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1] 기차길옆 런던 풍경. 1872년. 프랑스 예술가 귀스타브 도레는 빅토리아 중기 시대 런던의 결핍과 누추함을 목판화로 표현했다. 1869년 그는 영국 저널러시트 블랜차드 제롤드(Blanchard Jerrold)와 협업을 시작하였고, 4년에 걸친 작업을 통해 “런던 순례”(1872년)라는 이름의 기념비적인 책을 만들어냈다. (출처: 가디언)
도시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환경이다. 인류는 정착하면서부터 도시를 만들었고, 도시는 문명 사회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도시에 사는 인구는 극히 적었다. 종교나 정치 등의 영역에 종사하는 사람들만이 일부 살았을 뿐이다. 도시의 성장과 변화는 인구 수의 증감을 통해 살펴보는 것이 용이한 방법이다. 인구 증감에 따라 물자의 수요와 공급, 사회기반시설과 산업시설도 함께 늘고 줄기 때문이다.
19세기 초까지 세계 인구 대부분은 도시와 무관한 삶을 살았다. 처음으로 본격적인 도시화가 진행된 때는 11-12세기 중국 송대이다. 이 시기 중국은 7세기 후 유럽의 ‘산업혁명’ 초기단계의 경제와 비슷했다.
당시 중국의 철 생산량은 18세기 후반 영국 철 생산량의 2배였고, 수천 명이 일하는 공장이 흔했다. 이미 기계를 이용해 철을 생산하고 있었으며, 수표와 어음을 이용하는 등 정교한 상업적 체계가 완성되어 있었다. 1024년에는 지폐를 도입해 사용하였다.
12세기까지 가장 중요한 도시도 송나라의 수도 카이펑(開封; 개봉)이었다. 카이펑은 행정과 상업, 교역의 중심 도시였다. 1100년에 카이펑시의 인구는 50만 명이었는데, 당시 유럽의 최대 도시 베니스의 인구도 카이펑의 10분의 1이 되지 않았다.
1127년 여진족이 침입해 송나라가 남쪽으로 밀려나면서 항저우가 새로운 수도가 되었고, 세계 역사상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항저우의 인구는 1200년 200만 명에 이르게 되고, 19세기 런던이 성장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13세기에 세계에서 도시화된 지역을 가진 곳은 중국이 유일했다. 당시 도시 인구가 20% 가까이 이르렀던 것으로 보이나 이후 몽골로부터의 압력과 전쟁으로 중국의 도시는 파괴되어 갔다.
유럽에서는 12세기까지 지중해지역의 도시들이 가장 발달했다. 콘스탄티노플, 이슬람제국의 수도 코르도바, 세빌랴, 팔레르모 등이 당시 주요 도시들이다. 1000년 전 시기 유럽 지역에는 도시가 100개 정도 있었고, 그 중 절반은 이탈리아에 집중되어 있었다. 당시 가장 발달한 이슬람 세계와 연결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1000~1300년이 되면서 교육과 산업이 발달해 지중해 이외의 지역에서도 도시가 발달했다. 1300년에 유럽 지역에는 3~4천 개 정도의 도시가 있었지만, 인구 1만 5천 명 이상인 도시는 9개 뿐이었다. 이들 중 피렌체, 파리, 베네치아는 인구 10만 명이 넘는 큰 도시였고, 런던과 벨기에의 겐트는 인구 5만 명 정도였다.
1300년 이후부터 16세기 중반까지 도시화 속도는 느려진다. 흑사병으로 인구가 줄었고 경제 성장도 느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6세기 중반부터 도시화의 속도가 빨라진다. 16-17세기 네덜란드 지역에서 무역이 확대되고 부가 쌓이면서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도시화되기 시작했다. 16세기 초 네덜란드 인구 중 5분의 1이 1만 명 이상의 도시에 살았다. 1622년이 되면 인구 1만 이상의 도시에 사는 사람이 네덜란드 전체 인구의 절반이 된다.
16세기 파리와 런던의 인구도 빠르게 늘었다. 런던은 1520년에 6만 명이던 인구가 17세기 초에는 25만 명이 되고, 1650년이 되면 40만 명이 된다. 파리는 런던보다 100년 앞서 40만 명을 돌파했지만, 1700년이 되면 런던이 유럽 최대의 도시가 된다. 런던에는 왕실이 있었고, 정부와 법률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수요에 맞춰 공급해줄 상인, 무역상, 직인들도 모여들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 중에는 일자리가 없어 일용직이나 거지가 되는 이들이 많았다. 1520~1600년 사이 런던의 전체 인구는 4배 늘었는데 거지의 수는 12배가 늘었고 사망률도 높아서, 매년 6천 명의 인구가 새로 들어와야 런던의 인구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18세기가 되면 런던의 인구는 영국 전체 인구의 10분의 1에 달하게 된다.
