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온생명

2025년 3월 15일 광화문. 윤석열 파면을 위해 집회에 나온 시민들. 윤석열 정권 퇴진 집회는 정권 시작 3개월이 지난 2022년 8월 6일부터 시작되어 지난 2025년 4월 5일 134회까지 진행되었다. 비상계엄 이후 파면이 인용되기까지 지난 4개월 동안은 매일 ‘비상 촛불집회’가 개최되었다. 이후에는 ‘내란세력 완전 척결과 민주정부 건설’을 위한 촛불로 전환돼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사진출처 : Ohmynews.com)

안녕하세요. 이전에 올렸던 글 <한강의 생명과 장회익의 생명>에 이어, 추가적으로 같이 논의하고 싶은 내용이 있어 글을 올립니다. 이번 글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극우적 바람이 거세지고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세계적 현상에 대한 원인 
  2.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유지를 위한 상생적 의식(온생명적 의식)의 필요성 
  3. 어떻게 온생명적 의식을 확산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

2025년 4월 6일 박용국 (녹색아카데미)


  1. 극우적 바람이 거세지고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세계적 현상에 대한 원인 

 이전 글 <한강의 생명과 장회익의 생명>에서 나는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자연적으로 낱생명적 태도가 강화되고 있는 것이라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한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이는 전 세계의 문제이기도 한 것 같다. 많은 학자들, 언론들이 지적하듯, 전 세계적으로 극우 포퓰리즘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신자유주의의 부작용에 대한 왜곡된 대응이란 측면이 큰 것으로 보인다. 즉, 낱생명적 개인들의 확대로 인한 폐해를, 낱생명적 집단의 형성으로 해결하려는 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과 영국의 대처를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물결은 본격화 되었고, 1991년 소련의 붕괴 이후 세계화와 결합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자유무역, 금융시장 개방, 규제 완화, 작은 정부를 골자로 한 신자유주의는 전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경쟁 시장으로 만들었으며, 개인을 공동체의 시민이 아닌 세계 시장에서의 소비자로, 즉 낱생명적 개인으로 전환시켰다. 1995년 WTO 체제 확립 이후 글로벌 교역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으며, 이로 인해 세계 경제가 빠르게 성장한 측면도 분명히 존재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성장의 과실이 특정 계층에 집중되면서 불평등이 심화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소외 계층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다. 

 미국의 경우 세계화로 인해 소외된 계층의 대표격은 전통적인 제조업 분야 종사자였다. 노동력이 풍부하고 임금이 상대적으로 낮은 해외로 전통 제조업이 이전하면서 블루칼라 노동자들은 소외되어 갔다. 마이클 샌델에 의하면, 소외 계층의 불만에 대해 미국 진보 진영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블루칼라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진보의 정치 엘리트들은 젠더 평등, 이민자 인권 문제, 성 소수자 보호, 환경문제 등에 치중하면서 노동자들의 경제적 소외에는 별 관심도, 해결할 능력도 없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들의 경제적 소외는 사회적 존엄감의 상실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틈새를 극우 포퓰리즘이 파고들었고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트럼프는 문제의 원인을 불법 이민자 및 중국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동맹국에서까지 찾으면서 이들을 공격하였고, 미국이 자유무역의 희생자라는 서사를 강화했으며, 강경한 보호무역주의로 방향을 틀었다. 재선에 성공한 트럼프는 취임 첫날, 파리 기후변화 협약 및 세계보건기구 탈퇴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기후위기 문제를 비용이 많이 드는 허구적 위협으로 규정하고 팬데믹 대응과 같은 글로벌 문제에 대한 국제적 연대를 거부하며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둔 것이다. 또한 철강, 알루미늄, 자동차 등에 대해 25%의 보편관세를 부과했고, 2025년 4월 2일 모든 교역국에 대한 10%의 기본관세 및 한국을 포함한 특정 교역국들에 대한 추가적인 상호관세 부과를 발표했다. 이러한 조치는 WTO 규범 위반이다. 하지만 미국은 트럼프 1기 때부터 WTO 2심 상소 기구 위원 선임을 거부하였으며 해당 자리는 공석이 되었다. 따라서 상대국이 WTO에 제소하여 1심 판결에서 승소하더라도 미국이 상소하면 2심 상소 판결이 무기한 연기되어 버린다. 사실상 WTO의 국제무역분쟁 해결 기능은 상실되었으며 2025년 4월 2일 미국의 상호관세 발표로 WTO 체제는 붕괴 수순을 밟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트럼프는 미국의 이익을 배타적으로 추구하겠다는 미국우선주의를 내걸면서 국제질서를 힘으로 흐트러뜨리고 있는데, 이는 낱생명적 개인들의 확대로 인한 폐해를, 낱생명적 집단의 형성으로 해결하려는 모습을 극명히 보여준다.  

