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9년 아산에서 열렸던 “온생명론 작은 토론회”(녹색아카데미 주최)에서 발표했던 것입니다. 온생명과 가이아 개념을 사가드(P. Thagard)의 이론을 이용해 비교하였습니다. 2023. 9 -2024. 9에 걸쳐 진행하고 있는 “장회익과 장회익 저작(생명, 문명) 읽기” 모임과 관련해, 『삶과 온생명』(장회익, 2014)을 읽으실 때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아 이곳에 올립니다. 다른 곳에 나누고자 하실 때에는 링크만 공유해주세요.
최우석 (녹색아카데미 온생명론 연구모임)
1. 왜 다시 ‘온생명과 가이아’인가?
아직까지 온생명 개념은 충분히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이 개념을 엉뚱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고, 구체적인 오해는 없다하더라도 전반적인 맥락을 사뭇 다르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온생명 개념과 여타 생명 개념들 사이의 차이가 충분히 검토되지 않았다는 점도 혼동의 배경의 하나로서 고려해야 할 것이다. 어떤 개념을 충실하게 이해하는 데에서 다른 개념과의 차이에 대한 인식은 빼놓을 수 없다. 따라서 어떤 개념이 제시될 때 우선해야 할 일은 다른 개념과의 공통점을 드러내는 일보다는 차이를 드러내는 일이다. 차이점을 찾기 힘들 경우 그 개념은 존재 의의를 갖지 못할 것이다. 훌륭한 개념인지 그렇지 못한 것인지 하는 평가는 그 고유성을 인정받고 난 뒤의 일이다.
온생명 개념과 다른 생명 개념들 사이의 차이를 꼼꼼하게 검토해 나가겠다고 할 때 비교 목록의 맨 앞에 올 것은 아무래도 가이아(Gaia) 개념이 될 것이다. 온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접할 때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가이아를 떠올린다. 그리고 같은 개념은 아닌지, 다른 점이 있는지를 묻는다. 사정이 이러한지라 이 둘을 비교한 사례는 이미 몇 차례 있었다. 온생명론의 주창자 장회익 자신이 가이아 이론을 검토하면서 가이아와 온생명의 차이를 검토한 바 있고(장회익, 1992), 조용현(2003)과 홍욱희(2003)도 이 두 개념을 비교하였다. 하지만 이 문헌들을 통해 충분하게 두 개념 사이의 차이점이 다루어졌다고는 보기 힘들다.
우선 장회익(1992)는 온생명과 가이아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점을 개념의 포괄 범위와 생명의 주체라는 점에서 드러내고 있지만 본격적인 비교 작업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간략하고 일면적이다. 홍욱희(2003)은 적어도 개념의 측면에서는 온생명과 가이아가 다르지 않다고 보는데 이것은 온생명 개념에 대한 오해로부터 얻어진 결론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많다. 그는 ‘온생명의 물리적 실체’를 “지구에서 처음 생명체가 탄생했을 때부터 시작하여 이제까지 살았던, 그리고 현재도 살고 있고 앞으로도 영속할 모든 생물들의 집합체”라고 보고, 이런 까닭에 “온생명의 물리적 실체는 바로 가이아라는 몸체의 생물적 부분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결론짓고 있다(홍욱희, 2003: 160-161).
하지만 아무리 읽는 이의 해석의 자유를 인정하더라도 주창자가 제시하는 정의와 전적으로 배치되는 이런 이해를 오해가 아닌 또 하나의 해석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조용현(2003) 역시 부분적으로는 온생명 개념을 오해하고 있지만 적어도 개념의 외연이 가이아와 다르다는 점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두 개념의 훌륭함이나 취약점을 평가하기에 앞서 둘 사이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그리고 풍부하게 드러내 보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장회익이 설정한 ‘생명의 단위’라는 문제의식을 비판, 또는 도외시하는 가운데 온생명을 생명의 단위로 보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결론을 짓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태양-행성계’를 단위로 삼느냐 아니냐 하는 것 말고는 온생명과 가이아 사이의 차이를 더 이해해 보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만족스럽지 못하다.
다른 무엇보다도 아쉬운 것은 온생명과 가이아 개념을 비교한 이들 작업에 이렇다 할 만한 비교의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개념 문제를 설명하는 적절한 이론에 근거하여 개념의 차이를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한다면 온생명과 가이아 개념 사이의 차이는 여러 방면에 걸쳐 더 분명하고 더 극적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개념 간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을 동원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온생명 개념을 수용하거나 배척하거나 하기에 앞서 이 개념을 잘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앞으로 비교가능한 여러 가지 생명 개념들과 온생명을 하나하나 심도있게 비교해 나가면서 차이점을 풍부하게 이해하려 애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점은 온생명과 가이아의 비교가 적당하다. 나는 이 둘 사이를 비교하는 데에는 폴 사가드(Paul Thagard)가 제시하는 개념체계에 관한 이론과 장회익의 의미기반에 관한 이론이 적절한 방법론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아직은 작은 아이디어의 얼개를 가다듬어 보는 수준에 불과한 이 글에서는 이 두 이론을 방법론으로 삼아 두 개념의 개념체계와 의미기반을 파악해 비교하는 방법으로 두 개념 사이의 차이를 이해해 보고자 한다.
