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와 장미십자가 전설

다음 이야기는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90쪽에 나온 이야기의 연장선에서 읽으면 된다. 본래 여헌과 데카르트에 관해 작성했던 원고에는 다음의 이야기가 들어있었으나,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안에 이를 편집해 넣으면서 뒤에 나오는 이야기의 대부분을 삭제했다. 그러나 ‘자연철학 이야기’를 되살리고 싶다고 하기에 이를 복원해 소개한다.

장회익 (녹색아카데미). 2021년 4월 27일.

목차
1. 데카르트의 노트북 올림피카(Olympica)
2. 데카르트와 ‘장미십자가 동우회’
우리의 남은 관심사 : 데카르트가 이 동우회를 통해 무엇을 얻었으며 또 무엇을 버렸을까?


1. 데카르트의 노트북 올림피카(Olympica)

우리는 앞에 논의했던 여헌과 데카르트 사이에 몇 가지 흥미로운 유사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우선 이 두 사람 모두 일생을 거의 떠돌이 나그네 생활을 했다는 점이다. 여헌(1554-1637)이 어려서부터 집을 떠나 나그네 생활을 해서 그의 호(號)마저 여헌(旅軒)이라 했다지만, 데카르트(1596-1650) 또한 어린 나이에 기숙학교를 들어간 이후 집에서 거의 지낸 일이 없이 유럽 각지로 유랑 생활을 해왔다. 본래 프랑스 사람이지만 그는 프랑스보다 오히려 네덜란드 등 이웃나라에서 더 많이 지났다. 그의 54년이란 길지 않은 생애에서 알려진 이주 기록만 38회에 달하고 있으며 살았던 주요 거주 지역만도 10여 곳을 헤아린다. 말하자면 그는 서구의 여헌인 셈이다.

[그림 1] “데카르트와 스웨덴 크리스티나 여왕의 토론” 1649. (Nils Forsberg(1842-1934) after Pierre-Louis Dumesnil the younger(1698-1781). 출처: wikipedia/1649_in_Sweden)

그리고 관련된 이야기이지만 이들은 일생동안 지정된 직장이나 직위를 지니지 않았다. 그저 혼자 공부를 즐겨하며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언제고 아낌없이 가르침을 베푸는 말하자면 떠돌이 교사 비슷한 신분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들 사이의 중요한 공통점은 두 사람 다 생애의 어느 시점에 학문에 전념하겠다는 각오를 깊이 다졌다는 사실이다. 여헌이 17세(우리 나이 18세) 되던 해에 결의를 다지고 우주요괄첩을 만들어 일생을 품고 다녔듯이, 데카르트 또한 23세가 되던 해에 운명과도 같은 어떤 중요한 결의를 다지게 된다.

데카르트의 사후에 발견된 ‘올림피카(Olympica)’라는 제호의 노트북(각주 1)에 따르면 당시 군인의 신분으로 독일의 남부 지역에 머물고 있던 데카르트는 울름(Ulm) 근교의 한 ‘난로 피운 방’에서 매우 색다른 경험을 한다. 그는 1619년 11월 10일 낮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619년 11월 10일, 나는 열광에 사로잡혔다. ‘놀라운 학문’(mirabilis scientiae)의 기반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가 여기에 ‘놀라운 학문’이라고 쓰면서 실제로 마음에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정확히 그가 계획한 일이든 아니든 그는 결과적으로 대단히 놀라운 학문의 기반을 세웠다. 이 놀라운 학문이 바로 우리가 이제 살펴나갈 될 근대 과학이고 근대 철학임은 물론이다. (여기까지가 자연철학 강의 90-91쪽에 서술된 내용이다.)

[그림 2] “암스테르담의 데카르트”. 1629. (by Felix Philippoteaux 1880, coloured later. 출처 : Alamy/Descartes)

이러한 열광에 사로잡혀 하루를 보냈던 바로 그 날 밤, 그는 세 번에 걸친 꿈을 꾸었다. 그는 이 꿈들에 대해 상세히 기록해놓았는데, 그가 꾸었다는 세 번째 꿈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그가 책상에 앉아 있는데, 큰 백과사전이 놓여있어서 그 쪽으로 손을 뻗치려는 순간 또 한 권의 책이 놓인 것을 보았다. ‘라틴 시 선집(Corpus poetarum)’이었다. 그가 무작위로 한 부분을 펼치니 로마 시인 아우소니우스(Ausonius)의 시가 펼쳐졌는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되는 것이었다.