 이와 유사한 현상이 유럽에서도 발생하고 있다. 세계화에는 빛과 그늘이 있고 그늘진 영역, 즉 경제적 소외집단은 나라마다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서유럽과 북유럽의 경우, 작은 정부, 민영화, 노동 유연성 강화와 같은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흐름이 있었지만 WTO 체제 하에서의 글로벌 자유무역 및 금융시장 개방 흐름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EU 내에서는 원칙적으로 관세 자체가 전혀 없는, 상품, 서비스, 자본,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이 보장되는 단일 시장이었다. 따라서 이로 인해 기존 산업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경제적 소외계층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으며, 특히 2015년 이후 급격히 증가된 시리아 중심의 난민 유입으로 이들과의 경제적, 문화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난민들에 대한 혐오감정을 조장하고 EU체제에 적대적인 극우정당들이 부상하였다. 2024년 6월 EU 의회 선거에서는 극우 교섭단체의 의석수가 증가하였는데, EU 의회 의석수가 가장 많은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경우, 프랑스에서는 국민연합(RN)이 1위,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 형제들이 1위, 독일에서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2위를 차지했다. 2025년 2월 독일 총선에서 독일을 위한 대안은 20.8%의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극우 정당이 20%를 넘는 성적을 거두었다. 동유럽 국가들은 1990년대 이후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하면서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동시에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 극심한 불평등과 사회변화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극우정당들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헝가리의 오르반 총리는 2010년부터 4연임에 성공하였는데 2015년 난민 위기 이후 강경한 반이민, 반EU 정책을 피면서 언론 통제, 사법부 장악 등 극우 권위주의 색채를 강화하고 있다. 폴란드에서도 극우 성향의 법과정의당이 8년간 집권했으며, 2023년 10월 총선에서는 연립내각을 구성하지는 못하여 야당이 되었으나 여전히 가장 많은 의석수를 가진 제1당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그림 1] 민주주의 지수로 보는 전 세계 167개국 민주주의 현황. 주요 내용 : 2024년, 권위주의 정권이 전 세계적으로 더욱 강력한 입지를 확보하면서 민주주의는 계속 후퇴했다. 2024년 기준, 전 세계 국가의 15%(인구 기준으로는 6.6%)가 ‘완전한 민주주의'(8, 9)를 운영했고, 권위주의 정권을 운영하는 국가는 약 36%(60개국. 인구 기준으로는 39.2%)에 달했다. 포르투갈, 에스토니아, 체코는 ‘완전한 민주주의’로 승격된 반면, 프랑스와 한국은 결함이 있는 민주주의'(6, 7)로 격하되었다. (그림 출처 : Visual Capitalist. 소스 : Economist Intelligence Unit Democracy Index 2024.)

