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란 무엇인가?

* 이 글은 “공간”(장회익, 2003, <우리말 철학사전>)을 요약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녹색아카데미에서는 새자연철학세미나 등 모임 진행에 맞추어 장회익선생님의 책, 논문, 칼럼, 강연 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요약한 것임을 유념해주시고, 원문은 아래 세부사항을 참고해주세요.


“공간이란 무엇인가”. 장회익. 2003. <우리말 철학사전 3> 우리사상연구소 엮음. 지식산업사. pp.65-95.

  1. 공간 개념, 무엇이 문제인가?
  2. 근대과학 이전의 공간 개념
  3. 과학적 공간 개념
    • 1) 일상적 공간 개념
    • 2) 3차원 유클리드 공간 개념
    • 3) 4차원 유클리드 공간 개념
    • 4) 4차원 비유클리드 공간
  4. 공간 개념에 대한 철학적 성찰
    • 1) 공간은 존재론적 실체인가?
    • 2) 공간의 ‘절대성’과 ‘상대성’
    • 3) 공간의 유한성과 한계성
  5. 인간의 원초적 공간지각
  6. 맺음말 – 위치 공간과 비위치 공간

1. 공간 개념, 무엇이 문제인가?

공간.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개념 중 하나인 이 개념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다른 많은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공간 개념도 유아기 때부터 경험을 통해 서서히 형성된다. 일상생활에서는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지만 좀 더 엄밀한 지식, 즉 과학에 이러한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이런 익숙한 관념의 틀을 넘어설 수 있을지 물었으며, 과학이 발전하려면 우리가 이 틀에 무의식적으로 지배당하지 않도록 기본 개념을 비판해야 한다고 하였다.

과학에는 사실에 대한 엄밀한 서술이 일차적으로 필요하다. 적절한 개념적 바탕이 되어 있어야 엄밀한 서술이 가능한데,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 속에서 만들어진 개념은 그 바탕이 되기에 적절하지 않다. 우리는 이러한 개념과 개념의 틀에 무의식적으로 지배당하고 있고 그것 자체를 의식하는 일은 별로 하지 않기 때문에 그 개념의 틀을 바꾸는 일은 매우 어렵다.

과학의 발전과정에서 인간의 공간 개념이 크게 바뀐 일은 적어도 세 번 일어났다.  첫 번째는 일상적 공간 개념에서 3차원 유클리드 공간 개념으로 바뀐 것이고, 두 번째 변화는 3차원 유클리드 공간이 시간과 함께 4차원 유클리드 공간을 이룬다고 보는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일어났으며, 이것이 다시 4차원 비유클리드 공간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세 번째 변화가 일어났다.

첫 번째 변화, 즉 3차원 유클리드 공간 개념이 정확히 언제 완성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땅의 넓이, 물체의 부피를 정확히 계량하려는 노력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공간상의 위치를 정확히 지정하는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이 개념이 형성되었으며, 공간 내 기하학적 도형들에 유클리드 기하학이 적용된다는 발견에 도달하게 되었다. 뉴턴의 고전역학이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최소한 19세기 말까지 유일한 과학적 공간 개념이 3차원 유클리드 공간 개념이었다.

두 번째 공간 개념 변화는 바로 아인슈타인(A. Einstein, 1879-1955)의 특수상대성이론이다. 그 핵심적인 내용은 3차원 유클리드 공간이 시간과 함께 4차원 유클리드 공간을 이룬다는 것으로 이는 인류 지성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혁명적 사고의 전형이다. 그러나 특수상대성이론에 함축된 이 내용을 명시적으로 밝힌 사람은 아인슈타인이 아니라 그의 대학 스승인 민코프스키(H. Minkowski, 1864-1909)였으며, 그로 인해 상대성이론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세 번째 공간 개념 변화는 여기서 다시 4차원 비유클리드 공간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다. 이 또한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1915년에 일어났다. 상상하기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공간이 휠 수 있다고 우리는 이제 흔히 말하고 있으며, 공간이 실제로 이런 성격을 가진다는 것은 현대과학에서 정설이다.
공간 개념에 대한 물음은 이러한 과학적 개념 이외에도 많다. 공간이 물리적 실체로 실재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관념 속에서 만든 사물을 파악하는 도구인가? 과학이 이러한 물음에 대해 답할 수 있는가, 과학을 넘어서는 문제인가? 공간 개념의 ‘절대성’과 ‘상대성’의 의미는 무엇인가? 공간은 ‘유한한’ 것인가, 유한하다면 그 끝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공간 개념을 구성해내는 데 있어서 인간의 감각과 두뇌의 특성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중요하다. 인간의 관념과 사고는 모두 우리의 인식기관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인식기관을 직접 고찰해서 우리의 관념과 사고를 살필 수 있는 방법을 우리는 아직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시각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단서를 찾아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공간 개념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고대 사람들은 공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먼저 살펴보자. 이들의 생각은 근대과학적인 공간 개념과 크게 다르고, 현재 우리의 일상적인 공간 개념과도 다를 수 있다. 또한 고대 사람들의 관념 중에서 어떤 것이 근대과학에 계승되었고 극복된 것은 어떠한 부분인지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2. 근대과학 이전의 공간 개념

우리는 모두가 비슷한 공간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형성되며, 잘못을 발견해 수정해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대 이전 사람들이 가졌던 공간 개념을 접하게 되면 매우 이상해 보인다. 공간은 인간이 가지는 관념의 틀 안에 놓이는 한 특징적 양상이기 때문에 초기 인류의 공간 개념이나 근대과학의 공간 개념, 우리의 일상적인 공간 개념은 모두 다를 수 밖에 없다.

