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정리] 새자연철학세미나 5회 - 앎의 틀: 앎의 바탕 구도와 바탕 관념
모임 정리
앎의 바탕 구도
작성자
neomay33
작성일
2021-11-16 10:52
조회
2235
새 자연철학세미나 5회
세미나에서 나눴던 이야기를 간략하게 정리해보았습니다. 혹시 메모하신 분 계시면 이곳에 함께 공유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추가 질문이나 토론거리, 토론 메모도 좋고, 말씀하신 내용과 다르게 옮겨진 곳은 없는지도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때: 2021년 11월 11일 목요일 오후 8시 30분 ~ 10시 30분
주제: 앎의 틀 : 앎의 바탕 구도와 바탕 관념
여는 이야기: 장*욱
논의하는 자료들
-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제1장 “앎의 바탕 구도”(추수밭, 2019, pp.32-77)
- 『과학과 메타과학』 4장 “과학의 이론 구조-의미기반과 상황 진술”(개정판, 현암사, 2012, pp.85-111)
- (초판, 지식산업사, 1990, pp.63-84)
- (『삶과 온생명』 3장 “동양 사상에서의 시공 개념” (개정판, 현암사, 2014, pp.83-110)
- (초판, 솔, 1998, pp.74-100)
- 대담영상 정리글 <장회익의 자연철학 이야기> 2-1 : 앎의 바탕 구도(https://greenacademy.re.kr/archives/12031)
- 대담영상 정리글 <장회익의 자연철학 이야기> 2-2 : 예측적 앎의 바탕 구도와 시공간에 대한 바탕 관념(https://greenacademy.re.kr/archives/12109)
- 세미나 질문 모음은 첨부파일을 참조해주세요.
목차
여는 이야기 : 장*욱
읽은 소감과 질문
본격 질문
- 왜 (현대) 자연철학 논의에 동아시아 사상이 거론되어야 하는 걸까?
- 예측적 앎의 중요성과 주역
- 앎의 바탕 구도 또는 상황 진술
- 보편 이치, 보편 진리, 보편 원리, '리'를 따지는 것, 그것이 곧 결정론과 동전의 양면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아닌가?
- 의미기반에 대하여
- 의미기반에 대해 - 산염기 이론을 사례로
- 수학으로 표현되지 않는 과학의 개념이 있을 수 있는가?
- 과학에서 말하는 진리는 무엇일까? 군더더기는 버려야 할까?
여는 이야기 : 장*욱
책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1장의 마지막 부분에 여헌의 이런 말이 나온다. 상수학에 뜻을 두었으나 마음과 몸을 허비한 것 같고 유익함이 없었다. 조선시대 말이 아니라, 퇴계선생과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성리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리고 덧붙여 '산수'(수학)을 공부하라는 말이 와 닿았다. 산수에 신묘한 것이 있으니 공부하라고 제자들한테 말을 했다고 하는데, 21세기를 사는 저에게도 굉장히 유효하게 들렸다. 저는 대학교 들어와서도 2학년 때까지 주로 인문학 쪽 공부만 했고, 3학년 때부터 사회과학을 전공하면서 학문에 방법론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철학에서 논리학을 배우기는 하지만 논리학을 가지고 수업을 한다거나 하지는 않고 그저 사변적으로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것만 하는데, 특별히 학문의 방법론이라는 것을 따로 배우지는 않았다. 그런데 사회과학 쪽으로 가보니 학문의 방법론부터 방법에 무엇이 있는지부터 배우더라.
그리고 그 방법이라는 것이 통계같이 다 '산수'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저는 여기서 산수와 공부라는 게 요즘 하는 인문학 대중 강좌라든가 제가 했던 동양사상 공부 같은 것과 대응이 돼서,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 공부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삶과 온생명>에 상수학에 대한 장회익선생님의 평이 있다 : 이런 상수학이 실험을 통해서 그 설명력을 증명하지는 못했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지지받는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때에 맞게 이루어지니까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상수학의 지혜를 일상생활 속에서 얻을 수 있으니까 분명 일상생활 속에서 보상이 있었고 그래서 지지받았을 것이다.
제가 공부했던 동기나 기재같은 것이 설명된다는 생각을 했다. 20대 초반까지 자연과학 공부를 따로 하지 않고 주로 인문학, 사상만 공부했는데, 그 동기가 결국 일상적인 삶에서의 보상이나 지지였던 것 같다. 사상도 나름대로 세상을 설명하고 세상에 대한 관점을 제공하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서 볼안할 때 위안이나 심리적 보상을 얻었고 그런 것을 위해서 공부했던 것 같다.
그런데 자연과학을 공부하게 되는 어떤 기로에 제가 현재 서있다고 생각하는데, 최근에 스피노자를 같이 공부하는 친구와 작은 토론을 했다. 토론에서 나의 주장은,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자연과학과 함께 공부하는 것이 결국 스피노자 윤리학을 실천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었다. 자연과학 공부없이 인문학적으로만 어떤 사상을 얘기하고 공부하는 게 아니라 자연과학 공부와 함께 해야 어떤 윤리학적 실천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해서 친구는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론을 제기했다. 논쟁에서 쟁점은 세 가지 정도였다. 첫째, 똑같은 결론에 도달한다면 굳이 자연과학을 공부하는 것보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게 수학을 안 해도 되고 덜 부담스럽고 쉽지 않나? 둘째, 과학 공부를 좋아한다고 했더니 그것은 그저 취향 문제일 뿐이다, 그냥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호기심을 충족한다는 의미가 있을 수 있겠는데 취향이 없는 사람들은 무의미한 것 아니냐라고 했다.
세 번째 쟁점은, 토론 이후에 제가 생각해본 결과 과학의 유의미성이나 가치라는 게 인류 전체를 놓고 봤을 때에는 재론의 여기자 없는 것 같았다. 예측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백신을 만드는 것, 사회 정책을 만들 때 통계적인 근거에 따라서 하는 것 등을 보면 과학을 통해서 했을 때 훨씬 더 효과적이다. 그런데 전문가들이 현장에서 업무를 할 때는 과학이 의미가 있겠지만, 현장 밖의 비전문가에게는 예측적 앎이라는 것이 의미가 덜한 것 같다.
이것은 반박이나 문제 제기가 아니라, 어떤 사람한테는 과학 공부가 별로 의미없을 수가 있겠구나하는 실마리같은 것을 가지고, 제 나름대로 소화해볼 수 있는 과학 공부를 해보겠다는 다짐 같은 것이다. 해결해봐야할 제 나름의 주제를 세 가지로 세워보았다.
첫째, 예측적 앎이 예측이라는 보상만 주는 것이 아니라 대생 지식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데에도 보상을 줄 것이라는 가설을 가지고, 과연 그러한지 내가 배워봐야겠다 하는 것이다. 내가 체험하고 곱씹어봐야겠다는 생각이다.
둘째, 예측을 정말 필요로 하는 산업 현장 전문가들이 아니더라도 그냥 삶을 살아가는 어떤 실존적 인간에게 과학 공부가 모종의 보상을 해주고 의미나 가치가 있다면, 이 과학 공부가 단지 과학에 대한 호기심을 갖는 개인의 취향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해볼 만한 작업일 것이다. 이러한 가설을 가지고 모든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즉 윤리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배워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셋째, 만약에 과학을 빼고 사상 공부만으로도 가량 '온생명론'과 같은 동일한 결론에 이를 수 있다고 해보자. 예를 들어 천도교나 천주교에서도 생명사상이나 생태사상이 있으니 그런 데에서도 똑같은 결론에 도달한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과연 이것이 진짜 똑같은 결론인가, 경로가 다르니까 다른 차별적인 힘은 있지 않을까, 자연과학적으로 어떤 결론에 이르렀다면 뭔가 차별화되는 것이 더 있지 않을까 하는 가설을 가지고, 차별화된 힘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배우고 체감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나름의 세 가지 주제를 가지고 앞으로 열심히 산수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읽은 소감과 질문
이*일
왜 동양에서는 서구처럼 자연과학이 발전하지 못했는지 늘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1장을 읽으면서 왜 그런지 좀 더 이해하게 됐다.
