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물리학을 이해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두 가지 과제
작성자
자연사랑
작성일
2020-02-21 19:41
조회
2854
앞에서 소개한
Michael Raymer (2017)
Quantum Physics: What Everyone Needs to Know®
Oxford University Press.
는 양자물리학을 제목 그대로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많은 지식과 정보가 넘쳐 나고 있고, 늘 새로운 지식과 정보가 들어옵니다. 그 중에서 그래도 이것은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요?
민주주의의 문제, 소수자에 대한 권리 보호,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회, 타인에 대한 배려 등등을 넘어 자연에 대해 가져야 할 근원적인 관점과 사유로서 꼭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 답으로 양자물리학을 말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일 수 있습니다. 대개 양자물리학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늘 이야기하고 그것으로 밥벌어 먹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는 여전히 이 질문에 대해 제대로 된 답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여하간 일단 양자물리학을 제대로 알아야겠다고 마음 먹은 평범한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 때 꼭 해결해야 할 두 가지 과제가 있다고 이 책의 저자 마이클 레이머는 말합니다.
양자물리학은 세계를 확률을 통해 이해해야 하며, 그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가장 세련된 주장입니다. 여하간 세상은 불확실하고 미래는 불투명하고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지만, 양자물리학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그것이 최선이라는 겁니다.
확률을 통해서만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관념은 19세기 내내 조금씩 조끔씩 자리를 잡아왔습니다. 다윈의 자연선택이론조차도 확률에 대한 이야기이고, 열과 관련된 현상들은 확률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엔트로피 운운 하는 신비스러워 보이는 이야기도 실상은 확률 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점은 제5장에서 더 깊이 이야기될 겁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제4장은 이렇게 확률을 통해서만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양자물리학의 새로운 주장을 그냥 일단 받아들인 채로 형식체계를 구성해 갑니다.
$$\langle x \rangle = \int \Psi^* x \Psi dx$$
이라고 간단하게 쓰지만, 이 주장은 세계를 확률로만 이해할 수 있다는 아주 흥미로운 주장입니다.
1935년에 에르빈 슈뢰딩거가 "양자역학의 현 상황"이란 제목의 3부작 논문 속에 한 단락 지나가며 언급한 것이 상자 속의 고양이 사고실험입니다. 사고실험이라 한 이유는 실제로 실험할 수 없거나 매우 힘들지만 생각만으로 어떤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실험'이라고 했지만, 이런 논변은 대개 논리적으로 충돌하는 상황을 만들어 기존의 논의에서 숨어 있던 헛점을 드러내는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른바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양자역학의 확률적 서술을 거시적인 대상으로까지 확장하는 것이 비합리적이고 납득할 수 없다는 반례 제시입니다. 즉 미시적인 원자나 전자조차도 존재가 흐리멍텅한 안개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게 슈뢰딩거가 이 사고실험을 제안한 이유입니다.
최근에 국내에서 양자역학과 관련된 책들도 많이 나오고 대중강연도 많아지면서, 여기저기서 농담 수준으로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특히 물리학자들이 이 개념을 엉뚱하게 이해하고 잘못 받아들인 채, 더 이상한 이야기로 만들어 대중에게 퍼뜨리고 있는 것 같아 무척 우려스럽습니다.
세상이 확률로만 서술된다는 것은 전혀 신비한 일이 아닙니다. 주사위를 던져서 어떤 눈이 나올지 100프로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당장 다음 주 토요일에 비가 올지 맑을지조차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심학십도 제1도에서 여헌 장현광은 그런 예측적 앎에 대한 희망을 제시했고, 유럽에서는 제2도에 있듯이 뉴턴역학 내지 고젼역학을 통해 그 희망이 채워질 것처럼 말했습니다. 제2도는 어떤 면에서 넓게 보아 '모더니티' 내지 '근대성'에 대한 강한 신념을 보여줍니다. 제3도에서 상대성이론이라는 것을 통해 20세기 초에 뭔가 달라진 것처럼 사람들이 생각하게 되었지만, 꼼꼼하게 살펴보면, 이것이야말로 대단히 강력한 '모더니티' 내지 '근대성'이며,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놀라운 확신입니다.
