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생명과 장회익의 생명

한강 (그림 : The Nobel Prize)

 12월 3일 밤,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인터넷 속보 기사를 봤을 때 처음에는 가짜뉴스인 줄 알았다. 몇 시간만에 비상계엄이 해제되기는 했지만 그 이후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들을 보면서 나는 두 개의 상반된 감정을 느꼈다. 계엄이 선포되자 시민들은 국회로 달려나갔고 계엄군들의 진입을 몸으로 막아내었으며, 야당 의원들과 일부 여당 의원들은 빠르게 국회로 모여 계엄 해제를 의결했다. 독재를 꿈꾸는 자의 날벼락과 같은 계엄 선포에 대해 한국의 민주주의는 자체적으로 방어 메커니즘을 빠르게 작동시킨 것이다. 최고 권력자 한 명의 파괴적 시도에 의해 한국 민주주의는 무너지지 않았고, 헌법적 절차에 따라 평화적으로 그 시도를 무력화시킴으로써 한국 민주주의의 복원력을 세계에 보여주었다. 계엄 해제 이후, 나는 다음과 같이 예상했다. “계엄 선포는 보수냐 진보냐의 문제가 아니고 군사독재냐 민주주의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보수 진영에서도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에 대해 맹렬히 비난할 것이다. 국민들의 압도적 다수가 윤석열 대통령 탄핵을 원할 것이다. 빠르게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안이 통과될 것이고, 헌법재판소의 판결 역시 신속히 나올 것이다. 또한 탄핵심판과는 별개로 내란 행위에 대한 특검이 빠르게 국회를 통과하여 엄정한 수사가 뒤따를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헌법적 절차에 따라 신속히 진행될 것이다.” 그런데 사태는 생각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놀랐던 것은 여론조사 결과였다. 국민들의 압도적 다수가 계엄을 반대하고 탄핵을 찬성할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 달랐고, 시간이 지날수록 탄핵 반대 여론이 점점 높아졌다.

 나에게 계엄 사태는 두 개의 풍경으로 다가온다. 한국 민주주의 복원력, 그리고 내 예상보다 훨씬 많은 민주주의 파괴 행위를 옹호하는 국민들. 슬픈 감정이 들었다. 왜 이러한 폭력적 행위를 옹호하는 것일까? 공동체 구성원들의 의견이 서로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공동체 주요 문제들에 대해 서로 의견이 다르면, 같이 대화하고 타협하되, 합의되지 않으면 표결하면 된다. 내 의견이 소수이면 결과에 승복하고, 다음 번 선거 때까지 더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면 된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며, 보수와 진보는 이런 틀 위에서 공존한다. 하지만 내 의견이 관철되지 않는다고 총을 든 군대를 동원해 상대방을 제압, 제거하려는 것은 민주주의 자체를 파괴시키는 행위이며, 역사의 수레바퀴를 한참 거꾸로 돌려 군사독재 시절로 회귀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거대한 폭력이다. 만약 시민들이 막지 못해 군인들이 국회에 빠르게 진입하여 계엄해제를 막았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전국에서 많은 시민들이 몰려나왔을 것이며 군경들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진압을 위해 발포명령이 내려졌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언론에 보도된 바에 의하면,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공소장에는, 수도방위사령관에게 “총을 쏴서라도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끌어내라”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제압하기 위해 발포도 불사하겠다는 이 시도, 이 거대한 폭력. 왜 일부 국민들은 이러한 폭력을 비호하는 것일까? 한강이 자신의 소설에서 제기한 의문이 떠오르는 지점이다.  



계엄 선포 이틀 후인 지난 12월 5일, 한강은 노벨상 시상식에 참여하기 위해 스웨덴으로 출국했다. 12월 12일 노벨 낭독의 밤에서 한강은 『희랍어 시간』 일부를 낭독했는데, 낭독 전 스웨덴 진행자와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3일 밤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뒤 한국인들의 노력으로 폭력을 막고 상황이 신속히 안정된 데엔 책 『소년이 온다』의 영향이 있지 않으냐는 취지의 질문엔 “제 책이 아주 약간은 젊은 세대분들에게 광주로 가는 진입로 역할을 해 줬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게까지 말하는 건 좀 과장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며 저어했다. 하지만 “시위 현장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제 책(소년이 온다)을 읽고 있는 분들의 사진을 봐서 뭉클한 마음이 들었다”고 전했다. <한겨레, 2024년 12월 13일 기사>

