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회익의 자연철학이야기 10-1. 앎이란 무엇인가? (1)예측적 앎의 구도

이 자료는 녹색아카데미 유튜브 ‘자연철학이야기’에서 나눈 대담 10-1를 녹취, 정리한 것입니다. 대담은 책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의 이해를 돕기 위해 2020년에 제작되었습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이야기” 10-1편에서는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의 ’제9장. 앎이란 무엇인가’ 중 앎의 구도, 의식적 앎과 비의식적 앎, 양자역학의 해석 문제 등에 대해서 다룹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이야기 10-1. 앎이란 무엇인가? (1)예측적 앎의 구도

  1. 앎의 대상으로서의 앎
  2. 무엇이 앎의 주체가 될 수 있나?
  3. 앎의 구도
    3.1. 심학 제9도
    3.2. 역학모드
    3.3. 서술모드
    3.4. 역학/서술/의식모드와 앎
  4. 참여자로서의 낱생명과 지성(앎)의 출현
  5. 지적 활동의 주체적 양상
  6. 서술내용과 서술모드
  7. 기록물과 수행체
  8. 의식적 앎과 비의식적 앎 & 양자역학의 해석 문제
    8.1. 의식적 앎과 비의식적 앎
    8.2. 앎의 주체를 혼동하면서 양자역학의 해석에 혼란이 생긴다
  9. 가장 단순한 앎의 사례와 예측적 앎
    9.1. 나무에 달린 사과
    9.2. 예측적 앎을 위한 지식, 정보, 작동
    9.3. 예측적 앎 작동의 단위과정

1. 앎의 대상으로서의 앎

최우석   제일 어려운 “제9장. 앎이란 무엇인가”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제가 내용 소화를 잘 못해서 무슨 내용부터 여쭤보면서 얘기를 풀어나가야 할지 막막했는데요. 앎의 주체와 앎의 대상도 나누시고, 앎의 주체 안에서 모드도 나누셨습니다. 그래서 앎의 대상과 앎의 주체가 조우를 할 때 변별체를 경계로 구도가 형성되는 것 같기는 합니다.

일단은 이렇게 복잡하게 앎에 대해서 이해를 새롭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간절한 필요성은 무엇이었을지 궁금합니다. 가령 양자역학에서의 문제도 예를 들고 계신데,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그런 것들이 여러 군데에 있었나요?

장회익   원론적인 얘기를 하자면, 우리는 앎이란 것을 굉장히 중시하고 앎의 내용을 중시하는데, 그러면 도대체 앎이라고 하는 것 자체는 무엇인지 알고 말을 하느냐 하는 문제에서 걸릴 수가 있죠. 그래서 앎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의 앎의 대상으로 놓을 수가 있는 것이고, 그때의 앎은 무엇이겠느냐 하는 중요한 물음이 하나 있어요.

내 경우에 앎에 대한 물음이 구체적으로 떠오른 것은 양자역학의 해석 문제에 있어서예요. 양자역학이 뭐냐? 여기에 대해서 굉장히 의견이 분분해왔다는 것은 앞에서도 얘기했고 모두가 아는 사실이죠. 거기에서 기본적으로 앎이 뭔가를 정리 못 했기 때문에 그런 면이 있다 하는 것이 내 생각이고, 그래서 사실은 양자역학의 성격도 이해하기 위해서 같이 마련해본 내용이 9장이에요.

앞에서 양자역학을 다루기 전에 그 얘기를 했어야 오히려 맞겠지만, 그러면 내용 자체가 너무 방대해지기 때문에 뒤로 뺐어요. 앞에서는 양자역학에서 꼭 필요한 내용만 먼저 얘기하고 앎에 대한 것은 별도로 다뤄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앎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광범위하죠. 그래서 그 많은 앎을 어떻게 다 논의하느냐? 우리가 이 책에서 제일 중시했던 앎이 하나 있어요. ‘예측적 앎’, 미래를 어떻게 예측하는가 하는 것은 하나의 중요한 앎인데 구도는 굉장히 단순하지. 그 구도를 모형으로 그 앎을 중심으로 생각하자해서 그나마 그 쪽으로 상당히 규모를 축소했어요. 그렇더라도 우리가 물음을 제대로 던지려면 그 안에 상당히 여러 가지 복잡한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데, 그 정도를 여기서 다루어보자 해서 9장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어요.

내가 알기로는, 앞에서 다룬 내용들도 상당부분 그렇기는 하지만 특히 이 내용은 정말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나만의 독자적인 얘기일 거예요.(웃음) 내가 모든 논의를 다 훑어본 것은 아니지만 흔히 볼 수 없는 개념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비교적 단순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 내용을 어려워해. 그런데 사실 내가 볼 때는 어려운 내용이 아니거든. 사람들은 생소하면 어렵다고 해. 익숙하면 어렵지 않다고 하고. 그런 차이때문에 어렵다고 보는데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에요.

지금까지는 앎의 내용을 주로 다루었지요. 1장에서는 앎의 틀을 말했고, 2장에서는 고전역학을 다루었고, 그 다음에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등을 다루었는데, 1장에서 말한 앎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안의 내용이 문제였을 뿐이에요. 우리는 거의 대부분 앎의 내용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죠.

2. 무엇이 앎의 주체가 될 수 있나?

장회익 그런데 문제는 이 앎의 내용을 만들고 있는 앎의 주체가 뭐냐 하는 거예요. 무엇이 앎의 주체가 될 수 있느냐? 오늘 내가 화두를 하나 던져보면, 컴퓨터가 앎의 주체가 될 수 있느냐? 우리가 ‘안다’는 것은 일종의 동사죠. ‘나는 안다,’ ‘토끼가 안다’는 되는데, 그러면 ’돌멩이가 안다’? 이건 안 되겠죠. 그런데 ‘컴퓨터가 안다’ 이게 말이 되느냐 이거야?

최우석   요즘에는 될 거 같은데요?(웃음)

장회익   ‘컴퓨터가 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림 1] 무엇이 앎의 주체가 될 수 있나?

황승미   요즘 영화에 보면 많이 나오는데 ‘자기가 안다’고 혹은 아는 것처럼 만들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웃음)

장회익   그건 아는 것처럼 만드는 건데, 그게 ‘안다’는 것에 해당하는 얘기가 되느냐 하는 거예요. 이것을 지금 문제로 삼고 우리가 생각해봅시다. ‘컴퓨터가 안다’고 할 때 ‘안다’는 것은 무엇이고, ‘컴퓨터는 아는 게 아니다’고 할 때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 구체적으로 ‘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봐요.

