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와이드웹과 다이너북: 2-(4)월드와이드웹과 소통, 3-(1)미멕스와 PARC


월드와이드웹과 다이너북

1.여는 글. 2020. 5. 20. 

2.CERN의 꿈과 정보의 소통
   (1)부시 보고서와 유럽 내 과학연구의 통합. (2020. 5. 27.)
   (2)실험데이터의 수집과 컴퓨터의 사용. (2020. 6. 3.)
   (3)인터넷, 월드와이드웹, HTTP. (2020. 6. 10.)
   (4)월드와이드웹과 소통. (2020. 6. 17.)

3.앨런 케이의 다이너북
    (1)미멕스와 PARC. (2020. 6. 17.)
    (2)앨런 케이의 다이너북. (2020. 6.24.) 
    (3)미멕스의 꿈과 전지구적 정보의 연결. (2020. 7. 1.)

4.재매개화와 메타매체성. (2020. 7. 8.)

5.마무리 글. (2020. 7. 8.)


이 글에서는 과학기술과 새로운 문화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기 위하여 월드와이드웹과 랩톱 컴퓨터라는 과학기술적 성과물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전개되었는지 살펴보고, 이를 통해 이러한 새로운 매체가 가져온 사회문화적 변화의 의미를 찾아봅니다. 이를 통해 소통의 연결점과 (하이퍼)텍스트 쓰기의 문제와 매체성 개념을 비판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과학칼럼은 매주 수요일 업로드됩니다.
김재영 (녹색아카데미)


2-(4) 월드와이드웹과 소통

1994년 12월 14일 월드와이드웹 컨소시엄(W3C)의 주요 구성원들이 처음 모였고, 이튿날 Netscape가 Navigator 1.0을 발표했다. 흥미롭게도 바로 그 다음날(16일) CERN은 입자물리학 연구에 집중하겠다고 선언했다.

월드와이드웹의 산실 역할을 톡톡히 하긴 했지만, 이제는 월드와이드웹의 발전을 위한 지원은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CERN은 기본입자의 상호작용을 연구하기 위해 설립된 기관이었고, CERN의 결정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었다.

[그림 1] 넥스케이프 0.9(pre-1.0) 버전. 핸드북을 읽고 있는 마스코트 모질라. (출처: wikipedia)

버너스-리가 1989년에 월드와이드웹을 제안할 때 중요하게 거론했던 것이 CERN과 같은 거대규모의 연구소가 지니는 위계적 질서의 폐해를 극복하는 한 가지 방식이었다. 이것은 유럽의 12개국이 연합으로 설립하여 입자물리학이라는 과학연구에 집중하면서 컴퓨터를 많이 사용하는 연구기관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어려움이었다. 

처음 월드와이드웹의 의도는 CERN에 있는 여러 메인프레임 또는 워크스테이션들에 저장되어 있는 다양한 정보들을 통합적으로 연결하는 단순한 틀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단일한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하이퍼텍스트를 사용하여 수많은 종류의 저장된 정보들로 연결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이 틀의 역할이었다.

[그림 2] 팀 버너스-리가 1989년 CERN에 제출했던 ‘정보관리’ 제안서. (출처: CERN)

그 정보들은 보고서, 노트, 데이터베이스, 컴퓨터 문서, 온라인 시스템 도움말 등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월드와이드웹의 원래 목적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Berners-Lee & Fischetti 1999). 

  • 멀리 떨어져 있는 시스템에 네트워크를 통해 접속하여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정보를 찾아낼 수 있는 단순한 프로토콜의 전망
  • 정보제공자와 정보소비자를 이어주는 공통의 형식으로 정보를 자동적으로 교환할 수 있는 프로토콜의 마련
  • 당시에 CERN에서 사용되던 화면표시 기술을 써서 텍스트(가능하면 그림까지)를 읽을 수 있는 방법의 마련
  • 사용자들인 자신이 만든 문서를 제공할 수 있는 문서 수집 체계의 마련
  • 개인이 관리하는 문서들을 다른 사람이 문서들과 하이퍼링크를 통해 연결하는 방식의 마련
  • 중요한 정보를 핵심어의 검색을 통해 자동으로 얻을 수 있게 하는 통로의 마련
  • 공공영역에 있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여 기존의 독점적 시스템과 연결하는 인터페이스의 마련
  •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무료로 제공

이러한 항목들을 보면 이것이 단순히 물리학자들 사이의 정보교환에 그치지 않음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처음에는 물리학자들 사이의 소통의 도구였던 월드와이드웹은 물리학자와 기술자 사이, 그리고 전문적인 과학자와 비전문가로서의 정책결정자 사이에서 소통의 도구로 자리를 잡아갔다.

