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브 고시 『대혼란의 시대』 – 문학, 역사


이 글은 아미타브 고시의 책 <대혼란의 시대>(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21) 1, 2부의 일부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과학이나 사회학이 아니라 예술이나 문학의 영역에서 기후위기를 조망하는 통찰력 있는 글을 찾던 중에, 최근에 번역된 아미타브 고시의 책이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되어 녹색아카데미 웹진에 소개합니다.

아미타브 고시는 2015년 가을 시카고 대학에서 “거대한 혼란: 지구온난화 시대의 문학, 역사 그리고 정치”(The Great Derangement: Fiction, History, and Politics in the Age of Gobal Warming)라는 제목으로 네 차례 강연을 했습니다. 그 내용을 담은 책이 <대혼란의 시대>입니다. 1부는 문학, 2부는 역사, 3부는 정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미타브 고시는 소설가입니다. 사회인류학과 비교문학이라는 학문적 배경을 가지고 있고, 문학과 실제 삶에서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작품으로는 <굶주린 조수>, <섀도 라인스>, <캘커타 염색체>, <유리 궁전> 등 다수가 있습니다. 최고의 문학상들을 받고 있으며, 현대 문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주는 우리 시대의 작가이자 학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픽션은 왜 기후변화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가 혹은 안 다루는가

책 <대혼란의 시대> 1부 문학은 시카고대학 강연에서는 두 차례 다룬 내용이고, 책 분량으로는 절반에 해당합니다. 현대 소설, 특히 픽션이 왜 기후변화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가, 혹은 다루지 않는가, 그것이 왜 문제인가 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기후변화라는 주제가 너무나 있을 법하지 않은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고, 19세기 이후 구축되어온 자연에 대한 안정성, 예측가능성, 질서정연함 등과 거의 동시에 근대 소설이 등장한 것이 아미타브 고시가 중요하게 지적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문학과 예술이 근대성과 현재 체제를 옹호하고 은폐하고 더 나아가 가담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지 묻습니다.

문학에서 진지하게 다루어야할 주제의 기준이 시급성이라면 기후변화는 그 어떤 주제보다 시급한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기후변화를 다루는 글은 대부분 논픽션이고, 픽션에서 다루어진 경우에는 대부분 과학소설 장르로 분류될만한 주제로만 다루어지고 있다, “마치 외계인이나 행성 간 여행 비슷한 어떤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듯하다”(p.17)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아미타브 고시 자신도 그렇다고 고백합니다. 기후변화라는 주제를 간접적으로만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설가의 개인적인 관심사와 소설의 주제 사이에 간극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개인적 선호의 결과가 아니라고 아미타브 고시는 확신합니다.

“그것은 오늘날 순수 소설로 간주되는 것이 기후변화에 대해 드러내는 독특한 형태의 저항”때문이다.(p.18)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것은 근대성이라는 역사와 관련이 있는 것 같고, 순수소설이 기후변화라는 주제를 다루려 하지 않는 모종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로 이해됩니다. 왜 이렇게 됐는지 밝히는 것이 과제라고 아미타브 고시는 말합니다. 오늘날의 문화는 왜 그렇게 기후변화를 다루기 어려워하는가,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미타브 고시가 기후위기는 문화의 위기이고 상상력의 위기라고 보는 이유는, 문화 매체가 만들어준 이미지와 욕망을 그대로 수용하기 때문입니다. 문화는 욕망을 만들어내고, 탄소 경제를 끌고 가는 추동력이 바로 그 욕망이고, 우리는 보여주는 욕망을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특정한 자동차(속도 빠른 컨버터블 자동차)를 특별히 더 좋아하는 이유는 자동차의 재질이나 추상적인 자동차공학도 아니고 자동차 자체도 아닙니다. 그 욕망은 소설과 영화와 매체가 열심히 만들어낸 갈망이고, 그 갈망이 만들어낸 “인공물과 상품은 … 그 욕망을 낳은 문화적 기반의 표현물이기도 하고 그 은폐 장치이기도”하다는 것입니다.”(p.21)

문화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역사라는 더 넓은 배경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잘 알지만, 그렇다 해도 실제로 시, 미술, 건축, 영화, 산문 소설 등 다양한 양식의 문화활동과 이러한 배경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알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문화 영역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전쟁, 생태적 재난, 여러가지 위기에 반응해왔는데, 유독 기후변화에만 느리게 혹은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탄소 경제의 정치적인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은폐에 작가와 예술가들이 연루되도록 하는 관례와 방식과도 연관된다고 아미타브 고시는 지적합니다.

