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회익의 자연철학이야기 10-2. 앎이란 무엇인가 (2)이해와 앎

이 자료는 녹색아카데미 유튜브 ‘자연철학이야기’에서 나눈 대담 10-2를 녹취, 정리한 것입니다. 대담은 책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의 이해를 돕기 위해 2020년에 제작되었습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이야기” 10-2편에서는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의 ’제9장. 앎이란 무엇인가’ 중 이해와 앎의 문제를 다룹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이야기 10-2. 앎이란 무엇인가 (2)이해와 앎

  1. 앎과 우주 운행원리의 일치
  2. 내 안의 이(理)와 천지만물의 이(理)
  3. 아인슈타인: 세계의 영원한 신비는 이것이 이해된다는 것
  4. 앎과 이해는 어떻게 다른가?
  5. 이해의 한계?
  6. 학문의 통합적 이해
  7. 아인슈타인의 충고
  8. 삶과 앎
  9. 논의 과제
  10. 몇 가지 질문들
    10.1. 상상의 세계와 앎의 대상
    10.2. 앎의 대상과 앎의 주체

1. 앎과 우주 운행원리의 일치

최우석   앎이란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예측적 앎의 구도에 대해서 앞 시간에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앎이 어떻게 그렇게 자연을 잘 이해하게 되나, 이해할 수 있나 이런 문제에 대해서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내용이 [그림 1]입니다. 여기에 정리된 내용은 일종의 앎 혹은 지식의 진화적인 선택이랄까 이런 것이라고 받아들여도 될까요 ?

[그림 1] 앎과 우주 운행원리의 일치

장회익   그렇지. 기본적으로 그것 밖에는 없는 건데, 결국 우리 몸 자체가 진화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앎도 기본적으로 예외라고 볼 수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 틀에서 우리가 이해를 하면 앎은 생존 과정에서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어요. 어떤 앎을 가져보니까 생존이 잘 되고 어떤 앎이 없을 때 생존이 어려워서 없어진다면 생존에 유리한 앎이 일단 남게 되는 거지.

그리고 ‘생존은 앎을 통해서 보장된다’는 것은, 앎이 좋으면 즉 우주 이치에 맞는 앎을 가지고 행동을 하면 생존이 유리해질테니까 앎은 생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거지. 우리가 긴 기간에 걸쳐서 생존해오는 동안 생존에 이롭게 만들어진 앎은 근본적으로 우주의 운행원리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지 않느냐 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앎이 우주의 운행원리와) 일치해야 된다고 얘기할 수는 없지. 항상 임의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 생존에 안 맞으면 없어지는 거죠. 항상 꼭 맞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렇다는 얘기예요.

최우석   여기서의 앎은 외부 세계의 내적 반영(지식)을 포함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거죠?

장회익   그렇지. 

최우석   이렇게 보면 ‘앎이 생존을 통해 만들어지고 생존은 앎을 통해 보장된다’라고 하면(그림 1) 여기서 앎의 주체는 기본적으로 낱생명이라고 봐야 되나요?

장회익   온생명도 마찬가지지. 낱생명들이 성공적으로 생존해야 온생명도 유지가 되니까. 그런데 온생명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어떤 앎이 체계화된 것은 아직은 생각할 수 없죠. 낱생명들이 온생명 안에서 어떻게 생존 가능하냐, 그것들을 지금 만들어나가는 단계다 우선은 그렇게 이해를 하는 게 옳을 것 같아요.

최우석   이 수준에서는 우리가 의식 주체가 아니라 인식 주체의 앎의 원초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네요.

장회익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도 의견들과 관심도 많이 있었는데… 여기서 가장 기본적인 원초적인 앎도 결국은 원초적인 생명 구조와 크게 구분이 안 되는 거지. 그러니까 그것(가장 기본적인 원초적인 앎)이 생명이 되어왔다는 것은 그 중에서 앎에 해당하는 것도 생명에 맞추어서 생존해왔다고 보면 돼요. 이런 원초적인 단계에서는(그림 1) 사실은 그 생명의 실제 구조나 앎의 특성이 거의 서로 맞물려 있는 거예요.

최우석   그러면 생명과 앎이 거의 비슷하게…

장회익   그렇지. 생명과 앎이 거의 같이 나아가요. 앎도 생명의 과정 중의 일부인데 그 중에서도 중요한 일부인 거죠.

[그림 2] 앎과 생존

장회익   누가 한 얘기인지 지금 잘 기억은 안 나는데,(그림 2) “끊임없이 네 앎을 죽여라. 그렇지 않으면 네 앎이 너를 죽일 것이다”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앎에 고착돼서 살 수 있지만 세상은 자꾸 달라지니까, 거기에 맞는 좀 더 적합한 앎이 같이 나아가야 된다, 같이 나아가기를 거부하거나 정체되면 생존에 불리하다, 그래서 “네 앎이 너를 죽일 것이다”라고 하는 말이 그런 의미가 되는 거예요.

최우석   그러면 우리가 더 고차적이고 더 통합적인 앎을 향해서 가는 것 역시도 크게 봐서는 개개인의 지적 호기심을 넘어서는 더 큰 차원의 더 유리한 생존을 위한 하나의 흐름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장회익   그렇게 볼 수밖에 없죠.

최우석   그러면 만약에 그런 앎의 차원에서 여러 부류들끼리 경쟁한다고 하면 더 깊은 이해, 더 깊고 더 통합적인 앎을 가진 쪽이 더 유리할 수도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장회익   당연히 그렇게 봐야죠.

최우석   그러면 지적 유희를 넘어서서, 생존에 심각한 문제가 되는데요?(웃음)

장회익   당연하지.

