는 적어도 사용할 수 있는 어휘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국제 관계 시스템에서 공정한 권력 분배와 관련된 이슈를 공개적으로 솔직하게 다루는 데 필요한 언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들이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해 자신들의 지배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열망입니다. 자본주의는 내일 당장이라도 마술적인 변화를 통해 기후 위기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갈 수도 있겠지만, 정치적 군사적 지배를 원하는 제국적 열망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6. 『찬미받으소서』 vs 『파리협정문』

2015년에는 매우 중요한 기후변화 출간물 두 편이 발간되었습니다. 하나는 5월에 발표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환경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이고, 또 하나는 『기후변화에 관한 파리 협정문』(Paris Agreement)으로 그해 12월에 나왔습니다.

두 문서는 모두 기후과학의 연구 결과를 수용하고 비슷한 자료와 동일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비슷하지 않습니다. 『찬미받으소서』는 전직 문학 교사(교황)가 썼고 파리 협정문은 수많은 외교관과 각국의 대표들이 함께 쓴 글입니다.

종교 문서라고 할 수 있는 교황의 회칙은 암시적이고 문체도 화려할 것 같고, 반면 파리 협정문은 간결하고 명확할 것 같다는 인상을 미리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반대입니다. 교황의 회칙이 사용하는 언어는 명징하고 단순한 구성인데 반해, 파리 협정문은 고도로 양식화된 언어를 사용하 있고 구조는 복잡합니다.

파리 협정문은 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의 제목은 ‘의장의 제안’으로 좀 더 길며, 2부 ‘부록’은 협정 자체를 담고 있습니다. 파리 협정문에는 31개의 선언적 구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 중 15개는 1부 앞부분에 배치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이 분사(分詞) 형식의 구절이 쪽마다 가득합니다.

  • ~에 설립에 대한 결정 1/CP.17을 상기하고 (Recalling decision 1/CP.17 on the establishment …),
  • ~2, 3, 4조도 상기하고 (Also recalling Articles …),
  • ~의 관련 결정 또한 상기하고 (Further recalling relevant decisions …),
  • ~의 채택을 환영하고 (Welcoming the adoption …),
  • ~를 인식하고 (Recognizing that …),
  • ~를 인정하고 (Acknowledging that …),
  • ~를 지지하고 촉진하는 데 동의하고 (Agreeing to uphold and promote …),
    책 p.199.

이렇게 이어지는 제안들이 18쪽 계속 되는데, 여기에는 번호를 매긴 140개 조항과 6개의 섹션으로 되어 있고, 마침표는 2개 뿐입니다. 파리 협정문이 산문과 운문 중간쯤 되는 글이라면, 『찬미받으소서』는 복잡한 문제를 냉철하고 명료하게 다루고 있으며 운문은 책 말미의 기도문 두 개에서만 사용됩니다.

두 문서의 또 한 가지 차이점은 소망적인 표현과 추측입니다. 그런 표현이 등장하는 쪽은 『찬미받으소서』가 아니라 파리 협정문입니다. 파리 협정문은 이미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난 목표(지구 평균기온 상승폭 1.5도 이하로 억제)를 거듭 소환하면서도 그 목표의 기반이 되는 가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파리 협정문의 1.5도 목표는 온실가스를 지하 깊숙이 묻을 수 있는 기술을 전제하고 있지만, 그런 기술은 이제 초기단계에 있을 뿐입니다. 게다가 이 기술 중 가장 유망하다고 하는 ‘바이오 에너지 탄소 포집 저장 기술'(biomass energy carbon capture and storage, BECCS)이 규모면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작물을 인도보다 더 넓은 면적에 심어야 합니다. 이런 희박한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을 보면  파리 협정문 쪽이 오히려 더 신앙적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반면 『찬미받으소서』에서는 기후변화와 관련해 기적적인 해법같은 것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오늘 인류의 곤경을 이해하기 위해 탄소 경제 이전 시대의 전통에서 지혜를 구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과거 교회가 취한 입장에 대해 단호한 의문을 제기하며 우리 시대의 (성장) 패러다임을 비난합니다.

『찬미받으소서』는 “경제학자, 금융업자, 기술 전문가들이 더없이 매력적으로 여기는 ‘제한 없는 성장’ 개념”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오늘 우리가 실패하는 근본 원인은 “기술주의적 패러다임”때문이며, “그것은 기술 발전의 지향, 목적, 의미, 그리고 사회적 함의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파리 협정문은 우리의 성장 패러다임, 기술주의 패러다임에 대해 어떠한 문제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교토 의정서에도 ‘시장의 불완전성’에 대해 언급되어 있습니다. 국제적 마약 협정도 ‘약물 중독 등의 해악’을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파리 협정문은 그런 비판적인 구절이 전혀 없습니다. 그저 ‘기후변화는 인류 공통의 관심사’라고만 되어있을 뿐입니다.