황승미   8장에서 ‘나’ 얘기하실 때, 컴퓨터가 ‘나’가 될 수 있느냐라는 그 얘기와 상관이 있나요?

장회익   그 얘기와 관련을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어요. 그것과 관련을 짓는다면 어떻게 관련을 짓고, 아니라면 어떻게 안 짓는지 그것도 물론 같이 생각해봐야 되죠. 우리가 의식 주체냐 하는 문제… 의식 주체가 아닌 존재가 ‘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느냐? 우리 인간으로서는 그렇죠(의식 주체니까 ‘안다’고 할 수 있죠). 인간이 ‘안다’고 할 때에는 내가 의식했을 때 아는 거지, 의식하지 않은 것을 내가 안다고 말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것은 주체와 관계가 되는 거예요. 의식의 주체가 되느냐, 앎의 주체가 되느냐? 앎의 주체는 의식의 주체보다 낮은 거냐, 같은 거냐? 이런 문제들이 있어요. 그리고 의식의 주체도 물질로 되어 있지 않느냐, 그러면 물질로 되어 있는 것도 앎의 주체냐, 이런 얘기도 물을 수 있죠. 그래서 그런 것을 같이 생각하면서 진행을 할 필요가 있어요.

3. 앎의 구도

3.1. 심학 제9도

장회익   앎의 문제로 갔을 때는 앎의 내용과 앎의 주체, 그리고 이것들의 관계가 어떻게 맺어지는지 함께 봐야 돼요.

최우석   그 다음에 이 그림, 심학 제9도가 나오는데요.

[그림 2] 심학 제9도. 앎이란 무엇인가?

장회익   이 그림은 9장의 결론이에요. 대충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미리 염두에 두고 지나가는 게 좋기 때문에 결론을 먼저 보여주려고 이 자리에 넣었어요. 예측적 앎을 먼저 봅시다. 공이 여기 있는 걸 내가 봤어요(그림 2에서 왼쪽 위의 공), 그런데 5초 후에는 공이 어디로 가 있냐, 여기(오른쪽 공)에 가 있다 하는 것을 내가 처음에(5초 전에) 이미 생각할 수 있죠. 이것이 예측적 앎이지. 어디에서 어떤 속도로 움직이고 있고 어떤 힘을 받으면 어디로 가 있을 것이다 하는 것이 고전역학의 대표적인 예측적 앎이에요.

이것을 수행하는 앎의 주체에 대한 것이 이렇게 복잡하다는 거예요(그림 2). 우리는 그동안 처음 사건(왼쪽 전구)과 나중 사건(오른쪽 전구) 그리고 변화의 원리, 이 세 가지만 뽑아서 얘기해왔어요. 그런데 그것을 좀 더 구체화해보면 이 틀(그림 2) 안에 들어가는 거예요. 이 그림은 예측적 앎을 보여주는 더 포괄적인 그림이에요.

최우석   그러면 제1도부터 선생님께서 쭉 그려 오신 그림이 장현광선생의 구도에 맞췄다기보다는, 이렇게 보면 우리의 앎의 구조 자체가 그렇기 때문에 앎의 구체적인 내용물들도 그런 구조를 가진다는 말씀인가요?

장회익   그렇지. 우리는 양자역학까지도 포함해서 모든 앎을 [그림 2]와 같은 틀 안에서 본 거예요. 앎의 보편적인 틀이라는 얘기예요. 그런데 우리는 간단하게 하기 위해서 대상(왼쪽 공, 오른쪽 공), 처음 상태(왼쪽 전구)와 나중 상태(오른쪽 전구), 변화의 원리로 보는데, 여기 변별체라는 말을 중간에 한번씩 쓰고 있지.

양자역학에서 볼 때는 이 ‘변별체’가 상당히 중요하거든. 양자역학 이전에는 대상(공)이라고 하면 상태(전구)가 당연히 눈에 보이는 것처럼 생각을 했지만 사실은 대상과 변별체 사이의 만남, 접촉을 통해서 변별체에 뭔가가 찍혀야 의식모드(빨강색 화살표)에서 알 수 있어요. 대상만 가지고는 알 수가 없어. 그래서 우리가 양자역학 할 때 변별체를 명시적으로 얘기한 거예요.

그런데 사실 고전역학에서도 마찬가지야. 현재의 상태를 본다고 하는 것은 이미 변별체를 거친다는 얘기거든. 그래서 ‘상태’라는 것은 ‘사건’을 개념화시킨 거예요. 양자역학에서는 상태함수가 (사건을) 개념화시킨 결과이고 고전역학에서는 위치와 운동량이 상태예요. 고전역학에서는 변별체라는 중간 과정을 생각하지 않고 바로 처음 상태로 넘어가버렸는데, 사실 변별체 과정을 생략한 거죠. 양자역학에서는 이 과정(사건)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변별체 과정을 구체화하는 거예요.

3.2. 역학모드

장회익   그림 2의 심학 제9도에서 말하는 내용은, 왼쪽 대상에서 오른쪽 대상으로 되는 현상을 ‘처음 상태 – 변화의 원리 – 나중 상태’, 이 패턴으로 이해한다고 우리가 본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한 줄이 아니라 세 줄이나 된다는 거야. 색깔이 셋이죠. 파랑색은 역학모드예요. 현상을 파악하는 존재는 인식의 주체인데 주체는 몸을 가지고 있는 거야. 허공에 떠있는 주체가 아니에요. 영혼이 아는 게 아니라 몸이 아는 거지.

최우석   뭔가를 알 때 우리 몸 안에서 물리적인 변화도 일어난다는 의미인가요?

장회익   그렇지. 아무런 물리적인 변화 없이 알아지는 것은 없어요.

황승미   시신경이 작동하는 그런 것도 해당이 될까요?

장회익   그렇지. 그것이 역학모드예요. 물리법칙을 만족해요. 일단 대상을 봤고(변별체와 대상이 조우), 그 다음에 뇌에 뭔가 상태가 그려지죠. 뇌 속에서 뭔가 물리적인 활동이 일어나고 있어. 그런 물리적인 활동이 내 몸의 생리에 맞춰서 어떤 결론까지 나아가요. 역학모드에서는 물리법칙을 만족하지 않는 것은 없어요.

황승미   역학모드는 전체에서 다 작동을 하는 건가요?

