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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철학이야기
-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제8장. 사람도 소도 모두 잊다: 주체와 객체
- 다룬 주제들
1.물리학으로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2.데카르트가 말한 판단 기준으로서의 ‘나’와 주체로서의 ‘나’의 차이?
3. 아인슈타인과 스피노자
4.데카르트가 말하는 몸과 마음
5.스피노자의 『에티카』 에서 말하는 몸과 마음
▷ 녹취 시작
- 구분점 부분 : 장회익선생님 말씀
<최> 최우석 질문
<황> 황승미 질문
1. 물리학으로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최> 이 책은 물리학 책이 아니라 자연철학이라서 당연할 수 있지만, 물리학자가 ‘나’에 대해서 얘기한다고 했을 때 철학자들은 뭘 여기까지 넘어오나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물리학자가 물리학에 근거해서 ‘나’를 연구할 수 있나 싶지만, 책을 보면 여기서는 그것 너머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한 지적 모험자가 내가 어떤 지식에 근거하고 있다고 한다고 해서 내 호기심의 영역을 제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생명에 대해서, 보편적인 법칙 내지는 더 보편적인 것 하에서 어떠한 현상이 어떠한 구도에 들어오는지 아는 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셨다. 과연 ‘나’도 그런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건 이해하기는 어렵고 접근해 볼 수만 있는 것인지 좀 궁금하다.
- 재미난 생각이다. 나는 그걸 뒤집어서 얘기를 해보겠다. 과연 물리학을 하지 않고 ‘나’를 궁금해 할까? 왜냐하면 우리가 앞서서 생명 얘기할 때랑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흡사한 면이 있다. 생명을 물리학에 바탕을 두지 않고 이해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얘기하겠다. 물리학을 모른다면 이해가 안된다. 거기까지는 납득이 될 것이다. 이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더 보편적인 것과 연관해서 자리매김하는 것이니까.
- 그런데, 그러면 ‘나’도 이해가 되느냐? 이 문제가 진짜 물리학이 부딪히는 진짜 문제이다. 왜냐? 이건 물리학으로 안 되는 한계에 딱 온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생명까지는 멀지만 걸어 갔어, 갔더니 상당히 이해가 됐다. 그랬는데, 이번에는 ‘나’라고 하는 데서 무엇이 걸리느냐? 낭떠러지가 돼버린 것이다. 물리학으로 이해가 안 되는 낭떠러지에 딱 부딪힌 것이다. 누가 놀라겠나? 물리학이라는 바탕을 가지고 낭떠러지를 본 사람이 놀라지, 우리 일상 살아가는 사람은 놀랄 일이 없다.
-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나한테 가장 가까운 것이 ‘나’이고 내가 가장 잘 아는 게 ‘나’이다. 사실 상식적으로는. 저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내 몸 안에 있기 때문에 이거야말로 더 이상 물을 것도 없고, 당연하다면 가장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물리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가장 어렵고 가장 새로운 것이다. 그래서 문제가 된다.
- 물리학으로 연결되면 당연히 해야하는 건데, 연결 안 되는 데서 딱 부딪힌 것이다. 이걸 그러면 어떻게 봐야 하느냐. 훨씬 큰 문제에 와서 부딪혔고, 진지해질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생명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우리한테 너무 가깝다. 재밌는 것은 우리가 지금 이 책에서 출발하는 방식으로 말하자면 아주 추상적인 우주 전체의 보편적인 이치를 알고 그 다음에 우주 전체에서부터 봐왔다. 그 넓은 우주가 이해가 되고 있다.
- 그런데 그 중에 가장 어려웠던 게 생명, 우리가 사는 세계가 이 입장에서는 사실 이해가 난해하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고 적어도 생명이 가진 물질적인 측면에서는 나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해서 뚫고 왔다. 그런데 지금 ‘나’라는 데 딱 부딪히니까 이건 ‘이해한다’는 말을 못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해야되는 그런 상황에 마주친 것이다. 그래서 가장 진지하게 ‘나’를 볼 수밖에 없는 사람은 물리학자 아니냐, 그런 얘기를 하고 싶다.
