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 – 발췌, 요약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조현수 옮김. 제2판 2022, 제1판 2010. 궁리)은 녹색아카데미 온라인 책읽기모임 ‘책밤’에서 2022/11/22~2023/1/31에 걸쳐 읽은 책입니다. 책을 읽는 동안 핵심적이라고 생각되는 내용을 챕터별로 발췌해 공유해왔습니다.

매달 열고 있는 녹색문명공부모임(3/11)에서 토론 모임도 가졌습니다. 정리하는 의미에서 전체적인 내용을 더 간략하게 요약해보았습니다.

<우연과 필연> 발췌글 – 전체 목록 보기

참고자료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 (by 자연사랑)
“자크 모노와 알베르 카뮈, 그리고 레지스탕스” (by 자연사랑)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하워드 케이)” (by 자연사랑)


머리말

생물학은 학문들 사이에서 주변적인 동시에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데, 이는 생명체를 연구함으로써 일반적인 법칙들을 밝혀낼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문 전체의 궁극적인 야심이 우주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라고 보면 생물학은 중심적 위치를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

최근 20여 년 동안 발전해온 ‘유전암호의 분자 이론’이 생명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예측하거나 해결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생명체들에 대한 일반이론이 되고 있다. 이 이론의 의미와 적용 범위를 소수의 전문가 집단을 넘어서 많은 이들에게 이해되고 정당하게 평가를 받는다면 현재의 사상의 흐름에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고, 나는 이 책을 통해 그러한 일에 기여하고자 한다.

[그림 1] 『우연과 필연』은 자크 모노가 1969년 2월 미국 캘리포니아 포모나 대학에서 한 강연 “Molecular Biology and the Kingdom of Ideas” (Robbins Lectures)에 의거하고 있으며 이 주제로 1969~1970년 프랑스 꼴레주 드 프랑스에서도 강의했다. (출처 : 포모나 대학 화학부 웹사이트 갈무리)

1장. 이상한 존재들

우리가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구별하려고 할 때 명료하고 엄밀하고 객관적인 판단 기준을 가지기는 매우 어렵다. 어떤 존재물의 구조만을 기준으로 인공물을 가려내는 것은 불가능하며(돌멩이, 규칙적인 모양을 가지는 결정, 벌집 등), 기능까지 포함해서 조사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생명체는 ‘합목적성‘이라고 부르는 속성에 의해서 구별된다. 그러나 이 조건은 필요조건은 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생명체의 구조는 외적인 힘의 작용이 아니라 자기 자신 내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형태발생적’ 상호작용에 의해서 생긴다.

[그림 2]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구별하는 것은 그렇게 명료하지도 객관적이지도 않다.

생명체의 거시적인 구조를 형성하는 내적인 힘들이란 결정의 형태를 발생시키는 미시적 상호작용들과 같은 본성이며, 이것을 밝히는 것이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들 중 하나이다. 생명체의 구조는 외적인 힘의 작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전체 형태에서부터 가장 작은 세부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자기 자신 내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형태발생적‘ 상호작용에 의해서 생긴다.

생명체가 가지는 세 번째 두드러진 속성은 불변성이다. 생명체란 자기 자신의 구조를 발생시키는 정보를 불변적으로 복제하고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모든 생명체들에게 이 세 가지 속성, 즉 합목적성, 자발적 형태 발생, 합목적성은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유전적 불변성은 (생명체의) 구조의 자발적 형태발생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내며, 이렇게 자발적으로 형태발생된 구조가 ‘합목적적인 장치’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자발적인 형태발생은 속성이라기보다는 어떤 메커니즘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생명체들은 이상한 존재다. 모든 거시적 체계를 지배하는 물리적 법칙들에 비추어볼 때 생명체들의 존재는 현대과학이 의거하고 있는 몇 가지 근본적인 원리들을 위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생명체들이 보이는 역설은 불변성과 합목적성이다.

생명체라는 존재가 보이는 불변성이라는 속성은 열역학 제2법칙과 상치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대단히 역설적이다. 하지만 에너지적으로 고립된 어떤 계의 전체적인 전개에서만 타당하다. 고립된 계라고 할지라도 그 계 내의 어떤 부분적인 영역에서는 질서를 갖춘 구조가 형성되고 생장하는 일이, 즉 질서가 증가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생명체의 내에서 ‘구조의 불변적 복제’가 일어나는 데에는 어떠한 물리적인 역설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 필요한 열역학적 대가는 정확하게 지불되는데, 이는 생명체의 합목적적 장치 덕분이다. 이 장치는 생명체의 ‘구조적 규범의 보존과 복제’라는 자신의 의도를 실현하는 데 완전히 적합하다.

이런 합목적적 장치에 의해 추구되고 실현되는 이와 같은 의도가 존재한다는 것에서 진짜 문제는 물리적인 법칙들과 관련된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벌어진다. 이 현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이성, 우리의 직관과 관련되어 있다. 실제로 여기에 있는 것은 어떤 역설이나 기적이 아니라 어떤 ‘지식의 논리’상의 명백한 모순이다.

객관성의 공리는 현대 과학과 한 몸이다(갈릴레이와 데카르트 이후로).  하지만 이러한 객관성의 공리 때문에 우리는 생명체의 합목적적인 성격을 특기하게 된다. 생명체란 그 구조나 활동에 있어서 어떤 의도를 실현하며 추구하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아주 심각한 ‘지식의 논리’ 상의 모순이 존재한다.

생물학의 중심 문제는 바로 이 모순 자체다. 만약 이 모순이 외견상으로만 모순으로 보이는 것 뿐이라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고 이 모순이 정말로 모순이라면, 그것이 근본적으로 해결 불가능하다는 점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2장. 생기론과 물활론

생명체의 합목적적 속성이 근대 인식론의 근본을 이루는 공리들 중 하나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모든 철학적, 종교적, 과학적 세계관은 이 문제에 대해 반드시 함축적으로든 명백하게든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현대 과학의 눈으로 볼 때 유일하게 받아들일 만한 가설인 다윈의 자연선택설만이 불변성이야말로 필연적으로 합목적성에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자연선택설은 불변성을 일차적인 속성으로 생각하고 합목적성을 불변성으로부터 파생되어 온 이차적인 속성으로 생각함으로써, 이제까지 제시된 여러 이론들 가운데 유일하게 ‘객관성의 공리’에 부합하는 이론이 된다.

생명체의 이상함을 해명하기 위해 제시된 그 밖의 모든 이론들(종교적 이데올로기, 거대한 철학적 체계들 속에서 이와 관련될 수 있는 함축적인 생각들…)은 이와 반대되는 가설을 취하고 있다. 이들 이론들은 어떤 시원적인 합목적적 원리가 먼저 있고, 이 원리에 의해 불변성이 안전하게 지켜지고 개체발생이 유도되어 진화의 방향이 정해진다고 생각한다.

2장에서는 형이상학적 생기론, 과학적생기론과 물활론, 과학주의적 진보론, 변증법적 유물론 등이 어떻게 ‘객관성의 공리’를 저버리고 있는가를 대략적으로 분석한다. (여기서는 생략)

이러한 오류들의 원천에는 확실히 인간중심주의적인 환상이 자리잡고 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화론에 결부된 이 새로운 인간중심주의적 신기루가 사라지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떤 보편적인 이론이라 할지라도 생명권을 자신 안에 포함할 수 없음을 확신할 수 있다. 즉 생명권의 구조와 진화란 제1원리로부터 연역되어 나올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어떤 이론이 보편적인 이론이 되려면, 당연히 상대성 이론과 양자 이론, 그리고 소립자 이론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초기 조건들을 알기만 하면, 이런 이론은 우주 전체의 일반적인 진화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하는 우주론까지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예측은 단지 통계적일 수 밖에 없다.

