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후기] 『철도원 삼대』 - '가볍게 책/영화클럽 시즌2' 2회
『철도원 삼대』. 황석영. 2020. 창비.
‘가볍게 책/영화클럽 - 시즌2’에서는 ‘기후+문명+과학’을 주제로 한 영화와 책을 가지고 모임을 해보려고 이 책을 선정했는데요. 철도, 화석연료가 우리나라 역사와 사회와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돼 있어서 떼놓고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다 얘기하기는 어렵겠고, 등장인물 중심으로 간단히 소개하면서 모임 후기를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황석영작가의 『철도원 삼대』는 여러 리뷰나 기사에서도 소개되듯이 우리나라 100년 노동운동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작가도 후기에서 얘기하지만(‘작가의 말’을 미리 읽는 것도 좋습니다. 스포일 거의 없습니다.) 근대 산업노동과 노동자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이 많지 않나 봅니다. 그리고 노동운동사이기 때문에 황석영작가의 본격 장편소설임에도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라서야 주류 언론매체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등장인물로는 우선 현재 시대의 화자인 이진오가 있습니다. 중공업 회사에 다니는데, 회사 주인이 바뀌고 고용승계가 안 되면서 발전소 탑에 올라가서 고공농성을 1년 넘게 하게 됩니다. 이 1년 남짓의 시간과 지난 100년의 우리나라 역사와 노동운동의 역사를 함께 보여주는 것이 이 소설의 스토리이고, 중요한 실제 사건에 가상의 인물과 설정을 꼼꼼하게 대입하고 있습니다.
이진오 위로 아버지 이지산, 할아버지 이일철(+작은 할아버지 이이철), 증조할아버지 이백만, 증조고모할머니 이막음이 있습니다. 이렇게 지산, 일철/이철, 백만 세 사람이 철도원 삼대입니다. 현재의 화자 이진오는 4대손입니다.
맨 처음 증조대의 형제가 이천만, 이백만, 이십만, 이막음이고 1920년대 전후로 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들의 직업이 각각 화물선 기관장, 기차 기관수, 미곡도매상, 대목 그러니까 집짓는 목수(이막음의 남편 강씨)입니다. 배, 기차, 쌀, 집 이렇게 사람 사는 데, 사회가 유지되는 데 가장 기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유통, 쌀, 집을 등장인물들의 직업으로 하나씩 배정을 한 것 같습니다.
제목도 이미 그렇지만, 이 세 가지 분야 중에서 특히 철도는 소설의 뼈대처럼 놓여 있습니다. 철도는 근대화의 상징과도 같고, 일제가 마치 한국을 위해서 철도를 놓아준 것처럼 식민지사관에서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겠죠. 황석영작가가 인터뷰에서 말하기도 했던 ‘도둑이 놓고 간 사다리’ 얘기도 이 소설 중에 등장합니다.
가장 비중있는 등장인물은 이일철과 이이철 형제이고 어릴적 이름은 한쇠, 두쇠입니다. 아버지 이백만이 철도공작청에 다니는데, 당시 용산에 철도공작청이 실제로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집이 영등포 샛말(양평동과 당산동 사이)입니다. 영등포역은 1899년 경인선 개통과 함께 시작되었고, 경부선이 1905년에 개통되면서 영등포역은 더욱 교통과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한쇠는 철도종사원양성소라는 곳을 나와서 일제시대에 정식 기관수가 돼서 만주까지 운행을 다녔습니다. 일제가 한반도 뿐만 아니라 중국 만주까지 전쟁물자를 실어나르는 속도를 높이기 위해 애쓰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두쇠는 아버지 이백만을 따라 철도공작창에 들어가 선반조수를 하다가 노동운동을 합니다. 두 형제가 일제시대에는 서로 다른 삶을 살았는데요. 동생 두쇠가 감옥에서 고문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고, 해방 후 형 한쇠도 노동운동을 하게 되고 전쟁을 거치면서 북한으로 넘어갑니다.
이진오의 아버지이자 한쇠의 아들 이지산도 아버지처럼 기관수가 되려고 했지만 빨갱이집안이라고 해서 철도 학교 입학이 거부됩니다. 십대에 학생운동, 노동운동을 하다가 좌절을 겪으면서 북한으로 넘어가 아버지를 만나고 그곳에서 철도학교를 다녀 기관수가 됩니다. 나중에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남쪽으로 투입되고 기차를 몰다가 폭격으로 다리를 잃고 포로가 되어 집 영등포로 다시 돌아옵니다.
이 소설을 보고 당사자들은 어떤 기분이 들었을지 사실 상상이 잘 안 됩니다. 위로를 받기도 했을 것 같고, 더 화가 났을 수도 있을 것 같고, 눈물도 많이 흘렸을 것 같습니다. 작가 스스로도 쓰면서 상당히 힘들었을 것 같고요.