초기 인류는 공간 개념과 공간 안에서 경험한 내용을 구분하지 못했다는 것이 문헌학, 고고학, 인류학 연구의 발달로 밝혀졌다. 이들은 특별한 경험과 그 경험을 겪은 특정한 장소를 서로 결부시켜 파악하고, 이것을 다시 그 장소가 가지는 특성으로 전환하였다. 그래서 각 장소는 신성한 곳, 위험한 곳, 불길한 곳, 복된 곳 등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또한 일출, 일몰, 폭풍, 홍수와 같은 천문·기상 현상들이 일어나는 방향에 주목하면서 공간의 방향성을 인식하는 바탕이 되었다. 길이, 넓이, 부피 같은 개념은 매우 실용적인 관념으로 파악하였고 실제로 많이 활용하였다. 고대 수메르인은 곡물의 양을 가지고 면적의 단위로 삼았는데, 우리말에 있는 ‘마지기'(한 말의 씨앗으로 경작할 수 있는 논이나 밭이 면적)와 매우 비슷하다.

이러한 공간 개념은 고대 희랍에 이르러서야 정식으로 철학적 논의의 주제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희랍인들은 빈 간격이라는 의미의 공간 개념을 숫자 개념과 관련하여 논의하기 시작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숫자를 신성시했고, 사물의 숫자를 헤아리기 위해서는 그 사물을 구분할 수 있어야했기 때문에 그 사이를 가르는 빈 공간 개념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피타고라스 학파는 빈 공간 자체에 대해 독자적인 개념을 만들지는 못했다. 이들이 만든 초기 공간 개념은 그 안에 담겨 있다고 생각했던 공기의 개념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공간 개념이 본격적으로 추상화되기 시작한 것은 피타코라스 학파의 아르키타스(Archytas. 434/410 BC – 360/350 BC)에 이르러서다. 아르키타스는 “세계의 끝에서 팔을 내뻗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사고실험을 했다. 그는 공간(장소)과 물질을 구분하였다. 모든 물체는 장소를 차지한다, 장소가 없으면 물질 또한 없다, 장소가 가지는 성격은 모든 것이 그 장소 안에 있고 다른 무엇 안에 있지 않은 데 있다, 공간은 물체의 경계를 설정하며 물체가 무제한으로 퍼져나가거나 줄어드는 것을 막아주는 구실을 한다, 이것이 아르키타스가 공간을 보는 시각이다.

아르키타스에게 공간은 “모든 성질이나 힘을 배제한 순수 연장(extension)이 아니라 공허(void)에 둘러싸여 압력이나 장력을 행사하는 원초적 대기와 같은 것”이었다. 이는 동아시아의 태허(太虛) 개념과 비슷하다. 태허란 광활한 우주공간을 의미하며 중국 고대부터 사용했다. 장재(張載, 송나라 성리학자. 1020-1077)는 ⟪정몽⟫(正蒙)에서 태허는 모양이 없고 기(氣)의 본체이다, 기는 만물을 이루고 태허는 기의 공간적 양상이라고 하였다.

[그림 1] “한 중세 시기의 전도사가 자신이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을 찾았다고 말한다.” 이 판화의 제작자는 전해지지 않으며, 프랑스의 천문학자 카미유 플라마리옹의 1888년 책에 수록되어 ‘플라마리옹 판화’라고 불려진다. (출처 : Wikimedia Commons)

한편 데모크리토스(Democritos. 460 BC – 351 BC?)와 같은 원자론자들은 원자가 운동할 공간을 만들기 위해 공허 개념을 도입했다. 이는 다소 역설적인 상황인데, 고대 유물론자들이 자신들의 이론을 성립하도록 만들기 위해 ‘물체를 지니지 않은 실체’를 말해야 했기 때문이다. 
원자론자들이 공간이 무한하다고 보는 이유는 원자의 수가 무한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원자들간에 일어나는 물리적 작용은 모두 그 원자의 성격에 의해서만 결정되기 때문에 공간은 연장(延長)을 가질 뿐 물체의 운동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공백적'(空白的) 성격을 지닌다고 본다.(*’공백적’ 성격에 대해서는 “시간이란 무엇인가?”를 참조해주세요.)

반면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BC 5 – 6)와 멜리수스(Melissus. BC 5)는 우주가 항상 하나의 충만한 전체라고 보았는데, 원자론자들은 공허의 관점을 가지고 이들을 공격하였다. 멜리수스는 “공허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허는 없음을 말하는 것이고 없음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는 논리를 폈다.

플라톤(Plato. BC 428/427 또는 424/423 – 348/347)은 공간과 물리적 실체를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연결지으려 시도했다. 그는 “물리적 실체는 기하학적 표면에 의해 제한된 텅 빈 공간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보았다. 물리적 실체가 곧 기하학적 형태의 세계라고 하면서 네 가지 기본원소 곧 물(정20면체), 공기(정8면체), 흙(정6면체), 불(정4면체) 각각에 서로 다른 공간적 구조를 부여하였다. 플라톤은 물리학을 기하학으로 환원하려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림 2] 플라톤의 기본 원소. 왼쪽부터 흙, 물, 공기, 불이고, 맨 오른쪽 정12면체는 우주를 채우고 있는 제5원소 물질인 에테르(aether)이다. 케플러의 Mysterium Cosmographicum(1597)에 수록된 그림. (출처 : wikipedia)

그러나 근대과학 이전까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플라톤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공간 이론을 가장 체계적으로 발전시켰고, ⟪범주론⟫과 ⟪자연학⟫에서 자신의 공간 개념을 풀어냈다. 