그러나 1800년까지만 해도 도시에 사는 인구는 100명 중 3명에 불과했다. 19세기에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서 유럽과 북미에서 도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1900년 영국 인구 중 4분의 3이 도시에 살았고, 5분의 1이 런던에 살았다. 인구 수로 보면 변화가 더 확연한데, 영국의 도시 인구는 1800년대 200만 명에서 1900년대 3000만 명으로 늘었다.
1900년을 지날 시기 유럽과 북미의 대부분 지역이 도시화되었다. 세계 도시 인구 중 3분의 2가 유럽과 북미에 살고 있었고, 유럽의 도시 인구는 19세기 동안 6배 늘었다. 도시 인구가 먹을 식량은 시골의 농촌지역에 의존했지만, 국가 경제적인 면에서는 산업적인 생산으로 기여도가 증가하였다.
이 바탕에는 화석연료가 있다. 석탄을 쓰면서 에너지 소비량이 높은 사회,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산업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공장이 새로 생겨나고 일자리를 찾아 시골에서 빈민층이 들어오면서 도시의 인구는 더욱 증가하고 도시도 더 커지고 복잡하게 되었다.
유럽 대륙과 미국도 19세기 후반이 되면 영국과 마찬가지의 양상을 보인다. 새로운 에너지원인 석탄을 풍부하게 쓸 수 있는 석탄광 지역 가까이 새로운 산업 도시가 생겨났다. 벨기에, 북부 프랑스, 루르 지역 등이 그런 산업 도시였다. 1880년대 루르의 보훔에서는 제조업이 전체 일자리의 80%를 차지했다. 새로 생긴 도시들에서는 대체로 한 가지 산업이 주종을 이루었는데, 레베쿠젠과 바이에른의 화학공장같은 경우가 그러했다.
북아메리카의 도시들은 대체로 규모가 작았고 유럽과의 교역에서 중심지 역할 정도를 했다. 1830년까지도 인구 1만 명 이상의 도시는 23개 정도에 불과했다. 그 중 대도시는 뉴욕(20만 명)과 필라델피아(16만 명) 뿐이었다. 그러나 유럽 이민자들이 빠르게 증가하고 산업이 발달하면서 미국의 도시 인구는 매 10년마다 2배로 늘어나 1860년이 되면 600만 명이 된다.
미국에서는 1910년 인구 10만 명 이상되는 도시가 50개로 늘어나게 된다. 당시 뉴욕의 인구는 80만 명이었다. 그러나 빠르게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기에는 도시의 경제 수준도 사회기반시설도 부족해, 1820~1870년 뉴욕의 영아사망률이 2배로 늘어났다. 19세기 후반의 규정에 따르면 주민 20명 당 화장실 하나, 한 블록에 수도꼭지 하나만 있으면 새로 집을 지을 수 있었다.
1800년 이전의 도시들은 크기가 작았고 걸어다니면서 일상적인 일을 모두 처리할 수 있었다. 19세기 이후의 도시들은 교외로 뻗어나가면서 규모가 확대되었다. 근교 농업 지역이 도시로 편입되었고 연립주택들이 대규모로 지어졌다. 부유층은 도심을 떠나 교외에 새로 집을 지어 나갔다. 도심 지역은 공장들이 들어서고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 되어갔고 점점 더 지저분한 곳이 되어갔다.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교통 체계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의 생활과 일의 양상이 크게 달라져갔다. 교외 지역은 주택만 있고 일은 하지 않는 곳이 되어 갔다. 마차와 기차와 같은 대중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교외지역으로의 생활권 확대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특히 런던에서는 1840년부터 철도가 가설되었고, 철도노선을 따라가면서 캠버웰, 혼지, 킬번, 풀햄, 일링 등 주택 지역이 계속 확대되어 갔다.
미국에서는 1832년 말이 끄는 시내 철도가 뉴욕에 등장하면서 최초로 교외 주택지가 생겨났다. 1870년대부터는 고가철도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사람들은 도심에서 더 먼 곳에 살 수 있게 되었다. 1890년대가 되면 전차가 등장하고,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지하철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도로는 마차로 복잡했고 정체가 일상적이었기 때문에 지하철이 등장한것이다.