 한강은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5.18이 일어나기 4개월 전인 1980년 1월, 한강 가족은 서울로 이사했다. 한강이 살았던 광주 집에 새로 이사 들어온 가족의 막내 아들은 5.18때 계엄군의 총격에 의해 사망했다. 그 막내 아들이 『소년이 온다』의 “소년”이다. 서울로 이사한 한강은, 열두 살 때 5.18 사진첩을 보게 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1980년 1월 가족과 함께 광주를 떠난 뒤 4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학살이 벌어졌을 때 나는 아홉 살이었다. 이후 몇 해가 흘러 서가에 거꾸로 꽂힌 ‘광주 사진첩’을 우연히 발견해 어른들 몰래 읽었을 때는 열두 살이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에 저항하다 곤봉과 총검, 총격에 살해된 시민들과 학생들의 사진들이 실려 있는, 당시 정권의 철저한 언론 통제로 인해 왜곡된 진실을 증거하기 위해 유족들과 생존자들이 비밀리에 제작해 유통한 책이었다. 어렸던 나는 그 사진들의 정치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그 훼손된 얼굴들은 오직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으로 내 안에 새겨졌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나는 생각했다. 동시에 다른 의문도 있었다. 같은 책에 실려 있는, 총상자들에게 피를 나눠주기 위해 대학병원 앞에서 끝없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의 사진이었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두 질문이 충돌해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었다. <2024년 12월 7일, 스웨덴 한림원에서의 연설. 이하, 따로 출처 표기가 없는 모든 빨간색 글은 한강의 스웨덴 한림원 연설에서 인용>

내가 몰래 그 책을 펼친 것은, 어른들이 언제나처럼 부엌에 모여 앉아 아홉시 뉴스를 보고 있던 밤이었다. 마지막 장까지 책장을 넘겨, 총검으로 깊게 내리그어 으깨어진 여자애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을 기억한다.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다.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199P> 

열두 살에 그 사진첩을 본 이후 품게 된 나의 의문들은 이런 것이었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감수성 예민한 어린 한강의 눈에 들어온 사진첩의 사진들은 그녀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어린 한강의 내면에서 이 두 가지 질문이 충돌하였고, 그녀는 이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긴 탐색의 길을 걸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자행하는 거대한 폭력에 몸서리치면서, 한강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서워졌다. 그리고 자기자신 또한 인간이라는 사실이 무서워졌다. 어떻게 하면 모든 폭력으로부터 결백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모든 생명체는 살기 위해 다른 생명체를 먹어야 한다. 폭력으로부터 완벽히 결백한 존재를 꿈꾼 한강 입장에서는, 육식 뿐만 아니라 채식마저도 하나의 폭력으로 다가왔다. 식물도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룬다.

 세번째 장편소설인  『채식주의자』를 쓰던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나는 그렇게 몇 개의 고통스러운 질문들 안에서 머물고 있었다.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걸 위해 더이상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육식을 거부하고, 종내에는 스스로 식물이 되었다고 믿으며 물 외의 어떤 것도 먹으려 하지 않는 여주인공 영혜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매 순간 죽음에 가까워지는 아이러니 안에 있다. 사실상 두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영혜와 인혜 자매는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악몽과 부서짐의 순간들을 통과해 마침내 함께 있다. 이 소설의 세계 속에서 영혜가 끝까지 살아 있기를 바랐으므로 마지막 장면은 앰뷸런스 안이다. 타오르는 초록의 불꽃 같은 나무들 사이로 구급차는 달리고, 깨어 있는 언니는 뚫어지게 창밖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이 소설 전체가 그렇게 질문의 상태에 놓여 있다. 응시하고 저항하며. 대답을 기다리며. 

 살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체를 희생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한강은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른다. 나는 사진첩에서 보았던 그 소름끼치는 폭력에서 완전히 자유롭고 싶다. 완전히 결백하고 싶다. 그러나 그러자면 죽음 밖에 남지 않는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는 것인가? 한강은 그렇게 응시하고 저항한다. 대답을 기다리며.

 그 다음의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는 이 질문들에서 더 나아간다.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삶과 세계를 거부할 수는 없다. 우리는 결국 식물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정체와 이탤릭체의 문장들이 충돌하며 흔들리는 미스터리 형식의 이 소설에서, 오랫동안 죽음의 그림자와 싸워왔던 여주인공은 친구의 돌연한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분투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죽음과 폭력으로부터 온힘을 다해 배로 기어나오는 그녀의 모습을 쓰며 나는 질문하고 있었다. 마침내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지 않는가? 생명으로 진실을 증거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삶 쪽으로 바람이 분다, 가라, 기어가라, 기어가라, 어떻게든지 가라. 한강은 삶과 세계를 껴안고 싶었다. 폭력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인간과 세상을 온 몸으로 껴안고 싶었다. 구원을 얻기 위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기 위해 인간의 존엄을 향해 나아가고 싶었다. 그러자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지점이 그녀에게 있었다. 그녀의 영혼에 깊은 충격을 주었던 5.18 이었다.

