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 씨알과 온생명 사이


* 이 글은 최근에 발간된 다음 문헌에 발표된 내용입니다.
장회익, “인간 – 씨알과 온생명 사이”. 『함석헌과 생명평화』, 함석헌연구 제11집, 89-113 쪽, 2025.
* 2024년 9월 26일 씨알학당 정기강연회에서 이 내용으로 발표하신 내용을 아래 유튜브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1. 들어가는 말

  40여 년 전인 1982년에 “함석헌선생 팔순기념문집”으로 『씨알 인간 역사』(한길사)라는 책이 출간되었는데, 거기에 필자는 “인간: 우주적 실재에 대한 역사적 모형”이 라는 제호의 글을 게재했다.1 이 글은 함석헌선생(이후 존칭 생략) 가까이에서 그 분의 가르침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한 필자가 그 분의 높은 뜻을 기려 마련한 것이기에 나름의 정성을 들여 쓴 것이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두 가지의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그 하나는 ‘인간’을 논하고 있으면서도 함석헌의 주된 인간관인 ‘씨알’ 개념과 명시적인 연계를 짓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 이전에 이미 정기간행물 『씨알의 소리』가 널리 읽히고 있었고, 나 또한 그 안에 더러 글들을 썼기에 ‘씨알’의 의미를 전혀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그 개념에 대한 별도의 천착이 있었던 것도 아니기에 자칫 그 뜻을 잘못 헤아리지나 않을까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지금도 이 개념에 대한 깊은 연구가 없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이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단계이기에 불완전하나마 이것이 내가 논하려는 ‘인간’ 개념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말해보아야 하리라 생각한다.

  또 한 가지 당시의 내 글에서 아쉬움으로 남는 점은 그 시기 이후 내가 정립한 생명관인 ‘온생명’ 개념과의 관계가 이 글에서는 언급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후 내 저작인 『과학과 메타과학』(지식산업사, 1990; 현암사, 2014)에 이 글을 다시 실으면서 ‘인간’ 개념과 ‘온생명’ 개념과의 관계를 간략히 언급하기는 했으나2 이 역시 통합된 글의 형태로 논의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본래 함석헌기념문집에 실린 글의 논지를 살리면서도 이를 특히 함석헌의 씨알 사상과 또 이후 내가 제시한 온생명 개념과 어떠한 연관을 지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다만 씨알 사상이나 온생명 개념은 다른 문헌에서도 많이 언급되고 있으므로 이들에 대해서는 아주 간단히 그 개요만을 제시하고 이들이 본래의 논의 주제인 ‘인간’ 이해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중심으로 논의를 이끌어보려 한다.

2. 우주와 온생명

  오늘 우리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 하나는 우주 안에서 인간의 존재가 지니는 의미와 역할을 올바로 규명하는 일이다. 현대인은 지구 생태계 전체를 파괴시키기에 충분한 행위능력은 갖추고 있으면서도 이 안에서 자신과 생태계를 장기적으로 보존해 나가기에 충분한 명확한 통찰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통찰력을 얻기 위해 우리는 우선 인간이 속해 있는 생명의 세계를 명확히 이해하고 이 가운데에서 인간이 지녀야 할 바른 위치와 역할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이 점과 관련하여 함석헌은 그의 저서 『역사와 민족』에서 다음과 같은 말하고 있다.

진화의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생명은 발달하는 것이요, 다시 이 보다 더 높은 것이 있을 줄을 믿게 된다. 혼돈한 중에서 물질이 형성되고, 물질 위에 생명이 있으며, 생명 위에 의식이 있으며 의식 위에 양심이 있으며, 다시 그 위에 영적 생명이 나타남은 당연한 일이다. 진화의 과정을 보면 볼수록 이 우주 사이에는 신비막측(神祕莫測)한 것이 있음을 안다.3

