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온라인 세미나(2022년) 후 제출하는 서평입니다.

박용국 (녹색아카데미)

“나는 어떠한 세계에 사는 어떠한 존재이며, 그렇기에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나?” 10장에서 언급된 이 질문은 인간이 갖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가장 망각하기 쉬운 질문이기도 하다. 장회익 교수님께서 지적하셨듯이, 학문 분야들이 전문화되고 파편화되면서 이러한 근본적 질문에 대한 진지하고 통합적인 접근이 오히려 쉽지 않은 환경이 되어버린 측면도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위해서는 우주와 인간에 대한 통합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우주란 무엇이며, 그 안에서 탄생한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그에 기초하여 인간의 삶, 그리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이하 <자연철학 강의>)에는, 우주와 인간에 대한 통합적 이해를 위한 치열한 사유 여정이 여실히 담겨 있다.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하는 과정 속에서, 선학들이 이루어낸 지적 성과들을 녹여내어 새로운 통합적인 앎의 체계를 그려나가는 작업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마디로, ‘온전한 앎’을 향한 여정이 녹아있다. 

 <자연철학 강의>에서 말하는 온전한 앎은, 흔히 빅히스토리에서 이야기하는 단선적 방향의 서사가 아니다. 즉, 빅뱅에서 시작하여 물질이 탄생하고 태양계와 지구가 형성되며, 지구 위에 생명체가 탄생하고 이후 의식이 탄생하는 단방향의 서사가 아니다. 일원이측면론을 제안하면서 물질로 이루어진 생명체로부터 의식이 발생하는 사건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가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뒤집힌 것과 같다. 이렇게 의식적 주체의 측면이 표층에 드러나면서 인간의 문명이 발전하였고, 문명의 한 부분으로서 자연에 대한 사유 역시 발전하였다. 자연에 대한 사유란 곧 뫼비우스의 바깥띠를 이루는 물질에 대한 사유이다. 이 지점에서 뫼비우스의 띠는 다시 바깥쪽으로 뒤집히면서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

[그림 1] 십우도 혹은 심우십도

 <자연철학 강의>에서는 이러한 사유 여정을 십우도와 연결시켜 10개의 장면으로 엮어냈다. 1장에서 5장까지는 자연의 기본원리에 대한 이해가 발전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선학들의 작업 성과에 대한 소개와 함께, 곳곳에 저자의 새로운 통찰들이 담겨 있다. 특히 양자역학에 대해 설명하는 4장에서는, 서울해석의 기초가 되는 이론적 틀이 등장한다. 저자는, 자연의 기본원리에 대한 이해가 발전해가는 과정을 소의 자취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소를 얻고 길들이는 과정에 비유하고 있다. 이렇게 얻은 자연에 대한 기본원리를 구체적으로 적용하여 우주의 시초부터 현재까지의 존재양상을 물리적으로 개관할 수 있다. 6장에서 이 작업을 수행하며, 마치 이것은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풍광을 즐기는 것과 같다. 물리적 존재양상이 펼쳐진 가운데, 지구 위에서는 매우 독특한 구조가 출현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7장에서 다루는 생명이다. 생명의 본질적 특성에 대한 저자의 오랜 고찰과 사유과정을 통해, 기존의 생명개념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내고 온생명이라는 새로운 통찰이 담긴 개념을 설득력있게 제안한다. 