신*상
자득적 개념을 통해서 바탕 관념을 얻게 된다는 내용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오늘 올라온 질문 중에 '의미기반의 탄탄함의 문제'를 보면서 떠올린 것은, 중력 질량과 관성 질량이 같다고 과학자들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자득적 개념 때문이 아니었을까하는 것. 아인슈타인이 그것을 깨준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바탕 관념이 결국은 고*석님의 말씀처럼 의미기반과 연결된 것 아닐까, 의미기반의 탄탄함의 의미를 더 생각해보고 싶다.
장*주
책을 사기는 쉽고 읽기는 어렵다. 문해력 문제... 언어가 다르구나 느끼는 중이다. 시골에 와서 시골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은데 그런 느낌이다. 완전히 다른 언어를 배우는 느낌이다. 그래도 생태에 관심이 많이서 그쪽을 알고 싶다. 왜 '자연'철학인가 질문한 적이 있다. 자연, 생명의 의미를 알고 싶다. 그런데 처음에 물리학 얘기 많이 나와서 어렵기는 하지만, 내 수준 안에서 이해하고는 싶다.
황*미
유튜브 대담('장회익의 자연철학 이야기')을 녹취하고 정리하면서 여러번 보고 듣게 되는데, 제가 1년 반 전에 한 질문을 다시 보면서 깜짝 놀라는 경우가 많다. 너무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해서 깜짝 놀랐고, 그래서 그동안 공부가 좀 되기는 됐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이나 대담을 여러번 읽고 보는 게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김*춘
<과학과 메타과학>을 읽으면서 그 어려운 구조를 분류해내셨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과학이론은 발견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얘기가 새로웠다. 장*욱님의 얘기에 공감 많이 간다. 윤리학이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각각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보상을 기대하면서 공부를 했다는 얘기에 공감한다. 문제를 푸는 공부를 넘어서는 것이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구*아
나름대로 과학과 메타과학 등을 읽고 있는데, 사실 장*주님 말씀이 위로가 된다. 나도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인데 읽으면서 잘 이해가 안 된다. 장회익선생님의 대중서나 강연을 하시는 말씀은 이해, 공감이 잘 되는데, 이론적인 책은 제가 과학적인 지식이 부족해서인지 좀 어려웠다. 오늘 장*욱님의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어느 분야에서 이해를 하고나면 다른 분야의 지식에 대해서도 이해의 폭이 생긴다는 믿음이라고 이해했다. 저처럼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도 자연과학을 반복해서 공부하면 이해할 수 있을지 계속 해보겠다.
서*석
고전역학으로 빨리 들어갔으면 좋겠다. 2년 전쯤 신문기자가 쓴 책이 있는데, 자기가 평생 인문학을 했는데 나이 들어서 과학을 공부하면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과학이 분야별로 다른데, 수학도 분야마다 다르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한번에 묶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언어의 마법 혹은 추상화의 착각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선생님의 통합적인 접근에 대해서 좀 더 공부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세상에는 예술도 체육도 있고 다른 분야가 많은데 왜 산수와 상수만으로 보셨는지도 의문이다.
신*규
저도 1장이 이해가 쉽지 않았다. 평생 공부해온 것이 달라서 그런 것 같다. 선생님께서 평생 공부하신 깊은 사상을 쉽게 풀어쓰신 것이라 제가 이해하는 데 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언어의 자의성 때문에 학문하는 사람들이 개념들을 더 꼬이게 하고 어렵게 하는 듯하다.
김*미
수식이 나오면 머리가 멈춘다. <과학과 메타과학> 4장 의미기반에서 실태과학, 양태과학, 의미기반 서술을 보면서 선생님께서 스피노자를 좋아하시는구나 생각했다. 저는 동양사상에서 나오는 시공 개념에 눈길이 간다.
양*
신학 공부를 했고, 종교철학, 윤리학 쪽에 관심이 있다. 장회익선생님의 물리학 책들을 본다는 것은 나에겐 너무 어려운 일이다. 참가한다는 데 의의를 둔다. 학자분들이 많으셔서 영광으로 생각하면서 듣고 있다.
내 관심은, 과학이라는 것이 인문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는 결정론적으로 보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다른 학문과의 소통 가능성 등에 대해서 낯설다는 느낌이다. 선생님을 알게 돼서 책을 좀 보기는 했는데. 4장은 어려웠다.
책을 좀 읽어보면서 저도 선생님이 스피노자적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의 당연한 것들과 어떻게 윤리학적인 당위가 연결되는가 이게 스피노자라고 생각한다.
당연한 것과 당위 사이에 연결점이 있는가. 언어학, 수사학... 이런 것들이 역학, 실재성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궁금해하면서 듣고 있다. 물리학적인 언어가 낯설어서 어렵지만 잘 따라가보겠다.
이*원
장회익선생님께서 <과학과 메타과학>을 쓰실 당시에 제가 철학 공부를 하려고 찾아갔었다. 시작을 그렇게 해서인지 메타과학이야말로 철학이라고 당시에 생각했었다. 나중에 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보니까 피직스와 메타피직스라는 표현을 오래 전부터 쓰고 있었고, 메타라는 것이 갖는 의미가 피직스의 바탕이 되는 그런 것을 사유하는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구나 알게 됐다.
철학이 인문학의 언어이고 추상적인 표현이 많다. 우리가 인문학에 익숙해지면 추상적인 것도 일상적으로 쓰게 되는데, 구체적인 것을 담지 못한다는 답답함이 있었다. 그런데 메타과학에서는 내가 친숙했던 것들을 소재로 설명했기 때문에 그 책이 철학에 친숙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처음부터 철학만 봤으면 어려웠을텐데, 메타과학으로 공부하면서 이렇게 접근해가는 거구나 처음 목격했고 같이 큰 틀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과학과 메타과학>은, 선생님께서 당시 과학자로서 살아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사고를 계속 하셨기 때문에 철학의 언어와 많이 달랐다. 그 책을 철학자들은 철학자의 관점에서 읽기를 거의 안 했거나 포기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오늘처럼 이렇게 모여서 그 책을 당시에 봤다면 대화와 소통이 좀 더 일찍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 책이 어렵기는 한데, 결국 익숙함이다. 고민을 해야 얻어진다. 선생님의 글이 좀 딱딱하고 쉽게 소화가 잘 안될 수도 있는데, 자꾸 고민해보면 익숙해진다. 전부를 다 이해하기는 어렵겠지만, 관심있는 부분부터 시작하면 거기서부터 조금씩 문이 열릴 것이다.
이*은
이*원님의 익숙해진다는 말씀에 기대를 건다. 저도 의미 파악이 힘들었다. 그래서 질문이 안 나오는 것 같다. 이런 식의 질문숙제 검사, 좋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학생들과 하면서 과학 공부를 하는 입장에서 이 책을 읽고 생각하고 있다. 저는 오히려 수학적, 물리적인 게 나오면 반갑고, 철학적, 인문적인 게 나오면 익숙치 않다.
학교에서는 물리학, 수학 수업 때 분절된 개념을 요약해서 전달하는 데만 포인트를 두게 된다. 꽤 오래전에 <과학과 메타과학>을 읽었고 다 이해는 못했지만 이런 메타과학적인 이해 안에서 학교에서 수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책 읽고 의미 파악이 잘 안 될 때 게시판의 질문을 먼저 읽어보기도 한다. 최윤*님의 질문에 많이 공감한다. 과학적 진리, 과학적 실재... 과학을 공부한다는 것, 그런 것을 안다는 것, 같이 공부하는 것이 중요한 같은데 교과서는 그것과 멀고 요약만 있어서 아쉽다.
본격 질문
질문 : 왜 (현대) 자연철학 논의에 동아시아 사상이 거론되어야 하는 걸까?
송*아
장회익선생님은 동양의 시공개념 얘기도 많이 하고 성리학에도 관심을 기울이는데, 서구의 과학과 비교하시는 이유는 뭘까 궁금하다. 우리가 읽는 책에는 그 이유가 분명히 드러나있지 않은 것 같다. 선생님의 목표와는 어떤 식으로 연관이 되는가? 잘 와닿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카프라의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에는 동양 사상을 끌어와서 현대 물리학의 한계를 극복해보겠다하는 명시적, 구체적인 목표가 있었다. 그런 것처럼 선생님께서 동양사상을 끌어온 분명한 이유가 확실해야 다른 데서 이루어지는 비슷한 작업과 공통점, 차이점도 비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선생님이 계속 동양사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서구의 과학과 비교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장회익
우리가 앎을 추구하는 것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 동양사람도 서양사람도 앎을 추구했다. 그런데 하다 보니까 그 방법도 다르고 이렇게 달라진 것이다. 이제 그런 생각에서 동양 것이니까 동양 따로 하고 서양 것이니까 서양 따로 하게 된 것이다. 동양 것과 서양 것을 따로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을 넘어서자는 생각이다.