이 생애에서 나는 어떤 길을 따를 것인가? (Quod vitae sectabor iter?)

그리고는 다른 누군가가 나타나 아우소니우스의 “이거다 그리고 아니다(Est et Non)”라는 제목이 붙은 시를 내밀었다.

그리고 시집을 잡으려니까, 그만 사라져버렸고, 대신 백과사전을 보니까 이건 이전처럼 완전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낯선 사람과 책 모두가 사라지고, 데카르트는 계속 잠을 잤는데, 잠을 자면서 그는 이미 꿈의 내용을 해석하고 있었다.(각주 2)

데카르트의 이 꿈의 해명에는 후에 정신분석학의 대가 프로이트까지 동원된 일이 있지만 이에 대한 일차적 해몽가는 바로 데카르트 자신이다. 그의 해몽에 따르면, 백과사전은 전체 학문이고 시인은 그에게 그가 낮에 발견한 새 길을 따르라고 권한 것이다. 그리고 “이거다 그리고 아니다”라는 말은 학문에서의 진리와 허위를 말한다는 것이다. 그가 여기까지 생각하자 갑자기 그간의 학문 전체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바른 해몽인지 아닌지는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꿈을 계기로 데카르트가 어떤 소명 의식을 지니고 학문의 길에 제대로 들어섰다는 점이다. 적어도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본격적인 학문 탐구의 길로 들어섰고, 이는 결과적으로 인류 지성사의 물줄기를 크게 바꾸어 놓을 계기를 만들었다.

2. 데카르트와 ‘장미십자가 동우회’

데카르트가 라 플레슈 학교를 졸업할 무렵인 1614년 유럽 지성계에는 이름 모를 저자에 의한 이상한 서적 하나가 출간되었다. 『전 세계의 보편적 그리고 일반적 재구성: 유럽의 모든 학자와 지배자들에게 보내는 장미십자 동우회 성명서』[약칭: 성명서(fama)]라는 긴 제목의 책이다. 그리고 곧 이어 다음 해에는 『장미십자가 동우회의 고백과 함께 하는 철학자 필립 아가벨라의 비밀 철학에 대한 간결한 고찰』[약칭: 고백(Confessio)]이라는 글이 잇따라 등장했다. 이 글들은 ‘장미십자가 동우회’(Brotherhood of Rosy Cross: Rosicrucian)라는 신비한 비밀결사에 관한 것이어서 유럽 지성계에서는 그 후 한동안 비상한 관심과 함께 격렬한 공방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장미십자가 동우회’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림 3] 성명서(fama)의 첫 페이지. 1614. (출처 : de.wikipedia/wiki/Rosenkreuzer)

여기서는 이 문헌들 특히 ‘성명서’에 담긴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Aczel 84] 이 글들에 따르면 이 모임의 창시자는 1378년에 태어난 독일의 한 농부 크리스챤 로젠크로이츠(Christian Rosenkreuz)다. [‘로젠크로이츠’는 독일어로 ‘장미 십자가’를 의미하므로 모임의 이름이 그렇게 붙었다.] 그는 5살에 수도원에 들어가 희랍어와 라틴어를 익히고, 16살에는 수도원을 떠나 마술사들의 무리와 어울려 각지를 배회하며 5년 간 그들의 기술을 익힌다. 다시 마술사들을 결별한 그는 터키로, 다마스쿠스로 그리고 멀리 아라비아까지의 여행길을 혼자 떠난다. 그러는 가운데 오직 철학자들만이 아는 사막 속의 비밀 도시 담카(Damcar)라는 곳을 찾아간다. ‘자연에 대한 유별난 지식’을 지닌 이곳 주민들은 벌써 그가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고, 특별한 배려로 그를 환영한다. 그는 그들에게 자기 경험을 말해주었고, 그들에게서 물리학과 수학을 포함한 그들의 과학 그리고 자연의 법칙들을 배운다.

이렇게 3년 간 거기 머물면서 우주에 대한 숨겨진 지식을 얻은 그는 다시 바바리 해안으로 길을 떠나 페스(Fez)라는 도시를 찾아간다. 여기서 다시 2년을 머물면서 이곳의 현자들과 신비철학자들에게서 그들의 지혜를 전수받는다.

이제 그는 모든 학문을 개조하고 모든 사회를 개조할 원대한 아이디어를 구상한다. 그리고는 유럽에 그의 새 지식과 아이디어를 전할 목적으로 스페인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수용되지 못하고 오직 냉대만 받는다. 유럽 각지를 돌아다녔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시 독일로 돌아온 그는 커다란 집을 짓고, 그 안에 과학적 장비를 갖춘 실험실을 마련했다. 그는 과학을 통해 세계를 개조하려했고, 그의 사후 이것이 선발된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기를 희망했다.

