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회익의 자연철학 이야기 11. 온전한 앎 (11-1, 11-2)

이 자료는 녹색아카데미 유튜브 ‘자연철학이야기’에서 나눈 대담 11-111-2를 녹취, 정리한 것입니다. 대담은 책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의 이해를 돕기 위해 2020년에 제작되었습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이야기” 11-1과 11-2편에서는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의 ’제10장. 온전한 앎’ 중 ‘오늘날에 보는 태극도설의 의미’와 온전한 앎의 한 모형에 대해 다룹니다.

대담 ‘자연철학이야기’ 녹취록은 이번 편으로 연재를 마무리 합니다. 그동안 30개의 대담 영상을 29회에 걸쳐 전해드렸습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를 읽어나가시는 데, 더 나아가 자연철학을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이후에는 대담 연재를 먼저 하느라 잠시 미뤄뒀던 ‘카툰 자연철학’으로 자연철학 이야기를 이어갈 예정입니다. 카툰 연재는 9월 중에 시작할 계획입니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이야기 11.온전한 앎

11-1. 태극도설의 현대적 의미

  1. 현대의 우리에게 태극도설이 가지는 의미
  2. 근원적 물음 : 나는 누구?
  3. 가능한 대안 : 온전한 앎
  4. 심학 & 태극도설
  5. 태극도설 요지와 해석

11-2. 온전한 앎의 한 모형 : 뫼비우스 띠 모형

  1. 온전한 앎의 한 모형
  2. 왜 뫼비우스의 띠인가?
  3. 제10도 온전한 앎
  4. 온전한 삶이란?
  5. 뫼비우스 띠의 의미
  6. 추가 질문 & 마무리

11-1. 태극도설의 현대적 의미

1. 현대의 우리에게 태극도설이 가지는 의미

최우석   10장은 9장처럼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는데요. 태극도설을 이렇게 해석하시다니, 대단히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뫼비우스 띠로 조각상을 하나 만들어야 되지 않나 이런 생각도 들고 여러 가지 재미있는 생각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태극도를 보니까 정말 그림으로 뭔가를 설명하려고 하는 의도가 느껴졌고, 문장 중간에 그림 하나하나를 놓고 말을 풀어가는 것이 상당히 현대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장회익   태극도설 이외에도 그런 시도가 그 시기 또는 그때보다 조금 전 시기에 있었어요. 그게 아마 한 천 년 전에 나온 걸 텐데, 당시에 동양에서는 간단한 도형 구조를 가지고 어떤 깊은 의미가 거기에 담겼다, 진리를 표현할 수 있다하는 생각이 꽤 퍼져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태극도설도 아마 그 전에 나왔던 몇 가지 도식들을 다시 철학적으로 음미해서 도식을 통해 가장 간결하게 우리 우주와 삶에 대해서 정리해보자하는 생각을 구현한 거예요.

다행히 주자를 비롯한 신유학자들, 성리학이라고도 부르는데, 그런 분들이 태극도설을 중요하게 봐서 이것을 바탕사상으로 채용해왔죠. 그래서 천 년 이후, 공자 시대 말고 근래 유학에서는 어떤 합리적인 체계 속에서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어떤 삶의 지침을 찾겠다는 시도를 한 거예요.

그 전까지는 공자님 말씀이라고 하면 끝인데, 태극도설은 어떤 이론적인 틀을 중시하는 가운데 그 틀의 기본 바탕으로 채용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될 거예요. 그래서 퇴계 이황 선생은 성학십도의 첫 자리에 태극도를 놓았죠. 태극도설을 지금도 우리가 한번 음미해볼 필요가 있어요.

우리가 배울 점은 (학문하는) 자세예요. 태극도설 자체가 현대인들에게 직접적인 어떤 교훈을 준다기보다는 그런(통합하고 간결하게 정리하려고 하는) 정신으로 앎을 정리하고 그것을 통해서 뭔가를 얻으려고 했던 자세를 본받을 수 있어요. 그리고 그 당시로서는 태극도설 이상으로 나아가기도 어렵지 않았나 하는 면도 있어요. 그래서 태극도설에 대해서 현대의 시점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번역이라고 할까, 현대어로 한번 정리해본 것이 마지막 장 10장의 중요한 부분이죠.

최우석   이렇게 비유해볼 수 있을까요? 지금 선생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당대의 최신 우주이론, 최신 물리학이론을 가장 간결하고 가장 아름답게 전달해서, 전문가들이 아니라 당대의 교양인들이라면 모두 여기에서부터 우리가 세계에 대한 이해를 시작해보자하고 널리 전파하고자 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장회익   그렇게 볼 수 있지.

최우석   지금으로 보면 담대한 시도 같습니다.

장회익   그렇지. 적어도 그때의 학문은 이것이 일단은 완성된 형태다, 우리 삶의 기본 지침이다 하는 두 가지를 항상 염두에 두고 학문을 했죠.

2. 근원적 물음 : 나는 누구?

[그림 1] 근원적 물음 : “난 누구야?”