2. 내 안의 이(理)와 천지만물의 이(理)

[그림 3] 내 안의 이와 천지만물의 이

장회익   [그림 3]은 여헌의 <답동문>에 나오는 얘기예요. 어떻게 해서 우리가 알게 되느냐 하는 설명을 책에 나오는 대로 적어본 거예요. 여헌은 ‘내 안에 있는 이(理)와 천지만물의 이(理)가 있다’고 봐요. 우주 진행의 이(理)가 있고, 우리가 앎을 가지는 것도 이해 작용이라고 여기서는 보고 있어요.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치를 추구한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이(理)로 천지만물의 이(理)를 비추어 보아 이를 남김없이 꿰뚫어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이렇게 꿰뚫어 비추어 볼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이(理)와 거기에 있는 이(理)가 그 근본에 있어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여헌이 했어요.

이 말이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결국 어떻게 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가 하는 큰 의문이 당연히 있고, 그 의문에 대해서 하나의 답으로 제시한 것이 내 안에도 이(理)가 있고 천지에도 이(理)가 있는데 이것이 사실은 근본이 같기 때문에 서로 비추어서 맞는 것을 찾아나간다, 이러한 이해를 하고 있죠.

그런데 이것이 현대인으로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어떤 답이 되느냐? 우선 한 가지 질문이 이거죠. 어째서 근본에 있어서 하나인가? 여헌은 근본이 같다고 했는데, 어째서 같으냐?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물음을 던질 수가 있어요. 여기의 이(理)와 저기의 이(理)가 같다는 것은 좋은데, 근본이 하나인 이유가 있어야 할 것 아니에요? 거기에 대한 답은 <답동문>에는 없어요. 그걸 우리가 하나의 문제로 남겨놓고 그 다음에 아인슈타인의 말을 들어봅시다.

3. 아인슈타인: 세계의 영원한 신비는 이것이 이해된다는 것

[그림 4] 아인슈타인의 ‘영원한 신비’

장회익   아인슈타인이 유명한 말을 했죠(그림 4). “세계의 영원한 신비는 이것이 이해된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이 말은 (자연이 우리에게) 이해된다, 앎을 가진다는 것 그 자체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거지. 정말 어떻게 해서 우주의 신비가 우리에게 알려질 수가 있느냐? 그걸 이해 못하겠다 하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얘기예요. 우리의 앎이 우주의 질서와 연결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신비다, 이것이 이해가 안 된다 하는 얘기죠.

그래서 잠정적이지만 내가 제시하는 것은, “그 이유는 우리 자신이 40억 년에 걸친 존재의 모험과 바꾸어 얻어낸 결산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 자신이 40억 년에 걸친 존재의 모험을 한 거죠. 그 앎을 위해서 몸을, 생명을 걸었던 거야. 이런 앎도 가지고 살아보고 저런 앎도 가지고 살아봐서 실패한 것은 버리고 성공한 것만 취해온 거죠. 그러니까 40억 년에 걸친 존재의 모험을 우리가 한 건데 그것과 바꾸어 얻어낸 결실이 우리의 현재의 앎이에요. 따라서 그러한 앎은 우주의 기본 질서에 어느 정도 맞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다, 아까 얘기한 진화론적인 관점이에요.

내가 볼 때는 이 신비는 결국 이 방법(40억 년에 걸친 존재의 모험과 바꾸어 얻어낸 앎을 통한 이해) 밖에 없지 않느냐, ‘아인슈타인의 ‘영원한 신비’는 우리 자신이 우주적 과정을 통해 빚어지고 있다는, 빚어진 우리 자신이 다시 자신을 빚어낸 우주를 이해하려 한다는 그 근원적 신비에 맞닿아 있다’ 이렇게 나는 해석을 했어요.

사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그 긴 우주적 과정을 통해서 놀라운 생명을 이루어냈다고 하는 그 신비와 같은 맥락이다, 그렇게 밖에 볼 수 없어요. 대단한 놀라움인데 그것을 아인슈타인은 ‘영원한 신비’라고 했죠. 그것을 여헌은 천지만물의 이와 우리의 이가 근본이 하나다라고 했어요. 근본이 하나라고 하는 것은 결국 여기서 본다면 우리가 그 안에서 빚어졌다는 얘기지. 우리가 그 안에서 빚어졌으니까, 빚어지면서 얻은 것(앎)이니까 결국 근본이 하나라는 해석과 연결이 되지 않는가, 이렇게 해석을 해볼 수가 있어요.

최우석   저는 아까 앞에서 선생님께서, ‘앎이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내부와 외부 사이의 동조 기구다’라고 하는 차원에서 여헌의 말씀이 그런 건가 생각했는데, 그것과는 또 다른 건가요?

장회익   물론 동조 기구라는 말은 맞는데, 그것보다는 조금 더 깊은 의미의 질문이라고 볼 수 있어요. 어떻게 그런 동조가 되느냐 하는 문제, 그걸 조금 더 깊이 살펴 본 거지. 사실 우리는 알려고 노력을 하잖아요? 그런 노력을 해서 앎을 얻을 수가 있는 거지. 그것(앎)이 얻어진다는 것이 놀랍다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얘기예요. 아인슈타인이 이 말을 할 때에 여기에는 개인적인 경험이 포함되어 있는 거야. 상대성이론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상상도 못했던 이상한 건데 그것을 파악을 해서 보니까 우주가 그렇더라, 이런 아주 깊은 경험 속에서 나온 거예요.