보편이론은 어떤 종류의 대상과 사건들이 존재하게 될 것이며 그 속성이나 서로 간의 관계들이 어떤지는 일반적으로 미리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어떤 특수한 개별적인 대상이나 사건들이 존재하게 되고 그것들의 성질이 어떨지에 대해서는 미리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생명권은 미리 예측 가능한 대상이나 사건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어떤 특수한 사건을 이룬다. 이 사건은 물론 제1원리들과 양립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이 원리들로부터 연역되어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하다. 생명권이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은, 내 손에 쥔 자갈돌을 구성하는 원자들의 특수한 배열 상태가 예측불가능하다는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다.

제3장. 맥스웰의 도깨비

합목적성이란 개념은 어떤 정해진 방향을 향하여 정합적이고 건설적으로 이뤄지는 행위라는 관념을 포함한다. 이런 기준들로 볼 때, 단백질이야말로 생명체의 합목적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인 분자적 요인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모든 유기체는 각자 정합적이고 전체적으로 통합된 기능적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 자율적이고 기능적인 정합성을 위해서는 어떤 사이버네틱스 시스템이 있음에 틀림없다. 이 사이버네틱 시스템의 본질적인 요인들은 ‘조절’ 단백질이며 이는 화학적 신호를 탐지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은 합목적적인 성능은 결국 단백질의 소위 ‘입체특이성’에서 기인한다.

[그림 3] 단백질의 구조. (출처 : 『내 몸 안의 작은 우주 분자생물학』. 하기와라 기요후미 지음. 전나무숲. 2019. pp.48-49.)

단백질이란 매우 거대한 분자로서, 그 분자량이 10,000~1,000,000 이상 나가는 것까지. 이러한 고분자는 ‘아미노산'(20가지)이라는, 분자량이 약 100 정도인 화합물이 계속적으로 결합하여 중합된 결과로 만들어진다.

단백질의 수 많은 아미노산 잔기는 불과 스무 가지의 화학종에 모두 속하는 것으로 박테리아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에서 발견된다. 생명체의 구성이 이처럼 단조롭다는 사실은, 생명체들의 거시적인 구조의 놀라운 다양성이 실은 미시적인 구조의 놀랄 만한 단일성에 근거하고 있음을 예증하는 것이다.

유기체의 발생과 작용에 기여하는 수천 가지 화학적 반응들이 있는데, 이들 중 어떤 반응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 반응만을 일으키는 독특한 효소 단백질에 의해 선별적으로 결정된다. 효소 단백질의 특이성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가 있다.

1. 각각의 효소는 오직 한 가지 유형의 반응만을 촉매한다.
2. 이러한 유형의 반응을 겪을 수 있는 여러 화합물 중에서 효소는 일반적으로 그들 중 오직 하나에 대해서만 작용한다.

예로 푸마라아제는 푸마르산을 사과산으로 바꾸는데, 푸마르산의 기하 이성질체인 말레산에 대해서는 푸마라아제가 작동하지 않는다. 또한 사과산에도 두 개의 광학 이성질체(L-사과산, D-사과산)가 존재하는데, 푸마라아제는 L-사과산만을 탈수시켜 푸마르산을 만든다. 다시 말해 푸마라아제는 푸마르산으로부터 오직 L-사과산만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관찰 사례들은 입체 특이성을 갖는 복합체가 존재한다는 이론을 확증해주며, 다음과 같이 효소반응이 서로 구분되는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려준다.

1. 단백질과 기질 사이에 ‘입체특이성을 갖는 복합체’가 형성된다.
2. 이 복합체 내부에서 반응의 촉매적 활성화가 일어난다. 이 반응의 특이성은 이 복합체 자체의 구조에 의해서 그렇게 결정된다.

화학적 구조물의 안정성에 기여하는 결합에는 공유결합과 비공유결합 두 종류가 있는데, 효소와 기질 사이에 형성되는 복합체는 비공유적 결합체이다. 비공유결합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평균에너지(1~3킬로칼로)는 공유결합(5~20킬로칼로리)에 비해 훨씬 낮은데, 이 이유에 더해 소위 ‘활성화에너지’ 상의 차이가 ‘공유결합적’ 구조물과 ‘비공유결합적’ 구조물의 안정성의 차이를 설명해준다.

비공유적인 상호작용에 의해 이뤄진 구조가 어떤 안정성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많은 수의 비공유적 상호작용을 수반해야 하며 원자들 사이의 거리가 아주 가까워야 한다. 따라서 비공유적인 결합이 맺어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두 분자의 표면이 각자 상대방에 대해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구조를 갖고 있어서 한쪽 분자 속에 있는 여러 개의 원자들이 다른 쪽 분자의 여러 개의 원자들에 들러붙을 수 있을 때다.

이상의 사실에 이제 효소와 기질 사이에 형성되는 복합체는 비공유적 결합체라는 사실만 덧붙이면, 왜 이 복합체가 필연적으로 입체특이성을 갖는지를 알게 된다. 효소-기질 복합체는 매우 빠른 속도로 만들어질 수도 있고 해체될 수도 있어야 한다. 그것은 효소가 촉매로서 높은 활동성을 가지기 위한 조건이다. 실제로 이 복합체는 쉽게 그리고 매우 빠르게 해체될 수 있다.

“비공유결합에 의한 ‘입체특이성을 갖는 복합체'”라는 개념은 생명체를 특징짓는 이와 같은 선택의 현상을 – 모든 선별적인 구분의 현상을 – 해석하는 데 핵심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푸마라아제의 예를 들어 다시 말하자면, 이 효소는 선택을 위한 정보를 입체특이성을 지닌 그의 수용기의 구조 속에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정보를 증폭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는 효소 자체로부터 오지 않는다. 오직 한쪽 방향으로만 배타적으로 반응이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 효소는 푸마르산 용액의 화학적 포텐셜을 이용한다.

브리유엥(Léon Brillouin. 1889-1969)은 맥스웰의 미시적 도깨비가 그의 인지적 기능을 수행할 때는 반드시 어느 정도의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렇게 소비되는 에너지량은 일이 일어나는 계의 엔트로피의 감소에 정확히 상응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단백질 효소가 바로 미시적인 차원에서 질서를 창조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이러한 질서의 창조는 화학적 포텐셜을 소비하는 대가로 이뤄진다. 효소는 정확히 맥스웰의 도깨비처럼 기능하는데 그 이유는 다른 분자들과 비공유적으로 결합하여 ‘입체특이성을 갖는 복합체’를 형성할 수 있는 그의 능력 때문이다.

4장. 미시적 사이버네틱스

각 효소들이 잘 작동하더라도 전체가 정합적인 체계를 이루도록 서로를 제어하지 않는다면 혼돈에 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기체의 여러 다양한 성능들을 대규모적인 차원에서 상호조정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신경계와 내분비계의 기능이다. 이런 시스템은 기관들이나 조직들 사이의 상호조정을, 결국 세포들 사이의 상호조정을 가능케 해준다.

그런데 거의 이런 시스템들만큼이나 복잡한 사이버네틱 망이 각각의 세포 내부에도 존재하며, 그리하여 그 덕분에 개별 세포 내부의 화학적 기계장치의 기능적 정합성이 확보된다는 것은 최근 5~20년 사이의 연구에 의해 밝혀진 사실이다.