이 짧은 인용문 안에서 우리는 우주와 생명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삶의 열린 가능성에 대한 함석헌의 생각을 잘 읽어낼 수 있다. 이제 이러한 생각을 오늘의 관점에서 특히 앞에 언급한 온생명 개념과 관련하여 다시 정리해보고 이를 통해 그 안에 나타난 인간의 우주적 존재양상을 살펴나가는 것이 함석헌의 이러한 뜻을 이어가는 한 방편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온생명이란 무엇인가? 이는 바로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졌을 때 그 대답으로 나오는 개념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살아있는 존재와 살아있지 않은 존재를 구분하고 살아있는 존재가 지닌 ‘살아있음’이란 성격을 추상화하여 이를 생명이라 부른다. 그렇기에 이러한 성격을 지닌 존재, 예컨대 다람쥐나 소나무는 생명을 가진 것으로 보고 그렇지 않을 것들은 생명을 가지지 않은 것이라 본다. 그런데 문제는 고립된 다람쥐나 소나무가 살아있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들이 살아있기 위해서는 공기가 있어야 하고 물이 있어야 하고 먹이 그리고 햇빛이 있어야 한다. 한 마디로 생명은 이들을 살아있게 만드는 모든 인과관계의 그물에 엮여 존재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생명의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이 인과의 실타래가 어디까지 뻗는가를 살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인과의 실타래가 더 이상 밖으로 뻗어나가거나 들어오지 않는 전 영역을 찾아내었다면, 생명은 바로 그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지구상의 생명을 생각한다면, 태양과 지구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생명을 가능케 하는 한 완결된 인과의 실타래를 이루고 있기에, 우리 생명은 바로 이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생명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완결된 인과의 실타래를 하나의 기본 단위로 보아 필자는 이를 ‘온생명’이라 불러왔다.4 이렇게 할 때, 다람쥐나 소나무와 같은 각개의 생명체들은 ‘온생명’과 구분해 ‘낱생명’이라 할 수 있고, 이들은 모두 온생명의 나머지 부분이 함께 할 때에 한해 생명의 구실을 하게 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인간도 한 유기체이며, 또 앞에 말한 낱생명 가운데 하나이므로 인간과 ‘온생명’의 관계는 낱생명과 온생명 관계의 한 특수한 경우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도 그 자체로서 생명의 한 진정한 단위가 될 수 없고, 오직 ‘온생명’의 진화 과정에 나타난 한 일시적 존재양상으로서의 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에게 생명성을 부여한다면 이는 오직 ‘온생명’의 나머지 부분, 즉 그 ‘보생명’과의 연관 아래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이라는 존재는, 특히 한 개인으로서뿐 아니라 인류공동체로서의 인간은, 지구상의 생명 자체를 기술적으로 멸절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를 이지적으로 파악할 능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개체가 되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 더욱 놀라운 어떤 존재로 부상할 가능성 또한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모든 것은 어떻게 해서 가능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 끝은 무엇인가?

  3. 낱생명과 보생명의 상합적 공존 

  먼저 낱생명으로서의 인간이 지니는 의미부터 생각해보자. 우리는 앞에서 생명의 진정한 단위는 온생명이며, 각각의 개체 생명은 이것이 그 보생명과 결합되어 온생명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생명으로의 자격을 부여받는다는 점을 밝혔다. 그렇다면 이러한 낱생명은 온생명을 포함하는 전 우주적 존재양상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떠한 위치를 점유하는 존재인가?

  하나의 낱생명이 온생명의 한 구성원으로 그 보생명과 더불어 생명으로의 기능을 한다는 것은 보생명과 연계된 특정의 생명활동을 지속해나가야 함을 의미하며, 이를 위해서는 이 여건에 부합하는 그 어떤 특성을 자체 안에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이는 곧 하나의 낱생명은 그 보생명과 더불어 상합적(相合的) 공존자의 성격을 지녀야 함을 의미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것은 자신의 체내에 외적 실상에 관한 정보가 일정한 방식으로 부각되어 있음을 말한다. 물론 개체의 체내에 부각된 이러한 정보의 내용이 외적 실재의 상황을 완벽하게 서술할 수는 없으며, 오직 진화과정을 통한 역사적 생존경험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마련된 내용으로 국한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낱생명이 내부적으로 함축하는 내용은 이를 둘러싸고 있는 온생명의 나머지 부분 곧 그 보생명에 대한 ‘상합모형’(相合模型)에 해당하며, 이 모형 속에 반영되는 내용이 장구한 역사적 생존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를 ‘역사적 모형’이라 부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모형’은 통상적으로 쓰이는 의미보다도 다소 확대된 의미를 내포한다. ‘모형’이라는 말은 원래 실물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서, 실물을 축소시키거나 간소화시켜 그 특징적인 면모를 나타내주는 어떤 장치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예컨대 지구의(地球儀)를 우리는 지구의 모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형의 개념은 쉽게 확대된다. 예를 들어 ‘지구가 구형의 형태를 지녔다고 하는 생각’ 또한 지구에 대한 하나의 모형이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생각은 이미 ‘모형’이 아니고 ‘사실’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좀 더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은 결국 ‘공인된 모형’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오늘날 지구가 둥글다는 생각에 대하여 별로 의심을 하지 않고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지만(현재에도 지구가 둥글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은 자기네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협회까지 구상하고 있다) 수백 년 전까지만 해도 이것이 그리 쉽게 받아들여지는 모형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은 지구가 넓적한 쟁반 모양을 하고 있으며 지구 끝에는 무서운 벼랑이 있을 것으로 상상했다. 사실상 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지구에 대한 이 두 가지 모형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무엇이 오늘날 우리들로 하여금 지구의 쟁반 모형 대신에 지구의 구형 모형을 믿게 해 주었는가? 이것은 우리가 지구의 구형 모형을 인정할 때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사실들이 더 잘 설명되기 때문이다. 가령 수평선을 넘어 들어오는 배가 돛대부터 보이기 시작한다든가, 아무리 배를 타고 멀리 나가도 벼랑에 떨어지는 일이 없다는 사실 등이다.