최우석   [그림1]에서 ‘근원적 물음’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성학십도라든가 고전학문의 기본 입장, 즉 세계에 대한 이해와 나 자신의 삶의 길을 일치시켜서 이해하려고 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장회익   그렇지. 그런데 꼭 그때 그 사람들이 문제로 삼았다는 것뿐만이 아니고, 현대에도 마찬가지죠.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세계와 나에 대한 물음이 앎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맞는 답이 나온다면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야 된다는 거예요. 어느 시대나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물어야 되는 근원적 물음이죠.

[그림 2] 인간의 자기이해는 왜 어려운가?

장회익   사실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게 ‘나’죠. 내가 나 자신만큼 잘 아는 게 없지만 가장 모르는 게 또 ‘나’야. 내가 도대체 뭐냐? 참 큰 수수께끼죠. 그러니까 자기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고 뭐든지 될 수 있겠지만, 그래도 가장 합당한 것을 찾으려면 우리가 이 부분(그림 2에서 두 번째 단락)을 주목해야 돼요.

“새 학문을 통해 새 사실이 밝혀지더라도 이것이 자기 이해에 연결되기 보다는 기존의 이해 기준에 어긋나기 때문에 배격하거나 도외시한다”는 거예요. 일단은 ‘나’가 기본이기 때문에 판단의 근거가 바로 ‘나’야. 그러니까 나와 맞지 않으면 벗어나는 거야. ‘나’ 때문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도 굉장히 어려워져요. 그래서 ‘나’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가 않은 거예요. 인간은 자기를 기준으로 사물을 이해하지만 그 기준(자기)을 다시 이해하는 것은 한층 고차적인 작업이죠.

3. 가능한 대안 : 온전한 앎

[그림 3] 가능한 대안

장회익   그래서 가능한 대안으로 ‘온전한 앎’을 추구해보자하는 말을 내가 했어요. ‘온전한 앎’은 간단히 말해서 ‘온전한 구조적 통합이 이루어진 앎’이다 이렇게 정의할 수 있어요. 논리적 단절과 부분적 편향이 배제된 앎이다, 반듯한 지성의 거울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내가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담겨 있는 믿음직한 가장 온전한 앎이 있다면 ‘그 안에 있는 나’를 봄으로써 비로소 나를 파악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나를 볼 때, 만약 거울이 없다면 일생 동안 나는 내 얼굴을 못 보죠. 다른 사람들은 다 나를 보지만 나만은 내 얼굴을 못 보고 지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나의 숙명이거든.

그러나 거울이 있으면 좀 달라지지. 그래서 지성의 거울을 통해서 내가 반영된 세계가 뭐냐, 그것을 통해서 이런 것이 ‘나’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온전한 앎이 필요하다는 거지. 거울이 반듯해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왜곡이 없는, 단절과 편향이 없는 앎을 찾을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최우석   그 말씀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앎들 사이에 상충하는 것이 없게 매끄럽게 되어야 된다는 의미인가요?

장회익   그것이 하나의 중요한 기준이지. 상충하는 게 있으면 벌써 둘 중 하나는 틀린 거예요.

최우석   부분적 편향은 무엇에 대한 말씀이죠?

최우석   어느 한 부분은 과장해서 크게 보고, 나머지도 똑같이 중요한데 그런 것들은 작게 조금만 반영하는 것이 부분적 편향이에요.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다 비슷하게 중요성을 가지는데 자기 주변에 가까이 있는 것이 커 보이기도 하고 더 중요해보이기도 하고, 이런 여러 가지가 많죠.

이런 굴곡, 거울로 치면 울룩불룩한 그런 것이 없는 앎, 그런 것이 온전한 앎이에요. 우리가 부분적으로만 보면 뭐가 온전한 앎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 그 하나하나 자체만 보면 틀리지 않은데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작은 걸 확대하고 큰 것을 축소한 것이 돼서 잘못된 앎이 될 수 있어요. 온전한 앎의 기준에 어긋나는 거지.

최우석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에서 추구하듯이, 자연에 대한 이해와 생명과 삶과 인간 자신에 대한 이해 이런 것들이 두루 갖춰지되 상충하지 않게 정합적으로 연결되는 그런 것을…

장회익   그런 것에 가장 가까운 앎이 ‘온전한 앎’이지.

최우석   그렇게 정합적인 연결을 통해서 나 자신을 이해해야 그 기준이 신뢰할만하다는 말씀인가요?

장회익   그렇죠. 

황승미   여기에 연결지어서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요. 선생님께서 8장에서 앎의 주체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스피노자, 데카르트와는 달리 상대, ‘너’를 같이 넣어서 설명하고 계십니다. 8장에 보면 나의 주체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 너를 같이 끌어들여서, 내가 이렇게 의식하는 주체가 있는 것을 보니 너도 있을 것이라고 추정을 합니다.