2. 개념을 이해하는 시각의 변화와 개념체계
아직까지 여러 분야의 많은 학자들이 개념은 그 정의(definition)를 통해 의미가 분명해질 수 있다고 보고 있으나 개념 문제를 깊이 연구하는 분야에서는 이런 견해를 고전적 견해(the classical view), 또는 고전 이론(the classical theory)이라 보고 비판한 지 오래다(Medin, 1989). 고전 이론이 비판된 뒤 여러 가지 개념에 대한 이론들이 대두하였는데 오늘날에는 개념을 낱낱의 원소처럼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개념들과 연대하여 의미 체제를 형성하고 있는 구조로서 이해하는 견해가 크게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개념에 대한 구조적 관점 중에서 개념과 개념 사이의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그 차이의 심연을 평가하는 데 도움을 줄 만한 이론은 단연 사가드(Thagard, 1992)의 개념체계(conceptual system)에 관한 이론이다. 사가드는 아래와 같은 요소들을 포함한 ‘복합 구조(complex structures)’로 개념을 이해하는데(1992: 29-30) 이 중 위계 구조(hierarchies)를 이루는 종류-관계(kind-relations)와 부분-관계(part-relations)가 기초가 되는 중요한 요소라고 본다.
개념:
(Thagard, 1992: 30)
~의 한 종류(a kind of):
하위 종류들(subkinds):
~의 한 부분(a part of):
부분들(parts):
비슷한 것들(synonyms):
상반되는 것들(antonyms):
규칙들(rules):
예들(instances):
개념을 복합 구조로 본 데에 기초해서 사가드는 개념의 체계, 또는 개념의 위계(conceptual hierarchy)를 종류-위계, 부분-위계로 조직된 개념들과 그 개념들을 잇는 규칙들로 구성된 것으로 제시한다. 개념체계는 이렇게 볼 때 마디(nodes)들의 그물망(network)으로 분석할 수 있는데 개념들이 각각의 마디에 해당하고, 개념들 사이의 연결고리(links)가 바로 마디를 잇는 그물망 안의 선에 해당한다. 개념들을 잇는 연결고리에는 종류 고리, 사례 고 리, 규칙 고리, 속성 고리, 부분 고리 다섯 가지가 있다. 아래의 <그림 1>은 개념 위계의 한 예이다. 종류 고리(K) 는 “카나리아는 새의 한 종류이고, 새는 동물의 한 종류이다”와 같은 의미를 나타내고, 사례 고리(I)는 “트위티는 카나리아다”와 같은 뜻을 나타낸다. 규칙 고리(R)는 “카나리아는 노란색을 띤다”, 속성 고리(H)는 “트위티는 노랗 다”와 같이 읽을 수 있고, 부분 고리(P)는 “부리는 새의 한 부분이다”와 같은 의미를 상징한다.
이렇게 개념체계를 이해하면 개념의 변화(conceptual change)는 마디와 고리의 추가 및 삭제로 구성된다. 새 개념의 마디, 새 종류 고리, 새 규칙 고리가 추가되는 경우가 변화들의 대부분이다. 이런 변화는 마디들과 여러 가지 고리들이 동시에 무리져 추가되는 등 한꺼번에 생기는 경우가 많은데 이 중 가장 극적인 변화는 새 개념 마디와 고리가 과거의 것을 대체해 버리는 경우이다. 물론 일부가 대체되더라도 남는 부분이 있다면 연속성은 유지된다. 수준이 다른 여러 가지 변화가 있을 수 있지만 종류-관계와 부분-관계에 변화가 일어나면 대체로 마디나 고리의 단순한 가감과는 질적으로 다른, 개념체계 자체의 재구성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이 종류-관계와 부분-관계가 우리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존재론적 질문을 반영함으로써 우리 개념체계의 근간을 이루기 때문이다.
사가드(Thagard, 1992: 35)에 따르면 개념체계의 구조적 변화로 이해할 수 있는 개념 변화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는데 아래의 <표 1>은 개념 변화의 정도 차이를 9단계로 정리한 것이다. 위쪽은 그 정도가 미약한 단계인 반면, 아래로 갈수록 그 정도가 심각한 단계이다. 이 중 1~3단계는 단순한 믿음의 교정(belief revision)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의 단계는 믿음 교정 이상이다. 개념 위계의 수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가드는 여기서부터를 개념 변화로 본다. 관계 혹은 개념이 추가되거나 빠진다는 것은 개념 체계 자체의 변화를 의미하며, 개념들의 망을 재편성하는 단계(7, 8단계)나 위계의 성격 자체를 재정의하는 단계(9단계)에 이르게 되면 그 변화의 폭과 깊이가 심대하다. 특히 7단계까지는 과학적 지식의 발달에서 비교적 흔하게 볼 수 있는 변화라고 한다면 가지 건너뛰기나 나무 바꾸기의 단계는 과학혁명과 연관된 매우 드문 사건이라고 사가드는 말한다.
