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칼럼 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3회에 걸쳐, 인류세의 개념을 상세하게 검토한 뒤 우주와 자연사에 대한 과학의 역사에서 전개된 탈인간중심주의 전통을 살펴보고, 다나 해러웨이가 제안한 ‘툴루세’의 개념과 내용을 중심으로 인류세라는 이름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해봅니다.
“인류세, 탈인간중심, 툴루세”
1.인류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020. 4. 28.
2. 인간중심주의로부터 멀어져 온 과학의 역사. 2020. 5. 6.
3. 툴루세에서 불편하더라도 함께 살기. 2020. 5. 13.
김재영 (녹색아카데미)
*(1)편의 마지막 문장: 인류가 현재의 거대한 기후변화에 주된 요인 중 하나가 되고 있음은 분명히 인정하지만, 이 시대를 ‘인류세’로 불러야 할 만큼 인류가 중심적인 존재일까? 인류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이름에 ‘인류’라는 말이 들어 있긴 하지만 실상 인간중심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류세는 오히려 인류가 인류 이외의 수많은 생명체들과 나아가 지구 전체 생태계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인간을 넘어서는 생태중심주의의 견해를 제시하고 경각심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실상 그만큼 인류가 강력하며 이 지구 생태계의 운명을 인류가 좌우할 수 있다는 믿음이 그 안에 깔려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점에서 과학의 역사에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탈인간중심주의의 경향을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다.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Revolution’를 인류 역사에서 가장 의미가 큰 전환 중 하나로 내세웠다.
1543년에 출판된 코페르니쿠스의 책의 제목이 『천구의 회전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이기 때문에 ‘회전’과 ‘혁명’을 모두 의미하는 ‘Revolution’을 ‘전회’로 번역한 것은 영특한 선택이다. 코페르니쿠스는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의 기반 아래 2천 년 가까이 유지되어 온 지구중심설에 근본적인 혁명을 가져왔다.
그 자신은 결코 혁명을 원하지 않았고, 그의 태양중심설은 단지 지구와 태양의 위치만을 바꾸었을 뿐 이론적 계산의 정확도도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보다 많이 떨어졌고, 또 17세기 동안 오히려 튀코 브라헤(Tycho Brahe)의 체계가 더 선호되기도 했지만, 지구 또는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서 물러나게 한 것은 엄청난 일이었음이 틀림없다.
18세기에 이르러 윌리엄 허셸(William Herschel)은 망원경으로 은하수를 관측하고 은하수가 아주 많은 별로 이루어져 있음을 밝혔지만, 여전히 태양과 태양계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겼다.
20세기 초 미국의 천문학자 할로우 섀플리(Harlow Shapley)는 구상성단(공모양 별무리)의 세페이드 변광성을 이용하여 은하수의 3차원 구조를 밝히고, 태양은 은하수의 중심이 아니라 가장자리에 있음을 주장했다. 지구는커녕 태양마저 세상의 중심이 아님이 밝혀진 것이다. 그런데 섀플리는 자신의 모형이 거의 완결된 것이라 믿고 있었다.
1920년 미국 국립과학원에서 개최한 학회는 ‘대논쟁 The Great Debate’ 이라는 흥미로운 제목을 달고 있었다. 논쟁의 핵심은 안드로메다자리에서 발견된 희끄무레한 천체 M31의 정체였다. 당시 그렇게 형체가 명확하지 않은 희끄무레한 천체들을 ‘성운 nebula’이라고 불렀던 관례에 따라, M31의 당시 공식 명칭은 안드로메다 ‘성운’이었다. 섀플리는 M31과 같은 성운들은 모두 은하수 속에 있으며, 자신이 밝혀낸 은하수의 구조가 최종적인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와 달리 헤버 커티스(Heber Curtis)는 은하수와 비슷한 것이 수없이 많이 존재하리라는 “섬 우주” 가설을 주장했다. 1920년의 대논쟁은 은하수가 우주의 전부인가, 아닌가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M31이라 부르는 안드로메다 성운이 우리 은하 안에 있는가 아니면 밖에 있는가가 핵심적인 문제였다.
누구의 주장이 맞는지 확인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M31까지의 거리를 정확히 결정하는 것이다. 여기에 성공한 사람이 바로 에드윈 허블(Edwin Hubble)이다. 허블은 윌슨산 천문대의 100인치 망원경으로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세페이드 변광성을 찾아냈고, 그 변광성의 변광주기를 정확하게 측정하여 이로부터 M31까지의 거리를 구할 수 있었다.
섀플리는 우리 은하의 크기가 10만 광년 정도라고 특정했는데, 허블이 구한 M31까지의 거리는 90만 광년(실제로는 250만 광년 이상)이었기 때문에 안드로메다자리의 M31은 우리 은하에 속한 ‘성운’이 아니라 우리 은하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또 다른 은하임을 밝힌 것이다. 이제 M31은 명실공히 ‘안드로메다은하’로 자리 잡고 있다.