또 한 가지 재밌었던 것은, 나라는 주체를 너에게 넣을 수는 없지만 너라는 주체는 내가 인식하면서 나한테 가져와서 우리라는 새로운 주체를 만들고 더 큰 인식의 주체를 만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더 큰 주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소통이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우리에서 다시 온생명의 온우리라는 더 큰 인식 주체로 나아가는 데는 어떻게 소통을 해야 하는지, 그것은 과학 같은 것으로 소통을 해서 집합적 지성처럼 큰 주체가 만들어지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장회익   집합적 지성을 통해서 온생명의 정체를 파악하는 거지. 그것이 내 생명의 모습이다 하는 것을 파악하는 거예요. 내 생명이 바로 그렇게 연결되어 있고, 온생명을 떠나서는 내가 있을 수 없고 내 생명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온생명의 일부이고, 온생명이라는 큰 나로 갈 수 있는 길이 집합적 지성을 통한 온생명의 파악이라고 할 수 있어요.

황승미   인식 주체가 커가는 데 있어서 소통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소통을 통해서 편향이 배제된 앎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요?

장회익   소통은 앎의 과정에서 필수적인 거죠. 소통 없이 앎이 이루어지기 어려우니까. 그러니까 아까 ‘앎’을 얘기했지만 정보가 계속 왔다 갔다 해야 되는데, 집합적 지성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으로 왔다 갔다 해야 되거든. 온생명에 대한 이해를 하기 위해서도 그런 집합적 지성을 통해서 파악이 되니까 당연히 그 안에 소통이 들어가는 거죠.

4. 심학 & 태극도설

[그림 4] 성학과 심학의 차이

최우석   선생님께서는 ‘학십도’가 아니라 ‘학십도’라고 하셨는데요. 여기서 ‘심’은 찾는다는 뜻인가요?

장회익   그렇지. 처음에도 얘기했지만 성학과 심학의 차이를 다시 적어봤어요. ‘심’은 찾아나가자는 뜻이고, ‘성학’에서 ‘성’은 이미 성인들, 시대의 위대한 분이 알려준 내용이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심학’을 하기는 했는데, 근대학문의 약점은 핵심적인 내용을 간결한 형태로 정리해내는 데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일단은 태극도설이 간결한 정리의 대표적인 것이니 그것을 먼저 한번 보자, 우리는 그러면 태극도설에 대응하는 것으로 어떻게 간단히 정리해볼 수 있을지 생각해보자하는 입장이에요. 염계 주돈이, 이 분이 태극도를 만들었어요. 그림5에서 ‘제1도 태극도’라고 했는데, 원래 그냥 ‘태극도’인데 성학십도에서 제1도라서 그렇게 붙였어요.

[그림 5] 성학십도와 태극도설
[그림 6] 태극도

최우석   그러면 태극도는 이 하나의 그림으로 끝인가요?

장회익   태극도는 이것으로 끝이고, 여기에 대한 해설이 ‘태극도설’이에요. 그 후에도 태극도에 대한 수많은 해설이 나왔어요. [그림 7]이 태극도설의 전부야.

[그림 7] 태극도설

5. 태극도설 요지와 해석

장회익   태극도설의 글 하나 속에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을 담았다는 얘기예요.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요지만 간단히 줄인 것이 [그림 8]이예요. 장회익 버전의 태극도설 요지인 거지.(웃음) 한번 읽어봅시다.

[그림 8] 태극도설 요지

장회익   그리고 [그림 9]는 각 구절이 무슨 얘기인지 해설한 거예요. ‘무극이면서 태극이다’는 유명한 말이죠. 이 구절에 대한 수없이 많은 해석이 있어요. 이 표현(무극이면서 태극이다)을 빅뱅의 해설로 쓰면 딱 맞아. 이 분이 빅뱅을 알아서 쓴 건 아니지만, 만약에 빅뱅을 알았다면 이렇게 썼을지도 몰라.(웃음) 어떤 사람의 놀라운 직관이 빅뱅 같은 상황을 어떻게 그려냈다고 볼 수도 있고, 그러나 너무 심각하게 연결 지을 필요는 없지만 이렇게 생각해보고 지나가면 좋겠어요.

[그림 9] 태극도설 해석 (1)

최우석   태극이라는 말은 워낙 친숙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요. 여기서 ‘무’는 없다는 뜻이고 ‘태’는 엄청나게 크다는 뜻인데, 여기서 ‘극’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장회익   극한, 최고 이런 뜻이지. ‘인극’이라는 말도 있어요. 사람에게 나타날 수 있는 극한의 상황이라는 말도 있고, ‘태극’은 우주의 모든 것을 하나의 뭉치로 연결하는 거예요. 그런데 ‘무극’은 끝없다, 무궁하다는 의미예요.

최우석   무극은 분화가 없고 이쪽 극이나 저쪽 극이 없이 섞여 있다고 한다면, 태극은 뭔가 나뉘어져서 정리정돈된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데요.

장회익   그런데 태극은 그것이 통합되어 있는 거지. 그래서 태극이 나뉘어져서 음양이 나온다, 이렇게 가요. 태극은 음양으로 나뉘어지기 전에, 모든 것의 현황이 나타나기 전에 모든 질서가 하나에 그러나 그 원리를 담고 있는 그런 것을 얘기해요. 이제 다음 해석을 읽어봅시다.