기후변화를 일으키거나 취약한 건축 양식, 특정한 상표 등 이런 것들을 소설에서는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특정하게 다룸으로서 시장의 조작에 가담하는 것은 아닌가? 박물관을 찾은 관람자나 소설을 읽는 독자가 앞으로의 미래가 이전과는 다를 것이라는 실마리나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짐작할 수 없다면, 예술가와 소설가들이 “예술과 문학 형식의 은폐 양식에 의존”함으로써 우리가 처한 현실과 곤경을 사람들로 하여금 인식하지 못하게 막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아미타브 고시는 문학과 예술이 외면이나 방기를 넘어 기후위기를 생산해내는 체제에 의존하고 협조하고 가담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1부의 중요한 주제 중 또 하나는, 근대 소설이 ‘비인간의 행위 주체성’을 배제하고 인간중심적으로 달라졌는데, 그 시기가 바로 인간 활동이 지구의 자연 환경을 크게 변화시켜온 때와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비인간이란 인간이 아닌 것, 주로 고대 서사시에 잘 등장하는 신이나 자연적인 힘, 현실에 없는 동식물이나 현실과는 다른 동식물, 자연 현상 등을 말합니다.

근대 소설에서는 이러한 비인간의 역할이 축소되거나 배제되고, 이야기의 중심에 인간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미타브 고시의 지적에 따르면 우리는 여전히 비인간의 힘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많은 베스트셀러 책과 영화가 뱀파이어, 마녀, 변신하는 사람, 외계인, 돌연변이, 좀비같은 인물을 등장시켜 돈을 벌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 비인간의 영역에 속하는 행위 주체의 능력은 테크놀로지와 같이 갈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능력에 한정되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비인간의 힘을 느끼고 인정해왔고 지금도 그렇다고 아미타브 고시는 말합니다. 그것이 억눌리고 억압당해온 경위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데카르트식 이분법의 포로였다”는 주장조차 사실이 아니라고 아미타브 고시는 말합니다. “데카르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누가 동물이 작은 로봇이라는 말을 믿겠냐는 것입니다.

2.기후위기는 일어나고 있는 일인데 “있을 법하지 않은 일”로 취급되고 있다

아미타브 고시는 1978년 3월 17일 델리 북부에서 일어난 돌풍을 우연히 그 한가운데에서 겪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줍니다. 그 돌풍은 폭 50미터로 2~3분 동안 5킬로미터 정도에 걸쳐 영향을 미쳤고, 인도기상청이 관측을 시작한 이래 최초로 기록된 토네이도였다는 것이 나중에야 밝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바로 그 토네이도의 눈 한복판에 ‘우연히’ 들어가있게 됐다고 합니다. 아미타브 고시는 이 인근 지역을, 그리고 그 지역의 그 도로를 한번도 걸어본 적이 없었는데, 그날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었고, ‘있을 법하지 않은’,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일’을 겪었습니다. 아미타브 고시는 자신에게 깊은 영향과 각인을 남긴 것은 이 사건의 위험이나 파괴의 크기같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건이 자신의 삶과 교차하는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아미타브 고시는 아미타브 고시는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인데도 소설에 토네이도 자체를 제대로 등장시킨 적이 없다고 합니다. 실제로 기사 스크랩과 자료도 모아서 가지고 있고 수시로 꺼내 써보려고 시도해보았지만 실패했다는 겁니다. 왜 쓰지 못하는 것일까? 다른 사람이 그런 내용으로 소설을 썼다면 어땠을까 자문해보니, 상상력이 바닥난 작가나 쓸 법한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라고 느꼈을 것이라는 겁니다.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라고 다들 느낄 거라고 우려했다는 얘기입니다(p.28).