<표 1> 개념 변화의 정도 (Thagard, 1992: 35)
- 새로운 사례 추가
- 새로운 약한 규칙의 추가
- 새로운 강한 규칙─문제 해결과 설명에서 빈번히 역할을 하는─의 추가
- 새로운 부분-관계 추가: ‘분해(decomposition)’라고도 불림
- 새로운 종류-관계 추가: 구분되던 두 종을 잇는 새 종류가 추가되는 ‘융합(coalescence)’과 한 종을 서로 다른 것으로 구분하는 ‘분화(differentiation)’ 등이 있음
- 새로운 개념 추가
- 종류-위계의 부분적인 붕괴: 이전의 구분 방식은 폐기
- ‘가지 건너뛰기(branch jumping)’에 의한 위계 재편성: 위계 나무의 한 가지에서 다른 가지로 개념의 위치 이동
- ‘나무 바꾸기(tree switching)’: 위계 나무의 조직 원리의 변화
<그림 2>는 다윈 혁명에서 볼 수 있는 8단계의 ‘가지 건너뛰기’에 의한 위계 재편성의 예이다.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다윈 혁명을 통해서 애초에는 동물 전체와 구분되는 특수한 존재로서 위치하던 인간 개념이 동물의 한 종류이자 영장류의 한 종류가 되는 개념으로 체계상의 위치, 또는 지위가 변화하였다. 사가드에 따르면 이는 매우 큰 개념 변화에 해당한다. <그림 3>과 <그림 4>에서는 천문학 혁명에서 볼 수 있는 9단계의 ‘나무 바꾸기’의 예이다. 조직 원리의 변화는 나무 구조 자체의 가시적인 변화도 낳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 경우는 조직 원리에서부터 나무 구조까지 모두 변화하였다. 이 경우 별이나 행성 등은 외견상 같아 보여도 개념 체계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였기 때문에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사가드는 이처럼 개념을 개념체계로 이해하는 이론을 수립한 후 이를 바탕으로 역사상의 과학혁명들을 분석한다. 경합하는 개념들을 개념체계로 이해할 때 과연 여러 가지 과학혁명의 사례는 체계상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이며, 그 개념 변화는 얼마 만한 정도의 것이었는지를 평가해 본 것이다. 그의 작업은 아래와 같이 요약된다.
화학혁명에 대한 면밀한 분석은 종류-관계와 부분-관계 모두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준다(3장). 다윈은 인간을 특별한 피조물이 아닌 동물의 일종으로 재분류함으로써 종류-위계를 크게 다시 짰을 뿐만 아니라 겉보기에 닮았다는 점에 근거한 종류(kind) 관념을 공통의 조상에 기초한 역사적 개념으로 교체함으로써 종의 의미를 뒤바꾸어 놓았다(6장). 지질학 혁명에서는 판구조론이 대륙과 해양지각을 포함하는 종류-위계와 부분-위계의 재조직화를 가져왔다(7장). 8장에서 논의되는 물리학에서의 혁명들 또한 종류-위계와 부분-위계에서의 탈바꿈을 보여준다. 코페르니쿠스가 일구어낸 혁명의 한 주요한 요소는 지구를 행성의 일종으로 재분류한 것이었다. 뉴턴은 무게와 질량을 구분짓고, 중력을 구심력의 일종으로 다시 구상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질량과 에너지를 질량-에너지의 통일체가 각기 달리 드러난 것으로 봄으로써 뉴턴 역학과는 매우 다른 개념 편제를 가져왔다. 게다가 공간과 시간이라는 상식적인 개념들을 시-공간 통합 개념으로 대체하여 부분-관계의 의미를 극적으로 바꾸기까지 하였다. 마지막으로, 양자 이론은 파동과 입자 사이의 구분을 흐렸는데 빛의 파동은 양자화되고 입자는 파장을 갖기 때문이었다.
(Thagard, 1992: 7-8)
사가드의 논의는 개념의 체계와 변화에 관한 것을 넘어서 과학혁명의 사례들을 ECHO라고 하는 프로그램으로 분석해 볼 때 ‘설명적 정합성(explanatory coherence)’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변화가 일어났다는 논의로 이어지지만 이 글에서는 온생명과 가이아 개념을 비교하는 데 방법적 기초가 되는 개념체계 이론만 소개하기로 한다.
사가드의 개념체계 이론은 위의 과학혁명 분석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경합하는 개념들이 있거나 한 개념에서 다른 개념으로 개념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 그 변화의 실상을 분석하고 변화 또는 차이의 정도를 평가할 수 있는 매우 좋은 방법적 기초가 된다. 온생명 개념과 가이아 개념의 체계를 사가드가 제시한 바와 같이 종류-관계와 부분-관계를 중심으로 도해하게 되면 두 개념체계 사이의 차이를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으며, 나아가 <표 1>의 아홉 단계에 맞추어 그 차이의 정도를 평가할 수 있다. 이 글의 네 번째 단락에서 사가드의 이론에 따라 온생명과 가이아의 개념체계를 도해, 비교해 보겠다.
3. 개념체계의 기초가 되는 의미기반
개념체계를 도해하여 비교하는 방법은 서로 다른 개념들 사이의 차이점을 이해하는 좋은 방법이 되지만 여기에도 한계는 있다. 만약 개념체계로는 잡아낼 수 없는 사고의 바탕이라는 것이 있고, 여기에도 차이가 있어서 이 차이가 미치는 영향이 결코 작지 않다면 이러한 차이는 이해할 길이 없는 것이다. 흔히 오래된 동아시아의 사상과 현대 서구 사상이나 과학 사이에 닮은 점이 있다고 놀라와 하는 이야기들이 오가곤 한다.