초보적인 사이버네틱 작용은 어떤 특성화된 단백질들(화학적 정보를 탐지하고 집적하는 역할을 하는 단백질들)에 의해 이뤄진다. 조절 단백질 중에서 오늘날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알로스테릭(allosteric enzyme) 효소’*이다. 이 효소들은 고전적 효소들(푸마라아제)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만 적합한 특이성을 가진 기질을 알아보고 그것과 결합하여 그것을 다른 물질로 바꾸어 놓는다. 또한 기질 이외의 다른 화합물들도 선별적으로 식별하여 그것들과 (입체특이성을 갖도록)결합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알로스테릭 효소 : 알로스테릭이라는 단어에서 ‘알로’란 ‘다른’, ‘스테릭’은 ‘입체 모양’을 의미한다. 즉 알로스테릭이란 2가지 이상의 입체 모양을 취한다는 뜻이다. 알로스테릭의 또 다른 의미로 ‘다른 장소의’라는 뜻이 있다. 효소의 활성 부위와는 다른 장소, 즉 조절 부위에 최종 산물이 결합함으로써 활성이 변하는 효소가 바로 알로스테릭 효소이다.(『내 몸 안의 작은 우주 분자생물학』. 하기와라 기요후미 지음. 전나무숲. 2019. p.57.)

[그림 4] 알로스테릭 효소에는 활성 부위와 조절 부위(알로스테릭 부위) 2가지 부위가 있다. 조절 부위에 최종 산물이 결합하면 활성 부위의 모양이 변해 효소로서의 활성이 떨어져 피드백 억제 효과가 발생한다. (출처 : 『내 몸 안의 작은 우주 분자생물학』. 하기와라 기요후미 지음. 전나무숲. 2019.  p.57.)

이런 유형의 상호작용(알로스테릭 상호작용)에 의한 조절 기능을 수행하는 반응을 통제하는 물질을 ‘알로스테릭 이펙터’라고 부르는데, 이 알로스테릭 이펙터가 대사과정의 어느 지점에서 생기는가 하는 것과 그것이 일으키는 반응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이들 알로스테릭 상호작용을 몇 가지 ‘조절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효소의 활동은 모든 순간에 있어서 이 세 가지 정보의 총합을 나타낸다.

1. 피드백 저해
2. 피드백 활성화
3. 평행적 활성화
4. 전구체에 의한 활성화

조절적 상호작용에 소비되는 에너지는 사실상 제로다. 이때 소비되는 에너지의 양은 이펙터의 세포 내 화학적 포텐셜의 극소 부분에 불과한 반면 이 미미한 상호작용에 의해서 통제되는 촉매반응은 상대적으로 상당한 양의 에너지 전이를 수반할 수 있다.

문제는 한 개의 알로스테릭 단백질이라는 이  미시적 릴레이에 의해 어떻게 이렇게 복잡한 성능들이 수행되는지를 아는 것이다. 알로스테릭 상호작용은 단백질 자체의 분자적 구조가 불연속적으로 변화하는 덕분에 일어난다.

다음 장(5장)에서 구상 단백질의 복잡하고 치밀한 구조가 그 구조를 유지하는 데 서로 협력하고 있는 수많은 비공유결합을 통해 안정화되고 있음을 살펴볼 것이다. 그런데 몇몇 단백질들은 두 개(혹은 여러 개)의 서로 다른 구조적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 이 두 상태는 서로 다른 특이적 구조로 인해,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단백질이 전이됨에 따라 단백질의 입체특이적 식별성이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서로 길항관계에 있다.

그리고 여러 개의 리간드 사이에서 이뤄지는 협조적이거나 길항적인 상호작용은 완전히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뤄진다. 실제로, 리간드 자신들 사이에는 아무런 상호작용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전적으로 단백질과 리간드 사이에서만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이 개념이 없이는 생명체에서의 사이버네틱 시스템의 기원 및 발달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고분자나 핵산, 또는 단백질의 합성과 같은 차원의 반응에서도 역시 어떤 조절 시스템들이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차원의 조절 시스템에 대한 연구는 알로스테릭 효소의 조절 시스템에 대한 연구보다 훨씬 어렵지만 락토스계라고 불리는 시스템은 거의 완전히 분석되어 있다.

락토스계라고 불리는 이 시스템은 대장균에서 세 가지 단백질의 합성을 관장한다. 이 중 갈락토시드 파미아제는 갈락토시드로 하여금 세포 내로 파고들어가 그 안에서 축적되도록 해준다. 두 번째 단백질은 베타-갈락토시드 당을 가수분해한다. 세 번째는 소소한 일을 한다. 앞의 두 개 단백질은 대장균이 락토스(유당)와 그 밖의 다른 갈락토시드 당들을 대사적으로 이용하는 데 동시적으로 필요한 것들이다.(책 p.111 그림4 참조)

락토스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의미심장한 개념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a) 억제물질은 그 자체로는 어떤 활성도 갖고 있지 않으며 단지 화학적 신호의 순전한 중개자(전달자)일 뿐이다.
b) 갈락토시드가 효소 단백질의 합성에 미치는 영향은, 전적으로 억제물질이 가진 식별속성에 기인한다. 즉 이 억제물질이 서로 배타적인 두 가지 상태를 취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알로스테릭 상호작용이다.
c) β-갈락토시다아제(효소)가 β-갈락토시드를 가수분해한다는 사실과 이 β-갈락토시다아제의 생합성이 이 β-갈락토시드에 의해 유도된다는 사실 사이에는 아무런 화학적으로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이런 것을 두고 ‘무근거한 것’이라고 부른다.

무근거성이라는 근본적인 개념, 즉 어떤 화학적 신호가 수행하는 기능과 이 기능을 통제하는 화학적 신호의 본성 사이에는 화학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개념이며 알로스테릭 효소에 적용된다.

알로스테릭 상호작용의 작동 원리는 그러므로 제어 시스템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완전한 자유를 허락해준다. 이러한 제어시스템은 세포나 유기체에 더 많은 정합성과 효율성을 부여해주며 결국, 제어 시스템의 무근거성이야말로 분자적 진화에 실질적으로 무한한 모색의 장을 열어준 것이다.

알로스테릭 상호작용에 대한 분석은 합목적적인 활동이 구성성분을 많이 가진 복잡한 시스템의 독점적인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무근거성이란 개념 덕분에, 이러한 분자적 상호 조절작용이 어떻게 해서 또한 왜 화학적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오직 시스템의 정합성에 기여하는 점에 의해서만 선택되고 도태될 수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생명체가 모든 물리적 법칙들을 준수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의도를 추구하고 실현하기 위해서 이 법칙들을 초월한다는 것이 어떤 실질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인지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분석적 기반 위에서이지 모호한 ‘체계에 대한 일반이론’과 같은 기반 위에서가 아니다.

5장. 분자 개체 발생

이 장에서 나는 이러한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형태발생의 과정을 끝까지 분석해보면 결국 이 과정은 단백질의 입체특이적 식별력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은 먼저 미시적인 차원에서부터 일어난다. 거시적 구조의 개체발생을 미시적 상호작용에 의해 분석한다는 것은 아직 턱없이 요원한 일이지만, 몇몇 분자 구조물의 조립과정은 오늘날 아주 잘 이해되고 있다.

구상 단백질은 흔히 몇몇 소수의 화학적으로 서로 동일한 하위 단위들의 결합체로서 존재한다. 이들 단백질을 구성하는 하위 단위들은 일반적으로 그 수가 적으므로, 사람들은 이들 단백질을 ‘올리고머‘라고 말한다. 이들 올리고머의 하위 단위들(프로토머; promomer하위 단위체)은 전적으로 서로 비공유결합으로 결합되어 있다. 