[그림 2] 뫼비우스의 띠

 일반적인 물리적 구조물과는 다른 독특한 특성을 갖는 생명의 탄생도 매우 놀라운 일이지만, 생명이라는 구조물의 진화 과정에서 나타난 의식의 탄생 역시 매우 신비로운 일이다. 8장에서는 바로 이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히, 인간의 의식에서 나타나는 ‘나’라는 주체 의식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일원이측면론을 주장하면서, 인간은 물질적 몸을 지닌 객체이면서 동시에 ‘나’라는 의식을 지닌 주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 실체의 두 측면이 주체와 객체이며, 이는 뫼비우스의 띠가 하나이지만 바깥쪽(객체적 양상)과 안쪽(주체적 양상)을 모두 갖는 것으로 모형화해볼 수 있다. 우주와 생명의 바깥쪽만 관찰하는 것은 부분적 앎만을 형성할 것이며, 온전한 앎에는 안쪽에서의 주체적 양상이 포함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뫼비우스의 띠는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뒤집어진다. 이 영역에서 일어나는 주체적 활동을 통해 인간은 문명을 일구어냈다. 또한 8장의 내용 중 빠뜨려서는 안될 중요한 통찰은, ‘나’라는 의식이 그리는 경계선을 확장시켜 7장에서 등장한 온생명이라는 물리적 구조와 합치시키는 것이다. 온생명 역시 일원이측면론의 관점에서 객체적 양상과 주체적 양상 모두를 가질 수 있으며, 낱생명에 국한된 ‘나’의 경계를 온생명으로까지 확장시킬 수 있다. 이렇게 온생명 속에 여러 낱생명들이 존재하며, 여러 낱생명 속에 온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저자의 통찰은,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불교 화엄사상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나’의 범위를 온생명까지 확장시킬 때, 생명의 주체적 운영이라 부를 수 있는 ‘삶’은 낱생명인 ‘작은 나’만을 위한 것에서 온생명인 ‘큰 나’를 위한 것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온전한 앎 속에 ‘삶’의 지침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앎’이란 무엇인가? 온전한 앎을 위해서는 앎 자체에 대한 앎이 필요하다. 1장에서 5장까지에서 다룬, 인간이 자연의 기본원리를 밝혀나간 여정은, 물질세계에 대한 인간의 앎이 확장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앎이라는 것은, 물리적 바탕 위에서 일어난 물리적 현상이면서 동시에 의식 안에서 인지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결국, ‘물질세계’라는 대상에 대해 ‘물리적이면서 동시에 의식적인 활동’인 인간의 앎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뫼비우스의 띠가 다시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뒤집힌다. ‘내면의 의식적 활동’, 그리고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물리적 과정’, 또한 앎의 대상이 되는 ‘물질세계’가 어떻게 서로 결합되는지에 대한 구조를, 9장에서는 역학 모드, 서술 모드, 그리고 의식 모드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보여준다. 이러한 앎의 구조는 ‘앎 자체에 대한 앎’이라 할 수 있다. 이 구조를 통해, 4장에서 소개된 서울해석이 제시하는 새로운 존재론이 더욱 부각된다. 즉, 물리적 세계의 존재론적 구조가 상태층과 사건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상태층의 대상세계는 변별체와 만나 사건을 발생시키며, 서술주체는 사건층에 의한 경험표상을 통해 대상의 상태를 추론하고 향후의 상태 변화를 예측한다. 이렇게 앎의 구조까지 살펴보고 나니, 뫼비우스의 띠는 다시 뒤집어져 원래의 출발점으로 되돌아왔다.

앎의 대상인 ‘자연의 기본원리’는 이 책의 출발지점이었다. 이렇게 ‘온전한 앎’의 모형인 뫼비우스의 띠는 완결된다. 이 거대서사에는, 우주의 시작부터 생명의 탄생, 의식의 출현, 인간의 의식과 몸의 관계, 그리고 의식과 몸을 가진 인간이 앎의 주체로서 물질세계에 대한 앎이 이루어지는 구조적 틀을 포함한다. 10장에서 그려지는 온전한 앎의 모형에서, 뫼비우스의 띠라는 기하학적 구조 위에 정합적 관계 속에서 위의 사항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온전한 앎’의 모형을 통해, 마치 어떤 지역을 지구본이라는 틀 위에 정확히 표시하고 위치시킬 수 있듯이, 우리는 앎의 내용들을 정합적이고 자기완결적인 틀 위에 위치시킬 수 있다. 선학들로부터 내려온 그리고 앞으로 새로 밝혀낼 지적 성과들을 위치시킬 수 있는 모형을 확보한 셈이 된다. 더 나아가 온생명이라는 통찰은, ‘앎과 삶’이 분리되지 않게 하며, 삶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해준다.     