그러나 동서의 접근을 논하는 이런 논의의 대부분은 사실 겉으로 드러나는 구조상의 닮은 점에 주목하는 반면, 표현된 것 뒤에 자리하고 있는 바탕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겉보기에 닮은 점이 있더라도 그 바탕에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커다란 차이가 도사리고 있다면 이 둘은 결코 가까이 놓일 수 없는 것들인데 개념의 바탕을 잡아낼 적절한 시각이 없다면 먼 것을 가깝다고 말하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개념체계 분석도 겉보기 이면의 구조를 파악하는 작업이기는 하나 이마저도 잡아낼 수 없는 개념의 근저가 있다면 이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적 기초 역시 필요하다.
이러한 문제에 빛을 주는 것은 장회익의 의미기반 이론(장회익, 1990: 63-118)이다. 장회익은 과학이론의 구조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의미기반(semantic basis)’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과학이론의 구조를 보다 중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의미기반이란 “이론의 바닥에 깔려 있는 ‘의미의 기반’, 즉 이론 자체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 개념의 바탕”이라 할 수 있고, “‘의미의 기반’ 그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어서 이론의 구조 및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의미기반’의 구조부터 먼저 명백히 규명해 내어야 한다”는 것이 의미기반론의 핵심이다(장회익, 1990: 74).
… 하나의 과학이론을 S라 부르기로 할 때 이 이론은 영역(領域; domain) D와 사상(寫像; mapping) g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형태로 표시될 수 있다.
(장회익, 1990: 76)
S=<D, g>
여기서 영역 D는 이론 S의 ‘의미기반’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이를 구성하는 모든 의미요소(意味要素; semantic element)들의 집합이며, 이는 다시 이론의 취급 대상이 되는 모든 대상물들의 집합 즉 대상영역과 대상물들이 지닐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상황을 나타내는 물리량들의 집합 즉 상황영역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리고 사상 g는 이 영역 D 위에 정의되는 각종 함수(function), 관계(relation) 및 상수(constant)들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대체로 명시적 상황에 대한 진술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관점에서는 과학이론이라는 것이 그 언어에 해당하는 ‘의미기반’ D와 그 문장에 해당하는 ‘상황진술’ g의 대립되는 두 요소로 이루어지며 과학의 발전과정에 따라 이 두 요소가 모두 변형될 수 있는 성격을 지닌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특히 ‘의미기반’ D 그 자체는 다시 ‘대상영역’과 ‘상황영역’으로 구분되면서 이론의 매우 중요한 구조적 특성을 반영하는 부분이 되며, ‘상황진술’ g는 오직 이미 의미기반 속에 포함된 의미요소들만을 대상으로 이들간의 보편적·특정적 각종 상호관계를 표현하는 기능을 지니는 것으로 보게 된다.
장회익은 이어 의미기반을 서술하는 이론을 ‘지지이론’(supporting theory)이라 이름하여 위의 이론 S인 ‘형식이론’(formal theory)과 구분한다. 그리고 지지이론의 변형으로 물리학의 과학혁명 사례들을 분석한다. 의미기반의 변형을 수반하지 않는 지식추구활동은 대체로 쿤이 말한 정상과학 활동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반면, 의미기반 자체의 변형을 동반하는 지식추구활동은 인간의 사고방식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는 것으로서 쿤이 말한 과학혁명의 사례들이 여기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혁명의 경우는 “의미기반 속에 담긴 대상물로서의 지구와 여기에 대응하는 상황영역으로서의 ‘위치’(또는 운동) 사이에 구조적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뉴튼의 고전역학이 형성된 경우는 “의미기반 속에 대상물로서의 질점의 개념과 이것이 지닐 수 있는 상태량으로서의 역학적 상태(위치와 운동량) 개념 및 상태변화(운동량 변화) 개념을 설정한 것”이 되고, 상대성이론은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을 4차원 공간-시간으로 치환함으로써 의미기반의 상황영역에 자리잡고 있는 공간과 시간의 수학적 구조만을 바꾸어 놓은” 경우이다. 양자역학 역시 의미기반 내에 “새로운 ‘양자역학적 상태’ 개념이 도입되고 이를 나타내는 수학적 공간으로서 힐베르트 공간이 설정된” 경우이다. 그는 동역학의 의미기반을 ‘서술공간’(시공간의 구조), ‘서술모형’(대상의 표상모형), ‘서술양식’(상태규정 및 그 해석방식)으로 나누어 동역학의 부류를 나누고 그 의미기반상의 변화와 형식이론에의 영향을 상세히 고찰한 바 있다(장회익, 1990: 79-83).
장회익이 동역학 분야에서 규정한 의미기반의 분류가 다른 이론이나 개념의 바탕에도 그대로 적용될지는 미 지수이다. 그러나 어떤 개념이나 이론의 서술내용을 분석해 얻을 수 있는 개념체계의 바탕을 고려하고 그것을 찾아내는 데에 의미기반론은 충분히 방법적 기초가 될 수 있다. 동역학 이론 구조에서 성공적으로 의미기반을 찾아 내 그것을 드러낼 수 있었다면 다른 과학이론이나 내지는 학술이론 일반에 대해서도 그 의미기반을 가정하고 찾 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온생명 개념과 가이아 개념에도 개념체계 분석만으로 다 담을 수 없는 의미기 반이 있으리라 가정하고 다섯 번째 단락에서 그것을 드러내는 작업을 펼쳐 보이겠다.