 전 세계적인 극우화 경향은 세계 민주주의 지수의 하락에서도 드러난다. 이코노미스트 산하 EIU에서 매년 발표하는 세계 민주주의 지수, 스웨덴 V-Dem 연구소에서 발표하는 V-Dem 민주주의 지수, 미국 NGO 프리덤하우스에서 발표하는 세계의 자유 보고서, 국제기구 IDEA에서 발표하는 보고서 등에서는 세계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일각에서는 이들 기관의 주관적 평가에 신뢰성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세계 민주주의의 후퇴에 대해서 이들 기관 모두 공통된 견해를 보인다. 특히 2025년 3월 발표된 스웨덴 V-Dem 연구소의 보고서에서는, 독재화가 진행되는 국가가 2004년 12곳에서 2024년 45곳으로 20년만에 4배 가까이 늘었으며 민주주의 후퇴가 세계적인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2024년 9월 국제 IDEA는, 2023년을 민주주의가 8년 연속 후퇴한 해로 기록하며 이 추세가 글로벌 현상임을 강조했다. IDEA는 2020년부터 2024년 사이, 전 세계 선거 중 약 20%에서 패배한 후보 또는 정당이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법원 소송을 통해 선거 결과가 결정되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신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낱생명적 개인들을 전제로 한다. 호모 이코노미쿠스, 즉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용과 이익을 추구하는 합리적 개인들로 사회가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이 각자의 이익을 추구할 때 사회 전체의 이익이 증대되고 자원 배분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진다고 간주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논리를 전 세계 단위로 확장시킨다. 전 세계가 무역장벽 없는 하나의 시장으로 기능한다면 세계의 번영은 극대화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논리에 기반한 세계화를 통해 세계 경제는 빠르게 성장하였지만 기존의 각국 산업구조는 재편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새로운 글로벌 밸류체인이 형성되었다. 그러면서 자원 배분이 편향적으로 이루어졌고 사회경제적 소외 계층이 늘어나게 되었다. 사회를 낱생명적 개인들의 집합체로 여길 때의 부작용이 심각해진 것이다. 소외 계층들은 자신들의 문제에 대한 진보 진영의 대응에 불만을 느꼈고, 그들의 사회경제적 박탈감은 해소되지 못했다. 그러면서 극우 포퓰리즘에 힘을 실어주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반복하지만, 극우 포퓰리즘은 낱생명적 개인들의 확대로 발생한 문제들을 낱생명적 집단의 형성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이렇게 되면 내부적으로는 특정 혐오집단을 설정하고 적으로 만들어 세력을 결집시키고, 외부적으로는 자국우선주의를 강화하게 된다. 각국이 낱생명적 집단으로서 서로를 대하게 되면, 오직 자국 이익의 극대화를 배타적으로 추구하게 되고 무역 전쟁은 심화된다. 또한 국제기구 등을 통한 국가적 연대를 자국 주권침해로 여기며 배척하게 된다. 그러면 기후위기, 코로나19와 같은 팬데믹, 인공지능, 핵전쟁 위험, 국지적 분쟁 및 난민 문제, 일부 국가들의 빈곤, 인권 문제 등 전 세계적 협력을 통해서만 해결 가능한 글로벌 문제들은 해결되기는커녕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 국가간 적대감이 커지는 환경이 조성되면 국가간 물리적 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만약 강대국들이 대거 참여하는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된다면, 현재의 무기 수준을 고려해볼 때 인류는 파국적 재앙을 맞게 될 수 있다. 

 세계화라는 배타적 개인주의에 의해 발생한 문제들에 대한 해법은 반세계화라는 배타적 집단주의가 결코 아닐 것이다. 해법은 세계화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생적이고 협력적인 세계화로 방향을 트는 것이라 생각한다. 즉, 낱생명적 세계화에서 낱생명적 반세계화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온생명적 세계화로 방향을 트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대안적 세계화에 대한 논의는 1990년대부터 꾸준히 있어 왔지만 국제질서에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 개인 단위에서의 상생보다 국가라는 집단 단위에서의 서로간 상생은 훨씬 어려운 과제이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한데, 첫 번째로 라인홀드 니버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지적하였듯, 개인 단위에서는 도덕적이어도 도덕적 개인들이 모인 사회가 반드시 도덕적이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집단 단위에서는 개인 단위에서의 도덕성 수준을 기대하기가 훨씬 어려운데 집단은 내부결속을 우선하는 경향이 있고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기 훨씬 쉽기 때문이다. 이타적인 개인도 한 국가의 대표가 되면, 자국민들의 집단적 이익을 대변할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자동차 등이 지금까지 세계 시장에서 많은 수익을 거두었으니 이제는 다른 뒤처진 나라 기업들에게 양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이들 기업이 몰락하면 그 기업의 직원들뿐만 아니라 그와 연계된 수많은 전후방 국내 산업들이 연쇄적으로 큰 타격을 받으며 대량의 실직자가 발생하게 될 것인데, 그와 같은 양보를 주장할 수는 없다. 두 번째로 국제사회에는 강력한 세계정부가 없기 때문에 강제력을 갖춘 초국가적 규범이나 제도가 취약하다. 따라서 상생적 가치를 제도화하고 추진하는 글로벌 거버넌스의 형성이 쉽지 않다. 현재의 UN과 같은 국제기구도 결국은 몇몇 강대국들의 이익에 종속되기 쉽고 이들 사이의 패권경쟁에 휘둘리는 경향을 보인다.

