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회익의 자연철학 이야기> 대담영상 5-1 (4장. 양자역학)을 녹취하고 요약해보았습니다. 대담영상을 1편부터 녹취해서 자료로 만들 계획을 하고 있었는데요. 다음주 세미나에서 다룰 부분이 4장 양자역학이라서, 우선 4장부터 시작했습니다.
장회익선생님 말씀 위주로 정리했으니, 공부에 참고해주세요. 영상 5-2, 5-3 녹취도 곧 올리겠습니다.
대담영상 5-1 영상은 유튜브(녹색아카데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대담영상 5-1에서는 1926년 초 슈뢰딩거 방정식이 나오기까지의 역사를 짚어봅니다. 다룬 주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양자역학의 역사
- 1900 Max Planck 흑체복사
- 1905 Albert Einstein 광전효과
- 1913 Niels Bohr 수소원자
- 원자핵 등의 발견?
- 원자의 러더포드 모형
- 원자의 보어 모형
- 1924 Louis de Broglie
- 1925 취리히 대학의 한 세미나실 이야기
- 1926 Erwin Schrodinger 슈뢰딩거 방정식 제안
- 1925 Werner Heisenberg 행렬역학 제안
- 1926 Davisson and Germer 1927 Thomson and Reid
- 1927 Max Born 파동 함수의 확률적 해석
- 1927 Werner Heisenberg 불확정성원리 제안
- 1927 솔베이 국제회의 5차 회의
양자역학은 20세기 학문이다. 1900년 당시 막스 플랑크는 흑체라는 뜨거운 물체에서 방출되는 빛의 세기가 파장별로 어떻게 분포되고 있는지 설명하려고 연구하고 있었다.
1900년 막스 플랑크의 흑체복사 연구
물체를 뜨겁게 달구면 빛이 나는데, 그 물체의 색깔은 온도에 따라서 달라진다. 파장별로 얼마만큼의 강도로 빛이 나온다하는 것을 실험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당시 최초로 전등(전류를 흘려서 빛을 내는 것)을 발명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얼마만한 온도를 주면 어떤 빛이 나오는가에 관심들이 있었다.
어떤 파장의 빛이 얼마만큼 나오는지 그 이유를 물리학자들은 이론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 당시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인 바탕은 돼 있었다. 전자기 이론, 통계역학 이론도 나왔기 때문에 그 둘을 결함하면 그 곡선이 설명이 돼야하는데, 아무리 노력을 해도 도저히 만족스러운 설명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막스 플랑크는 고민하던 끝에 과감한 가정을 하나 한다. 흑체복사에서 나오는 에너지와, 특별한 진동수 즉 각파수 f (단위 거리당 파가 몇 개 들어가는가)에 보편상수 h를 곱한 값이 비례한다는 가정이다.
빛의 색깔이 다르다는 것은 진동수가 다르다는 의미이다. 이 진동수 값에 어떤 상수 h를 곱한 값의 정수배에 해당하는 에너지만 내뿜는다라는 가정을 하나 넣으면 설명이 잘 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상수를 집어넣으면 설명이 잘 되는지 당시에는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막스 플랑크는, 이건 우연일 뿐이고 뭔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임시변통으로 설명이 되기는 했지만 이것이 아닌,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의 원리에서 도출되는 것으로 설명을 해야 완전히 설명이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플랑크는 자신이 만든 이론을 10년 동안이나 신뢰하지 않았고, 어디가 틀렸는지 발견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알고 보면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에너지가 hf라는 것이 자연의 기본 특성인데, 이것을 발견해놓고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실험 결과에 의해 만들어진) 흑체복사 곡선은 당시 이론과는 맞지 않았다. 그런데 플랑크의 가정을 집어넣으니 실험 결과와 잘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hf가 바로 에너지이다. hf가 에너지이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다.
<질문> 흑체가 무엇인가?