⟪범주론⟫에서는 모든 양들은 소산적(消散的)이거나 연속적이어야 하며, 공간은 연속적이라고 했다. 물체가 공간을 점유할 때 모든 부분들이 공동의 경계를 지니므로 공간 또한 이를 모두 담아내기 위해서는 연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공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물체들이 점유한 모든 장소(place, topos)의 총합을 의미하며, 역으로 장소라 함은 물체가 점유한 경계에 따라 제약되는 공간의 부분을 말한다.

– 책 pp.70-71.

한편 ⟪자연학⟫에서는 … 물체의 장소는 물체 자체의 부분이나 인자가 아니라 이를 그 안에 품는 것이며, 물체 고유의 장소는 물체 자체보다 더 크지도 작지도 않다… 모든 기본적 물질은 그 자체의 특별한 장소로 움직이려는 경향이 있으며, 일단 거기에 도달하면 그 자리에 머무르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장소의 실재성과 계층성 논증을 이끌어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물리적 원소(불과 흙덩이 기타)들이 보이는 경향은 장소가 실재임을 말해줄 뿐 아니라 이것이 실질적인 영향을 끼침을 말해준다. 불과 흙덩이가 각각 위-아래로 그 자신의 장소를 찾아 움직이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장소들이 세분되고 상이한 계층을 지님을 말해준다.”

– 책 p.71.

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우주의 중심과 땅의 중심이 각각 존재하며, 이 둘이 우연히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일치하기는 하지만 개념적으로는 다르기 때문에 무거운 물체(흙덩이)가 지닌 자연스러운 운동이 지향하는 것이 우주의 중심인지 지구의 중심인지에 대한 물음이 남게 된다. 이에 대해 그는 무거운 물체가 지향하는 것은 땅의 중심이 아니라 우주의 중심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불과 같이 가벼운, 즉 무거운 물체의 반대가 되는 물체는 우주 중심의 반대 극단이라고 할 수 있는 우주의 변두리를 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무거운 물체가 땅의 중심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땅이 그 중심을 우주의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우연에 의한 것일 뿐”이라고 명확하게 말한다. 이는 현대과학과 매우 대조적이다. 현대과학에서는 우주의 중심은 존재하지 않으며, 물체가 낙하하는 것은 지구 질량의 중심이 그쪽에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한편 공간의 3차원적 성격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논의가 이루어진 적이 별로 없다. 이에 대해서는 철학자들보다는 오히려 예술가들의 작품 속에서 그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특히 15세기 르네상스 회화에서 원근화법이 나타나면서 3차원에 대한 의식이 명료해졌다. 이러한 3차원적 묘사의 선구자는 이탈리아 파두아(Padua)의 아레나(Arena) 예배당의 벽화를 그린 조토(Giotto di Bondone. 1266? – 1337)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특히 건물 등에서 차원적인 기법들이 등장했다.

[그림 3] “Birth of the Virgin Mary”. 아레나 예배당의 벽화 중에서. 조토. 1303-1305. (출처 : wikipedia)

15세기에 이르면 알베르티(L. B. Alberti. 1404 – 1472),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1420 – 1492),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 – 1519)와 같은 화가들이 화폭 전체에 3차원적인 표현을 펼치게 된다. 그러나 사물의 위치를 3차원 좌표계를 사용하여 설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이루어진 것은 17세기 근대과학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졌다.

[그림 4] “Annunciation”(성수태 고지).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72-1476. (출처 : wikipedia)

3. 과학적 공간 개념

1) 일상적 공간 개념

우리는 별도의 의식적인 학습없이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 공간 개념을 파악한다. 이러한 공간 개념이 어디에서부터 출발했고 어떻게 구성되는지 체계적으로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우선 공간이라는 하나의 통합적 개념에 도달하기 전에 공간이 가지고 있는 부분적 개념들이 먼저 인식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 중에 가장 쉽고 익숙한 것이 장소 개념이다. 우리말로는 어떤 ‘곳’이라는 뜻이다. 이 말이 의미를 가지려면 “그곳이 어디냐?”라는 물음에 답할 수 있는 개념이 필요하다. 즉 질문한 사람의 위치를 중심으로 거리, 방향 또는 그와 비슷한 개념이 있어야 한다. 이 개념이 가장 원시적 형태의 ‘좌표계’를 형성할 수 있으며, 장소라는 것은 바로 이 좌표계 안에서 의미 있게 구분되는 개념이 된다.

공간 개념을 구성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부분 개념은 ‘자리’ 개념이다. 이는 “그 자리가 찼느냐, 혹은 비었느냐?”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 되는 개념으로 사람이 누울 자리, 과일이 놓일 자리, 곡식을 쌓아둘 자리 등이 예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자리 개념은 곧 방의 넓이, 그릇의 크기, 창고의 규모와 같은 정량적인 개념과 연결되며 우리말로 ‘들이’라는 용량 개념을 구성하게 된다. ‘들이’를 규정하면서 길이와 넓이, 부피 개념이 자연스럽게 구분되어 공간의 차원 개념도 등장하게 된다. 이들 개념이 공간의 차원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무의식 중에 파악하면서 공간 개념의 한 속성으로 습득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일상적 공간 개념은 “여러 개념 요소들을 하나의 개념으로 엮어 통합적으로 파악해낸 지적 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개념들 사이의 연관관계를 파악하지 못하고 각각이 별개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공간이라는 것이 여러 국면을 가지는 하나의 개념임을 무의식 중에 쉽게 파악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명료하게 의식화하는 과정없이 이 정도 차원의 이해에 머물고 있으며, 이를 일러 ‘일상적 공간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2) 3차원 유클리드 공간 개념

일상적 공간 개념은 나름대로 유용하고 우리가 일상 생활을 하는 데에도 불편함이 없지만, 현상을 시공간적으로 서술하고자 하는 엄밀한 과학에서 개념적 바탕으로 삼기에는 부족하다.