장회익   그렇지. 내 몸 안에서 작동을 하지. 왼쪽 대상에서 오른쪽 대상으로 변화하는 과정도 물론 역학모드지만, 그것을 보기 위해서 내 몸 안에서 일어나는 또 하나의 역학모드가 있는 거야. 공은 저기서 날아가지만 그것을 아는 것은 내 몸에서 해내니까. 몸에서 해내는 과정 자체에 이미 물리적인 과정이 필수적으로 깔리는 거예요. 그것은 우리가 의식도 못하죠. 그 물리적인 과정을 따로 알기 위해서는 다른 물리학자가 현미경으로 내 몸을 또 연구해야 될 거예요. 그건 우리한테 지금 중요한 게 아니지만 그것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

3.3. 서술모드

장회익   그런데 역학모드만 있는 게 아니고, 여기서 제일 중심적인 것이 서술모드예요. 사건을 상태로 바꾸는 과정은 정보적인 과정이에요. 저기서 어떤 물리적인 사건이 발생했지만 인식 주체는 그것을 ‘발생했다고 하는 정보’로 받아요. 물리적으로 보기는 했지만 나는 정보로 받아서 아는 거죠.

‘정보’라는 말이 뒤에서도 많이 나오지만, 사건을 안 봤으면 내가 몰랐을 텐데 봤기 때문에 어떤 것이다 하는 내 앎의 한 부분에 점을 찍는 거죠. 이것은 정보 과정이에요. 물리 과정과는 달라. 정보 과정은 정보 채널에서 어떤 영향을 주는 거예요. Yes면 이리 가고 No면 저리 가는, 그런 채널에 연결이 돼요.

그런 서술모드가 있어요. 여기에 변화의 원리를 연결하면 나중 상태와 나중 사건이 나와요. 이런 서술모드를 이해하는 데 가장 적절한 사례가 있어요. 그게 바로 컴퓨터야. 컴퓨터는 물론 물리적인 것으로 구성이 되어 있고 물리적으로 작동을 하지만, 우리가 입력(input)을 하면 그것이 정보 프로세싱을 해서 결과(output)를 내는 거죠. 컴퓨터 내에서 일종의 서술 과정을 거치는 거예요. 그래서 서술모드를 통해서 답을 내는 대표적인 사례가 컴퓨터예요.

그런데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컴퓨터 칩에 의해서 나타나는 과정과 똑같지는 않지만 뉴런들의 활동도 기본적인 성격은 같은 거예요. 내 뇌에서 일어났든 컴퓨터를 통해서 보든 이건 다 서술모드예요. 서술모드가 없으면 이런 앎은 불가능해. 그러니까 역학모드만 가지고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돌덩어리를 갖다 놓으면 앎이라 할 수 없는 이유는 서술모드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최우석   그렇다면 서술모드는 물질의 바깥에 대한 얘기인가요, 안에 대한 얘기인가요?

장회익   물질로 구성된 정보 채널이 서술모드예요. 정보 채널은 물질로 구성될 수 밖에 없지. 물질을 떠나서는 안 돼요.

최우석   만약에 돌멩이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고 하면 무슨 뜻이다 라고 규정한다고 하면, 돌멩이의 배치는 그냥 물질의 배치이지만 그것이 의미를 가진다고 하는 정보적인 규정은 ‘나’ 내지는 의식 주체가 있어야 되잖아요?

장회익   그렇지. 의식 주체가 자기 안에 그런 규정을 설정해 놓는 거죠. 첫째 돌멩이가 움직였다는 건 뭘 의미한다, 두 번째 돌멩이가 움직였으면 뭘 의미한다 하는 규약이 이미 되어 있는 거야. 그 규약에 맞춰서 활동을 하는 것, 이것이 서술모드예요.

최우석   그러면 서술모드는 서술모드에 해당하는 물질적인 것도 있으되, 물질 안에서 거기에 무슨 의미 부여라고 할까, 여하튼 물질 안에서 양쪽이 다 있어야 서술모드가 되는 건가요?

장회익   여기 책이 있는데, 까만 색 하얀 색 점들이 찍혀 있을 뿐이지. 그렇지만 나의 뇌와 이 책을 만든 사람 사이에, 이렇게 돼있을 때는 뭘 의미한다는 규약이 있어서 내가 읽으면 뭔가 의미 있는 활동이 일어나죠. 이것이 서술모드라고. 가장 대표적인 예가 글씨지.

나한테 편지가 왔다, 편지가 온다는 것은 물질이 오는 거야. 종이 조각 하나가 오는 거지만 거기에 찍혀 있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이 가지고 있던 의미가 나한테 전달되는 거죠. 이것이 서술모드예요.

황승미   그러면 서술모드가 되려면 사회화가 돼 있어야 할 것 같고, 바탕관념도 있어야 되는 건가요?

장회익   그렇지. 그 바탕개념이 컴퓨터에서는 최소한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컴퓨터에 소프트웨어도 깔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서술모드가 되는 바탕을 깔고, 뭐가 들어오면 거기에 맞춰서 작동을 하는 거죠. 우리 안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일인데, 컴퓨터라는 사례가 없었더라면 그려보기가 어려웠을 거예요.

황승미   컴퓨터의 경우라고 한다면 역학모드는 뭐고 서술모드는 무엇인가요?

장회익   하드웨어가 역학모드이고, 소프트웨어가 서술모드지. 컴퓨터 안에 있는 칩이 하는 모든 역할로서의 작용은 다 서술모드이고, 실리콘 분자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다 하는 것이 다 역학모드지.

3.4. 역학/서술/의식모드와 앎

황승미   그러면 컴퓨터 운영체제(operating system)까지 가는 건 의식모드인가요?

장회익   의식모드는 그 다음 차원이야. 내가 안다는 것, 내가 봤더니 이렇더라 하고 내가 느끼는 것이 의식모드죠. 모든 것에 다 의식모드가 있는 게 아니야. 컴퓨터에는 의식모드가 없을 수 있지. 실제로는 없다고 보는 게 옳지. 컴퓨터 스스로 내가 이걸 알았다하고 얘기하는 의식이 실제로 컴퓨터 안에서 작동 안 한다고 보는 게 옳아요.

그러니까 컴퓨터는 서술모드까지만 하는 거야. 그런데 서술모드가 앎의 핵심이에요. 그러나 사람의 경우에는 의식이 되지 않으면… 예를 들어서 모기가 나를 물면 탁 치잖아요. 이것은 사실 거의 중간 프로세스는 의식이 되지 않지만 이미 서술모드 때문에 치는 거지. 결과적으로 사후적으로는 의식도 하게 되지만, 의식하지 않고 하는 경우가 많죠.

예를 들어서 몽유병 환자들의 행위는 서술모드는 있는데 의식모드는 없는 경우예요. 그런데 우리의 내장 기능 모두가 다 서술모드야. 내장의 활동, 혈액의 활동 이런 것들을 나는 의식하지 않죠. 그런데 이건 굉장히 중요한 앎이거든.