알다시피 근대과학을 중심으로 한 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인데, 동양에서는 자생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 왜 안나왔나, 하기는 했나, 도대체 무엇을 했나? 어떤 이유 때문에 동양에서는 구체적인 것이 안 이루어지고 서양에서만 했나하는 것이 한 부분이다.
그리고 지금도 동서양을 통합해서 파악하려는 시도가 있는데, 대체로 나열만 하고 있다. 나는 전체적으로 엮어보려고 했는데, 전체를 하나의 눈으로 보려고 한 그런 동양적인 시각을 살려보자는 시도이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10장에서 그렇게 해봤다.
동양 학문이 상세한 구체적인 과학을 이루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통합적이고 전체적인 이해를 하려고 노력을 했고, 그런 시도는 지금도 필요하다. 아까도 나왔지만 과학을 하는 것이 인문학 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느냐 하는 질문이 많이 있다. 뿔뿔이 흩어진 것 하나씩만 가지고는 어렵다. 전체가 엮어서 보여주는 그것이 엄청난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쉽지 않지만 통합적으로 파악하려는 시각을 가지고 내용까지 다 담는 얘기를 담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느냐 하는 그런 시도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려울 수밖에 없다. 수박 겉핥기가 아니니까. 내용을 갖춰서 하려면 어려울 수 있다.
과학을 전혀 안 한 인문계 쪽 분도 지금 절반 가까이 계신데, 여기서 상당히 얻는 게 있을 것이라고 본다. 물론 쉽지 않다. 1-2년은 고생해야 되는데, 그래도 이 정도 내용을 얻기 위해서 2주에 한번씩 모여서 공부하는 고생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느냐하는 생각이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왜 동양 것을 끌어들이느냐? 일부러 끌어들인 게 아니고, 우리의 바탕이 동양이다. 우리 생각의 출발점이 여기다. 거기서부터 쌓아 올라가야되는데, 우리는 수입해서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밑바탕이 빠져 있는 것이다. 우리가 원래부터 생각하고 있는 바탕으로부터 연결이 빠져 있다. 그 연결까지 같이 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같은 출발선에서 동양에서 생각한 바탕에서 출발해서 과학을 한번 해보자 이런 취지가 담겨 있다. 너무 이상하다 생소하다고할 것은 아니고, 그저 그렇게 한번 생각해본다는 점, 여기에 유익함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과학이 출발은 서양에서 했지만, 그 사상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바탕이 연결이 되면 16, 17세기 동양사람으로서도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그 바탕에 선다는 얘기가 되니까 그렇게 생각을 해보면 좋겠다.
이*영
저도 예전에 <과학과 메타과학> 읽을 때 어려웠다. 요즘에는 불교철학 공부를 하고 있다. 불교 철학에서 가장 중심 개념이 무상과 연기이다. 무상, 모든 것이 변한다, 연기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 부처님께서 어떻게 그런 깨달음에 갔는지 모르겠지만, 양자역학에서 지금 심각하게 생각하는 게 관측에서 주체와 객체의 관계이다. 관찰자가 없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책 제목 <삶과 온생명>처럼 생명도 하나의 생명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고 볼 때, 불교철학, 양자역학.... 다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서양의 과학은 엄청나게 많은 것을 이루었고, 우리는 서양 과학의 발전에 따라서 식민 지배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환원주의적으로 하나하나 잘라서 공부하면 훨씬 더 쉽지만 전체적인 것을 알기는 어렵다. 서양사람들은 거기서 혼란에 빠져서 헤매고 있다. 현재의 과학이 그런 단계라고 생각한다.
질문 : 예측적 앎의 중요성과 주역
김*영
저도 동양과 서양이라고 하는 이분법을 넘어서고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장회익선생님의 심학십도는 예측적 앎이라고 부르는, 지금과 나중을 연결시키는 어떠한 앎에 대한 것이 핵심인데, 그 핵심을 끌어오는 출발점이 여헌선생의 <답동문>이다.
장회익선생님께서는 19세기 초 라플라스와 연결되는 것이 신기하고 흥미롭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전에 이미 라이프니츠가 그 얘기를 했었고 라이프니츠는 여헌 장현광과 거의 동시대 사람이다. 그래서 사실은 17세기에 이미 그런 예측적 앎의 중요성을 동아시아의 조선과 독일에서 각각 독자적으로 알았다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장회익
장현광이 라이프니츠보다 100년 정도 앞서기때문에 동시대는 아니다. 동시대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라플라스의 언명보다는 빠르다는 것은 나도 몰랐던 사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여헌, 라이프니츠, 라플라스 정도인 것이고, 그 외 사람도 얼마든지 이런 생각을 했을 수 있다. 누가 처음으로 그런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따지자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무렵에 여헌이 그런 생각을 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가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그런 취지다.
라이프니츠에 대해서 한 가지 걸리는 것은 '운명'이라는 얘기를 했다는 것이다. 운명에 대해서는 동서양이 모두 가지고 있었다. 여헌은 합리적인 이치에 따라서 한다는 것이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운명이라는 말과 섞어서 해서 약간 헛갈리는 면이 좀 있다.
이*일
라플라스는 뉴턴 이후에 200년 정도 이후의 사람이고 뉴턴 역학을 공부해서 알던 사람이다. 라플라스가 독자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뉴턴 역학을 보고서 그런 얘기를 했을 것이다. 여헌은 독자적으로 그러한 원리에 도달했다.
최우*
송*아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정리를 좀 해보자.
여헌에서 근대를 찾는 것이 적절한가라는 질문을 했는데, 왜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지 설명해주면 좋겠다.
송*아
저는 사학을 전공했다. 사학과에서 흔히 다루는 맥락에서 설명을 하자면, 해방 이후에 근대 이전 조선에서 내재적으로 근대가 발생하려고 했었다는 것을 찾으려 노력을 많이 했다. 여기서 문제점은 그런 시도 자체가 마주하게 되는 아포리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근대를 찾으려고 하면서 '근대'라고 하는 서구가 제시하는 기준에 맞춰서 미흡했다는 평가밖에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나의 문제 의식은 이런 것이다.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는 다른 글들인데 같이 놓고 보는 문제이다. 선생님의 용어에 따르면 바탕 구도가 다른 것인데, 현대의 우리에게 유사해보이더라도 굉장히 큰 거리가 있는 다른 얘기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플라톤의 <국가>에서 정의, 덕이라는 단어의 뜻이 가지는 다양한 맥락과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문맥이 있는데, 그런 것을 다 없애면 위험하지 않을까. 여헌의 사상을 오독하게 되는 위험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장회익
내가 말하는 '근대 학문'에서 근대는 역사, 문명사에서의 근대가 아니다. 고전 학문-근대 학문으로 나눈다면 고전학문의 특징은 이미 선각자들이 해놓고 우리는 그것을 체득하는 것이고, 근대 학문은 '아니다 내가 할 게 더 있고 내가 해야한다'하고 이렇게 자기가 학문의 탐구자가 되는 정신이 근대 학문의 정신이다.
그것을 기준으로 하면, 예를 들어 성학십도는 이미 돼 있는 가르침을 우리가 어떻게 공부해서 우리가 취득해서 살 거냐에 중심이 있고, 그래서 고전 학문의 표본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여헌은, 내가 하겠다, 우리가 해야 된다, 성인이라고 해서 우리와 다를 게 없다하는 것을 선언하고 나온 학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근대학문의 출발이라고 보았다. 적어도 우리 우리 조선 사회에서는 근대학문의 맹아라고 본 것이다. 그 이상 복잡한 근대론을 얘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학문 정신, 내가 학문을 하느냐 아니면 내가 받아들여서 체득하느냐의 차이로 구분한 것이다. 그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 뉴턴이나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과학이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하는 것에서 탈피하고 우리가 직접 해야한다로 갔다. 근본적인 반성을 데카르트가 했고 뉴턴이 받아서 이어갔다. 뉴턴의 노트 이야기(<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p.100)도 내가 새 학문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새 학문을 자기가 하겠다하는 그런 면에서 동서양이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최우*
1장은 동양의 보편론을 따진다기 보다는 여헌 장현광이라고 하는 한 사람의 이론으로부터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앎의 틀을 끄집어 내는 데 제일 큰 의의가 있다고 저는 생각한다. 그래서 심학1도에서부터 쭉 끌어져 나오는데, 그 앎의 틀을 중심으로 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든다.