현상을 시공간적으로 서술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시간과 공간 개념을 명백한 계량적 성격을 지닌 변수로 나타내야 하며, 우리가 기왕에 지닌 모든 부분 개념과 이들 사이의 연계를 이 중심적인 변수를 통해 명료하게 표현해야 한다. 사물을 과학적으로 서술하는 데 기본이 되는 주요 개념들을 이렇게 체계적으로 정량화하는 일을 일러 ‘명시적 개념화’작업이라 부를 수 있으며, 시간과 공간의 명시적 개념화 작업을 어떻게 수행하느냐 하는 것이 성공적인 과학을 이루어내는 첫째 과제라고 할 수 있다.

– 책 p.74

그런데 시간과 공간을 명시적으로 개념화하는 방법이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다. 이 사실은 대안적인 명시적 개념화가 이루어지고 난 후에 서서히 밝혀졌으며, 처음에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상대론적 시공간 개념을 다루면서 더 깊이 논의하기로 하고, 먼저 최초로 형성된 고전역학적 시공간 개념을 살펴보자.

일상적 경험 속에서 구축된 어떤 관념을 명시적으로 개념화 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개념의 틀을 되도록 단순화하려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이러한 자세를 취하게 되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 각각을 독립된 변수로 지정하는 것이 가장 간단하다. 시간과 공간을 지칭하는 변수들이 서로 특별한 관련을 드러내보이지 않는다면, 공간(또는 시간) 개념을 생각할 때 시간(또는 공간) 개념은 염두에 둘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하나의 개념을 명시적으로 정량화하는 가장 간단한 방식은 이 개념을 적절한 단위와 함께 실수 공간에 대응시키는 것이다. 사람의 체중을 예로 들자면, 1kg이라는 단위를 설정하기만 하면 모든 사람의 체중을 실수 공간 안의 수치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공간 개념은 이와 달리 하나의 변수로 표현해 낼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장소가 있다고 할 때 그 위치를 표현하려면 기준으로부터 떨어진 거리 뿐만 아니라 방향도 나타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길이'(1차원)와 ‘넓이'(2차원), ‘들이'(3차원)라는 개념들을 하나의 틀로 묶기 위해서도 변수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서로 수직하는 세 개의 변수를 택하고 독립적인 실수 공간에 대응시키는 것이다. 이때 세 개의 실수 공간은 같은 단위를 가진다. 다시 말해, 공간 안에 하나의 기준점과 서로 수직인 세 개의 기준 방향을 설정하고, 각 방향에 실수 공간에 대응하는 기준 좌표축을 설정한다는 것이다. 이런 준거의 틀을 데카르트 좌표계(Cartesian coordinate system)라 한다.

[그림 5] 데카르트 좌표계 (출처 : wikipedia)

이렇게 하면 공간 안의 모든 위치를 예를 들어 x, y, z라는 세 개의 변수들의 값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이때 이 세 개의 변수들은 좌표계에 의존하기 때문에 방향이 다른 새로운 좌표계에서는 그 값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변환되어 달라지게 된다. 이와 같이 세 변수로 공간상의 위치를 나타내는 경우를 3차원 공간이라고 하고, 이 변수들로 표현하는 도형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이 성립할 때 이를 ‘3차원 유클리드 공간’이라고 부른다.

3차원 유클리드 공간 개념을 형성하고 나면 그동안 일상적 공간 개념 안에 들어있던 여러 부분 개념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 또한 명시적 개념화 작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이제 본격적으로 과학적 서술을 할 수 있게 된다. 뉴턴의 고전역학이 바로 이러한 개념의 틀 위에서 만들어졌으며, 인류 지성사상 최초의 매우 성공적인 과학이론이 되었다.

3) 4차원 유클리드 공간 개념

3차원 유클리드 공간 개념을 바탕으로 많은 과학 이론들이 놀라운 성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굳이 대안적인 개념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또한 과학이론 자체에 어떤 문제점이 드러난다고 해서 이것이 곧바로 공간 개념을 수정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기도 쉽지 않다. 게다가 대안적 개념화 가능성이 고려되어 본 적도 없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점에서 20세기 초에 형성된 4차원 시공간 개념은 인류 지성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이 형성된 역사적 경위는 짧지 않으니 그 중에서 몇 가지만 언급하겠다.