 한강은 900여명의 5.18 증언자들의 증언을 모은 책을 읽었고, 다른 시간, 다른 공간, 인류 역사에 있었던 학살들에 대한 탐색으로 범위를 넓혀갔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과거를 재조명하고, 나아가 과거를 도울 수 있을까? 이러한 작업을 통해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을까?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자료를 읽을수록 이 질문들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는 듯했다. 인간성의 가장 어두운 부분들을 지속적으로 접하며, 오래 전에 금이 갔다고 생각했던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마저 깨어지고 부서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쓰는 일을 더이상 진척할 수 없겠다고 거의 체념했을 때 한 젊은 야학 교사의 일기를 읽었다. 1980년 오월 당시 광주에서 군인들이 잠시 물러간 뒤 열흘 동안 이루어졌던 시민자치의 절대공동체에 참여했으며, 군인들이 되돌아오기로 예고된 새벽까지 도청 옆 YWCA에 남아 있다 살해되었던, 수줍은 성격의 조용한 사람이었다는 박용준은 마지막 밤에 이렇게 썼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 문장들을 읽은 순간, 이 소설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벼락처럼 알게 되었다. 두 개의 질문을 이렇게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그렇다. 현재가 과거를 돕는 것이 아니다. 과거가 현재를 돕는 것이다.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하는 것이다. 12.3 비상계엄 소식을 듣자마자 여의도 국회로 뛰쳐나간 사람들… 과거가 현재를 도왔다. 무장한 계엄군을 맞닥뜨리면서도 맨몸으로 막아낸 그들의 용기…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했다. 그날 밤,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이유로 여의도로 달려갈 생각을 하지 못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들에게 감사했다. 죽은 자와 산 자 모두에게. 

 세상의 폭력과 아름다움 사이.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 그 길을 건너기 위해서는 죽은 자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열두 살에 그 사진첩을 본 이후 품게 된 나의 의문들은 이런 것이었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에서, 두 벼랑 사이를 잇는 불가능한 허공의 길을 건너려면 죽은 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어린 동호가 어머니의 손을 힘껏 끌고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걸었던 것처럼.

그렇게 『소년이 온다』를 완성해 마침내 출간한 2014년 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느꼈다고 고백해온 고통이었다. 내가 이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느낀 고통과,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느꼈다고 말하는 고통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생각해야만 했다. 그 고통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인간성을 믿고자 하기에, 그 믿음이 흔들릴 때 자신이 파괴되는 것을 느끼는 것일까? 우리는 인간을 사랑하고자 하기에, 그 사랑이 부서질 때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사랑에서 고통이 생겨나고, 어떤 고통은 사랑의 증거인 것일까? 

 한강은 묻는다. 인간을 사랑하고자 하기에, 세상을 사랑하고자 하기에, 폭력성의 목도로 큰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닐까? 결국 『소년이 온다』를 읽으며 고통받는 원인은, 폭력을 반복해온 인간의 역사를 보며 인간성에 대해 절망하는 원인은, 사랑 때문이 아닐까? 

 어떤 고통은 사랑의 증거인 것일까?

 한강은 최신작인 『작별하지 않는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친구인 경하와 인선이 촛불을 넘겼다가 다시 건네받듯 함께 끌고 가는 소설이지만, 그들과 연결되어 있는 진짜 주인공은 인선의 어머니인 정심이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뒤, 사랑하는 사람의 뼈 한 조각이라도 찾아내 장례를 치르고자 싸워온 사람. 애도를 종결하지 않는 사람. 고통을 품고 망각에 맞서는 사람. 작별하지 않는 사람. 평생에 걸쳐 고통과 사랑이 같은 밀도와 온도로 끓고 있던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며 나는 묻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가 우리의 한계인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는 끝내 인간으로 남는 것인가?

 사랑이 있기에 고통이 있는 것일까? 그렇기에 이 작품의 주인공 정심은 평생에 걸쳐 고통과 사랑이 같은 밀도와 온도로 끓고 있던 것인가? 그렇기에 그녀는 그러한 고통에 대해 작별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인가? 

 지난해 1월 낡은 구두 상자에서 찾아낸 중철 제본에서, 1979년 4월의 나는 두 개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었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사랑은 무얼까?

 한편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2021년 가을까지, 나는 줄곧 다음의 두 질문이 나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왔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이 두 질문 사이의 긴장과 내적 투쟁이 내 글쓰기를 밀고 온 동력이었다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첫 장편소설부터 최근의 장편소설까지 내 질문들의 국면은 계속해서 변하며 앞으로 나아갔지만, 이 질문들만은 변하지 않은 일관된 것이었다고. 그러나 이삼 년 전부터 그 생각을 의심하게 되었다. 정말 나는 2014년 봄 『소년이 온다』를 출간하고 난 뒤에야 처음으로 사랑에 대해- 우리를 연결하는 고통에 대해- 질문했던 것일까? 첫 소설부터 최근의 소설까지, 어쩌면 내 모든 질문들의 가장 깊은 겹은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것이 내 삶의 가장 오래고 근원적인 배음이었던 것은 아닐까?

 결국 한강은 사랑으로 나아간다. 아니, 애초부터 이 모든 탐색의 기저에는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자각한다. 2023년 1월 이사를 위해 창고를 정리하던 한강은 어린 시절 자신이 썼던 시 한 편을 발견한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일기장들과 그 책자를 원래대로 구두 상자 안에 포개어 넣고 뚜껑을 덮기 전, 이 시가 적힌 면을 휴대폰으로 찍어두었다. 그 여덟 살 아이가 사용한 단어 몇 개가 지금의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뛰는 가슴 속 내 심장.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 그걸 잇는 금(金)실- 빛을 내는 실. 

 그리고 사랑은 생명과 겹쳐진다. 사랑도 생명도 따뜻한 연결이다. 곧 금(金)실이다.