질문 : 앎의 바탕 구도 또는 상황 진술
최우*
심학 1도는 앎의 바탕 구도와 바탕 관념 두 개로 구성돼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바탕 구도에 대해서는 제가 올린 질문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겠다. 간단한 질문인데 바탕 구조에 대한 이해를 좀 해볼까 한다.
<과학과 메타과학> 4장에 보면 과학이론이 의미기반과 상황진술로 구성되어 있다고 정리되어 있다. <과학과 메타과학>에서 의미기반이라고 얘기한 것이 이 책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에서는 바탕관념으로 이름이 다시 붙었고, 상황진술은 바탕구도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이해했다.
이렇게 봤을 때 제일 단순한 의문 중 하나는 이것이다. 이런 관점이 앎이라고 하는 것을 구조적으로 보는 관점이고 그 구조는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는 구조와 물 밑의 구조 이렇게 나뉘고, 물 밑에 있는 게 의미 기반이고 물 위에 있는 게 상황 진술이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드러나지 않는 잠재 구조, 드러나 있는 명시 구조 이런 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런데 책에서는 구조라고 하지 않고 구도라고 하신 점에 대해서 의문점이 있다.
장회익
의미기반은 바탕 관념이 맞지만, 상황진술은 바탕 구도가 아니다. 상황진술은 예를 들면 운동방정식같은 것이 해당된다. 바탕 구도는 전체의 틀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 둘을 합친 전체 틀, 기본 틀 안의 구조 속에서 의미기반에 해당하는 부분이 상태, 상태와 상태를 연결하고 그것을 상태 변화의 법칙을 통해서 연결하는 전체의 틀을 구도라고 보는 것이다.
복잡하게 따질 이유가 없다. 전체를 묶어서, 말하자면 심학 제1도의 그림 자체가 구도이다. 그런 틀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안에는 의미 기반에 해당하는 부분이 들어 있고 상황 진술에 해당하는 부분도 들어 있고, 그 관계를 얻는 것이 구도이다.
최우*
질문 : 보편 이치, 보편 진리, 보편 원리, '리'를 따지는 것, 그것이 곧 결정론과 동전의 양면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아닌가?
장회익
결론만 얘기하면, 그렇지 않다. 합리적으로 예측할 수 있지만, 그것이 꼭 완벽하게 결정론적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현대과학에서 우리가 보지만, 5장 통계역학에서 여러가지 변수들이 다 있는 것을 가정하고도 의미있는 예측을 한다. 전혀 결정론이 아니다. 우연의 요소가 무제한으로 들어있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 어떤 결과를 예측하는 것이고, 크게 보면 그것도 이치다.
'리'라고 하는 것이 꼭 결정론으로 가야하는 것이 아니다. 결정론적인 관계도 포함하지만 그것이 우연의 요소와 엮여서 또 큰 틀에서 어떤 경향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넓은 의미의 '리'에 속하는 것이다. 좁혀서 결정론을 볼 필요는 없다.
딱 결정론으로 된다는 것은 고전 역학의 틀에서 그렇게 했지만, 양자역학만 봐도 사건을 일으키는 것은 확률적으로 일어나지, 결정론적으로 사건이 일어나는 게 아니다. 당시 상태함수가 어떻게 변하느냐까지만 결정론적이고, 그 다음 현상으로 나타날 때는 이기 거기에 확률이 들어 있다. 전체로 보면 의미 있는 설명을 해주고 있는 틀이다. 그걸 갖다가 '리'라는 말을 서구 과학에서 특별히 쓰고 있지는 않지만, 그쪽에 '리'를 연결한다고 하면 넓은 의미의 '법칙성'이다, 이렇게 볼 수 있다.
최우*
예측할 수 있다는 것과 결정되어 있다는 것은 다른 말씀이라는 것인가?
장회익
그렇다. 다르다.
질문 : 의미기반에 대하여
고*석
계속 궁금한것은 장회익선생님이 말하는 '앎이란 무엇인가'라는 큰 물음이다. 지난 모임에서 앎과 삶의 관계에 대한 고민도 저의 관점에서는 이어지는 고민이다. 선생님이 의미기반과 바탕관념이 대략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는 말씀도 도움이 되었다.
앎의 바탕에 놓인 관념이라는 그 개념을 좀 더 이해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 짧게 시도해보자면, 두 갈래 방향으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
하나는 가능한 한 명료한 관념의 어떤 체계가 명료하다는 것은 언어를 전제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명료함이라는 덕목을 갖추기 위해서는 고정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영원히 고정될 필요는 없지만 주어진 시점에 고정된 어떤 명료한 관계가 하나의 방향이다.
또 다른 방향은, 관념에는 비언어적인 요소들, 존재와 활동의 덩어리... 거기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언어를 건져내기는 하지만, 그 자체는 언어 이전의 것이 학문의 밑바탕에 있다고 보는 관점이 하나 있다. 또 하나는 학문은 말로 하는 것이고 말로 하기 위해서는 명료한 개념이 그 바탕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가 이어져 있지만, 저한테는 앎과 삶의 관계로 이어진다.
온전한 앎, 그게 어떤 방향인지가 정말 막연한 여물지 않은 질문이다. 조금씩 다듬어가고 있다. 의미기반이라는 화두로 질문하고 싶었다.
장회익
나는 이론의 틀을 의미기반, 상황진술 두 가지로 <과학과 메타과학>에서 정리했다. 이 책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에서는 의미기반을 바탕 관념으로 얘기했다. 이 책에서 <과학과 메타과학>의 틀을 고수하지는 않았다.
고전역학이나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으로 가면서 그 개념을 그렇게 많이 쓰지는 않았다. 써도 좋지만. 결국 한 쪽은 의미를 제시해주는 기본적인 관념이다. 일상언어로도 할 수 있고 수학적인 언어로 표현해도 좋다.
어쨌든 바탕 관념이 있고, 그런 다음 바탕 관념을 매개로 관계를 짓는 것, 이것이 물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formalism, 법칙의 관계, 법칙들의 틀이다. 교과서에서는 법칙 밖에 안 나오고, 그 밑에 깔려 있는 의미기반은 별로 잘 돼 있지 않다. 그런데 그것을 연결하는 것이 어려워서 과학 공부가 어려운 거다.
교과서는 명시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보는데, 의미기반과 같이 봐야 된다. 그 의미기반을 우리가 보통 의식하지 않는다,과학자들 조차도 의식하지 않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 의미기반이 굉장히 중요하다. 의미기반에 변화가 올때 이해에 어려움이 생긴다. 왜냐하면 의식하지 않았던 건데 그것이 뒤틀리니까, 그 의위 것과 연결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혁명이 되는 것이고, 대표적인 것이 고전역학이다.
기존의 우리의 일상적인 바탕 관념에서 고전역학이 무엇을 고쳤느냐? 중요한 것은 3차원 공간을 분명히 했다는 것이다. 내가 1장에 여헌 이론을 소개한 이유 중 하나는, 여헌 이론에 3차원 개념이 없다는 것 때문이다. 상하 방향을 2차원과 별개로 보기 때문에 대지가 왜 안 떨어지느냐 하는 질문이 나오는 것이다. 바탕 관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뉴턴은 3차원으로 봤기 때문에 아래쪽으로 떨어져야할 이유가 없는 것이고 떨어진다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그래서 사과가 왜 떨어지느냐 하는 전혀 다른 질문이 나오는 것이다. 고전역학은 바탕 관념을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바꿔서 구체화한 것이다.