4. 온생명과 가이아 개념의 체계
가이아 이론은 굉장히 혁신적인 이론이다. 그러나 생명, 또는 살아 있는 시스템에 대한 개념체계의 변화에 가 이아 이론이 던진 파문은 그닥 크지 않은 것 같다. 비교를 위해서 우리는 가이아 이론 이전의 시스템적 관점에서 보는 생명, 또는 살아 있는 시스템(living system)의 개념체계를 고려해 볼 수 있다. 시스템적 관점에서 살아 있는 시스템이 곧 ‘생명’으로 정의되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이러한 살아 있는 시스템에는 단세포 미생물로부터 다세포 유기체, 그리고 생태계 등의 유기체 이상의 체계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여러 종류의 살아 있는 시스템은 직간접적으로 전체-부분 관계를 이루는 위계 구조를 이루기도 한다. 따라서 개념상으로는 <그림 5>와 같은 체계도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비교해볼때 러브록(Lovelock)이그리고있는가이아개념의체계는<그림6>과같이표현될수있다고본다.즉, 전체적으로 <그림 5>의 살아 있는 시스템의 개념체계와 비슷하지만 살아 있는 시스템으로 가이아란 개념이 새롭 게 정의되어 추가되고 이 가이아가 살아 있는 시스템의 위계 구조에서 가장 위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를 <표 1>에 제시된 사가드의 아홉 단계 개념 변화의 정도에 비추어 보면 여섯 번째 단계의 새로운 개념의 추가와 이에 따라 다섯 번째 단계의 새로운 종류-관계의 추가, 네 번째 단계의 새로운 부분-관계의 추가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개념의 변화 자체는 꽤나 심각한 것이고, 이에 따라 가이아 이론에 대한 저항도 상당했지만 적어도 사가드가 제시한 아홉 단계의 개념 변화의 정도에서는 기존의 개념체계를 뒤흔드는 7단계 이상의 변화가 있 었다고 보기 힘든 것이다.
한편 가이아 개념체계에서도 가이아나 유기체 등이 무엇의 한 종류인지는 상당히 애매하다. 러브록 자신이 이 점에서 많은 혼동을 보이고 있는데, 경우에 따라 그는 가이아를 생물(a creature)라고 하기도 하고, 유기체(a organism)이라 하기도 하며, 살아 있는 행성(a living planet), 초유기체(super-organism)라고 하기도 하는 등 많은 혼선을 빚고 있다(Lovelock, 1972, 1999). 그 자신이 “가이아의 개념은 거의 완벽하게 생명(life)의 개념과 연계되 어 있다”고 밝히면서 “생명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검토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듯이 비치기도 하지만(Lovelock, /1992: 51), 가이아 이론에서 생명의 정의 문제는 본격적으로 논의되지 않고 있다. 이 점에서 가이아가 생명의 한 종류인지, 생물체나 유기체의 하나인지, 살아 있는 시스템의 하나인지 하는 점은 적어도 러브록에게 있어서는 분명치않은것같다.
이에 반해 장회익의 온생명 개념의 개념체계의 부분은 <그림 7>처럼 도해될 수 있다. 여기에 표시되지 않은 것은 온생명이 그 부분으로 항성과 행성을 갖는다는 점인데, 복잡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생략하였다. 이 체계 역시 붉은 색으로 표시된 부분에 한해 서는 앞의 살아 있는 시스템 개념체계 나 가이아의 개념체계와 크게 다를 것 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개념체계가 가이아 개념체계와 크게 다른 점은 바 로 생명을 ‘자족적 생명’과 ‘조건부적 생 명’, 두 종류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이아 개념체계에서는 생명을 직접 적으로 규명하려는 시도가 엿보이지 않 을 뿐만 아니라 생명을 본질적 차원에 서 구분해보려는 시도도 찾아볼 수 없 다.가이아는우리가접할수있는최상 위의 거대한 살아 있는 시스템 또는 유 기체이지만 그것은 부분-관계가 아닌 종류-관계에서는 다른 유기체나 세포와 같은 생물체 또는 살아 있는 시스템과 대등한 또 하나의 시스템일 뿐이다. 하 지만 온생명 개념체계에서 생명은 일차 적으로 자족적 생명과 조건부적 생명으 로 나뉘며 조건부적 생명들은 자족적 생명이존재해야만존재할수있는존 재로 규정된다. 이로써 생명 개념체계의 나무 구조가 크게 바뀌게 되는데 가이아와 온생명 개념체계를 놓고 비교해 본다면 이 차이의 정도는 Tha- gard의 아홉 단계 개념 변화의 정도에 비춰볼 때 9단계 나무 바꾸기(tree switching)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으로 간단하게 사가드의 개념체계 이론에 따라 온생명과 가이아 개념의 차이를 이해해 보았는데 <그림 6>과<그림7>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듯이 가이아 개념 체계와 온생명 개념 체계 사이의 차이는 관련 문헌의 어구들을 비교해 볼 때 느껴지는 것 이상으로 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온생명과 가이아의 차이는 항성 을 포함하는가 아닌가 정도의 차이로 여기고, 그러한 차이는 별 대수로울 것이 없다고 보는 것 같지만 적어도 생 명 개념에 초점을 맞추고 그 개념체계면으로 본다면 두 개념은 개념 위계의 조직 원리와 나무 구조 양면에서 모 두큰차이를갖는개념이다.
