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수록 풍요롭다⟫ 북리뷰 : 경제는 언제까지 성장해야 하는가?


오늘 소개하는 글은 ‘탈성장’에 대한 책 ⟪적을수록 풍요롭다⟫를 리뷰한 Los Angeles Review of Books의 기사입니다. 11월 녹색문명공부모임에서 요르고스 칼리스 등이 쓴 ⟪디그로쓰⟫를 읽고 이야기할 예정인데요. 그전까지 탈성장에 대한 다양한 책과 기사를 살펴볼 계획입니다.

*아래 칼럼을 쓴 에드워드 카버(Edward Carver)는 런던에 기반을 두고 있는 저널리스트이며, 가디언과 르 몽드 등에 글을 기고하고 있습니다.
기사 원문 보기 : “For How Long Must the Economy Grow?” Edward Carver. 2020. 11. 30. Los Angeles Review of Books.

*책 ⟪적을수록 풍요롭다⟫(Less is More)의 저자 제이슨 히켈(Jason Hickel)은 런던정치경제대학교 국제불평등연구소 방문 선임연구원, 바로셀로나자치대학교 환경과학기술연구소 교수, 영국왕립예술학회 회원입니다. 저서로 ⟪격차⟫(The Divide), ⟪죽음으로서의 민주주의⟫(Democracy as Death) 등이 있습니다.


성장 vs 탈성장

미래 세대가 현재 우리 시대를 되돌아본다면, 우리가 그렇게 많이 알고 있었으면서 어떻게 기후변화에 대해서 아무일도 하지 않았는지 의문스러워 할 것입니다. 지난 수십년 동안  위기를 완화하기 위한 노력들이 국제적인 의제로 다루어졌고, 과학자들은 인류가 맞닥뜨린 위험을 보고했고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극적으로 줄여야만 한다는 것을 설명해왔습니다.

그러나 아직 의미있고 구속력 있는 국제적인 행동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주춤해지기는 했지만 온실가스 배출량은 계속 늘어나고 있고, 한해 한해 지날수록 문제는 해결하기 점점 더 어려워져갑니다.

경제인류학자 제이슨 히켈(Jason Hickel)은 우리가 아무것도 안하는 이유는 경제성장에 집착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성장중심주의”(Growthism)은 정치 스펙트럼 전체를 가로질러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대사에서 가장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중 하나이다.”

– 제이슨 히켈

“우리는 대량 멸종의 시작점에 서 있는데 당신들 전부는 돈과 영원한 경제 성장이라는 동화에 대해서만 얘기한다”라고 17살 된 스웨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는 작년 UN 기후정상회담에서 대표자들에게 말한 바 있습니다.

“탈성장” 운동은 2000년대 말 유럽에서 등장했습니다. 그 원칙은 생태경제학과 환경 연구들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탈성장주의자들은 경제 성장이(현재 대부분 정부들의 주요 목표인) 에너지와 자원 이용을 동반할 수 밖에 없으며, 에너지와 자원을 쓰면 쓸수록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것은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녹색 성장”(Green growth)은 따라서 그 말 속에 모순이 담겨 있습니다. 생산과 소비를 많이 할수록 배출량이 증가합니다.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재생가능에너지에 투자를 한다고 해도, 성장을 지향하는 경제에서는 지구 생태계를 유지하고 기후를 안정화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탈성장주의자들은 말합니다.

히켈이 최근에 낸 ⟪적을수록 풍요롭다⟫(Less is More: How Degrowth Will Save the World)는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비학술서 출판사에서 이런 주제를 다루는 최초의 책들 중 하나입니다. 제목은 약간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책에는 ‘어떻게’를 알려주는 방법이 아니라 “성장중심주의”에 대한 간략한 역사가 담겨 있으며, 성장중심주의가 기후 안정, 생태적 안정과 양립할 수 없는 이유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경제 성장 개념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

“경제 성장”의 현대적 개념은 1930년대 나왔습니다. 이때는 산업적인 생산양식과 싼 화석연료 사용이 증가하던 시기였고 미국은 대공황에서 벗어나던 중이었습니다. 정부의 경제 관료로 일했던 시몬 쿠즈네츠(Simon Kuznets)는 모든 경제 활동을 측정할 수 있는 새로운 지표를 개발하는 일을 이끌었습니다. 즉 생산되는 모든 재화와 용역의 가치를 측정하는 지표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때 만들어진 지표가 국내총생산(Gross Domestic Production; GDP)의 전신이며, 국가의 경기 회복을 추적하고 전시 생산을 준비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 되었습니다. 이 지표의 이론적인 기반은, 재화와 용역을 점점 더 많이 교환하고 지구의 한계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영원히 성장하는 경제였습니다.