당시 4차원 시공간 개념을 상정하거나 수용해야 할 직접적인 실험적 증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마이켈슨-몰리의 실험(Michelson-Morley experiment)이 새 시공간 개념에 대한 실험적 증거라고 보기도 했지만, 이는 잘못 이해한 것이다. 아인슈타인 자신이 이 실험을 증거로 제시하지도 않았고, 실험을 주도한 마이켈슨(A. A. Michelson. 1852-1931)은 당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한 상대성이론을 만년이 되어서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이 4차원 시공간 개념을 도입하게 된 바탕은 무엇일까? 그는 “모든 자연법칙은 서술 좌표계의 상대적 운동과 무관하게 같은 형태를 가져야 한다”는 이른바 ‘상대성원리’를 믿었다. 그런데 기존의 시공간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는 전자기 법칙들이 상대성원리에 위배되었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시공간 개념 자체를 수정함으로써 자연법칙들이 상대성원리를 따르도록 만든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4차원 시공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상대성원리’는, 곧 자연법칙들이 4차원의 한 축인 시간 좌표축의 방향 설정과 무관하게 같은 형태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다시 시공간이 4차원 구조를 가져야 함을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가 이러한 상대성원리를 믿었다는 사실은 이미 직관적으로 시공간의 4차원 구조를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민코프스키가 이를 일깨워주기까지 자신이 도입한 새 시공간 개념이 4차원 구조를 지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 책 p.77

그렇다면 민코프스키가 해석한 4차원 시공간의 의미가 무엇인지 간략히 살펴보자. 우리는 3차원 공간 개념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차원 하나를 더 추가해 4차원을 생각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미 형성돼 있는 세 개의 차원 하나 하나와 완전히 대등한 또 하나의 차원이 물리적으로 존재하느냐”하는 문제가 있다. 이러한 것은 물론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공간상의 한 축과 너무도 이질적이어서 시간을 네 번째 차원으로 생각하는 것은 너무 무리하고 부적절해 보일 것이다. 사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전의 시공간 개념에서 시간과 공간을 구분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겉보기의 차이가 있음에도, 과감하게 공간변수와 대등한 성질을 지니는 또 하나의 가상공간 축을 도입하고, 이를 나타내는 변수가 실제의 시간변수와 일정한 방식으로 연관된다는 관점을 취하면, ‘형식상의 4차원’ 구조를 만들면서도 공간과 시간의 질적 차이는 그대로 보존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민코프스키가 해석해낸 4차원 시공간의 성격이다.

– 책 p.78

3차원 유클리드 공간에서는 하나의 위치를 지정하는 데에 세 개의 변수 x, y, z가 있어야 한다. 이들 세 변수는 성격이 서로 대등하다. 여기서 다시 4차원 유클리드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위의 세 변수와 성격이 대등한 또 하나의 변수가 형식상 필요하다. 이 새로운 변수로 $\tau$를 도입하고, 이것을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변수 $t$와 특정한 관계 $\tau=kt$를 가진다고 가정해보자.

여기서 상수 $k$(속도의 단위를 가진다)의 값을 적절히 택할 경우 우리가 현실세계에서 경험하는 시간과 공간이 새 변수 $\tau$를 매개로 4차원적 성격을 만족함을 경험적으로 확증할 수 있다면, 이러한 의미에서 시간과 공간이 4차원 유클리드 공간을 형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경험적 확증’이란 몇 번의 실험으로 검증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4차원 유클리드 공간에서 설정된 시공간 개념을 바탕으로 자연법칙들을 서술하면 이 법칙들이 내적 정합성을 잘 만족시키고 또한 모든 자연현상을 잘 설명해준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 경험적으로 확증하는 과정이다.

이제 결론적으로 말하면 위에 도입한 상수 $k$가 $k^{2}=-c^{2}$(c는 광속도로 알려진 자연계의 한 보편상수임)의 관계를 만족한다는 가설을 도입할 경우, 이렇게 구성된 4차원 시공간이 자연법칙들의 정합성을 잘 나타내줄 뿐 아니라 이들 법칙이 서술, 예측하는 실험적 상황에서 매우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 책 p.78-79

놀랍게도 이러한 새 시공간 개념을 바탕으로 한 자연법칙들은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단순미와 대칭미를 보여준다. 이 말은 오직 이러한 새 개념을 바탕으로 할 때에만 자연의 진정한 조화가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뿐만 아니라 새 시공간 개념으로 자연법칙을 서술하게 되면, 그 개념이 아니고는 알 수 없었을 많은 새로운 사실들과 현상들을 알 수 있게 된다. 물체를 아무리 가속해도 그 속력은 결코 광속도 $c$를 넘을 수 없다는 것, 에너지와 질량이 $E=mc^{2}$이라는 유명한 관계식을 통해 서로 관련된다는 것 등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4) 4차원 비유클리드 공간

민코프스키의 4차원 공간은 유클리드 공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새 변수 $\tau$를 포함한 변수 네 개로 이루어지는 임의의 평면을 잡더라도, 그 안에서는 예를 들어 피타고라스 정리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공간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이론을 일반적으로 특수상대성이론이라고 부른다.

특수상대성이론은 전자기 현상 등 많은 현상들을 매우 성공적으로 서술해냈으나, 뜻밖에도 만유인력이라고 불러온 중력은 적절하게 서술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인슈타인은 공간 개념의 혁명적 전환을 한번 더 시도하여 유클리드 기하학보다 더 일반적인 공간 개념, 즉 일반상대성이론의 바탕이 되고 있는 4차원 비(非)유클리드 공간을 도입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로바체프스키(N. I. Lobachevsky. 1792 – 1856)와 리만(B. Riemann. 1826 – 1866) 등이 이미 19세기에 성공적으로 만들어냈으며, 이를 통해 기하학이 물리적 공간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져 있었다. 실제 공간에서 비유클리적 성격을 실험적으로 확인해보려는 시도도 이어졌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만들어내기 이전에는 물리적 공간의 비유클리드적 성격을 표현해낸 명시적 이론이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이러한 비유클리적 성격이 당시 측정 가능했던 규모의 공간 범위 내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인슈타인은, 한 물체가 주변 물체들에 의해 받는 중력은 실은 어떤 형태의 힘이 아니라 주변 물체들의 질량 – 좀더 엄격히 말하면 이들의 에너지﹒운동량 분포 – 이 그 물체가 지나가는 공간 자체를 휘게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을 엄밀한 수학적 형태로 정리해낸 것이 그의 일반상대성이론이다.