온생명적 세계화는 결코 쉬운 길이 아니며 이상론적으로 보이지만 배타적 반세계화가 초래할 수 있는 파국적 위험을 고려할 때 다른 대안이 없어 보인다. 상생이라는 공동의 가치를 향해 국제기구, 각국의 정부들, 다국적기업을 포함한 각 기업들, 시민사회 및 개별 시민들의 협력적 참여가 필요할 것이다. 세계화를 통한 이익과 혜택이 국가 간, 그리고 국가 내에서 어떤 식으로 분배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개선시킬 수 있는지 지속적인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상생적 세계화에 대한 논의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여러 대안들이 제시된 바 있다. 예를 들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세계화와 그 불만』에서 각종 구체적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개발도상국 생산자들에게 적정한 가격을 보장하고 환경친화적인 생산을 유도하며 해당 지역사회의 경제적 자립을 지원하는 형태의 공정무역과 같은 국제 무역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개발도상국들 뿐만 아니라 선진국들 내부에서의 분배 문제 역시 개선되어야 하고 사회경제적 소외계층의 사회적 존엄성을 지키려는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국제질서 형성에 강항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대국들 내부에서 극우적 목소리가 커지면 결국 국제질서는 배타적 반세계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일극화의 시기가 끝나고 다극화의 시기로 전환되는 현상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다극화의 성격이다. 각국이 각자도생하는 낱생명적 다극화는 매우 위험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2.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유지를 위한 상생적 의식(온생명적 의식)의 필요성 

전 세계의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현상을 지켜보면서 민주주의의 유지를 위한 요건들을 생각해보게 된다. 어떤 정치체제이든 그 체제의 유지에 필요한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이 받쳐주지 않으면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제도와 의식 사이의 괴리가 크면 그 제도는 오래 유지될 수 없다.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태도, 즉 똘레랑스라 생각한다. 똘레랑스가 사라지면 민주주의는 붕괴된다. 똘레랑스라는 문화가 있어야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인정하고 서로 대화하며, 표결을 통해 결정된 사항에 대해서 승복할 수 있다. 그리고 표결에서 진 쪽은 더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려 노력하면서 다음 표결을 기다릴 수 있다. 공정한 선거제도, 삼권분립, 권력간 견제와 균형 등은 권력을 이용하여 다양성을 억압하는 것을 막기 위한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제도적 장치들이지만, 역으로 다양성이 인정될 때 이러한 제도적 장치들은 유지될 수 있다. 구성원들간의 똘레랑스가 사라지고 정치적 양극화가 극단화되면 이러한 제도적 장치들은 점점 붕괴되어 간다. 하지만 이러한 똘레랑스가 필요한 전부일까? 만약 똘레랑스가 단지 서로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태도를 의미한다면, 즉 타인들의 고통과 사회적 연대에 무관심한 차가운 관용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똘레랑스는 어디까지나 민주주의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요건일 뿐이다. 이러한 낱생명적 자유주의만으로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존속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개개인은 다른 사람들의 자유에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각자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는 의회라는 사회적 합의기구를 통해 헌법과 법률로 정한다. 이러한 절차적 틀은, 경제의 영역에서는, 신자유주의에서도 강조하던 것이었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는 낱생명적 개인은 시장질서라는 틀 내에서 자신의 자유를 최대한 이용하여 경제활동을 한다. 낱생명적 자유주의(낱생명적 개인주의)는 경제의 영역에서는 신자유주의에 대응되며, 정치의 영역에서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에 대응된다. 낱생명적 자유주의는 지난 30여년간의 세계화 과정에서 보았듯이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심화를 가져오며 소외계층의 커져가는 불만을 해결하지 못한다. 소외계층은 강력한 소속감을 주는 낱생명적 집단주의에 쏠리면서 점점 민주주의라는 체제 자체에 회의를 갖게 되고, 이 틈새를 파고드는 극우 포퓰리스트 정치인에게 힘을 실어주게 된다. 그러면서 민주주의는 후퇴하며 경우에 따라 붕괴하기도 한다.  