황승미   입출력이 되는 건 다 서술모드라고 보는 건가요?

장회익   그렇지. 입출력이 되는 프로세싱은 단지 역학모드만이 아니고, 그 구조에 의해서 구조적인 연관에 의해서 일어나는 정보 채널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정보 채널에 따라 일어나는 것, 그것이 서술모드예요.

그런데 사람이 안다고 할 때는 의식모드까지 들어가요. 그래서 그림 2에서 세 줄이 되는 거예요. 컴퓨터는 역학모드와 서술모드까지 있죠. 서술모드가 빠지면 앎이라고 할 수 없어요. 서술모드까지 있으면 기능적인 앎은 되지. 의식모드까지 있으면 의식적인 앎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의 경우에는 세 줄 다 있는 경우를 보편적으로 앎이라고 흔히 얘기하지만, 그러나 실제로 의식모드가 수반되는 앎은 우리 몸 안에 있는 활동 중에서도 극소수예요. 거의 대부분은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중에서도 앎이 다 이루어지고 있는 거예요. 우리 생리활동이 다 일종의 앎의 활동이거든. 우리 의식 없이 내 몸을 살아가게 유지시켜 주는 것, 이것이 앎의 활동이에요. 서술모드가 그렇게 하는 거지. 그런데 우리가 의식하는 부분은 그 중에서 상당히 일부라는 것이고, 우리가 상식적인 앎이라고 말할 때는 의식모드까지 있을 때를 얘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최우석   그러면 사람은 아예 없고 어떤 회로가 하나 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햇빛을 감지하는 센서와 전등이 있고 스위치가 있어서 센서에 햇빛이 감지되면 스위치가 꺼져서 불이 꺼지게 만들고, 햇빛이 감지되지 않으면 스위치가 켜져서 불이 들어오게 만드는 회로라고 한다면 역학모드는 당연히 있는 거죠. 그런데 사람이 이걸 보지도 않고 아무 일도 없는데 이 회로 혼자서 해 뜨면 꺼지고 해지면 켜지고 하는 일이 계속 반복적으로 일어난다고 하면 여기에도 서술모드는 있다는 말씀인 거죠?

장회익   있는 거지. 아주 초보적인 서술모드죠. 내가 𝜶, 𝜷, 𝚪(감마)로 얘기했는데, 해가 들어오는 것을 𝜶라고 하고 𝜶를 받아서 반응 𝜷가 일어날 경우 𝜶를 분별해서 하는 기능 𝜷, 이것이 아주 초보적인 앎이에요.

최우석   그러면 RNA 복제 같은 경우도 서술모드가 있는 앎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장회익   그것은 오히려 역학모드만으로도 이루어지죠. 그런데 이 시퀀싱(염기 배열)이 (유전)정보를 담고 있고, 시퀀싱에 뭐가 왔을 때 이 시퀀싱이 판단을 해서 행동을 지시(예: 특정한 단백질 생성) 한다면 그것은 앎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최소한의 앎이죠.

그런데 시퀀싱이 왜 필요하냐? 그것이 분별을 가능하게 하는 정보 채널이라는 거예요. 그 정보 채널에 의해서 기능을 하는 거죠. 랜덤한 것은 아니지만 정보 패턴인데,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서 달리 반응할 수 있는 기능이 담길 때 이것이 서술모드예요.

최우석   이때 정보라고 하면, 뭔가가 분별이 되고 분별한 것에 대해서 거기에 대응하는 반응이라든가 뭔가가 짝이 지어진다고 하면…

장회익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짝이 만들어질 수도 있죠. 예를 들어 DNA에서 RNA가 만들어져서 나오고 그 다음에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할 때 그 짝이 있을텐데, 그 짝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특별히 의미 있는 과정은 아니에요. 물론 그것도 필요할 수는 있지만, 문제는 그것이 있음으로써 어떤 분별 능력을 가져서 상황에 따라 다른 결과를 유도하는 체계가 형성될 때에 그것을 우리가 정보 기록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런 것을 가지고 활동을 할 때 서술모드라고 하고, 그것이 앎의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 되는 거예요.

장회익   앎의 범위가 굉장히 커지는 것 같습니다.

장회익   커지는 것도 되고, 좁혀지기도 하지. 핵심이 어디냐 할 때는 바로 그런 서술모드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를 보면 되니까. 거기서부터 우리가 그걸 더 확대해서 여러 가지 모든 앎을 볼 수 있죠. 알고 보면 가장 핵심은 서술모드에 있다는 거지. input에 따라 분별해서 다른 결과 output으로 연결시켜주는 것, 이것을 정보 채널, 알고리즘, 소프트웨어 등 여러 가지로 부르는데 그것이 다 앎의 서술모드에 해당하는 거예요.

최우석   모드라는 말을 쓰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장회익   다 하나의 활동인데, 그 활동 내에서 서로 다른 측면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물리적인 실체가 다 하는 것이고 당연히 역학적인 법칙을 따르는데, 같이 있는 거지만 구별해내서 보기 위해서 그렇게 나눈 거예요. 역학적인 측면을 역학모드라고 불렀고, 서술의 기능을 하는 것 그것도 물리적인 분자덩어리들이지만 서술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서 서술모드라고 했고, 그 다음에 의식은 그것들이(물리적인 분자덩어리들이) ‘이것이 나다’라고 느끼는 그 기능이 발현될 때에는 의식모드라고 했어요. 하나지만 셋이 같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림 2]에서 세 줄로 나타낸 거예요.

최우석   일원이측면과는 또 다른 차원인가요?

장회익   일원이측면에서는 역학모드와 서술모드를 한 측면으로 봤고, 또 다른 한 측면은 의식모드로 본 거죠. 의식모드와 역학/서술모드를 구분하는 거예요. 역학모드와 서술모드는 물질적인 측면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러나 앎의 경우에 있어서 역학모드와 서술모드 둘로 또 나누어진다는 것이 흥미로운 거죠.

최우석   물질에서 다시 또 정보적인 차원이 또 한 측면으로 있을 수 있다는 말씀이네요.

장회익   우리가 생명이라고 할 때는 역학모드와 서술모드까지만 본 거예요. 그 안에서 ‘나’다 하고 나온 것이 의식모드예요. 생명이 아닌 것에서는 역학모드 외에 별로 다른 게 없어. 생명 정도 되는 것, 그러한 어떤 이차질서 이상에서 서술모드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야 생존이 가능해요. 그 다음에 의식까지 할 때 사람으로서 ‘삶’이 되는 거지.

