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색이동 세 가지와 르메트르-허블의 법칙
우주론 또는 천문학에서 자주 혼동되는 것이 적색이동(redshift)입니다. 꽤 많은 책에서 여전히 '적색편이'라는 표현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일본어 용어 赤方偏移 탓입니다. 한국어에서 '편이'는 대부분 便易 즉 편하고 쉽다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일본어에서는 偏移를 써서 한 쪽으로 치우쳐 옮겨간다는 의미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한자를 병기하지 않으면 '편이'가 그런 의미인지 알아채기 어렵기 때문에 지금의 표준 용어는 '적색이동'이 되었지만, 여전히 과거의 낡은 용어가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우주론이나 천문학에서 나오는 적색이동에는 세 가지 다른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먼저 도플러 효과와 관련된 적색이동(Fizeau-Doppler redshift)이 있고 다음으로 중력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중력 적색이동(gravitational redshift)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주 전체의 공간적 팽창에서 비롯하는 우주 적색이동(cosmic redshift)이 있습니다.
적색이동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프라운호퍼 흡수선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실험실에서 화학물질이 담긴 진공관에 빛을 쪼이고 이를 프리즘이나 회절격자를 이용하여 만든 분광기(스펙트로스코프)로 관찰하면 "빨주노초파남보"의 색깔별 빛띠 중간 중간에 검은 색으로 가느다란 선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빨간색의 파장이 대략 780나노미터이고 보라색이 350나노미터이니까 그 사이에 있는 검은 선들이 어떤 파장에 해당하는지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습니다. 이 선을 '프라운호퍼 선'이라 부릅니다. 이 선들의 분포는 원소마다 고유합니다. 따라서 어떤 화합물에 어떤 원소가 있는지 알기 위해 이 프라운호퍼 흡수선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를 더 확장하면 태양에서 오는 빛을 분광기로 들여다 보아 태양에 어떤 원소가 있는지 알아낼 수 있습니다. 아래 그림이 전형적인 예입니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Fraunhofer_lines )
태양에 헬륨이 많이 있다는 것도 이 방법으로 알아냈습니다. 그 무렵에는 지구에도 헬륨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태양의 원소'라는 뜻으로 heliu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가 나중에서야 지구에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밤하늘의 천체 중 '성운'이라 부르는 특별한 천체에서 오는 빛을 분광기로 관찰하면 특이하게도 모든 프라운호퍼 흡수선이 죄다 파장이 긴 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파장이 긴 쪽을 빨간색, 파장이 짧은 쪽을 파란색이라 부르기 때문에 이를 '적색이동' 영어로는 redshift라 부릅니다. 독일어로는 Rotverschiebung으로 거의 같은 용어를 쓰는데, 프랑스어로는 décalage vers le rouge이라고 곧이곧대로 "빨강 쪽으로 치우침"이라고 길게 씁니다. 한국물리학회에서 한 동안 '빨강치우침'이라는 용어를 표준으로 삼았는데, 꽤 긴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이 잘 쓰지 않아서 다시 '적색이동'으로 돌아갔습니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Redshift )
이것은 명확한 관측결과이며 현상입니다. 이런 것이 왜 생기는가를 놓고 세 가지 다른 설명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지금도 여러 곳에서 상당한 혼동이 있습니다. 1923년 미국의 천문학자 베스토 슬라이퍼(Vesto Slipher)는 41개의 나선 성운(나중에 은하임이 밝혀져서 지금은 그냥 '은하'라 부릅니다)의 프라운호퍼 흡수선 이동을 힘들게 측정하여 발표했습니다. 그 중 36개는 적색이동을 보이고 5개는 청색이동을 보였습니다. 슬라이퍼는 이것을 도플러 효과로 설명하려 했습니다.