그러니 아인슈타인 양자역학의 근본적 확률성에 맞닥뜨렸을 때 "신이 주사위놀이를 할 리 없다"는 식으로 오만방자한 말을 꺼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약하자면, 마이클 레이머의 이야기를 살짝 바꾸어, 양자물리학이라는 새로운 물리학 이론이 세계관과 시대정신에서 근본적으로 제시하는 첫 번째 과제는 바로 세계를 단지 '확률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는 냉정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세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사태의 전모를 알 수 없고 늘 어떤 식으로든 불확실성과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니까 쉽게 말해 세상이 아주 정교한 시계태엽장치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 양자물리학이 가져온 첫 번째 과제입니다. 모더니즘의 붕괴 같은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첫 번째 과제와 유사하면서도 구별되는 두 번째 과제가 있습니다. 레이머는 이런 예를 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가령 고풍스러운 갈색 지갑을 선물받았다고 해 봅시다. 그 선물의 포장을 열기 전에는 정열적인 붉은 색 스카프가 들어있을지 갈색 지갑일지 까만 장갑일지 제각기 확률로밖에 알 수 없지만, 포장을 여는 순간 이것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포장을 뜯든 안 뜯든 그 속에 있는 선물은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세상이 시계태엽장치처럼 굴러가지 않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확률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받아들이더라도, 그 다음 단계는 확률이론 내지 확률계산을 통해 세상을 차근차근 알아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양자역학은 세계를 이해하고 예측하는 기본 장치로 '상태함수'라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확률적 예측일지라도, 상태함수를 제대로 알면 세계에 대한 확률적 예측은 확실하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말이 좀 꼬입니다. 확률적 예측을 확실하게 할 수 있다는 게 무슨 말일까요? 이 말은 확률이론에서는 시행에서 어떤 결과가 산출될지 후보들의 목록을 다 알고, 그 후보들에 대해 확률이 어떻게 배정되는지를 다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짧게 말해 확률분포를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받아들이더라도 그 확률분포를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다면 그것에 만족하면 됩니다.
두 번째 과제는 그렇게 예측한 것을 실제로 확인한 다음에 생겨납니다. 이제부터 그 앎의 대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모호한 표현을 정확히 만들면, 이제 그 대상에 대해 상태함수를 어떻게 새로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상태함수를 알면, 비록 확률분포에 그치더라도 어떤 결과들의 후보가 나올지 그리고 각각 확률이 어떻게 배정되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그 후보들 중 하나가 결과로 나온 다음에 대상의 상태함수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 새로운 상태함수를 어떻게 선택해야 할까요? 이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가 바로 양자물리학이 해결해야 할 두 번째 과제입니다.
요즘 항간에 퍼져 있는 야릇한 해석에 따르면, 상자 속의 고양이는 살아 있기도 하고 죽어있기도 하고 반반의 확률로 된 특이한 존재인데, 뚜껑을 여는 순간 살아 있거나 죽어 있거나 하는 쪽으로 갑자기 양자도약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 양자도약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를 설명하지 않고, 그냥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말합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제4장의 공리4가 해결하려고 하는 내용이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옵니다.
--------------
이제부터는 공리4가 도대체 어떻게 튀어나오는 것인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Michael Raymer (2017)
Quantum Physics: What Everyone Needs to Know®
Oxford University Press.
는 양자물리학을 제목 그대로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많은 지식과 정보가 넘쳐 나고 있고, 늘 새로운 지식과 정보가 들어옵니다. 그 중에서 그래도 이것은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요?
민주주의의 문제, 소수자에 대한 권리 보호,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회, 타인에 대한 배려 등등을 넘어 자연에 대해 가져야 할 근원적인 관점과 사유로서 꼭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 답으로 양자물리학을 말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일 수 있습니다. 대개 양자물리학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늘 이야기하고 그것으로 밥벌어 먹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는 여전히 이 질문에 대해 제대로 된 답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여하간 일단 양자물리학을 제대로 알아야겠다고 마음 먹은 평범한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 때 꼭 해결해야 할 두 가지 과제가 있다고 이 책의 저자 마이클 레이머는 말합니다.
양자물리학은 세계를 확률을 통해 이해해야 하며, 그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가장 세련된 주장입니다. 여하간 세상은 불확실하고 미래는 불투명하고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지만, 양자물리학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그것이 최선이라는 겁니다.