다시 말해서 생명 이전에 우주에 대해서 얘기할 때는 역학모드였고, 그 다음에 생명에서 서술모드가 나타나고, 인간에서 의식모드가 나타나는 거죠. 그런데 우리 인간의 경우는 특히 의식모드를 포함하는 것을 앎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우리가 앞에서 한 얘기와 관련 짓고 있는 거예요.

4. 참여자로서의 낱생명과 지성(앎)의 출현

장회익   생명과 연관이 있다는 면에서 낱생명과의 관계를 조금 더 얘기를 해보면, 낱생명이라는 것은 복합질서(이차질서, 즉 온생명) 안에 있는 하나의 참여자거든(그림 3).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 안에 단순히 붕 떠서 들어있다는 얘기가 아니야. 그 안에 굉장히 정교한 연결을 가지고 있다는 거지. 온생명 안에서 낱생명이 있다는 것은 물에 달걀이 떠 있듯이 붕 떠있는 게 아니라 모든 것들과 굉장한 연결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참여자’라는 표현을 썼어요. 온생명 내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을 주고받지 않으면 낱생명은 생존이 안 돼. 굉장히 중요한 연결을 주고받아야 돼요. 오늘 같이 점심 같이 먹었는데, 점심 같이 먹는다는 게 얼마나 복잡한 과정으로 연결이 되는 거냐고.(웃음) 그런 연결 없이는 안 돼요.

[그림 3] 참여자로서의 낱생명

장회익   그래서 참여한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연관을 가지는데, 그것의 관건이 뭐냐? 자신 외 나머지들과 성공적으로 관계를 맺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음식점을 찾아갈 수 있어야하고 앉아서 원하는 것을 먹을 수가 있어야 돼요. 이런 일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지만 굉장한 일이에요. 돌덩어리한테 하라고 해봐요. 할 수가 없죠. 

그러니까 여타 참여자들과 성공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낱생명의 생존의 관건이에요. 그것이 바로 온생명이 돼야 한다는 것의 또 다른 측면은, 낱생명의 입장에서 보면 온생명과 굉장히 정교하게 관계맺음을 한다는 거예요. 이 관계맺음을 어떻게 가지느냐 할 때 앎이 필요해요.

관계맺음은 내부와 외부, 낱생명과 보생명의 관계인데(그림 4) 외부의 상황이 내부에 반영되어 있어야 돼요. 우리 세계가 어떻다는 것에 대해서 내 뇌에 있어야지, 전혀 모르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그래서 그러한 ‘내적 반영’을 지식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림 4] 지성(앎)의 출현

장회익   그런데, 외적 상황이 일정하다면 내부만으로 충분한데 외적 상황은 계속 바뀌어요. 모든 것이 다 유동적이고 바뀌는 거야. 그렇다면 현재 내가 점심을 먹을 수 있는 데가 어디냐, 현재 상황에 대해서 우리가 정보(외적 상황)를 알아야 찾아가는 거예요(내적 반영). 내적 반영 중에서 가변적인 것은 정보가 되고, 지식은 상당히 안정적인 거지. 지식은 좀 길게 유효한 것들이고 정보는 순간순간 달라질 수 있는 거죠. 정보와 지식 두 가지를 같이 봐야 되거든. 안 달라지는 혹은 덜 달라지는 중요한 부분이 있고 매번 달라지는 부분이 있는데, 이 두 가지에 대한 앎이 있는 거예요. 전자를 지식, 후자를 정보라고 했어요.

그리고 우리가 앞에서 본 역학에서는 지식이 특성, 정보는 상태예요. 같은 대상에 대해서도 상당히 오래 지속되는 것이 특성이고, 상태는 그때그때 달라지는 것이죠. 그 두 가지 종류, 사실 우리는 특성과 상태라고 했지만, 좀 더 일반화시키면 일반적인 지식과 정보의 차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정보라는 말은 다른 의미로도 쓰이지만, 여기서는 대략 이런 의미라고 할 수 있죠.

장회익   외부에 대한 명료한 이해가 내부에 있어야 내부가 외적 상황에 맞춰서 그 외부와의 관계를 능동적으로 맺는 거예요. 능동적으로 관계를 못 맺으면 내부는 실제로 거의 생존이 안 돼요. 그래서 ‘내부와 외부 사이의 동조기구’가 필요한데 그것이 ‘앎’이에요. 앎이라고 하는 것이 생명의 본질적인 한 부분이지.

황승미   생명이 유지되는 데 앎이 필요한 건가요? 생명 자체가 앎인가요?

장회익   생명은 그 자체를 우리가 앞에서 따로 얘기했어요. 그 중에서 앎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특히 한 개체로서 가져야 될 앎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보생명과 관계를 맺어야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온생명의 나머지 부분과 관계를 맺어야 되기 때문에 온생명 전체에 대한 뭔가의 이해가 내 안에 들어있어야 한다는 것, 그게 지식이에요. 그런데 가변적인 상황이 있어요. 모든 상황이 늘 변하는데 그것을 다 알고 있을 수 없으니까 현재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 가변적인 부분을 계속 받아들이는데 그것이 정보죠. 그 지식과 정보를 활용해서 거기에 맞는 행위를 내가 해야 돼요. 음식을 먹으려면 입을 벌려야 하는데, 입을 못 벌리면 소용이 없는 거야. 그 모든 것이 다 이런 관계맺음에 해당한다는 거예요.

최우석   고차적으로 가기 전에 단순한 질문을 드려보면, 이런 앎에서 가장 원초적인 것은 해가 있으면 그쪽으로 잎을 돌리는 반응 같은 것들이 있을 텐데요. 이런 반응을 지식같이 고차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구조화된 혹은 패턴화 된 반응이 작동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지면 그것부터 앎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장회익   그렇지. 앎이, 식물 체내에 그러한 지식이 들어있다고 보면 돼요. 그래서 해가 비치면 거기에 맞춰서 반응하도록 되어 있는 거죠.

최우석   그러면 외부로부터 오는 자극을 감지해서 정보로서 받아들이고 거기에 구조화되고 패턴화 된 반응, 그러니까 A정보가 들어오면 𝜶를, B 정보가 들어오면 𝜷를, 이런 식으로 반응할 때가 가장 원초적인 앎이 각인되어 있다고 해야 할까요?

장회익   그렇지.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거야. 모든 복잡한 앎도 그 구조에서부터 정교화 시키는 거예요.