5. 온생명과 가이아 개념의 의미기반
그런데 이 두 개념 사이의 차이는 의미기반에서 훨씬 더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말한 다면 이 둘은 그 대상영역에 있어서 ‘확장된 개체 중심적 사고’와 ‘현상 중심적 사고’라고 하는 서로 다른 의미기반 에뿌리를박고있다.
두 개념의 주창자인 장회익과 러브록의 글을 잘 살펴보면 이들이 생명 문제와 관련해서 대상을 설정할 때 매 우 다른 사고 방식을 적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러브록의 관심에 들어오는 대상들은 모두 그 ‘경계’를 분 명하게 설정할 수 있는 ‘개체’와 ‘유사-개체’라고 할 수 있는 반면 장회익이 관심을 두는 대상들은 개체가 아닌 ‘현 상’이다. 아래에서 이 둘의 차이를 살펴 보기로 한다.
장회익의 일관된 사고 방식은 『과학과 메타과학』에서 찾아 볼 수 있다(장회익, 1990). 온생명론은 ‘생명의 단위’라는 새로운 문제 설정을 통해서 기존 생명 개념의 혼돈 양상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장회익은 생명의 단위라는 문제를 설정한 후 ‘작용체’(body of function)와 ‘보작용자’(co-functionator)라는 개념 및 ‘정상적 단 위’(normal unit)와 ‘조건부 단위’(conditional unit)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문제에 접근한다.
가령, 바이러스가 생명 인가 아닌가 하는 해묵은 논쟁은 작용체와 보작용자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바이러스 자체는 생명이니 비생명이니 규정지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작용체의 하나로 이해 해야한다는것이다.바이러스는세포 내환경이라고하는적절한보작용자를만났을때에만복제작용을나타 내는작용체다.
이는우리자신이적절한산소와온도,습도,영양등의매우특수한보작용자와결합할때에만생 명 현상을 유지할 수 있는 또 다른 작용체라는 점과 본질상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생물, 또는 생 명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모두 매우 특수한 보작용자와의 결합 하에서만 생명 현상을 보이는 작용체들이다. 작 용체 자체는 그것만으로는 생명이 될 수 없다. 건강한 개를 우주 공간에 놓아 두었을 때 그 개에게서 생명 현상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적절한 보작용자를 거기에서 만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작용체는 보작용자와 결합하여 ‘작용단위’(unit of function)를 이룬다. 이 때 특이한 ‘작용상태’가 발생한다. 이 것이 우리가 접하게 되는 다종다양한 ‘현상’(phenomenon)들이다. 온생명론이 관심을 두고 있는 생명도 작용단위 가 형성되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고, 정신도 작용단위로부터 떠오르는 현상 중 하나이다. 이처럼 ‘작용체’만을 중시하던 기존의 사고 방식과 달리 ‘작용체’ 뿐만 아니라 이것과 ‘보작용자’가 함께 특이한 ‘작용상태’를 만들어 내 는 바에 주목하는 새로운 사고 방식을 우리는 임의로 ‘작용단위 중심 사고’, 또는 ‘현상 중심 사고’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현상중심사고는어떤성질이개체로대표되는‘실체’안에들어있다고,달리말해어떤실체또는개체가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어떤 인간이나 유기체의 여러 가지 특징들이 DNA 안 에 ‘들어있다’고 보고 유전체의 염기 서열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에 큰 기대를 걸고 있지만 현상 중심 사고로 본 다면 이는 일면적인 사고이다. 작용체와 보작용자를 함께 이해하지 않고서는, 나아가 특정 작용체와 이에 결합하 는 특수한 보작용자가 서로 관계 맺는 방식까지 이해하지 않고서는 작용단위로부터 떠오르는 현상을 이해하기 어렵다. 같은 작용체라도 다른 보작용자를 만나 전혀 다른 작용단위 또는 현상단위를 형성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 능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작용단위 형성에 실패하는 경우도 가능하기 때문에 DNA건, 개체건 작용체에만 초점을 맞추는 사고는 현상 중심 사고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면성을 벗어나기 어렵다.
작용단위 중심 사고, 현상 중심 사고의 반대편에는 개체 중심 사고, 또는 경계 중심 사고라고 할 만한 것이 있 다. 이는 인간의 감각 조건상 매우 자연스러운 사고로서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어떤 대상들을 설정하는 경험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 사고는 우리의 오감이나 오감의 확장을 통해서 지각할 수 있는 경계를 중심으로 경계 안과 밖을 구분하고 경계 안을 동질적인 실체로 지정하는 사고이다. 이 사고에 따르면 우리가 주 로관심갖게되는대상들은대체로대상체이지현상이아니다.어떤현상또한대상체가그안에‘가지고있는’속 성이 구현된다거나 뿜어져 나오는 것으로 이해된다. 혹은 어떤 실체의 활동 결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 사고는 경계로 구획되는 개체를 확대함으로써 기존의 한계를 탈피해서 사고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데, 하지만 이 때에도 기준은 우리가 익히 경험하는 개체가 되기 쉽다. 확장된 개체가 사고 영역에 들어온다고 해도 기존에 익숙한 개 체들이 갖는 성질에 준하는 것이 똑같이 발견된다거나 하는 경우일 가능성이 높다.