 소설을 쓰는 동안 사용했던 몇 권의 공책들에 나는 이런 메모를 했다. 

 생명은 살고자 한다. 생명은 따뜻하다.
 죽는다는 건 차가워지는 것. 얼굴에 쌓인 눈이 녹지 않는 것.
 죽인다는 것은 차갑게 만드는 것.
 역사 속에서의 인간과 우주 속에서의 인간.
 바람과 해류. 전 세계를 잇는 물과 바람의 순환.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어 있다, 부디.

 한강에게 생명이란 무엇인가?

 어떠한 따뜻함. 온기. 

 폭력에 의해 싸늘하게 식어버린 시체가 아닌, 

 체온의 따뜻함.

 그리고 연결. 

 한강의 폭력에 대한 혐오는 인간에 대한 혐오로 이어졌고, 자기자신 역시 인간이라는 사실은 그녀를 절망케 했다. 『채식주의자』에서 그녀는 절규했다. 결백해지려면, 구원되려면,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죽어야 하는 것인가? 구원은 생명이 아닌 죽음에 있는 것인가?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한강은, 그럼에도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명으로서 진실을 증거해야 한다고, 삶 쪽으로 바람이 부니 기어서라도 가라고 외친다. 이후, 한강은 『소년이 온다』에서, 그녀를 절망케 했던 인간의 거대한 폭력에 맞선, 인간의 존엄성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흰』에서 한강은 밝은 것. 밝고, 눈부시고 아무리 더럽히려고 해도 더렵혀지지 않는, 인간의 그런 어떤 지점, 투명함 을 그린다. 그리고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그녀는 결국 사랑에 가닿는다. 그리고 그 사랑은 생명이다. 구원은 죽음이 아닌 생명이다. 따뜻하고, 서로 연결되는. 

 2011년 『희랍어 시간』을 쓴 다음 더 밝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잘 안됐어요. 왜 그럴까 하고 깊이 파고들었더니, 제가 만 아홉살에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광주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란 걸 알았어요. 그렇게 『소년이 온다』를 썼고, 밀고 나아갔더니 제주 4·3 사건까지 간 것이지요. 의도적으로 기획한 건 아니었어요. 앞으로는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써 보려고 해요. 물론 써지는 대로 쓰겠지만, 제 마음은 겨울에서 봄으로 가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서울신문, 2023년 11월 5일 기사>


‘장회익의 자연철학’에서 생명은 매우 중요한 논의 주제로 다루어진다. 

 그러던 가운데 연구라는 구실로 일 년 간의 말미를 얻어 미국 어느 곳에서 지내던 1977년 어느 날, 내 머릿속에는 마치 어떤 영감과 같은 하나의 환상이 떠올랐다. 광막한 대지 위에 태양이 내려 쪼이자 서서히 지표면으로부터 마치도 아지랑이와 같이 꿈틀꿈틀 피어오르는 그 무엇이 보였다. 그러다가 이것이 서서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형되면서 살아 있는 생태계 전체의 모습이 그 안에 펼쳐지고 있었다. “아, 바로 이것이구나!” 지나간 40억 년의 역사가 짧은 순간에 재연되면서 살아 있는 전체의 모습이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이었다. 바로 ‘생명’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그러고는 이 모습의 바탕에 흐르는 물리적 필연이 내 머릿속을 스쳐가고 있었다. 이는 곧 생명이란 우연의 소산이 아니라 물리적 필연 위에 솟아나는 것이며, 이 필연을 밝히는 과정에서 생명의 바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으리라는 느낌이었다. 이와 함께 여기서 물리적 필연을 이루는 일차적 동인이 바로 태양의 에너지임을 직감했다. 화분에 물을 주니 화초가 피어나듯이, 지구라는 물질적 바탕 위에 태양의 에너지가 내려 쏘이니 생명이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장회익,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추수밭, 2019, 382-383P>

 한강의 생명장회익의 생명. 분명 서로 맞닿는 지점이 있다. 그 지점은 바로 연결이다.  

 장회익은 생명의 단위에 주목한다. 개체만으로는 생명의 유지가 불가능하다. 여타 다른 존재들과 함께 할 때만이 생명의 유지가 가능하다. 생명의 진정한 의미를 담기 위해서는 기존의 통상적인 개체적 생명 단위를 확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생명이란 무엇인가?’ 하는 주제에 대해 글을 쓰고 싶었지만, 생각을 바꾸어 ‘생명의 단위’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생명의 성격을 ‘단위’라고 하는 하나의 새로운 관점에서 논의해보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의의 과정을 통해 나는 생명의 진정한 단위를 우리가 흔히 생명체라 부르는 개체생명들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족적 성격을 지닌 ‘온생명(global life)’에서 찾아야 한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그동안 우리가 ‘생명’이라고 보았던 개체생명 곧 ‘낱생명’들은 온생명의 나머지 부분이 함께 할 때라야 비로소 생명 노릇을 할 수 있는 조건부적 단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생명의 모습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생명현상을 이루어내게 될 이 전체를 하나의 실체로 파악할 때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실체는 생명현상이 자족적으로 유지되기 위한 최소의 단위이기도 한데, 이것이 바로 앞에서 우리가 말한 ‘온생명’에 해당하는 것이다. <같은 책, 383-386P>