그 다음에 상대성 이론은 다시 시간과 공간에 연결을 준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바탕 관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손이 위로도 가고 옆으로도 가니까 3차원은 그나마 짐작이 되지만, 4차원은 전혀 상상이 안 가는 개념이다. 이런 의미기반이 새롭게 올 경우에 과학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양자역학에서 또 한번 의미기반의 변화가 온다. 위치 공간과 운동량 공간이 연결되고, 그 다음에 상태를 지정하는 방식에서 변한다. 그러니까 어디에서 어떤 변화가 오느냐를 명백히 해야 그 다음 단계를 이해하기 쉬운데, 그것을 명백히 하지 않고 그냥 (바탕 관념의) 위에 나타나는 법칙들, 과정만 주로 가지고 보면 이게 이해가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바탕관념의 변화, 의미기반의 변화를 강조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시공간 차원의 틀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의미기반에 깔린 대표적인 것이다. 그 다음에 우리가 대상을 어떻게 보느냐, 고전역학적으로 보느냐 양자역학적으로 보느냐가 또 굉장히 큰 변화이다. 이러한 의미기반을 명백히 해야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사실 의미기반이라는 말을 쓴 학자가 거의 없다. 바탕관념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나눠보는 것이 사람이 별로 없다. 그래서 내가 소개한 것이다. 다른 데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라 생소할 것이다. 과학이론을 이해하는 데 또는 더 넓게 앎을 이해하는 데 굉장히 중요하다.
최근에 다시 생각해서 책을 새로 구상하고 있다. 이 책과 관련지어본다면 9장에서 출발해서 1, 2, 3, 4장....으로 가는 구도이다. 앎의 구도에서 자연철학을 다시 보는 것이고, 양자역학까지만 갈 예정이다. 이번에 출발은 앎에서 출발해서 올라간다. 의미기반과 상황진술, 바탕관념과 또 뭐, 존재론적인 것과 포말리즘... 이런 것들을 명료하게 정리하는 구상을 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양자역학까지)을 좀 더 다듬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고*석
고전학문과 근대학문의 차이를 설명해주신 선생님의 설명이 와닿았다.
이미 벌어진 학문의 과정에 대한 어떤 재구성으로서는 분명히 합리적인 재구성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가 만일 양자역학이 태동하던 시기로 가서, 양자역학이 주도권을 가지게 될지 사라질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엇이 그 승부를 결정짓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럼 결국은 일상적 경험까지 포함하는(보어) 인간의 체험이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은 어떨까?
장회익
근본적으로 과학은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경험과 어긋나면 깨질 수 밖에 없다. 근본적으로 그렇지만, 수많은 체험 중에 어느 체험이냐? 우리는 짜여진 바탕관념 속에서 사고한다. 그 위의 과학이론과 어긋날 때 바탕관념을 바꿀 생각을 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연히 바탕 관념이 다른 사람과는 대화조차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토마스 쿤이 얘기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의식적으로 바탕 관념을 들여다볼 생각을 해볼 수 있다. 논리적인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더 잘 다듬고 정교화시켜 놓으면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나올 수 있다. 그건 대단히 중요한 발견이다. 그 다음에 그 새 그릇에 안착시킬 수 있다.
바탕관념을 다듬고, 바탕 관념을 가지고 작업하는 것은 한층 더 심층적인 작업이고 정말 필요한 작업이다. 체계적으로 검토하는 일, 의미기반 혹은 바탕관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것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역사적으로 살펴 나가는 작업은 굉장히 재미있다.
그러면 앞으로 갈 때도 그런 가능성을 생각해서 앞질러서 생각해볼 수 있다. 양자앙이론에 대한 의미기반 이론에 대해서 지금 내가 다듬고 있다. 바탕관념을 가지고 이해를 해야 그 다음에 논리적으로 연결이 된다.
김*미
선생님의 바탕 관념은 플라톤식이 아니라 푸코식의 어떤 에피스테메처럼 한 시대를 풍미하는 그런 바탕을 두는 인식론으로 들린다. 그 틀 안에서, 예를 들어서 천동설 시대에서 지동설 시대, 상대성 이론, 전기자기장 이론, 그 다음 양자 이론... 그런 큰 프레임, 지형으로 저는 들린다.
장회익
그것이 다 바탕 관념이 달랐기 때문이다.
질문 : 의미기반에 대해 - 산염기 이론을 사례로
유*주
저는 화학을 공부했고 교육을 하고 있어서 계속 그쪽으로 읽혀지고 있다. <과학과 메타과학>이 저에게는 의미 있게 와 닿았다. 과학지식이 발전한다고 하셨는데, 발전이란 의미가 과학철학사적으로는 좀 다르다고 생각한다. 과학에서는 과학 지식이 발전하는 것을 진보라고 하고, 지식의 누적되면서 어떤 진리로 다가간다, 누적적으로 진보한다라고 보는 관점이 있고, 반면 쿤의 입장은 패러다임 안에서만 진리가 있다고 본다. 상대적인 의미로 저는 이해하고 있다.
심우십도를 보면 소가 진리를 의미한다. 소를 찾아가는 과정을 서술하셨는데, 장회익선생님이 보는 진리는 이 책에서 어떤 관점으로 서술되었는가?
장회익
두 가지가 다 있다. 과거에는 직선적으로 발전한다고 보았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쿤이 그게 아니라고 했고 패러다임의 변화가 온다고 했다. 그런데 그 패러다임 변화가 그렇게 상대적인가하면 그것도 역시 아니다. 그 패러다임 변화 자체도 발전의 일부이다. 패러다임을 더 넓게 해서 수용하는, 더 넓은 패러다임이 된다.
그렇게 되면 수용이 된다. 양쪽이 서로 수용이 되는지 모르고 부분부분을 가지고 싸운다. 연결이 안 되니까 싸울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패러다임이 더 넓어져서 각각이 수용이 되고 하면 자꾸 발전한다. 내가 이 책에서 소개하는 차원 얘기도 그렇다. 패러다임의 바탕 자체를 넓혀갈 수 있다. 넓혀가는 것에 의한 과학, 이것이 크게 보면 진전이다. 그러나 작게, 좁은 의미에서 보면 여전히 패러다임이 다르다고 해서 정리가 안 되고 계속 싸우게 된다.
유*주
<과학과 메타과학>에서 의미기반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과학교육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학문을 하거나 앎을 추구할 때, 의미기반이 무엇인지 사유하고 찾아가는 게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과학 교육에서도 다루지 않았던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제가 아는 선에서, 화학에서 의미기반 개념을 적용해봤다. 화학에서 산염기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가지 이론이 있다. 아레니우스 이론과 브뢴스테드-로리 이론. 전자는 물질에, 후자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이론이다.
이렇게 판단 기준이 물질이냐 과정이냐로 산염기 이론이 나뉜다고 설명하면 학생들이 헛갈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부분에 관심이 많다. 이렇게 두 이론이 각각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 어떻게 보면 과학자가 바라보는 관점일 것이다.
그런데 그 관점이 아마 바탕 관념, 의미기반이지 않나 생각한다. 의미기반의 공약불가능성을 얘기하셨는데, 의미기반의 어떤 형태가 변형되는 것이 과학혁명이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서로 공약불가능성, 서로 평가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을 때 과학혁명이 일어나는 것?
아레니우스 이론이 설명 못하는 것을 브뢴스테드-로리 이론이 설명하고 반대로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학교 교과서에서는 이런 것들을 누적적으로 발전하고 포괄하는 관점으로 설명하고 끝내버린다. 그런데 실제로 깊이 들어가보면 판단 기준이 있고 그것을 통해서 이해하면 더 쉽다.
어떤 이론이 가지고 있는 관점, 이런 것도 의미기반, 바탕 관념이 되지 않을까해서 화학에 한번 적용해보았다. 그런데 과학혁명은 스케일이 크고, 이론은 작다. 이런 작은 스케일의 사례로 선생님이 말하는 과학혁명 이야기와 비교해서 얘기할 수 있을까?
장회익
스케일은 조금 다르지만 관계는 역시 유사하다. 나는 의미기반을 좀 큰 틀에서 많이 얘기했지만, 지금 든 사례처럼 작은 현상에 대한 이론, 관계에서도 볼 수 있다. 그것을 어디에 바탕을 두고 봤냐 하는 것을 찾아내서 그것을 정리해주는 게 그 의미기반에 해당하는 것을 찾아주는 것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좋은 이해 방식이고 교육적으로 굉장히 좋다고 본다.