도플러 효과는 1842년에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크리스티안 도플러가 발표한 현상입니다. 도플러는 "Über das farbige Licht der Doppelsterne und einiger anderer Gestirne des Himmels - Versuch einer das Bradley'sche Aberrations-Theorem als integrirenden Theil in sich schliessenden allgemeineren Theorie"라는 긴 제목의 논문에서 쌍성에서 오는 별빛이 멀어져가는 것은 적색 쪽으로, 그리고 가까워지는 것은 청색 쪽으로 프라운호퍼 흡수선이 이동한다는 것을 발표하고, 이 현상을 파동의 원천(광원)이 움직일 때 파장이 달라진다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슬라이퍼도 특별한 고민 없이 은하에서 오는 빛의 흡수선 이동을 도플러 효과로 설명하려 했습니다. 1924년 에드윈 허블은 안드로메다 자리의 나선 '성운' M31까지의 거리를 변광성을 이용하여 정확하게 확정하고 그 거리가 우리 은하의 크기보다 훨씬 더 크다는 점을 밝혔습니다. 따라서 M31은 우리 은하 내에 있는 하나의 성운이 아니라 우리 은하 밖에 있는 또 다른 은하임을 밝힌 셈이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윌슨산천문대의 밀턴 휴머슨(Milton Humason)이었습니다. 허블은 1929년 24개의 외부은하 성운의 적색이동과 그 성운까지의 거리가 비례한다는 주장을 담은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Hubble, Edwin (1929). "A relation between distance and radial velocity among extra-galactic nebulae". PNAS. 15 (3): 168–173. DOI: 10.1073/pnas.15.3.168
이러한 성공에 이어 많은 나선 '성운'들이 실상 은하임이 속속 밝혀지고 적색이동과 거리의 관계도 밝혀졌습니다. 휴머슨을 비롯하여 니콜라스 메이올(Nicholas Mayall)과 앨런 샌디지(Allan Sandage) 등은 1955년까지 800여 개의 은하의 적색이동을 매우 정교하게 관측하고 그 정확한 값(파장의 변화)을 측정했습니다.
그런데 이 그래프는 유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은하의 후퇴속도를 정확히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이론에서 도출된 결과가 아니라 정밀도가 높지 않은 관측 데이터를 가지고 어림을 한 것이며 이 그래프의 직선에서 벗어나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또 은하의 후퇴속도는 기껏해야 초속 몇천 킬로미터에 불과합니다. 이를 수식으로 $$ v = H D$$로 씁니다. 여기에서 $v$는 은하의 후퇴속도이고 $D$는 그 은하까지의 거리입니다. 그런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은하라면 후퇴속도가 초속 30만 킬로미터 즉 광속에까지 이를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그보다 더 멀리 있는 은하의 경우에는 아예 후퇴속도가 광속을 넘어설 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정말 그럴까요?
적색이동을 도플러 효과로 설명하는 경우 개념적으로 어려움에 부딪칩니다. 가령 2015년에 큰곰자리에서 발견된 먼 은하 GN-z11의 경우에는 정교하게 측정된 적색이동이 $z=11.01$입니다. 관측결과에 대한 귀납적 일반화로서 허블의 법칙을 곧이곧대로 적용하면 이 은하는 우리 은하로부터 광속의 11배가 넘는 속력으로 후퇴하고 있어야 합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GN-z11
그런데 생각해 보면 적색이동은 프라운호퍼 흡수선이 방출될 때와 달리 관측될 때 더 길어진다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정의도 $$ z = \frac{\lambda_o - \lambda_e}{\lambda_e}$$와 같이 파장의 차이만으로 충분합니다.