1940년대가 되면 산업화된 국가들 대부분과 국제단체들은 경제 성장을 가장 중요한 척도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쿠즈네츠 자신은 GDP를 그 나라의 복지를 나타내는 척도로 사용하면 안 된다고 의회에 경고했습니다. “더 높은 성장이라는 목표는 무엇을 성장시키려는 것인지, 무엇을 위한 성장인지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한다”고 쿠즈네츠는 말했습니다.

그의 경고는 수십 년 동안 묵살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많은 경제학자들이 GDP 성장을 다른 모든 것 위에 놓고 목표로 삼는 것이 타당한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히켈은 지표가 가지는 약점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정리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목재를 얻으려고 숲의 나무를 잘라낸다면 GDP는 올라간다. 만약 당신이 근무일 수를 늘리고 은퇴 시기를 늦춘다면 GDP는 올라간다. 만약 환경오염으로 환자가 늘어난다면 GDP는 올라간다. 그러나 GDP에는 원가 계산이 포함되지 않는다. GDP에는 야생동물의 서식지이고 이신화탄소를 흡수해주는 숲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과로와 환경오염이 사람들의 몸과 정신에 가져오는 악영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GDP는 나쁜 것을 빼버리고 좋은 것도 아주 많이 없애 버린다. GDP는 화폐화 되지 않는 경제 활동은 계산하지 않는다. 인간의 생명과 복지에 필수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제외된다. 당신이 먹을 것을 스스로 기르고, 집을 청소하고 부모를 돌보더라도 GDP는 거기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 제이슨 히켈

세계 경제가 매년 약 3% 증가한다고 할 때, 이것은 매 25년마다 경제 규모가 2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경제 규모와 마찬가지로 국민의 복지도 2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부자 나라에서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은 다른 유럽연합 국가들보다 1인당 GDP가 훨씬 더 높지만 평균기대수명은 더 낮으며 거의 모든 복지 지표들의 값이 낮습니다.

“성장”이라는 말에는 긍정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어서, 우리는 여기에 담긴 경제적인 함의를 잘 생각하지 못합니다. 인간과 동물은 자라지만, 영원히 자라지는 않습니다. 사람도 동물도 성체가 되고 나면 그 후에는 그 크기를 유지한다고 히켈은 지적합니다.

“경제 성장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놀랍습니다. 경제학에 담긴 지배적인 믿음에 따르면, 한 나라가 아무리 부유해진다 하더라도 GDP는 매년 계속 높아져야 하며 그 한계는 없습니다.”

– 제이슨 히켈

탈성장 옹호자들이 옳다고 잠시 가정해봅시다. 정부가 새로운 경제 지표를 채택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불행하게도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정부의 GDP 목표는 문제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엘리트 계층의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해 고안된 경제적 철학적 사고에 수 세기 동안 뿌리내려 왔다고 히켈은 주장합니다.

성장주의의 뿌리

오늘날 비전문가들 다수는 깨어진 적이 없는 엘리트의 경제적 지배 체제였던 봉건주의가 자본주의로 교체되었다고 보려고 합니다. 히켈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흑사병(Black Death)  이후 점전적으로 변해가는 중간 시기가 있었습니다. 1350~1500년 동안의 시기를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은 “유럽 프롤레타리아의 황금기”라고 부릅니다. 이 시기에 노동자들은 높은 임금을 받았고 여가시간도 아주 많았습니다.

이런 전개를 엘리트들은 잘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귀족들, 교회, 부르주아들은 부도덕하고 게으른 하층계급들을 보고 한탄했으며, 노동자들이 획득한 것들을 무효로 만들기 위해 서로 협력했습니다. 이들은 밭, 숲, 강 같은 공유물들을 개인 재산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인클로저”(enclosure)라고 하는 이 과정은 1500년대에 유럽 역사상 가장 심각한 기아 사태로 이어졌습니다.

