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와 근대문명 – 멈퍼드 『기술과 문명』 중에서

루이스 멈퍼드. 1934, 1963. 『기술과 문명』. 문종만 옮김. 2013. 책세상.

이 글은 루이스 멈퍼드의 『기술과 문명』 제1장(문화적 사전 준비) 중에서 근대 기계 문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부분을 중심으로 발췌한 것입니다. 녹색아카데미 온라인 책읽기 모임에서 읽고 있는 『인포메이션』(제임스 글릭, 2017)의 제4장(생각의 힘을 기어장치에)과 연결시켜 읽으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이 글은 발췌한 글이오니 더 자세한 내용은 책을 참고해주세요.

발췌 및 요약 : 황승미 (녹색아카데미)


기계, 공동시설, ‘거대 기계’ (pp.31-35)

기계란 무엇인가? 기계시대를 논했던 많은 사상가들은 기계가 최근에야 등장했고 수공업에서만 사용된 것처럼 얘기하지만 그 근거는 빈약하다. 적어도 지난 3,000년 동안 기계는 인류 기술 유산의 본질적 부분이었다.

“기계는 에너지를 전환하고, 작업을 수행하며, 육체의 기계적이고 감각적 능력을 확장하기 위해, 혹은 삶의 과정을 측정할 수 있는 질서와 규칙성에 맞게 전환하기 위해, 비유기적 단위들의 복합체 형태로 발전해왔다. 자동화는 신체 기능을 모방한 도구가 제작된 이후, 이 기능을 극대화한 최종 단계에 등장했다.”

책 p.32.

기계와 도구는 어떻게 다른가. 도구는 인간이 계속 조작해야 하지만 기계는 그렇지 않다. 둘의 본질적 차이는 작업의 독립성과 자동화 정도에 있다. 작업자의 기술과 원동력으로부터 작업이 얼마나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가하는 것이 차이의 기준이다.

도구와 자동기계의 중간 단계에 공작기계(machine-tool)가 있다. 이 공작기계에 외부 동력을 연결하면 자동기계가 된다. 도구의 쓰임새는 다양하지만 기계는 한 가지 특화된 기능에 맞춰 만들어진다. 자동기계는 매우 전문화된 장치로, 개념적으로 보면 동력을 유입하는 장치, 복잡한 부분들의 상호작용, 정해진 몇 종류의 작업을 수행한다.

이와 달리 더 정적이지만 기능 면에서 마찬가지로 중요한 또 다른 기술이 있다. 신석기 이래 가장 효과적으로 환경에 적응하면서 발명되어온 가정용품(utensil), 기구(apparatus), 공동시설(Utilities)이다. 맨 처음 바구니와 항아리가 등장했고 그 다음으로 염색용 통과 벽돌 가마가, 뒤이어 저수지와 수로, 도로와 건물이 나타났다. 근대가 되면서 드디어 동력 기계로 작동되는 철도와 전력 시설 같은 기간산업이 발달했다.

근대의 발전에서 기술 수단과 기계가 핵심 역할을 수행하게 되면서 기구와 공동 시설은 투박하고 조야한 기술로 평가절하 되면서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역사상 이 두 가지는 결코 분리된 적이 없었고, 모든 기술 복합체는 이 둘을 포함한다.

* 저자가 사용하는 기계 개념 정리

– 기계들(machines) : 인쇄기, 역직기 같은 특정한 기계 종류를 의미.

– 거대 기계(the machine) : 기술 복합체 전체를 의미. 산업 혹은 새로운 기술에서 도출된 지식, 기술, 요령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도구, 수단, 기구, 공동 시설과 기계들까지 포함하는 개념.

*번역자에 따르면 멈퍼드는 1967년 『기계의 신화』 이전에는 ‘거대 기계’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지만 ‘the machine’을 ‘기계라는 것’ 혹은’기계 자체’로 번역할 경우 매끄럽지 못하여 ‘거대 기계’로 번역하였음을 p.35의 각주 (3)에서 밝히고 있다.

