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뱅 우주론의 개요와 몇 가지 오해
빅뱅 우주론의 표준적인 역사를 간단하게 정리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이 글은 이전 녹색아카데미 홈페이지에 올렸던 글입니다.
이 글을 쓴 것이 2011년이었는데, 지난 10여년 사이에 우주론과 천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2015년에 중력파가 검출되고 2019년과 2022년에 블랙홀의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얻은 것이 두드러집니다. 또 2011년 노벨물리학상이 우주팽창이 감속이 아니라 가속되고 있음을 1990년에 밝힌 솔 펄머터, 브라이어 슈미트, 애덤 리스에게 주어졌습니다. 2021년 12월에 허블우주망원경과 WMAP 망원경을 잇는 제임스 웨브 우주망원경(James Web Space Telescope)가 발사되었습니다. 이제까지와 비교할 수 없는 정교한 데이터를 보내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선 대폭발 우주론 또는 빅뱅 우주론이라는 이름부터 말하자면, 1949년 프레드 호일(Fred Hoyle)이 BBC 라디오 방송에서 자신의 '정상상태이론'(Steady-State Theory)과 경쟁하던 다른 이론을 두고 농담으로 말한 Big Bang idea(큰 꽝이라는 생각)을 그 주창자 중 하나인 게오르기 가모프(George Gamow, Георгий Антонович Гамов)가 받아들였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1912년 베스토 슬리퍼(Vesto Slipher)가 나선'성운'의 빛띠(스펙트럼)에서 적색이동을 관측했습니다. 빛띠라는 것은 무지개처럼 빨주노초파남보의 색이 펼쳐지고 그 속에 특정 원소에 따라 검은 흡수선들이 나오는 것인데 은하에서 오는 빛의 스펙트럼이 지구상에서 보는 것을 기준으로 빨간색(파장이 긴 쪽)으로 치우친 것을 발견한 거죠.
1916년에 아인슈타인이 중력의 일반적인 이론인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했는데, 바로 이듬해 이 이론을 써서 우주 전체에 적용해 볼 수 있다고 생각이 나옵니다. 유명한 얘기지만, 중력장 방정식을 우주에 적용하면 자칫 우주가 팽창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챈 아인슈타인은 이를 막기 위해 중력장 방정식을 수정해 버립니다. 소위 우주 상수를 덧붙인 것이죠.
1922년 러시아의 수학자 알렉상드르 프리드만(Alexandr Friedman,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Фри́дман)이 아인슈타인의 중력장 방정식을 풀어 우주가 팽창하는 모형을 발표합니다. 1927년에는 벨기에의 물리학자/사제였던 조르주 르메트르(Georges Lemaître)가 프리드만의 연구를 모른 채로 마찬가지의 결과를 얻습니다. 르메트르는 이렇게 우주가 팽창할 수 있다면 과거에는 아주 작은 점에 모여 있었을 것이라는 선견지명 있는 주장도 제시했습니다.
1924년부터 에드윈 허블이 멀리 떨어져 있는 나선은하들의 빛띠를 정밀하게 측정하여, 드디어 1929년에 유명한 허블의 법칙을 발표합니다. 먼 은하들은 모두 우리 은하로부터 후퇴하고 있는데,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그 적색이동의 정도가 크다는 것입니다. 은하의 후퇴속도가 적색이동에 비례하기 때문에, 결국 은하의 후퇴속도가 우리 은하로부터의 거리에 비례한다는 법칙이 등장합니다.
이 관측결과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놓고 1930년대 이후로 치열한 논쟁이 붙은 것입니다. 1948년 프레드 호일, 토머스 골드(Thomas Gold), 헤르만 본디(Hermann Bondi) 등은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은하들이 만들어진다는 소위 '정상상태 이론'을 제안합니다. 같은 해에 러시아 출신의 게오르기 가모프가 랠프 앨퍼(Ralph Alpher)와 로버트 허만(Robert Herman)과 함께 르메트르의 이론을 토대로 우주공간이 팽창한다는 이론을 발표합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가모프가 말장난을 좋아해서, 논문에 참여하지 않은 한스 베테(Hans Bethe)를 저자 이름에 넣어 Alpher-Bethe-Gamow의 논문을 만든 뒤, 자기 이론을 알파-베타-감마 이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겁니다. 이 이론은 단순히 이론적으로 르메트르의 수학적 전개와 사변적 주장을 반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열팽창하면 온도가 내려간다는 열역학 법칙을 토대로, 만일 우주공간이 전체적으로 팽창한다면, 우주의 어느 방향에서나 똑같이 배경처럼 깔려 있는 빛의 복사가 있을 것이라고 예측한 것입니다. 당시까지 알려진 수치를 이용하여 그 배경복사가 5 켈빈(즉 영하 268도 섭씨)보다 낮은 온도의 흑체복사에 대응한다는 예측도 했습니다.