  지구의 모형을 생각할 때 우리는 지구라는 실체가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우리의 모형이 이 실체를 표현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좀 더 깊이 고찰해 보면 우리는 결코 모형을 벗어나 객관적 실재를 직접 인식할 길이 없음을 알게 된다. 오직 우리 자신이 구축한 모형들을 통해 경험사실들을 설명해 보고, 이러한 설명이 무리 없이 가능해질 때 우리는 우리가 구축한 모형들이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구에 대한 구형 모형이 쟁반 모형에 비하여 좀 더 많은 실재성을 함축한 모형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그런데 사물을 인식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모형들은 하나하나 고립된 것이 아니다. 다시 지구의 구형 모형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우리가 이 모형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지구상에서 우리의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거꾸로 매달리어 살 수 있는가 하는 데 대한 해답도 찾아내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이와 함께 뉴턴의 중력 모형이 수용되어야 하며, 이것은 다시 뉴턴의 역학이론 전체의 수용을 요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형을 통하여 인식한다고 할 때, 모형 하나하나를 사물 하나하나에 대응시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연관된 한 묶음의 모형 체계를 채택하게 됨을 알 수 있다. 모형 자체의 이와 같은 성격을 고려할 때 고립된 하나하나의 사물에 대응되는 모형의 개념보다는 하나의 통일성을 가진 모형체계의 개념이 더욱 유용할 것이며, 따라서 여기서는 ‘모형’의 개념을 좀 더 확대하여 이러한 모형 체계까지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활용하려 한다. 

  그런데 우리가 낱생명 안에 부각된 내용을 보생명 즉 온생명의 여타 부분에 대한 ‘상합모형’이라고 말할 때, 이 ‘상합모형’이 의미하는 바는 이것이 단순히 보생명의 그 어느 국면을 반영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뿐 아니라 이 낱생명과 온생명의 여타 부분이 서로 화합하여 살아 움직이는 생명을 형성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모형 속에는 낱생명이 처한 온생명적 상황에 대한 사실적 정보뿐 아니라 이 가운데서 적절히 행동해야 할 필요 지침도 함께 포함되어야 한다. 이제 이러한 낱생명이 자체의 감각기관을 통해 외적 정보를 수집하고, 또 이에 따라 적절한 행동을 수행하며 생존해가는 존재라고 한다면, 이것이 지닌 모형적 특성은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인 각종 소재들을 정리하고 해석하는 ‘이해기준’의 역할과 함께 해석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행동지침’의 역할을 하는 데에 있다. 사실상 ‘이해기준’과 ‘행동지침’이라고 하는 이 두 가지 역할은 서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유지해가는 ‘상합모형’이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할 단일 기능의 두 측면에 해당한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경우의 예로서 고대인들이나 또는 문명의 오지에 사는 미개인들의 자연관을 생각할 수 있다. 고대인들이나 미개인들도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생활 주변의 일들을 어떤 체계적인 틀에 맞추어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연의 질서에 대한 현대과학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 없었으므로 자연계의 많은 현상들이 이들에게는 매우 임의로운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이들은 임의로운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정령(精靈)이란 모형을 통해 자연계의 다양한 변화들을 이해하려 했다. 이들은 돌에도 나무에도 동물에도 모두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고, 이 정령들의 임의로운 행동이 예측키 어려운 변화를 일으킨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의미를 가지자면 필연적으로 정령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설정되지 않으면 안 되며, 따라서 이러한 관계를 나타내 주는 관련된 다른 모형들이 요청된다. 이것이 바로 마법(魔法)과 의식(儀式)이라는 모형들로서 정령들은 인간에게 마법을 행사하여 영향을 미치며 인간은 의식이라는 형태로 이에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 묶음의 이러한 모형들은 하나의 조직적인 모형 체계를 형성하게 되며, 이 모형 체계는 인간의 현실적인 생활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고대인들에게는 정령이라든가 마법, 의식 등의 초자연적 모형들이 일상적인 다른 모형들과 하나의 자연스런 융합을 이루어 그들의 관념세계를 형성했으며, 그들은 이러한 일련의 모형 체계를 기반으로 하여 오관을 통해 경험되는 모든 현상들을 해석하고, 또 해석된 내용에 맞추어 그들의 행동방향을 결정해 나갔던 것이다.