수도원과 시계 (pp.35-43)

근대 문명에서 맨 처음 기계가 형성되기 시작한 곳은 어디인가? 기술뿐만 아니라 습관, 상상, 삶의 방식에 따라 기계 문명이 형성되었을 것이므로 그 기원은 여럿일 것이다. 새로운 질서의 첫 번째 징후는 보편적 세계상, 시간과 공간의 범주가 근본적으로 바뀌면서 나타났다.

자연 탐구의 양적방법이 규칙적 시간 측정에 적용된 것이 획기적인 전환의 계기였다. 새로운 기계적 시간 개념은 수도원의 일상생활에 뿌리박고 있었다.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투스(Sanctus Benedictus de Nursia)는 새벽 5시에 일어나 하루에 일곱 번 기도를 드리는 성무일과를 정했다.

[그림 1]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투스(480-543). 그리스도교의 성인 가운데 한 사람. 베네딕토가 수도자들을 위해 쓴 『베네딕도 규칙서(Regula Benedicti)』는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서방 기독교의 가장 영향력 있는 규율 중 하나가 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

7세기에 교황 사비니아누스(Sabinianus)는 수도원에서 하루 일곱 번 종을 치는 것을 의무화한 대칙서를 발표했다. 이와 같이 시간 준수 규칙이 생김에 따라 시간을 재고 규칙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해졌다…. 13세기 들어서는 기계식 시계가 도시로 퍼져나갔다. 

쿨턴(G. G. Coulton)은 베네딕트회 수도사들을 근대 자본주의의 최초 건설자로 보는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Sombart)의 관점에 동의했다. 노동의 가치를 숭상하고 토목사업을 벌였던 수도원의 규율은 전쟁에서 군대가 참호를 파는 모습과 흡사했다. 시계는 시간을 관리하는 수단이자 인간의 행동을 일치시키는 수단이었다.

[그림 2] 베르너 좀바르트(1863-1941). 독일의 경제학자, 사회학자. 후기에 나치와 관련되면서 좀바르트의 연구는 학문적으로 거의 묻혀버렸다. (출처 : 책 p.38, wikipedia)

근대 기계식 시계에 관한 명확한 기록은 13세기의 것이 가장 이르다. 1370년 하인리히 폰 위크(Heinrich Von Wyck)는 시계탑 형태로 ‘근대’ 시계를 제작했고, 비슷한 시기에 종탑이 등장했다. 해시계와 물시계는 날씨와 계절의 영향이 컸지만 기계식 시계는 낮에도 밤에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쓸 수 있었다. 시계는 수도원의 벽을 넘어 도시로 퍼져나갔고 노동자와 상인들의 도시 생활에 규칙을 부여하고 규제했다. 

이런 점에서 근대적 산업 시대를 추동한 핵심 기계는 증기 기관이 아니라 시계라고 할 수 있다. 시계는 기계의 전형적 상징이었으며 몇 세기 후 모든 산업 분야에서 완성된 형태로 쓰인 정밀한 자동기계를 예견하는 것이었다.

시계 이전에도 물레방아와 같은 동력 기계는 있었지만 시계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동력 장치였다. 시계의 정교한 톱니 바퀴 구조는 다양한 유형의 전동 장치와 전달 장치에 응용됐고 다른 기계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시계의 발전은 당연히 여러 고대 기술이 누적된 결과였다.

시계는 시간이라는 아주 특별한 생산물을 ‘생산’하는 기계다. 인간의 경험에서 시간을 분리해내 수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독립적이고 특별한 과학의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인간 공통의 경험과는 어긋났다.

기계적 시간은 수학적으로 고립된 시간들이 죽 이어져 연장된 것에 불과하다.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의 유기적 시간은 일련의 효과들이 누적된 것이다. 기계적 시간은 시계의 시침이나 영화 이미지처럼 앞으로 혹은 뒤로 갈 수 있지만 유기적 시간은 탄생, 성장, 발전, 쇠락, 죽음이라는 순환을 따라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림 3] 앙리 베르그송( 1859-1941). 프랑스 철학자. (출처 : wikipedia)

한 시간을 60분으로, 1분을 60초로 나누는 방식이 일반화된 것은 1345년경의 일이다. 16세기 초 뉘른베르크의 젊은 기술자 페터 헨라인(Peter Henlein)은 철조각을 이어 붙인 톱니바퀴로 휴대용 시계 “뉘른베르크의 달걀”을 발명했다. 16세기 말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는 소규모 가정 시계가 보급되기 시작한다. 곧 ‘시계 같은 규칙적인 삶’은 부르주아의 이상이 됐고, 시계를 가지는 것이 성공의 상징이 됐다.