하지만 주류 천문학에서는 가모프의 이론이 거의 무시되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다가 1964년에 미국의 전파천문학자 아노 펜지어스(Arno Penzias)와 윌슨(Robert Wilson)이 다소 우연히 이 배경복사를 발견함으로써 노벨상까지 타게 된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시 살펴볼 점 하나는 제임스 피블즈(James Peebles)의 연구입니다. 펜지어스와 윌슨은 아주 운이 좋아서 우주배경복사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 채로 이를 발견했다고 할 수 있는데, 같은 시기에 피블즈는 이를 이론적으로 상세하게 해명하고 또 전파망원경으로 그 증거와 흔적을 찾으려 온갖 노력을 다 하고 있었습니다. 펜지어스와 윌슨에게 전파망원경에서 모든 방향으로 균일하게 잡히는 배경잡음의 의미와 내용을 자상하게 설명해 준 것도 피블즈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978년 노벨물리학상에서 피블즈가 제외되었을 때 논란이 일었습니다.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 해 노벨상의 1/2는 저온물리학의 이론적 연구로 유명한 러시아 출신의 이론물리학자 표트르 카피차에게 돌아갔고, 노벨상은 한 해 최대 3명까지만 줄 수 있습니다. 펜지어스와 윌슨은 논문을 함께 발표했기 때문에 피블즈를 노벨상 수상자에 포함시키면 그 중 한 명에게만 노벨상을 주어야 해서 조금 곤란했을 것 같습니다.
https://www.nobelprize.org/prizes/physics/1978/summary/
여하간 다행히 2019년에 제임스 피블즈는 "물리적 우주론에 대한 업적"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https://www.nobelprize.org/prizes/physics/2019/peebles/facts/
우주배경복사를 정밀하게 측정하기 위해 1989년에 발사된 COBE (Cosmic Background Explorer) 위성이 10여분이 채 되지 않아 정확히 우주배경복사가 2.72548 ± 0.00057 K의 흑체복사와 10만분의 1 오차 안에서 일치함을 보여주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보도를 보면서 무척 신기해 했습니다.
(그림 출처: http://lambda.gsfc.nasa.gov/product/cobe/c_edresources.cfm )
2005년에 Scientific American 잡지에 실린 대폭발 우주론에 대한 오해(Misconceptions about the Big Bang)가 흥미롭습니다.
Charles H. Lineweaver and Tamara M. Davis (2005) Misconceptions about the Big Bang. Scientific American. (제목을 클릭하면 그 글로 바로 갈 수 있습니다.)
논문을 첨부하고, 몇 가지 핵심적인 내용을 요약해서 덧붙입니다.
(1) 대폭발(Big Bang)은 어떤 종류의 폭발인가요?
틀린 답: 대폭발은 마치 폭탄이 터지듯 허공에서 무엇인가가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맞는 답: '대폭발'이라는 이름과 달리, 폭발 같은 것은 없습니다. 공간이 한없이 팽창하고 있을 뿐입니다. 에드윈 허블은 멀리 있는 은하들이 우리 은하로부터 후퇴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멀리 있는 은하에서 오는 빛이 전반적으로 빨간색(파장이 긴 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에, 은하가 우리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후퇴 속도가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더 빠릅니다.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관념은 공간 자체가 한없이 팽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결정적인 증거는 COBE (COsmic Background Explorer) 관측위성의 관측 결과입니다.
(2) 은하가 빛보다 빨리 멀어질 수 있나요?
틀린 답: 물론 빛보다 빠를 수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빛보다 빠른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맞는 답: 가능합니다. 은하의 후퇴속도는 특수상대성이론을 따르지 않습니다. 은하의 후퇴 속도는 멀어질수록 한없이 더 커질 수 있습니다. 허블 반지름에 이르게 되면, 은하의 후퇴 속도가 빛의 속도가 되고, 그보다 더 멀리 있는 은하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후퇴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상대성이론과 충돌하는 것은 아닙니다. 은하가 멀어져 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은하가 들어 있는 공간이 팽창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른 결과이고, 우주공간의 팽창 자체는 빛보다 빠를 수 있습니다.
(3) 빛보다 빨리 멀어지는 은하를 관측할 수 있나요?