 <자연철학 강의>에 대한 개괄에 이어,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내용들에 대해 추가적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앎 자체에 대한 논의이다. 정합적인 앎의 체계를 구성하는데 필수적이고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면서도 많은 경우 도외시되는 주제이다. 앎을 이야기할 때 앎의 주체와 앎의 대상을 논의해야 하는데, 앎의 주체 즉 앎을 다룰 주체적 몸은 일정한 구성요소들을 지닌 조직을 이루어야 한다고 <자연철학 강의>에서는 말하고 있다. 돌멩이나 다람쥐는 모두 외부의 물리적 자극에 의해 특정 운동이 일어나지만 돌멩이가 외부 대상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외부의 물리적 자극에 대한 다람쥐의 반응은 물론 역학적으로도 기술될 수 있겠지만, ‘앎’의 측면에서 볼 때 새로운 모드의 기술방식이 필요하다. 정보의 연산과정이라는 관점에서의 기술방식이 서술 모드이며, 앎의 주체적 몸은 역학 모드 뿐만 아니라 서술 모드에도 놓인다. 돌멩이는 역학 모드에만 놓이기 때문에 앎의 주체라 간주할 수 없다. 다만, 여기서 서술 모드가 가능한 ‘일정한 구성요소들을 지닌 조직’이 구체적으로 어떤 기준을 만족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추가적인 논의는 필요할 것이라 생각된다. 역학 모드와 서술 모드 외에, 앎의 주체 중 최소한 일부는 의식을 갖고 있고, 그러한 의식 주체는 의식 모드에도 놓여 있다. 하지만 앎의 주체가 되기 위해 반드시 의식 모드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림 3] 심학 제9도.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장회익. 2019). p.479.

 앎 중에서도 물리적 대상에 대한 예측적 앎에 한정하여 논의를 계속해보자. 앎의 주체는 앎의 물리적 대상과 변별체를 매개로 조우한다. 양자역학의 서울해석은 이러한 앎의 구조를 매우 강조한다. 양자역학에 대한 많은 오해들이 앎의 구조에 대한 논의를 도외시함으로써 발생한다고 서울해석은 보기 때문이다. 

 서울해석에 의하면, 앎의 물리적 대상은 상태층과 사건층이라는 2개의 존재론적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 물리적 대상은 ‘사건을 야기하는 성향’으로 존재하며, 이 상태층은 상태함수로 표현된다. 대상은 특정한 위치와 운동량을 갖는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고전적 관념과는 달리, 양자역학에서의 대상은 변별체와 조우시 사건을 야기할 성향으로서 존재한다. 변별체와 만나면 사건 또는 빈-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이것은 대상의 사건층을 이룬다. 물리적 세계가 상태층과 사건층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관점은, 고전적 실재성이 부정되면서 혼란 속에 있던 양자역학 해석 문제의 많은 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서울해석의 중요한 존재론일 것이다.