허블이 관측한 것은 은하의 후퇴속도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단지 적색이동의 크기가 은하까지의 거리에 비례한다는 것입니다. 즉 $$z c = H D$$라 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z$의 값이 작을 때에는 $$z = \sqrt{\frac{1+\frac{v}{c}}{1-\frac{v}{c}}}-1 \approx \frac{v}{c}$$와 같이 도플러-피조 공식을 이용하여 적색이동이 후퇴속도에 비례함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하간 허블의 법칙이라고 흔히 부르는 그것은 이론적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관측데이터로부터 귀납적으로 추론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은하를 비롯하여 천체들은 아주 골고루 우리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름대로의 중력과 상호작용에 따라 고유한 운동(peculiar motion)을 하고 있습니다. 가령 안드로메다 은하는 우리 은하 쪽으로 다가오고 있고, 모든 은하가 나름대로 움직입니다. 관측 데이터는 이런 것이 모두 들어 있는 결과입니다.
이것과 구별되는 것이 소위 르메트르의 법칙입니다. 1918년에 아인슈타인이 중력장방정식을 써서 우주의 시간적 전개를 풀어낼 수 있으리라고 아이디어를 낸 뒤 1922년 러시아의 물리학자 알렉상드르 프리드만이 이를 가장 단순한 경우로 국한시켜 방정식을 풀어냈습니다. 1927년 벨기에의 물리학자-사제 조르주 르메트르가 아인슈타인 중력장 방정식으로부터 $$ v = \frac{\dot{a}}{a} D = HD$$임을 유도해 냈습니다. 이 주장은 관측결과를 귀납적으로 종합하거나 귀추적으로 추론한 것이 아닙니다. 아인슈타인 방정식이 옳다면 그로부터 연역적으로 유도되는 이론적 주장입니다. 미국의 수학자/물리학자 하워드 로버트슨도 1928년 같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과학사를 고려하여 제대로 이름을 붙이면, 경험적인 귀납적 일반화로서의 허블 법칙과 일반상대성이론으로부터의 연역적 유도로서의 르메트르-로버트슨 법칙을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혼동을 피할 수 있는 현명한 선택입니다.
소위 $\Lambda$-CDM 모형에서 먼 은하까지의 고유거리를 적색이동에 대해 그리면 다음과 같은 그래프를 얻습니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Redshift )
여기에서 세로축의 $d_H$는 고유거리로서 대략 말하면 우주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팽창할 때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멈춘 스틸 사진을 찍었다고 치고 그 때의 거리입니다. 위의 그래프에서는 지구로부터 그 천체까지의 거리가 됩니다. 특정 적색이동 $z$ 값에 대응하는 고유거리를 나타낸 것이 흑색 실선입니다. 적색이동이 작을 때에는 이 고유거리가 대략 적색이동에 비례합니다. 위의 그래프는 소위 '로그 그래프'라고 부르는데 한 칸을 지수로 나타냅니다. $z$값이 커짐에 따라, 고유거리가 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로축의 단위는 Glyrs인데 giga light-years 즉 10억 광년입니다. 세로 축에서 10이라는 눈금이 있는 곳이 100억광년입니다.
붉은색 점선은 회고 시간(look-back time) $t_{LB}$에 광속을 곱한 값 $c t_{LB}$입니다. 회고시간은 빛이 검출된 시점으로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빛이 방출된 시점까지 계산한 것입니다. 여기에 광속을 곱하면 빛이 여행해 온 거리가 됩니다. 우주의 맨 처음이 빅뱅이라고 하면, 빅뱅을 지금으로부터 137.9억년 전이므로, 회고 시간과 광속을 곱한 값은 137.9억 광년이 될 것입니다. 빅뱅에 가까워질수록 적색이동의 값은 급격하게 커집니다. 지금으로부터 37만 9천년 전에 생겨난 우주배경복사의 적색이동은 $z=1089$쯤 됩니다.
더 상세한 건 https://web.unbc.ca/~gjones/Redshift.pdf 와 같은 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도플러 효과에서 비롯되는 적색이동과 우주의 팽창에서 비롯되는 적색이동은 다릅니다. 여기에 덧붙여 일반상대성이론에서 계산되는 중력 적색이동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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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역사는 위키피디어에 해당 항목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https://en.m.wikipedia.org/wiki/Chronology_of_the_univer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