흑체 복사라는 것은, 까맣게 생긴 물체를 달구어서 열감지나 이런 걸 통해서 찾아내는 것인가?완전히 검은 것은 가장 이상적으로 빛을 흡수하고 방출한다. 그래서 흑체라고 특별히 이름 붙인 것이다. 금속같은 물체를 달구면, 흑체의 경우와 비슷한 곡선이 나온다. 흑체라고 하는 것은 전문적인 표현이고, 뜨거운 물체에서 나오는 빛의 분포, 그렇게 이해하면 된다.
1905년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 연구
금속이 빛을 받아 전자를 방출(광전효과)하기 위해 흡수하는 에너지도 특정한 에너지 hf 단위를 가진다. 플랑크는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이론을 확장시켰다고 좋아하기는 커녕 이론을 더 잘못되게 만들었다고 우려했다.
1913년 닐스 보어의 수소원자 모형
보어의 원자모형에서는 전자의 각운동량이 일정한 값을 가지는데, 이 때도 플랑크 상수 h가 들어간다. 각운동량도 ħ(=h/(2π) ‘에이치 바’로 읽는다)의 정수배만을 가진다. 보어가 모형을 만들면서 그런 가정을 한 것이다.
수소원자에서 전자 하나가 가질 수 있는 각운동량(운동량에 각을 곱한 것)은 ħ의 정수배 이외의 것은 가질 수 없는데, 당시 왜 그런지는 몰랐다. 그렇게 된다면 그것이 가지는 에너지는 E = -[me4/(8εo2h2)](1/n2) 라는 것이다.
수소원자를 자극하면 빛이 나오는데, 높은 에너지 Ei에 있다가 낮은 에너지 Ef로 바뀌면서 나오는 에너지 차이가 빛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 빛의 에너지가 바로 hf = Ei – Ef이다. 이것은 모형이론이다. 아직 양자역학이라는 체계적인 이론이 나오기 전이니까, 이런 가정(hf)을 하면 이것이(hν = Ei – Ef) 설명된다.
이런 사실들은 이론이 나오기 전에 이미 측정이 되어서 밝혀져 있었다. 수소원자를 자극할 경우 나오는 빛을 봤더니 특정한 파장의 빛만 나오더라는 것이다. 실험에서 관측한 결과와, 보어가 얘기했던 에너지 차이(Ei – Ef) 값이 딱 맞아떨어졌던 거이다.
그래서 이것을 닐스 보어의 수소원자 모형이라고 한다. 여기서 플랑크의 이론이나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와 공통되는 부분은 플랑크 상수가 모두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이상한 가정이지만 그것을 넣으면 다 설명이 되고, 플랑크상수를 넣지 않으면 다 설명이 안된다.
원자핵 발견?, 러더포드 모형, 보어 모형
원자핵 발견과 전자와 관련된 발견들은 1900년보다 앞선다. 원자의 구조, 원자가 있다는 것은 알려져 있었지만 안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원자에서 전자가 튀어나온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19세기 말경). 원자 안에 양성을 가진 부분이 있고 음성을 가진 전자가 뒤섞여있다는 것까지는 알았다. 그런데 자극을 하면 가끔 전자가 튀어나오는데, 이게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가 오리무중이었다.
러더포드 모형
그러다가 보어의 스승격인 러더포드가 원자 속이 어떻게 돼있는지 알기 위해서 알파 입자라고 하는 단단한 입자를 때려보는 실험을 했다. 처음에는 뒤섞여 있다고 일단 생각을 했다. 그렇게 뒤섞여 있다면 알파 입자가 대략 통과를 하게 될텐데 이상하게 되돌아오는 것도 있고 비껴서 나가는 것도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통과하지만.
왜 알파입자가 수소원자를 맞고 되돌아오는가하는 것은 몰랐다. 알파입자는 +전하인데, 원자 가운데 진짜 +전하만 가진 단단한 묶음이 있어서 그것을 맞으면 튕겨 나오고 아니면 통과하는 것으로 실험 결과를 해석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설명을 해야 해명이 되는 결과였다.
그래서 원자의 구조는 가운데에 핵이 있고 전자들이 밖에서 돈다고 보는 모형을 보어 이전에 러더포드가 제기했다. 이것이 원자의 러더포드 모형. 이 모형은 원자 핵을 발견했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보어 모형
그런데 원자들 중에서 가장 간단한 것이 수소 원자이다. 핵이 가운데 있고 전자 하나가 돌고 있어서 가장 간단하다. 전자가 여러 개면 서로 상호작용을 해서 복잡하니까 전자 하나 짜리를 설명해내면 다른 것도 설명할 수 있지 않겠나 해서 수소 원자를 연구했다.