많은 양의 서류작업을 해야 했던 CERN의 연구자들과 기술자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위해 문서를 공유하고 전달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이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핵심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단순히 문서전달 시스템의 혁신이 아니었다.

위의 항목들에서 볼 수 있듯이, 월드와이드웹에서 하이퍼링크를 통해 전달되는 것은 바로 하이퍼텍스트였으며, 이렇게 전달되는 정보는 모두가 하이퍼텍스트 또는 하이퍼미디어로 표현될 수 있는 한 어떠한 제한도 없어야 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다만 월드와이드웹이 물리학과 관련되지 않는 일상의 대중들 사이에서 소통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대서양 건너편에서 또 다른 진지한 상상력과 노력이 훨씬 더 급진적인 방식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3-(1) 미멕스와 PARC

1945년 7월, 배니버 부시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자문보고서 「과학, 그 끝없는 최전선」(Bush 1945a)을 제출하는 동시에, 「월간대서양」(The Atlantic Monthly)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대로”(Bush 1945b)라는 제목의 흥미로운 글을 투고했다.

[그림 3] 배니버 부시의 1945년 칼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대로” (출처: ISSUU)

이 글에서 부시는 당시로서는 쉽지 않았을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고 있을 무렵, 부시의 상상은 라이프니츠와 배비지가 발명한 ‘계산하는 기계’로 나아간다. 단추를 누르면 말을 하는 Voder를 발전시킨 Vocoder, 사진과 현미경을 이용하여 보는 것을 확장하는 장치도 인상적이지만,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Memex라는 기계이다.

책상처럼 생긴 곳에 단추와 키보드와 화면 같은 것이 달려 있고, “모든 책, 기록, 통신을 저장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매우 빠르고 유연하게 이를 검색할 수 있는” 이 장치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모아 서로 나눌 수 있는 장치이기도 하다(Nyce & Kahn 1991).

[그림 4] 배니버 부시의 1945년 칼럼에 등장하는 미멕스. (출처: US Dept of Defense)

당시 부시가 염두에 둔 것은 마이크로필름, 팩시밀리, 광전지, 전보 등과 같은 당시의 기술 수준이었으며, 이런 장치들을 조종간(레버)을 이용하여 작동시킨다는 것이었다. 부시의 상상이 현실이 된 것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1980년대 초에 세상에 나타난 Osborne 1(그림 4), Epson HX-20, GRiD Compass 1101(그림 5)과 같은 랩톱 컴퓨터는 지금 흔히 볼 수 있는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지만, 원론적으로 부시의 Memex라는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랩톱 컴퓨터는 데스크톱(desk-top)과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허벅다리 위에(lap-top) 올려놓고 작업을 할 수 있을 만큼의 크기와 무게를 지닌 컴퓨터를 가리킨다. 흔히 노트북 컴퓨터라고 부르는 것처럼 노트북(공책) 정도의 크기가 표준적이며, 대개 휴대할 수 있는 컴퓨터(portable computer)와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그림 5] Osborne 1. 1981년 4월 3일 출시. 최초로 상업적 성공을 한 마이크로컴퓨터. 무게 10.7kg, 당시 가격은 1,795 달러였다. (출처: oldcompers.net / wikipedia)
[그림 6] 1985년 우주선왕복선 디스커버리호에서 GRid Compass가 사용되었다. (출처: wikipedia)

그런데 이러한 의미의 랩톱 컴퓨터로서 상업적으로 성공적이었던 Osborne 1이나 GRiD Compass 1101보다 우리에게 더 흥미로운 것은 1970년대 초에 논문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다이너북(Dynabook)이다. 

1968년부터 제록스 회사(Xerox Corporation)의 C.E.O.를 맡게 된 맥컬러프(C. Peter McColough)는 복사기뿐만이 아니라 디지털 컴퓨터에서도 앞서 나가고 싶어 했다. 맥컬러프는 ‘정보의 아키텍처’야말로 미래 산업사회를 주도할 제록스의 진명목이라고 믿고 있었다. 1969년 초 제록스가 SDS(Scientific Data Systems)를 인수한 것도 디지털 산업의 중요성을 크게 보았던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

새로운 자본의 디딤돌을 찾고 있던 맥컬러프는 포드 자동차 회사의 물리학자 골드먼(Jacob E. Goldman)을 영입하여 제록스의 연구개발 책임자 자리를 맡겼다. 골드먼은 맥컬러프에게 새로운 디지털 기술을 연구할 수 있는 기관을 설립해야 한다고 제안했고, 이를 위해 또 다른 물리학자 페이크(George E. Pake)를 추천했다.