김*우
질문 : 수학으로 표현되지 않는 과학의 개념이 있을 수 있는가?
'스니드의 관점'에 따르면 과학은 자연현상 가운데 수학적 구조에 맞는 것을 파악하는 행위라고 보고 있다(<과학과 메타과학> p.96). 그런데 저의 생각은, 과학의 모든 게 수학적으로만 표현이 돼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있다. 장회익선생님은 이런 개념으로 포섭되지 않는 부분들도 있지 않겠느냐 하고 약간 여지를 남긴 것 같다. 그런 여지에 해당되는 부분이 무엇일까 궁금하다.
수학적인 개념으로 표현되지 않지만 과학적인 개념도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칸트가 공간을 '외적 직관', 시간을 '내적 직관'이라는 식으로 표현했는데, 그런 것들이 수학적 표현이 아니라고 해서 과학적 개념으로서 가치 없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김*영
짧게 말씀드리면 스니드는 1970년대 독일어권 사람이고 수리물리학자이다. 실제로 <수리물리학의 논리적 구조>라는 책을 냈다. 스니드나 그의 제자들은 생명과학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수리 물리에만 관심이 있었고 수학적 구조를 해명하려고 했다. 장회익선생님은 스니드 이론의 개념을 원용해서 의미기반으로 발전시킨 것이라고 저는 이해한다.
*스니드 이론, 의미기반과 상황진술에 대해서는 자연철학게시판의 김*영님의 글 "[과학과 메타과학]의 용어해설"을 참고해주세요.
장회익
맞는 얘기다. 의미기반도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되면 좋지만 꼭 수학적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수학적으로 표현이 되면 장점이 있다. 첫째, 정량적인 표현할 수 있다. 모든 차이를 일관된 수치로 나타내니까 좋다. 둘째, 논리성이다. 논리적인 연결을 가지고 정량적인 것을 표현한다는 것이 굉장히 탁월한 것이다.
자연과학은 그 둘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적용하기 어려운 분야라든가 할 수 있는데도 못한 데에서는 상당히 많은 부분이 답보 상태로 가는 수가 있다. 그러나 유용한 도구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스니드의 입장은 특별한 경우로 본 관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다.
질문 : 과학에서 말하는 진리는 무엇일까? 군더더기는 버려야 할까?
최윤*
과학적 진리란 무엇인가. 의미기반을 통해서 어떤 과학적인 서술이나 진술을 하는 것이라면, 의미기반을 너머의 과학적 진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과학적 진리란 것이 있을까. 새로운 더 나은 이론들이 나오고 있지만 그 속에 진리라는 것이 있을까? 진리에 너무 과도한 기준을 부여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있다.
과연 어떤 과학이론에 예측력과 설명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그 이론의 의미기반에 전제된 실재를 실재로 받아들여야 하나? 의식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도, 없다고 보고 설명하면 더 간소한 이론 체계가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세계를 예측하거나 설명하는 데 군더더기가 되는 개념들 없이 설명하면 더 낫지 않을까?
장회익
큰 질문이다. 두 가지 질문을 했는데. 첫째, 진리라고 하는 것이 과연 있느냐, 거품을 빼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는데, 사실 과학에서 그 거품을 많이 뺐다. 과학에서는 진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 말을 안 쓴지 굉장히 오래 됐다.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이 진리라고 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가 현재 만들 수 있는 최선의 설명방식이다, 암묵적으로 그렇게 이해하는 거다.
옛날에는 뉴턴 역학이 진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많다. 우리가 진리를 찾았다고 하지만 그 후에 자꾸 깨지다보니까 진리라고 할 것이 없어서, 지금도 그 말 자체를 거의 안 쓰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거품을 뺐다고 말할 수 있다.
의식 문제는 책 7, 8장에서 많이 다뤘다. 과학적인, 특히 물리학적인 바탕 위에서는 '나'라고 하는 존재를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러면 '나'라고 하는 것을 빼버리면 설명이 되나. 그런데 그건 엄연히 있는 거다. 그러니까 이것이 어떻게 연결되느냐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관심사이고, 이 책에서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짧게 말하면 일원이측면이다. 둘이 하나인데 단, 측면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을 떼서 둘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고. 그런데 하나는 내적인 측면, 하나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측면. 둘이 전혀 다른 측면이다. 뫼비우스의 띠를 도입한 이유도 그것이다. 한쪽 면은 물리학적인 논리로만 연결된 세계라면 또 한쪽은 그걸 통해서 보는 세계. 그런데 이 둘이 분리돼있지 않고 하나이다.
최윤*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서 범심론같은 개념, 이론이 좀 떠오르기도 했다. 물질과 정신의 속성이 같이...
장회익
그것하고는 좀 다르다. 나는 일원이측면으로 보는 것이다. 범신론은 아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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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정말 놀랍습니다. 2시간이란 짧으면 짧고 길면 긴 시간 동안 나눈 이야기가 이렇게 많았다는 것도 놀랍고, 그것을 이렇게 읽기 쉽게 정리해 주신 neomay33님의 뛰어난 능력이 놀랍습니다. 덕분에 생각을 한번 더 곱씹어 보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시간이 아~주 많이 든답니다. ^^;
이번에는 클로바노트라는 (바보)앱이 받아쓴 것과 제 메모를 대조하면서 했더니 시간이 더 걸렸어요. ㅠ.ㅠ
그나저나 바로 3장부터 정말 걱정입니다...
매번 좋은 정리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ㅠ 확실히 이렇게 글로 다시 한 번 읽어 보면 생각 정리가 잘 되는 것 같습니다 ㅎㅎ 아래 질문 글은 저번 세미나 마치고 끼적이기 시작했는데, 세미나 때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억이 나지 않아 갈무리를 못하고 있었거든요. 막연한 의문점들은 있었고, 구체화는 절반 정도 했던(중간 정도까지는 기억을 더듬거리며 쓴) 글인데, 선생님이 정리해주신 글 덕분에 부족하게나가 정리해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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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책을 읽고, 선생님과 대화하다 보면 선생님의 학구열, 방대한 관심사 같은 게 느껴지는데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특히, 초반부터 메인 텍스트에서 선생님이 하고자 했던 작업이 무엇이고, 왜 필요한지, 그 전체적인 그림은 어떤지에 대해 고민했던 저로서는, 진도가 조금씩 나가면 나갈수록 선생님이 이 책에서 정말 엄청난 작업을 시도하려 했다는 사실이 조금씩 느껴집니다. 물론 아직 혼란스럽고 의문이 드는 게 한두개가 아니긴 하지만요… ㅎㅎ 이미 그 혼란함과 의문점을 느껴버린 이상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풀어써보곤 싶은데, 디테일을 살리고자 하는 욕망은 능력도 안 되거니와 직장인으로서 시간의 한계가 있는 만큼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 혼란함과 의문점을, 새로운 텍스트를 읽고 소화한 다음 저의 언어로 풀어 설명하기보다는 예전에 읽었던 텍스트를 막연하게 남은 문제의식이나 전체적인 구조를 떠올리며 그것을 부분적으로 발췌 및 인용하는 방식으로 풀어보려고합니다. 투박하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한다거나 다른 사람의 언어에 기대어 말할 수밖에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부족한 능력과 다른 일에도 많은 시간을 써야하는 일개 직장인으로서의 한계라는 핑계를 빌어 죄송하다는 말씀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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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중에 시간 관계상 “선생님이 동양사상 - 특히 성리학 - 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 동양사상을 서구사상 - 특히 서구의 과학 - 과 계속해서 비교하시는 이유가 뭘까?”라는 질문을 먼저 드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질문이 중요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5회차 세미나 글을 읽으며 들었던 소감에도 언급했던 것처럼 선생님이 동양사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가 이 책의 논지 전개과정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나아가 핵심적인 부분과도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선생님께서는 ‘우리는 동양인인 만큼 우리의 바탕인 동양의 사상에 대한 필요하니까.’라고 답하셨던 거로 기억합니다. 시간 상 당시에는 바로 질문을 드리지 못했으나 이런 의문점들이 떠올랐습니다.