여헌도 어떤 경험을 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우리가 우주를 알려고 하면 우주의 기본적인 진행 원리와 연결이 된다 하는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되는 이유는 같은 근원에서 나왔다고 얘기를 한 거예요. 같은 근원에서 나왔다고 하는 여헌의 얘기를 다시 우리가 현대적으로 보면 우리 자신이 그걸 통해서 빚어진 존재다 하는 말의 조금 다른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겠나, 이런 거죠. 우리 앎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아주 깊은 차원의 신비 문제를 지금 여기서 거론하고 있는 거예요.

4. 앎과 이해는 어떻게 다른가?

[그림 5] 앎과 이해는 어떻게 다른가?

장회익   ‘앎과 이해는 어떻게 다른가?’ 이건 좀 단순한 얘긴데, ‘앎’과 ‘이해’를 같은 의미로도 쓰고 다른 의미로도 쓰는데 그것을 한번 정리해 본 거죠. ‘앎’이란 ‘단편적 앎의 요소 곧 정보들과 이들을 연결하는 이론들로 구성’된다, 그러니까 앎이란 그걸 다 통합해서 그 안에 있는 단편적인 내용과 연결하는 내용을 다 합쳐서 얘기하는 거예요. 반면 ‘이해’는 ‘단편적 앎의 요소들을 연결된 전체의 형태로 파악하는 능력 혹은 행위’를 말해요.

여기서 강조하는 점은 ‘이해’라는 앎이 대단히 중요한 앎이라는 거예요. 보통 앎 속에는 이해도 포함되지만 단편적인 것도 그냥 앎이라고 해요. 이것과 저것이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는데, 이건 이렇더라 저건 저렇더라 하는 것도 앎이기는 하죠. 그런데 그런 앎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을 수 있어요. 신뢰성의 문제도 있고, 활용가능성의 문제도 있죠. 이걸 알았다고 해서 저쪽에 대해서도 뭘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런 제한된 면도 있어요.

서로 상치되는데 모순되는 걸 모르고 모두 받아들일 수도 있죠. 그래서 ‘이해가 없거나 부족하면 단편적 앎의 요소들 속을 헤매게 되며, 서로 상치되는 앎을 붙들고 갈등하게’ 된다, 그리고 ‘앎의 검증과 효용은 이해의 폭에 크게 의존한다,’ 그래서 이해라고 하는 것을 나는 강조해요. 이해라고 하는 것은 서로 간의 연결을 파악하려는 거죠.

앎은 독립적인 여러 가지 요소들이 그냥 병렬적으로 있는 게 아니고, 그 전체가 이상적으로 보면 하나로 묶여서 한 덩어리로 파악할 수 있는 그런 것이라고 할 때, 그 앎은 우선 활용가능성이 높고 우리가 이해하고 파악하기가 쉽죠. 기본 원리 하나를 알고 나면 나머지는 다 되니까. 물론 원리 하나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래서 기본 원리에 대해 이해를 하고 나면 많은 곳에 적용이 되고, 모든 현상의 연관관계를 파악할 수 있어요. 사물을 보는 파노라마가 넓어지죠. 관계없이 보면 한꺼번에 봐도 조각조각을 보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모자이크를 보는 것 밖에 안 돼.그래서 기본적인 연결을 통해 보는 것이 이해인데, 이런 이해를 추구하는 앎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얘기예요.

다음 장에서 얘기하겠지만 ‘온전한 앎’이라고 하는 것은 전체가 하나로 연결된 이해 가능한 앎,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같은 앎이지만 단편적인 앎도 앎이라고 하고 이해도 앎이라고 하는데, 지금 많은 경우에 여러 학문들이 이해를 넓히려고 애를 쓰지만 학문들 하나하나에서 이루어지는 이해들은 어떤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따로 있어요.

전체를 연결하는 통합학문을 얘기하는 이유는 이해의 폭을 넓히는 앎을 추구하자, 그리고 그것이 소중하다, 하나하나 개별적인 앎을 추구할 때에는 통합적인 앎을 파악한다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일 수는 있지만 전체를 파악하게 되면 그 안에 담을 수 있는 내용이나 질은 대단히 높다, 이런 얘기예요.

최우석   ‘이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지난번에 말씀하시기를, 보편적인 원리에 비추어서 여러 가지 것들의 자리를 잡아서 꿰뚫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단편적 앎의 요소’들을(그림 5) 연결된 전체로 파악하는 것의 한 방법이 보편원리에 비추어서…

장회익   바로 그렇지. 우리가 보편원리를 찾는 이유가 바로 전체로 연결되는 것, 이해의 바탕이 되는 것을 찾자고 하는 거예요.

황승미   이해의 주체는 개인인가요, 아니면 현대 과학 이론인가요?

장회익   일단은 개인이 이해를 하는 거죠. 개인이 이해한 경험을 공유할 수 있지. 내가 이해를 했으면 비교적 쉽게 남을 이해를 시킬 수가 있죠. 내가 이해를 못하고서는 남을 이해시키는 것도 안 되죠. 그렇게 하면 공유된 이해가 되는 거예요. 공유된 이해의 폭이 넓어지면, 나는 부분만 이해를 했지만 연결하면 공유된 이해가 되기 때문에 더 큰 이해의 틀이 우리의 집합적 지식 안에 담길 수 있어요. 학문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그런 내용을 가지고 있는 거지.

황승미   그러면 ‘현대 문명’은 우주를 ‘이해’하고 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까요?

장회익   상당 부분 그렇게 가려고 하는 거죠.

5. 이해의 한계?

[그림 6] 이해의 한계?