 한강의 생명과 장회익의 생명 모두 핵심적인 것은 연결이다.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 그걸 잇는 금(金)실- 빛을 내는 실. 
 생명은 살고자 한다. 생명은 따뜻하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어 있다, 부디.<한강의 생명>

 진정한 생명의 모습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생명현상을 이루어내게 될 이 전체를 하나의 실체로 파악할 때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장회익의 생명>

 장회익의 생명에서는 금실이 물질 및 에너지 교환이라는 모습으로 꿰어져 있다. 물질 및 에너지 교환을 통한 부엔트로피의 증가(자유에너지의 증가). 모든 생명체는 금실을 통한 서로 간의 연결이 없으면 고도의 정교한 질서가 해체되어 무질서하게 흩어진다. 무질서도(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항하려면 서로 간의 연결이 필수적이다. 연결을 통해서만 국소적인 무질서도 감소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연결의 정점에는 태양에너지가 있다. 태양을 정점으로 한 서로 간의 따뜻한 연결 없이는 어떤 생명체도 자신의 물질적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 자신의 체온을, 자신의 따뜻함을 유지할 수 없다.

 이후 이 소설(소년이 온다)을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 이따금 그 묘지에 다시 찾아갔는데, 이상하게도 갈 때마다 날이 맑았다. 눈을 감으면 태양의 주황빛이 눈꺼풀 안쪽에 가득 찼다. 그것이 생명의 빛이라고 나는 느꼈다. 말할 수 없이 따스한 빛과 공기가 내 몸을 에워싸고 있다고. 

 한강의 생명은 문학적으로 표현되고 장회익의 생명은 과학적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이 둘은 따뜻한 연결이라는 금실에서 서로 만난다. 문학과 과학이 교차되는 지점이다.


 불교의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삼성설을 말한다. 삼성설(三性說)이란 세 가지의 성질을 의미하는데,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을 가리킨다.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은 두루 분별하여 집착된 성질을 의미한다. 따뜻한 연결이 실종된, 각 개체들이 차갑고 견고한 경계를 그리는 것을 묘사한다. 의타기성(依他起性)은 다른 것에 의존하여 발생하는 성질을 의미하며, 상호의존해 있는 주변과의 따뜻한 연결감 속에서의 부드러운 경계를 가리킨다. 연결감이 점점 강렬해지면, 자신이 전체와 분리된 한 개체라는 관념이 느슨해지다가 경계선이 완전히 사라지는 영역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불교 유식학에서는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 부른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변계소집성이 강할수록 자신이 그리는 경계선은 차갑고 견고하며 경직된다. 자신과 다른 무언가에 대해 배타적이 되며, 공존하려 하기보다는 억압하려 하고,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며, 사회 전체를 하나의 색깔로 획일화시키려 든다. 이와 달리, 개인이나 집단에서 의타기성(상호의존성)이 강할수록 주변과의 경계선은 부드러워지며, 자신과 다른 무언가에 대해 보다 포용적이 된다. 적대적 억압이 아닌 화합적 공존의 방향을 지향하게 된다. 

 <장회익의 자연철학>에서의 낱생명 및 온생명은 불교 유식학의 변계소집성 및 의타기성과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유식학에서의 의타기성은 온생명처럼 그 연결 범위를 태양계로 한정하지 않지만, 독립된 개체 단위가 아닌 연결된 더 큰 단위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온생명과 통한다. 변계소집적 태도를 자신을 낱생명에만 국한시키는 인식에 기반한 태도, 즉 낱생명적 태도라 지칭할 수 있을까? 의타기적 태도를 자신이 낱생명이면서 동시에 온생명이기도 하다는 인식에 기반한 태도, 즉 온생명적 태도라 지칭할 수 있을까?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일까?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자연적으로, 낱생명적 태도가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낱생명 일변도의 태도가 개인 단위로 형성된 낱생명적 개인, 그리고 집단 단위로 형성된 낱생명적 집단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한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낱생명적 태도가 강화되면, 민주주의의 위기가 찾아온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각자 자신만이 생각과 의견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공동체의 주요 문제들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서로 간의 대화와 타협이 필요하다.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표결하고 내 의견이 관철되지 않았더라도 수용한다. 그리고 다음 표결 또는 선거 때까지 더 많은 사람들을 설득한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낱생명적 태도가 강화되어 낱생명적 정치집단들이 정치를 지배하면 아고라가 콜로세움으로 변하게 된다. 아고라는 상호존중이라는 토양 위에서 각 정당과 진영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바탕으로 토론하고 논쟁하며, 합의되지 않으면 다수결에 따르는 정치 문화이다. 이에 비해, 상대방을 적으로 간주하고 정치를 전쟁으로 여기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에 따른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이기고 지는 문제로 모든 것을 환원시키는 정치 문화가 콜로세움이다. 일종의 전시 상황이기 때문에 콜로세움에서는 상대 편에 대해서는 무조건 공격하고 우리 편은 무조건 감싸는 맹목성이 지배한다. 특히 정당의 강성 지지층들을 중심으로 이런 문화가 자리잡게 되며, 자신 진영이 갖는 비민주주의적 행태에 대한 내부 쓴소리는 내부총질로 규정하고 배신자로 낙인 찍으며 좌표를 찍어 공격하면서 내부의 색깔을 하나로 만들어 버린다. 이 때문에 다채로움이 공존하는 사회가 아닌, 흑백으로 나뉜 사회가 된다. 이렇게 상대방을 적으로 인식하고 대화와 타협이 사라지며 제도적 남용이 수시로 일어날 때 민주주의는 기반이 흔들리게 된다. 그리고 상대방을 실제 물리적 폭력을 사용하여 제압, 제거하려 할 때 민주주의는 완전히 붕괴된다.