그런데 보어는 이런 가정 hf = Ei – Ef을 하면 실험 결과가 설명이 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자가 튀어나올 때 왜 이런 특정한 에너지의 빛(hf)만 나오는가 하는 것이다. 러더포드 모형으로 봤을 때 가운데 핵이 있고 전자가 돌텐데, 전자가 튀어나올 때 왜 특정한 에너지의 빛만 나오는가를 설명하려면 보어의 가정이 필요하다.
전자는 특별한 궤도에만 있고, 궤도에 따라서 에너지가 다르고, 각 궤도마다의 에너지 차이만큼만 빛이 나온다는 것이다. 에너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전자가 떨어지면 그 에너지 차이만큼 빛으로 나온다.
그 전에 이미 다른 연구자들이, 수소에서 나오는 스펙트럼이 어떤 에너지를 가진다, 어떤 진동수를 가진다는 것을 찾아낸 결과들이 이미 있었다. 거기에 맞도록 보어가 만들었고, 이것이 보어의 원자 모형이다. 이런 가정에 따라서 결과가 나온 것 뿐이고, 그 이상은 없다.
플랑크상수라는 것을 하나 넣었더니 많은 것이 설명이 되더라는 것. 고전역학이나 기존의 전자기학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반드시 가정을 집어넣어야만 설명이 되는 이런 상황이었던 것이다.
1924 Louis de Broglie의 입자의 파동설
프랑스 귀족인 드 브로이는 1차대전에 참전했고, 이후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물리학 공부 시작했다. 그때까지 빛은 파동성이 있고, 아인슈타인이 볼 때는 입자적 성질도 가지고 있다고 밝힌 상황이었다.
드 브로이는, 빛이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전자라든가 알맹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파동성을 가질 수 있겠다고 생각해보았다. 빛은 파동이라고 알려져있는데 입자성을 가지는 것을 보니까 입자도 파동성을 가지고 있지 않겠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성 이론에서 이런 식 p2 -(E/c)2 =-mc2을 얻었었는데, 여기서 에너지에 hf를 집어넣으면, 빛의 경우는 질량이 0이 나오고, 운동량이 p = E/c =hf/fλ= h/λ 이렇게 파장의 역수가 운동량과 관계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입자의 경우도 거꾸로 해보면 λ=h/p 관계가 나온다. 따라서 운동량 p, 파장 λ를 가진 입자를 생각해볼 수 있지 않겠나하는 것이 드 브로이의 이론이고, 그렇게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근거가 매우 약한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심사하는 교수들은, 이 이론이 의미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판단하기 어려워서 아인슈타인에게 보내보자고 꾀를 냈다. 1924년이면 아인슈타인의 위상이 하늘 꼭대기까지 가 있을 시기이기 때문이다. 우리 학생이 이런 논문을 하나 썼는데 선생님이 검토 좀 해주십시요 하고 보냈더니, 아인슈타인이 탁 보더니 거대한 비밀의 장막 한 귀퉁이를 들어올린 것에 해당합니다 하고 써보내왔다.
그래서 이 논문이 일약 유명해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빛의 이중성이다. 빛은 파동인데 입자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런데 이번에는 입자라고 생각했던 것이 파동의 성질도 가지고 있겠다하는 아이디어가 나온 것이다.
1925 취리히 대학의 한 세미나실 이야기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드 브로이의 논문을 굉장히 높이 평가했다는 소문이 유럽에 좍 나게 됐다. 그러자 이 논문을 좀 읽고 우리가 이해해보자 하면서 유럽의 주요 대학 교수들이 관심을 가지게 됐다.
조금 전에 사진으로 봤던 취리히 공과대학과 취리히대학이 아마 1~2주에 한번씩 합동 세미나를 하는데, 거기서 누가 한번 드 브로이의 논문을 읽고 설명을 해줬으면 좋겠다 하는 제안이 들어왔고, 이렇게 해서 드바이 교수가 당시 중진 이론물리학교수여서 의뢰를 받게 됐다.