2. 데카르트가 말한 판단 기준으로서의 ‘나’와 주체로서의 ‘나’의 차이?
<황> 그런데, 선생님께서 ‘나’라고 하시니까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것 같다. 책에는 “주체와 객체”라고 부제가 달려 있고, 몸-마음 문제(body-mind problem)라는 걸 들어본 적이 있고, 정신-신체 얘기도 하고 계셔서 어렵게 느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나’를 어떻게 알 것인가라고 하시니까, 어떤 문제인지 훨씬 더 잘 와닿는 것 같다.
그리고 앞서서 다뤘던 데카르트는 인식, 판단의 기준이 ‘나’라고 했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끝까지 생각해서 그런 학문, 연구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나’를 모르겠다 하시니까 판단의 기준이 갑자기 무너지는 느낌이다.
- 데카르트는 인식 주체를 말한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기능 중에서 중요한 것은 ‘인식’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주체적인 삶의 영위, 산다는 것, 그리고 ‘나’와 ‘나 아난 것’의 관계, 이런 것이다. 데카르트가 인식의 출발점으로 ‘나’를 삼았다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발전이다. 그래서 근대 학문은 바로 내가 앎의 주체이고 내가 알아야겠다, 이런 각성으로 나아갔다.
- 그런데 그 문제는 ‘나’ 문제의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이다. 앎의 문제이다. 그것은 사실 조금 떼서 다음 9장에서 “앎이란 무엇인가”에서 다루었다. 데카르트가 거기서 처음 출발점으로 삼았던 것은 앎의 주체로서의 ‘나’를 세운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말하는 ‘나’와 앎의 주체로서의 나가 서로 무관한 것은 아니다. 앎의 주체와 나가 동일한 주체니까.
- 어떤 면에서는 데카르트는 ‘나’를 발견한 사람이다. ‘나’라는 것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다들 여기고 있기 때문에 눈에 안보인다. 이건 내 몫이고 이건 당신 몫, 이거 말고는 우리가 일상에서 별로 신경쓰지 않고 있다가, ‘나’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인식의 주체로서 진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 그랬기 때문에 나(주체)와 나 아닌 것(객체), 또는 정신과 물질의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가 바로 대두된 것이다. ‘나’ 문제에 대한 정답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나’와 ‘나 아닌 것’의 관계가 뭐냐에 대해서 제일 진지하게 생각해본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데카르트이다. 데카르트는 그런 의미에서 인식 주체로서의 ‘나’ 뿐만 아니라 더 크게 삶의 주체로서의 나도 철학의 중요한 과제로 내세우고, 나름 어떤 해답을 제시하려고 했다.
- 지금 우리 입장, 특히 내 개인의 입장에서는 그 해답이 적합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보고 있다. 그러나 ‘나’를 진지한 문제로 내세웠다는 것이 중요하다. 흔히 일상생활 속에서의 ‘나’라고 하는 것은 어떤 철학적인 문제로 보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스피노자는 그걸 문제 삼았다. 그러니까 다른 대답이 또 나오게 된 것이다.
3. 아인슈타인과 스피노자
- 스피노자는 바로 그 문제를 포착해서 다른 대답을 시도한 사람이다. 뉴턴과 스피노자가 데카르트 바로 후대 사람인데, 흥미롭게도 두 사람 다 데카르트와 직접적인 스승-제자 관계는 아니다. 심지어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 같은 도시에서 살기까지 했고 나이 차이도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접했다는 기록은 없다. 내가 책에서 상상은 해봤지. 만났을 수도 있다, 그만큼 가까이 살았으니까.
- 어쨌든 뉴턴과 스피노자가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데카르트는 새로운 근대적인 입장에서의 학문의 틀을 세웠다고 한다면, 뉴턴은 자연 이해에 적용을 해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뉴턴의 성과가 빛을 잃으려고 하는 무렵에 스피노자가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스피노자는 뉴턴이 명성을 떨칠 시기에는 완전히 죽어 있었다.