장회익   한 사람이 ‘이해’를 할 수 있는가 하는, 이해의 한계 문제가 있죠.(그림 6) 그래서 ‘사람의 지적 능력은 유한하기 때문에 이해 능력도 유한할 것이고, 그렇다면 인간에 의한 우주의 이해는 일정 범위 이상 넘어갈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여기에 대해서 이런 답이 가능해요. ‘이론을 가다듬음으로써 이것이 이해 가능한 형태를 취하면서도 그 내용의 질적 수준을 끊임없이 높일 수 있다,’ 그래서 ‘심오한 이론일수록 더 단순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니까 가장 심오한 것, 가장 단순하고 아름다운 것을 하나 딱 얻으면 그 안에 많은 이해 가능한 내용을 담을 수가 있다, 이것을 개인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지. 개인이 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런 얘기를 할 수가 없어요. 아무도 그러한 아름다움이나 단순함을 느낄 수가 없는데 어떻게 얘기할 수가 있겠나?

그래서 적어도 누군가는 이렇게 느낄 수 있는 그런 앎을 만들어야 서로 공유하기도 쉽고, 각자 부분 부분 따로 있는 것을 합쳐서 그렇게 된다고 하는 것은 말이 그렇지 현실적으로 합칠 방법이 없는 거야. 연결한 것을 아무도 이해를 못하다면 공유가 불가능하죠. 그래서 결국은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야 하고, 그러려면 되도록 단순화하면서도 깊은 내용이 담기는 그러한 지적 노력이 필요한 거지.

그리고 여기에 ‘아름답다’라는 말을 썼는데, 앎이 아름다울 수가 있냐? 그런데 우리가 심오한 과학이론을 보면 아름답다는 말을 쓸 때가 있어요. 놀랍게도 아주 단순하면서도 많은 것을 담고 있고, 그러면서도 상식적으로는 거의 생각할 수 없는 깊은 심오한 것과 연결이 되는 것, 이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느냐? 심미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는 건데, 아름다움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 또 다른 깊은 문제이지만, 앎 속에서도 틀림없이 그런 요소가 있다 하는 것은 우리가 느끼거나 다른 사람이 경험한 얘기를 들어서 알 수 있죠.

최우석   그러면 깊고 빼어난 이해를 만들어내는 그런 노력이 당연히 필요하지만, 이미 성취된 이해를 다시 써보고 더 간단하게 만들고자 하는 노력도 계속 이어져야 다음 단계의 이해로 넘어가고 또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그러는 걸까요?

장회익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이해’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따로 객관적으로 봤을 때 단순하고 아름다운 것이 이미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자꾸 재음미함으로써 불필요한 것을 계속 잘라내고 더 중요한 것을 찾아내고, 그럼으로써 더 아름다운 것으로 향해가는 그런 작업을 계속 해나가는 거예요. 완성 된 건 없어.

최우석   또 한 가지 드는 생각은, 현대 학문의 추세는 끝없는 새로움의 추구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기존의 이론, 기존의 발견을 음미하고 그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서술하는 연구는 잘 인정을 못 받는 것 같은데요. 가령 과학혁명기에 있었던 흥미로운 일인데, 슈뢰딩거의 이론과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이 결과적으로는 같은 걸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는 논문이 나와서 인정을 받고 확립이 됐다고 하는 이런 얘기가 저는 상당히 놀라웠습니다. 그런데 현대 학문 세계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의문이 듭니다.

장회익   당연히 있어야 되는 건데, 사실은 내 느낌으로는 현대 특히 20세기 후반을 넘어서 지금 21세기로 오면서 그런 연구에 대한 중요성이 점점 떨어지고 인정을 덜 받고 있어요. 반면 부분적인 확실성만 추구하는 이런 경향이 상당히 강하다고 봐요. 그렇게 되면 그 자체는 사실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많지만, (각각을) 어떻게 아울러서 전체로 가지고 가느냐에 대해서는 판단도 어려워요.

현대 학문 세계에서는 전체적인 이해를 권장하는 추세가 좀 약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현대 학문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더라도 그러한 부분적인 연구를 하면서도 전체를 아울러서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또 거기에서도 성과를 얻어낼 수 있고, 그 성과는 소중하다는 말을 할 수가 있죠.

6. 학문의 통합적 이해

장회익   [그림 7]은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을 간단히 규정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는지 적어본 거예요. ‘개체로서의 내 삶을 중심으로 파악한 내용’이 대충 인문학의 카테고리에 속한다고 본다면, 사회과학은 ‘사회구성물로서의 내 삶을 중심으로 파악한 내용’에 속한다고 봤어요.

동심원으로 봤을 때 가장 작은 동심원을 주 관점으로 본 것이 인문학이라고 한다면, 사회과학은 그 다음 동심원, 공동체의 관점에서 본 것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어요. 자연과학은 뫼비우스 띠의 외면을 중심으로 파악한 내용에 속한다고 봤어요. 물질적인 측면이죠. 그러니까 내면의 주체를 직접 다루지 않아요. 주체는 그저 내면에 깔려서 숨어 있고 외면에 나타나는 현상을 주로 보는 것이 자연과학이에요. 인문학에서 주체가 가장 강하게 나타나고, 사회과학에서는 주체들의 모임을 객체화해서 보는 거예요

[그림 7] 학문의 통합적 이해

황승미   인문학, 사회과학은 조금 더 의식모드 쪽이고, 자연과학은 조금 더 서술모드 쪽이라고 하면… 너무 도식화한 걸까요?(웃음)

장회익   그렇게도 이해할 수가 있겠죠.