확률을 통해서만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관념은 19세기 내내 조금씩 조끔씩 자리를 잡아왔습니다. 다윈의 자연선택이론조차도 확률에 대한 이야기이고, 열과 관련된 현상들은 확률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엔트로피 운운 하는 신비스러워 보이는 이야기도 실상은 확률 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점은 제5장에서 더 깊이 이야기될 겁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제4장은 이렇게 확률을 통해서만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양자물리학의 새로운 주장을 그냥 일단 받아들인 채로 형식체계를 구성해 갑니다.
$$\langle x \rangle = \int \Psi^* x \Psi dx$$
이라고 간단하게 쓰지만, 이 주장은 세계를 확률로만 이해할 수 있다는 아주 흥미로운 주장입니다.
1935년에 에르빈 슈뢰딩거가 "양자역학의 현 상황"이란 제목의 3부작 논문 속에 한 단락 지나가며 언급한 것이 상자 속의 고양이 사고실험입니다. 사고실험이라 한 이유는 실제로 실험할 수 없거나 매우 힘들지만 생각만으로 어떤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실험'이라고 했지만, 이런 논변은 대개 논리적으로 충돌하는 상황을 만들어 기존의 논의에서 숨어 있던 헛점을 드러내는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른바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양자역학의 확률적 서술을 거시적인 대상으로까지 확장하는 것이 비합리적이고 납득할 수 없다는 반례 제시입니다. 즉 미시적인 원자나 전자조차도 존재가 흐리멍텅한 안개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게 슈뢰딩거가 이 사고실험을 제안한 이유입니다.
최근에 국내에서 양자역학과 관련된 책들도 많이 나오고 대중강연도 많아지면서, 여기저기서 농담 수준으로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특히 물리학자들이 이 개념을 엉뚱하게 이해하고 잘못 받아들인 채, 더 이상한 이야기로 만들어 대중에게 퍼뜨리고 있는 것 같아 무척 우려스럽습니다.
세상이 확률로만 서술된다는 것은 전혀 신비한 일이 아닙니다. 주사위를 던져서 어떤 눈이 나올지 100프로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당장 다음 주 토요일에 비가 올지 맑을지조차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심학십도 제1도에서 여헌 장현광은 그런 예측적 앎에 대한 희망을 제시했고, 유럽에서는 제2도에 있듯이 뉴턴역학 내지 고젼역학을 통해 그 희망이 채워질 것처럼 말했습니다. 제2도는 어떤 면에서 넓게 보아 '모더니티' 내지 '근대성'에 대한 강한 신념을 보여줍니다. 제3도에서 상대성이론이라는 것을 통해 20세기 초에 뭔가 달라진 것처럼 사람들이 생각하게 되었지만, 꼼꼼하게 살펴보면, 이것이야말로 대단히 강력한 '모더니티' 내지 '근대성'이며,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놀라운 확신입니다.
그러니 아인슈타인 양자역학의 근본적 확률성에 맞닥뜨렸을 때 "신이 주사위놀이를 할 리 없다"는 식으로 오만방자한 말을 꺼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약하자면, 마이클 레이머의 이야기를 살짝 바꾸어, 양자물리학이라는 새로운 물리학 이론이 세계관과 시대정신에서 근본적으로 제시하는 첫 번째 과제는 바로 세계를 단지 '확률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는 냉정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세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사태의 전모를 알 수 없고 늘 어떤 식으로든 불확실성과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니까 쉽게 말해 세상이 아주 정교한 시계태엽장치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 양자물리학이 가져온 첫 번째 과제입니다. 모더니즘의 붕괴 같은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첫 번째 과제와 유사하면서도 구별되는 두 번째 과제가 있습니다. 레이머는 이런 예를 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가령 고풍스러운 갈색 지갑을 선물받았다고 해 봅시다. 그 선물의 포장을 열기 전에는 정열적인 붉은 색 스카프가 들어있을지 갈색 지갑일지 까만 장갑일지 제각기 확률로밖에 알 수 없지만, 포장을 여는 순간 이것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포장을 뜯든 안 뜯든 그 속에 있는 선물은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세상이 시계태엽장치처럼 굴러가지 않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확률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받아들이더라도, 그 다음 단계는 확률이론 내지 확률계산을 통해 세상을 차근차근 알아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양자역학은 세계를 이해하고 예측하는 기본 장치로 '상태함수'라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확률적 예측일지라도, 상태함수를 제대로 알면 세계에 대한 확률적 예측은 확실하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말이 좀 꼬입니다. 확률적 예측을 확실하게 할 수 있다는 게 무슨 말일까요? 이 말은 확률이론에서는 시행에서 어떤 결과가 산출될지 후보들의 목록을 다 알고, 그 후보들에 대해 확률이 어떻게 배정되는지를 다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짧게 말해 확률분포를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받아들이더라도 그 확률분포를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다면 그것에 만족하면 됩니다.