가이아 개념의 바탕에는 이 개체 중심 사고, 경계 중심 사고가 놓여 있다고 생각된다. 러브록의 가이아 개념 은 기존의 생물 개체들 말고는 살아 있는 시스템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완고한 생물학자들의 저항과 무시를 수없 이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는데 이것은 이 양자의 의미기반에 ‘확장된 개체 중심 사고’와 ‘개체 중심 사고’의 대립이 놓여 있어 대립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러브록은 항상성과 같은 생물 유기체에서 발견되는 특성을 기준으 로 삼아 이러한 특성을 보이는 경계를 가진 존재로서 가이아를 ‘살아 있다’고 보고 있는데, 이는 개체의 외연을 넓 힌 확장된 개체 중심 사고라는 바탕 위에서 펼쳐지는 발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개체 중심 사 고에서 확장된 것이지 이와 전혀 다른 사고라고 할 수 없다는 점은 ‘경계’에 대한 러브록의 집착에서 읽을 수 있 다. 그의 책 『가이아의 시대』를 보면 여러 곳에서 ‘경계’에 대한 그의 집착을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은 개체 중심 사고의 특징 중 하나로 판단된다.
슈뢰딩거의 생명에 관한 일반론에서 발견할 수 있는 놀라운 통찰의 하나는 생물들이 경계(boundary)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 점이다. … 만약 생물을 능동적으로 낮은 엔트로피를 유지하려는 속성을 갖는 자가 조직적 시스 템(self-organizing system)으로 정의한다면, 그러면 외부로부터 바라볼 때 이 각각의 경계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바로 살아 있는 존재라고 할 수있다. (Lovelock, /1999: 66)
(Lovelock, /1999: 82-83)
… 안정성과 잘 정의된 경계역은 서로 자리를 함께하는 듯 하다. … 그것을 벗기면 또 다른 꺼풀이 나타나는 러시 아 인형처럼 생물들은 일련의 경계역 속에 존재한다. 가장 바깥쪽의 경계역은 외계와 접하고 있는 지구 대기권의 가 장자리다. 그 내부의 경계역에서는 가이아에서 생태계로, 생태계에서 식물체와 동물체로, 그리고 다시 세포에서 DNA로 갈수록 경계의 실체는 계속 희미해지는 대신 그 밀도는 더욱 증가한다. 지구의 경계역은 모든 생물들과 그들 의 주위 환경으로 구성되는 한 살아 있는 시스템, 즉 가이아를 에워싸고 있다.
온생명 개념이 바탕하고 있는 작용단위 중심 사고에서 작용단위는 경계를 중심으로 설정되지 않는다. 경계를 중심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은 작용체들이고 작용체와 보작용자의 결합으로 형성되는 작용단위의 경계는 구체적 이기보다 추상적이고, 실제적이기보다는 이론적이다. 이 때문에 작용단위 중심 사고는 직관적으로 이해되지 않 는매우낯선사고방식이된다.이점은작용단위중심사고를사람들이쉽게받아들일수없게하거나도리어반 감을 갖게 만드는 주된 원인이다.
이상에서 보듯 온생명 개념과 가이아 개념은 그 개념체계에서뿐만 아니라 의미기반에서도 현격한 차이를 보 이고있다.현상중심사고와확장된개체중심사고라고하는대상영역에대한지극히다른접근방식은이두개 념을 바탕에서부터 확연하게 갈라 놓는다. 과연 현상 중심 사고가 더 탁월한 접근인지, 확장된 개체 중심 사고가 더 탁월한 접근인지 하는 점을 가려내는 것은 추후의 과제가 되겠지만 무엇보다도 두 개념의 의미기반 상의 차이 를 이해하지 못한 채 온생명과 가이아를 혼동한다거나 되는 대로 뒤섞어 버리게 된다면 우리는 새로운 개념적인 돌파구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이와 별도로 굉장히 흥미로운 점 한 가지는 가이아 이론의 또 한 사람의 주창자인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는 개념체계상 에서는 러브록과 별 다른 점이 없는 것 같지만 의미기반에서는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마굴리스는 가이아에 대한 그녀의 글들에서 공통적으로 가이아를 ‘현상’으로 보고 있다. 그녀는 어떤 메카니즘이 있을 때 현상이 발생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으며, 이 메카니즘을 구체적으로 규명하는 것을 가이아 가설의 검증과정 으로 보고 있다(Margulis, 1999, /2007). 이 점은 가이아를 실체처럼 대하는 러브록과 크게 다른 태도로서 작용 단위 중심 사고와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마굴리스가 메카니즘을 토대로 하는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러브록과 다른 의미기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다.
6. 결론
앞에 서술된 나의 아이디어가 충분히 설득력을 가진 것이라고 판명된다면 온생명과 가이아 개념은 기존까지 여러 사람들이 생각하던 것에 비해 훨씬 더 큰 차이를 갖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개념은 개념체계상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일 뿐만아니라 의미기반에서도 도저히 융화될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를 안고 있다. 개념 간에 차이가 있고 그 차이가 심대하다는 이야기는 이 둘이 모두 가치 있는 것으로 양립할 수 있거나 내지는 의미 있는 경합이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차이가 있다는 것만으로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탁월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는 없지만 뚜렷한 차이는 우열의 경합과 평가를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또한 어떤 점에서 구체적으로 차이가 나는지를 분명하게 이해하면 할수록 개념의 탁월성, 유용성을 평가할 수 있는 밑천이 쌓이는 셈이므로 차 이를이해하고그차이의정도를평가하는작업의중요성은낮게보아서는안될것이다.