 한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낱생명적 태도가 강화되면, 승자독식 사회가 된다. 경제적 보상이 지나치게 한쪽으로 편중되고, 보상 획득을 위한 서로 간의 경쟁이 치열해진다. 한국 사회는 대기업 정규직, 전문직비정규직, 중소기업 정규직 간의 사회경제적 보상 차이가 크게 벌어져 있으며, 이 둘 간에는 생애 주기 전반에 걸쳐 삶의 질에 큰 차이가 난다. 고용노동부의 고용노동통계에 따르면 2023년 대기업(300인 이상 사업장) 대비 중소기업 임금 비율은 53.6%로, 중소기업 임금수준은 대기업의 절반 정도이다. 12 대 88의 사회라 불리는 이러한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는 결코 포용적인, 온생명적인 구조가 아니다. 낱생명적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1차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경쟁은 어릴 때부터 치열해지며, 이로 인해 사교육 비용이 치솟고 공교육은 약화된다. 부모의 소득불평등이 사교육 불평등으로 이어지며, 이는 곧 기회의 불평등으로 귀결된다. 2024년 8월 한국은행이 발표한 <입시경쟁 과열로 인한 사회문제와 대응방안> 리포트에서는, 입시경쟁 과열은 사교육 부담 및 교육기회 불평등 심화, 사회역동성 저하, 저출산 및 수도권 인구집중, 학생의 정서불안과 낮은 교육성과 등 우리나라의 구조적 사회문제를 유발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리포트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23년까지 고교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연간 4.4%씩 증가하였고, 사교육을 포함한 교육비는 2023년 가계소비지출의 22.5%로 가장 큰 부담 항목이었다. 소득수준 및 거주지역에 따른 사교육비 지출의 차이 및 이로 인한 교육기회 불평등의 악화는, 사회경제적 지위의 대물림 심화와 교육적 다양성 부족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사회적으로 낱생명적 태도가 강화되면, 낱생명적 사회집단 간의 갈등과 반목이 극심해진다. 세대, 젠더, 지역, 종교, 인종, 문화, 이념의 차이에 따른 사회적 갈등은 사회 혼란을 부추기고 극우 또는 극좌의 선전, 선동에 취약해지는 환경을 조성한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나치즘과 파시즘이 득세했던 주요 배경에는 1차 세계대전 이후의 극심한 사회 혼란이 있었다. 나치즘과 파시즘은 배타적 자기확장에만 경도되어 있는, 낱생명 일변도의 이념이다. 2차 세계대전 때 자행된 나치의 유대인에 대한 홀로코스트, 1994년 르완다 후투족이 투치족에 벌인 대량 학살, 1990년대 초중반 세르비아가 보스니아 무슬림들에 행한 인종청소는, 낱생명적 태도의 극단적 형태들이다.

 낱생명적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에서는 각자도생과 능력주의가 위력을 발휘하며 사회적 연대는 약화된다. 사회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자신이 이룬 성과를 순전히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으로 여기고 당연시할 때, 경쟁에서 밀린 사람들을 무시하게 된다. 경쟁에서 밀린 사람들은, 능력 부족으로 뒤로 밀린 것에 대해 열패감과 열등감을 느끼면서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스스로 무시한다. 그러면서 일의 시장적 가치와 일의 존엄성이 등치화되어 버린다. 마이클 샌델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기에, 그리고 그런 의존을 인식하기에 우리의 집합적 복지에 대한 기여도를 평가할 까닭이 있는 것이다. 이는 시민들이 “우리는 모두 함께입니다”라는 말을 위기 때에 건성으로 내뱉는 말로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믿고 할 만큼 건실한 공동체 의식을 필요로 한다. 그런 말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대한 믿음이 가는 묘사여야 한다.