여기서 공간이 휜다는 말은 그 공간 안의 각 위치들 사이에 유클리드 기하학에 벗어나는 관계들이 성립한다는 이야기다. 곧 한 공간 안에 놓인 위치들 사이의 거리 관계가 – 예를 들어 피타고라스 정리가 말해주는 것과 같은 – 유클리드 기하학을 따르지 않고 좀더 복잡한 다른 규칙을 따를 수 있다는 것이며, 이들이 따를 규칙 자체가 주변의 질량 분포에 의해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말해주는 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중력 방정식이다.

그러므로 아인슈타인의 중력 방정식은 뉴턴의 이른바 만유인력법칙을 대체함과 동시에 4차원 시공간 자체가 유클리드적 성격에서 벗어나는 정도를 명시적으로 표현해주는 관계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책 pp.80-81

중력이 그리 크지 않은 영역에서는 일반상대성이론과 뉴턴의 만유인력이 서술하는 내용이 거의 동일한 결과를 나타낸다. 그러나 중력이 매우 강하면, 즉 질량이 크게 밀집되어 있는 영역에서는 관측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정도로 차이가 난다. 태양 주변을 스쳐 지나오는 빛의 경로가 변화하는 경우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일반상대성이론은 현상을 예측하고 설명하는 능력이 탁월하며 특수상대성이론과 마찬가지로 자연법칙을 더 단순하고 조화롭게 설명해준다. 더 단순하고 조화롭다고 해서 그 이론이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옳은 지식은 아름다운 지식이어야 한다”는 하나의 불문율이 여기에서도 적용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림 6] ‘중력 렌즈 효과’. 허블망원경. 2011. 먼 천체에서 나온 빛들이 그 빛의 경로 중간에 놓인 강력한 중력을 가진 천체 주변을 지나면서 휘어져보이는 현상. 그림에서 중간 오른쪽에 보이는 푸른 원같은 것을 두고 중력 렌즈 혹은 ‘아인슈타인의 링(ring)’이라고 부른다. (출처 : wikipedia)

4. 공간 개념에 대한 철학적 성찰

1) 공간은 존재론적 실체인가?

우리의 일상적 공간 개념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크게 세 차례에 걸쳐 명시적 개념화 과정을 거쳤으며, 이를 기반으로 매우 성공적인 과학이론들이 이루어졌다. 이제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져볼 수 있다.

이렇게 마련된 공간 개념은 하나의 존재론적 실체를 대표하는 것인가, 아니면 외적 사물을 파악하기 위해 인간이 관념 속에 만들어놓은 단순한 하나의 지적 구성물인가? …

어떤 의미에서 공간이란 ‘빈자리’를 나타내는 것이고, 이는 곧 없음과 같은 뜻일 수 있다. 그럼에도 공간 자체를 ‘있다’고 말할 때 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가 만일 공간말고는 그 무엇도 없는 세계를 생각한다면 공간의 존재 또한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공간의 독자적 존재성은 생각하기 어렵다.

공간이 있다면 이는 오직 여타 물체들의 한 존재양상으로서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공간이라는 것이 여타 물체들이 개별적으로 지니고 있는 양상은 아니다. 그 어느 물체도 하나의 공통된 공간 안에 놓이는 것이지, 개별적으로 자기 공간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공간이라는 것이 현실세계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물체와 물체 사이의 거리라고 우리가 파악하는 그 무엇”은 무엇인가? 이것은 단순히 ‘없는 것’인가? 설혹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크기를 말할 수 있고 모양을 말할 수 있고 성질을 말할 수 있다면 이것은 ‘있는 것’에 비해 부족함이 없지 않은가? 이렇게 명백한 성격을 가진 그 무엇을 ‘있는 것’의 범주에서 제외한다면 도대체 그 ‘있는 것’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인가?

– 책 p.82

공간이라는 것이 가지는 ‘있음’의 성격은 명백히 다른 물체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존재성을 배제하게 되면 더 큰 문제가 야기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재론적 관점을 취한다고 하면, “공간은 우리가 이해하는 세계 안에서 존재성을 인정받을 명백한 자격을 갖춘 그 무엇”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세계는 존재하고, 그 세계가 구조를 지닌다고 할 때 그 구조의 양상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바로 공간이다.

공간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공간이 가지는 존재론적 지위를 논의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공간 개념을 마음대로 설정해도 자연을 이해하는 데 있어 어떤 영향도 없다면, 우리는 공간 자체의 존재성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공간’의 자리에 ‘신’을 넣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우리가 공간을 더 정교하게 이해할수록 드러나는 자연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명료해진다. 공간이 어떤 존재성을 지니며 대단히 구체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다.