이 글에서 채택한 방법론을 좀더 정교하게 적용하고, 분석과정을 보다 면밀하게 한다면 시안 단계에 지나지 않는 이 아이디어는 의미 있는 연구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우리는 개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개념 사이의 차이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그 차이의 정도를 평가하는 작업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개념을 바탕으로 우리의 이해가 앞으로 전진해나갈 수 있다고 한다면 개념 사이의 차이를 이해 하는 작업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편 이 글과 같이 온생명 개념과 가이아 개념의 차이를 이해하게 되면 온생명 개념의 유의미성을 논하는 초 점도 보다 분명해진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 드러낸 온생명 개념의 개념체계를 고려한다면 온생명 개념의 핵심은 전체론이나 체계론 등이라기보다는 생명을 ‘자족적 생명’과 ‘조건부적 생명’으로 나눈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온 생명론의 새로운 점은 기존까지 생명이라고 이해해왔던 조건부적 생명과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자족적 생명이 엄밀한 의미에서 생명이고 조건부적 생명은 그 자체로 생명이 될 수 없다고 하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온 생명론의 가치를 따져보기 위해서는 ‘자족적 생명’ 개념이 왜 필요한지, 이를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은 무 엇인지, 실제로 얻게 되는 개념적인 유용성은 무엇인지, 생명과 관련된 기존 논의들과 이것이 융화될 가능성은 있 는지하는점등을물어야할것이다.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작용단위 중심 사고’, 또는 ‘현상 중심 사고’ 역시도 기존 생명 개념과 크게 다른 점 이라면 새로이 논의의 초점으로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온생명론의 가지고 있는 잠재력, 폭발성 은 온생명이라고 하는 생명 개념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 의미기반인 ‘작용단위 중심 사고’, ‘현상 중심 사고’에 있 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는 비단 생명 개념 뿐만아니라 여타의 분야에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 가있는데예를들어망치나정보,독성과같은대상에대한관심을‘망치현상’,‘정보현상’,‘독성현상’,또는‘망치 작용단위’, ‘정보 작용단위’, ‘독성 작용단위’로 옮긴다면 우리의 이해가 훨씬 더 풍부하고 다면적으로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이는 그간 우리가 익히 해왔던 사고와 상당히 다른 사고이면서도 또 한편으로 여러 선각자적인 사상가 나학자들이그리드물지않게펼쳐왔던사고이기도하지않을까싶다.이사고방식을생명탐구의분야뿐만아 니라 여러 학문 분야에 적용할 때 같은 자료들을 가지고도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깨달음들을 얻게 되지 않을까 막연한 짐작을 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원자 현상’에서 시작해 ‘분자 현상’, ‘항성 현상’, ‘행성 현상’, 생명 현상’, ‘정신 현상’으로 이어지는 ‘현상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이 세계를 재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점 또한 온생명론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주목해서 앞으로 가능성을 탐색해야 할 영역이 아닐까 한다.
끝으로 이 연구 결과에 뒤따라 나오는 구체적인 질문들이 수없이 많겠는데 그 중 한 두가지만 적어 보고자 한 다.먼저,이글의논의가타당하다고인정된다면조건부적인생명,즉낱생명은생명작용단위를이룰수있는후 보, 즉 생명 작용체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이 작용체는 보작용자와 결합해 작용단위를 이룰 때에만 생명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한다. 그런데 이 때 우리는 온생명 작용단위와 구분되는 낱생명 작용단위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작용체에 해당하는 낱생명에만 주의를 기울이지만 이 경우는 이 작용체가 낱생명 작용단위를 이루고 있 는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생명 작용단위로부터 떠오로는 생명 현상 역시도 ‘온생명 현상’과 ‘낱생명 현상’으 로 구분해 보아야 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낱생명 현상’에 대한 이해는 기존의 생명과학의 성과로 충분한 것 일까? 아니면 낱생명 작용단위를 설정함으로써 기존에 얻을 수 없었던 새로운 이해가 가능할 것인가?
다음으로 궁금한 것은 ‘씨앗’이나 ‘포자’, ‘정자’, ‘난자’ 등의 지위이다. 사실 생물학적 지식이 부족해 기존의 생 명과학에서 이들을 생명으로 다루는지, 생명 중 어떤 지위를 부여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데 기존 생명과학에서 의 논의도 궁금하고, 온생명론에서 이들을 새롭게 주목할 측면이 있는지도 궁금하다. 이 글의 논의에 비추어 본 다면 씨앗이나 포자는 특수한 생명 작용체라고 생각된다. 경우에 따라 이들 작용체는 적절한 보작용자를 만나지 못한 채로 아주 긴 시간동안 보존되었다가 적절한 보작용자를 만났을 때 생명 작용단위를 형성할 수도 있다고 들 었는데 이를 기존의 생명과학의 시각에서 어떻게 논하는지 궁금하다. 또한 씨앗이나 포자를 생각해 볼 때 어떤 한온생명이우주공간내다른곳에서생명을연장하고자할때취할수있는방식도이와같지않을까하는생각 도 해볼 수 있다. 자유에너지 공급체를 마련해 이동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한다면 원하는 공간의 물리적 여건을 보작용자로 삼을 수 있는 작용체를 형성해 생명이 아닌 작용체만을 해당 지점으로 보내는 방식 말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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