황승미   생명 말고 생태계 수준으로 올라가면 어떻게 되나요? 생명체가 아닌 물질들도 서로 붙었다 떨어졌다 하면서 반응을 하고, 낱생명 안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데 그런 과정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장회익   그런 것들도 서술모드지. 온생명 내에서 일어나는 온생명의 생리예요. 온생명이 그렇게 구조화되어 있는 거지. 그 구조에 따라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황승미   그러면 그건 생태계 차원의 서술모드라고 해야 할까요?

장회익   그렇지.

최우석   좀 구분을 해보기 위해서 여쭤보자면, 화학반응은 서술모드는 아닌 건가요?

장회익   화학반응 자체는 역학모드지. 생명체 내에서 구조화된 화학반응, 사이클이 되면 이미 그것은 서술모드로서 기능을 하는 거예요. 반응 자체는 역학모드지만.

최우석   그런데 선생님께서 이런 설명을 책에는 안 쓰신 것 같은데요. ‘동조 기구’라는 말은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5. 지적 활동의 주체적 양상

[그림 5] 지적 활동의 주체적 양상

장회익   이제 지적 활동의 주체적 양상을 봅시다. 주체냐 아니냐? 주체가 ‘나다’하고 느끼는 것이 중요해요. 지금까지는 ‘나’라고 느끼는 것과 무관하게 얘기했는데, ‘나’라고 느낄 때가 주체예요. “내가 그 안에 있다”는 거예요. “Cogito ergo sum,” 생각한다 그래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이죠. 생각을 존재에 앞세운 이유는 주체로서 자기를 먼저 파악을 한다는 거예요.

주체적 양상은 주체가 된 자만이 안다고 밖에 얘기할 수 없어요. 그게 주체의 성격이지. 우리가 8장에서 논의했던 내용이에요. 바로 그런 주체가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거예요. 그것이 앎의 본질은 아니야. 앎은 우리가 안다고 할 때는 주체로서 아는 것을 칭하는 게 상식이지만, 아까 얘기했듯이 컴퓨터라든가 식물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우리처럼 의식해서 하느냐? 그런 의식과는 무관하게 활동하는 거예요.

우리가 거기서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서술모드까지는 다 앎이라고 인정하지만 의식모드는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어요. 인간은 나나 남이나 비슷하게 서로 이해를 하고 있으니까 인간은 당연히 의식모드까지 포함하는 세 개의 모드가 있는 거예요. 그러나 보편적인 앎은 서술모드까지만 가면 이미 앎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6. 서술내용과 서술모드

[그림 6] 서술내용과 서술모드

장회익   이제 서술내용과 서술모드를 봅시다. 변별 구조 𝚪𝜶𝜷가 있으면 외부 정보 𝜶가 왔을 때 𝜷로 가는 거죠. 변별구조 𝚪가 있기 때문에 변별을 할 수 있는 거예요. 𝜶와 𝜷를 연결하는 𝚪(감마)를 서술내용이라고 해요.

최우석   정보부터 변별구조와 반응까지를 다 포함하는 것이 서술모드인가요?

장회익   그렇게 봐도 되지. 변별구조가 있음으로써 𝜶가 왔을 때 𝜷로 간다는 것이 핵심이에요. 이런 과정을 역학모드와 서술모드를 나누어 볼 수 있다는 얘기는 앞에서 이미 설명했죠. 물리적인 법칙을 따르는 과정이기 때문에 당연히 역학모드가 있지만, 그러나 𝚪𝜶𝜷와 같은 어떤 조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서술모드가 돼요. 조직을 이루지 않으면 역학모드 이상으로 갈 수가 없죠.(그림 7)

최우석   ‘조직상의 변별구조’(그림 7)는 무슨 의미인가요?

장회익   “앎의 주체가 앎을 가진다는 것, 곧 인식적 활동을 하게 된다는 것은 이에 해당하는 조직상의 변별구조가 존재함으로써, 그 앎의 내용을 이 변별구조가 물리적으로 대행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그림 7). 변별구조 𝚪가 있어야 서술모드가 된다는 거예요. 구조는 물리적인 법칙을 따를 뿐인데, 결과적으로는 그런 변별 작용을 한다는 거죠.

[그림 7] 물리적 실체로서의 앎의 주체

최우석   그러면 이 변별구조에는 외부 정보 𝜶라는 것이 올 때 𝜷 반응을 한다고 하면, 반드시 센싱(sensing)하는 것이 이 구조 안에 포함이 되어야 하나요?

장회익   그렇지. 그것이 변별체라는 거예요. 변별체가 꼭 필요한 거지.

최우석   그렇다면 변별체를 센서라고 할 수 있는 건가요?

장회익   그렇지. 우리 감각기관이 다 그렇죠. 물리적인 정보이기 때문에 물리적인 변별을 할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최우석   예를 들어서 손에 뭔가가 부딪혔을 때 부딪히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과 여기에 뭔가 부딪히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처리하는 것은 또 다르잖아요? 그러면 내면 없이는 센싱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장회익   센서, 변별체부터 전체가 정보적인 연결을 가지고 있는 거지. 그걸 정보적인 연결이라고 해요. 끊기면 소용없지. 적어도 정보적으로는 연결이 돼야 돼. 빛으로 연결이 돼도 되는 거예요. 빛이라는 것도 정보로 오니까.

황승미   몽유병 환자나 고통을 인식 못 하는 병에 걸린 사람 같은 경우는 역학모드와 서술모드까지는 되는데 의식모드는 안 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장회익   그렇지. 병원에서 수술할 때 마취가 바로 의식모드를 단절시킨 거예요. 몸이 다 기능을 하지만 의식만 못 하는 상태죠.

황승미   이해됐습니다! 확 ‘의식’ 됐어요.(웃음)

장회익   수술할 때 의식을 하면 괴로우니까 의식모드를 차단시키는 거죠.

7. 기록물과 수행

최우석   그런 정보적인 것의 프로세싱을 할 때 기록물과 수행체로 나뉜다고 말씀을 하셨어요.

장회익   어떤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이 있고, 그 다음에 판단이 섰으면 뭔가 활동을 하는 것이 수행체이고,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은 대체로 기록물의 형태로 있는 거지. 두뇌 속의 메모리, 컴퓨터 속에 들어 있는 메모리 이런 것들 안에 기록이 되어 있어요. 그건 단순히 기록인데 거기를 지나가면서 뭔가를 하게 되는 거죠. 뭔가를 할 수 있는 게 수행체죠. 사람의 몸속에서는 DNA가 기록물이라면 그걸 받아들여서 활동을 하는 단백질이 수행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림 8] 기록물과 수행체

장회익   그 둘이 항상 같이 있고 붙어 있지만 우리가 개념적으로 분리해서 이해할 수 있지. 대개 기록물은 큰 변화가 없어요. 기록물도 갱신해야 될 필요가 있을 수 있죠. 해보니까 안 맞고 자꾸 실패한다면 기록이 잘못된 건가 해서 고칠 수가 있어요. 이런 것을 ‘학습’이라고 해요.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기록에 뭘 덧붙여서 그 기록을 더 나은 것으로 갱신하는 거죠. 우리가 알아나간다고 한다면, 기록물을 갱신시키는 것을 두고 좁은 의미의 앎이라고 할 수 있어요.