최우석   인문학의 핵심을 문∙사∙철로 보면 사∙철하는 분들이 이런 분류는 아니라고 할 것 같은데요?(웃음)

장회익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고 너무 단순화시킨 거죠.(웃음)

7. 아인슈타인의 충고

[그림 8] 아인슈타인의 충고

장회익   그림 8은 아인슈타인이 1952년에 어떤 젊은 학자가 보낸 편지에 답장을 한 거예요. 꼭 경험을 해야 많이 안다는 것과는 반대되는 내용이죠. 깊이 이해를 하면 몇 가지 경험만 가지고도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는 얘기예요. 그러니까 개인이 무한히 경험할 수도 없지만, 그 대신 우리의 이론적인 깊이가 깊어지면 경험이 많지 않더라도 중요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말이죠.

최우석   이 얘기는 어찌보면 사회 경험이 적은 사람도 대단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얘기도 될 수 있을까요?

장회익   그런 얘기도 되죠.

8. 삶과 앎

[그림 9] 삶과 앎

최우석   지난번에 ‘삶’이라는 것을 규정해주셨는데 이제 ‘앎’도 이런 식으로 규정되는 건가요?(그림 9)

장회익   생명의 주체적 양상이 삶이라면, 앎은 생명(삶)의 인식적 활동을 의미해요. (삶과 앎의) 일차적인 목표는 ‘성공적 관계 맺기’, 즉 보생명과의 관계를 맺는 거예요. 그런데 한 가지 부차적이지만 더 중요한 것이 나왔어요. 앎을 통해서 ‘성공적 자기이해’가 가능하다는 거예요. 내가 어떤 것인지 처음부터 알고 태어난 게 아니지. ‘나’라는 것이 가장 큰 신비인데, 이러한 앎을 통해서 결국은 내가 어떤 존재다, 내가 어떤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존재다 하는 것을 알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다시 말하면 ‘온전한 앎을 통해서 온전한 삶을 지향’할 수가 있게 된다, 삶을 더 풍부하게 할 수가 있다는 거예요. 일차적 목표에서는 생존이 목적이라면 이차적 목표에서는 삶의 의미를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 이차적이지만 어떻게 보면 궁극적인 앎의 목표라고 볼 수 있어요.

최우석   여러 수준의 낱생명에서부터 온생명까지 다 적용이 될 수 있을까요?

장회익   그렇게 볼 수가 있을 거예요.

황승미   그런데 ‘성공적 자기이해’가 책 후반부에 나오기도 하고, 뭔가 너무 당연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저한테는 좀 의미가 크게 다가왔습니다. 제가 예전에 온생명론을 처음 공부할 때는 과학을 잘 몰랐는데, 조금씩 해나가면서 동기와 관심을 가지게 된 큰 계기가 ‘나’를 이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늘 내가 뭔지 모르겠고 왜 사는지 모르겠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모르겠다는 그런 고민을 늘 해왔거든요. 사실은 이런 것들이 나이가 좀 들면서 엄청나게 큰 고민이었어요.

어떤 직장을 가져야 되고 어떻게 해야 되는지 거의 머리 속이 카오스 상태인 채로 10-20년 살았는데 공부를 해서 그런 고민들이 정리가 될 것이라고는 저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알고 보니 아까 인문학이나 사회과학도 나왔지만 그런 것들에 제가 했던 고민들이 다 담겨있었던 것 같아요. 저만 가지고 있는 고민도 아니고 이미 다른 사람들이 예전에 다 했던 것이고 어느 정도는 해결된 그런 얘기들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이런 것도 공부하고 저런 것도 읽으면서 제 질문과 고민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겠구나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과학도 그런 답을 줄 수 있을 줄은 솔직히 생각을 못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온생명론에서 인간과 생명, 지구를 설명하시는 것을 보면서 아, 과학을 공부하면 과학을 통해서 내 자신을 이해하고 자연이나 우주 안에서의 제 위치, 자리를 잡을 수 있겠구나 처음으로 생각하게 됐어요. 그래서 ‘성공적 자기이해’가 그렇게 당연한 얘기는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장회익   예를 들어서 철학과 과학을 가지고 얘기를 해본다면, 일단 여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면서 폭넓게 과학적 지식이 변해왔지만 상당히 완만하게 현대까지 변해왔죠. 근대 이후에 굉장히 급격하게 바뀐 것이 과학적인 앎이거든. 이러한 과학적 앎을 담고 보는 것과 그 전까지 피상적이고 일상적인 생활에서 조금씩 파악된 것을 가지고 보는 것과는 당연히 같은 철학을 하더라도 차이가 있어요. 그리고 정말 내가 누구냐,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는 것에도 상당히 차이가 있는 거죠.

그래서 근대 이후에 이루어져온 비약적이고 놀라운 과학적 앎을 담지 않으면 사실은 이차적인 목표(성공적 자기이해)를 달성하기에 한계가 있어요. 오천 년 동안 쌓아온 지혜도 대단히 소중하지만, 그 위에서 그대로 비슷한 걸음을 걷게 되는데 뭔가 새로운 어떤 것이 이제 가능하게 됐다 하는 그러한 측면을 중시하고 싶다는 거죠.

그래서 ‘자연철학’이라고 하는 명칭을 붙이고 생각을 해봐야하는 이유, 내가 이 책을 시도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거예요. 근대 이후에 얻은 가장 심오한 내용을 정리하고 그 바탕 위에서 뭔가 더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자 하는 얘기예요. 과학이 있음으로써 새로운 중요한 변수가 생겼다는 것, 그것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9. 논의 과제

[그림 10] 논의 과제

최우석   이 챕터에서 마지막으로 이런 과제를 선생님께서 던지셨습니다.(그림 10)

장회익   지금까지는 과학에서 얘기했던 앎을 중심으로 모형을 했는데, 더 큰 앎이 있을 거예요. 많은 앎이 있는데 그 중에서 우리에게 중시되는 폭넓은 앎이 있다면 철학적 앎이다, 그 철학적 앎의 성격은 어떤 것이냐? 대충 살펴보면 존재론, 인식론, 당위론 이렇게 나눠볼 수 있을 거예요.