흑사병의 전파 과정. 1346~1353년. (그림 출처 : wikipedia)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을 얻지 못했고 살던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1500년대 당시 영국에서 평균기대수명은 43세였는데 1700년대가 되면 30대로 떨어졌고, 서부 유럽에서 실질 임금은 동일 기간동안 70%까지 감소했습니다. 초기 자본주의는 평민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해서, 존재론적 비관주의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모두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의 유명한 경구 “자연 상태”의 삶은 “위험하고 잔인하고 짧다”를 잘 알고 있다. 홉스가 이 글을 쓴 것이 1651년이다. 자본주의 이전에 존재했던 빈곤 상태를 기술하기 위해 홉스가 이렇게 썼을 것이라고 우리는 추정한다. 그 문제를 자본주의가 해결하려고 했다고 우리는 생각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이다. 홉스가 썼던 빈곤 상태는 바로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생겨났다.”

– 제이슨 히켈

진보주의에 무시무시하게 대응한 것이 자본주의입니다. 1531년 영국의 왕 헨리8세는 “게으름”을 처벌하는 ‘부랑자 법'(the Vagabonds Act)을 발표습니다. 처형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유산계급을 위해 일하는 것을 거부했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습니다. 반면, 영군 전역의 교구들에서는 “구빈원”(workhouses)을 만들어서 여러가지를 가르쳤습니다. 구빈원은 부분적으로는 공장이었고 부분적으로는 문화적인 재교육 기관이었습니다.

“우리가 인간 본성에 새겨져있다고 생각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원칙은 인클로저 과정 동안 도입되었다.”

– 제이슨 히켈
영국 튜더 왕조 시기, 길거리에서 부랑자들이 잡혀가고 있다. 1536년. (그림 출처 : wikiedia)

엘리트는 이 시기 동안 “성장중심주의”라는 씨앗을 뿌렸습니다. 이들은 더 효율적인 경작물 수확과 더 많은 생산을 할 수 있게 한다고 말하면서 인클로저를 정당화했습니다.

17세기 초 두 명의 사상가 프란시스 베이컨과 르네 데카르트가 이러한 노력에서 핵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이들에게 훌륭한 업적도 있지만, 인간과 자연을 나누고 이 둘 간에 분명한 계층구조를 만든 것은 이 두 사람입니다. 즉 자연을 “정복”하고 자연을 우리의 “노예”로 만들고 “억지로 비트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분은 이제 우리의 사고 안에 너무 깊이 박혀 있어서 거의 인식하지도 못합니다. 데카르트는 몸과 정신도 비슷한 방식으로 분리했습니다. 즉 몸이 정신을 보조하는 부차적인 것이라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가장 유명한 말은 “나는 나의 폐로 숨을 쉰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니었습니다.”)

이 개념은 노동 착취와 인간 몸에 대한 지배 혹은 부분적인 지배를 정당화하기 쉽게 만들었습니다. 국가에 의한, 땅 주인과 노예 무역업자에 의한, 합자회사(joint stock companies)에 의한, 식민주의자들에 의한, 남자들에 의한 지배를 더 용이하게 했습니다. 몸과 땅은 추출되어 이용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 대한 좀 더 전체론적인 관념은 뿌리채 뽑혀나갔습니다.

이러한 그의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히켈은 히피가 아니라 토착지식을 풍부하게 갖춘 인류학자입니다. 서구학문의 창시자들 중 일부를 비판하기는 하지만 그는 서구학문에 헌신하고 있는 학자입니다. 그는 베이컨과 데카르트가 어떤 사항에 대해 어떻게 틀렸는지 보여줍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의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단지 상투적인 요가 문구가 아니라 근거가 탄탄한 사실이며, 우리는 죽자고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책의 몇 군데 히켈과 출판사가 순진해보이는 곳이 있습니다. 책 표지가 가장 눈에 띄는 부분입니다. “세계를 구하자”는 1980년대에 방영 되던 텔리톤(telethon; 자선기금 모금을 위한 장시간 텔레비전 방송)처럼 식자층 독자들로 하여금 신경을 꺼버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당황스럽게도 출판사에서는 표지에 ‘멸종저항'(Extinction Rebellion) 이름도 올려 놓았습니다. 이 운동단체는 2018년에 영국에서 시작되어 빠르게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 그룹에 속한 두 사람이 서문을 썼는데 이 글은 히켈의 글 수준에 맞지도 않습니다(서문은 건너뛰세요.).