하나의 올리고머 분자 속에 들어 있는 프로토머들은 각자가 서로에게 기하학적으로 동등하도록 배열되어 있다. 그러므로 올리고머 분자는 참으로 미시적인 결정(結晶)을 이룬다. … 이 결정은 반드시 새로운 대칭 요소들을 얻어야만 생장한다. 내가 ‘폐쇄 결정(結晶)이라고 부르는 어떤 특별한 부류의 결정에 속한다. 이 결정은 반드시 새로운 대칭 요소들을 얻어야만 생장할 수 있다.

이 단백질의 몇몇 기능적 속성이 그의 올리고머로서의 상태와 관련 있으며 또한 그의 대칭적인 구조와 관련 있다. 올리고머 분자 속의 프로토머들은 서로  비공유결합이다. 따라서 쉽게 해리시킬 수 있으며 그의 모든 기능적 속성들(촉매적 혹은 조절적 기능)을 잃게 된다. 그런데 다시 초기의 ‘정상적인’ 조건을 회복시켜 주면 다시 자발적으로 본래의 상태를 완전히 복원하게 된다. 이는 여기에 극도의 특이성을 드러내는 식별 과정이 존재한다는 증거이며, 이러한 재결합 과정은 분명히 후성적인 것이다.

지금 우리의 관심을 끄는 중요한 핵심은 이 분자적인 후성 과정이 가지고 있는 자발적인 성격이다. 이 과정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에서 자발적이다.

1. 올리고머의 형성에 필요한 화학적 포텐셜을 계 내에 주입할 필요가 없다. 이 화학적 포텐셜이 모노머들의 용액 속에 이미 들어있다고 보아야 한다.
2. 이처럼 열역학적으로 자발적인 이러한 과정은, 또한 운동학적으로도 역시 자발적이다. 이 과정을 활성화하기 위해 어떤 촉매도 필요치 않다. 이는 비공유결합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분명하다.

복잡한 분자 구조물의 자발적 구축에 대해서 오늘날 알고 있는 가장 괄목한 사례는 아마도 몇몇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의 사례일 것이다. 박테리오파지 T4의 복잡하고 매우 정밀한 구조는 이 입자의 기능에 잘 대응하고 있다. 그 기능이란 자신의 게놈(즉 DNA)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숙주의 세포벽에 들러붙어서 주사기처럼 자기가 갖고 있는 DNA를 그 속에 주입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정밀한 미시적 기계를 구성하는 갖가지 부품들은 이 바이러스의 여러 돌연변이체로부터 각각 다로 따로 얻어질 수가 있다. 실험실 상황에서 이 부품들이 마구 혼합되어 있는 경우, 이들은 자발적으로 서로 모여들어, 정상적인 것과 똑같은 입자를, 즉 자신의 DNA를 주입하는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입자를 재구성하게 된다.

[그림 5] 박테리오파지 T4의 구조. (출처 : 위키백과)

미시적 구조물의 형성에 대한 연구에 근거를 둔 이러한 생각이 마찬가지로 거시적 구조(조직, 기관, 사지 등)의 후성적 발생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있고, 또 설명해야 한다. 이와 같은 문제는 그 크기에서 뿐만 아니라 복잡성에 있어서도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차원으로 제기된다.

이 차원에서 가장 중요한 구조-구축적 상호작용은 세포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같은 조직을 구성하는 개별 세포들 각자는 서로를 변별적으로 식별하여 짝이 맞는 것끼리 모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구성요소들과 어떤 구조를 갖기에 이처럼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지는 아직 아는 바가 없다. 모든 정황을 미루어 볼 때 세포막들의 특징적인 구조들로 인한 것 같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분석해보면 이러한 네트워크의 구조는 결국 단백질들의 식별력이다.

합목적성의 역설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제 남은 것은 이와 같은 입체특이적 결합을 기능하게 하는 단백질의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어떻게 진화되어왔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단백질의 구조 형성 방식을 다루고, 다음 장(6장)에서는 단백질의 구조가 진화되어온 과정을 다룬다.

합목적성의 궁극적인 ‘비밀’을 숨기고 있는 이 분자적 구조를 자세히 분석해보면 심오한 의미를 담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우선 구상 단백질의 입체 구조는 두 가지 유형의 화학적 결합에 의해서(부록 1 참조) 결정된다.

1.  소위 ‘일차’ 구조는 아미노산 잔기들이 선형으로 배열되어 이루어진다.
2.  그렇지만 단백질이 자연스럽게 취하고 있는 구조는 둥그스름한 구상 구조이다. 단백질 분자 내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비공유적 상호작용들의 총합이야말로, 아니 이들 상호작용들의 상호협력이야말로 단백질의 기능적 구조를 안정화하는 요인.

[그림 6] 단백질의 구조. 맨 아래 : 1차 구조, 오른쪽 : 알파-헬릭스 구조, 베타-병풍구조, 가운데 : 3차 구조, 왼쪽 위 : 4차 구조. (출처 : wikipedia)

지금 우리의 관심을 끄는 물음은 단백질의 인지적 기능을 가능하게 하는 이런 특수하고 독특한 형태가 어떻게 개체발생하느냐, 즉 이런 형태가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런 구조가 형성되는 메커니즘은,

1. 단백질 구조를 유전적으로 결정하는 유전자는 단지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 잔기들의 배열순서(서열)만을 규정할 뿐이다.
2. 이렇게 합성된 폴리펩티드 섬유는 자발적으로 또한 자율적인 방식으로 접혀져 둥그스름한 형태를 취하게 되고, 이 형태가 어떤 기능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폴리펩티드 섬유는 원칙상으로는 수천 가지의 접혀진 형태를 취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중 단 하나만을 선택해서 취한다. 단백질 분자의 후성적 발생…을 설명하는 것은 그 원칙상 비교적 간단한 일이다.

1. 생리학적으로 정상적인 환경, 즉 수상(水相)에서는 단백질의 접혀진 상태가 펼쳐진 형태보다 열역학적으로 보다 안정적이다. 아미노산 잔기들 중 대략 절반은 ‘물을 피하려 하는 성질'(소수성) 때문에 단백질은 잔기들이 상호 접촉하여 서로를 고정시키는 조밀한 구조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2. 어떤 하나의 폴리펩티드 배열이 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접혀진 구조들 중에서 오직 하나만이, 혹은 오직 아주 소수만이, 가능한 가장 조밀한 구조를 실현한다.

그러므로 유전자(게놈)가 단백질의 기능을 완전히 결정한다고 말하기에는 어떤 모순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단백질의 기능이란 보다시피 그 3차원적 구조로 인해 얻어지는 것인데, 유전자가 결정하는 것은 단지 폴리펩티드를 이루는 아미노산의 배열순서 뿐이기 때문이다.

분석과 통계의 현대적 기법을 이용하여 이들을(단백질의 배열순서) 체계적으로 비교해본 결과 도출된 일반적인 법칙은 우연의 법칙이었다.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우연적’이다. 즉 200개의 아미노산 잔기를 가지고 있는 단백질에서 그중 199개의 순서를 정확히 알고 있더라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나머지 하나의 잔기가 어떤 것인지를 예측하게 해줄 어떤 이론적이거나 경험적인 규칙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의미에서 설령 단백질의 1차 구조 일체가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지금 현재 우리가 실제로 볼 수 있는 배열순서는 우연에 의해서 합성된 것이 결코 아니다. 우연에 의해 정해진 아미노산들의 배열순서는 각각의 유기체에서 혹은 각각의 세포에서, 아주 오랫동안 매 세대를 거쳐 실제로 수천 번씩 혹은 수백만 번씩, 구조의 불변성을 아주 정확하게 보장해주는 메커니즘에 의해 반복되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6장. 불변성과 요란

서양 사상은 거의 3천 년 전 이오니아 제도에서 태어난 이래 불변성과 요란(섭동)이라는 상반되어 보이는 두 개의 입장으로 나뉘어 전해내려 오고 있다. 플라톤에서 화이트헤드, 헤라클레이토스에서 헤겔과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지식의 이론’은 마치 선험적인 것처럼 제시되고 있지만 실은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도덕적, 정치적 입장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며 차후적으로 고민된 것이다.

