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성 개념어 사전] 자연재난 – 철원군 소재 마을 침수의 경우


우석영의 지속가능성 개념어 사전


자연재난(自然災難, Natural Disaster). 자연재해(自然災害)라고도 한다. 개항 전 조선에서는 천변지이(天變地異), 천재지변(天災地變), 천지재변(天地災變), 천재(天災), 화앙(禍殃)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했다. 독일어로는 Naturkatastrophe, 프랑스어로는 Catastrophe naturelle, 라틴어로는 Naturalis Clades라고 했다. 

기표가 무엇이든, 각국에서 어떤 용어가 선호되었든, 이러한 용어들의 뜻은 다르지 않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자연력으로 인한 인간의 고난. 그러나 ‘그 고난’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자연력’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신(天帝, God) 또는 신의 뜻(God’s Will)이었다. 그러니까 ‘자연재난’이라는 용어는 재난의 경험자들, 즉 피해자들에게 “당신이 받은 충격을 운명으로 받아들여라”라는 말을 속삭인다. 

이러한 목소리를 거부한 이들은 ‘인간에 의한 재난’이라는 뜻의 ‘인재(人災)’라는 단어를 선호했다. 이 단어는 조선 시대에도 두루 사용되었고, 지금도 분명 유용한 단어일 것이다. 하지만, 이 단어는 ‘회피 가능한(했던) 재난’이라는 아이디어 말고는 우리에게 그 어떤 다른 말도 들려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물어보자. 지난 (2020년) 8월 한탄강이 범람하면서 발생한 철원군 소재 마을들의 침수는 천재일까, 인재일까? 그러나 천재 vs 인재라는 프레임 자체가 혹시 지나치게 단순한, 그래서 실은 무가치한 이분법은 아닐까? 

2020년 8월 5일 오후 집중호우로 물에 잠겨있는 강원 철원군 동송읍 이길리 일대 (사진: 강원일보)

천재 vs 인재라는 이분법의 감옥을 빠져나와야만 한다는 주장이 세계 최초로 제출된 것은 아마도 1977년일 것이다. 이 해 창간된 저널 <재난(Disasters)>의 창간호에서 벤 와이스너(Ben Wisner)와 그의 동료들은 재난의 자연적 면모와 사회적 면모 양자를 두루 살펴야만 재난 발생의 메커니즘과 재난 경험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작 이들의 속내는 재난의 사회적 면모를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이들은 허리케인, 태풍, 홍수, 가뭄, 화산폭발 같은 사건들이 수학적으로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발생하고 있으므로 사회-자연 관계상의 사회적 측면이야말로 재난의 강도와 빈도를 결정하는 결정인자라고 주장했다.  

와이스너와 그의 동료들은 1970년대에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진 연구자들이 아니다. 이들은 21세기 들어서도 계속해서 자신들의 입장을 발표했다. 이들이 발표해서 유명해진 재난 설명 모델이 있는데, ‘압력과 방출의 모델(the pressure and release model)’이 바로 그것이다. 이 모델을 간략히 설명하면 이러하다. 

압력과 방출의 모델(PAR model) [위키피디아]

먼저, 이들이 재난의 사회적 면모를 통칭하기 위해 ‘무방비성(vulnerability)’이라는 용어를 호출해냈다는 점부터 인지하기로 하자. 압력과 방출의 모델에 따르면, 사회적 약자들은 무방비성이 증대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달리 표현하면, 이들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압력이 계속 증대하게 된다. 이 압력은 계속 증대하다가 가뭄, 홍수, 감염병과 같은 자연의 위험원들과 충돌하면서 비로소 ‘방출(release)’된다. 풍선을 떠올려 보면 이 모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까지 계속 부풀어 오르고 있는 풍선을 떠올려 보자. 하지만 이것을 터뜨리는 것은 내부의 힘이 아니라 외부의 뾰족한 침이다. 이 침은 외부의(자연의) 힘이지만, 만일 풍선이 (사회 내적인 힘에 의해 안에서) 부풀어 오르지 않았다면 풍선이 터지는 일, 즉 재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와이스너와 그의 동료들에 따르면, 무방비성은 ‘근본 원인(root causes)’에서 비롯된다. 권력, 자원, 체제에 대한 접근이 제한된 상태, 정치/경제 시스템이 근본 원인에 해당한다. 이러한 원인은 지역의 투자/시장/기관의 부족, 급작스러운 도시화, 부채, 산림파괴, 토양생산성 감소 같은 ‘역동적 압력(dynamic pressure)’을 낳고, 이러한 압력은 위험한 장소(위험지대), 위태로운 건물과 인프라, 저소득, 재난 대비 부족, 풍토병 유행 같은 ‘안전하지 않은 여건(unsafe conditions)’을 낳는다. 이런 식으로 일어나는 사건의 연쇄적 발생을, 이들은 ‘무방비성의 전진’이라고 지칭했다. 무방비성은 전진을 계속해가는데, 마침내 ‘그날’이 찾아온다. 자연이 당긴 방아쇠에 의해 그간 누적된 압력이 대거 방출되는 날 말이다. 바로 ‘그날’ 사람들과 그들의 삶은 재난의 바다에 침몰한다.  