1484년, 그는 10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그의 많은 유품과 함께 한 동굴 안에 안치되었다. 1604년, 그러니까 정확히 120년이 지난 후, 네 사람의 학자가 우연히 이 동굴을 찾았다. 그곳에는 거울과 종, 그리고 책들과 펼쳐진 사전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모든 것들이 생생했는데, 동굴 벽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라틴어로 새겨져 있었다.

Post CXX Anns Patebo  [백 이십 년 후에 내가 발견되리라]

[그림 4] 철학자들의 산에서 로젠크로이츠의 무덤을 발견하는 순간(1604)을 표현한 그림. (출판년도 1785. 출처 : wikimedia commons)

네 친구들은 이것을 하나의 증표로 보았다. 그들은 그의 글과 유물들을 통해 배우면서 비밀 동우회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이 결사의 취지는 과학을 통한 세계의 재구성에 두었다. 그들은 수학과 물리학 공부에 착수했고 의학과 화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얼마 되지 않아 네 사람이 각각 한 사람씩을 더 끌어들여 회원은 모두 8명이 되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6가지 규칙을 정했다.

1.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의료를 무상으로 제공한다.
2. 각자는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의 풍습에 따른다. 
3. 회원은 일 년에 한 번씩 만난다.
4. 각자가 후계자를 정함으로써 회원이 죽더라도 보충되도록 한다.
5. 각자는 R.C.라고 하는 글자로 된 숨은 증표를 늘 지참한다.
6. 회원은 적어도 백년 간 이 결사의 비밀을 지킨다.

또 다른 문헌에는 이들의 의식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는데, 이들은 검은 장식 띠와 앞치마를 걸쳤고 좌장의 탁자 위에는 완벽한 금속 삼각형, 나침반, 그리고 성경이 놓여있었다고 한다. 이는 곧 기하학과, 물리적 세계, 그리고 기독교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림 5] 장미십자회의 비밀 상징에 관한 책 『Secret Symbols of the 16th & 17th Centuries – in colour – AMORC Centennial Edition』의 표지. 2015. (AMORC는 Ancient Mystic Order Rosae Crucis의 줄임. 출처 : The Rosicrucian collection)

연구자들에 따르면 이 동우회의 창시자인 로젠크로이츠는 가공인물인 것이 거의 확실하나, 이러한 취지 아래 모임을 만들어 활동한 사람이 있었던 것은 거의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들의 이름으로 출간된 책들도 있으며 그 안에는 수학, 과학, 그리고 신비주의에 관련된 글들이 있다. 이 안에는 생물학, 의학, 초기의 물리학, 그리고 연금술, 점성술 등 오늘의 시각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들도 많이 담겨있다. 이들은 대체로 교회의 권력에 반대하고 종교체제의 개혁을 주장했다. 그리고 당시 설혹 이것이 자연과학에 관련된 것이라 하더라도 제도권 교회의 정통 학설에 맞지 않는 학설은 가차 없이 처벌 대상이 될 수 있었으므로, 자유롭게 학문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눈에 띠지 않는 조직 안에 숨어서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조직 구성원들의 희망과는 달리, 일단 이러한 조직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더 많은 탄압이 가해져 단순히 이 조직과의 연계가 의심되기만 해도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그러한 의심을 사고 그것 때문에 직접 간접으로 어려움을 당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가 바로 데카르트이다. 데카르트 당시 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데카르트 연구자들 사이에서 가장 큰 관심사의 하나가 된 것이 데카르트와 ‘장미십자가 동우회’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최근의 본격적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는 최소한 초기에는 이 모임과 깊은 관련을 가졌던 것이 분명하다.(각주 3) 그 하나의 증거로 그의 노트북 ‘Olympica’에 사용된 용어들을 들 수 있는데, 이 비밀결사의 회원들은 자신들만의 비밀 코드를 위해 자신들 사이에만 통하는 언어를 개발했다. 우선 ‘Olympic’이라는 말 자체가 ‘지성적’ 혹은 ‘이해 가능한’ 이라는 뜻의 특별 언어이다. 그리고 ‘놀라운 학문’(mirabilis scientiae) 또한 철학, 마법, 연금술 등을 나타내는 그들만의 독특한 표현이다.