[그림 4] 뉘른베르크의 달걀. 1505년 독일의 페터 헨라인이 만든 최초의 휴대용 시계. (출처 : wikipedia)

수도원에서 형성된 시간을 준수하는 질서정연한 삶은 타고난 인간 본성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서양인들이 시계에 속박돼가면서 시간 준수는 ‘제2의 본성’이 됐다. 그러나 동양 문명은 시간에 의존하지 않고도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시간을 경험의 지속이 아니라 시간, 분, 초의 집합으로 여기기 시작하면서, 시간을 계산하고 절약하는 습관이 생겼다. 추상적 시간이 새로운 생활양식을 구축하면서 인간의 유기적 기능은 통제됐다. 사람들은 시계에 맞춰 배고프지 않아도 밥을 먹었고 졸리지 않아도 잠을 잤다. 하루 일과를 세밀하게 쪼개고 조정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기계적 효율의 이득, 마력으로 측정될 수 없는 이득은 어마어마했다. 근대 산업 레짐은 석탄, 철, 증기기관 없이는 지탱될 수 있을지 몰라도 시계 없이는 한시도 유지될 수 없었다.

공간, 거리, 운동 (pp.43-51)

다고베르트 프라이(Dagobert Frey)는 중세 초기와 르네상스 시기 공간 개념의 차이점을 다룬 연구에서 세세하고 풍부한 근거를 들어, 두 문화는 개념적으로 동일한 시간과 공간 관념을 가질 수 없다는 일반론에 도달했다. 중세 시대 공간은 상징과 가치를 기준으로 구성됐다. 중세의 공간은 성경과 신화라는 상징으로 세워져 있었고, 일곱 가지 미덕, 12사도, 십계명, 삼위일체 등을 표현하는 상징 형식들로 분할됐다. 크기는 중요도를 나타냈기 때문에 사람들을 다른 크기로 그리는 것도 중세 예술가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세 공간의 또 다른 특징은 시간과 공간을 상대적으로 독립된 두 체계로 이해한 것이다. 중세 예술가들은 자신의 공간적 세계 속에 다른 시대의 사건들을 끌어들였다. 시간의 경과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그리스도의 삶을 당시 이탈리아의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인 것처럼 묘사했다.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의 <성 제노비우스의 세 가지 기적(The Three Miracles of St. Zenobius)>에서는서로 다른 세 시대가 한 무대 위에서 펼쳐진다. 이런 시간과 공간의 상징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이거나 기적이었다. 공간의 진정한 질서는 신이, 시간의 진정한 질서는 영원성이 부여했다.

[그림 5] <성 제노비우스의 세 가지 기적>. 산드로 보티첼리. 제작년도 1500~1510. (출처 : wikipedia)

서구 유럽에서 공간 개념의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14~17세기에 이르러서다. 이러한 새로운 변화의 징후 중 하나가 원근법이다. 원근법이 발명되면서 소실점을 중심으로 상이 체계적으로 배치되었으며, 대상들의 상징적 관계가 시작 관계로 다시 양적 관계로 전환되었다. 그 결과 외부 자연과 사실에 관한 새로운 관심이 싹텄다. 이러한 관심은 회화에 깊이감을 부여했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거리의 관념을 새겼다. 공간 이동은 새로운 가치의 원천이자 목적이 되었고, 회화에서 측정된 거리는 시계로 측정된 시간을 한층 강화했다.