- 스피노자의 이론이 잘못 돼서라기 보다는, 그 이론이 워낙 심오한 면이 있어서 그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기도 했을 것이다. 종교적인 신앙이라든가 당시의 제도적인 관념과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어떤 면에서 해석에 따라서는 꼭 그렇지 않을 수 있는데도 당시로서는 달랐던 것 같다. 스피노자는 철저한 합리주의자, 철저하게 정직한 학자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데카르트만 해도 상당히 능구렁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책을 써놓고도 눈치를 보고, 이 책 냈다가는 안 되겠다 싶으면 가명으로 살짝 내기도 하고. 이 정도의 조심성이 있었다.
- 그런데 스피노자는 그렇지 않았다. 젊을 때부터 자기 생각에 옳지 않다 싶으면 막 얘기했고, 그래서 파문 당했다. 파문 당하고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오로지 학문하는 데에만 전념했다. 상당히 좋은 기회도 있었다. 당시로서는 최고의 대학 중의 한 군데(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교수로 와달라고 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거기 가면 내가 자유를 잃지 않겠나, 나는 내 생각의 자유를 조금이라도 꺽을 여지가 있는 곳으로는 갈 수 없다, 나는 계속 렌즈 갈면서 살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학문의 길을 가겠다고 했고 그렇게 했다.
- 순수한 학문적인 정열로 묶인 사람이 스피노자다. 그것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나쁘게 비춰져서 몇 백 년, 아마 거진 200년 가까이 잊혀져 있었다. 처음 100년은 완전히 암흑 속에 묻혀 있었고. 그래도 알아본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기는 했다. 학자들은 알아봤지만. 어쨌든 대중적으로는 책도 못 내고 그러다가. 내가 볼 때는, 상징적으로는 아인슈타인이 죽은 스피노자의 팔을 일으켜서 부활을 시킨 사람이다.
- 왜냐하면 아주 묘한 인연이 있다. 뉴턴은 데카르트의 전통을 받아서 엄청난 공적을 세웠고 이어져왔는데, 그런 뉴턴의 빛을 처음으로 가려버린 사람이 아인슈타인이다. 그런데 이제 그 아인슈타인이 스피노자의 손을 잡고 일으켰는데, 그 사건이 바로 1920년에 아인슈타인이 스피노자의 집에 가서 자기가 왔다는 서명을 하고간 일이다.
- 물론 그것만이 아니라, 아인슈타인이 생전에 꽤 여러번 스피노자에 대해서 언급을 했다. 가장 존경할만한 철학자라고 했고. 특히 종교와 하나님, 신에 대해서. 나는 신을 인정하되 스피노자의 신을 인정한다고 아인슈타인이 말했다. 그런 말을 했지만 실제로 그 집에 직접 방문한 것은 1920년이었다. 이 때가 바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옳다고 입증이 돼서 세계가 난리를 일으킨 시기이다. 그래서 전세계에서, 더구나 뉴턴의 중력이론이 이제 바뀌었다고 하는 바로 그 시기에 스피노자를 딱 찾아갔다!
- 가볍게 보면 가볍게 볼 수 있는 일이지만, 내가 볼 때는 아인슈타인이 어디 관광하러 다니고 그런 사람은 아니거든. 그런데 가서 거기에 이름을 남겼다는 것. 다른 기록에는 없고. 단지 안토니오 다마지오가 쓴 『스피노자의 뇌』(『Looking for Spinoza』)라는 책에 보면 나온다. 다마지오가 방명록을 뒤져가지고 찾아서 얘기를 해줘서 우리가 알게 된 거다.
- 그래서 지성사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아이러니라고 할까, 데카르트-뉴턴-스피노자로 연결이 된다, 이런 걸 알고 우리가 보면 재미가 있다.
<황> 아인슈타인이 베른에서 올림피아 아카데미를 할 때 스피노자의 에티카도 읽었을 것 같다.
- 그때 『에티카』를 읽었다고 기록에 나온다.
<최> 올해가 2020년이니까, 아인슈타인이 스피노자의 집을 방문한 게 올해로 딱 100년이 된다.
4. 데카르트가 말하는 몸과 마음
- 데카르트는 몸과 마음을 어떻게 봤나, 이걸 먼저 생각해보고 지나가는 게 좋겠다.