틀린 답: 은하의 후퇴속도가 빛보다 빠를 수 있다고 해도, 거기에서 오는 빛은 우리에게까지 도달할 수 없습니다.
맞는 답: 가능합니다. 소위 '허블상수'가 시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빛보다 빨리 멀어지는 은하에서 방출된 빛알(광자)이 우리에게까지 오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4) 우주의 적색이동(빨강치우침)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틀린 답: 도플러 효과는 광원이 멀어지면 관측자에게 오는 빛의 파장이 길어진다는 것입니다. 은하 스펙트럼(빛띠)에 적색 이동이 있는 것은 광원인 은하가 공간 속에서 후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맞는 답: 은하가 공간 속에서 대단히 큰 속도로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은하는 거의 정지해 있다고 말하는 게 더 옳습니다. 따라서 처음 은하에서 나오는 빛의 파장 분포(스펙트럼)는 우리가 아는 빛띠(스펙트럼)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주공간 자체가 팽창하고 있기 때문에, 이 빛이 우리에게까지 오는 동안 그 파장이 더 길어집니다.
(5) 관측할 수 있는 우주는 얼마나 큰가요?
틀린 답: 대폭발이 137억년 전에 일어났으므로, 관측할 수 있는 우주의 크기는 137억 광년입니다.
맞는 답: 137억년 전에 방출된 빛이 우리에게까지 도달하는 동안 공간이 팽창해 왔기 때문에, 빛이 지나온 거리는 팽창이 없는 공간 속에서 빛이 137억 년 동안 지나온 거리보다 더 큽니다. 대략 계산해 보면 3배 정도 더 큽니다.
(6) 우주공간이 팽창함에 따라, 그 안의 은하나 그 안의 모든 것이 팽창하고 있나요?
틀린 답: 공간이 팽창하면서 은하도 함께 팽창하기 때문에, 가령 은하단(은하들의 무리)의 테두리도 그만큼 더 커집니다.
맞는 답: 공간이 팽창함에 따라 은하단 속의 은하들은 서로 멀어져 가긴 합니다만, 은하들 간의 인력 때문에 다시 가까워집니다. 두 가지 힘이 평형을 이루도록 은하단의 크기가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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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자연철학 세미나 -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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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이론의 형식체계와 그에 대한 해석의 문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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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 강독 모임] 소감입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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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 얽힘과 태극도(음양도) 그리고 '양자 음양'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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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식 없이 술술 양자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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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9 강독 마무리 토론회 발표용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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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이론"이란 미국 드라마가 무척 인기가 좋았었는데, 그 주제가가 재미있습니다.
" target="_blank" rel="noopener">The Big Bang Theory Song by Barenaked Ladies from The Big Bang Theory (TV series)
지금까지 노래가 1절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두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틀린 답: 대폭발은 마치 폭탄이 터지듯 허공에서 무엇인가가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맞는 답: '대폭발'이라는 이름과 달리, 폭발 같은 것은 없습니다. 공간이 한없이 팽창하고 있을 뿐입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강의 p.304
…물리학자 가모프가 우주가 뜨거운 대폭발을 통해 출발했다면 그 진행 과정의 일부로 물질과의 열평형에서 분리된 초기 빛들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빅뱅이 일어난 후 처음 얼마 동안에는 빛과 물질 입자 특히 전자와의 강렬한 상호작용으로 인해 빛의 수명이 길지 않았으나, 일단 전자들이 수소 원자핵이나 헬륨 원자핵과 결합해 중성 원자를 이루게 되면 빛이 전자와 에너지를 주고받기 어려워져 공간을 자유롭게 떠다니게 되고,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남이 있는 빛이 바로 이 우주배경복사라는 것이다. …
‘자연철학강의’에 위와 같이 ‘빛’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빅뱅이 폭탄이 터진 것 같은 대폭발이 아니었다면 우주공간에 빛이 어떻게 처음 나타나게 되었을까요? 저는 빛은 항성이 생겨나야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빅뱅은 도대체 왜 일어났을까요?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있었을까요?