과학을 위한 유일한 선험적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객관성의 공리’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우주의 구조 속에는 불변적인 것들이 존재한다는 생각과 결코 양립 불가능하지 않다. 현상들을 분석하는 데 과학이 구사하는 기본적인 전략은 불변적인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모든 물리적인 법칙들은 어떤 불변적인 관계를 규정한다.

과학에는 플라톤적인 요소가 존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요소를 과학으로부터 배제할 수는 없다. 저마다 독특한 현상들의 무한한 다양성 속에서 과학은 오직 불변적인 것만을 추구할 뿐이다. 퀴비에 이후의 19세기 위대한 박물학자들이 몰두한 해부학적으로 불변적인 것들에 대한 체계적인 탐구에는 그러한 ‘플라톤적인’ 야망이 있었다.

생명체 조직의 기본적 설계도를 탐구하려 했던 이와 같은 거대한 작업이 있었기에 진화론이 등장하게 되었다. 생명계 전체의 미시적 차원에서의 깊고 엄밀한 통일성(단일성)을 완전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주로 20세기 2/4분기에 일어났던 생화학의 발전을 기다려야 했다.

오늘날 우리는 박테리아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그 구조나 기능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1. 구조의 동일성 : 동일한 두 종류의 주요 고분자(단백질과 핵산)로 구성되어 있다. 
2. 기능의 동일성 : 화학적 포텐셜의 동원이나 저장, 또는 세포 구성성분의 생합성 등의 기본적인 화학적 조작들은 모든 유기체들에게서 모두 동일한 반응들(의 연쇄)에 의해 수행된다.

만약 모든 생명체들의 구성요소가 화학적으로 모두 동일하고 또한 그것들이 모두 동일한 경로에 의해 합성된다면, 생명체들이 보여주는 놀랄 만한 형태학적, 생리학적 다양성의 근원은 무엇일까? 모든 생명체들의 보편적인 구성요소인 뉴클레오티드와 아미노산은 논리적으로 일종의 알파벳과 같다. DNA 속 뉴클레오티드들의 연쇄로 적혀 있는 텍스트가 각 세포 세대마다 불변적으로 복제됨으로써, 종의 불변성이 보장되는 것이다.

첫째로 밝혀두어야 할 점은 DNA의 불변적 복제의 ‘비밀’이, 이중쇄를 구성하는 두 개의 사슬이 서로 결합하여 비공유적 복합체를 형성할 수 있도록 서로에 대해 입체화학적 상보성을 갖는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DNA 복합체의 위상학적 구조는 단백질의 그것에 비해 훨씬 더 단순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복제의 메커니즘이 원활히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DNA 구조의 세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주기적 결정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염기쌍이 배열되는 순서가 전혀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자의 전체적인 구조가 어떤 염기쌍이 다음 순서에 이어질지에 대해 아무런 제약도 가하지 않으므로, 어떤 염기쌍이든 상관없이 다음 순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별 사슬 각자의 성장은 뉴클레오티드들이 서로 공유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이뤄진다. 그리고 이러한 공유결합은 결코 자발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 촉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뉴클레오티드들의 축합반응의 촉매가 되는 것은 ‘DNA-폴리머라아제’라는 효소다. 이 효소는 주어져 있는 DNA 사슬의 뉴클레오티드 배열순서에 ‘상관없이’ 작용한다.

뉴클레오티드 배열을 아미노산 배열로 번역하는 메커니즘은 그 원리 자체에 있어서 복제의 메커니즘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이러한 번역의 경우에도, 정보의 전달이 일어나도록 해주는 것은 비공유적인 입체특이적 상호작용이다. 번역에 사용되는 암호(트리플릿; 코돈; codon)는 모든 생명체들에게 보편적이다.

[그림 7] mRNA의 코돈 예. 각 코돈은 세 개의 뉴클레오타이드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코돈은 하나의 아미노산에 대응된다. (출처 : wikipedia)

정상적인 유기체에서는 이와 같이 정밀한 미시적 기계 구조로 인해 번역 과정이 놀랄 만큼 충실히 수행된다. 결과적으로 DNA상의 뉴클레오티드 배열이 그에 대응하는 폴리펩티드상의 아미노산 배열을 완전히 규정한다. 

이 시스템은 그 구조상 모든 변화와 모든 진화에 저항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로써 우리는 사실상 진화 자체보다도 더 역설적인 어떤 사실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즉 수억 년 이래로 어떤 눈에 띄는 변화도 없이 자신의 형태를 똑같이 반복해온 몇몇 종들의 놀랄만한 안정성 말이다.

반면 물리학은 우리에게 어떤 미시적인 존재도 양자적 차원의 요란(섭동)을 겪지 않을 수 없음을 가르쳐준다. 이런 양자적 요란(섭동)들이 거시적 시스템 내에 쌓이면 결코 피할 수 없이, 변화를 겪게 되는 것이다.

우연이야말로 생명권에서 일어나는 모든 새로움과 모든 창조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필연적으로 결론내릴 수 있다. 순전한 우연, 오직 우연, 절대적이지만 또한 맹목적인 것에 불과한 이 자유, 이것이 진화라는 경이적인 건축물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다.

*프란세스카 멀린에 따르면 자크 모노가 이 책에서 사용하는’우연’의 의미는 적어도 세 가지라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논문을 참고해주세요.
Francesca Merlin (2015) “Monod’s conception of chance: its diversity and relevance today”. C R Biol 338(6):406-12. https://doi.org/10.1016/j.crvi.2015.03.004

7장. 진화

생명체라는 이 극히 보수적인 시스템에 진화의 길을 열어주는 기본적인 사건들은 미시적이며 우연적인 것들이며, 또한 이 사건들은 자신들이 생명체의 합목적적인 기능에 결국 일으키게 되는 효과들에는 전혀 무관하다.

자연선택이 작용하는 것은 거시적인 차원, 즉 유기체의 차원이다. 자연선택은 실로 우연의 산물들에 대해서 작용한다. 하지만 자연선택이 작용하는 영역은 엄격한 요구가 지배하는 영역이며 모든 우연이 배제된 영역이다.

생명체의 복제 장치가 지닌 보수성은 거의 완벽하므로 하나하나의 돌연변이는 개별적으로 볼 때는 극히 드문 사건이지만, 개체군의 차원에서 보자면 돌연변이는 결코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다. 자연 선택의 압력이 가해지는 것은 바로 이 개체군에 대해서이다.

역설적으로 보이는 것은 진화가 아니라 오히려 ‘형태’의 안정성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어떤 종들은 수억 년 이래 거의 변화없이 형태를 유지해오고 있으며, ‘오늘날’의 세포는 20억~30억 년 전부터 존재해온 것이다.

한편 복제 시스템은 미시적 요란(섭동)을 막아내기 보다는 반대로 그 영향을 고스란히 자기 안에 받아들일 뿐이다. 하지만 합목적적인 시스템상에 나타난 이러한 변화는 결국엔 최종적으로 자연선택에 의한 심판을 받게 되며, 거의 대부분의 미시적 요란(섭동)들은 합목적적 시스템이라는 여과 장치를 무사히 통과하지 못한 채 무위로 끝나고 만다.

