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성 개념어 사전] 7.커먼스/커먼스의 비극/사회적공통자본


우석영의 지속가능성 개념어 사전


언제부턴가 ‘커먼스(commons)’라는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공유지’, ‘공유재’라 부르던 단어였다. 사실 이 단어는 앞의 두 번역어 말고도 ‘공공재’, ‘공공물’, ‘평민’ 등 다양한 용어로 번역할 수 있는데, 이처럼 여러 번역어 후보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번역의 어려움을 시사한다. 

   그러나 ‘common’이라는 단어의 본뜻(‘모두에게서 발견되는’, ‘모두가 공유하는’)을 가만 새겨보면, 사실 그리 어려운 용어도 아니다. ‘common people’은 모두가 어슷비슷한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 달리 말해 ‘평민’을 뜻하며, ‘The House of commons’는 귀족 아닌 평민들의 의회(하원)를, ‘common sense’는 모두가 공유하는 감각이나 양식, 즉 상식을 뜻한다.  

   그렇다면 ‘commons’란 ‘모두가 공유하는 또는 모두가 접근하여 그 혜택을 볼 수 있는 무언가’를 뜻한다. 하지만, 이 ‘무언가’는 무엇일까? 그것은 땅일까? 재산일까? 자원일까?

[그림 1] 엘리너 오스트롬. 오스트롬은 경제적 거버넌스, 특히 커먼스 분석으로 2009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출처: wikipedia)

   2009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 1933~2012)의 답변을 들어보기로 하자. 오스트롬은 ‘공동관리재산(common-pool property)’과 ‘공동관리자원(common-pool resources)’을 구분했는데, 그녀에 따르면, 커먼스는 공동으로 소유되는 재산(권)이거나 공동으로 관리되지만 그 누구도 소유할 수는 없는 자원이다. (Derek Wall, The Commons in History, Kindle, Loc. 6)

   커먼스에 관한 논의는 커먼스에 관한 입장과 분리되지 않는다. 엘리너 오스트롬은 (이러한 의미의) 커먼스를 보호해야만 환경 악화를 막을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생물학자 게릿 하딘(Garrett Hardin, 1915~2003)은 오스트롬과는 상반되는 입장을 제시해서 세계의 이목을 끈 인물이다.

1968년 하딘은 《사이언스》에 제출한 논문에서 커먼스와 공유(common ownership)가 환경 악화를 막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야기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논리는 이러했다. 여기, 공유지(커먼스)가 있다. 사용자 A는 이곳을 보호하며 사용하려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사용자 B에게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다. B는 최대한 이 땅을 착취하려 한다. B의 뜻을 안 이상, A는 공유지를 보호하겠다는 처음의 뜻을 접게 된다.

[그림 2] 개릿 하딘. 미국 생태학자, 우생학 지지자이며 인구과잉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출처: wikipedia)

이런 식으로, 특정인에 의해 소유되지 않는 땅인 공유지에선 ‘땅의 착취’라는 비극이 어쩔 수 없이 발생하게 된다. (이것을 커먼스의 비극(tragedy of commons, 흔히 공유지의 비극으로 번역됨)이라고 부른다.) 즉, 공유 제도는 환경 파괴로 귀결되기 마련이며, 따라서 커먼스는 개인이나 국가의 소유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 (Derek Wall, ibid, Loc. 18)

오스트럼은 왜 하딘의 입장에 반대했을까? 역사의 페이지를 들춰보면, 커먼스의 사유화(시장화)와 국유화가 실패한 사례가 많았고, 특정 지역공동체 또는 커머너들(commoners)이 커먼스를 잘 관리한 성공 사례도 많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녀가 보기엔 커먼스의 관리 주체는 지역주민들이어야 했다. 개인 간 신뢰도가 높고 지역생태환경에 관한 지식도 높은 이들이 커먼스 관리의 적임자라는 것이었다. (Derek Wall, ibid, Loc. 22)

   다시 커먼스의 정의 문제로 돌아와 보자. 하딘의 경우, 커먼스를 공유자원으로 이해하고 있다. 오스트롬은 커먼스라는 용어로 때로는 공동으로 관리되는 자원을 지시하면서도, 때로는 자연환경을 지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연환경을 ‘자원’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오대양은 인류의 해양‘자원’인가? 지구 곳곳을 돌고 연결하는 탄소 사이클이나 물의 사이클 같은 지구시스템의 자율적 운동과정을 ‘자원’이라고 말해도 합당할까? 