두 번째 과제는 그렇게 예측한 것을 실제로 확인한 다음에 생겨납니다. 이제부터 그 앎의 대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모호한 표현을 정확히 만들면, 이제 그 대상에 대해 상태함수를 어떻게 새로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상태함수를 알면, 비록 확률분포에 그치더라도 어떤 결과들의 후보가 나올지 그리고 각각 확률이 어떻게 배정되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그 후보들 중 하나가 결과로 나온 다음에 대상의 상태함수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 새로운 상태함수를 어떻게 선택해야 할까요? 이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가 바로 양자물리학이 해결해야 할 두 번째 과제입니다.
요즘 항간에 퍼져 있는 야릇한 해석에 따르면, 상자 속의 고양이는 살아 있기도 하고 죽어있기도 하고 반반의 확률로 된 특이한 존재인데, 뚜껑을 여는 순간 살아 있거나 죽어 있거나 하는 쪽으로 갑자기 양자도약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 양자도약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를 설명하지 않고, 그냥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말합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제4장의 공리4가 해결하려고 하는 내용이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옵니다.
--------------
공리4: '측정'에서 상태의 변화
대상이 상태
$$\Psi = \sum_{i} c_i \phi_i$$
에 있을 때, 지점 $j$에 해당하는 위치에 '측정장치'를 놓아 대상과 접촉시키면
(1) 확률 $|c_j |^2$으로 '측정장치'에 흔적을 남기고 대상은 $$\Psi'=\phi_j$$로 전환되거나
(2) 확률 $1-|c_j |^2$으로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phi_j$가 빠진 새로운 상태 $$\Psi'' = \sum_{i} c'_i \phi_i$$로 전환된다.
이제부터는 공리4가 도대체 어떻게 튀어나오는 것인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전체 641
번호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추천 | 조회 |
공지사항 |
[자료] 유튜브 대담영상 "자연철학이야기" 녹취록 & 카툰 링크 모음 (2)
neomay33
|
2023.04.20
|
추천 2
|
조회 8316
|
neomay33 | 2023.04.20 | 2 | 8316 |
공지사항 |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강독모임 계획 안내 (1)
시인처럼
|
2023.01.30
|
추천 0
|
조회 8049
|
시인처럼 | 2023.01.30 | 0 | 8049 |
공지사항 |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정오표 (10)
시인처럼
|
2022.12.22
|
추천 3
|
조회 10462
|
시인처럼 | 2022.12.22 | 3 | 10462 |
공지사항 |
[공지] 게시판 카테고리 설정에 대해서 (4)
시인처럼
|
2022.03.07
|
추천 0
|
조회 9485
|
시인처럼 | 2022.03.07 | 0 | 9485 |
공지사항 |
새 자연철학 세미나 보완 계획 (3)
시인처럼
|
2022.01.20
|
추천 0
|
조회 10332
|
시인처럼 | 2022.01.20 | 0 | 10332 |
공지사항 |
새 자연철학 세미나 - 안내
neomay33
|
2021.10.24
|
추천 0
|
조회 10020
|
neomay33 | 2021.10.24 | 0 | 10020 |
296 |
(*) 4차원 속도의 의미 (상세한 유도과정 포함)
자연사랑
|
2021.09.09
|
추천 0
|
조회 2714
|
자연사랑 | 2021.09.09 | 0 | 2714 |
295 |
4차원 불변 간격과 4차원 시공간
자연사랑
|
2021.09.09
|
추천 1
|
조회 2306
|
자연사랑 | 2021.09.09 | 1 | 2306 |
294 |
4차원 시공간과 세계선 그리고 블록 우주 (2)
자연사랑
|
2021.09.09
|
추천 1
|
조회 3320
|
자연사랑 | 2021.09.09 | 1 | 3320 |
293 |
시간 속의 속력, 공간 속의 속력 (4)
자연사랑
|
2021.09.09
|
추천 2
|
조회 1863
|
자연사랑 | 2021.09.09 | 2 | 1863 |
292 |
4차원 시공간 이해하기 - 시간을 허수축에 놓는 뜻 (4)
박용국
|
2021.09.06
|
추천 0
|
조회 15813
|
박용국 | 2021.09.06 | 0 | 15813 |
291 |
<'새 자연철학' 세미나> 홍보용 파일들
시인처럼
|
2021.09.06
|
추천 1
|
조회 2261
|
시인처럼 | 2021.09.06 | 1 | 2261 |
290 |
시간축/공간축으로의 이동 vs 시공간 개념 (3)
자연사랑
|
2021.09.05
|
추천 3
|
조회 3999
|
자연사랑 | 2021.09.05 | 3 | 3999 |
289 |
양자역학에서 물리적 측정값과 복소수 (6)
자연사랑
|
2021.09.03
|
추천 1
|
조회 3692
|
자연사랑 | 2021.09.03 | 1 | 3692 |
288 |
허수, 복소수, 측정, 자연 (3)
자연사랑
|
2021.09.03
|
추천 5
|
조회 3543
|
자연사랑 | 2021.09.03 | 5 | 3543 |
287 |
'새 자연철학' 세미나 제안서 초안
시인처럼
|
2021.09.02
|
추천 0
|
조회 1740
|
시인처럼 | 2021.09.02 | 0 | 1740 |
제임스 글릭의 ‘인포메이션’을 읽었지만 정보가 무엇인지는 몰라서 혹시 글을 쓰신 적이 있지 않을까해서 '정보'로 검색했는데 이 글이 나와서 잘 읽었습니다. 양자역학 공부를 앞둔 시점에 읽으면 좋은 글이네요.
