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장 회 익
과학자들에게 잊힌 이름이 있다면 그가 이마누엘 칸트이다. 어느 과학 교과서에도 칸트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사실 칸트의 시대에는 과학이라는 말이 오늘날처럼 쓰이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말하는 과학과 철학 사이의 경계도 없었다. 그는 자기의 학문을 철학이라고도 하고 과학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그를 철학자, 특히 형이상학자로 기억하며, 그 형이상학이야말로 과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생각한다.
칸트는 1724년 4월 22일, 당시 동부 프러시아의 항구도시 쾨니히베르크에서 태어나 일생을 그곳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고 산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80회 생일을 두어 달 앞둔 1804년 2월 12일 같은 도시에서 서거했다. 참고로 그를 앞서 간 거장 뉴턴(1642-1727)과 라이프니츠(1646-1716)는 그가 갓 태어났거나 태어나기 직전까지 살았던 사람들이다.
많은 독창적 학자의 길이 그러하듯 칸트의 학문 여정 또한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1740년에 쾨니히베르크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 자연과학 등을 공부하고 1744년에 졸업했으나, 당시의 관례대로 유명한 교수의 뒤를 이어 라틴어 논문을 쓰고 또 주위 교수들의 인정을 받아 대학 교수가 되는 전형적인 학자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생각을 독자적으로 펼치는, 그리하여 가까운 교수들의 학설과 별 관련이 없는 자연과학(연소와 전기에 관한) 논문을 독일어로 발표하고는 바로 대학을 떠나 이 후 11년간을 개인 가정교사로 보내며 자기 나름의 학습에만 전념했다. 1755년 철학에서의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고 뒤늦게 대학에 돌아와서도 정식 봉급이 지급되지 않는 시간강사(Privatdozent) 자리를 얻어 다년간 논리학, 형이상학, 윤리학 뿐 아니라 물리학, 화학, 그리고 오늘날 지구과학이라 불리는 물리지리학(physical geography), 군사 축성학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과목들을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강의했다. 실제로 1755년에 발표한 그의 책 “보편적 자연사와 천체이론”(Universal Natural History and Theory of the Heavens)은 이 방면의 독창적 이론이며, 이 안에는 후에 라플라스가 완성한 “태양계 기원의 성운설”의 주된 내용이 담겨 있기도 하다. 그리고 다시 11년이 지난 1766에 비로소 그 대학의 도서관에 부사서(sublibrarian) 자리를 얻음으로써 처음으로 봉급을 받는 대학 고용원이 되었고, 나이 50에 가까운 1770년에 이르러서야 정식으로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논리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 그는 “감성과 이성의 한계”라는 주제로 저술을 시작하여 거의 10년에 걸친 작업 끝에 그의 주저인 “순수이성비판”(Critique of Pure Reason)을 완성했다. 이 책은 결국 1781년 봄 칸트의 57번 째 생일 한 달 전에 출간되었는데, 이 책이 보여주는 창의성과 그 간 들어간 공력을 생각하여 칸트는 최소한 철학자들 사이에서라도 즉각적인 반응이 있을 것을 기대했지만 그는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거의 일 이년이 지나도록 그가 내심으로 존경했던 그래서 즐겨 읽어줄 것으로 기대했던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로지 싸늘한 무반응 혹은 비판적 언급만을 받았을 뿐이다.
결국 5년이 지나서야 그의 작업이 빛을 보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단순한 수용의 형태로서가 아니라 진지한 논의의 대상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1786년 예나 대학의 철학자 레오나드 라인홀트(Leonard Reinhold)에 의해 “칸트철학에 관한 글들(Letters on Kantian Philosophy)”이란 제호의 시리즈 글들이 당시에 널리 읽히던 철학 저널에 연재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호의적인 반응뿐 아니라 비판적인 반응과 함께 상당한 오해를 수반한 내용들도 많았다. 이를 간파한 칸트는 주로 오해를 해명하기 위해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개정판을 준비했고, 초판 출간 6년만인 1787년에 정식 개정판을 출간했다. (지금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인용문들의 출처를 예컨대 A144/B183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 관례인데, 이는 초판 144쪽과 개정판 183쪽에 있는 내용이라는 의미이다.)
이와 함께 칸트는 그 부록에 실천이성에 관한 글도 실으리라 준비를 했는데, 그 내용이 이미 너무 방대하여 “실천이성비판”이라는 독립된 책으로 출간했고, 곧 이어 또 하나의 과제로서 “판단력비판”이란 책을 완성하여 이른바 칸트의 “비판 3부작”을 완성했다.
칸트의 이 작품들에 대해서는 너무도 많은 논의들이 이루어져 왔고 수많은 연구논문들이 쏟아져 나왔기에 여기서는 내가 보는 다소 특이한 관점 하나만을 제시하려 한다. 즉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뉴턴의 고전역학에 대한 철학적 수용이라는 사실이다. 엄밀히 말하면 거의 같은 시기인 1786년에 출간된 칸트의 다른 저서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Metaphysical Foundations of Natural Science)가 여기에 더 가까운 것이지만, 후자는 그 내용을 더 구체화한 것이고 그 근본정신은 순수이성비판에 이미 담겨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순수이성비판”은 고전역학의 내용은 완전히 감추고 있으면서 그것을 담아낼 철학적 바탕만 제시한 것이고,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는 과학의 내용이 이 그릇에 어떻게 담기는지를 명시적으로 제시한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인류지성사의 큰 흐름에서 보자면 인류 최초의 합법칙적 자연이해에 해당하는 고전역학이 등장한 이래 이를 바탕으로, 이를 수용할 인간의 이성 곧 지적구도가 어떠한 모습을 띠고 있는가를 의식적으로 체계화한 작업이 “순수이성비판”이라 할 수 있다. 인류는 고전역학을 통해 자연의 이해에 크게 다가섰지만 칸트철학은 이를 통해 인간이 자신의 지적구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뉴턴의 고전역학이 완전한 진리일 수 없듯이 칸트의 메타이론이 또한 완전한 진리일 수 없다. 뉴턴의 고전역학이 하나의 과학이론이라 한다면 칸트의 철학은 과학에 대한 과학이론 즉 하나의 메타과학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한다. 단지 이것이 종래의 독단적(dogmatic) 형이상학의 형식을 띠고 등장했기에 여전히 형이상학이라 불렸고, 그렇기에 또 하나의 독단적 형이상학으로 비치면서 오히려 과학지성계에서 배격 또는 외면을 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그가 자신의 학문을 과학이라고 보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그가 말한 과학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과학은 절대 진리가 아니며 항상 당시 상황에서 말할 수 있는 최선의 지적 구조물에 해당하는 것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흥미로운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만일 칸트가 양자역학을 알았더라면 그는 과연 어떠한 비판철학을 만들었을까 하는 점이다. 이것은 그저 한가하게 지난 역사를 되돌려보려는 부질없는 물음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양자역학을 조금이나마 안다고 생각하는 내가 오늘의 칸트가 되어 그가 수행했던 지적 과제를 계승해보는 일이다. 그렇게 할 때 기대되는 성과는 양자역학에 대한 좀 더 투철한 이해와 더불어 인류가 상정할 수 있는 최선의 지적구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한 단계 높은 이해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