존재론은 ‘무엇이 있느냐’, 인식론은 ‘어떻게 아느냐’, 당위론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이런 것들이 철학적 앎의 중요한 세 가지 관심사예요. 이런 것들을 ‘메타적 사고’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단순한 사고나 앎이 아니라 그것을 밟고 한층 높은 차원에서 전체를 내려다보는 그런 사고를 통해서 생각하는 이것이 대략 철학적 지식, 철학이 시도하는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그리고 또 어떤 종류의 지식이 더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앞으로 생각해볼 것이 많죠. 우리가 모든 앎을 다 섭렵한 게 아니기 때문에. 앎의 아주 기본적이고 가장 단순하고 전형적인 것을 얘기했고 이제 철학에서는 이런 얘기를 하는데, 그외 다른 앎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생각한 것들과 어떤 관계가 있고 또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은 앞으로 생각해봐야 할 과제다 하고 남기고 지나가려고 하는 거예요.

최우석   이 논의과제를 보면, 선생님께서는 존재론과 인식론, 당위론을 하나로 쭉 관통해서 하나의 이해 안에 각각의 자리를 찾으셨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장회익   여기서 내가 ‘자연철학’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런 내용(존재론, 인식론, 당위론)을 처음부터 의식하고 진행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은 여기에 해당하는 것을 적어도 자연을 바탕으로 해서 일단 담아서 자연철학이 아니라 그야말로 일반철학으로 가기 위해서 자연철학이 제공할 수 있는 내용을 담아보았다, 이렇게 보는 게 어떨까 생각해요.

최우석   보통 사실과 당위 문제에 대해서 얘기를 많이 하고 있고, 그 안에 굉장히 큰 논리적 비약과 단절이 있다는 얘기들을 많이 하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생명이라고 하는 것을 그 중간의 매개 다리로 해서 존재와 당위 사이에, 사실과 당위 사이에 놓인 넓은 강을 확 좁히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회익   나는 존재론, 인식론, 당위론을 따로따로 생각하지 않고 이것들을 연결할 수 없을까 이렇게 본 거죠. 셋을 하나로 만드는 것. 그래서 존재론까지가 앞에서 했던 것이라면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이 인식론에 대해서 좀 생각해본 것이고, 다음에는 아마 당위론과 관련한 얘기로 넘어가지 않을까 생각을 해요. 이러이러하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느냐. 여기에 대한 답을 내가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지는 않죠.

그러나 당위론을 위한 바탕틀, 특히 자연철학이라고 하는 사고를 통해서 얘기할 수 있는 바탕틀은 제공해보겠다는 거예요. 그것이 단편적으로 이것 이것이다라고 하는 게 아니라. 사실 철학에서도 존재론, 인식론, 당위론을 다 연결해서 하는 철학자는 별로 못 봐요. 나는 존재론을 한다, 나는 인식론을 한다, 이렇게 하고 있는데 이제 서로 연결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 목표가 될 수 있죠.

최우석   딱 그렇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앞에서 나온 역학모드와 서술모드, 의식모드가 이 세 가지와 조응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장회익   그런 면도 있지.

[그림 11] 무엇이 있는가(존재론), 어떻게 아는가(인식론), 어떻게 살아야 하나(당위론)

10. 몇 가지 질문들

10.1. 상상의 세계와 앎의 대상 

최우석   이렇게 해서 앎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도모해봤는데 많이 곱씹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단순한 질문 한 가지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464쪽을 보면 “예를 들어 사후에 만날 수 있는 어떠한 세계도 상상의 대상은 될 수 있겠으나 앎의 대상은 될 수 없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상상은 앎의 대상이 아닌가요?

장회익   상상이라고 하는 것은 두뇌활동의 일부인 것은 틀림없어요. 뭔가를 그려보는 거죠. 그런데 상상을 앎과는 구분할 필요가 있어요. 상상은 뭐든지 할 수 있지. 물론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에 어패가 있을 수 있어요. 왜냐하면 두뇌가 유한하니까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상으로 많은 것을 할 수가 있어요. 상상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지적활동의 굉장히 놀라운 한 부분이에요. 상상을 못한다면 새로운 것을 찾아나가기가 어려워.

그런데 상상을 일단 하면 그 다음에 그 상상의 내용과 구체적인 것을 매치시켜서 판단을 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 거야. 상상이 없으면 말하자면 가설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래서 새로운 어떤 것을 사고할 활동의 가능성이 차단돼요. 지적 활동의 가능성은 상상 속에서 이루어지거든. 상상은 상당히 많은 범위에서 여러 가지를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상상이 됐다고 해서 이것이 앎이냐 하면 앎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적어도 어떤 현상이나 이론에 의해서 확인이 될 때 앎의 틀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상상이면서 앎이 아닌 것은 얼마든지 있죠.

그런데 상상이 없으면 새 앎을 개척하기는 굉장히 어려워져. 그러니까 상상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덩굴 식물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뻗어올라가는 것과 비슷해요. 덩굴 식물이 바람이 부는 대로 이렇게 저렇게 흔들리는 형상이 우리의 지적인 상상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요.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탁 잡히는 게 있으면 그걸 타고 올라가는 거거든. 그때부터는 어떤 의미 있는 앎이 되는 거지.