‘2021년을 사는 한국인은 15세기의 동양(성리학) 텍스트보다, 어떤 점에서 15세기 서구(유럽)의 텍스트가 더 익숙하게 느껴질 정도로 서구화되어 있다. 그런 우리에게 지금 옛 동양의 텍스트가 무슨 소용일까? 오히려 동양인이라는 정체성을 사유하고자 했다면, 우리가 독해하고자 하는 동양의 사유가 한국인의 사고와 행동 방식에 어떤 흔적을 남겼으며, 이게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탐구해야 하는 거 아닐까?’라는 의문입니다. 약 20년 전에 동서양의 두 철학자가 나눈 인터뷰에서 언급되듯(http://legacy.h21.hani.co.kr/h21/data/L000124/1paq1o01.html) 동양사상에 대한 관심이 “단순히 ‘우리 것이니 관심을 갖자’는 차원을 넘어”서야, 동양사상을 그 맥락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현재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우리가 동양인이기 때문에 동양의 사상을 공부해야 한다기보다, 현재의 어떤 문제 때문에 동양의 사상을 공부해야 그 공부가 막연해지지 않고 구체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 프랑수아 줄리앙의 표현을 빌자면, ‘독서-문제제기’의 방식으로 동양사상을 읽는 게 낫지 않나 싶습니다. ‘독서-문제제기’의 방식은 내적으로 독서행위에 참여하면서(해당 문구의 맥락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는 상태로 읽으면서), 문제제기(비교의 준거점)를 통해 두 텍스트의 내재적 논리를 부각시켜 상호 비교해 구체적이고 유의미한 결론에 다다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질문이 사전부터 매우 중요해집니다. “유가의 의식이 그 고유한 논리 속에서 인본주의의 표본일 수 있었던 조건과 그 근본적 특성은 무엇인가?”(운행과 창조, 16)
선생님이 동양사상에 관심을 뒀던 이유 중 조금 더 구체적으로 와 닿았던 건, ‘통합적인 사고를 지향했던 실례로서 동양사상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셨을 때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의문을 말씀드리기 전에, 제가 ‘장현광과 근대’에 대한 질문을 드리면서 느꼈던 의문점을 먼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장현광과 근대’에 대한 질문을 드렸던 이유는, 많은 맥락이 있긴 하지만, 오독의 여지를 막고 구체적이고 의미있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그 텍스트를 내적으로 충실히 읽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매우매우요. (옛 텍스트를 읽고 일상적 관념에서의 깨달음이나 지혜를 얻을 게 아니라면요) 그리고 이는 선생님이 궁극적으로 동양사상을 통해 하려는 작업과 연관된다고도 생각하기에 제게 매우 중요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여전히 구만옥 교수의 저서 “세종시대의 과학기술”의 출판사 소개글이 밝히듯 “근대과학의 관점에 따라 전통과학 분야를 분류하고 그 가운데서 근대과학의 요소만을 추출해 재배열하는 근대주의적 관점에 의거할 경우, 전통과학이 출현하고 작동했던 사회적・지적 맥락이 사상되어버릴 위험성이 크고, 그 역사적 위상에 대한 평가도 자의적 해석이 되어 형평성을 잃어버리기 쉽”다고 생각하는데, 이에 대해 선생님께서는 선생님께서 언급하신 근대학문, 근대라는 단어에 ‘이전의 것을 마냥 따르지 않고, 나의 머리로 생각하고 내가 직접 찾겠다는 정신’ 만을 담은 것이라고 설명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근대학문을 그렇게 정의하는 게 타당한가? 그 기준이 근대학문과 고전학문을 가르는 기준으로 충분한 건가? 설령 그게 타당하다고 해도, 장현광의 성리학적 맥락을 제외하고 특정한 구절을 뽑아 근대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이는 건 적절한가? 그렇게 따지면, 여신(女神)이 말한 것일지라도 “논변으로 판가름하라”라고 말하는 파르메니데스 단편(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279)도 근대적인 건가? 어떤 권위에 의거하지 않고 자신의 논리적 생각을 통해 직접 판단하라고 하고 있으니까. 이런 논리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보고 시대를 앞선 사고, 선구적이었다라고 평가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5회 차 세미나를 위한 소감글에서도 인용했듯, ‘장현광이 수용한 주요 이론은 소옹의 역학적 관점에 상당히 가깝고 독창적인 부분이 있긴 했어도 여헌의 역학은 철저하게 성리학의 범주 내에서만 자유로웠던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세종대의 과학기술의 눈부신 성과를 두고(‘농사직설’, ‘향약집성방’, ‘훈민정음’, ‘고제 연구와 아악의 정비’, ‘천문 역법 사업’ 등) 이 시기 과학기술의 자주성을 치켜세우는 시각이 많았는데(우리가 해야 한다, 우리의 자주적인 게 중요하다라는 의식의 발로로 세종대에 과학기술은 뛰어난 성과를 이뤄낼 수 있었다, 같은 생각들) 사실 이 자주성이란 것은 중화세계라는 세계관 안에서의 자주성, 즉 중국의 사상과 과학기술을 철저히 익혀 자기화한 결과였습니다.(문중양, <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 다시 보기>) 저는 이게 장현광에게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격물의 대상으로 하늘과 땅을 비롯해 일월성신에서 비주초목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자연 세계에서 접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조목조목 거론하고 있으며, 이들을 직접 눈으로 관찰하거나 귀로 들어서 그 실상을 직접 파악해야 함을 강조”(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55) 했던 사실들도 성리학의 틀 안에서 모두 이해가 가능한 행동범위 안에서의 텍스트(주희희 격물치지에 대한 해석)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에서 격물이라 말하고 도리어 궁리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대체로 ‘궁리’라고 말하면 마치 허공에 매달려서 잡을 것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다만 격물이라 말하면, 저 형이하의 기에 나아가서 바로 저 형이상의 도를 찾으니, 여기에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음을 보게 된다. 때문에 다만 격물이라 말한 것이다.” - 주자어류 62권 - 안유경, 성리학이란 무엇인가, 250쪽에서 재인용)
그런데 사실 이런 질문보다 더 와닿았던 의문은, 근대를 그렇게 이해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게 크게 없는 것 같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근대를 그렇게 이해해도 저 짧막한 한 구절에는 내포되어 있는 명제, 판단, 사실들이 꽤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 문장은 내재적인 것뿐만아니라 관계적인 맥락안에서도 의미를 부여받으니까요) 굳이 거창한 담론을 끌어들지이 않아도, 선생님이 이야기하는 근대라는 단어에는 대단한 성과를 내놓은 근대과학의 발판으로서의 ‘자주적 정신’이라는 아우라가 있으며 이미 그 순간 근대와 관련된 여러 담론과 무관하지 않아집니다. 그 잣대로 보는 순간 장현광의 사상은 서구적 근대(선생님이 말씀하신 구절로만 이해한다고 하더라도)와 유사한 정도만큼 독창적이고 선구적이지만, 서구의 근대라는 정상성과 비교해 불완전하고 미흡한, 실패한 것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선생님은 메인 텍스트에서 동양 사상의 그런 불완전함, 미흡함에 대해 지적을 많이 하고 계시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장현광의 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그게 불가능했는지(프랑수아 줄리앙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왕부지에게 창조사상이 불가능함을 이론적으로 가늠하여 그에 따른 근본적 차이를 헤아려 보기 위함이다.”(운행과 창조,22))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은 자리잡기 힘들다고 생각(고민을 한다고 해도 피상적인 것으로 그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현광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을 막는 것이죠. 보고 싶은 것만을 보게 되기 때문에.
이제 다시 ‘동양인의 통합적 사고, 그런 사고가 지금 필요하기 때문에’라는 문제의식으로 다시 돌아와 보자면,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어서 5회 차 세미나를 위한 질문 첫 번째에 그와 관련된 글을 끼적이긴 했는데, 시간상 아쉽게도 직접 질문을 드리진 못했습니다. 제가 5회 차 세미나를 위한 소감에서 던졌던 첫 번째 질문은 이거였습니다. ‘책 초반에 <성학십도>>와 <심우십도>>가 “형식적 보조적 기능 이상의 특별한 의의를 지니는 것이 아니지만”이라고 나와있으나 사실 실질적 의미를 담고 있는 건 아닌가? 실질적 의미를 담고 있다면, 그렇게 실질적 의미를 담는 게 타당한 건가? 설령 형식적이고 보조적인 기능만했다고 하더라도 두 텍스트를 사용하는 방식은 적절했는가?’ 저는 저 두 텍스트가 선생님이 초반에 말씀하신 대로 형식적이고 보조적인 기능으로 사용되었다고 했을 때도 의문점이 있었고, 말씀하신 것과 다르게 책에서 그 이상의 실질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을 때도 의문점이 있었습니다.