페이크는 컴퓨터가 아니라 핵자기공명의 전문가였으며 워싱턴 대학에서 대학행정가로 탁월한 능력을 보이고 있었다. 골드먼은 젊을 때부터 친구이자 동료로 그 능력을 잘 알고 있던 페이크가 새로운 연구소의 소장을 맡는다면 제록스의 자본과 더불어 벨연구소에 못지않은 훌륭한 업적을 낼 수도 있다고 믿었다.

이렇게 해서 1970년 6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팔로알토(Palo Alto)에 제록스의 새로운 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골드먼은 이 연구소의 이름을 PARC(Palo Alto Research Center)로 약칭했다(Smith & Alexander, 1988). 

페이크가 맨 먼저 한 일은 컴퓨터공학 분야에서 가장 탁월한 사람들이 어디에 있으며 누가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미국 국방성(Defence Department)의 고등연구기획국(Advanced Research Projects Administration, ARPA)에 연결되었고, 거기에서 밥 테일러(Robert W. Taylor)를 알게 되었다.

테일러는 1961년에 미국 항공우주국(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에 들어갔고, 이후 ARPA의 정보처리기술과(Information Processing Techniques Office)의 책임자가 되었다가, 1969년에 유타대학 컴퓨터공학과로 옮겼다. 

[영상 1] 컴퓨터를 이용한 사고, 표현, 교육, 미래를 주제로 한 앨런 케이의 TED 강연. 2007년. (출처: TED)

페이크가 테일러를 팔로알토로 초청한 것은 PARC를 구성하게 될 세 개의 독립된 연구 분과, 즉 일반과학 연구 분과(General Science Laboratory, GSL), 시스템공학 연구 분과(System Science Lab, SSL), 컴퓨터공학 연구 분과(Computer Science Lab, CSL)에서 어떤 연구를 하는 것이 좋을지 테일러에게 자문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페이크는 테일러가 미국 전국을 다니면서 컴퓨터공학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나왔고, 그 분야에서 누구 훌륭한 연구자인지를 대단히 잘 알고 있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테일러는 ARPA의 IPTO 시절부터 컴퓨터가 단순히 많은 양의 연산과 계산을 빠른 시간에 해 주는 연산기계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외부로 표현하고 관찰하고 교류하는 매체”라고 믿어왔고, 제록스에서 제안한 PARC의 컴퓨터공학 연구 분과(CSL) 책임자 자리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테일러는 PARC로 오면서 ARPA에 있던 유능한 컴퓨터 전문가들을 데려왔다. 그 중에 앨런 케이(Alan Curtis Kay)와 버틀러 램슨(Butler Lampson)이 있었다. 버틀러 램슨은 하버드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하면서 방전함 사진을 분석하기 위한 프로그래밍으로 컴퓨터 쪽에 발을 들여 놓았다.

[영상 2] 버틀러 램슨의 2015년 강연. “Perspectives on protection and security” (출처: Association for Computing Machinery; ACM)

램슨은 물리학을 더 공부하기 위해 버클리 대학으로 갔다가 ARPA와 테일러가 후원하는 시분할(time-share) 프로젝트[Project Genie]에 참여하면서 전기공학 및 컴퓨터공학으로 옮겼다. 테일러는 램슨을 제록스로 데려오기 위해 램슨이 소속해 있던 버클리 컴퓨터 회사(Berkeley Computer Corporation, BCC)를 합병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램슨과 더불어 BCC에서 제록스로 옮겨온 쌔커(Charles P. Thacker)도 물리학 전공으로 버클리 대학을 졸업한 뒤, 입자가속기에서 일을 하려고 대학원에 진학했으나, 시분할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전기공학 및 컴퓨터공학으로 전공을 바꾼 경우였다. 램슨과 쌔커는 이더넷(Ethernet) 통신망, 레이저 프린터, Alto 개인용 컴퓨터를 개발한 주역이었다.

… “3-(2) 앨런 케이의 다이너북”으로 계속됩니다.


참고문헌

  • 김재영 (2010). “CERN의 월드와이드웹과 앨런 케이의 다이너북: 최초의 랩톱컴퓨터와 메타매체와 소통”, 탈경계인문학. 3(2): 249-289. 
  • Berners-Lee, T. & Fischetti, M.I. (1999). Weaving the Web: The Original Design and Ultimate Destiny of the World Wide Web, Harper.
  • Bush, V. (1945a). A Report to the President by Vannevar Bush, Director of the Office of Scientific Research and Development, July 1945,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 _______ (1945b). “As We May Think”, The Atlantic Monthly, July 1945.
  • Nyce, J.M. & Kahn, P. eds. (1991). From Memex to Hypertext : Vannevar Bush and the Mind’s Machine, Academic Press.
  • Smith, D.K. & Alexander, R.C (1988). Fumbling the future: How Xerox invented, then ignored, the first personal computer, William Morrow and Co.
  • 이 글은 녹색아카데미 웹진을 위해 김재영(2010)을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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