[그림 10] 태극도설 해석 (2)

장회익   [그림 10]은 우리가 지금까지 얘기한 것과 태극도설을 굳이 연결해본다면 이렇게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 거예요. 그리고 그 다음 음양 개념의 해석을 봅시다.

[그림 11] 음양 개념의 해석

장회익   [그림 11]은 만약에 이분들이 우리가 공부한 내용을 알고 썼다면 이런 의미를 지니지 않았을까 하는 내용이에요. 물론 당연히 이런 생각을 하고 썼다는 건 말이 안 되지만, 현재 우리가 볼 때에 그런 내용을 어떤 직관을 통해서 파악했다고 말해서 나쁠 게 없겠다는 거죠.

최우석   음양에 대한 다른 해석들은, 뭔가 대비되고 비슷하지만 다른 것 혹은 플러스 마이너스 이런 식으로 해석했다고 한다면, 선생님의 해석은 굉장히 독특합니다.

장회익   내 책의 관점을 통해서 가장 가까이 연결 시켜본 시도라고 보면 되겠어요. 그 다음 오행 개념의 해석을 봅시다.

[그림 12] 오행 개념의 해석

장회익   오행의 다섯 가지, 토목화수금이 있어요. 달력에 있어서 외우기 쉽죠. 그리고 수생목, 목생화, 화생토, 토생금, 금생수는 각각이 서로 연결된다는 뜻이에요. [그림 12]처럼 오행을 해석하면, 우리 현대인으로서도 음양오행의 말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해서 적어본 거예요.

[그림 13] 태극도설 해석 (3)

장회익   우리는 지금 몸과 마음에 대해서 굉장히 진지하게 생각을 했는데, 여기 태극도설에서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처음부터 몸과 마음을 구분 안 하고 있는 거야. [그림 14]는 내가 이렇게 해석해본 거예요.

[그림 14] 태극도설 해석 (4)
[그림 15] 태극도설 해석 (5)

장회익   [그림 15]에서 ‘성인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우리가 온생명 개념을 통해서 온생명을 ‘나’로 여기는 존재가 생각하는 내용이라고 가정하고 내가 적어본 거예요. 우리가 단순히 안다는 것, 생명 개념과 온생명 개념을 설혹 합리적으로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바로 ‘나’다 하는 심정적 장벽을 넘기는 쉽지 않아요. 왜냐하면 ‘나’라고 하는 심정적 장벽은 이미 내 몸 둘레에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온생명을 ‘나’로 여기기가, 즉 성인의 마음을 가지기가 쉽지 않다는 것과 비슷한 얘기죠.

[그림 16] 태극도설 해석 (6)

장회익   [그림 16]에서 “시초를 찾아보고 … 이치를 알게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누가 하는 것인지 주어가 생략되어 있는데, 아마 독자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거예요.

황승미   결국은 삶과 죽음이네요.

장회익   그렇지.

[그림 17] 태극도설과 현대학문과의 대비

최우석   이렇게 보니 태극도설과 현대학문이 크게 대비가 되네요. 그렇다면 이제 과제는 현대학문의 장점을 살리고 태극도설의 이런 시도를 살리는 데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장회익   그런 얘기죠. 그래서 ‘온전한 앎’의 모형을 생각해 본 거예요.

(대담 11-1 끝)

11-2. 온전한 앎의 한 모형 : 뫼비우스 띠 모형

1. 온전한 앎의 한 모형

[그림 1] “온전한 앎”의 한 모형 : 지구의와 뫼비우스의 띠

장회익   [그림 1]의 ‘지구의’ 사진은 우리가 2017년에 취리히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찍었던 사진이에요. 상당히 초기에 만들어진 지구의라서 박물관에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중요한 점은 이때의 지리적인 앎이라는 것이 상당히 많이 새롭게 알려지기는 했지만, 각 위치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느냐하는 것은 잘 모르고 있을 때라는 거지.

지구가 둥글다는 것 자체도 일부 학자들은 얘기했지만 평민들은 그게 말이 되느냐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예요. 당시 알고 있는 세계를 지구의에 배치해 본 거죠. 지도 자체는 그렇게 정확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구에 배치를 했기 때문에 크게 잘못 된 것은 없는 거예요.

조각 지도를 아무리 모아도 평면 지도로 만들면 동쪽 끝과 서쪽 끝이 가장 멀게 되죠. 실제로는 붙어있는 지역이 가장 멀어. 평면 지도에서는 이런 모순이 생기는데, 그런 모순이 없으려면 ‘지구의’ 위에 지도를 그려야 된다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는 상식이죠.

온전한 앎도 비슷해요. 앎이 여러 가지 많은데 이걸 백과사전에 다 집어넣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봐야 그 전체 연결망을 알 방법이 없어요. 지구라는 것은 그 형태가 이미 구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에 구에 배치하면 분명해지지만, 앎의 기하학적 구조는 알려진 것은 없거든. 그러면 우리 앎에 있어서 지구 모형에 해당하는 구조가 무엇이냐? 그것을 우리가 알아냈다고 했을 때 그 구조에 배치를 하면 우선은 부분 부분을 별로 정확하지 않더라도 제 자리에만 갖다 맞추면 크게 잘못될 것은 없겠지.