생명세계에서 일어나는 진화는 필연적으로 비가역적인 과정이며, 따라서 시간 속에서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방향은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 즉 열역학 제2법칙이 명하는 방향과 같은 방향이다.

이 제2법칙은 통계학적인 예측이기 때문에 어떤 거시적인 시스템 내의 아주 작은 운동에 있어서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엔트로피의 고개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 있을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예외적인 운동들이 생명체들의 복제 기구에 의해 포획, 복제되어 자연선택에 의해 보존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즉 미시적 우연이라는 거대한 저장고가 품고 있는 무한히 많은 우발적 사건들 중에서 다른 모든 사건들을 제쳐둔 채 오로지 극히 드물게 값진 사건들만을 선택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진화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종의 타임머신이라 할 수 있다.(항체에 의한 유기체의 방어 시스템 사례. p.179~181)

자연선택설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이 이론이 선택을 행하는 요인으로 너무나 자주 오직 외적 환경의 조건만을 주장하는 것처럼 간주되어왔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은 순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어떤 새로운 돌연변이가 만나게 되는 ‘최초의 선택 조건’은 두 가지 요인(외적 환경과 이 돌연변이가 발생한 생물의 합목적적인 장치의 구조와 작용 전체)을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방식으로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어떤 집단의 진화를 보면 겉으로 보기에 어떤 기관이 일정한 방향으로 발달하는 듯한 경향이 관찰된다. 행동의 진화와 이 행동을 뒷받침해주는 해부학적 특징의 진화는 서로 동행하는 것임에 틀림없다(초원에 사는 말의 도망치기 선택과 말굽으로의 진화, 새들의 혼전의식 등).

라마르크가 설명하고자 애썼던 이러한 결과는, 즉 어떤 종의 특유한 활동과 그 종의 해부학적 구조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결과는, 순전히 행위에 대한 자연선택의 작용으로써 이뤄질 수 있었음을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진화해온 방향을 정한 선택압들의 문제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의 경우에는 다른 동물들과 달리 언어를 가지고 있다. 상징적 언어의 사용은 생명계에서 유일무이한 사건으로서, 또 다른 진화의 길을 열어 문화와 관념 그리고 지식의 세계를 창조한다.

촘스키(Noam Chomsky. 1928~)에 따르면 언어의 심층 구조는, 즉 그 ‘형식’은 모든 인간 언어에서 동일하다. 이러한 언어의 발달은 호모 사피엔스에게서 중추신경계가 놀라울 정도로 발달되어 있다는 사실과 관련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인간의 이런 뇌의 발달을 위해서는 200만 년 이상의 세월 동안 선택압이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것이 필요했다.

내게 가장 그럴듯하게 생각되는 가설은 상징적 의사소통을 잘 하는 자들이 선택받아 살아남을 수 있는 전혀 새로운 선택압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언어 능력의 발달이 고취되었을 것이며 또한 언어 능력을 뒷받침해주는 생체 기관, 곧 뇌의 발달도 역시 고취되었을 것이다.

[그림 8] 긴팔원숭이, 사람,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의 골격 구조. 이들은 동일한 조상에서 진화했다. (출처 : wikipedia)

초기 언어습득이 후성적 발생 과정과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은 해부학적 자료들에 의해 확증된다. 이러한 뇌의 발달은 본질적으로 피질 신경세포(뉴런)들의 상호연결이 현저히 풍부해지면서 이뤄지는 것으로 보인다. 뇌의 후성적 발달이 수행하는 기능 중 하나가 바로 언어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인지적 기능의 발달은 출생 이후 이뤄지는 피질의 성장에 의존하는 것이 분명하다.

언어라는 도구가 없으면, 이러한 인지적 기능 대부분은 활용될 수 없는 것으로 마비되고 만다.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능력은 더 이상 한갓 상부구조로서 생각될 수 없다. 현대의 인간에게 그의 인지적 기능과 상징적 언어 사이의 이런 긴밀한 공생관계는 이 둘의 장기간에 걸친 공동 진화의 소산이다.

촘스키에 따르면, 이러한 형식(모든 언어에 공통된 하나의 ‘형식)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고 종에 애초부터 내재하는 특징이어야 한다. 이는 곧 인간의 진화에서 분절화된 언어의 출현이 단지 문화의 진화만을 일어나게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신체적 진화에도 결정적인 방식으로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뇌의 후성적 발달 과정 중에 나타나는 언어사용 능력은 오늘날 ‘인간의 본성’ 자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8장. 지식의 최전선

물리학의 경우 그것이 미시 물리학이건 우주 물리학이건 직관적인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원인은 문제되는 현상들의 스케일이 우리의 직접적인 경험의 범주들을 크게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에서의 어려움은 이와 다르다. 하지만 생명체 시스템이 가진 경이적인 복잡성은 그것에 대한 직관적인 전체상을 갖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내가 보기에 지금 지식의 최전선은 진화의 양 극단에서 펼쳐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최초 생명체의 기원 문제가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까지 나타난 것들 중 가장 강력하게 합목적적인 시스템(인간의 중추신경계)의 기능에 관련된 문제이다.

이번 장에서 나는 아직 미지의 영역인 이 두 최전선의 윤곽을 대강 가늠해보려 한다.

생명체의 기원 문제는 오히려 예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해결하기 어려운 것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최초의 유기체가 출현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은 세 단계를 틀림없이 거쳤을 것이다.

1. 뉴클레오티드와 아미노산이 지구상에서 형성되는 단계.
2. 복제 능력을 가진 최초의 고분자들이 형성되는 단계.
3. 어떤 합목적적 장치가 구축되는 진화가 일어나고, 그리하여 원시 세포에 이르게 되는 단계.

우리가 정말로 벽에 부딪치게 되는 것은 세 번째 단계에서다. 왜냐하면 원시 세포의 구조가 어떠했을지에 대해 우리는 전혀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연구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세포들조차도 ‘원시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 출발점에 대해서는 그럴듯한 가설이나마 제시할 수는 있을 것이다.

가장 커다란 문제는 유전암호와 그 번역 메커니즘의 기원 문제다. 실로 이것에 대해서는 그냥 ‘문제’라고 말하기보다는 ‘진짜 수수께끼’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유전암호란 번역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오늘날의 세포 번역 기계는 대략 150개의 고분자 성분을 포함하는데, 이들 성분들 자체가 DNA 속에 암호화되어 있다.

어떻게 이 고리가 이처럼 자기 순환적(자기 완결적)으로 채워지게 된 것일까? 문제를 정확한 방식으로 제기해보면 단순화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 하나다.

a) 유전암호의 구조는 입체화학적 이유(입체화학적 친연성)에 의해 설명된다.
b) 유전암호의 구조는 화학적으로 보자면 자의적이다. 우연적 선택들이 유전암호의 구조를 조금씩 점진적으로 풍부하게 만들어온 것이다.

이 중 첫 번째 가정이 월등히 더 매력적이다. 이 가정은 유전암호의 보편성을 설명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확증을 기대하기 어려운 가운데, 사람들은 두 번째 가정으로 기울고 있다. 이 가정은 유전암호의 보편성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

유전암호의 보편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시도들 가운데 오직 하나만이 살아남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지만, 원시적인 번역 기계의 모습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모델도 제시해주지 못한다.

이제 추상적인 사변만으로 이 틈을 메워야 한다. 지구상에 생명이 출연하기 전에 같은 사건이 일어날 확률은 얼마나 됐을까? 그렇지만 생명의 출현을 가능케 한 결정적 사건은 오직 단 한 번만 발생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즉 그 선험적 확률은 거의 0이다.