‘양자, 정보, 생명’에서 정보 부분만 읽어보았는데 엔트로피와 관련된 내용은 어렵지만 9장(이정민)은 흥미로웠어요. ‘생명기호학(Biosemiotics)’은 처음 들었는데 어떤 분야인지 궁금해서 도서관에서 주제어로 검색하니 ‘Biosemiotic perspectives on language and linguistics’ 라는 책만 한 권 나왔습니다. (이게 Biosemiotics 총 20권 시리즈 중 하나인데 책값들이 엄청나네요.)
[양자, 정보, 생명]을 읽으셨다니 대단하십니다. [양자, 정보, 생명]은 읽기 편한 논문집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문적이거나 테크니컬한 내용을 최소화한 논문들을 모아 놓은 것이라 그럭저럭 읽을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명기호학이라 부르는 분야는 20세기초 생물학자 야콥 폰 윅스퀼이 제안한 '둘레세계(Umwelt)' 개념에서 발전한 매우 흥미롭고 특이한 분야입니다. 윅스퀼의 '둘레세계' 혹은 '움벨트'는 이미 존재하는 세계 속에 생명체가 놓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가 각각 감각과 행위를 통해 각자의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관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은 떡갈나무 바라보기입니다.
야콥 폰윅스퀼의 아들 투레 폰윅스퀼과 토머스 세벅(셰뵉 타머슈 Sebők Tamás)이 둘레세계론을 발전시켜 생명과 언어와 커뮤니케이션과 정보를 통합하는 학문분야로 '생명정보학 biosemiotics'을 제안했습니다. 실상 '정보'라는 것이 생명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상세하게 들어가면 더 볼 것이 무척 많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OpenAI의 ChatGPT에게 "What is the biosemiotics?"라는 질문을 던지니 다음과 같은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Biosemiotics is the study of how living organisms communicate and interpret information through various forms of signs and symbols. It combines elements of biology, linguistics, and semiotics (the study of signs and symbols) to understand how living systems use and interpret signs and symbols to function and adapt in their environment. Biosemiotics looks at how different organisms communicate, whether it be through verbal or nonverbal means, and how they interpret and respond to these signals. It also examines the role of meaning and interpretation in biological systems, and how this impacts the evolution and behavior of living organisms."
더 정확하고 상세한 입문 수준의 설명은 역시 위키피디어가 적절할 듯 합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Biosemiotics
제가 선호하는 논문집으로 아래의 것이 있습니다.
George Terzis and Robert Arp (eds.) Information and Living Systems: Philosophical and Scientific Perspectives. MIT Press. 2011
첨부파일 : Information-and-Living-Systems_-Philosophical-and-Scientific-Perspectives-George-Terzis-Robert-Arp-eds..pdf
ChatGPT에서 질문을 조금 바꾸어 "Explain the biosemiotics."라 하니까 다음과 같은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Biosemiotics is the study of communication and meaning-making in living systems. It is a field that combines the study of biology, linguistics, and semiotics (the study of signs and symbols) to understand how living organisms use signs and symbols to communicate and understand their environment.