 양자역학 형성 초기,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보어는 상보성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하지만 서울해석의 존재론에 의하면 이중성 문제는 애초에 발생하지 않으며 상보성을 도입할 이유도 없다. 물리적 대상은 변별체와 조우하기 전에는 상태층으로 존재하며, 이로 인해 마치 파동의 특성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변별체와 조우하면 사건의 흔적을 남기며, 이로 인해 마치 입자의 특성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또한 측정 문제와 관련, 서울해석에서는 변별체를 앎의 주체로 간주하였으며, 따라서 변별체의 기능 수행에는 의식 모드의 존재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보았다. 이중 슬릿 실험에서, 빛이나 전자는 슬릿에 설치된 변별체와 만나면서 사건 또는 빈-사건이 야기된다. 이 과정에서 의식을 가진 주체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서울해석의 입장이다. 서울해석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의식있는 관찰자가 상자 문을 열고 고양이의 생사를 확인할 때까지 상태가 중첩되어 있지 않다고 본다. 다만, 변별체의 구체적 조건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에서는 상자 안의 공기 분자가 변별체 역할을 하지만, 이중 슬릿 실험에서는 공기 분자가 변별체 역할을 하지 않는다. 같은 공기 분자이지만 변별체로서의 역할 수행 여부가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또한 서울해석에서 변별체는 하나의 앎의 주체(인식 주체)로서 간주되지만, 따라서 역학모드 뿐만 아니라 서술모드에도 놓여있어야 하지만, 앞에서의 논의에서도 보았듯이 공기 분자가 서술모드에 놓여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서울해석의 존재론은 기존의 고전적 존재론과는 다르다. 양자역학의 발전으로 인해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서울해석은 앎의 문제 및 존재론부터 근본적으로 다루었다. 세계는 특정 위치와 운동량을 가진 입자들의 집합체가 아니다. 또한 입자와 파동의 상보성을 갖는 물질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서울해석의 존재론에 의하면, 세계 속 물리적 존재자들은 사건 야기 성향이라는 상태로 존재하며, 변별체와 조우하면서 사건의 흔적을 남긴다. 

 <자연철학 강의>에서는 기본적인 앎의 틀 위에 4가지의 공리로 양자역학을 정식화한다. 여기서 특기할 점은, 제시된 공리에 의해 위치-운동량, 시간-에너지 불확정성 원리가 자연스럽게 도출된다는 것이다. (또한 3장 특수상대성 이론 부분에서는 시간에 ic라는 상수를 곱해 공간 성분의 하나로 편입시키는 과정, 즉 시간에 허수를 곱하면 공간 성분과 동일하게 취급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자연철학 강의>에서 이루어지는 생명에 대한 깊이있는 고찰은 생명의 단위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자연계의 국소질서들을 살펴보면 매우 특수한 성질을 지닌 국소질서를 맞닥뜨리게 된다. 이 국소질서는 복잡한 내부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자유에너지를 증가시키는 반응을 끊임없이 이어나간다. 이를 위해 주변 환경에 의존하여 높은 자유에너지를 가진 물질을 획득하며, 이를 통한 자유에너지 감소 반응을 내부구조 유지를 위한 자유에너지 증가 반응과 커플링 시킨다. 이 과정 중의 하나가 자신을 촉매로 스스로를 복제하는 반응이다. 이러한 국소질서를 <자연철학 강의>에서는 자기촉매적 국소질서(자촉질서)라 부르고 있다. 하지만 자촉질서를 곧바로 생명이라 부를 수 있는가? 개개의 자촉질서에 온전한 생명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위와 같은 생명활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햇빛을 포함한 주변의 바탕질서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자촉질서들과 바탕질서를 모두 포함시켜 생명의 자족적 단위를 상정한 것이 온생명이며, 이것은 태양-지구계에 해당한다. 낱생명으로서의 자촉질서는 다른 자촉질서 및 바탕질서와 서로 의존하면서 커다란 하나의 자족적 단위를 형성한다.  

 ‘나’라는 주관적 의식이 그리는 경계선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위와 같은 온생명의 이미지와 맞물리면 나의 경계는 온생명 전체로 확장될 수 있다. 많은 종교적 체험들은 나를 한 몸에 국한시키는 소아(小我)에서 벗어나, 신 또는 전체와 합일되는 느낌과 함께한다고 본다면, 나의 경계를 온생명 전체로 확장시키는 것은 종교적 감정과도 연관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이는 삶에 대한 태도와 삶의 방향성 설정과도 밀접하게 연관될 수 있다. 온전한 앎에 대한 추구가 바른 삶의 길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자연철학 강의>에서는 보여준다. 뫼비우스의 띠 안에서, 앎의 길과 삶의 길은 합쳐진다.