현대과학이 말하는 공간 개념이 추상적이고 인위적이며, 자연계 안에 놓여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사물을 보는 인식의 틀에 더 가깝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공간 개념은 분명히 우리가 사물을 보는 중요한 인식의 틀이며, 따라서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원자 개념과 쿼크(quark) 개념도 동일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현대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떤 개념의 대상이 저 바깥 세계에 존재하느냐, 우리의 관념 속에 존재하느냐”하는 것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양쪽에 걸쳐 존재한다. 바깥 세계에 있는 존재물과 우리의 관념 안에 있는 존재물이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와 전체로서 대응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칸트의 순수직관론을 생각해볼 수 있다.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는 공간의 감성의 형식이라 보았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간을 ‘바깥 세계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라고 볼 때, 칸트는 ‘사물을 파악하는 인식의 틀’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대단히 중요한 인식론적 진전이다.

사실 공간의 성질은 경험 속에서 이끌어낸다기보다 우리의 관념 안에서 구성해내는 것이며, 사물을 인식함으로써 공간이 알려진다기보다 공간 개념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만일 공간 개념이 지니는 이러한 성격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했다면 이것 또한 새로운 오류가 된다. 공간은 결국 인식 틀이 됨과 동시에 여전히 더 넓은 의미에서 인식의 대상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 책 p.84

이제 우리는 “공간(우주) 안에 내가 있는가, 내 안에 공간(우주)이 있는가?”하는 인식론적이고 좀더 본질적인 물음을 제기해볼 수 있다. 인식론적으로는 분명히 인식 주체인 내 안에 우주를 상정할 수 있기 때문에 내 안에 우주가 있다는 말이 타당하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인식이 “나 자신이 우주 안에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기도 하다.

일종의 사이버공간(Cyberspace)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의 인식 공간 안에 ‘관념적으로’ 우주를 담을 수 있지만, 이러한 관념을 일으키는 우리 자신의 물리적 실체는 여전히 물리적 공간 안에 ‘물리적으로’ 담겨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의식 세계를 담고 있는 의식 공간 혹은 ‘사이버 공간’과, 물리적 세계를 담고 있는 물리적 공간 또는 ‘실제 공간’을 개념적으로 명확히 구분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2) 공간의 ‘절대성’과 ‘상대성’

공간 개념과 관련하여 ‘절대성’과 ‘상대성’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 이는 상대성이론이 등장한 이후 ‘상대성’이라는 개념이 크게 부각되면서 이와 대비시켜 그 이전의 공간 개념을 ‘절대성’으로 규정하는 데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상투적인 개념을 관행적으로 사용하기 전에, 이러한 언어들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우리가 어떤 맥락에서 사용하는지 면밀히 검토해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철학에서 ‘절대성’이라고 하면 “완전하고 자족적이며 자신 이외의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실재의 한 질서”를 의미한다. 이를 좀 더 의인화하여 나타내면 “그 자신 행위를 하면서 행위를 받지 않는 그 무엇”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에 비해 ‘상대성’은 별도의 의미 규정 없이 ‘절대성’에 대치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도 될 것이다. 우리가 일단 이러한 의미의 ‘절대성’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생각해온 공간 개념이 과연 어떤 점에서 절대적이고 어떤 점에서 상대적인지 생각해볼 수 있다.

– 책 p.85

먼저 3차원 유클리드 공간과 특수상대성이론의 바탕이 되는 4차원 유클리드 공간의 경우를 살펴보자. 둘 중 하나는 “완전하고 자족적이며 자신 이외의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성격을 지니고 다른 하나는 그런 성격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만약 3차원 공간이 이러한 절대성을 지닌다면 한 차원 더 늘어나 4차원이 된다고 해서 그 절대성이 사라질 이유가 없다.

시간 개념과 공간 개념이 비상대론적 시공간 개념에서는 서로 독립적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이 한 공간의 서로 다른 성분을 이룬다고 보는 상대론적 시공간 개념에 비해 ‘절대성’에 더 가깝다고 볼 측면은 있다. 그러나 이런 차이를 ‘절대성’과 ‘상대성’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을 경우, 3차원 공간도 이 하나의 공간을 세 개의 공간변수들이 구성하고 있으므로 ‘상대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게 된다.

반면 특수상대성이론의 기반이 되는 4차원 유클리드 공간 개념과 일반상대성이론의 기반이 되는 4차원 비유클리드 공간 개념의 경우에는 절대성의 기준, 즉 “자신 이외의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성격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가 있다. 4차원 유클리드 공간은 그 주변의 질량 분포와 무관한 반면, 4차원 비유클리드 공간은 질량 분포의 영향을 구조적으로 흡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차이를 이유로 전자를 ‘절대적’이라 부르고 후자를 ‘상대적’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사실 ‘절대성’과 ‘상대성’을 구분하는 ‘완전하고 자족적’이라는 기준 자체가 매우 추상적인 개념이어서 어느 하나가 자족적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도 매우 어렵다. 결국 사람들이 그동안 무엇이 ‘절대성’이고 무엇이 ‘상대성’인지 모르고 이 말을 사용해왔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여전히 이 개념에 ‘절대성’ 혹은 ‘상대성’ 개념을 부여한다면 계속 혼동이 생길 것이다. 이제 과오가 드러났으니 이러한 내용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과오를 시정해야 할 것이다.