게다가 기후변화, 기후위기의 현 상황을 부르는 이름도 파리 협정문에서는 소극적입니다. 『찬미받으소서』에는 재앙, 재난같은 단어가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파리 협정문에는 그저 기후변화의 부작용, 악영향같은 단어로 언급됩니다. 재앙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찬미받으소서』는 언어도 양식도 단순 명쾌합니다. 모호함, 전문 용어를 배제하고, 열린 자세를 취하려고 애씁니다. 반면 파리 협정문의 어휘와 양식은 제한하고 폐쇄하려는 노력의 결과물입니다. 놀랍게도 『찬미받으소서』는 마치 이러한 일을 미리 예언이라도 한 것 같습니다.

“국제 차원의 정치적, 경제적 논의”에서 이루어지는 의사 결정 방식에서 “전문가, 여론 주도자, 의사소통 관련 미디어의 역할”에 대해 밝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서 부유한 지역에 살고 있는 권력 중심부의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있으며, 이들의 문제에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일이 없다고 지적합니다. 부유한 권력 중심부의 사람들은 세계의 대다수 인구들이 살아가는 수준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발전, 삶의 질을 누리며 살아간다고 비판합니다(책 p.204).

어쩌면 『찬미받으소서』는 회칙에서 “배제된 사람들”(the excluded)라고 부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이러한 표현 양식을 채택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파리 협정에서 여러 억만장자, 기업, ‘기후 기업가'(climate entrepreneur)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파리 협정문에 사용된 용어들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용어들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유무역 협정에서 사용되는 바로 그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찬미받으소서』의 주요 관심사는 빈곤과 정의이기 때문에 자연과 가난한 사람들이 배제되지 않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여기서 빈곤과 정의의 연결은 긴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빈곤을 분리된 요소로 취급하며 관리하거나 개선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사회 불평등에 대한 고려없이 생태적 이슈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찬미받으소서』는 ‘그린 레토릭'(green rhetoric)을 맹공격하며 다음과 같이 직설적으로 주장합니다.

“진정한 생태적 접근은 언제나 사회적 접근이어야 한다.”

“정의의 문제를 환경에 대한 논쟁에 포함함으로써, 지구의 외침과 가난한 자들의 외침을 동시에 경청해야 한다.”

“특히 글로벌 노스(north)와 글로벌 사우스(south) 사이에는 진정한 ‘생태적 채무 관계’가 존재한다.”

다시 파리 협정문과 비교해보면, 파리 협정문에 언급되는 빈곤은 언제나 “그 자체로 재정적 메커니즘을 통해 개선할 수 있는 상태”로서이며, 정의와 관련되어 등장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부록의 전문(前文)에 “기후변화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해 조치를 취할 때 일부 사람들에게는 ‘기후 정의'(climate justice) 개념이 중요하다”고 언급한 대목 뿐입니다. 여기서 ‘일부 사람들’이라고 한 부분은 일부만 그렇고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곧 기후 정의를 부인한다는 뜻입니다.

두 문서의 가장 큰 차이는 글 마무리 부분입니다. 파리 협정문은 2015년 12월 12일에 협정의 효력이 시작되며, 목표를 구현할 수 있도록 가맹국들이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기를 기원하며 글을 맺습니다.

반면 『찬미받으소서』의 글 마무리는 기도문으로, 도움과 지도를 호소합니다. 기도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 시대는 “진보와 인간의 능력에 대해 비합리적 확신을 품은 시대”라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찬미받으소서』는 “‘인간의 자유는 무한하다’는 생각에 대한 문제 제기”임을 밝히면서 현재 정치에서 가장 급진적 요소 중 하나인 자유에 대해 지적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인간이 그 자신을 위해 창조한 자유일 뿐 아니라 … 정신이자 의지이기도 하고, 자연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We have forgotten that man is not only a freedom which he creates for himself. … He is spirit and will, but also nature.”

책 p.206.

아미타브 고시는 기후위기 해결을 위한 우리의 실천적 투쟁이 매우 힘들고 지난할 것이며, 성취가 있든 없든 그것이 어떤 성취이든 심각하고 파괴적인 결과는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음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더 현명하게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세대이기를 기대합니다. 더 밝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세대, 현재 인류가 당면한 ‘대혼란’을 뛰어넘고, 비인간 존재들과의 유대 관계를 다시 발견해 복구하고, 이러한 전망을 새로운 예술과 문학 속에 담아낼 수 있으리라 믿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 글은 아미타브 고시의 책 <대혼란의 시대>(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21) 3부의 일부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요약, 정리 – 황승미 (녹색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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