우주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사건들 중 한 특정한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게 될 선험적 확률은 0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는 존재한다. 현 시점에서 우리는 생명이 지구상에 오직 단 한 번 출현했다는 것을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처지다.

인류의 출현은 또 하나의 유일무이한 사건으로서, 그 자체로 모든 인간중심주의로부터 우리를 떼어놓는다. 생명의 출현이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류의 출현가능성이 거의 0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지식의 최전선은 인간의 뇌에 대한 탐구다. 가장 어렵고 중요한 문제들 중에는 중추신경계와 같은 복잡한 구조의 후성적 발생이 제기하는 문제가 있다. 시냅스라는 기본적인 논리적 요소의 기능을 인식하지 않고서는 중추신경계의 기능을 이해할 수 없다. 뇌의 원래적인 기능을 규정하여 열거하자면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감각 입력에 맞추어 신경 지배 활동을 조절하고 통합.
2. 행동을 위한 프로그램들을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여러 회로들의 형태로 포함.
3. 외부 세계를 재현. 
4. 의미 있는 사건들을 기록, 저장. 유사한 것들끼리 묶어 분류. 이 집합들을 관계에 따라 서로 연관 지운다.
5. 상을 만들어낸다. 즉 표상하고 본뜬다.

1, 2, 3의 기능이 단지 조정적이고 외부 세계를 재현해내는 데 그치는 기능이라면, 4와 5의 기능은 인지적 기능이며 오직 5의 기능만이 주관적 경험을 창조해낼 수 있다.

오늘날의 이러한 발견(원, 삼각형, 사각형과 같은 기초 기하학의 관념들은 대상 자체 속에서 표상된다기보다 이 대상을 지각하는 감각분석기에 의해 표상되는 것)은 어떤 새로운 의미에서 데카르트와 칸트가 옳고 철저한 경험론자들이 틀리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물의 행동에는 경험에 의해 얻어진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으나, 경험적인 것들의 이러한 포함은 동물들에게 이미 선천적으로 주어져 있는, 즉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어떤 프로그램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주창하고 경험론자들이 부정한 ‘관념의 본유성'(선천적으로타고남)에 대한 오랜 논쟁이 있다. 이는 표현형과 유전형 사이의 구분을 두고 생물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논쟁과 유사한 면이 있다. 유전학자가 아닌 생물학자들이 보기에 이 구분은 단지 유전자의 불변성이라는 공리를 구하기 위해 고안된 인위적인 장치에 불과한, 대단히 의심스러운 것이다.

대단히 중요한 어떤 의미에서 18세기의 위대한 경험론자들은 틀리지 않았다. 유전적으로 타고난 것을 비롯한 생명체의 모든 것은 모두 경험으로부터 온다라는 그들의 생각은 전적으로 옳다. 종의 조상 전체가 진화의 과정을 통해 축적한 경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인간의 경우 경험을 주관적으로 시뮬레이트 하여 그 결과를 예측하고 적절한 행동을 준비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으로 진화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인간 뇌의 특징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이 시뮬레이션 기능의 강력한 발달과 집중적인 사용인 듯 하다. 언어는 이 기능에 근거해 있으나 단지 그것의 일부분만을 드러낼 뿐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가졌던 중추신경계의 시뮬레이션 능력은, 그것의 적합한 표상 능력과 정확한 예측 능력이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확인됨으로써, 호모 사피엔스의 단계에서 도달한 상태에 이르도록 발전되어온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선천적으로 타고난 논리적 도구는 우리로 하여금 틀리지 않고 우주의 사건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즉 이 우주의 사건들을 상징적 언어로서 그릴 수 있게 해주며,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게 해준다.

바로 여기에 또 하나의 최전선이 있다. 데카르트가 그러했듯이 우리도이 최전선을 뛰어넘을 수 없는 한, 이원론은 적어도 조작상의 유용한 진리로는 계속 살아남을 것이다. 17세기 사람들에게나 현재의 우리에게나, 실제 사람들의 경험에서는 뇌와 정신이 서로 다른 것으로 체험되고 결코 서로 같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분석해보면 존재에 대한 이러한 이원론은 한갓 환상에 불과하다.

정신이 현존한다는 것을 어느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영혼을 어떤 비물질적인 ‘실체’로 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결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심할 수 없는 증언을 해주는 것은 바로 이런 존재뿐이다.

9장. 왕국과 어둠의 나락

인간의 신체상의 진화는 언어의 진화에 깊이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언어는 선택의 조건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현대인은 이러한 진화적 공생의 소산이다. 인간은 이중적 진화, 즉 신체상의 진화와 ‘관념상의’ 진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동물종보다도 훨씬 더 자기 선조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종의 발달과 확장이 어느 정도의 단계에 이른 순간부터, 종족 간의 혹은 인종 간의 투쟁이 진화를 결정짓는 핵심 요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다. 네안데르탈인들이 아주 갑자기 사라지게 된 것은 우리 인간의 선조인 호모 사피엔스가 저지른 인종말살의 결과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것이 최후의 사건도 아니다. 역사 속에서 행해진 수많은 인종말살의 행위를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러한 선택의 압력이 인류를 어떤 방향으로 진화하도록 몰고 갔을까? 중요한 것은 수십만 년에 걸친 이러한 인간의 문화적 진화가 인간의 신체적 진화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행동이 그저 자동적으로 행해지던 것을 넘어서 문화적 성격을 띠게 된 이후부터 문화적 특징 자체들이 게놈의 진화에 압력을 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진화가 죽 이어져 오다가 문화적 진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져서 드디어 게놈의 진화와 완전히 동떨어진 채 저 혼자서만 계속 진화하는 시기가 오게 된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분명 문화적 진화와 신체적 진화가 완전하게 분리되었다. 현대 사회에서 선택(도태)은 억제되고 있다. 얼마간의 선택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다윈적 의미에서의 ‘자연적’인 것은 아니다.

생물학자는 사상들의 진화를 생명계에서 일어나는 진화에 비교해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사상의 선택과 도태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임에 틀림없다. 정신 자체의 차원과 성능(performance)의 차원이 그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상이 크게 뻗어나간다는 것과 이 사상이 얼마나 많은 객관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가 하는 것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가장 강력한 침투력을 가진 사상들이란 인간에게 우주의 거대한 내재적 운명 속에서 그의 자리를 배정해줌으로써 인간을 설명하는 사상, 그리하여 이 내재적 운명 속에서 인간의 불안을 해소시켜주는 사상일 것이다.

수십만 년 동안 인간 개인의 운명은 그가 속한 집단이나 부족의 운명과 하나였으며, 부족은 그 구성원들의 단결에 의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유전적 진화는 인간의 뇌를 부족집단의 법을 잘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진화되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법에다 어떤 거대한 존엄성을 갖도록 그 근거를 부여할 수 있는, 어떤 신화적 설명을 만들 필요성(요구)을 느끼게 하는 방향으로 진화되도록 했다.

우리는 이러한 인간들의 후손이다. 모든 신화와 종교, 모든 철학과 과학은 바로 이 불안으로부터 창조된 것이다. 이러한 강렬한 요구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라는 점, 즉 유전 암호 자체의 어딘가에 적혀 있고 자발적으로 발달한다는 점은 나로서는 아무런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것이다.

인간이 형성하는 사회적 제도는 순전히 문화적인 것이다. 신화니 종교니 거대한 철학적 체계니 하는 것들을 발명하고 구축해야 했던 것은, 인간이 순전한 자동성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동물로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치러야 했던 대가였던 것이다. 하지만 문화적 유산 이외에도 유전적인 뒷받침이 필요했다. 이 유전적 뒷받침은 다름 아닌 이러한 문화적 유산을 마치 정신이 갈구하던 자양분인 양 보이도록 만든 것이다. 