  4. 로봇족의 존속

  이제 낱생명이 이런 의미의 ‘상합모형적’ 성격을 지녔다고 할 때, 이것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인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우주의 초기에는 이러한 존재가 있지 않았으며 오직 긴 우주적 진화과정을 통하여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점은 우주의 역사 자체를 거슬러 올라가 살펴봄으로써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상합모향 자체의 성격 속에서 그 불가피성을 찾아볼 수 있다. 즉 낱생명의 성격을 나타내는 상합모형은 필연적으로 역사적 모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것과 대비되는 ‘비역사적’ 모형이라고 할 로봇족의 존속 문제를 고찰해 보자.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들 일반의 여러 특성을 나타내는 데 자동자(automation)라는 개념이 종종 활용되고 있다. 자동자라는 것은 그 자체 속에 어떤 내부적 상태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어서 외부로부터 어떤 자극을 받을 때 이 자극과 내부 상태의 성격에 따라 정해지는 어떤 반응을 나타내며, 동시에 그 자신은 새로운 내부적 상태로 전환하게 되는 그 어떤 장치로 정의된다.

  이러한 정의를 통해 볼 때 우리가 위에서 제시한 ‘확대된 의미의 모형’ 개념은 이러한 자동자의 개념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위에서 말한 모형이라는 것이 외부적 자극에 접하게 될 때 이를 해석할 이해기반과 또 이에 대처할 행동지침을 지닌다는 점에서 바로 내부적 상태를 포함하고 있는 자동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자동자 개념과 여기에 관련된 여러 이론들은 이것이 근래에 급격히 그 중요성이 증가하는 전자계산기(computer)와 자동공작기(robot), 그리고 여러 생리현상과 심리현상을 이해할 이론적 모형이란 점에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폰노이만(von Neumann)에 의하여 도입된 자체복제성(self-reproducing) 자동자의 개념은 생명현상의 성격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관심을 끌어 왔다.5

  이제 자체복제 능력과 자체보존 능력을 가진 자동공작기, 즉 로봇들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해 보자. 이 로봇들의 기능 가운데에는 자신과 동일하거나 대단히 비슷한 로봇들을 인간의 관여 없이 스스로 생산해내며 동시에 스스로의 기능을 유지하고 보존해 가는 기능까지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이들은 로봇 제작에 필요한 재료를 스스로 마련하고 이들을 스스로 조합하여 자신들과 같거나 거의 비슷한 로봇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자신들의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와 정비에 필요한 물자도 스스로 개발하여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이 이러한 활동을 한다 하더라는 이는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 안에서 이루어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이미 일정한 세계 안에 놓여 있으며, 그 세계가 허용하는 여건의 범위 안에서 이러한 일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들이 이러한 활동을 해내기 위해서는 이들 안에 외부상황에 대한 정보를 채취할 수 있는 정보 채취기관과, 받아들인 정보를 내부에서 해석하여 외부상황을 판단한 후 여기에 적절한 행동방안을 마련하는 지적활동 기관, 그리고 마련된 방안을 행동에 옮겨놓을 공작수행 기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제 이러한 로봇족이 어떠한 계기로 지구상에 존재하게 되었다고 해보자. 이들은 얼마나 오래 동안 존속해 갈 수 있을까? 물론 로봇 하나하나는 유한한 수명을 가진다. 아무리 스스로 잘 정비를 하고 수선을 해 가며 지낸다 하더라도 결국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들 첫 세대가 그 수명을 다하기 전에 독자적으로 존속해 갈 능력을 가진, 다음 세대를 만들 수만 있으면 이 로봇족의 생존은 지속된다. 그러나 몇 세대나 이렇게 지속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들의 존속을 어렵게 하는 두 가지 요인을 곧 발견하게 된다. 그 첫째는 지구상의 상황의 변천이다. 이들의 활동과 보존을 위한 에너지와 물자가 언제나 처음과 같은 비율로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예상치 못한 다른 괴물들이 나타나 이들의 생존을 위협할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구상에는 언제나 천재지변이라는 것이 그치지 않고 발생한다. 물론 이들의 두뇌활동기관 속에는 이러한 일들에 대처할 상당량의 처방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두뇌의 용량이 유한한 이상 이 처방의 개수가 무한할 수는 없다. 한편 상황의 변화요인은 무제한으로 존재할 것이기에 이들이 미처 그 두뇌 속에 처방을 간직하지 못한 사건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고, 이때에 이들의 존속은 위협받게 된다.