<최> 저는 데카르트가 몸과 마음을 어떻게 봤다는 건지 잘 파악을 못 했다. 데카르트가 처음으로 몸에 기반해서 마음을 설명하려고 했다는 것인가?
- 우리가 가장 흔히 말하는 이원론의 대표적인 서술이라고 할까. 몸과 마음은 다르다, 그리고 서로 관련을 맺고 있다. 다시 말하면, 물질은 알겠는데 그러면 마음은 뭐냐. 그것에 대해서 데카르트가 뭐라고 설명을 해야되니까. 사실은 그 내용 자체를 보면 데카르트의 몸과 마음에 대한 이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내용이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몸과 영혼이라고도 하고. 영혼이라는 게 있어서 사람 몸 속에 들어가서 삶을 만들어가다가, 죽을 때는 영혼이 떠난다, 이런 생각은 동서고금을 통해서 가장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생각이라고 본다. 그런 생각 안해봤나?
<황> 그런데 저는 선생님의 책을 보면서는 데카르트가 그렇게 이원론으로 설명했다기보다는, 그야말로 물질에 기반해서 마음을 설명했고 스피노자는 그걸 더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현대 뇌신경학이라고 해야할까, 현대 학문들도 다 다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내 책에 명시적으로 얘기한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몸과 마음의 문제에 대해서. 그런데 이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한 것이 데카르트의 관점이다. 예를 들면 물체라고 하는 것, 몸이라고 하는 것은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그런데 정신은 부분으로 나눌 수가 없다. 그러니까 (데카르트가) 예를 들기도 했다. 의지를 가졌다, 감각을 한다, 이해를 한다 이런 것들 다 정신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의지, 이건 이해, 이건 감각, 이런 식으로 각각 (구별되어서) 나누어지는 게 아니다. 하나의 정신이 그걸 다 한다는 것이다.
- 그러니까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부분으로 나눌 수 없는 것이고, 물체는 전부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몸은 유한한 공간을 가지고 부분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그래서 정신이 물질의 한 부분이라든가 이렇게 볼 수가 없는, 전혀 이질적인 두 가지가 같이 있다, 이렇게 본 것이 데카르트의 이론이다.
<최> 그러면 데카르트의 경우에는 정신에 대한 탐구 방법은 굉장히 달라질 것 같다.
- 그렇다.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면 정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사람한테 틀림없이 있는 건데. 몸과 정신이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 서로 전혀 관계없이 몸은 몸대로 정신은 정신대로 놀지는 않거든. 내가 마음을 먹으면 몸이 맞춰서 움직이는 건 틀림없는 거니까. 그러니까 관계를 맺기는 맺는데 서로 이질적인 둘이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 이게 걸리는 것이다.
- 그래서 그런 얘기들을 했는데. 그래도 워낙 말재주가 좋으니까. 생각도 물론 깊고. 그러니까 독자들이 많지는 않았겠지만, 흥미로운 사람이 있지. 엘리자베스 공주는 공주였기 때문에 정치에도 관여를 했겠지만 직접 정치를 하거나 행정을 한 건 아니다. 그런데 상당히 지적인 사람이었다. 데카르트 책을 상당히 정독을 하고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을 한 거다. 이렇게 몸과 정신의 성격이 다른데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 이런 질문을 한 거다.
-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우리말로는 ‘송과선’(pineal gland)이라는 것으로 얘기했다. 두뇌 속에 송과선이라고 하는 게 있는데, 아마 몸의 모든 신경이 송과선을 통과하는 걸로 생각이 되고 있는 모양이다. 데카르트는 거기에 영혼이 들어와 앉아있지 않겠냐하고 본 거다. 그래서 ‘영혼의 처소’라고도 했다. 마음이라고 하는 존재는 송과선에 있고, 몸은 전부 물질적인 움직임밖에는 하는 게 없다고 본 것이다. 몸의 모든 활동, 모든 정보는 일단 물질적이고, 송과선에서는 그 모든 미세한 물질적인 것을 감지할 수 있는 어떤 묘한 역할을 해서 통일된 정신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 정신에 의지라든가 뭐 그런 게 나오면 거기에 또 날카로운 어떤 것을 자극해서 몸으로 전달하고. 우리가 양자역학에서 얘기할 때 나왔던 ‘변별체’에 비유해볼 수 있겠다.