 지난 40년 동안, 시장주도적 세계화와 능력주의적 성공관은 힘을 합쳐셔 이런 도덕적 유대관계를 뜯어내 버렸다. 그들이 뿌려 놓은 글로벌 보급 체인, 자본의 흐름, 코스모폴리탄적인 정체성은 우리가 동료 시민들에게 덜 의존적이 되고, 서로의 일에 덜 감사하게 되고, 연대하자는 주장에 덜 호응하게 되도록 했다.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은 우리 성공은 오로지 우리가 이룬 것이라고 가르쳤고, 그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느낌을 잃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유대관계의 상실로 빚어진 분노의 회오리 속에 있다. 일의 존엄성을 회복함으로써 우리는 능력의 시대가 풀어버린 사회적 연대의 끈을 다시 매도록 해야 한다…

 ‘사람들은 시장이 각자의 재능에 따라 뭐든 주는 대로 받을 자격이 있다’는 능력주의적 신념은, 연대를 거의 불가능한 프로젝트로 만든다. 대체 왜 성공한 사람들이 보다 덜 성공한 사회구성원들에게 뭔가를 해줘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설령 죽도록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자수성가적 존재나 자기충족적 존재가 아님을 깨닫느냐에 달려 있다.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함규진 옮김, 와이즈베리, 2020, 330-343P>

 낱생명적 자유는 자유지상주의이며, 온생명적 자기 정체성이 간과되기에 사회적 연대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하지만 온생명적 자유는 이와 다르다. 개개인(낱생명들)의 자유를 중시하면서도, 각 존재가 단절적으로 존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따뜻한 연대에 손을 내민다. 온생명적 정체성은 결코 집단주의적이거나 전체주의적이지 않다. 오히려 반대이다. 온생명적 태도는 각 낱생명들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각자 자신만의 꽃이 활짝 피어날 수 있도록 서로 돕는 사회를 지향한다. 이에 비해 낱생명 일변도의 정체성이 개인을 넘어 집단 단위로 형성되면 전체주의가 된다. 개인은 전체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간주되며, 개개인의 다양성은 억압된다. 이러한 낱생명적 집단은, 낱생명적 개인들과 밀접히 연관된다. 낱생명적 태도는 외로움과 소외감을 불러 일으키기 쉬우며, 에리히 프롬이 지적했듯이 이러한 개인들은 자유로부터 도피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군중 속의 고독을 벗어나 집단 내에서의 강력한 소속감을 느끼고자 하며, 외부에 혐오의 대상을 설정하면서 내부 결속력을 높이는 방식을 택하기 쉽다. 그리하여 특정 인종, 특정 종교, 특정 세대, 특정 젠더, 특정 문화 등에 대한 집단적 혐오를 바탕으로 한 낱생명 일변도의 집단적 정체성이 형성된다. 그리고 다채로운 색깔의 세계를 흑백의 세계로 바꾸어 버린다. 내 편 아니면 적이다. 화면이 컬러에서 흑백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낱생명 일변도의 사회에서는 이분법적인 극단적 선전, 선동이 득세하게 된다.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사유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위중한 내란 범죄임에도 왜 오히려 그때보다 탄핵 반대 여론이 더 높은가? 박근혜 전 대통령 당시에는 탄핵 찬성 여론이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물론 탄핵 찬성 비율이 더 높긴 하지만 그때만큼 압도적이지 않다. 이에 대해 많은 언론에서 여러 분석들을 내놓고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당시에 비해 훨씬 심화된 집단 단위의 낱생명적 태도가 큰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당시보다 훨씬 심화된 정치사회적 양극화 때문이 아닐까? 전쟁 상태에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하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쌓아올린 절차적 민주주의를 한순간에 무너뜨리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고 해도, 그런 것보다는 어떻게든 상대방을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민주주의 vs 군사독재의 문제가 진보 vs 보수의 문제로, 즉 민주주의 존립에 관한 문제진영간 전쟁의 문제로 프레임 전환이 일정 부분 이루어졌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진정한 보수라면 이 체제 자체를 무너뜨리고자 한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누구보다 앞장서서 비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콜로세움의 정치 환경에서는 보수의 가치인 자유민주주의 수호보다는 자기 진영 비호와 상대 진영 공격이 우선이라는 인식이 더 힘을 받게 된다.

 극우와 극좌는 집단 단위의 낱생명 일변도라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서로 반대편에 있는 것 같지만, 혐오에 기반하고 있고 다름을 용납하지 않으며 전체주의를 강요한다는 점에서 서로 닮아 있다. 서로는 서로의 거울상이다. 극우는 주로 사회적 약자를 집단적 혐오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내부 결속력을 강화한다. 소수민족이나 이민자, 여성 등을 타겟으로 삼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또한 반공이념을 기형적으로 적용하여 자신에 비판적이면 반국가세력이라는 딱지를 붙여 억압한다. 극좌는 주로 사회 기득권층을 혐오 대상으로 설정한다. 문제는 사회 전복을 통해 새로운 정권이 수립된 후에도 그 혐오와 배제의 방식이 유지된다는 점이다. 혁명 엘리트들은 새로운 사회 기득권층이 되어 기존의 문제를 답습하거나 더욱 극단화한다. 이것이 왕정이나 독재정권을 타파하고 민주주의를 수립한 시민혁명과의 차이점이다. 시민혁명 역시 왕과 귀족이라는 사회 기득권층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지만, 극좌 정권과 달리 구체제의 독재구조가 무력화되고 시민들의 정치적 자유와 평등이 확장되며 다양성이 인정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우리나라의 4.19 혁명, 5.18 광주 민주화운동. 6.10 항쟁 등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극좌 정권의 경우 혁명 완성이라는 미명 하에 이념적 순수성을 강조하면서 개인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독재에 비판적이면 반체제 인사라는 딱지를 붙여 숙청한다. 소련의 스탈린은 1930년대 대숙청 기간 동안, 자신에게 비판적인 세력들 약 100만명을 반체제 인사라는 명목으로 처형했다.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한 사람들까지 합하면 희생자는 이보다 훨씬 늘어난다. 중국의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 실패 이후 1967~1977년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홍위병과 인민해방군을 동원하여 반혁명분자라는 죄목으로 수십만에서 수백만명을 처형했다.  