그래서 ‘제대로 된 구조 위에 배치한 앎’이 온전한 앎이라고 나는 봤어요. 완벽한 앎은 아니고. 완벽한 앎은 우리가 기할 수 없지만, 그러나 크게 잘못되지 않은, 적어도 우리 지구상의 위치를 지구의 위에 표시할 정도로 거기에 해당하는 앎의 구조를 알고 배치를 한다면 그것은 굉장히 소중한 것이 되죠. 그 구조를 개략적으로만 알아도 앞에서 본 태극도처럼 모든 앎을 일단은 연결시킬 수가 있죠.

2. 왜 뫼비우스의 띠인가?

[그림 2] 왜 뫼비우스의 띠인가?

장회익   그래서 내가 ‘뫼비우스 띠’ 모형을 제안했어요. 왜 뫼비우스 띠 모형을 해야 하느냐? 여기서 조건이 뭐냐? 앎의 정합성(서로가 어긋나지 않음)을 반영하는 기하학적인 구조가 갖추어야 할 조건을 살펴봤어요.(그림 2)

첫째는 논리적 부정합성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다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지, 어디에서 단절되면 안 돼. 원형이거나 구형은 단절이 없어요. 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3차원에서는 구형이고 2차원에서는 원형이에요. 동그란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되어 있으니까 각 부분이 서로 단절이 없죠. 논리적 부정합성이 없는 원형, 구형 이런 것들이 하나의 모형 후보가 될 수 있어요.

두 번째 조건은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이면서 두 측면이라는 거예요. 분리할 수 없는데 나타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두 개의 면이 나온다는 거예요. 자연 현상에서는 물질적인 면이 표출되다가 인간 이후에 사회 활동, 삶의 현장으로 오면 의식의 측면 즉 마음의 측면이 표출되는 거야.

전에도 얘기한 것처럼 마음이 운전석에 앉아 있는 것이 우리 삶의 세계지. 그 전까지는 물질 현상 속에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그건 모르겠지만, 어쨌든 물질 현상 밖에 안 보였어요. 우리가 물질로 되어 있지만 물질은 오히려 마음의 지배를 받죠. 물론 마음도 물질의 지배를 안 받는 건 아니지만 어차피 하나니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마음이 세계를 움직이는 거죠. 그러니까 물질세계에 가려져 있다가 마음이 표면으로 떠오른 것이 인간의 삶이고 문명이에요.

그래서 한번 외부가 내부로 들어가고 내부가 외부로 나오는 이러한 것이 가능한 구조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뫼비우스의 띠라는 거예요. 때로는 몸이 부각되고 때로는 마음이 부각되는 것이 겹쳐서 연결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논리적 정합성, 몸과 마음의 일원이측면성(一源二側面性)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것이 뫼비우스의 띠다, 그래서 이 모형을 택한 거예요.

3. 제10도 온전한 앎

[그림 3] 제10도 온전한 앎

장회익   지금까지 우리가 고려했던 것을 뫼비우스 띠로 연결해봅시다.(그림 3) 제일 먼저 ‘자연의 기본 원리’에서 출발했죠. 자연의 기본 원리가 뭐냐? 우리가 앎을 추구하는 것이 사실은 자연의 운행 원리를 찾는 것인데, 그 원리를 통해서 우리가 우주를 이해했고, 그 다음에 생명을 이해했어요.

그런데 인간도 생명의 한 부분이고 인간(객체)도 몸을 가지고 있죠. 몸까지는 자연의 기본 원리와 우주, 생명과 다 연결을 해서 이해를 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주체가 나타난 거지. 인간(주체)과 인간(객체)이 바로 하나이면서 둘이에요. 인간(주체)부터는 마음이 중심이 되는 활동이 되고, 인간(객체)까지는 몸이 중심이 되는 거죠. 그래서 이 마음이 문명을 만들고 앎(인식)을 만들고 그 앎이 자연에 대한 사고를 해서 자연의 기본 원리를 발견한 거야.

[그림 3]에서 오른쪽 푸른 색 부분을 뫼비우스 띠의 표면이라고 한다면 왼쪽 붉은 색 부분은 그 이면이에요. 이면이 다시 겉으로 나와서 표면으로 활동을 해나가는 구조가 되는 거죠. 이것에 우리가 알만한 것을 다 의미 있게 배치를 하면 뫼비우스 띠 형태의 앎을 이룬다고 할 수 있겠어요. 