  이들의 존속을 어렵게 할 두 번째 요인은 이들 자신의 복제능력이 가진 제한성이다. 이들이 자기 자신과 동일하거나 또는 매우 흡사한 다음 세대를 복제한다고는 하지만, 이미 그들 자신이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존재이고 이 복잡한 존재를 그대로 모방하여 이와 동일한 존재를 만든다는 것은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 복제과정 속에 필연적으로 일정범위 이상의 오차가 수반되게 마련이며, 이로 인하여 세대마다 조금씩 변형된 존재들이 되어 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몇 세대를 거치지 못해서 이들은 이미 원형에서 충분히 벗어날 것이고 따라서 결국 생존에 적합하지 못한 존재들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이러한 두 가지 제약조건을 가지고 있는 이상, 초기에 아무라 정교하게 만들어진 로봇들이라 하더라도 이들이 지구상에서 여러 세대를 존속해 간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오직 한 가지 가능한 요행을 생각한다면 이 두 가지 요인이 서로 상쇄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즉 불가피한 오차로 인하여 변형된 후대의 로봇들이 오히려 그동안 변화된 외계의 상황으로 인하여 생존하기에 더욱 적합한 존재들이 되어 있는 경우이다. 이는 마치 불의의 사고로 눈을 한쪽 잃은 사람이 있는데 때마침 세상이 바뀌어 눈을 한쪽만 가져야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실현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한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러한 종족들이 지구상에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포함한 지구상의 생물종들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것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검토해 보자.  

  5. 상합적 정체성의 의미

  이를 위해 지구상의 생물종이 위에 제시한 로봇종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생명체도 로봇과 똑같이 몇 가지 기본적인 물질입자들의 짜임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이 구성입자들도 로봇과 똑같은 자연계의 보편적 물리법칙에 순응하고 있다. 

  그럼에도 생명체가 로봇과 크게 다른 성격을 나타내는 것은 이런 존재들이 전체 온생명의 생리에 순응하여 빚어진 것이며 계속 빚어져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생명 개체의 존재양상은 그 개체를 먼저 규정하고 이의 존속을 가능케 하는 주변 여건을 설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온생명이란 상위 체계가 전제되는 가운데 거기서 빚어져 나온 한시적 기능체로서의 정체성만을 가지게 된다. 즉 그 자체만의 개별적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온생명의 정체성과 더불어 말해야 하는 상합적 정체성만이 부여되는 성격을 가졌다는 것이다.

  즉 <로봇+주변환경> 관점과 <온생명 내의 낱생명>은 특정 시점에서의 물질적 구성은 같을 수 있지만 하나는 로봇에 방점이 찍히는 개별적 정체성 위주의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온생명에 방점이 찍히는 상합적 정체성 위주의 관점이라는 데서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한 쪽에는 생존의 주체가 로봇이 되고 주변환경이 주어진 여건에 해당한다면 다른 한 쪽은 생존의 상위 주체가 온생명이 되고 낱생명이 그 하위 주체가 되는 구조이다. 이들의 차이는 바로 그 시간 의존성 즉 ‘존속’ 문제와 관련하여 점점 더 크게 벌어진다. 

  그렇기에 이러한 상합적 정체성을 지닌 생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간적 존재양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속한 온생명의 경우, 대략 40억 년 전에 태양과 지구 사이에 형성된 매우 특별하며 풍요로운 어떤 물질적 여건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온생명의 소재가 될 바탕 여건인데, 우리는 아직 우주내의 다른 어떤 곳에 이런 여건이 마련된 사례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일단 이런 여건이 발생하면 그 안에서 비교적 단순한 자체촉매적 국소질서 하나가 우연에 의해 발생할 수 있고, 이것이 다시 변이를 동반하는 자체복제와 주변여건에 따른 자연선택에 의해 점점 더 정교한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들을 산출해내게 된다. 이렇게 마련된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들이 오늘 우리가 말하는 낱생명들이다. 그러니까 생명의 정체성은 바로 이 전체 체계 곧 온생명 안에 있으며 이 안에서 인간을 비롯한 낱생명들이 지니는 지위는 오직 이 온생명과 함께하는 상합적 정체성을 지니는 것에 해당한다. 이때 낱생명 자체는 독자적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기에 시간이 지나 그 형태가 몰라보게 달라지더라도 상합적 정체성은 여전히 유지하는 것이기에 생명으로서의 존속성은 보장된다. 예를 들어 인간은 최초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와 너무도 다르지만 온생명과 함께하는 상합적 정체성은 여전히 연결되는 것으로 보며 이 점은 미래의 모습에도 그대로 해당한다. 그러므로 온생명이 존속되는 한, 인간 후예의 상합적 정체성이 유지되는 한 넓은 의미의 인간은 존속된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개별적 정체성을 지닌 자체복제성의 자동자는 주위 여건의 변화와 복제과정의 오차라는 두 가지 문제로 인해 그 존속 자체에 위협을 받는다. 그런데 원시 생명체에서는 이런 두 가지 역기능이 쉽게 결합하여 하나의 발전적인 진화의 길을 터준다. 원시 생명체의 경우에 쉽게 예상되는 것은 그 구조적 단순성으로 인해 매우 활발한 복제기능을 가질 것이며, 따라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급격히 불어나리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복제과정의 미숙성에 따라 변종의 가능성 또한 높았으리라 추측된다. 그러므로 복제과정의 오차로 인하여 변형된 생명체들 가운데서 변화된 주위 여건에 부합되는 것들이 언제고 존재할 수 있으며, 이들이 선택되어 더욱 성공적인 생존을 유지해나가게 된다.