불안을 잠재우고 법을 근거 지우는 역할을 하는 ‘설명들’은 모두들 한결같이 ‘이야기’ 구조를 가진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개체발생기라 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원시 신화는 신적인 영웅(주인공)과 관련이 있다. 위대한 종교들도 영감에 가득 찬 어떤 예언자의 삶이 남긴 이야기(역사)에 근거하고 있다. 반면 불교는 가장 고도로 분화된 종교로서, 그 원래적인 형태에 있어서 오직 카르마(업)에만, 즉 개인의 운명을 지배하는 초월적 법칙에만 천착한다.

플라톤~헤겔~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위대한 철학 체계들은 ‘설명적이면서도 동시에 규범적인’ 개체발생기를 제공한다.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해방을 약속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개체발생기적인 구조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데올로기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역사에 대해서 제공하는 전체적이면서도 세부적인 데까지 이르는 설명 때문이다.

객관성의 공리에 기초해 있는 과학은 지난 3세기 동안 인간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고하게 차지하게 되었다. 물론 실천상에서의 자리이지 영혼상에서의 자리는 아니다. 과학이 주는 모든 힘으로 무장하고 또한 그것이 주는 모든 물질적 풍요를 향유하면서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바로 이러한 과학에 의해 이미 그 뿌리까지 괴멸된 가치 체계에 따라 살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의 도덕적(정신적), 사회적 존재의 근저에 있는 이 허위가 바로 현대인이 겪는 영혼의 질환이다. 이 영혼의 질환을 어렴풋하게나마 다소간 자각하고 있기에, 오늘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 문화에 대해 증오 내지는 두려움의 감정을 겪고 있는 것이다. 좌우지간 그것은 소외의 감정이다. 과학에 대한 염오의 감정이 드러나는 것은 흔히는 과학의 기술적 응용의 부산물들(원자폭탄, 자연파괴, 인구증가 같은 것들)에 대해서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거부감은 실은 과학의 본질적인 메시지 자체를 향해 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신성 모독, 즉 가치에 대한 파괴다. 그리고 이러한 두려움을 가진다는 것은 완전히 정당하다. 과학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그 완전한 의미에서 받아들이게 되면, 인간은 마침내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온 자신의 오랜 꿈에서 깨어나 자신의 완전한 고독을, 자기 존재의 근본적인 이상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제 어디에 의지해야 할 것인가? 윤리와 지식은 행동 안에서 또한 행동에 의해서 불가피하게 서로 연결되기 마련이다. 행동은 지식과 가치가 동시에 작용하도록, 혹은 동시에 문제가 되도록 만든다. 모든 행동은 어떤 윤리를 나타낸다. 모든 행동에는 어떤 지식이 반드시 전제되어 있으며, 또한 행동이란 지식을 낳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두 개의 원천 중 하나다. 

객관성의 공리를 참된 지식의 필요조건으로 놓은 순간부터, 하나의 근본적인 구별이 윤리의 영역과 지식의 영역 사이에 서게 되었다. 지식은 그 자체로 모든 가치 판단을 배제하는 한편, 윤리는 그 자체로 비객관적이므로 지식의 영역으로부터 영구히 추방된다.

하나의 공리로 놓이게 된 이러한 근본적인 구별이 결정적으로 과학을 창조하게 된 것이다. 어떤 담론이나 행동이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즉 진정한(참된) 것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담론이나 행동은 자신들이 실행되는 데는 저 두 가지 범주를 서로 결부시키면서도 동시에 이 두 가지 사이의 구별을 명확히 드러내고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 진정성이라는 개념이 윤리와 지식이 만나는 공동 영역이다.

참으로 객관적인 체계에서는 지식과 가치 사이의 혼동은 철저히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금지, 즉 객관적인 지식을 근거 지우는 이 ‘첫 번째 계명’은, 그 자체로서는 객관적이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 바로 이 점이 핵심이다. 지식과 가치를 그들의 뿌리에서 서로 연결하는 논리적인 결절점이다.

객관성의 공리를 참된 지식을 위한 조건으로서 삼기로 하는 것, 이것은 하나의 윤리적 선택이지 지식의 판단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객관성의 공리에 따르면, 자의적으로 선택된 이 공리가 세워지기 이전에는 ‘참된’ 지식이란 아직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식이 따라야 할 규범이 무엇인지를 세우는 이 객관성의 공리는 어떤 가치를 규정하고 있다.

지식의 윤리에 있어서는, 어떤 원초적인 가치에 대한 윤리적 선택이 지식을 근거 지우는 기반이 된다. 이 점에 의해서 지식의 윤리는 물활론적 윤리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지식의 윤리는 인간 자신이 그것을 공리로 선택하여 모든 담론과 모든 행동의 진정성의 조건으로 삼는 것이다. 즉 인간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내어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부과한 것이다.

현대 사회가 물질적으로 강력한 힘을 갖게 된 것은 지식을 가능케 한 이러한 윤리 덕분이며, 정신적으로 허약한 것은 바로 이 지식에 의해 궤멸된 가치 체계에 여전히 의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은 치명적인 것이다.

지식의 윤리는 하나의 초월적 가치를 규정한다. 참된 지식이 그것이다. 지식의 윤리는 또한 어떤 의미에서 ‘윤리에 대한 지식’이기도 하다. 즉 생물학적 존재가 가진 충동과 정념, 그리고 그의 절대적 필요조건과 한계 등에 대한 지식이다.

지식의 윤리가 보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생명계와 관념계(the animal kingdom and the kingdom of ideas )라는 두 개의 세계에 동시에 속해 있는 존재이며, 이러한 이원론에 의해 고통받는 동시에 풍요로워지는 존재이며, 이러한 고통스러운 이원론을 예술이나 시, 그리고 사랑을 통해 표현하는 존재다.

내가 보기에 지식의 윤리는 진정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는 기초가 될, 합리적이면서도 동시에 결연히 이상주의적인 유일한 태도다. 변증법적 유물론에 입각한 사적 예언주의에는 그 태생에서부터 많은 위험요소가 내재되어 있었다는 점을 알아보는 것은 쉬운 일이다. 사적 유물론은 다른 물활론들보다 아마도 훨씬 더 가치의 범주와 인식(지식)의 범주를 완전히 혼동하는 데 근거하고 있다.

참으로 과학적일 수 있는 사회주의적 휴머니즘을 위한 진리의 원천과 도덕적 영감을 찾을 수 있는 곳은 과학 자체의 원천에서가 아니고 어디겠는가? 즉 지식을 근거 지우는 윤리에서가 아니고 어디겠는가? 그것은 우리가 도덕적 책임을 가져야 할 이유를 우리가 바로 자유롭게 이러한 공리적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위에다 근거 지우는 윤리이다.

(자크 모노, 『우연과 필연』 발췌 끝.)

발췌, 요약 : 황승미 (녹색아카데미)

[그림 9] “시시포스”. 티치아노 베첼리오, 1548-1549. (출처 : wikipedia)
“이제 이 우주는 주인을 잃게 되었지만, 그의 눈에는 이런 우주가 황폐하거나 허망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는 바위의 알갱이 하나하나, 어둠이 내린 산에서 짧은 순간 명멸하는 작은 광채 하나하나, 이런 것들로 하나의 세계가 족히 형성된다.” – 알베르 카뮈, 『시시포스의 신화』 (『우연과 필연』 권두언 중에서).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