있을 법하지 않다는 것은 ‘있을 법하다’의 반대라기보다는 확률의 문제라고 아미타브 고시는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실제로 확률과 근대 소설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고, 근대 소설이 태어나기 전에 이야기가 다루는 픽션은 “전례 없는 일”,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라비안 나이트>, <서유기>, <데카메론>같은 이야기는 있을 것 같지 않은 이야기를 다루지만, 근대 소설은 “전례 없는 사건은 배경으로 밀어내고 나날의 일상을 전경으로 끌어내는”식으로 변화했다고 합니다(p.30). 근대 소설은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 아니라 일상을 부각하고,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을 보여주며, 볼 것으로 안내했다는 것입니다. ‘일어난 일’이 아니라 보여주고 싶은 것을 쓴다는 겁니다. 일상적인 디테일을 끼워넣음(fillers)으로써 우리가 보고 느낄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일상의 레토릭(rhetoric)은 부르주아적 삶의 즐거움, 현대생활에 대한 ‘합리화’와 함께 등장했으며, 이러한 사고 체계는 예술뿐 아니라 과학에도 적용되었다는 것이 아미타브 고시의 말입니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책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을 예로 들면서, 이 책은 본질적으로 (과학 이론에 대한) 내러티브에 대한 책이라고 설명합니다. 제이 굴드는 지구의 역사를 있을 법하지 않은 격변설과 점진설적 접근법을 비교해서 보여주면서, 점진설이 우세를 점해왔지만 실제로 지질학 기록에 따르면 수많은 시간적 틈새, 격변까지는 몰라도 자연의 점프가 존재한다는 겁니다.

19세기 이후 현재까지 우리가 격변하고 있을 법하지 않은 일들에 대해 불신하는 경향은 홀로세의 비교적 안정적인 기후에 기반하고 있으며, 우리가 평범함, 온건함같은 단어와 자연을 연결하여 연상하는 것이 바로 그 징표라고 고시는 말합니다.

하지만 근대소설은 격변설에 맞닥뜨린 지질학과는 달리 ‘있을 법하지 않은 것’과 마주치는 상황에 몰린 적이 없으며(p.37), 근대 소설은 사건의 토대를 은폐하는 작업을 수행해왔다고 비판합니다. ‘사실주의’ 소설은 현실적인 것을 은폐하면서 소설의 현실을 구축해가는 모순적인 방식을 쓴다는 겁니다.

소설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확률과 실제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확률이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는 문제도 있습니다. 흔히 “이것이 소설에 나온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라는 말같은 것입니다. 실제 생활에서는 작은 우연이 소설에서는 너무나 큰 우연, 혹은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아미타브 고시가 1978년 토네이도를 만난 것과 같은 바로 그런 장면입니다. 이런 일을 소설에 쓴다면 사람들은 ‘고딕 소설’, ‘공상 소설’, ‘괴기 소설’, ‘공상 과학 소설’같은 것으로 부르며 “순수 소설이라는 대저택”에서 쫓아내버릴 것이기 때문에 작가들은 쓰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고시가 겪은 토네이도는 기후변화로 인한 기상 사건은 아니었고, 그저 ‘있을 법하지 않은 사건’이었지만 말입니다.

1부에 대한 소개는 이 정도로 줄이겠습니다. 아미타브 고시가 문학과 기후위기를 연결지어 설명하는 글은 문학에 관심있는 분들에게도 매우 유익하고 통찰을 주는 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3.제국, 제국주의 역사와 아시아 & 기후위기

기후위기에 대한 기술은 주로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아미타브 고시 자신이 보기에는 제국과 제국주의가 자본주의 만큼이나 중요한데 간과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자본주의와 제국은 분명 단일한 실재의 양면이긴 하지만”(p.121) 서로 상반되는 경우도 많고 그 관계가 단순치 않다는 것을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아시아 대륙은 면적이나 인구 수에서 압도적이기 때문에 재난이 발생했을 때 피해를 입는 인구의 규모가 다른 유럽이나 섬 나라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그런데도 기후 문제와 관련된 담론은 언제나 유럽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아이러니라고 지적되기도 하는 점은, 제국주의에 의해 아시아의 산업화가 늦어지지 않았다면 지구온난화가 지금보다 더 심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기후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시기는 1930년대까지 올라가야 하며, 찰스 킬링(Charles Keeling)이 하와이 마우나로아 관측소에서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처음 측정했을 때 이미 300ppm을 넘어서 있었습니다(p.127). 이때는 아시아 여러 국가들의 경제가 급속하게 발달하기 이전인 1950년대 말입니다.