이제 모든 사건은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이상적 연결망의 범위 내에서 발생했다. 이 체계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사건은 직선 운동이었다. 직선 운동은 잘 짜인 시간과 공간 좌표 체계에서 정확한 지점들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이제 시간과 장소가 사건 이해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대상의 시간적, 공간적 변화는 특정한 장소와 순간에 발생한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이제 미지의 대상은 알려져 있는 것만큼이나 이미 결정돼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지구는 둥글다. 그러므로 인도는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했다. 그리고 인도와의 거리와 그곳에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계산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공간 질서의 관념은 탐험을 촉진했고 미지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했다. 화가들이 원근법으로 증명하고자 했던 것을 지도 제작자들은 새로운 지도 제작으로 입증했다. 1314년 제작된 헤리퍼드 세계지도(Hereford Map)는 실제 항해에 무용지물이었지만, 1436년에 제작된 안드레아 방코(Andrea Bianco)의 지도는 실제 정확도 면에서 한 단계 진보했다. 위도와 경도라는 보이지 않는 선을 설정함으로써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같은 후대인들의 탐험을 가능케 했다.

[그림 6] 헤리퍼드 세계지도. 1314. (출처 : wikipedia)
[그림 7] 방코 지도. 1436. (출처 : wikipedia)
[그림 8] 콜럼버스 지도. 1490. 리스본의 지도제작자 바르톨로메오와 콜럼버스가 제작. (wikipedia)

화가와 지도 제작자가 닦아놓은 시간, 공간의 추상적 체계를 기반으로 공간, 운동, 이동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이 커졌다. 이와 함께 토목, 선박 건조, 나침반, 천체 관측기, 배의 키 등의 개선되고 발명되는 변화들도 잇따라 신세계로의 유혹은 더욱 커져갔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사유 구조의 출현(Schemata)이었다. 중세 초기에 분리돼 있엇던 시간과 공간의 범주는 하나로 통합되었고, 다시 운동과 통합되면서 시간과 공간은 수축되거나 확장될 수 있게 됐다.

군사 기술에서 석궁과 투석기의 성능이 개량됐고 사정거리도 늘어났다. 곧이어 강력한 대포와 장총도 발명되었다. 1420년 폰타나(Giovanni Fontana)는 자전거를 설계했고 1589년 안트베르펜의 질 드 봄(Gilles de Bom)은 사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화차를 제작했다. 이런 지속적인 발명은 19세기에 폭발적으로 성장한 기계문명의 전조였다.

[그림 9] 폰타나의 책 『Bellicorum instrumentorum liber(The book of war instruments)』(1420~1430)에 포함된 탈 것의 모습. (출처 : wikipedia)

서구 문명의 많은 요소들이 그렇듯이 이러한 발명의 원초적 충동은 아랍에서 전해졌다. 880년 아불 카심(Abul-Qasim)은 비행을 시도했고, 1065년 맘즈버리의 올리버(Oliver)는 높은 곳에서 비행을 시도하다가 추락해 사망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태도는 작업장, 회계 사무소, 군대, 도시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근대 문화는 공간에서 시작되었고 운동에 몰두했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이를 수의 낭만주의(The romanticism of numbers)라고 했다. 시간 준수, 상거래, 전쟁에서 인간은 수를 적극 활용했고, 이는 더욱 강화되었으며, 숫자만이 중요해졌다.

발명의 의무 (pp.89-94)

과학적 방법의 발전에서 유효성이 인정된 원리들은 발명의 토대가 되었다. 과학과 기술은 서로 다른 뿌리에서 유래했지만 나눠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면서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발전했다. 증기기관처럼 경험에 의거한 발명은 니콜라 카르노(Nicolas Léonard Sadi Carnot)의 열역학 연구에 실마리를 제공한 반면,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의 자기장 연구처럼 추상적 물리 연구는 발전기의 발명에 직접 영향을 주었다.