 지금까지 장회익의 자연철학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펼쳐 보았다. 끝으로 덧붙이고 싶은 것은, ‘장회익의 철학체계’ 뿐만 아니라 ‘장회익의 철학하기’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감히 추정하는 바, 장회익 교수님께서는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그 해답을 추구하는 여정 속에 있으셨던 것 같다. 10장에서 언급된 “나는 어떠한 세계에 사는 어떠한 존재이며, 그렇기에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나?”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은 이 책에서 심우십도의 심(尋)과 성학십도의 학(學)을 결합하여 만든 심학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선학들의 성과들을 탐색하면서 스스로 깊이 사유해가는 것이 ‘장회익의 철학하기’라 여겨진다. 이 철학하기에는 메타적 접근이 포함되는 것 같다. 어떤 체계 내에 있는 자신을 체계 밖으로 이동시켜 체계 전체를 조망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구체적 행위들에 대한 관심이 삶 내에서의 접근이라면, 인간이란 무엇이며 삶이란 무엇인지 조망하며 구체적 행위들과 연관시키는 작업은 메타적 접근이다. 이런 의미에서 위의 근본적인 질문은 삶에 대한 메타적 질문이며 여기에서 메타삶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과학과 과학 활동 밖으로 나와 이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스스로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메타과학이 나올 것이다. 9장에서 인용된 아인슈타인의 <물리학과 실재> 논문에서는 ‘일상적 사고의 성격 분석이라고 하는 더욱 어려운 과제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라는 언급이 나오는데, 이것은 일상적 사고 과정을 대상으로 하는 메타적 사고라 할 수 있다. 9장에서는 이 작업의 일환으로 ‘앎’이라는 활동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메타앎에 대해 다루며, 그 결과물로 심학 제9도가 등장한다. 메타적 접근은 근본적이고 깊이있는 사유로 이끈다. 메타적 접근은 우리를 철학하게 한다. 

 메타적 접근의 대상에 자기자신이 포함되면 일종의 역설이 발생한다. 메타앎의 경우, 앎 자체에 대해 인식하고 있는 메타앎의 주체는 내부에 있는 앎의 주체와 동일하다. 즉, 자기자신이 앎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앎의 대상이 된다. 에셔의 작품, ‘판화 화랑’에서와 같은 상황이다. <괴델,에셔,바흐>의 저자인 호프스태터가 말하였던 이상한 고리(strange loop)가 형성된다. <자연철학 강의>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앎의 구조의 기하학적 모형으로 채택된 뫼비우스의 띠는 이상한 고리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바깥쪽 면을 따라 이동하면 안쪽면을 거쳐 결국 원점으로 되돌아오게 되는 띠의 구조는, 안과 밖이 겹쳐지는 역설 구조의 이미지가 내포되어 있다. 

 결국 뫼비우스의 띠로 형상화되는 심학 제10도에는 앎과 삶 뿐만 아니라 메타앎과 메타삶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양자역학의 공리체계로 정식화되는 존재론, 메타앎의 인식론, 온생명과 연관된 가치론이라는 철학의 주요 주제가 모두 담겨 있다. 

 ‘장회익의 철학체계’ 뿐만 아니라 ‘장회익의 철학하기’에도 관심을 갖는다면, <자연철학 강의>의 철학에 대해서도 스스로 살펴보고 자신만의 근본적인 질문들과 연관지으며 사유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시간이 공간성분과 동일하다는 통찰이나 양자역학의 공리체계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닌만큼, 과정을 무시하고 결론만 받아들이기 보다는, 왜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되었는지 비판적 사유를 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철학 강의>를 읽고 이에 대해 사유하는 과정은 ‘장회익의 철학’에 대해 이해하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철학하기의 과정이기도 하다. 10장에서의 언급처럼 심학 제10도는 잔가지들을 걷어내고 전체적인 지형을 그린 만큼, 생략되거나 거친 부분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부분들을 채워나가는 일은 후학들의 몫일 것이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