읽으면서 가장 슬펐던 부분은, 4대손 이진오의 고공농성 선배인 영숙의 이야기였습니다.(영숙은 한진중공업 김진숙씨를 모델로 한 것 같습니다.) 영숙은 수배 중에 고향언니 정자의 집을 찾아가는데요. 정자는 십대부터 그때까지 계속 같은 봉제공장에서 미싱사를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마침 가출해있던 정자의 딸을 두 사람이 같이 찾아가 데려온 날, 영숙은 폭발하면서 노조네 운동이네 하는 너 같은 것들 지긋지긋하다, 당장 나가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또 가슴아팠던 부분은 한쇠가 두쇠를 기차에 몰래 태워 작전 수행을 도와주는 장면이었습니다.(p.472). 수배생활 중인 동생을 오랜만에 만나 하는 얘기라는 게 기차 얘기였습니다. 작가가 이 장면을 그리기 위해서 얼마나 고심했을까 싶었습니다.
형이 준비해온 것은 철도원의 작업복 작업모 등속이었다. 이철은 담갈색 작업복을 입고 다리에 각반을 두르고 작업모를 섰다. 일철은 옷을 갈아입고 나온 아우의 아래위를 훑어보고는 앞장서 걸었다. 그들은 철로를 건너 특급열차가 들어온 폼으로 갔고 기관차에 올랐다. 이철이 기관차의 외양과 운전실의 기기를 보고 나서 일철에게 말했다.
“이거 터우인가?”
“그래, 텐더형이지. 그중에 가장 큰 발틱 계열이다. 견인력 삼만 삼천 파운드야.”
“마터는 없어요?”
“응, 그게 제일 많은데 대개가 화물열차를 끈다. 산악형이라 북선에서는 마터가 대부분이다. 산악지방에선 미카를 못 쓴다구.”
대답해주다가 일철은 아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장 화났던 부분은 전쟁이 끝나고 일본이 항복한 다음날, 일본 왕 히로히토의 방송내용(‘대동아전쟁종결조서’)이 한글로 번역돼서 뿌려졌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항복이 아니라 종전을 수락한다였습니다. 동아시아의 번영과 안정을 위해 ‘짐’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런데 적들과 동맹국들이 안 도와주고 방해해서 잘 안 됐다, 앞으로 우리가(일본이) 고생을 할 텐데 우리 임무가 무겁고 갈 길이 머니 참고 열심히 하자, 이런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더 화나는 내용이 많은데요, 한 번 읽어보시기면 좋겠습니다.(p.518-520)
이 책을 읽고 한 가지 예상치 못한 느낌이 남았는데요. 100년 노동운동사라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구나 했는데, 오히려 이 시대를 버티고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준 게 어머니들이고 할머니들이고, 가족과 사람에 대한 깊은 사랑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이 소설에는 남성노동운동가 뿐만 아니라 여성운동가들도 많이 나옵니다. 두쇠의 아내 한여옥, 두쇠와 함께 활동한 박선옥, 할머니 신금이도 결혼 전까지 공장을 다니면서 독서회 활동을 했고, 기타 많은 여성운동가들이 나옵니다.(소설 속에서는 공장에서도 시골에서도 항상 독서회가 꾸려지고 있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고증을 해서 쓰신 거겠죠.)
작가가 실제로 그런 의도를 가지고 그래냈겠지만, 이 시대에 여성들이 자식들, 남편들, 부모들 보살피고 먹이고, 생계를 책임지는 그런 일들을 해낸 걸 생략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선지 밥 먹는 장면, 음식을 설명하는 장면도 꽤 많이 나옵니다. 고공농성 중인 이진오가 먹는 음식은 누가 어떻게 가져다 주고, 대소변은 어떻게 처리하고 팔다리 운동은 어떻게 하고 잘 때는 어떻게 입고 덮는지도 꼼꼼히 서술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인 것 같고요.
남성 등장인물들이 노동운동을 하다가 수배를 받거나 잠행을 할 경우에도 가만히 숨어있는 게 아니라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면 공장이든 어디든 들어가고 떡집, 각종 가게 등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도 생각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여성들도 대개 봉제공장, 떡집, 생선장사, 반찬가게 등 닥치는대로 일을 하면서 집안과 가족들을 챙깁니다. 흔한 편견이, 독립운동이니 사회주의운동이니 하면 모던보이 모던걸 차림으로 스파이처럼 다니는 걸 상상하게 되는데, 이 책을 보면 공장이든 장사든 일 할 거 다 하면서 노동운동을 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게 더 사실적인 듯 해서, 참 고달프다 싶었습니다.