- 변별체의 기능은 정보적인 면과 물질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면서 서로 연결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비유해서 말해보면 그 변별체에 해당하는 것이 송과선에 딱 앉아서 전체를 통괄하며서 몸의 모든 것을 거기서 받아들이고 마음의 모든 것을 몸에 전달해주는 방식이다. 그런 묘한 이론적인 모델을 제시한 것이다.
- 그러면 왠만한 사람같으면, 아 참 좋은 이론이다하고 감명을 받을텐데. 엘리자베스 공주는 납득이 안간다, 설득력이 부족하다해서, 자꾸 비판을 한 것이다. 말하자면 건설적인 비판을 한 것이다. 그래서 그걸 또 설명하고 설득하기 위해서 데카르트가 책을 한 두 권 썼을 것이다. 데카르트는 자기나름 몸과 마음이 서로 다른 것이 만나서 상호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그 관계라고 하는 것에서 걸리는 거다. 그런 문제를 안고 그 이상 진전이 없었다. 스피노자는 거기서 근본적으로 다른 얘기를 한 것이다.
<최> 데카르트의 설명은 연장을 가진 물질과 정신 내지는 사유는 완전히 다른 것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없는 완전히 다른 것인데, 그러면 어떻게 정신이 몸에 영향을 미치고 몸의 영향을 정신이 받느냐? 이 문제에 있어서 송과선이라고 하는 신체의 한 부분에서 묘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설명을 데카르트가 했고, 엘리자베스 공주같은 사람은 당신의 설명과 이론이 맞지 않다고 비판을 했다. 어떻게 정신이 연장을 가진 물질을 조정할 수 있다는 말이냐,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겠다.
<황> 선생님의 책 p.409에서 각주를 보면, 데카르트의 책에서는 “‘신경전달 물질’을 ‘동물의 정수’ 또는 그냥 ‘정수spirit’라고 표현하고 있다”라고 쓰여 있다. 사실 이것도 데카르트를 변호하자면 일종의 물질로 정신을 설명하는 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 그러니까 지금 데카르트를 변호하는 건가?
<황> 변호하자면 그렇다는 말씀이다. 물질로 정신을 설명하려고 시도한 것 아닐까?
- 정신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다는 건, 우리가 지금 그렇게 이해를 너그럽게 해주기 위한 거라면 몰라도. 데카르트는 몸과 정신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대전제를 깔고 있다.
- 데카르트와 공주의 문답을 보면 이렇게 돼있다. “영혼이라는 것은 공간상의 연장이 없는 비물질적인 것인데, 어떻게 물질에 영향을 미치는가?”(엘리자베스 공주), “영혼과 물질은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기에 이것을 물질과 물질의 상호관계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데카르트)
- 안 된다고 해놨는데, 그러면 되는 건 뭐냐 이거다. (<황> 변호를 포기하겠습니다. ^^;) 엘리자베스 공주는 이해가 안된다고 하고. 여기서는 변호를 포기했고. 그래서 그 다음에 이제 우리가 스피노자로 넘어가도록 하자.
5. 스피노자의 『에티카』에서 말하는 몸과 마음
- 스피노자에 대해서는 예전에 공부들 많이 하지 않았나?
<황> 스피노자야말로 물질로 정신을 설명하려고 시도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기하학적인 형식을 통해서.
- 물질로 정신을 설명했다는 것은, 말하자면 유물론 비슷한 얘기같은데.
<황> 신체 상태를 가지고 행복이나 기쁨같은 것들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설명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봤다. 몸의 어떤 것과 관계없는 어떤 정신도 생각할 수 없다. 더구나 영혼이 혼자 날아다니는 이런 것은 있을 수 없다. 두 개의 실체를 생각한 것이 데카르트라면, 실체는 하나다 그런데 다른 측면의 기능이라는 것이 스피노자의 바탕관념이다.