상상은 되지만 앎은 아니다 하는 말이 무의미한 말은 아니지. 우리가 사후에 만나는 세계도 상상은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직까지는 앎으로 연결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지 못한 거지. 그러니까 우리는 사는 세계에 대해서는 알겠는데 그 후의 것은 머리 속에 그려볼 수는 있지만 현재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어요. 그런 상상을 통해서 뭔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나올지는 모르겠는데. 상상은 되지만 아직 앎으로 연결 안 됐거나 심지어는 앎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없는 상상도 있을 수 있죠.

최우석   원초적인 차원으로 가면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앎의 폭이 굉장히 넓다고 생각했는데, 경험과 연결이라고 하는 점에서 앎의 범위가 엄격해지는 것 같습니다. 가령 수학도 그런 지식이라고 하고 소설이라고 하면 소설이라고 하는 대상물이 있고 소설들에 대한 우리의 어떤 규정, 언명, 지식들이 있습니다. 앎이 아닌 상상에 대한 지식, 정보들인데 그런 것들로 쌓여진 것이 인문학일 수도 있고 수학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황승미   약간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 말씀에서 사후세계에 대해서 탐구를 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서 사후세계의 땅이 어떻고 땅을 구성하는 물질이 어떻고 하늘이 어떻고, 이런 상상을 앎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말씀이신 것 같아요. 그 사후세계를 상상하는 행위 자체는 의식 모드이고, 사후세계에 대해서 사람들이 자신의 유한한 의식과 지식을 가지고 소설을 쓰고 얘기를 만들어내는 것 자체는 의식모드에 의해서 구현되는 것이고 하나의 결과물이 되는 거죠.

최우석   경험적 검증은 어떻게 해요?

황승미   검증의 대상은 아니죠. 현실세계를 가지고 사후세계를 상상하는 행위는 특별한 의식모드의 실행인 거죠. 구절을 약간 오해한 것 같아요.

장회익   상상이 현실과 연결될 수 있는 그런 상상이 많아요. 그래야 우리가 새로운 앎으로 갈 수 있거든. 상상을 일단 먼저 하고 거기에 맞는 행위를 하다가 어떤 새로운 앎의 근거를 찾을 수 있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해온 여러 가지를 봐서 현실 가능성은 별로 없고 그저 상상으로 그칠 수밖에 없는 사례의 하나로 내가 사후세계를 짚었을 뿐이에요.

황승미   사후세계는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죠. 달나라에 가서 달의 지각 구조가 어떨까 상상해보고, 가서 파보고 하는 것과는 달리 사후세계는 가서 땅을 파볼 수는 없잖아요.

최우석   상상과 앎을 구분하는 것이…

장회익   구분을 해야 한다고 봐요. 정신의 활동을 다 앎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에요. 앎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근거가 있고 믿을만한 가능성을 지닌 것을 앎이라고 하지, 생각가능한 모든 것이 다 앎일 수는 없죠. 이런 의미는 돼요. 최박사가 지금 이런 상상을 했다, 그런 상상을 했다는 것을 내가 알았다, 그건 되지. 상상을 했다 하는 것도 하나의 팩트는 돼. 그 팩트에 대한 앎은 있을 수 있지만, 그 상상의 내용 자체가 반드시 앎이 된다는 얘기는 적합한 건 아니라는 거죠..

황승미   선생님, 제가 464쪽의 사례를 오해한 건 아니죠? 선생님께서는 사후세계를 사례로 들면서 앎의 대상이 몽상 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예시한 것이지, 상상에 초점이 맞춰진 것은 아니죠?

장회익   그렇지. 상상에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고, 상상 중에서 사후세계와 같은 그러한 상상은 앎과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는 얘기를 한 거지.

최우석   앎이라고 하는 것은 온생명 안의 복합질서 안에 참여자가 외부와 내부 사이의 동조기구로서 그리고 생존에 중요한 중핵으로서 쭉 해오다가 의식모드라고 하는 것이 나오면서 그런 앎의 활동이 더 고도화되고, 의식모드가 더 고차적이고 정교화되면서 생존 자체와 무관한 의식모드의 작용으로서 상상, 공상 이런 것들이 또 한편으로 나와서 우리의 세계 중의 또 하나를 이루게 되었다, 이렇게 볼 수 있나요?

장회익   (앎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들이 그런 상상을 하는 삶의 양식 중의 하나, 일부라는 것은 인정해야 될 거예요. 사후세계를 생각하는 것도 사람의 정신적인 활동 중의 하나지. 그런데 그런 활동을 한다, 그것이 정신활동이라는 것은 인정하는데 그것이 앎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앎과는 다르다고 얘기할 수 있겠죠.

10.2. 앎의 대상과 앎의 주체

[그림 12] 예측적 앎의 구도

최우석   지금까지 앎의 주체에 대해서 얘기를 했고 앎의 대상 얘기는 지금 안 다루고 있습니다. 양자역학에서 나온 얘기 중에 상태 층위와 사건 층위를 구분해야 한다, 이런 말씀이 있는데요. 우리가 모든 앎의 대상에 대해서 의식모드 혹은 서술모드가 대상에 직접 들어갈 수 없다, 사건을 통해서 들어오는 서술모드라고 하면 정보적인 연계만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앎의 대상에서 직접 상태가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사건 층위로부터 오는 걸 가지고 우리 내부에 외부를 모사한 지식 혹은 외부를 모사한 앎으로 쭉 유추를 해서 저쪽에서 오는 다른 정보로 검증을 하는 것만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물(物) 자체는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상태 층위로는 직접 들어갈 수 없고 사건 층위만 만날 수 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장회익   그렇지. 지금 대상과 변별체가 조우하면 사건을 확인할 수 있죠. 그런데 (처음) 사건이 있으면 이것은 이런 상태(처음 상태)에 해당한다 하는 것을 우리의 앎의 틀(그림 11, 예측적 앎의 구도) 속에 담아놓고 있는 거예요. 우리의 앎의 틀 속에서 처음 사건을 처음 상태로 해석할 수 있다 하는 것은 앎의 이론적 내용에 해당하는 거죠. 양자역학이 그 중의 하나예요.