여기 뫼비우스 띠에서 상대적인 위상이 크게 틀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치 지구의(地球儀) 위에 대륙을 앉히듯이 우리 앎의 중요한 부분을 뫼비우스 띠 안에 넣을 수 있고, 그렇게 집어넣을 때에 ‘나’라고 하는 것은 인간(주체)에 속는 거죠. 내가 어디에 있느냐? 물론 인간(객체)와 연결되어 있겠지만 인간(주체)에서 ‘나’를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이러한 구도가 아직 완결됐다고 볼 수는 없지만 하나의 제안이에요. 이런 것이 의미 있게 연결이 된다면 온전한 앎에 가까운 것이 되지 않겠나 정리해본 거죠. 지금까지 우리가 자연의 기본 원리에서부터 우주, 생명을 거쳐 인간과 인식, 자연에 대한 사고에 이르기까지 쭉 살펴왔어요. 물론 문명에 대해서는 자세히 논하지는 않았지만, 그림 3에 나오는 과정을 거의 다 거쳐 봤어요. 우리가 지금 자연철학을 하고 있으니까 문명까지 논하는 것은 범위를 좀 넘어가는 일이죠. 그러나 문명을 담을 수 있는 자리는 그림 3에 남겨 두었어요.

최우석   순서상 ‘인간-인식-문명’ 이렇게 안 쓰시고 ‘인간-문명-인식’으로 쓰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장회익   인식이 자연에 대한 사고와 연결되기 때문에 이렇게 했어요. 물론 인식은 인간(주체)에서부터 함께 가는 거예요. 고대문명에서도 인식, 앎에 중요성을 부과했지만 근래에 와서 ‘자연에 대한 사고’와 ‘자연의 기본 원리’ 쪽으로 더 가기 때문에 문명보다 뒤에 인식을 두었어요. 순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황승미   인식이 없이도 문명이 만들어질 수 있는 건가요?

장회익   인식이 비교적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있을 때도 문명은 이루어져 왔죠. 그런데 인식을 심화시킨 것은 오히려 근대라고 볼 수 있어요.

최우석   여기서 말하는 인식이 9장에서 얘기하는 그 ‘앎’인가요? 9장에서 인식 주체와 의식 주체로 나누셨는데 의식이 아니라 인식이라고 쓰신 것은 … 

장회익   그렇지. 앎을 중심으로 하는 거예요. 의식은 이미 인간(주체)에서부터 나오는 거니까. 의식을 통해서 우리가 문명을 이루었지만 문명을 통해서 앎 그 자체 그리고 인식을 심화시킨 거죠.

최우석   기본 구도에 따라서 간결하게 파악을 하는 것과, 여기에 또 살을 붙여 나가는 노력이 같이 있어야겠네요. ‘온전한 앎’의 모형(그림 3)이 21세기에 선생님께서 태극도를 대체해서 제시하는 앎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장회익   그렇지. 이 그림이 태극도에 해당하는 그림이라고 볼 수 있겠어요. 여기에 대한 설명이라고 하면 태극도설에 해당하는 내용이 될 텐데, 뒤에 조금 더 쓴 게 있으니까 한번 봅시다.

[그림 4] 곽암의 마지막 시

장회익   그리고 곽암의 마지막 시를 끝으로 이 책을 마무리 했어요. [그림 4]에서 붉은 글씨는 내가 번역한 것이고, 아래 검은색 글씨는 이 시를 내가 새로 해설해본 거예요. 해설은 책에는 싣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우리가 지나온 과정은 구슬을 모으는 과정이었어요. 구슬을 모아 와서 뫼비우스 띠 고리 위에 엮어보니 그 전체가 어떤 지혜의 꽃으로 필 수 있는 게 아닌가, 이렇게 해설을 해본 거예요.

4. 온전한 삶이란?

장회익   책은 그렇게 끝났고, 몇 가지 더 얘기할 게 있어요.

[그림 5] 온전한 삶이란?

장회익   온전한 앎을 우리가 얘기했는데, 그렇다면 온전한 삶이라는 것도 얘기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온전한 삶인가? 온전한 앎을 추구하는 삶이면서 동시에 온전한 앎에 부합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온전한 앎은 완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계속 추구를 해야 하죠. 하지만 추구된 만큼이라도 거기에 부합하는 삶을 산다면 적어도 온전한 삶을 지향하는 삶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거예요. “안다고 하는 것은 행하는 것의 시작이고, 행한다는 것은 앎을 이룬 것이다”, 왕양명 선생이 <전습록>에 쓴 글이 있어요.(그림 5). 앎과 삶에 대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림 6] 삶의 의미

장회익   삶의 의미가 뭔지, 지금부터 삶의 문제를 생각해봅시다. 현시대의 우리는 온생명을 느끼며 참여할 기회를 가지고 있어요.(그림 6) 그런데 이것은 40억 년 만에 처음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냐, 이렇게 나는 생각해요. 왜냐하면 우리가 온생명 안에서 살지만 자기가 온생명임을 느끼고 온생명에 의식적으로 참여한다는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은, 우리 이전에 거의 누구도 없지 않았나.