벤 와이스너의 ‘압력과 방출의 모델’ 또는 ‘무방비성 이론’은 이른바 ‘자연재난’의 원인을 신의 뜻으로 환원해버리는 못된 이데올로기의 전횡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뜻깊다. 이들 덕에 우리는 비로소 숙명론자가 처하기 마련인 무기력과 무이성(반反이성)의 지하감옥에서 풀려나 활력과 이성의 대지로 올라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이론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이들은 자연의 위험원들을 수학적으로 예측 가능한 것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곧 이들이 지구 시스템의 자율적 운동성과 유동성, 즉 예측불가능성을 간과했음을 뜻한다. 달리 말해서, 이들의 모델에서 자연의 메커니즘은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있다. 둘째, 이들은 정치/경제 시스템 같은 ‘근본 원인’이 재난의 사회적 면모만이 아니라 자연적 면모(자연의 위험원)에도 힘을 발휘한다는 점을 명쾌히 밝히지 못했다. 즉, 자연의 위험원 자체가 근본적인 원인에 의해 강화되며, 자연의 위험원의 위험도가 계속 증대하는 ‘위험의 전진’이 있다는 사실을 짚어내지 못했다. 이들이 자연의 위험원으로 거론한 것들(사이클론, 허리케인, 태풍, 홍수, 산사태, 가뭄, 감염병 등)의 거의 대다수가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의) 생산과 소비 양면에서 진행되는 화석연료 연소, 산림파괴 같은 활동에서 비롯된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던가. 

자, 그렇다면 다시 물어보자. 앞서 말한 철원군 주민들의 침수 피해, 그 원인을 무엇이라고 봐야 할까? 이들에게 피해 보상을 한다고 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해야 하는 걸까? 더 쉽게 말해, “누구/무엇”에게 책임이 있는가? 침수 가능한 저지대를 삶터로 선택했던 주민들에게 책임이 있을까? 하지만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들이 그곳을 선택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고지대에 살려고 했지만, 지금의 터에 살라고 한 건 1979년 당시의 (한국) 정부였다. 북한 쪽에서 잘 보이는 곳에 마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렇다면 이번 사태는 한탄강이 범람하지 못하도록 댐의 방류량을 세심히 조절하지 않았던 북한 당국에 책임이 있는 걸까? 하지만, 50일간 장맛비가 내린 사태, 즉 이상기후는 어떨까? 그것은 신의 뜻이므로, 책임을 묻는 자리에서 제외해야만 할까? 

잠시 이렇게 우리의 뇌를 어지러운 상태로 놓아두기로 하자. 그리고 이 상태에서도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해보기로 하자.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순수한 의미의 ‘자연재난’이라는 것은 없거나, 있더라도 극히 희박하다. 둘째, 벤 와이스너가 제시한 것과 같은 ‘근본 원인’을 찾아내 해결하는 것이 진정한 해법일 것이다. 셋째, 철원군 주민이 입은 침수 피해의 경우 반드시 다중책임을 생각해야만 하며, 온실가스 과다 배출 행위자의 책임이 거론되어야만 한다. 정부는 주민의 이주를 지원해야 마땅하지만, 그것을 넘어서 전지구적 기후위기 극복에 힘을 쏟아 향후 유사한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할 책무가 있다. 넷째, 이상기후(기후변화) 자체가 사태 발생의 중대 원인이므로, 국제적인 단위에서(아니라면 적어도 국가 단위에서) 조성된 기후재난기금이 철원군 피해 주민들에게 지급되는 보상금에 포함되어야 한다. 즉, 1회성의, 국가재난지원금 같은 것으로 이들의 피해를 보상하려 해서는 안 되며, 그런 식의 보상은 불완전한 보상으로 여겨져야만 한다.

우석영 (녹색아카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