[그림 10] 니콜라 카르노(1796-1832). 프랑스의 물리학자. 열 기관의 최대효율에 대한 이론을 처음으로 만들었으며, 후에 열역할 제2법칙이 만들어지는 데 기여했다. (출처 : wikipedia)
[그림 11] 마이클 패러데이(1791-1867). 영국의 과학자. 전자기장의 관계를 밝혀냈고 전자기 유도, 반자성 현상, 전기 분해 등의 원리를 발견했으며, 그가 발견한 전자기 회전 장치는 후에 전기 모터로 이어졌다.. (출처 : wikipedia)

기계의 초기 발전 단계에서 생명체와 유기적인 것은 빠르게 배제됐다. 기계만이 인간이 분석, 규제, 한정, 통제할 수 있는 자연의 모조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극의 목표는 자연 정복이 아니라 자연을 새롭게 종합하는 것이었다. 증기기관은 말의 힘을, 철과 콘크리트는 나무를, 아날린 염료는 천연 염료를 대체해갔다. 종종 이런 대체 과정에서 창출된 지식은 불충분했고 재앙이 뒤따랐다. 지난 1,000년의 역사는 근본적 위험을 내표하고 있는 뚜렷한 기계적, 과학적 승리의 사례들로 넘쳐났다. 이제 발명은 하나의 의무가 되었다.

이제 인간의 에너지는 협소하고 명확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바퀴를 돌리는 노동을 위해 모든 사회적 능력이 집중되었다. 삶이란 노동하는 것이다. 노동 외에 진정 기계가 알 수 있는 삶은 무엇인가? 인간의 신념이 마침내 발견한 새로운 목표는, 산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것이 아니라 증기기관과 기계를 돌리는 것이었다.

동력이 운동으로 전환되고 운동이 생산으로 전화됐으며 생산은 다시 이윤 확대로 이어지면서 권력이 증대를 낳았다. 인간보다 기계적 정신과 습관 및 행동 방식을 우선시한 것은 최악의 목표 설정이었다. 17세기부터 기계는 종교를 대신했고 이 신흥 종교의 유용성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18세기 이후 영리기업가, 산업가, 엔지니어, 심지어 배우지 못한 기계공들이 열정적으로 전도하지 않았다면, 기계로의 개종과 기계적 향상은 한참 지체됐을 것이다. 발명과 발견의 모음집에서 다름슈테터(Darmstaedter)와 뒤 부아 레몽(Du Bois-Reymond)이 추정한 발명가들의 숫자는 1700~1750년 170명, 1750~1800년 344명, 1800~1850년 861명, 1850~1900년 1,150명이었다. 수치에서 보듯이 1750~1850년 사이에 발명과 발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많은 상품들이 발명을 통해 생산되었지만 수많은 발명이 상품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졌다. 유용성이 가장 중요한 발명의 기준이었다면 발명은 의식주 분야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해야 했지만, 실제로는 전쟁과 광산에 비해 농업과 공동 주거지 건설 부문은 기계적 기술 혜택을 가장 늦게 받았다.

처음부터 기계 자체는 기계가 제시한 이데올로기를 의심하는 삶의 영역들을 먹어치우면서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물질에 대한 관심, 도구를 능수능란하게 다룬다는 자부심, 형태를 솜씨 있게 만드는 기교는 기술 발전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러디어드 키플링(Rudyard Kipling)은 신의 시 <공병들(Sappers)>에서 기계를 발명가와 노동자의 주의와 관심을 산 몸에 받는 생명체처럼 매력적으로 표현했다. 크랭크, 피스톤, 나사, 밸브, 물결 모양의 움직임, 맥박, 리듬, 속삭임, 매끄러운 표면 등은 신체 기관과 기능을 닮은 데가 많아서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도록 유도했다.

이제 기계 자체는 더 이상 하나의 수단이 아니었고, 기계의 작동은 기계성과 인과성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인간이자 목적이었다.

[그림 12] 러디어드 키플링(1865-1936). 영국의 소설가, 시인. (wikipedia)

3 댓글

  1. 자연사랑

    루이스 멈퍼드의 <기계와 문명>을 요약해 주셔서 무척 고맙습니다. 제임스 글릭의 <인포메이션>과 함께 읽기에 매우 유익하리라 생각합니다.

    • neomay33 글쓴이

      네, 멈퍼드의 책은 믿고 읽으면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번역은 책마다 좀 편차가 있겠지만요. ^^;
      그런데 『기술과 문명』은 절판됐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 책밤 시즌2 책 후보에 올리질 못했습니다. e북도 없어서요.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