  흔히 자연선택이라 불리는 이 과정을 통하여 생명체가 존속해 갈 외부 상황을 좀 더 잘 반영하고 있는 모형이 계속 적자(適者)로서 선택되어 나가게 되고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오래 거쳐 갈수록 그 선택된 ‘내부적 상태’ 속에는 이것이 외부와의 접촉을 통해서 감지하는 정보를 정확히 해석하여 외부의 객관적 상황을 판단하는 기준과 또한 여기에 현명하게 대처하여 생존을 지속시킬 행동의 지침들이 정선되어 축적되는 것이다. 이렇게 조성된 내부적 상태라는 것은 결국 객관적 상황과 생존의 조건이라고 하는 양면적인 ‘우주적 실재’를, 역사적 생존 과정을 통하여 그 속에 점점 더 충실히 반영해 가는 ‘역사적 모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6. 모형을 창조하는 모형

  인간도 물론 이러한 역사적 모형을 함유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단지 이를 수동적으로 함유할 뿐 아니라, 의식적으로 모형을 창조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다. 즉 인간은 ‘모형을 만드는 모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그의 특이한 두뇌구조로 인하여 폭넓은 정신활동이 가능해졌으며, 특히 상징을 통하여 사물을 구상화할 능력을 가졌다.6 이는 곧 만들어진 모형을 그 안에 간직할 뿐 아니라 이를 의식적으로 개선하는 작업을 수행하는 존재임을 말한다.

  이렇게 주체적 활동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는 이 모형은 지금까지 고찰해 온 다른 모형들과는 다른 중요한 특성을 하나 가지고 있다. 다른 역사적 모형들이 오직 파멸과 존속이라는 무서운 심판 아래 적자생존이라고 하는 자연선택 과정 만에 의해서 형성되어 온 것임에 비하여, 이 모형은 의식적으로 비판되고 의식적으로 선택된다는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인간은 사물을 구상화하는 정신활동을 통해 의식 가능한 하나의 모형 우주를 창조해내고 이 우주내의 사물을 가상적으로 활동시켜 봄으로써 자신에게 닥쳐올 상황을 미리 그려보고 이에 비추어 자신의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이것은 말하자면 가상적인 모형을 만들어 가상적인 심판대 위에 올려놓고 이것이 가상적인 자연선택 과정을 거치게 함으로써, 현실적인 파멸의 위험을 거치지 않고도 생존에 유리한 선택을 해 나갈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인간의 이러한 성격은 개체로서의 인간 뿐 아니라 문화공동체로서의 인간에게도 해당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생존에 유리한 모형을 선택해 간다는 것이 개개인간의 생존조건에 관계된 것일 뿐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인간의 생존조건에 관한 이야기도 된다.

  이렇게 인간에 의해 향유되고 전수되어 온 두 ‘모형’을 다음과 같이 구분해 지칭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의식적 경험의 산물로서 문화의 형태로 전수되는 ‘문화적 모형’이며 다른 하나는 문화 이전의 생물학적 진화 과정에서 형성되어 유전적으로 전수되는 ‘유전적 모형’이다. 이제 인간에게 전수된 두 가지 모형의 상호관계 및 이들이 인간의 생존에 기여하는 점들을 생각해 보자. 우선 인간이 의식적으로 창조하고 있는 문화적 모형이라는 것은 그 기본 바탕을 유전적 모형 속에 두고 있다. 인간이 다른 생물들과 다른 생물학적 특성, 즉 인간에게 전수된 유전적 모형의 특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비교적 큰 두뇌를 가지게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언뜻 보아 별로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이 특성은 결과적으로 엄청나게 큰 차이를 가져왔다. 즉 다른 생물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폭넓은 정신세계를 인간에게 열어준 것이고, 이 정신세계는 또한 그 안에서 새로운 유형의 모형이라 할 수 있는 문화적 모형이 자라나게 해 준 것이다.

  이 유전적 모형은 인간의 정신세계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는 점 이외에도, 인간의 생존 그 자체를 위해 절대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다른 모든 생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유전적 모형은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모든 생리작용과 본능적 심리작용을 가능하게 해주는데, 이에 비하면 문화적 모형이 기여하는 정도는 오히려 극히 작은 한 부분에 해당한다. 우리의 문화적 모형이 이제 겨우 물질의 운동과 변화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는 단계에 놓여 있다고 한다면, 인간의 그리고 모든 생물들의 유전적 모형들은 이러한 물리적 화학적 법칙들을 이미 능숙하게 활용하여 놀랍고 다양한 생리현상들을 가능하게 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문화적 모형 또한 유전적 모형과의 상호보완적 결합을 통해 인간의 생존을 위한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된다. 즉 인간은 자신이 이룩한 문화적 성취를 통해 자신이 살아갈 우주적 환경여건을 크게 변모시켰고, 따라서 이 새로운 여건 속에서 생존해 갈 새로운 모형을 지속적으로 추구해나가고 있다. 장구한 역사 속에서 더딘 진화과정을 밟아 이루어진 유전적 모형은 그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급격한 변화에 대처할 만한 유연성에서는 한계를 지니고 있어서 결국 의식적으로 창조되어가고 있는 문화적 모형에 일정한 보완적 역할을 맡기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경우 비교적 고정된 유전적 모형과 함께 상대적으로 유연성이 큰 문화적 모형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생존을 위하여 일단 다행한 일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문화적 모형이라는 것은 인간의 의식적인 활동에 의하여 제안되고 비판되고 선택되는 것이기에 인간은 이제 자신의 생존 책임을 스스로 감당해 나가야 할 무거운 부담을 함께 지게 된다.