최우석   그러면 이때 기록의 형태는 이런 것도 될 수 있을까요? 단백질의 경우에 3차원적인 구조 때문에 어떤 특정한 것과 붙는다든가 떨어진다든가 하면서 그 구조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들었는데요. RNA나 DNA의 배열에서부터 모양새, 그 모양새가 어떤 기능을 한다고 하면 그런 모양새도 기록이 될 수 있을까요?

장회익   그런데 거기서 기록이라고 하는 것은 DNA, RNA 수준이고, 그런 단백질 형태를 가진 것은 이미 수행체의 구체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는 거지. 수행체가 그런 모양을 가짐으로써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거죠. 그런 모양이 되면 활동을 하더라도 거의 자동적으로 일정한 수행이 되는 거니까.

8. 의식적 앎과 비의식적 앎 & 양자역학의 해석 문제

8.1. 의식적 앎과 비의식적 앎

[그림 9] 의식적 앎과 비의식적 앎

장회익   앎의 주체는 역학모드와 서술모드 이외에 ‘의식모드’에 놓일 수도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앎은 ‘의식모드’에 해당한다 하는 것을 앞에서 얘기했죠.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 우리의 앎은 이미 ‘비의식’(무의식)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고, 극히 일부만이 의식모드 안에 통합되어 있다”(그림 9), 그러니까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비의식적 앎이지. 의식하지 않으면서 서술모드가 작동하고 있을 때를 말해요. 특히 우리가 두뇌와 직접 관계가 될 때, 좁은 의미의 의식과 관계가 될 때에는 무의식이라는 말을 많이 써요.

최우석   그러면 ‘나’가 생기지 않아도 앎은 있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앎이라고 하는 게 주체의 출현에 꼭 의존하는 것은 아니고…

장회익   앎이 의식 주체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지. 서술모드가 있어야 당연히 의식 주체가 되는 거지만. 의식 차원까지 가는 것은 사실은 극히 특별한 것이라고 봐야 돼요.

8.2. 앎의 주체를 혼동하면서 양자역학의 해석에 혼란이 생긴다

최우석   좀 논외의 질문인데요. ‘나’를 얘기할 때 주체를 의식 주체, 감각 주체 이런 식으로 무엇의 주체가 되는가에 따라서 여러 가지 층위를 나누어볼 수 있을까요?

장회익   층위라기보다는, 크게 봐서 ‘나’냐 아니냐를 느끼는 주체를 의식 주체라고 봐요. 그리고 ‘인식 주체’라는 말을 나는 써요. 인식 주체는 앎의 주체다 이거지. 인식 주체는 의식을 하지 않는 것도 인식 주체가 될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컴퓨터는 인식 주체가 되는 거예요.

최우석   나를 나로서 의식하는 주체가 더 고도화된 앎의 주체이고, 인식 주체는 나를 나로 의식하지 못해도 앎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장회익   그렇지. 그래서 양자역학에서 한 가지 큰 해석상의 혼란을 겪고 있는 것도 인식 주체와 의식 주체를 혼동하고 있어서 생기는 문제예요. 변별자는 인식 주체의 한 부분이고, 그래서 변별자와 관계를 맺으면 상태가 바뀌는 거거든. 그러니까 인식 주체와 접했을 때 일어나는 일인데, 그것을 의식 주체와 접촉해서 그렇다고 해석해버리면 내가 의식 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서 저것이 달라진다, 이런 이상한 해석을 하게 되는 거예요.

인식 주체와 의식 주체를 분명히 해야 돼요. 서술모드까지가 인식 주체에 해당하고, 그 다음에 의식모드까지 가면 의식 주체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서술모드와 변별체가 관계하는 것이지 의식 주체와는 관계가 전혀 없어요. 이걸 혼동해버리면서 많은 통속적인 양자역학자들이 우리가 어떻게 의식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하는 말을 함부로 쓰고 있어요. 그것을 조심해야 돼요.

최우석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네요.

9. 가장 단순한 앎의 사례와 예측적 앎

9.1. 나무에 달린 사과

장회익   그림 10은 가장 대표적인, 일상적인 단순한 앎을 우리가 지금까지 해본 구도에 따라서 정리해본 거예요. 지금 나무에 사과가 달려있는 것을 우리가 보고, 사과에 대해서 어떤 예측적 앎을 가지고 적용한다고 할 때 어떤 과정을 거치느냐?

[그림 10] 나무에 달려있는 사과를 의식하는 과정

장회익   (1), (2) : 제일 먼저 대상으로부터 정보를 우선 받아요. 사과나무에 사과가 달려있구나 먼저 아는 거지. 이것은 대상으로서의 정보를 받는데 여기서는 아, 저게 사과라는 것이다하고 아는 것이 첫째야. 사과라고 하는 특성이 우리의 앎의 틀 속에 이미 박혀 있어요. 대상이 무엇이다 하는 것, 대상의 정체, 그 특성을 확인하는 것이 첫째죠. 그런데 이러한 판정기준(지식)이 이미 나한테 각인이 되어 있어야지. 그 지식이 없으면 사과를 봐도 사과로 판정할 수가 없죠.

(3) : 그 다음에는 상태를 확인하는 거예요. 새파란 걸 보니까 아직 안 익었구나, 아직 설익었다 하는 상태. 같은 사과지만 여러 단계의 상태가 있잖아요. 현재는 설익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에요.

(4) : 그 다음에는 이제 추론하는 거지. 아, 저렇게 되면 상태 변화의 법칙에 의해서 앞으로 두 달 후에는 익겠다, 보름 후에는 익겠다 하는 판정을 내리는 거예요. 상태 변화의 법칙에 따라서 미래 상태를 추론하는 거죠. 상태 변화 원리가 나한테 각인되어 있어서 작동을 하는 거예요.

(5) : 그 다음, 보름 후에 가보니 정말 사과가 익었구나, 내 예상이 맞았구나 틀렸구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먹어보고 맛으로 확인할 수도 있죠.