 결국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유지를 위해서는 온생명적 태도에 기반한 자유주의, 즉 온생명적 자유주의가 필요한 듯 하다. 낱생명적 자유주의는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필요조건일 뿐이다. 온생명적 태도가 받쳐주지 않으면 결국 낱생명적 자유주의조차 흔들리면서 낱생명적 집단주의로 방향이 틀어지고 민주주의는 후퇴한다. 극우적 움직임이 확산되는 현재의 세계 상황은 민주주의라는 제도와 그에 필요한 의식과의 간극이 점점 커지면서 일어난 현상으로 보인다.

 1980년대 영미 정치철학계에서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적 공화주의 간의 논쟁이 활발히 벌어졌었다. 1971년 존 롤스는 『정의론』에서 절차적 정의를 바탕으로 한 자유주의를 새롭게 정립하였는데, 1982년 마이클 샌델은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에서 이를 비판하면서 논쟁이 촉발되었다. 마이클 샌델의 비판은 여러 측면에서 전개되었지만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는 원자화된 개인을 전제하고 있으며, 개인의 자유와 경제적 분배의 절차적 정당성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 중 하나이다. 이는 개인의 파편화를 초래하며 공동체의 공동선(common good)과 같은 가치를 논의에서 배제시킨다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개인주의적 자유주의 쪽에서는 공동체주의가 공동체의 가치를 개인들에게 강요하면서 개인들의 자유를 제약하며 자칫 전체주의로 흘러갈 위험성이 있다고 비판하였다. 낱생명적 인간관을 전제하면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는 서로 대립된다. 낱생명적 인간관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가치가 상충되기 쉬우며, 공동체적 가치와 유리된 파편적 개인의 자유지상주의로 흐르거나 공동체적 가치의 관철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가 심각하게 억압되는 전체주의로 변질될 위험이 충분히 존재한다. 낱생명적 인간관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가치를 합쳐놓은 공동체주의적 자유주의란 말은 형용모순이다. 그 둘은 합쳐지지 않으며 양자택일의 대상이다. 하지만 온생명적 인간관에서는 그렇지 않다. 온생명적 인간관은 낱생명과 온생명으로서의 정체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생명적 자유주의는 낱생명으로서의 자유와 온생명으로서의 사회적 연대가 모두 포함되며, 따라서 공동체주의적 자유주의는 결코 형용모순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는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인류 역사에 국가라는 정치단위가 나타난 이후 현재까지, 왕정과 같은 독재체제가 훨씬 더 많은 시간과 공간을 점유했다. 민주주의란 당연한 것이 아닌 듯 하다. 그에 필요한 의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언제든 기존의 독재체제로 전환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낱생명적 자유주의만으로는 부족하다. 더군다나 빠른 기술발전의 성과물들은 오히려 배타적 태도를 더욱 강화시키는 쪽으로 작동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낱생명적 개인주의(자유주의)를 낱생명적 집단주의로 변질시키는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자기 진영의 목소리에만 귀기울이게 만들고, 더 많은 조회수를 얻기 위해 유튜버들은 보다 더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주장이 담긴 컨텐츠들을 생산한다. 그리고 이러한 뉴 미디어들이 레거시 미디어를 대체해 버리면서 균형적 공론장이 약화된다. 진영 논리는 강화되고 극단화되며, 상대 진영을 비방하는 정보는 사실 여부에 대한 제대로 된 확인 없이 카카오톡, 인스타그램 등과 같은 SNS를 통해 서로서로 빠르게 유통된다. 그리하여 가짜뉴스, 음모론, 상대진영에 대한 악의적 음해에 기반하여 정치적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상대 진영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민주적 절차를 무시해도 된다고 여기며, 심지어 군대를 동원한 계엄과 같은 물리적 폭력도 용인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정보 접근성의 확대로 이어져 한때는 민주주의의 확산에 도움을 주었으나, 이제는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소가 되어가고 있다. 오히려 호모 사피엔스의 부족 본능을 강화시켜 정치적 부족주의를 부추기고 있다. 

