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읽는 문명이야기 (14) 에너지원 1-사람과 동물의 힘


[그림 1] 20세기 초 런던에서는 말이 끄는 마차가 주요한 도시 교통수단이었다. 그림은 1900년 전후 런던을 배경으로 한 아서 코난 도일의 소설 “바스커빌가의 개”의 삽화. 홈즈는 마차와 기차를 타고 런던 시내와 교외를 오가며 사건을 해결한다. 일러스트 Sidney Paget. 1901~1902년. (출처: Raptis Rare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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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에서 인구와 농업생산량이 크게 증가한 두 번의 계기가 있었다. 첫 번째는 수렵채취 문명에서 농업문명으로의 전환이었고, 두 번째는 새로운 에너지, 즉 화석연료를 사용하게 되면서였다. 19세기 전까지는 나무, 수력, 풍력과 사람의 힘 등 몇 가지 안되는 저밀도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현장에서 조달하였다.

대부분의 필요한 동력은 사람의 힘이었다. 심지어 19세기에도 전세계의 기계를 움직이는 데 필요한 에너지 중 75%를 사람이 공급했다. 사람은 동물보다 덜 먹고, 동물보다 더 다양한 일을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15세기 벨기에 북서부 브뤼주 장터에 대형 크레인이 설치되었을 때도 동력은 사람이 제공했다(그림 1). 당시 사람들은 이를 두고 기술 기적이라며 경탄했다고 전해진다. 

최근까지 사람의 힘은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이었다. 100년 전만 해도 영국에서 하인으로 일한 인구가 250만명이었고(이중 84%가 여성이었다), 직업군 중에서 가장 비율이 높았다. 고대 사회와 식민지 사회에서 지배계급이 원하는 사업은 모두 강제노동과 노예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메소포타미아의 궁전과 사원, 이집트와 중앙아메리카의 피라미드 그리고 중국의 만리장성과 대운하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림 2] 15세기 브뤼주에 설치된 대형 크레인. Book of Hours. Simon Bening(1483~1561). (출처: Twitter @Oniropolis)


농노제는 서유럽에서는 18세기까지, 동유럽과 러시아 그리고 유럽 식민지 국가들에서 19세기까지 유지되었다. 강제노동도 유럽에서는 흔했다. 1000년 넘는 시간 동안 농부들은 지주들의 땅을 빌려 경작했고, 이에 더해 지주의 농장에 가서 추가로 일을 해주어야 했다. 20세기 들어서도 전체주의 국가에서 주요 건설사업에 강제노동이 이루어졌다.

노예제도는 정착 사회와 함께 나타나 19세기까지 전 세계에서 지속되었다. 이집트와 고대 그리스, 그리고 로마제국은 노예에 기반해 이루어진 사회였다. 그리스 아테네의 노예 인구는 약 10만 명이었고, 기원 후 1세기경 이탈리아에서는 노예인구가 약 200만 명이었다. 두 경우 모두 노예 수가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1에 해당했다. 이렇게 많은 노예를 유지하기 위해 이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했다. 서유럽과 흑해, 아프리카 등 지역에서 공급되는 노예 수는 매년 25만 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사람 다음으로 쓸 수 있는 동력원은 동물이었다. 주로 말과 소였는데, 문제는 동물들을 먹이는 일이었다. 말 한 마리를 먹이는 데 필요한 사료를 거두려면 땅 2헥타르(약 6천 평)가 필요했다. 소는 말보다는 적게 먹었지만, 사람의 식량을 기르기에도 땅이 부족했던 때였기 때문에 동물을 많이 기르지는 못했다.

[그림 3] 메소포타미아 지역 수메르의 고도 우르의 유물에는 말이 끄는 경량 전차(chariot)가 등장한다. “The Standard of Ur.” BC.2500년 경. (출처: British Museum)


바퀴를 이용한 수레는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나타났고, 그 후에 인더스 강 유역과 이집트에서 이용했다(그림 2). 사람이 끄는 경우도 있었지만 주로 황소와 야생당나귀가 수레를 끌었고, 유럽과 중동에서는 황소가 중요하게 쓰였다.

말은 남부 우크라이나 평원에서 기원전 3200년경부터 기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짐을 실어나르는 수레를 끌기 위해서는 도구가 필요한데, 기원전 3세기가 되어서야 중국에서 처음으로 가슴걸이가 개발되었다. 유럽에서는 말에 사람이 타거나 짐을 싣기만 했고, 중국이 가슴걸이를 고안한 후로도 1000년이 더 지나서야 이 방법을 개발하게 되었다.

수 천 년 전부터 인간들은 무거운 기계를 개발하였고 가축들이 그 기계를 움직였다. 특히 곡식을 가루로 만들거나 으깨기 위해 방아를 돌릴 때 동물들의 힘이 필요했다. 산업혁명 초기였던 18세기 후반에 특히 동물들이 많이 이용되었고, 동력의 크기도 ‘마력’으로 표시하였다. 방아를 돌리는 데는 2~3 마력, 방직기에서 방추 100개를 돌리는 데 1 마력 정도가 필요했다. 말은 사람을 잘 따르는데다 비싸지 않았기 때문에, 10마력 이하는 말이 많이 사용되었다.

1800년 이후 증기가 나오면서 차츰 말이 대체되기 시작했지만, 증기기관으로 넘어가는 데까지는 몇 십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말은 내연 기관이 개발되기 전까지 중요한 교통 수단이었다. 개인적인 교통 수단은 모두 마차였고, 역마차나 심지어 운하의 배도 말이 끌었다.19세기 들어 철도가 개발되면서 교통량이 늘어 말이 더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1810년 1만 5천대였던 개인 소유 마차가, 1870년이 되면 12만 대가 된다. 런던에서는 1902년 당시 승합마차 3700대, 2인승 마차 7500대, 전세 마차 3900대가 있었다(그림 3). 철도 회사도 짐마차로 물건을 날랐기 때문에 철도 회사가 말 6000 마리, 석탄 회사는 8000 마리를 가지고 있었다.

1900년 한 해 동안 영국의 말들이 먹어 치운 귀리와 건초는 400만 톤에 달했고, 이만큼의 사료를 키우는 데 600만 헥타르의 땅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들 사료는 영국이 아니라 외국에서 값싸게 들여오는 수입품이었다. 미국에서는 전체 농지의 4분의 1(면적 3600만 헥타르)에서 말 사료용 곡식을 키웠다.

내연 기관이 발달하면서 말은 점차 화석연료로 대체되었고, 농업 부문에서만 사용되었다. 영국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미 말이 끄는 버스가 모두 사라졌고, 1920년대 초부터 약 10년 사이에 동력원이 화석연료 전환되면서 말의 수는 절반으로 떨어졌다.

(다음 편 “에너지원 – 나무와 화석연료”로 이어집니다.)

[그림 4] 1926-1927년 런던. 말이 끄는 버스(horsebus). (출처: gettyimages)


참고자료

<녹색세계사>, 클라이브 폰팅 지음. 1991; 이진아/김정민 옮김. 2007. 그물코. (12장)


“그림으로 읽는 문명이야기”에서는 인류 문명의 흥망성쇠와 녹색문명을 고민해봅니다. 클라이브 폰팅의 <녹색세계사>를 읽어가면서, 현재의 환경문제와 기후위기 상황 그리고 석유에 기반한 현대도시문명을 다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그림으로 읽는 문명 이야기’는 매주 수요일 업로드됩니다.


발췌, 요약: 황승미 (녹색아카데미). 2020년 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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