매우 근본적이며 중요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이 세상에 빛이 어떻게 처음 나타나게 된 것일까? 빅뱅은 도대체 왜 일어났을까?"라는 질문은 대답하기가 무척 어려운 문제이거나 대답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보통의 물리학자라면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우주 내에 여하간 지금 무엇인가 있다면 그것은 파괴되지도 않고 창조되지 않는다.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빛을 보고 있으며, 빛이 파괴된다거나 창조된다는 이론이나 실험적 증거는 없으므로, 빛은 언제나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즉 빛이 어떻게 처음 나타났는가 하는 문제를 물리학자를 비롯한 자연과학을 탐구하는 사람들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문제에 대답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빅뱅이라 부르는 그 엄청난 '태초'가 도대체 왜 일어났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주론이나 자연철학의 관점에서라면 이런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에도 여하간 의견을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과연 우주 또는 세계에 '시작'이라는 것이 있었는지, 또 그렇게 믿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 중 한 요소인 '빛'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떤 양상으로 변화해 왔는지를 해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의 우주론 연구자들은 나름대로 답(이라기보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미나 시간을 통해서나 여러 방법으로 더 이야기 나눌 주제인 것 같습니다. 장회익 선생님도 <자연철학 강의> 316쪽부터 이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쉽게 접근하면, 빛이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 이유는 "빛이 항성이 생겨나야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짐작"했었기 때문이라 추측했습니다. 빛의 근원이 태양이나 그를 닮은 별이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빛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물리학과 우주론의 맥락에서 빛은 물질이 생겨나기 전에 이미 존재했습니다. 애초에 어떻게 빛이 생겨났는지는 모르지만, 여하간 지금 관측되는, 온 우주에 가득 차 있는 우주배경복사는 바로 태초의 순간으로부터 38만년쯤 지났을 때 물질 사이를 헤집고 제 갈 길을 계속 가고 있는 그 빛의 흔적이며 자취입니다. 그러니 여하간 처음에 빛이 있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첨언하면, 저는 빛이 존재한다는 것과 빅뱅이 있었다는 것은 층위와 성격과 수준이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현대물리학과 현대우주론을 꽤 오랫동안 공부해오면서, 제가 가지게 된 관점 중 하나는 과학철학에서 말하는 구성적 경험주의와 비슷한 것입니다.
빛이 존재한다는 것을 저는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지금 무엇인가를 보고 있고 밤이 되면 보이던 것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 모두 빛과 관련된다고 믿습니다. 그 빛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간 빛이 있다는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빅뱅'이라는 것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여러 실증적 증거를 기반으로 만들어낸 현대우주론의 표준모형, 즉 주류의 관점에 따르면 138억년 전에 '빅뱅'이라 부르는 엄청난 우주적 사건이 있었고 그 뒤로 우주공간이 끊임없이 팽창하고 있다는 관념은 지난 100여년 사이에 주로 유럽과 미국에서 활동하던 과학자들이 합의한 관념입니다. 우주론은 물리학, 화학, 공학, 생물학 등과 달리 그 개념적 토대와 기반이 상당히 약합니다. 어쩌면 100년쯤 뒤에는 '빅뱅'이라는 것이 정말 일어났다고 믿은 20세기와 21세기 사람들을 비웃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우주에 태초(시작)이 있었다는 이론을 '큰 꽝 아이디어(a Big Bang idea)'라고 부르면서 비판한 프레드 호일(Fred Hoyle 1914-2001)을 생각을 다시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생 탁월한 천문학자로서 우주에서 어떻게 물질이 만들어졌는가를 탐구해 왔으며 허블-휴머슨의 관측등을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빅뱅이론'은 신이 세상을 만들었고 또 맨 처음에 "빛이 있으라"라면서 빛을 만들었다는 기독교의 신화 내지 종교적 믿음에 근거를 둔 유사과학이라고 공격했습니다. 정말 138억년쯤 전에 빅뱅이라는 게 있긴 있었을까요?
프레드 호일의 생각을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프레드 호일은 우주의 역사에서 무거운 물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해명한 B2FH 논문의 공동저자인 동시에 이 문제를 이미 1946년 논문과 1954년 논문에서 더 상세하게 해명한 중요한 천문학자입니다. 그런데 실상 호일은 여러 모로 저평가되었습니다. 우주와 세계에 대한 과격한 생각을 여기저기서 너무 과감하게 제시한 탓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워낙 독보적이었지만 영국사람 특유의 독설과 조롱이 섞인 직설적 발언으로 물의도 많이 일으켰던 모양입니다. SF 소설도 여러 편 썼고, 하여튼 특이한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프레드 호일의 생각을 살펴보시고 나중에 시간 되실 때 나누어 주시면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조금 맥락이 다르지만, 제가 이전에 과학동아에 연재했었고 neomay3님이 멋지게 웹진에 맞게 편집해 주신 글(https://greenacademy.re.kr/archives/1580)도 조금은 도움이 될 듯 합니다.
링크해주신 글에 그림들이 없어져서 수정했습니다. 예전 글들에서 그림이 자꾸 사라지는데 하나씩 고치겠습니다. 너무 많아서 한꺼번에는 못하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