우선 전자는, 형식적이고 보조적인 기능만했다고 하더라도 두 텍스트를 사용하는 방식이 적절했냐는 질문입니다. <성학십도>>와 <심우십도>>가, 메인 텍스트(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안에서 인용되고 사용되는 방식이 텍스트의 본 뜻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데 이게 이렇게 사용되는 게 적절하냐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본래 심우도에서 牛를 통해 표상하고자 했던 앎의 대상은 我, 子我, 心 등과 같은 대상이고, 이 텍스트는 궁극적으로 空을 깨달아 금강경 식으로 말하자면 중생을 제도 하는 과정을 담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 텍스트에서 인용하는 방식은, ‘앎’이라는 추상적인 키워드만 유사하다는 점에서, <심우십도>> 본 텍스트가 지니고 있는 내적인 연결성, 유기적 연결성이 모두 무너진 채로 사용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자의 질문은, 메인 텍스트에서 <성학십도>>나 <심우십도>>가 - 특히 <성학십도>>가 - 보조적, 형식적 기능을 넘어서는 위치에 있는 것 아닌지, 그런 위치에 놓는 것은 타당한지에 관한 질문입니다. 제가 특히 <성학십도>>가 단순한 보조적, 형식적 기능 이상의 위치에 놓여있는 게 아닌지 의문이 들었던 이유는, 이게 통합적 앎을 추구하기 위해 필요한 ‘어떤 체계이자 일관된 스토리 또는 기준’으로 사용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걸 통합하는 데 가장 중요한 줄거리와 뿌리를 찾는 일은 선생님이 강조하셨던 것이기도 합니다) 글의 구조를 보면, 칸트를 독해하셨던 텍스트에서 사용하시던 ‘앎의 바탕 틀’을 ‘앎의 바탕 구도’로 개념화하시고 각각 물리학 체계들 등을 앎의 바탕 구도라는 체계에 맞게 요약해 이를 <성학십도>>와 같이 열 가지의 그림으로 나열하시고 있습니다. 우주의 생성과 변화의 원리로부터 시작해 인간 세계의 가치 및 당위를 이야기하는 <성학십도>>의 맥락을 그대로 차용하고 계신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보면 <성학십도>>가 단순히 보조적, 형식적 기능을 넘어서는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많은 물리학적 지식을 통합할 줄거리로, 서사로, 스토리로, 체계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의도하신 바를 아직 명확히 아는 건 아니지만(앞으로 읽어나가야 할 책 분량이 더 많이 남은 만큼…) 적어도 이런 의도를 가지고 계셨던 거라면 문제는 좀 더 복잡해지는 것 같습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성학십도>>나 <심우십도>>는 대상으로 삼았던 나름의 맥락을 지닌 앎이 있었고, 그 앎을 각자 성리학적, 불교적 세계관 안에서 해설한 텍스트입니다. 각각의 그림은 각 장마다 내적으로도, 그리고 다른 그림과 관계적으로도, 그리고 ‘십도’라고 하는 전체적으로도 담긴 의미가 있을 만큼 유기적인 연결고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단순히, 통합적 앎을 추구했던 전형으로서 껍데기만을 이용하는 순간, ‘본 텍스트가 지닌 내적 연결성, 유기적 연결성은 모두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성학십도>>가 통합적인 세계관을 제시했다고 해서, 그게 <성학십도>>의 틀을 차용한 <심학십도>>가 통합적인 세계관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이야기와는 아주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껍데기 보다 더 중요한 건 통합적인 세계관을 이야기하는 구체적인 서사, 그리고 각 앎의 바탕 구도 사이의 관계, 앎의 바탕 구도와 서사와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2회 차 세미나 질문으로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전의 자연철학을 좇는다고 했을 때, 선생님의 자연철학은 그것과 어떻게 같고 또 어떻게 다른가? 단순히 복고주의인가? 아니면 진보가 있었나?” 이 질문은 앞서 ‘장현광과 근대’와 관련된 질문과 유사한 맥락에서 던진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애초에 현재와 같이 분화되고, 복잡해진, 기능화된 사회에서 ‘통합적인 사고’를 하려고 하는 행위가 과거와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 질 수밖에 없다고(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다른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복고주의로 회귀할 경우에는 과거에는 이랬으니 이걸 따라서 현재에도 해보자, 그걸 본받자 등과 같은 피상적인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장현광과 근대에서 계속 강조했던 것처럼, 내재적인 독해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결과가 그 피상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내재적인 독해가 중요한 이유, 동서문화비교 분야의 권위자였던 프랑수아줄리앙이 왕부지의 이야기를 하면서 중국 사유를 18세기와 ‘같이’ 표현할 수 있기를 욕망했던 이유기도 합니다. 제 생각에, ‘통합적 사고’와 관련해 내적으로 충분히 읽는다는 건, 이런 질문을 더 던져보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 성리학적 세계나 스토아학파적 세계에서 제시한 통합적 세계관, 통합적 사고가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현대에는 왜 그런 통합적 사고가 점차 없어진 걸까? 이 두 질문을 깊이 파고들어봐야 단순한 복고주의가 아니라, 현대적으로 재해석되고 재구성된, 그럼으로써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통합적 사고의 틀을 직조하는 게 가능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저 두 질문을 계속 염두에 두어야 더 구체적인 다른 질문을 던져보고 그에 따른 다른 의미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 쉽지 않은 작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애초에 인간의 의미와 가치의 문제를 언급하려면 ‘감정’에 대한 언급을 빼놓을 수 없는 거 아닐까?’, 뫼비우스의 띠의 문제는 그 관계를 구체적으로 사고하고자 한다면 엄청나게 복잡해질 텐데 이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셀라스Willfrid Sellars의 주요 문제의식으로 해결하고자 한참을 노력했던 게 과학적 이미지와The Scientific Image 현시적 이미지The Manifest Image 사이의 관계가 아니었던가?’, ‘십도十圖를 “말로 전하기 어려운 내용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하셨는데 과연 그랬나? <성학십도>>의 독자는 선조가 아니었던가? 이건 士들이 해석하고 소비하는 텍스트였는데, 그렇다면 이건 대중에게 전체 그림을 쉽게 전달하는 것이라기보다 특정 과목의 중간고사 범위의 내용을 교육받은 학생들에게 선생이 제공하는 요약본에 가까운 건 아닐까? <성학십도>>에 담긴 글은 당시 士나 王이 어릴 적부터 계속해서 접했던, 삶과 밀접했던 것들이었으니까.’ 이런 다양한 질문도 떠올랐는데, 추후에 이야기 해볼 기회가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언급했던 통합적 사고에 관한 이야기가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충분히 논리적으로, 구체화한 상태로 이야기를 풀어놓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직 제 머릿속에서도 잘 정리가 된 것 같지 않네요…
겨울나무님의 글이 참 많은 생각을 자아냅니다. 문득 이 글은 답글 중 하나로 쓰시는 것보다 독립된 포스팅으로 올려 주시면 이 글에 담긴 생각을 놓고 더 편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로 독립된 글로 하나 더 올려 주시면 어떨까요?
넵 알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겨울나무님! 장회익선생님께서 답해주셔야할 내용이 아주 많이 담겨있네요.
저도 왜 동양에서 출발했다가 돌아와야 하는지, 왜 여헌 얘기가 1장이고 태극도설이 10장인지에 대해서 선생님께서 너무 소박하게 답해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미리 가르쳐주면 스릴이 사라질까봐 그러시는 걸까요? ^^; 제가 이해한 바로는 그렇게 소박하지도 전혀 단순하지도 않고 분명한 이유가 있거든요. 그리고 그것이 선생님께서 이 책을 쓰신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도 댓글이 아니라 새글로 올려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넵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