이러한 증거들 말고도 당시 젊은 데카르트가 이 조직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충분한 개연성을 찾을 수 있다. 우선 사실이든 아니든 그 조직은 아랍 세계를 통해 이어져 온 고대 이집트, 그리스, 페르시아의 학문전통을 잇고 있으며, 또 그 안에 수학과 과학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비법으로 전해져 오는 신비 사상 가운데에도 그 어떤 쓸 만한 알맹이가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것들은 이제 막 학문의 길에서 그 무엇을 갈망하고 있던 데카르트에게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림 6] 케플러(왼쪽)가 점성술에 사용하기 위해 직접 그린 천궁도(horoscope, 오른쪽).(출처 : wikipedia, wikipedia commons)

이것이 직접적 동기가 되었던 아니던 간에 그는 마침 이 동우회의 뿌리를 형성한 독일 지역을 두루 방문했고, 이 모임의 회원임이 거의 확실한 한 신비주의 수학자 파울하버(Faulhaber)를 만나 상당 기간 학문적 교류도 유지했다. 데카르트의 글과 편지 등에는 파울하버와 케플러(Kepler) 두 수학자의 업적과 아이디어를 통해 영향을 받았음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케플러는 이미 행성 궤도에 관한 업적으로 지울 수 없는 업적을 남긴 사람이지만, 그 또한 이 동우회와 긴밀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점성술에 대해서도 긍정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우리의 남은 관심사 : 데카르트가 이 동우회를 통해 무엇을 얻었으며 또 무엇을 버렸을까?

우리의 남은 관심사는 데카르트가 이 동우회를 통해 무엇을 얻었으며 또 무엇을 버렸을까 하는 점이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데카르트와 여헌의 입장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여헌에게 ‘장미십자가’에 해당하는 것은 소옹의 학문세계이다. 여기서 우리는 양쪽 다, 건질 것보다는 버릴 것이 더 많은 바구니였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과학적 사고가 일부 들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수많은 전근대적 사유의 패턴이 들어있는 것이다. 이들의 차이를 좀 더 좁혀 비교하자면 ‘장미십자가’에는 버릴 것도 많고 건질 것도 많았다고 한다면, 소옹의 선천학에서는 버릴 것이나 얻을 것 모두 그리 크지 않았다는 차이를 지적할 수 있다.

여헌은 소옹의 학문에서 우주의 과거와 미래를 내다보는 학문적 관심사를 취하는 대신 번거롭고 실증성이 약한 상수학(象數學)을 버렸고, 데카르트는 장미십자가에서 수학과 과학에 대한 관심을 취하는 대신 역시 번거롭고 신비적 색채가 강한 마술적 점성적 연금술적 요소를 버렸을 것이다. 이를 갈라놓는 과정에서 그의 엄격한 비판철학이 탄생했고, 그 알맹이를 활용하는 과정에서 그는 근대과학의 바탕을 닦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굳이 여기서 데카르트와 장미십자가 이야기를 되살려 소개한 것은 ‘장미십자가 전설’을 통해 데카르트가 얻은 것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함이다. 삭막하게만 느껴지기 쉬운 수학과 과학에 대한 관심 즉 오늘의 자연철학 탐구를 이러한 ‘장미십자가 전설’이 말해주는 신화적 여정 속에 담아 파악할 경우 온 몸에 피가 흐르고 가슴 속에 심장이 솟구치는 경험이 동반되리라 하는 생각이다.


  • 각주 1. 이 노트북은 그의 사후, 유물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고, 그의 초기(1691) 전기작가였던 바이레(Baillet)의 기록이 이것을 전한다. 이 문서의 원본은 사라졌고, 라이프니츠가 만든 사본은 남아있는데, 그 내용은 바이레의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 (Amir Aczel, [Descartes’ Secret Notebook]. Random House, 2005)
  • 각주 2. 실제로 당시 아우소니우스의 시들이 실린 큰 대형 시집이 있었고, 데카르트가 다녔던 라 플레슈 예수회 왕립학교에도 학생들이 읽도록 비치되어 있었다. 그 책에 이 두 시는 서로 마주보는 면에 실려 있다. (Francis Crick, [The Astonishing Hypothesis: The Scientific Search for the Soul]. London: Simon&Schuster, 1994: 60)
  • 각주 3. 2001년 Strasbouarg대학의 Edouard Mehl은 Sorbonne에서 받은 박사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한 책에서 이 점을 잘 밝히고 있다. (Edouard Mehl, Descartes en Allemagne, Strasbouarg: Presses Universitaires de Strasbouarg,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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