종종 몇 백 년, 몇 천 년 전에 성인이 가끔씩 나타나서 중요한 가르침을 베풀었는데, 그분들은 어쩌면 이것을 직관적으로 느끼고 아신 것이지만, 체계화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 현재 우리는 성인이 아니더라도 온생명을 우리가 직접 파악을 하고, 그 삶을 직접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온생명을 느끼고 의식적인 참여를 행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생존기간 및 이후에 존속할 가치와 보람을 누린다.”(그림 6) 이건 무슨 의미냐? 우리가 유한한 기간 밖에 못 산다는 것은 틀림없어요. 생존 기간은 반드시 유한한 거야. 그러면 그 생존 기간이 전부라고 한다면 이건 허무한 거지. 끝나버리니까. 그러나 가치와 보람이라고 하는 차원은 무제한으로 열려 있어요. 짧은 기간이지만 거기서 우리가 가치나 보람을 만드는 것은 한계를 둘 필요도 없고 둘 수도 없어요.

길고 짧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가치와 어떤 보람을 누릴 수 있느냐 이것이 우리한테 열려 있다, 또는 무제한으로 열려 있다, 심지어 불교에서는 깨달음이 순간적으로 일어나는데 그 순간 속에 무한의 가치가 담겨있다고도 볼 수가 있죠.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한테는 아직 유한하지만 그 삶의 현장 속에 우리가 들어와서 뭔가를 할 수 있는데, 이 유한한 삶에서 무한한 차원으로 열려 있는 가치와 보람을 향유할 수 있는 상황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지. 그래서 릴레이 경기로 가끔 비유를 해요. 우리 온생명을 긴 릴레이 경기에 해당한다고 한다면 현재 생존하는 사람들은 지금 바통을 들고 경기를 뛰는 사람들이에요.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사람들의 바통을 우리가 이어받은 거지. 언젠가는 바통을 넘겨주고 우리는 밖으로 나갈 거예요.

그러니까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온생명 자체 속에 뭔가 기여를 하면서 사는 대단히 놀라운 중요한 기회가 주어져 있고,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기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쉴 때가 오는 거지. 무한히 쳇바퀴 돌 듯이 산다고 하면 대단히 지루할 거예요. 우리는 유한한 기간 동안 할 것을 다 하고 쉴 수 있다는 거죠.

말하자면 선수가 뛸만큼 뛰고 다음 선수한테 넘겨줘야지, 계속 혼자서 뛰라고 하면 아무리 좋은 것도 너무 힘들죠. 우리가 지금 그런 상황이에요. 현재 달리고 있지만 쉴 때도 오는 거죠. 쉴 때라는 것을 우리는 보통 삶이 끝난다고 하는데, 이것을 나쁘게만 볼 것이 아니라 이러한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할 수 있겠어요.

5. 뫼비우스 띠의 의미

장회익   뫼비우스 띠의 의미에 대한 설명을 읽어봅시다.(그림 7, 8)

[그림 7] 뫼비우스의 띠가 보여주는 것
[그림 8] 뫼비우스의 띠 완성의 의미 

장회익   이런 희망을 가져보는 거죠.(그림 7, 8) 노력을 해서 뫼비우스의 띠에 해당하는 이해에 도달한다면 보통의 사건이 아니죠. 우리가 우주적인 존재가 되는 거예요. 적어도 우리는 이러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 하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 이 책의 메시지라고 보면 되겠어요.

[그림 9] 뫼비우스 띠

6. 추가 질문 & 마무리

장회익   이것으로 이 책에서 하고자 한 얘기, 또 이번 강의에서 하고 싶은 얘기를 불완전하나마 대략 했어요. 혹시 조금 더 부연하고 싶은 얘기나 질문이 있으면 해봅시다.

최우석   이 책을 보면서 새롭게 느낀 것이 있습니다. 저는 이론적으로 선생님의 온생명에 대한 인식, 온생명에 대한 이론이 선생님의 물리 세계에 대한 이해로부터 쭉 연장돼서 그 귀결로 나온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존재론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고, 그것이 또한 생명과 연결 고리를 가지면 가치론적으로도 온생명이 중요한 토대를 이루게 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 책을 보면서 인식이라고 하는 데에 있어서도 온생명이 굉장히 중요한 것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물리 세계를 쭉 이해한 끝에 새롭게 얻어낸 ‘온생명’이라고 하는 이해가, 존재와 인식과 가치 이 세 가지 측면을 논하는 데 있어서 다 중핵적인 것을 이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온생명이 어떤 총체적인 그 무엇을 찾는 사람에게는 깊이 받아들이고 싶은 좋은 실체였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지금 이 책에서는 존재론적, 인식론적, 가치론적으로 이 세계를 이해하는 데 온생명이 필수불가결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새롭게 느꼈습니다.

제가 처음에 접근할 때에는 자연 세계를 지키고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가 하는 준거점으로 온생명론을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자연도 생각하고 지구와 생태도 생각하던 차원에서 온생명론을 가장 합리적인 이론이라고 생각하면서 접했고 그것으로부터 선생님 이론을 찾아 따라 들어오게 됐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위상을 넘어서서 온생명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존재와 인식과 가치를 설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데까지 와서, 이론적으로 굉장히 쭉 잘 짜여 있구나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이렇게 이론을 짜 오신 것은 아니죠?

장회익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지. 그 과정을 조금 얘기하면, 사실은 처음에 출발할 때에는 물리적인 원리를 파악하는 것이 목적이었어요. 그것만 해도 굉장히 흥미롭고 알고 싶은 거였는데, 그 다음에 물리적인 원리를 통해서 생명을 이해하는 데 연결할 수 있겠다 하는 거였어요.