지하철은 1860년 런던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보스턴에서는 1897년, 파리에서는 1900년, 베를린에서는 1902년, 뉴욕에서는 1904년 건설되었다. 보스턴에 첫 지하철이 생겼을 때 구간은 몇 개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첫 해 승객이 5000만 명이었다. 뉴욕에서는 노선이 하나였는데, 하루 이용객이 100만 명이었다. 이러한 기반시설과 교통 체계 발전에는 에너지가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교외 주거지역이 개발되면서 도시의 모습이 조금씩 달라져갔다. 대도시의 중심 지역은 주로 금융과 상업 활동이 그 주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고, 산업활동도 생산활동도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그 결과로 도시의 인구는 감소해, 런던 인구는 1850년대부터 줄기 시작했다. 뉴욕에서는 1905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심 반경 6킬로미터 내에 살았는데, 20년 후에는 3분의 1만 남게 되었다.
20세기에도 선진국의 도시들은 계속 성장하면서 시골지역으로 확장해갔다. 철도와 지하철에 이어 자가용 차가 생기면서 더 큰 변화가 생겨났다. 미국은 1920년대에, 유럽에서는 1950년대에 이르러 자가용 차가 확대되면서 통근 거리가 점점 더 늘어났다. 로스엔젤레스 같은 도시는 자가용 차를 전제로 만들어진 도시였기 때문에 더욱 심했다. 로스엔젤레스 도심부에서 도로, 고속도로, 주차시설, 차고가 차지하는 면적은 3분의 2에 달했다.
정부는 인구 증가에 따라 도시의 기반시설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대부분 허술하고 무계획적으로 성장, 확장되어 갔다. 개선을 위해 빈민가를 철거하거나 재개발을 하기도 했다. 19세기 후반 하우스만이 시도한 파리 중심부 재건이 최초였다.
영국도 19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 빈민가를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그러나 도시 팽창을 통제하기는 어려워 ‘그린벨트’를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1937년 런던은 주변지역을 보존하기 위해서 ‘그린벨트’를 공식적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개발은 그린벨트를 뛰어넘어 더 멀리까지 뻗어나갔다.
소련 같은 계획경제에서도 모스크바의 성장을 막지 못했다. 소련의 도시 인구는 1920년대에 20퍼센트, 1980년대에 60퍼센트 이상 증가했다. 신도시를 800개 이상 만들어 다소 억제하기는 했지만, 교외까지 교통수단이 부족해 인구는 도심으로 더욱 몰렸다. 1935년 소련 정부는 모스크바 인구를 500만 명 이하로 제한하기 위해 통행증까지 발급했지만 인구 증가를 억제하지 못했다. 1971년에 다시 인구 상한을 750만 명으로 정하고 20세기 후반까지 650만 명으로 줄이기로 계획을 했지만, 2020년 현재 모스크바 인구는 1,250만 명이 넘는다.
[그림 9]는 지난 500년간 세계와 주요 국가들에서 변화된 도시 인구 비율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19세기를 지나면서 빠른 도시화가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중국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15세기 이전부터 도시 인구가 높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영국의 경우에는 산업화가 일찍 이루어지면서 1600년대 초부터 도시 인구가 증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국도 1900년 이후부터 도시 인구가 증가하였으며, 1900년대 중반부터 급속도로 도시 인구가 늘어났다. 전세계의 도시 인구와 농촌 인구는 2007년을 기점으로 교차한다(그림 10). 이전까지는 농촌인구가 더 많았으나, 20세기 후반부터 농촌인구가 정체하면서 도시 인구가 농촌 인구를 추월해 증가하고 있다.
참고자료
- <녹색세계사>, 클라이브 폰팅 지음. 1991; 이진아/김정민 옮김. 2007. 그물코. (13장)
“그림으로 읽는 문명이야기”에서는 인류 문명의 흥망성쇠와 녹색문명을 고민해봅니다. 클라이브 폰팅의 <녹색세계사>를 읽어가면서, 현재의 환경문제와 기후위기 상황 그리고 석유에 기반한 현대도시문명을 다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그림으로 읽는 문명 이야기’는 매주 수요일 업로드됩니다.
발췌, 요약: 황승미 (녹색아카데미). 2020년 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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