드바이교수가 보니 잘 이해가 안되기도 해서, 후배 신임교수인 슈뢰딩거에게 떠넘기게 됐다. 슈뢰딩거도 보니 잘 이해가 안됐다. 사실 이런 식의 이론 체계는 잘 없다. 아이디어 차원의 이론이다. 슈뢰딩거도 이미 이런 비슷한 생각을 하기는 했고 해서 그것과 연결해서 발표하기로 했고, 1925년 12월 초순에 가진 세미나에서 발표를 했다.
1926 Erwin Schrodinger 슈뢰딩거 방정식 제안
그런데 발표를 다 듣고 나더니 드바이 교수가 하는 말이, 도대체 그거 방정식이 없지 않냐, 그걸 설명해주는 방정식이 있어야한다고 핀잔을 주게 된다. 슈뢰딩거는 크리스마스 휴가 동안 이론을 정리해서 방정식을 만들었고, 두 주 후에 “이번에는 방정식을 들고 나왔습니다” 선언을 하고 방정식을 제시한 것이 1926년이다.
슈뢰딩거 방정식은 양자역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방정식이다. 말하자면 변화의 원리가 고전역학 즉 뉴턴의 운동방정식에서 슈뢰딩거 방정식으로 바뀐 것이다.
과거에는 고전역학으로 해야 설명이 됐고, 아인슈타인의 이론도 4차원으로 확장한 것밖에 안된다.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기본 변화의 원리를 획기적으로 바꾼 것이고, 그 방정식이 바로 슈뢰딩거의 방정식이다. 이 방정식이 나옴으로써 양자역학의 기본틀이 잡힌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 방정식을 발표한 순간이, 내가 여기에 묘사한 것처럼, 소의 고삐를 잡아끄는 장면에 해당한다.
1925 Werner Heisenberg 행렬역학 제안
여기서 한 가지 빠트리면 안되는 것이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으로 표현된 양자역학이다. 내용적으로는 슈뢰딩거 방정식과 같은 것임이 나중에 밝혀졌다. 슈뢰딩거 방정식에 근거해서 수소 원자에 대해 보어가 해석을 했는데, 하이젠베르크는 전혀 다른 방식인 행렬역학을 이용해서 먼저 했다. 시간적으로 조금 더 앞섰다.
해석의 내용은 근본적으로는 같은데, 수학적으로 행렬 방식이 슈뢰딩거 방정식(미분방정식)보다 조금 접근하기 어려워서 덜 알려졌다. 처음에는 둘이 다른 줄 알았는데, 표현이 다를 뿐이지 내용은 같은 것이었다. 사실은 두 사람이 동시에 찾아냈다고 얘기해도 된다.
<질문>나중에 보니 다른 줄 알았던 두 방정식이 같더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두 방정식의 수학적 방식은 전혀 다르지만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은 수소 원자의 스펙트럼이다. 전혀 다른 데 결과가 같게 나온다는 것도 궁금하지만, 이 둘이 같다는 것의 의미는 수학적인 표현을 바꾸면 같아진다는 것이다. 행렬은 수학적 표현 방식의 하나다. 슈뢰딩거 방정식을 띄엄띄엄한 형태로 바꾸면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으로 가고 그게 확인이 된 것이다. 그게 사실은 같은데 서로 다른 방식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사실 양자역학은 슈뢰딩거 혼자 했다고 할 수 없다. 앞의 많은 사람들이 중요한 기여를 했고, 하이젠베르크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6 Davisson and Germer 1927 Thomson and Reid
여기서 재밌는 것은 1926년에 드 브로이의 이론이 실험적으로 확인되었다. 데이비슨과 저머, 톰슨과 라이드 이런 사람들이 처음부터 양자역학 실험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얇은 니켈 막에 전자를 때리면 전자가 어떻게 튀어나올 것인가 실험했는데, 이상한 무늬가 생긴 것이다. 파동이 간섭을 일으키지 않으면 무늬가 생길 수가 없다. 처음에는 뭐가 잘못 돼서 무늬가 생긴 줄 알았다. 이상한 게 들어와서 생겼나보다하고 없애려고 아무리 해도 없어지지 않았고, 나중에 계산을 해보니 그런 무늬가 간섭을 통해서 나오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실험이 드 브로이의 가설을 증명해주게 되면서, 이 사람들은 얼떨결에 노벨상을 받게 된 것이다. 자기들은 실험에 실패한 줄 알고 고민했는데 결국은 노벨상까지 받게 된 것이다. 양자역학의 역사에 기여했던 이 사람들도 다 노벨상 받은 사람들이지만.