In biosemiotics, the focus is on how living systems use signs and symbols to convey meaning and information. For example, a plant may use chemical signals to attract pollinators, or a predator may use body language to communicate aggression. Biosemiotics also looks at how living systems use signs and symbols to interpret and respond to the environment.
One key concept in biosemiotics is the idea of the "semiotic triangle," which consists of a sender, a receiver, and a message. In biosemiotics, the sender is the living organism that is communicating, the receiver is the organism that is receiving the message, and the message is the sign or symbol that is being communicated.
Overall, biosemiotics is a complex and interdisciplinary field that helps us understand the ways in which living systems communicate and understand their environment, and how these processes shape their behavior and evolution."
똑같은 대답을 주지 않은 것이 재미있습니다.
아직 상대성 이론 편도 채 못마쳤는데, 양자역학 편을 정력적으로 올려주셔서 감사한 마음 반, 부담스런 마음 반입니다. (양자물리학을 모든 사람이 꼭 알아야 한다면, 이렇게 확률적인 표현을 주로 써야 한다는 것이지요? ^^) 묵혀 뒀다가 라도 나중에 하나하나 따져가며 읽어야 겠다는 마음도 물론 많습니다.
음... 슈뢰딩거 고양이의 저 설명이 맞는게 아니군요. 어디에 물어볼 곳도 없고, 이책저책 설명이 죄다 제각각인 듯한 문제였는데, 슈뢰딩거의 고양이의 해석은 무엇이 맞는 것인지도 궁금해 집니다.
제가 혼동을 드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리학자들이 이 개념을 엉뚱하게 이해하고 잘못 받아들인 채, 더 이상한 이야기로 만들어 대중에게 퍼뜨리고 있는 것 같다"라고 쓴 것은 양자역학이 예측을 확률적 예측까지로 국한시킨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저의 주장과 장회익 선생님의 주장도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다른 주장일 뿐입니다. 슈뢰딩거가 1935년에 제시한 고양이 사고실험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놓고 수많은 해석들이 제각기 나름의 설명을 내 놓고 있기 때문에, 그 중 어느 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은 각자의 몫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옹호하는 그 설명과 해석이 더 합리적이고 더 그럴 듯하고 더 적절하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제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설명과 해석을 비판하고 문제점을 지적하게 됩니다.
단적으로, 주사위를 던질 때 주사위가 바닥에 닿기 전에는 여섯 가지 눈이 모두 '중첩'으로 있다가 바닥에 닿는 순간 그 중 하나의 눈으로 '도약'했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거나 신비주의적인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꼭 마찬가지로 슈뢰딩거의 사고실험에서 뚜껑을 열기 전 고양이가 '반생반사'의 상태였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특히 일상언어에서 "...한 상태였다"라는 표현은 이미 실재론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하지만 양자물리학에서 '상태'는 아주 조심스럽게 이해해야 하는 물리학 용어입니다. 고전역학에서 '상태'는 "위치와 운동량"이라고 말하는 대신 하나의 단어를 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양자역학에서 '상태'는 철저하게 '상태함수'로 표현되는 어떤 상황 내지 출발점 내지 서술의 대상입니다.
장회익 선생님의 접근은 매우 독특합니다. 양자역학의 해석 하나를 툭 던지는 대신에 양자역학이라는 자연철학의 한 틀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고 있고 또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그대로 (그러나 물리학을 전공하지 않는 독자를 최대한 배려하면서 가장 빠른 지름길로) 제시하고, 독자가 직접 판단하게 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위키피디어 Schrödinger's cat에는 적어도 일곱 가지의 해석이 나옵니다. 저는 이 일곱 가지 해석이 모두 한계가 있고, 이와는 다른 '서울 해석'이 제대로 상황을 보고 있다고 믿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다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조금씩 '양자역학' 어휘에 익숙해져가는 느낌입니다. ^^
고맙습니다. 부족한 글이 조금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 시간을 쪼개 글을 올리는 보람이 있습니다.
적어주신 것에 십분 공감합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는 쉽게 읽히는 만만한 텍스트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 언어, 표현, 어휘에 익숙해져 가다 보면, 실상 동아시아 자연철학, 근대물리학의 자연철학, 상대성이론의 자연철학, 양자역학의 자연철학, 통계역학의 자연철학, 우주론의 자연철학, 생명론의 자연철학, 인지와 앎에 대한 자연철학, 스피노자의 자연철학, 주돈이와 황극경세서의 자연철학에서 오고가는 이야기가 봄비처럼 슬며시 스며들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