- 그러니까 정신에서 나타나는 그 어떤 것도 몸의 뭐 하고 반드시 관계가 된다. 몸의 어떤 것과 관계가 없는 정신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완전 대칭은 아니지만, 비대칭은 틀림없는데, 그 기능은 구분하거나 떼서 볼 수가 없다. 이런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보기에 따라서는 유물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정신이 없다, 나머지 모든 것이 몸이고 정신은 허상이다가 아니다. 정신대로 그 기능이 반드시 있는데, 몸과 정신은 떼어놓을 수 없는 두 개의 양측면이라고 하는 표현이 어디 잠깐 나온다.
- 그것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주체와 객체의 이해에 굉장히 가까운 면이, 바로 하나이면서 양쪽에 전혀 다른 두 가지 측면을 보이고 있는 존재로 묶어서 이해하는, 이것이 스피노자의 기본 생각인 것 같다. 이걸 제대로 이해하려면 방대하게 책을 읽어야 한다. 『에티카』라고 하는 책도 읽어야하고. 그 책을 읽은 소감을 한번 얘기해보면 좋겠다.
<황> 명료한 양식으로 쓴다고 기하학적 양식을 썼다는데, 저한테는 양식이 잘 와 닿지 않았다. 그 설명이 이해는 잘 안 됐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앞서서 선생님께서 체온 얘기를 하셨지만 체온이 정상 체온이고 잘 먹고 잘 자고 이랬을 때 우리가 행복한 상태, 기쁜 상태에 도달한다 이런 식으로 전개를 하는 부분이 있다. 선생님께서 책에도 써놓으셨지만, 몸과 마음은 하나의 실체이기에 상호작용을 할 필요가 없다라고 이해했다. 좀전에 제가 물질이라고 말씀드렸지만 몸으로 마음, 정신을 설명하는 그 방식이 저는 가장 인상적이고 새롭고 다른 데서는 못 봤던 설명이었다.
- 그런데 우리가 지금 스피노자라고 하면 가장 대표적인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고, 마음을 이해하려고 한 철학자라고 분류하고 있다. 반면 뉴턴은 물질 세계, 역학이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본 것처럼 여기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스피노자도 물리학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다. 깊은 이해를 하고 있었다. 이미 벌써 데카르트가 상당한 작업을 했고, 스피노자도 그걸 거의 다 이해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물리학적인 질서에 어긋나는 그 무엇도 없다하는 것을 스피노자는 인정한 것이다.
- 자연의 질서, 물질적인 자연의 질서에 어긋나는 무엇이 정신에 가서 방해를 하고 영향을 주는 것이 없고, 그것 자체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눈에 보이는 물질 현상은 물리 법칙에 따르지만 정신의 입장, 마음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마음이라는 것으로 직접 느끼면서 한다, 같은 현상을 마음이 그냥 느끼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물질과 마음은 분리될 수 없는 전체로서 하나다. 물질만 있고 정신이 전혀 없는 그런 것은 일단 배제하고, 모든 물질과 모든 정신은 함께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가장 가까이 간 철학자가 스피노자다.
- 그래서 그때 그 정신이라고 하는 전체를 통괄하는 정신, 신이라는 개념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신이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봤다. 그래서 이것을 범신론이라고도 부른다. 그래서 무신론자라고 할 수도 없다. 신을 인정하되, 그런 신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기독교, 유대교의 신관에는 전혀 맞지 않으니까 이상한 소리한다고 했지만. 하여간 그런 철학이다.
- 그런데 지금 여기에 소개한 다마지오는 현대의 신경생리학자, 마음에 관한 현대과학자이다. 이 사람이 『Looking for Spinoza』(『스피노자의 뇌』. 사이언스북스. 2007.)라는 책을 쓰면서, 스피노자의 그 이론이 현대에 우리가 알고 있는 신경생리학에 가장 잘 부합이 된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현대에서는 신경의 물질적인 연관 등등 많은 이해를 우리가 거쳐왔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스피노자의 이론과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스피노자를 제대로 이해하고 현대 신경생리학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인데, 우리가 따라가면서 이해하기는 쉽지는 않다. 그런데 여기서는, 현대의 신경생리학자, 그러니까 마음과 몸에 대해서 연구를 하는 가장 대표적인 학자가 스피노자의 이론에 상당히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지나가면 될 것 같다.
끝.
녹취: 황승미 (녹색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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