 어느 사회나 극우와 극좌는 있게 마련이다. 극단적 이념이나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제도권 밖에 주변화 되어 있으면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권력의 중심부에 있는 대통령이 극우 유튜브에 매몰되어 폭력적 계엄을 선포하고 부정선거 음모론을 공공연하게 주장하며, 제도권 내의 여당이 정치적 이익을 위해 계엄옹호 논리와 부정선거 음모론을 조장하거나 방조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정국 때와는 전혀 다르게, 윤석열 측 및 극우 유튜버들의 선전, 선동에 의한 극우 논리의 확산으로 극심한 사회 혼란이 나타나고 있다.

 인간은 개인적, 사회적 존재인 동시에 자연적 존재이기도 하다. 즉, 인간은 자연의 여러 종(種)들 중 하나이다. 자연적으로 낱생명적 태도가 강화되면, 우리 생명의 중요한 터전인 지구에 대한 고려 없이 무분별한 개발에 몰두하게 한다. 낱생명적 인류집단은 그리하여 인간이라는 종 자체의 생존이 위협받는 기후위기 상황을 자초했다.


 새로운 문명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한강의 생명과 장회익의 생명은 이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개체에서 관계로.

 소유에서 존재로.

 성장에서 성숙으로. 

 즉,

 낱생명에서 온생명으로.

 인간은 개인적 존재이자, 사회적 존재이고, 자연적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개인적 존재로서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미래를 꿈꾼다. 또한 사회적 존재로서 사회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바라보며, 바람직한 공동체의 모습을 고민한다. 그리고 자연적 존재로서 자연 안에서 인간을 바라보고, 종(種)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성찰한다. 이 모든 차원에 온생명적 태도를 적용할 수 있으며, 낱생명이면서 동시에 온생명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설정할 수 있다.

 온생명적 태도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까? 따뜻한 연결이라는 기반 위에서, 개인적, 사회적, 자연적 존재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형성해 나간다. 각자의 서로 다른 의견, 개성, 자유를 존중하고, 자신만의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서로 힘을 보태며, 주변에 대한 포용적 연대를 지향한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다양성을 말살하는 거대한 폭력에 대해서는 단호히 저항한다. 이러한 온생명적 태도가 확산될 수 있을까? 인류 문명이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 

 낱생명적 태도에서 온생명적 태도로의 거대한 전환. 이는 쉬운 과제가 아니다. 단순히 개개인의 온생명적 자각이 부족하다는 지적만으로는 부족하다. 개인의 자각만을 강조하면, 온생명적 자각이 부족한 사람들을 철학적,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데 그칠 위험이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접근 뿐만 아니라, 온생명적 자각으로의 전환이 힘을 받기 어려운 사회구조적 환경에도 주목해야 한다. 사회경제적 양극화와 심한 경쟁, 이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 각자도생의 환경은 낱생명적 태도를 강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는 순환론적이다. 온생명적 태도가 확산되면 온생명적 제도와 사회구조가 만들어진다. 또한 온생명적 사회구조 내에서는 온생명적 태도의 확산이 더 쉽게 일어난다. 결국 의식의 차원제도의 차원 모두에서 온생명으로의 전환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는, 투 트랙의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야 선순환이 가능할 것이다.

 똘레랑스는 관용적 태도를 의미한다. 똘레랑스를 파괴하는 거대한 폭력, 거대한 앵똘레랑스에, 그리고 그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에게 우리는 왜 고통을 느끼는가? 한강에 의하면 사랑이 있기에, 거대한 폭력의 목도로 고통받는다. 바로 그렇기에 저항한다. 나치에 의해 학살된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통을 느끼는 것은, 인간에 대한, 그리고 세상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한강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거대한 폭력에 저항하는 근본원인은 사랑이며, 이를 망각할 때 자칫하면 괴물과 싸우다가 스스로 괴물이 되어 버린다고. 결국, 온생명적 자각이 있기에 거대한 앵똘레랑스의 목도에 고통을 느끼고, 거대한 폭력에 단호히 저항한다.

 한강은 묻는다. 

 우리는 인간을 사랑하고자 하기에, 그 사랑이 부서질 때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사랑에서 고통이 생겨나고, 어떤 고통은 사랑의 증거인 것일까?
 우리는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가 우리의 한계인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는 끝내 인간으로 남는 것인가?

 역사 속에서의 인간과 우주 속에서의 인간.
 바람과 해류. 전 세계를 잇는 물과 바람의 순환.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어 있다, 부디.

– 박용국 (녹색아카데미)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