이 소설에는 실존인물도 많이 등장합니다. ‘경성트로이카’라는 유명한 조직의 인물도 등장하고, 이들을 도운 경성제대 일본인 미야케 교수도 등장합니다. 그외 실제 일어났던 중요한 역사들도 하나하나 다루고 있는데요. 이 모든 중요한 사건들을 역사적으로 살피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건들에 엮인 개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작가가 짚어주고 싶었던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저는 일부만 속했지만 동시대인으로서 이렇게 기록하고 챙겨주는 작가의 책무, 의무를 다해주신 황석영작가께 깊은 감사를 느꼈고, 이 소설이 시리즈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큰 호소력을 가질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영화 『암살』이나 『밀정』처럼 재밌는 요소가 아주 많은데요, 이미 영화 제작이 진행 중일 지도 모르겠네요. 🙂
'가볍게 책/영화클럽 시즌2' 3회는 다시 영화입니다. 아놀드 슈와르츠제네거가 나오는 1990년 「토탈 리콜」과 「아바타」 1편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로 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가볍게 책/영화클럽” 2024년 시즌2 – 3회 : 영화 「토탈 리콜」, 「아바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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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책/영화클럽' 2024년 시즌2, 시작합니다.(9월~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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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영화클럽" 게시판 열었습니다 & 1회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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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가볍게 책/영화클럽” 2024년 시즌2 – 3회 : 영화 「토탈 리콜」, 「아바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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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토탈 리콜」 감독 파울 페르후번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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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후기] 『철도원 삼대』 - '가볍게 책/영화클럽 시즌2' 2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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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철도원 삼대』 - '가볍게 책/영화클럽 2024년 시즌2' - 2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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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철도원 삼대』 - 등장인물, 줄거리 정리 링크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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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예스터데이』 - 가벼운 줄거리 소개 (스포일 있음) (가볍게 책/영화클럽 2024-시즌2-1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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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영화 소개 - '가볍게 책/영화클럽 2024년 시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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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즌 가벼운 참여 감상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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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영화클럽' 2004 시즌1 마쳤습니다. 시즌2는 9월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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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카』 도입부의 인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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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 후기] 영화 「아이, 로봇」과 인공지능 ("가볍게 영화클럽" 시즌1 -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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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인공지능 관련 녹색평론 칼럼(185호) 발췌 요약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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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당백-철도원 삼대 2부
글 참 잘 쓰셔요. ㅎㅎ 어쩜 어젯밤 나눈 대화를 생생히 살려내시는 솜씨에 감탄합니다. 도중에 읽다가 히로히토 일왕이 자기네가 조선을 비롯해 동아시아번영을 위해 애쓰는데 적국(미국 등)때에 중단하게 됐다고 말하는 부분. 진짜 화가 나요. 우리는 새파랗게 속았죠. 항복한다고 선언한 줄 알았는데 항복의 항자가 어디도 없네요. ;;; 요새 식민지근대화론주의자들이 권력 요직을 꿰어차고선 당당히 떠들어 대서 어이없두만 이 사람들은 일왕이 이렇게 떠든것을이미 잘 알고 100퍼 공감하는 걸로 확신돼네요.
재밌는 부분, 상세한 이야기는 쏙 빼고 기억나는 대로 큰 줄거리만 적었습니다. kyeongaelim님도 모임 때 해주신 얘기들 남겨주세요~ 기억이 서서히 사라지기 전에. ㅎㅎ; 그리고 쓸 때는 대충 쓴 거 같은데 지나고 나서 예전 기록을 읽어보면 꽤 소상히 썼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라고요.
저는 항상 모임 하고 나서 뒷북 여운이 남는데요. 이런 저런 생각이 계속 드네요. 소설 마지막을 왜 그렇게 했나 싶기도 하고요. 그런 면에서는 좀 답답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막음이 고모와 신금이 할머니에게 주술적인 능력을 부여한 걸 두고, 작가가 손쉬운 수단을 선택했다고 비판하는 평들도 좀 봤는데요. 곰곰 생각해보니 이건 어쩌면 역사적인 내용을 다루는 소설이기 때문에 선택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 나오는 사건과 결과는 독자인 우리가 모두 알기 때문에 이야기 전개에서 크게 놀랄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귀신을 보고 미래를 어느 정도 보는 고모와 할머니의 그런 점이 소설적인 재미를 불러일으키는 요소로도 작동하지만, 더 중요한 기능은 독자인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을 작중 인물 중 누군가도 알고 있는 식으로 처리함으로써 모두가 뻔히 아는 내용에 작중인물들이 놀라는 유치한 장면을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이렇게 나름 분석을 해보았습니다.
위 후기에 소설을 소개하는 데 치중하다보니 이 소설을 읽어나가는 것이 어떤지는 전혀 쓰지 못했는데요. 사실 추진력은 좀 부족해서, 저는 이 모임이 아니었다면 다 못 읽었을 것 같습니다. 길기도 길지만요. 지난 100년의 한국역사와 맞물린 산업노동자와 노동운동의 역사가 궁금하지 않다면 다 읽어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만 된다면 읽어나가는 데는 무리가 없습니다. 일단 잡으면 이야기가 술술 넘어가고요. 중반 넘어가면 흥미로운 액션 씬도 꽤 나옵니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이 영화를 본 것처럼 생생한데요. 특히 여성 등장인물들 각각의 캐릭터가 다양하게 표현이 잘 돼있어서, 메인 캐릭터인 한쇠, 두쇠보다 4대손 이진오의 할머니, 증조할머니, 고모할머니가 더 기억에 남습니다.
일당백-철도원 삼대 1부 (제가 즐겨보는 '일당백'에서도 『철도원 삼대』를 다뤘는데 잊고 있다가 어제야 재발견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