1927 Max Born 파동 함수의 확률적 해석
문제는, 슈뢰딩거 방정식에서 나오는 주인공 ?(프사이)라고 하는 함수가 있는데, 그걸 적당히 해석해서 현상을 설명하는데, 그 함수의 정체가 뭐냐. 막스 보른은 파동함수의 확률적인 해석이라고 했다. 어떤 대상이 ‘어느 위치에 있나’가 아니라 ‘어느 위치에 있을 확률이 얼마인가’를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해석을 했다.
슈뢰딩거는 방정식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몰랐나.슈뢰딩거는 방정식의 의미를 잘 몰랐다. 확률적인 해석은 보른이 한 것이다. 슈뢰딩거도 여러가지 설명을 많이 했지만, 확률이다 아니다 하는 설명은 하지 않았다.
1927 Werner Heisenberg 불확정성원리 제안
하이젠베르크가 중요한 기여를 했는데, 불확정성원리라는 것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고전역학에서는 입자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려면 위치와 운동량이 꼭 필요하다.
하이젠베르크가 여러가지 생각을 해보니까,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고 하면 운동량이 결정이 안되고, 운동량을 정확하게 알려면 위치가 결정이 안되는 것이다. 이 둘을 (동시에) 정확하게 알 수가 없고, 아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해서, 그 한계를 부등식으로 얘기를 해준 것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이다.
이것은 고전역학에 큰 타격이 되었다. 왜냐하면 둘을 정확히 알아야 미래 예측을 하는데, 하나를 알면 다른 하나를 알 수가 없다. 다른 하나를 알려면 또 이쪽을 알 수가 없는 이런 관계를 위치와 운동량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1927 솔베이 국제회의 5차 회의
슈뢰딩거 방정식이 나오고 얼마 안됐을 무렵 벨기에 브뤼셀에서 솔베이 국제회의(제5차)가 열렸다. 정식 회의 이름은 ‘전자와 광자’였는데, 도대체 양자역학이란 것이 뭐냐하는 것이 주제였다. 어쨌든 양자역학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해서 당시 유럽의 있는 최일급 학자들만 싹 뽑아다가 돈이 좀 있는 사업가가 전체 돈을 내서 브뤼셀에 모여서 회의를 했다.
1911년부터 시작됐는데 1927년 제5차 회의가 제일 유명하다. 29명이 참석했는데 그 중 17명이 노벨상을 받았다. 그래서 아마 20세기 초에 가장 열띤 물리학의 발전이 이루어질 중심에 서있던 대가들이 다 모인 것이다.
이 사람들이 모여서 양자역학이 도대체 뭐냐 열띤 논의를 한 것이다. 그런데 그 논의가 아직도 끝이 안났다. 지금 현재 양자역학의 주류 해석은 닐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를 중심으로 한 ‘코펜하겐 해석’이다. 보어의 연구소가 코펜하겐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붙여서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한다.
내 입장과는 다르다. 어쨌든 주류가 그러한데 거기에 제일 반대했던 사람이 아인슈타인이었다. 못마땅해 했고 슈뢰딩거도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역사인데, 역사 얘기는 이 정도로 그치고. 도대체 여기까지의 결론이 뭐냐, 이거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방정식은 맞춰보면 설명은 되지만 그러나 아직도 알쏭달쏭하다는 입장이 이때까지 얘기라고 볼 수 있다.
대담영상 5-1. 끝.
녹취, 요약: 황승미 (녹색아카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