녹색 성장과 탈성장

자본주의의 추악한 역사를 펼쳐넣고 있지만 히켈은 목소리 큰 녹색이 쏟아내는 것 같은 독설을 풀어놓지는 않습니다. 그는 “녹색 성장” 옹호자들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린 뉴딜을 폄하 하지도 않습니다. 그린 뉴딜 안에는 탈성장주의자들의 분노를 살 만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히켈은 성장 없는 그린 뉴딜을 요청합니다.

탈성장주의자들이 보기에는, 동일한(혹은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에너지원만 바꾸려는 생각은 그 에너지의 상당 부분을 태워 없애는 세계 엘리트들을 위한 환타지에 불과합니다. GDP 성장을 계속 추구한다면 재앙과 같은 기후 붕괴를 피하는 데 요구되는 속도로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탈성장주의자들은 주장합니다.

“녹색 성장”은 기술 발전을 중심에 놓는 반면, 탈성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발전된 기술과 에너지 효율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기후를 안정화하는 데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무한한 에너지는 자연이라는 하나의 “단위”(unit)에서 짜내질 수 없다고 탈성장주의자들은 말합니다. 재생가능에너지를 만들기 위해서도 광물을 캐내야 하며,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데에도 물리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재생가능에너지가 더러운 에너지를 대체하고 있는 게 아니라 에너지 믹스(Energy mix; 수력, 화력, 원자력, 재생가능에너지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만든 1차 에너지원을 함께 섞어 전기 등 2차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것을 의미-편집자 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부분적인 이유는 효율이 더 큰 소비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항공여행이 더 효율이 좋아지고 싸다면 사람들은 더 많이 비행기를 탈 것입니다. 효율이 좋은 냉장고가 시장을 휩쓴다면 중산층 소비자도 그 냉장고를 살 것이고 오래된 냉장고는 지하실이나 창고에 넣어둘 것입니다. 현재 경제 시스템에서는, 녹색 기술조차 자연을 이용하는 속도를 높일 수 있습니다. 탈성장주의자들은 기후 변화 자체가 과거 기술 발전의 결과이며, 기술 발전은 자본을 위해 일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탈성장”이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겁을 줍니다. 불황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탈성장주의자들은 관리하면서 점진적으로 경제를 재정비하자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탈성장은 한계가 아니라 풍요에 대한 것임을 설명하느라 히켈은 갖은 애를 씁니다. 그는 평등주의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전지구적인 불평등이 없어지고 사회는 더 민주적이고 덜 소비지향적이 되고, 억만장자와 빚진 사람들도 더 적어지는 겁니다. 히켈은 온라인 토론에서 성장에 대한 집착은 변화를 막는 주요한 방해물이라고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인들과 기업들이 하고 있는 모든 퇴행적인 일들을 생각해보라. 이들은 노동 여건을 악화시키고, 환경 보호 수단을 없애고, 시장을 자유화하고, 은행 규제를 완화하고, 사회 복지 비용을 삭감한다. 진보적인 좌파가 성장이라는 틀 안에서 움직일 정도로 우리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손 안에서 놀고 있으며, 그들이 이런 수단들을 정당화하기 훨씬 더 쉽게 만들어주고 있다.”

– 제이슨 히켈

생태경제학 문헌들로부터 뽑은 히켈의 핵심 주장은 세계가 사용하는 에너지와 자원에 상한을 두고, 우리가 지구의 한계(planetary boundaries) 내에 들어갈 때까지 점차적으로 그 한계 값을 낮춰가자는 것입니다. 히켈이 제안한 상한이 가능한지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기법과 정치학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 검증하지 않은채 남겨두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이 정책 광을 위한 책은 아니니까 그건 괜찮습니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탈성장 정책이 어떻게 작동하는 지는 좀 더 보여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히켈은 상한을 도입하는 데 필요한 국제적 협력에 대해 논의하지 않습니다. 그는 또한 이런 전환이 예를 들어 공공의 건강과 교육에 가져올 영향을 살피지 않습니다. 통화량이 감소해 세수가 줄어들면 교육과 복지 재정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있어야 합니다.