그 다음에는 물리적인 세계에서 양자역학이라고 하는 희한한 이론이 나오는데, 그것을 이해하려면 새로운 앎의 틀을 찾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는 생각에서 앎이라는 게 뭐냐 하는 문제를 또 생각을 했죠. 거기까지 생각을 해놓고 보니까 그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게 아마 한 10년 정도 전부터 떠오른 생각이에요.

그래서 전체를 의미 있게 한번 연결해보자 하는 생각을 했어요. 내가 지향하고 해보고 싶은 것이 그렇게 큰 것이 아니었는데 하다보니까 자꾸자꾸 커지는 거야. 그래서 에라, 하는 김에 전체를 담자 해서 내가 최종 목표로 잡은 것이 ‘온전한 앎’이고 온전한 앎이라는 것은 ‘온전한 삶’의 토대다 하는 거죠.

결국은 우리가 온전한 삶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하는 문제로 귀결이 돼요. 그래서 이 책을 쓰면서 아, 이런 것이 학문의 보람이 아니냐.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공감하고 받아들일지 모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들이 해야 하겠지만, 나로서는 내 학문의 노력이 여기까지 포괄할 수 있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보람을 느끼고 있어요.

이것이 뭔가 온생명적인 삶에 의미 있는 기여가 된다면 그 이상 학문적으로 바랄 것이 없어요. 그런 얘기를 해주니까 나로서는 상당히 고무되고 보람을 좀 더 느낀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최우석   뭔가 솥발이 완성된 느낌이랄까, 세 개의 솥발이 우리의 전체적인 이해를 떠받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듭니다..

장회익   희망사항이 있다면 이 책이 하나의 좋은 출발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예요. 물론 엉성한 면도 많고 살펴보면 부분적으로 잘못된 것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책을 통해서 꽃필 수 있도록 누군가가 이어줄 수 있다면 그것처럼 내가 바라는 게 없죠.

누누이 강조하는 거지만 현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통합적인 앎인데 우리가 그것을 놓치고 있다는 거예요. 필요한 것이 그것인데 개인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앞에서도 잠깐 얘기했지만 개인이 통합적인 앎을 추구해야 돼요. 개인의 앎이 통합적이 되지 않으면 전체가 통합적인 어떤 것을 만들어낼 수가 없어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해야 된다고 말하지는 않겠어요. 그러나 정말 학문적인 의욕을 가진 사람이라면 지금 그것을(앎을 통합하는 작업)을 꼭 해줬으면 좋겠다 하는 희망을 간절히 가지고 있어요. 특히 강의를 듣는 학생들, 그리고 지금 함께 공부하는 나에 비해서는 젊은 분들이 같이 힘써주면 좋겠다 하는 희망을 마지막으로 전달하고 싶네요.

최우석   선생님 덕분에, 이 책에서 부록의 일부를 빼고는 완독했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서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경희대학교 강의 덕분에 선생님 말씀을 여러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영상자료로 확보했다는 것도 저는 뿌듯합니다.

장회익   내가 일생 학생들한테 강의를 해왔지만, 이번 학기처럼 첫 시간부터 끝 시간까지 학생들 얼굴도 못 보는 강의는 처음이에요.(웃음) 영상으로 강의를 남기는 것도 처음이라서, 그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에요. 지금까지 강의를 해 왔고, 옛날에는 기술적인 것도 안 됐었지만. 그나마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기록으로 남아 있게 된 것도 나한테는 상당히 다행이라고 봐요.

한 가지 걱정스러운 것은, 혹시 그 안에 실수 한 게 얼마나 있을까 그게 걱정이에요. 그런데 너무 그런 데 대해서 마음을 깊이 쓰지 않은 이유가 사람은 불완전한 거다, 어차피 나도 실수를 하는 거다, 다른 사람도 다 하는 거다, 저 사람도 실수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걸 알아주는 것도 그게 나를 제대로 아는 거예요.

저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다 하게 되면, 우리하고는 다른 사람이구나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그냥 가볍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안에 틀린 얘기도 있을 것 같고 부족한 얘기도 있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너그럽게 용서해주기를 바래요. 그렇게 해서 더 인간적으로 가까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그게 오히려 더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학생들한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대담 11-2 끝.)


대담 : 장회익, 최우석, 황승미

영상 편집 : 최우석

녹취, 글 편집 : 황승미

전체 제작 : 녹색아카데미


녹색아카데미 유튜브 채널

장회익의 자연철학이야기 녹취록 목록 (유튜브 대담영상 녹취록 1차 편집본. 완결)

장회익의 자연철학이야기 녹취록 목록 (유튜브 대담영상 녹취록 2차 편집본. 진행중)

자연철학 세미나(1차) 녹취록 목록

새 자연철학 세미나 모임 정리 목록

자연철학이야기 카툰

자연철학 세미나 게시판

녹색아카데미 SNS : 페이스북 그룹트위터인스타그램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