아시아 지역의 급속한 경제 성장이 1980년대 말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지구 대기 중 온실가스 농도가 이렇게 빠르게 증가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아미타브 고시는 급속한 경제성장을 통해 아시아가 수행해낸 역할이 있음을 지적합니다. 기후위기의 뒤늦은 원인 제공자이자 피해자인 아시아가 우연히 폭로하게 된 사실은, 모든 사람이 서구 유럽 중산층처럼 살 수 있을 만큼 지구가 받쳐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되면 유럽은 다른 후발 주자 국가들에게 ‘우리처럼’ 살 수 있다고 광고, 설득할 수 없습니다.

아시아 국가들이 20세기 말이 되어서야 산업화하게 된 원인에도 제국과 제국주의가 있습니다. 단순히 탄소 경제를 만들어낸 산업혁명, 기술이 영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탄소 집약 경제가 구축되기 전 ‘구세계’에서도 기술의 교류는 왕성했고, 먼 거리의 여러 장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비슷한 기술, 비슷한 역사적 과정들이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미타브 고시가 2부에서 들고 있는 예로는 언어의 자국화, 각종 테크놀로지와 지식 교환, 무기류와 전쟁관련 기술 혁신, 수학, 철학 등 다양합니다. 메리 에베레스트 불(Mary Everest Boole. 영국 19세기 수학자)은 동양의 지식이 지속적으로 공급되지 않았다면 유럽의 과학이 풍요로워질 수 없었을 거라고 했습니다. 동서양의 철학 사상도 빠른 속도로 교류되어, 데카르트의 사상도 그의 사후 10년 만에 힌두 철학자들에게 익숙할 정도로 전해졌다고 합니다.

중국은 약 1000년 전에 ‘중세 경제 혁명’을 겪으면서 환경을 과도하게 파괴하는 수준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중국은 전근대 말에 이미 천연가스를 이용해 가정에서 조리를 하고 가정용 가스 조명 기기도 만들어 썼으며, 석유를 이용해 휴대용 전등도 사용했습니다.

유럽보다 앞서 화석연료를 활발하게 사용한 것은 중국만이 아닙니다. BP(British Petroleum)는 원래 1908년 Anglo-Persian Oil Company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이란의 석유 개발을 목적으로 한 Burmah Oil Company의 자회사로 설립되었고, 1954년 Anglo-Iranian Oil Company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BP라는 이름은 1959년에 채택한 것입니다.

버마의 석유 역사는 아미타브 고시의 소설 <유리 궁전>에도 등장합니다. 소설 속에 묘사되는 버마 석유 산업은 19세기 후반 예낭야웅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역사는 1000년 이상 더 올라갈 수도 있다고 합니다. 현대 석유 산업으로 가는 최초의 일들이 실제로 버마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는데, 1885년 자국의 석유를 통제하고자 하는 버마의 시도가 실패하고, 영국이 버마를 침공하면서 모든 것이 영국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석유 산업이 시작된 것은 언제라고 우리는 알고 있을까요? 현대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1859년 8월 28일을 그 시작으로 봅니다. 이 날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타이터스빌(Titusville) 인근 오일 크리크(Oil Creek)에서 에드윈 드레이크 대령이 유정을 시추하는 데 최초로 성공한 날입니다.

아미타브 고시는 석유 산업의 시작을 이렇게 정한 것은 서구 근대성이라고 말합니다. 서구의 “지성계가 그것이 독특하다는 것을 널리 알리는 데 엄청나게 헌신한 결과라는 점”, 그것이 서구 근대성이라는 것입니다(p.140).


아미타브 고시의 책 <대혼란의 시대가>가 나온지 5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가 말하는 “있을 법하지 않은 일”들은 그 이전에 비해 훨씬 더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를 다루는 장르 소설(cli-fi: climate fiction)에 대한 이야기도 전보다 더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기후위기가 없는 것처럼, 혹은 기후위기 상황을 그와는 무관한 날씨나 재난으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습니다. 책의 ‘3부 정치’에서 이런 문제가 좀 더 다루어지고 있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환경 회칙 <찬미받으소서>와 2015년 기후변화에 관한 파리협정문이 날카롭게 비교, 비판되고 있습니다. 3부는 다음 주 환경칼럼에서 소개드리겠습니다.

이 글은 아미타브 고시의 책 <대혼란의 시대>(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21) 1, 2부의 일부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요약, 정리 – 황승미 (녹색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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