[그림 3] 데이비드 볼리어가 진행하는 팟캐스트 ‘Frontiers of Commoning’ (출처: podcasts.apple.com)

이 질문에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는 사람들도 많다. ‘커먼스 전환(Commons Transition)’이라는 플랫폼/그룹은 ‘커먼스’를 ‘자원’이라고 부르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이 그룹을 만든 한 사람인 데이비드 볼리어(David Bollier)의 커먼스 정의를 들어보자. 그에 따르면, 커먼스는  

  1. 자원의 장기적 책임관리를 하기 위한 하나의 사회시스템이다. 이 책임관리는 공유 가치와 지역공동체 정체성을 보존한다. 
  2. 시장이나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최소화 또는 제로화하며 지역공동체들이 자원을 관리하는, 자율적으로 조직된 하나의 시스템이다. 
  3. 우리가 함께 물려받거나 창출하고, 미래 세대에게 (줄어들지 않거나 더 나아진 형태로) 물려주어야만 하는 우리 모두의 부(wealth)이다. 우리 모두의 부는 자연의 선물, 도시 인프라, 문화적 작품들과 전통, 그리고 지식을 포함한다.
  4. 종종 당연시되는 방식으로 가치를 창출하는 경제(그리고 생명!)의 한 부문이다. 그리고 종종 이 부문은 시장-국가(Market-State)에 의해 위험해지기도 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커먼스는 ‘공공의 부(common wealth)’이면서 지역공동체가 활용하는 ‘사회시스템’이면서 동시에 ‘경제와 생명의 한 부문’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입장일 뿐이지만, 설혹 위의 세목 중에서 ③항만을 수용한다 해도, 앞에서 봤던 정의보다는 훨씬 더 포괄적인 정의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잠시, ③항에서 필자가 굵게 표시한 부분에 주목해주기를 바란다. ‘공공의 부’인 커먼스는 ‘윗세대에서 아랫세대로 전해지는 것’이다. 즉, 자연과 전 세대들이 현 세대와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자연이기도 하고 인류의 생산업적(works)이기도 하다.

또,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는 것이다. 대기, 물, 산림, 호수, 바다, 토양, 삶의 지속을 보장하는 기후, 도로, 상하수도, 전력, 인터넷에 공개되는 지식, 박물관이나 도서관 등에서 무료로 관람, 열람할 수 있는 예술작품과 책과 신문……같은 것들. 

   그런데 볼리어의 ‘공공의 부’ 개념은 일본 경제학자 우자와 히로후미(宇沢 弘文, Uzawa Hirofumi, 1928~2014)가 제시한 ‘사회적 공통[공공]자본(Social Common Capital)’ 개념과 포개져 있다.

[그림 4] 우자와 히로후미. 수학적 경제학의 선구자였으며 거시경제학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출처: 동경대학)

우자와에 따르면, 사회적 공통자본은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되는데, ①자연환경(대기, 물, 산림, 호수, 바다, 토양…) ②사회 인프라(교통, 도로, 상하수도, 전력, 가스 등) ③제도자본(교육, 의료, 금융, 사법, 행정 같은 기본제도와 이것의 유지에 필요한 것들)이 그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우자와 히로후미, 차경숙 옮김, 경제학이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파라북스, 164-166쪽. 장석준, 우석영, 21세기를 살았던 20세기 사상가들, 책세상, 174-175쪽 참고)

그러니까, 우자와의 사회적 공통자본 중 ①자연환경 ②사회 인프라 ③제도자본 중 일부(교육제도 유지에 필요한, 쉽게 접근 가능한 지식)는 볼리어가 생각한 ‘공공의 부’에 해당하는 셈이다.         

   하지만 볼리어의 ‘커먼스’이든, 우자와의 ‘사회적 공통자본’이든 이들의 관심사는 이런 개념 자체가 아니다. 이들의 관심은 이것의 공공적 관리를 통한 새로운 경제의 모델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2020년 7월 14일 정부는 ‘한국판’ 그린 뉴딜(Green New Deal) 계획을 발표했다. 이날 발표된 계획이 대서양 양편에서 추진되는 그린 (뉴)딜 계획과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커먼스에 관한 태도에 있을 것이다.

한국 버전의 계획은 ‘커먼스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중심에 두고 있지 않다. 반면, 후자는 커먼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일 자연환경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경제·사회적 제도 전반을 재편하고자 한다.

즉, 후자의 그린 (뉴)딜 계획에서 강조되는 것은 탈 탄소화라는 목표를 둔 산업 재편만이 아니라 생물다양성 보호, 대기·수질·토양의 무오염, 친환경 농식품 경제를 통한 농토의 보존이기도 하다.

달리 말해, 후자에서는 자연환경 같은 커먼스를 지속가능하게 함이 곧 인간의 삶과 복지를 지속가능하게 함이라는 (한국 정부의 계획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19년형 코로나바이러스가 새삼 일깨워준) 탈근대의 사유가 전제되어 있다.

우석영 (녹색아카데미)

[그림 5] 인류의 커먼스, 지구. (출처: 커먼스트랜지션, Image by NASA Goddard Space Flight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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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색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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