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성 개념어 사전] 대사적 파열(Metabolic Rift)


우석영의 지속가능성 개념어 사전


사회와 자연이라는 이분법에 우리는 익숙해져 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이런 이분법의 프레임으로 세계를 인식해왔던 것이다. 이 이분법의 틀에서, 자연은 사회가 아닌 무엇이다. 사회 바깥에 있는 것, 야생의 것, 길들여지지 않은 것, 사회 바깥에 있으며 사회의 재생산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것, 인간 아닌 것들 그리고 그들이 속한 세계.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인식된 자연은 실제의 자연이 전혀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자연관이 오늘날까지 주류의 자연관이 된 건, 이것이 자본주의의 운동, 즉 자본의 축적 운동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자연은 언제까지나 경제의 “외부”로,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로, “자원이나 자원의 매장지로” 남아주어야만 한다. 

19세기 후반, 자본주의의 파괴적 양상을 분석했던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사회/자연을 양분하여 이해하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사회가 자연과 뒤섞이며 자신을 재생산하는 과정을 분석하며, 마르크스는 “사회적 대사[代謝] 작용(social metabolism)”이라는 개념을 동원한다.

그가 보기에, 인간집단은 언제나 자연의 대사 작용(자연의 과정)과 인간을 매개하는 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필요를 충족해왔는데, 그 활동을 그는 “사회적 대사 작용”이라 불렀다. 이 사회적 대사 작용의 중심 내용물은 노동대중의 노동과 생산 과정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보기에 인간의 경제 활동은 모두가 일종의 (자연과의) 사회적 대사 작용인 셈이다.

“사회적 대사 작용”이라는 개념은 마르크스 자신이 창안한 것이 아니라 동시대 자연과학자들, 이를테면 친구였던 롤랑 다니엘(Rolad Daniels) 그리고 자본주의적 농업(1850년대에 UK에서 출현한 2차 농업 혁명의 결과물)의 지속불가능성 또는 토양 파괴성을 맹렬히 비판했던 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Justus von Liebig)로부터 빌려온 것이었다. 

[그림 1] “여기요… 내 커피에 영세 농민 수천명의 피와 고통이 들어있는데요.” 공정거래 광고. Mother Jones 매거진. 1999년 9-10월호. (출처: Monthly Review)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대사 과정상의 (…) 회복 불가능한 파열”(Karl Marx, Capital, vol. 3, 949)을 향해 치닫기에 극복되어야 할 경제체제였다. 사회재생산의 위기인 이 “대사적 파열(Metabolic rift)”은 인간이 자연을 대상으로 벌이는 사회적 대사 과정이 그 물리적인 조건과 모순을 이룰 때 나타난다.

극명한 사례는 자본주의적 농업(산업농)이다. 교환가치 (또는 이윤) 본위로 돌아가는 이 기이한 농업은 (화학물질의 투여를 통해) 생산의 근본 조건이 되는 토양의 품질을 계속 악화시킴으로써, 달리 말해 “생명의 영원한 조건들 전체와 자기 자신을 관련시켜야만 하는 농업”(Marx, Capital, vol. 3, 754.) 자체와 모순되면서, 자신의 재생산을 계속 위태롭게 한다.

따라서 이런 식의 전진이라면 어느 순간 사회적 대사 과정상의 파열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는 이런 식의 생태적 모순을 지니고 있기에 문제적이었다.    

마르크스의 입장에서 자본주의의 결정적 문제는 “대사 과정의 문제”이기도 했다. 즉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자연의 대사 과정을, 아울러 인체의 대사 과정을 파괴하기에 악독하다. 쉽게 말해, 자본주의는 지구의 자연, 그리고 노동자 대중의 육체적인 삶(육체적 대사 작용, 건강, 수명), 이 둘을 동시에 파괴하므로 지양의 대상이다. 후자와 관련하여 마르크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고온, 먼지 자욱한 공기, 고막을 찢는 소음으로 인해 감각 기관 모두가 손상된다. 서로 서로 밀집된 기계들 사이에 있는 생명과 사지의 위험은 말할 필요조차도 없을 것이다. 산업 전투현장에서 상해를 입거나 살해된 이들의 목록을 사계절만큼이나 규칙적으로 생산해낼 위험 말이다.” (Marx, Capital, vol. 1, 552–53) 

한마디로,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는 뱀파이어 같은 괴물이었다. “뱀파이어처럼 오직 살아 있는 노동을 빨아먹음으로써 살아가며, 노동을 더 많이 빨아먹을수록 더 오래 사는”(Marx, Capital, vol. 1, 342.) 시스템. 그리고 자연의 대사 과정(자연의 과정)의 파괴, 노동자 대중의 육체 파괴, 이 둘을 봉합하며 새로운 인간 발전을 도모하는 사회경제적 기획을 그와 동료들은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그림 2] “자본주의체제 피라미드.” Industrial Worker. 1911년. (출처: wikiwand)

■ 더 생각해볼 만한 것: “인간도 자연의 일부”인가?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작 《자본(Capital)》에서 어떤 파괴력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자연을 파괴하는 힘인데, 단지 인체 외부의 자연만이 아니라 인체라는 자연도 함께 파괴하는 힘이었다. 또한 마르크스는 인간 개체와 집단, 인간 외 자연 모두에 적용되는 “대사 작용(metabolism)”이라는 개념을 활용하여 자본주의의 현실을 파악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을 이분하여 이해하는 관점에 대립각을 세웠다. 

21세기인 지금도, 마르크스의 시대였던 19세기에도, 유럽에서도, 동아시아에서도 인간이나 사회는 자연 밖에 있지 않고, 거꾸로 자연은 인간이나 사회 밖에 별도로 있지 않다. 기후변화, COVID-19 같은 위기로 상징되는 오늘날의 위기는 자본주의의 위기와 자연의 위기가 동시에 출현한 이중의 위기가 아니라 “자연의 대사 과정을 파괴하는 자본주의의 위기”, “자연-안의-자기파괴적-자본주의의 위기”라는 하나의 위기이기도 하다. 더욱이, 마르크스가 우려의 어조로 언급했던 “대사적 파열”은 19세기의 현실이라기보다는 20세기와 21세기의 현실이라는 점도 인지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사회/자연, 인간/자연의 이분법을 넘어 새로운 앎의 지평으로 우리를 인도해줄 새로운 언어가 우리에게는 절실하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언어란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 그것은 기껏해야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낡은 언어일 뿐이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고 미지근하게 말해선 안 된다. 인간과 자연을 마치 분리할 수 있는 것처럼 허황되어 말해선 안 된다. 

“인간은 자연이 길러낸 존재”이며 “자연물로서만 존재하고” 인간이 자신의 안과 밖에 발견하는 것은 “오직 자연뿐”이라고 말해야 한다. 인간은 자연에 서식지를 마련하여, 자연에 감싸인 채로, 자연과 대사 작용을 하며 살아가는 여러 자연물 중 독특한 유형일 뿐이다. 또한 자본주의는 자연(물)을 자원으로 삼는 경제 양식이라기보다는, (사회적 대사과정을 통해) 자연을 재배열하는 하나의 양식이다. 집, 마을, 도시 같은, 외관상 자연물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자연의 물질을 재료로 인간이 조형했거나 변형한 것들이므로 “일종의 자연물”(제2의 자연)이라 불러야 한다. 인간의 거주지이자 피난처는 도시가 아니라 지구이며, (지구 밖이 아니라) 지구 안에서라면 인간에게 자신과 무관한 “외부”란 존재하지 않는다. 

글: 우석영 (녹색아카데미). 2020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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