우주의 모습을 기준으로 보면 인류의 사상은 모든 것의 중심이 인간과 인간이 사는 땅 즉 지구에 있다가 점점 태양으로, 태양계로, 우리 은하로, 다시 수많은 은하가 거대규모에 퍼져 있는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해 왔음을 볼 수 있다.
15세기 독일의 철학자, 신학자, 수학자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colaus Cusanus)는 신이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이 세계에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할 중심이 따로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우주에 대한 사상을 넓게 바라보면 바로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의 신념이 옳았다는 쪽으로 확장되어 온 셈이다.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가이아 마주보기: 새로운 기후시대에 관한 여덟 번의 강의 Face à Gaïa. Huit conférences sur le nouveau régime climatique』에서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다 보니 신이 맨 바깥 변방으로 물러나 버린 역설적 상황을 이중초점의 역설로 설명하는데, 이렇게 어디에도 중심이 없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게 된다면 이중초점의 역설은 자연스럽게 해소되는 셈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믿음이 발전한 것은 박물학 또는 자연사의 전통에서도 볼 수 있다. 19세기 진화이론을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본다면, 찰스 다윈의 가장 중요한 저작은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도 『인간의 유래 The Descent of Man』도 아닌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 The Expression of the Emotions in Man and Animals』이라 할 수 있다.
찰스 다윈의 조부 이래즈머스 다윈(Erasmus Darwin)은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의 목적론적 생명론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 있지 않았고, 찰스 다윈도 그 영향에서 쉽게 놓이지 못했다.
비록 인간도 다른 동물들이나 심지어 식물들과 같은 연속선 위에서 이해해야 함을 과감하게 주장하긴 했지만, 18세기의 칼 린네(Carl von Linné)의 탁월한 선택보다 더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린네는 『자연의 체계 Systema Naturae』에서 당시까지 알려진 동물과 식물을 모두 분류하여 정리하는 놀라운 기획을 시작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이 인간을 동물계에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그전까지 플리니우스의 ‘존재의 대 연쇄’라는 관념은 신부터 돌멩이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계층과 순서를 부여하는 것이었고, 인간은 동물이나 식물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린네는 모든 동물과 식물을 종-속-과-목-강-문-계의 틀 안에서 세분화하여 분류하고 종 이름과 속 이름을 함께 사용하는 이명법을 제안했다. 여기에서 인간을 포유동물문 호모속 사피엔스종으로 분류함으로써 인간도 동물과 직접 맞닿아 있는 존재임을 처음 주장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에서 찰스 다윈은 완전히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다. 무서움, 즐거움, 기쁨, 괴로움, 그리움 같은 감정에 관한 한 동물들의 표현과 인간의 표현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으며, 다만 각자의 방식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라고 하는데, 목숨이 오고 가는 심각한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지렁이나 사람이나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윈의 마지막 저작이 지렁이에 대한 오랜 탐구를 정돈한 것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지렁이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인간이나 흙이나 다른 동물이나 식물들이 모두 자신이 살아가는 환경 또는 둘레세계Umwelt일 뿐이다.
야콥 폰 윅스퀼(Jakob von Uexküll)은 동물들이 감각기관과 운동기관을 통해 구성하는 세계는 처음부터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각각의 동물들이 자신만의 둘레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그 어떤 둘레세계도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3)툴루세에서 불편하더라도 함께 살아가기”(2020. 5. 13)로 계속됩니다.
참고문헌
- http://www.stratigraphy.org/index.php/ics-chart-timescale
- https://savageminds.org/2016/11/18/staying-with-the-trouble-making-kin-in-the-chthulucene-review/
- Christophe Bonneuil, Jean-baptiste Fressoz (2013) L’Événement Anthropocène. La Terre, l’histoire et nous. Points.
- Heather Davis and Etienne Turpin, eds. (2015) Art in the Anthropocene: Encounters Among Aesthetics, Politics, Environments and Epistemologies. Open Humanities Press.
- Donna Haraway (2016) Staying with the Trouble: Making Kin in the Chthulucene. Duke University Press.
- Bruno Latour (2015) Face à Gaïa. Huit conférences sur le nouveau régime climatique. Éditions La Découverte.
- Jason W. Moore, ed. (2016) Anthropocene or Capitalocene? Nature, History, and the Crisis of Capitalism. PM Press.
- Bernard Stiegler (2018) The Neganthropocene. Open Humanities Press.
- 대문 그림: 안드로메다 은하. 출처: wikipedia.
*이 글은 아트인포스트 zer01ne 디지털 매거진에 실렸던글(김재영)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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