 결국 의식과 제도의 차원 모두에서 낱생명적 자유주의를 온생명적 자유주의로 전환시키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의식과 제도는 같이 가야 한다. 사회연대를 향한 제도개혁이 온생명적 의식을 끌어올리는 측면이 분명 있겠지만, 의식이 받쳐주지 않는데 우격다짐으로 공동체적 가치를 강요하며 지나치게 앞서가면 그 간극 사이에서 갈등이 분출될 수 있다. 강요된 연대는 결국 또다른 전체주의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정치권과 시민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정치사회적 논의들은 제도적, 정책적 측면에 국한되는 경향들이 있는데, 온생명적 의식의 확산에 대한 사회적 관심 역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3. 어떻게 온생명적 의식을 확산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

어떻게 하면 온생명적 의식을 확산시킬 수 있을까? 나는 그 답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온생명적 의식의 확산을 위한 중요한 축들 중 하나로 교육과 소통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좋은 교육이란 무엇일까?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자기자신, 타인, 자연과의 따뜻한 연결감의 함양이라는 큰 틀은 제시해주되, 그 안에서 각자가 자유롭게 탐구하고 토론하고 공부하며 자신만의 세계관을 확립해 나가도록 도와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자기자신과의 따뜻한 관계를 잘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 건강한 자존감을 형성해나갈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것, 사회적 차원에서는 다양성을 존종하고 자신의 삶이 주변 많은 사람들의 도움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우며 타인의 고통에 손을 내미는 사회적 연대에 대한 관심을 북돋아주는 것, 그리고 자연적 차원에서는 어떤 생명도 단절적으로는 물리적 생존이 불가능하며 자연과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다는 자각을 일깨워주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교육의 큰 틀이다. 이렇게 개인적, 사회적, 자연적 존재로서의 따뜻한 연결이라는 큰 틀 내에서 각자 자신만의 꽃이 활짝 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이것을 일종의 온생명적 교육철학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한국의 학교 교육현실은 이와 많이 다르다. 서울교대 권정민 교수가 지적했듯이 입시와 교육은 다르다. 입시는 입시이고 교육은 교육이다. 입시는 1~2년 정도 준비하면 되도록 하고, 교육은 교육대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한국의 경우 교육이란 곧 입시교육이다. 심지어 최근에는 7세 고시, 4세 고시라는 말까지 나오면서 어린 시절부터 입시를 위한 교육이 시작된다. 그리고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시험에 나오는 지식의 습득이다. 물론, 현장에 계신 많은 선생님들이 이러한 교육 현실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나름의 노력을 많이 하고 계시지만 대세가 바뀌기에는 아직까지는 역부족인 듯 하다. 입시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공정성 이슈는 중요해지고, 따라서 입시는 창의성이나 비판력을 평가하는 것보다는 정해진 정답을 얼마나 많이 맞추느냐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정답이 하나로 정해진 객관식 문제의 답안지 작성에 익숙해진 사회는, 사회에 의해 정해진 삶의 답안지가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시험이 요구하는 정답이 하나이듯, 삶이 요구하는 정답도 하나로 정형화되는 경향이 발생하는 것이다. 입시, 취업, 결혼 등 삶의 시기에 따라 완료해야 할 사회적 과제가 정해져 있고, 각 사회적 과제의 수행결과는 대체로 서열화되어 비교의 대상이 된다. 나만의 삶의 답안지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닌, 사회에 의해 주어진 삶의 답안지를 따라가려 하며, 정형화된 사회적 기준에 미달되면 스스로를 비난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존감은 훼손되고 때에 따라 정신적 위기가 찾아오기도 한다. 