히켈은 일자리에 대해서 더 많이 언급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탈성장을 옹호할 필요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보편적 기본임금, 일자리 보장, 재교육 프로그램, 노동자들의 협상 능력 증진 등을 제안합니다.그의 탈성장 계획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노동시간을 20~30시간으로 줄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실업도 줄이고 소득 분배도 더 광범위하게 할 수 있고, 복지도 개선하고 돌봄 노동을 할 시간도 더 많이 확보됩니다.

탈성장이 정치적으로 가능한지 아닌지가 분명히 문제입니다. 기술 문제에 있어서는 탈성장주의자들이 옳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장이 최고인 한 지구를 안정화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러한 반문화적인 개념으로 폭넓은 운동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틀렸습니다.

성장을 옹호하는 그린 뉴딜은 훨씬 더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쪽은 사회 변환을 덜 요구합니다. 이론적으로 그린 뉴딜은 모든 이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그들의 소득을 증가시킵니다. 이것은 사실 계층 갈등을 분산시키는 한 방법입니다. 파이가 커지면 노동 계층은 최소한 부스러기들을 더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세기 경제학자이자 오랫동안 연방준비은행 장을 했던 헨리 월리치(Henry Wallich)이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성장이 있기만 하다면 희망도 있고, 큰 소득 격차도 참을만 한 것이 된다.” 히켈은 월리치의 말을, 우리는 더 평등하고 덜 성장한다로 바꿉니다.

그러나 기후 운동이 성공하는 데 지지가 필수적으로 필요한 노동 계층이 이러한 비전에 모여들까요? 히켈이 “탈성장”은 풍요라고 강조하지만 이 말은 내핍해야할 것처럼 들립니다.

양측이 모두 동의하는 바는, 남반구 국가들은 경제 성장을 해야하고 에너지와 자원 사용도 늘려야한다는 것입니다. 탈성장 옹호론자들은 물질 소비를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북반구 국가들이라고 말합니다. 탈성장 운동은 주로 백인들과 유럽인들들이 하고 있는데, 이들은 저임금 국가들에 대해 공정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탈성장을 하게 되면 미국인들과 인도인들은 종국적으로 동일한 양의 에너지를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녹색 성장 옹호론자들은 탈성장이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샤라크찬드라 렐리(Sharachchandre Lele)같은 세계 불공평이론의 “시조”는 2015년 파리협정과 같은 녹색 성장 옹호론자들의 프로그램을 지적합니다. 그는 인도의 환경정책 전문가이며 성장 패러다임을 비판합니다. 탈성장은 현재의 세계 질서에 훨씬 더 직접적인 도전입니다.

탈성장주의자들은 기후변화가 수많은 생태적인 문제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봅니다. 경계를 초월하는 가장 눈에 띄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깨끗한 에너지는 배출량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숲 파괴와 남획, 토양 고갈, 그리고 대량 멸종 문제는 반전시킬 수 없다. … 깨끗한 에너지를 쓰더라도 성장에 사로잡힌 경제는 결국 우리를 생태적인 재앙으로 몰고 갈 것이다.”

– 제이슨 히켈

자연과의 사이에 우리가 만들어놓은 균열을 치유하고 지난 500년 동안의 문화적 프로그래밍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사회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히켈은 믿습니다. 헤켈의 책은 경제와 환경 사상을 짧고 매력적으로 종합하고 있으며, 급진적인 정책을 요청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고등학교에서 이 책을 읽을 것을 추천합니다.


*이 글을 쓴 에드워드 카버(Edward Carver)는 런던에 기반을 두고 있는 저널리스트이며, 가디언과 르 몽드 등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기사 원문 보기 : “For How Long Must the Economy Grow?” Edward Carver. 2020. 11. 30. Los Angeles Review of Books.

*⟪적을수록 풍요롭다⟫(Less is More)의 저자 제이슨 히켈(Jason Hickel)은 런던정치경제대학교 국제불평등연구소 방문 선임연구원, 바로셀로나자치대학교 환경과학기술연구소 교수, 영국왕립예술학회 회원입니다. 저서로 ⟪격차⟫(The Divide), ⟪죽음으로서의 민주주의⟫(Democracy as Death) 등이 있습니다.

번역, 정리 : 황승미 (녹색아카데미)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의역한 부분이 많습니다. 정확한 내용은 원문 보기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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