이런 이론적인 틀을 만들어서 보는 거예요. 그런 경우에 양자역학이 만든 틀과 고전역학이 만든 틀은 서로 차이가 있죠. 고전역학에서는 위치와 운동량이라고 하는 것을 처음 사건으로 보고 바로 처음 상태에 집어넣었지만, 양자역학에서는 그걸 가지고 아, 이것은 이런 상태를 의미하고 처음 상태는 변화의 원리에 따라 나중 상태로 변하지만 나중 사건을 일으킬 어떤 경향, 성향이 있다, 이렇게 연결돼요.

이러한 내용(대상과 변별체의 조우 – 처음 사건 – 처음 상태 – 변화의 원리 – 나중 상태 – 나중 사건 – 대상과 변별체의 조우)은 앎의 이론적인 틀 속에 포함이 되는데, 틀 자체도 이미 우리의 앎의 활동에서 나온 거지.

최우석   그러면 [그림11]에서 변별체까지를 포함하는 것까지가 앎의 주체에 해당하는 건가요?

장회익   그렇지. 변별체가 경계를 얘기하는 거예요.

최우석   변별체는 대상에도 포함이 되나요?

장회익   대상과 직접 관계 되는 건 변별체 뿐이지. 변별체 아래쪽(사건)으로는 정보적으로 연결이 되고, 위쪽(대상)으로는 물리적으로 연결이 되죠. 변별체는 그 두 가지 역할을 하는 거예요. 대상에 대해서는 물리적인 상호작용의 일부이고, 아래 사건 쪽으로는 정보적인 연결 고리죠. 그 두 가지를 함께 하는 것이 변별체예요.

최우석   그런데 여기서 제가 알듯 말듯 한데요. 변별체가 앎의 주체에 포함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왜 중요한가요?

장회익   마치 눈이 없으면 세상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눈이 대단히 중요해. 눈이 주체의 일부로 있다는 것은 정보적인 연결을 가진 최전선이기 때문이에요.

최우석   만약 제가 눈이 굉장히 나빠서 안경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고 한다면 안경도 앎의 주체로서 저에게 포함이 되는 것인가요?

장회익   그렇지.

황승미   인식하는 몸 자체가 변별체 아닌가요?

장회익   우리 신체에 변별체가 많이 있죠. 감각기관들이 다 있지만, [그림 11]과 같은 앎의 구도는 그런 것들을 넘어서는 거예요. 실험장치, 이런 것들도 변별체예요. 실험장치에서부터 나까지는 정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실험장치가 인식 주체에 속해요. 인식 주체의 최전선에 실험장치의 감지장치까지 들어가는 거예요. 

황승미   그러면 만약에 미세먼지가 많아서 산이 잘 안보이면 미세먼지도 변별체가 되는 건가요?(웃음)

장회익   아… 미세먼지 때문에 못 본다 그러면 미세먼지도 인식에 어떤 기능을 좀 하겠지.

최우석   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고 느낀 것 중의 한 가지가, 생명 세계에서는 온생명 안에서 어떤 낱생명이 있으면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보생명이 되잖아요. 그것과 비슷한 구도로서 어떤 앎의 대상이 있을 때, 그 앎의 대상을 제외한 나머지 온생명이 그 앎의 주체가 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거든요 .

장회익   그렇지. 나머지 모든 것이 우리에게 정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정보적으로 연결된 모든 것은 앎의 주체죠. 심지어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도 집합적 앎의 주체가 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알면 그것을 다른 사람들한테 얘기해주잖아요. 그러면 정보만 가는 거예요. 물론 공기의 진동이 가야되지만 공기의 진동을 중시하는 건 아니지. 내가 얘기한 의미가 가는 것이 중요하지. 정보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으면 한 사람이 알면 다 알 수 있는 거예요. 집합적 앎의 주체죠. 특히 과학자가 안다고 할 때 그 주체가 뭐냐, 집합적 앎의 주체예요. 우리의 집합적 지성이 주체야.

그 지성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느냐 하는 것은, 대화를 통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방법이 있죠. 나 개인의 감각기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야. 나의 감각기관이 대표적이고 전형적인 변별체인 것은 맞죠. 내 안에서는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지만 내 몸을 떠나서도 모두 정보적으로 연결이 되고, 실험을 하면 실험장치까지 집합적 앎의 주체에 속하는 거예요.

대상을 제외한, 대상을 알기 위한 모든 것은 앎의 주체에 속해요. 나와 정보적으로 연결이 안 되는 어떤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대상과 주체 이외의 별개로서 그저 보면 돼요. 따로 노니까. 정보적으로도 연결이 안 되고 대상에도 속하지 않으면 그건 그냥 무시하면 되는 거예요. 그 외의 것은 그것이 뭐든 나와 정보적으로 연결이 되는 것이라면 집합적 앎의 주체, 예측적 앎의 구도에 속하는 거예요.

(대담 10-2 녹취 끝.)

대담 : 장회익, 최우석, 황승미
영상 편집 : 최우석
녹취, 글 편집 : 황승미
전체 제작 : 녹색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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