 지금처럼 사회적 보상이 한 쪽으로 편중된 사회 시스템 하에서는 과도한 경쟁은 불가피하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육의 큰 틀에 대한 관심이 들어갈 공간적 여유는 많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좋은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한 사회적 토론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큰 틀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라도 더 확산될 수 있도록 여러 차원에서 노력이 필요할 듯 하다. 또한 가정교육, 학교교육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 차원에서도 온생명적 의식에 대한 관심을 확산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녹색아카데미 모임은 이런 측면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육과 더불어 소통도 중요한 것 같다.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은 『당신이 옳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식에게 버림받고 무시당한 한 어르신의 외로움. 자신은 세상에 아무런 쓸모없는 존재인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 소외된 어르신에게 보수단체 강사의 말은 자기 존재의 가치와 삶의 이유를 부여해주었을 것이고 그렇게 극우단체에 가입하였을 것이다. 청소년이나 청년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치열한 입시 및 취업 경쟁 속에서 자기 존재를 잃어버리고 소외감 속에 허덕일 때, 낱생명적 집단 내에서의 강력한 소속감은 그들에게 벼랑 끝에 만난 동아줄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사회와의 따뜻한 연결감을 상실한 낱생명적 개인은 이와 같이 자기자신과의 따뜻한 연결감, 즉 건강한 자존감 역시 상실하기 쉬우며, 낱생명적 집단을 형성하는 경향을 보일 수 있다. 그들의 외로움과 소외감, 불만은 정당하다. 다만 그 해결방식이 왜곡되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극단적 언행을 비판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왜 그런 방식의 해결책에 끌리게 되었는지 묻고 소통하면서 따뜻한 연결감을 재건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 

 공동체의 문제를 논의하는데, 다른 구성원들의 의견도 경청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극우적 견해라 판단되더라도, 만약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전체 구성원들 중 무시할 수 없는 비율을 차지한다면, 그들의 의견도 경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들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래야 소통이 가능하고 그래야 변화가 가능할 것이다. 낱생명적 개인주의 및 집단주의를 적대적 혐오 및 배제의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 온생명적 접근방식인 것일까?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온생명적 의식의 확산을 위한 교육여건 개선과 소통의 확대. 어렵지만 가야할 길 아닐까? 낱생명에서 온생명으로의 전환은 어쩌면 인류의 생존과도 연관이 되어 있는 문제이다. 지금은 대전환의 시기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는 세계 민주주의의 위기이며, 경제적으로는 자유무역에서 보호무역으로 넘어가면서 세계적인 무역전쟁이 촉발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자연적으로는 인류 생존을 위협하는 기후위기 문제가 코 앞에 와 있다. 또한 심상치 않은 AI의 발전 속도는 광대한 영역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되며, 제프리 힌턴 교수와 같은 일부 AI 석학들은 인간 지능을 넘어서는 범용 AI의 등장 및 이로 인한 인류의 멸절까지도 경고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글로벌 협력을 통해서만 해결 가능하지만 현재와 같은 낱생명적 다극화 상황에서는 그 해결이 요원하다. 문명의 방향을 온생명을 향해 틀어야 한다. 어려운 길이지만 가야할 길이다.

 온생명은 자연철학을 넘어 개인철학, 사회철학, 교육철학 등에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글은 그러한 확장을 제안하면서 내놓는 작은 예시글이다. 앞으로 온생명의 확장 적용에 대한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문의 : 녹색아카데미 greenacademy.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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