  한편 우리가 온생명 개념을 먼저 명시적으로 파악하고 그 안에 놓인 존재로 인간을 파악한다면, 인간과 온생명의 관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영상을 그려볼 수 있다. 사실 인간이 온생명 안에 놓인 자신의 존재위상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인간과 그리고 온생명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만일 온생명 안에 놓인 자신의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협소한 개체보존과 개체증식의 본능에만 의존한다면, 이는 암세포가 숙주 신체 위에서 자체보존과 자체증식만을 계속하는 상황에 해당할 것이고, 반대로 인간이 온생명 안에 놓인 자신의 존재양상을 명확히 파악한다면, 이는 곧 인류가 온생명 안에서 마치 인간 신체 안의 신경세포들과 같은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이 자기의 신체 안에서 정신세계를 전개시키는 것이 그가 지닌 신경세포들 때문이라고 한다면, 인간을 신경세포들로 삼는 온생명은 다시 인간의 역할에 힘입어 한 단계 높은 ‘우주적 정신세계’를 펼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의 단순한 동물적 개체가 신경세포들로 구성된 두뇌를 가짐으로 인해 정신적 기능을 지닌 인격의 주체를 이루는 것처럼, 하나의 유기적 생명체로서의 온생명은 인간이 그 두뇌로서의 역할을 올바로 수행함으로 인해 현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고차적 정신기능을 지닌 ‘우주적 주체’를 이루게 됨이 가능하리라는 것이다. 이때에 각 개체로서의 인간은 이러한 우주적 주체에 종속된 부속품적인 존재가 아니라 이 ‘우주적 주체’를 ‘확대된 자아’로 느끼며 참여하는 ‘공동주체’에 해당할 것이다. 이러한 ‘우주적 주체’ 또한 개체들에 의한 이러한 고양된 주체 형성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 개체로서의 각성이 그만큼 소중하다. 우리가 곧 살펴보겠지만 이렇게 각성된 개체로서의 인간을 함석헌은 ‘씨알’이라 명명하고 있다. 이렇게 각성된 씨알들을 담은 온생명, 곧 ‘우주적 주체’를 갖춘 새로운 생명은 더욱 신비한 그리고 여전히 우리 손에 잡히지 않는 그 어떤 ‘우주적 실재’를 향해 하나의 살아 있는 모형으로 계속 성장해 나갈 것이다.

  7. 깨달은 인간으로서의 씨알

  우리는 인간을 생명의 기원으로부터 먼 미래로 지향해 가는 하나의 역사적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고찰해 보았다. 다른 낱생명들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궁극적 실재의 모습을 스스로의 몸속에 새겨 나가는 어떤 조각 작품과도 같은 것이다. 인간이 지닌 더욱 특이한 점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수동적으로 다듬어지기만 하는 작품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의식하고 자신의 몸을 다듬어나가는 작품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으로 인하여 인간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자신이 그 일부로 되어 있는 온생명의 운명을 의식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으나, 적어도 아직까지는 이러한 인간의 존재양상이 인간 개개의 구성원들에 의해 충분히 이해되고 이에 맞추어 각자의 삶이 영위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많은 선각자들 특히 종교지도자들은 인간이 놓인 이러한 상황을 그때그때의 역사적 문화적 상황 아래 자신의 언어와 방식에 따라 일깨워 왔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선각자였던 함석헌 또한 그 자신의 특유한 언어로 이러한 인간의 위상을 깨우쳐주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위에 언급한 ‘씨알’ 개념이다.