9.2. 예측적 앎을 위한 지식, 정보, 작동

[그림 11] 예측적 앎을 위한 지식과 정보

장회익   이러한 단순한 과정이 다 같은 패턴의 앎에 속한다는 거예요. 이것을 일반화해볼 수가 있어요.(그림 11) 지식과 정보는 앞에서 얘기했죠. 특성에 관한 것은 지식, 상태에 관한 것은 정보라고 했어요. 지식 1, 2, 3 그리고 정보 1, 2, 3 각각 세 가지로 나누어봤어요.

지식 1은 대상의 특성에 관한 것, 이것은 사과다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거예요. 지식 2는 대상의 상태에 관한 것, 이런 혹은 저런 상태에 있을 수 있다 하는 거예요. 어느 상태에 있다는 게 아니라 가능한 상태들이 뭐다 하는 것을 말해요. 지식 3은 상태 변화의 경향, 상태는 어떻게 변한다, 상태 변화의 법칙에 대한 거예요. 이 세 가지가 각각 다른 지식이에요. 이러한 세 가지 지식을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어야 예측적 앎을 가지기 위해서 활용을 할 수가 있어요.

그때 더 필요한 것이 정보예요. 지식만 가지고는 안 되고, 세 가지 정보가 더 들어와야 돼요. 첫째는 대상의 특성을 지정할 수 있는 정보, ‘아, 저것은 사과다’하는 것을 얘기해줄 수 있는 정보가 와야 돼요. 둘째, 처음 상태 즉 ‘현재 저 사과는 안 익었다’하는 것에 대한 정보가 와야지. 그래야 설익은 사과가 있다 하는 것을 알 수 있죠. 셋째는 검증해서 다시 얻는 정보. 내가 보름 후에 다시 본다거나 맛을 보고 익었구나 안 익었구나하는 것을 아는, 사후에 확인하는 정보가 또 필요해요.

이러한 지식과 정보가 유기적으로 작동을 해서 예측적 앎을 만드는 거죠. 우리가 봤던 모든 아주 심오한 이론들이나 단순히 사과를 보는 것이나 기본 구조는 다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앎을 이해한다는 것은 모든 앎에 공통된 요소를 찾아서 특성을 살피는 것, 그것이 앎에 대한 앎이에요.

9.3. 예측적 앎 작동의 단위과정

[그림 12] 예측적 앎 작동의 단위과정

장회익   [그림 12]은 예측적 앎이 작동하는 단위과정이에요. 앎의 각각의 스텝이 어떻게 가는지 보여주는 거예요. 정보1이 들어와서 지식1을 작동시켜 대상의 특성이 지정되고, 정보2가 들어와서 지식2를 작동시켜 상태1이 지정이 되고, 지식3을 활용함으로써 상태1이 어떻게 될지를 산출해 나중 상태2가 결정이 돼요. 그 다음에 나중 상태2를 보고 어떻게 대응하니까 어떻더라 하는 세 번째 정보3이 나오는 거죠. 이렇게 함으로써 내가 생각했던 것이 맞았나 안 맞았나 확인해보는 과정까지가 하나의 단위과정이에요.

정보3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맞으면 내 지식이 쓸 만하다, 안 맞으면 왜 안 맞았나, 무엇을 내가 잘못했나 생각해보고 다시 수정해서 또 다시 하는 학습의 효과를 가지고 있어요. 하나의 단위과정을 통해서 학습의 소재가 나오는 거죠.

[그림 13] 전형적 앎의 몇 가지 사례

장회익   그래서 우리가 항상 쓰는 앎에 대한 사례를 더 들어봅시다. 사과를 대상으로 하는 사례는 너무 단순하니까. 조금 더 고차적인 앎으로 의사가 가지고 있는 앎이 있어요. 환자를 대상으로 적용하는 앎. 의사는 환자가 오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 사람의 특성을 먼저 봐요. 그 다음에는 현재 상태가 어떤 병적인 상황에 있는지, 이대로 두면 어떻게 진행이 되겠나 보겠죠. 진행되는지 예측만 하고 마는 의사는 별로 없지. 그렇게 안 되려면 현재 상황에서 무엇을 바꿔야 병을 치료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 의사한테도 환자한테도 가장 중요한 일이죠.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여기에 +𝜶를 하면 상황이 저렇게 바뀌어서 치료가 된다, 이것이 의학, 환자를 대상으로 적용하는 앎이에요. 최소한 그 틀은 가지고 있어야 하죠.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치료할 수가 있지. 또 상황이 처음 상태가 다르면 또 달리 간다 하는 것을 알아야 되죠.

경제 상태도 마찬가지이에요. 전 국민의 관심사가 이런 데 가 있지만. 이것도 우리 경제의 특성, 현재 상태, 상황 변화에 대한 법칙, 이대로 가면 5년 후에 한국은 어떤 위치에 있다, 이것이 좋으면 그대로 갈 것이고 안 좋으면 어떻게 해야 더 좋아지는가를 계속 봐야 되는 거죠.

최우석   그때 특성은 무엇이 될까요?

장회익   특성은 경제학자들이 기준으로 삼는 여러 가지가 있겠죠. 총생산량이나 인구, 기능적인 능력이라든가, 그런 것을 이용해서 현재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같은 특성을 가지더라도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 다를 수 있죠. 경제학자들도 역시 이런 앎의 틀을 가지고 볼 거예요.

그리고 천체(지구) 주변에 떠도는 물체, 외계 물체가 지구로 들어온다, 인공위성이 돈다, 이런 것이야말로 가장 전형적인 동역학, 고전역학에서 활용할 수 있는 앎의 사례가 되죠. 보편이론으로서의 동역학, 즉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과 통계역학을 거쳐 가면서 모든 앎이 이런 틀 안에서 움직여요.

우리는 그 앎의 내용을 서술했지, 그 앎을 가능하게 하는 주체에 대해서는 이번 장에 올 때까지 안 했어요. 그 안에는 의식 주체에 대한 이해도 함께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의식 주체까지 하고 나서 비로소 9장에서 우리가 앎을 얘기하는 거예요. 의식까지도 포함을 해야 앎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앎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하자, 그 다음에는 그러면 ‘완전한 앎’이 있느냐, 이렇게 해서 끝맺음으로 가는 거예요. 전체적인 구도가 그래요. 그래서 이제 다시 심학 제9도를 보면, 결국 이 패턴을 빙빙 돌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요.

[그림 14] 심학 제9도. 앎이란 무엇인가?

(대담 10-1 녹취 끝.)

대담 : 장회익, 최우석, 황승미

영상 편집 : 최우석

녹취, 글 편집 : 황승미

전체 제작 : 녹색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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