  안병무는 함석헌의 글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민중이 뭐냐? 씨알이 뭐냐? 곧 나의 나대로 있는 사람이다. 모든 옷을 벗은 사람, 곧 알 사람이다. 알은 실(實), 참, real이다. … 그 한 알이 이 끝에서 나로 알려져 있고, 저 끝에선 하나님, 하늘, 뿌리만으로 알려져 있다. …” 여기서 씨알은 가장 못났으나 동시에 곧 하늘이라는 그의 사상이 정착된다.7

인간이 지닌 모든 겉모습을 벗어던지고 오직 우주적 실재를 지향하는 그 한 가지로 그는 ‘알맹이’ 곧 ‘알’ 사람이며 그가 지향하는 반대 끝 곧 궁극적 실재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이야기이다. 세속적으로 아무리 못난 인간이라 하더라도 이것만은 공유하는 것이며 이것을 깨달아 삶의 뿌리로 삼는 사람이 곧 함석헌이 말하는 씨알이다. 그래서 송기득은 함석헌 씨알 개념이 지닌 이러한 상민성(常民性)을 강조하면서 함석헌 자신의 삶이 바로 이러한 씨알의 구현이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상민(常民)이란 떳떳하고 버젓한 사람이다. 언제 어디에나 있는 사람, 밑바닥 사람이다.” 그래서 민중(民衆)이다. 그는 이 민중을 독특하게 ‘씨알’이란 말로 개념화한다. ‘씨알’(民, 民衆)이란 “하늘과 사람을 바로 볼 수 있는 사람, 곧 하늘 백성(天民)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지금껏 하나의 씨알로 살고 있고, 또 씨알로 살려고 애쓰고 있다. …

  80여년을 살아 온 오늘날까지 그는 한번도 벼슬한 적이 없다. 권력계층이나 부유계층에 끼어 본 적이 없다. 다스리는 자리에 앉아 본 적도 없고 ‘가진 자’의 부류에 든 적도 없다. 흔히 그를 ‘종교인’이라고 부른다. 이건 그에 대한 편의로운 호칭일 뿐,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명칭이다. ‘씨알’에게 명칭이 붙을수록 씨알스럽지 못한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겉으로라도 그는 ‘씨알’의 한 상징임에 틀림없다.8

  한편 함석헌은 이러한 개인 곧 씨알이 전체와의 관계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개인은 저만이 홀로서 되는 것 아니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개인인 것은 물론이지만 그 개인의 뒤에는 언제나 전체가 서 있다. 양심은 제가 만든 것이 아니요, 나기 전 벌써 그 테두리가 결정되어 있다. 사람은 생리적으로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족적인 사회적인 존재다. 개인은 전체의 대표다. 전체로부터 떨어진 나는 참 나일 수 없고, 스스로의 안에 명령하는 전체를 발견한 나야말로 참 나다. 그것이 참 자기발견이다. 그 전체는 종교적으로 하면 하나님이요, 세속적으로 하면 운명공동체인 전체사회다.9

여기서 함석헌은 “그 전체는 종교적으로 하면 하나님이요, 세속적으로 하면 운명공동체인 전체사회”라 말하고 있지만 우리가 위에서 보아온 문맥에서 보자면 이것이 바로 ‘온생명’에 해당한다.

함석헌은 내가 여기서 말하는 ‘온생명’ 개념에 접할 기회가 없었던 분이기는 하나 위에 인용한 문장만 보더라도 그 자신 이미 이 내용을 상당부분 체득한 사람으로 보이며 그런 뜻에서 함석헌의 씨알 개념을 온생명이 자신임을 자각한 개체로서의 인간이라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1. 장회익, “인간: 우주적 실재에 대한 역사적 모형”: <함석헌선생 팔순기념문집> 『씨알 인간 역사』(한길사, 1982) 257~280쪽. (이 글은 『과학과 메타과학』 (지식산업사, 1990, 제2부 10장; 현암사, 2012, 10장)에서 원문을 볼 수 있습니다.) ↩︎
  2. 장회익, 『과학과 메타과학』(지식산업사, 1990; 현암사, 2012) <제10장 인간의 우주적 존재 양상>. ↩︎
  3. 『역사와 민족』(제일출판사, 1973) 28쪽. 김경재, “뜻, 역사, 민족”<함석헌선생 팔순기념문집> 『씨알 인간 역사』(한길사, 1982) 74쪽에서 재인용. ↩︎
  4.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논의는 장회익, 2014,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 (서울: 한울) 또는 장회익, 2019,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제7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
  5. J. von Neumann, Theory of Self-reproducing Automata, A. W. Burks, ed., Urbana :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66. ↩︎
  6.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Ernest Cassirer)는 인간을 상징적 동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E. Cassier, An Essay on Man, Yale University Press, New Haven, 1944. ↩︎
  7. 안병무, “순수와 저항의 길”, 『씨알 인간 역사』(한길사, 1982) 21쪽. ↩︎
  8. 송기득, “함석헌의 저항론-맨 처음에 저항이 있었다”, 『씨알 인간 역사』(한길사, 1982) 78쪽. ↩︎
  9. 함석헌, 『역사와 민족』(제일출판사, 1973) 78쪽. 김경재, “뜻 역사 민족” 『씨알 인간 역사』(한길사, 1982) 71-72쪽에서 재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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