‘절대성’과 ‘상대성’ 개념을 그 개념이 훨씬 완화된 상태로, 즉 ‘절대성’은 ‘고정적이고 위계적인 성격’이고 ‘상대성’은 ‘유동적이고 평등적인 성격’이라고 한다면, 실제로 인류의 시공간 개념의 역사는 ‘절대성’에서 ‘상대성’으로 지속적인 변혁 과정을 겪어왔다고 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N. Copernicus. 1473 – 1543)와 갈릴레이(G. Galilei. 1564 – 1642) 이전에는 공간 안의 모든 점이 대등하지 않고 그 안에 중심이 있으며, 운동과 정지를 구분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뉴턴의 고전역학이 형성되면서 이러한 절대성 개념은 그 의미를 실질적으로 잃게 되었다. 이것을 보통 갈릴레이의 상대성 원리라고 부른다.

뉴턴은 절대정지 공간의 개념을 버리지 못해 이것이 오직 ‘신(神)의 마음 속에’ 있다고 보았으나, 이는 역설적으로 과학에서는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뉴턴이 어떻게 생각했든 간에 고전역학의 공간 개념은 매우 상대적이다.

단지 가속도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단순한 기준 설정의 문제가 아닌 공간 자체의 성격에서 오는 것이라고 보아야 했으나, 이는 후에 4차원 비유클리드 공간을 채택한 일반상대성이론에서 극복되었다.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가속도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조차 기준 설정의 문제로 돌릴 수 있게 된다.

– 책 p.87

19세기 들어 전자기학 이론이 체계화되면서 절대정지 공간 개념이 다시 등장한다. 전자기 법칙들은 3차원 공간과 이와 독립된 1차원 시간을 바탕으로 서술되므로 엄격히 말해 하나의 정지된 기준 좌표계에서만 적용된다. 따라서 이 좌표계가 놓인 공간을 물리적으로 절대정지 상태에 있는 공간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바로 이 공간이 무엇인지 밝히고자 했던 시도가 바로 마이켈슨-몰리 실험이다. 즉 이 공간을 기준으로 하여 지구가 움직이는 속도를 측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특수상대성이론이 채택하고 있는 4차원 유클리드 공간을 바탕으로 하여 전자기 법칙을 다시 서술해보면 이러한 문제는 해소된다. 즉 “하나의 기준 좌표계가 특정한 절대정지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지니지 않게 된다.” 실제로 상대성이론의 시공간에 ‘상대성’이라는 호칭이 부여된 가장 큰 이유는 이와 같이 19세기 전자기학에 잠시 등장했던 절대정지 공간 개념을 상대성이론이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뉴턴의 고전역학에서 말하는 절대공간을 부정했기 때문이 아니다.

3) 공간의 유한성과 한계성

공간은 유한한가 무한한가, 유한하다면 그 끝은 어디인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공간의 성격과 관련하여 관심을 가졌던 물음이다. 피타고라스 학파였던 아르키타스는 “세계의 끝에서 팔을 내뻗칠 수 있을 것인지” 문제를 제기했고, 이 물음은 이후에도 자연철학에서 계속 반복되었다. 14세기에 미들튼(Richard of Midddleton. 1249 – 1308), 1418년에 포지오(G. F. Poggio Bracciolini. 1380 – 1459), 1690년에 로크(J. Locke. 1632 – 1704)가 아르키타스와 같은 물음을 제기하였다. 동아시아에서는 11세기에 주희(朱熹. 1130 – 1200)가 이 물음을 가지고 병이 날 정도로 골똘히 생각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이 문제를 고민한 사람들 대부분은 공간의 끝을 생각할 수 없다고 보았다. 공간이 장벽에 의해 차단될 수 있지만 그 장벽도 마찬가지로 공간 안에 놓여야 하기 때문에 공간의 끝이라는 것이 공간 자체의 성격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공간은 무한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공간의 끝이 없으므로 공간이 무한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유한하면서도 끝은 없는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공의 표면, 원이 둘레가 대표적인 예다. 

이러한 사례를 지적하면 사람들은 곧 “아, 그것은 공의 표면이 3차원 공간 안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3차원 공간이 아닌 순수 2차원 공간 곧 종이와 같은 평면에서는 유한하면서도 끝이 없는 경우란 있을 수 없다”고 지적할 것이다.

여기서 순수 2차원이라는 것이 2차원 유클리드 공간이라면 이 지적은 옳다. 2차원 유클리드 공간의 경우 공간의 크기 곧 면적이 유한하면서 끝이 없을 수 없으며, 1차원 유클리드 공간의 경우에도 공간의 크기 곧 길이가 유한하면서 끝이 없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3차원 유클리드 공간의 경우 공간이 크기 곧 부피가 유한하면서 끝이 없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공간은 끝을 생각할 수 없으므로 공간은 유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것을 논리적 비약이라고 하는 것은, 이들은 공간이 3차원 유클리드 공간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전제했기 때문이다. 만일 공간이라는 것을 3차원 비유클리드 공간이나 혹은 4차원 시공간 안에 놓인 ‘3차원 구면’이라고 생각한다면, 공간은 그 부피가 유한하면서도 끝은 없을 수 있다.

– 책 p.88-89

현대 우주론에서 말하는 대표적인 시공간 모형에 의하면, 우주 공간은 4차원 시공간 안에서 이러한 ‘3차원 구면’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 구면의 반경이 증가하여 공간 자체가 팽창한다. 반대로 과거의 우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약 138억 년 전에는 우주의 공간 전체가 부피 없는 하나의 점에서 출발하여 지속적으로 팽창해왔으며 앞으로도 당분간 팽창이 지속될 것이다.

거의 확실한 사실은 현재 우주가 유한하기는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아무리 가더라도 끝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는 결코 닿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곧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공간은 유한성(有限性)은 지니고 있지만 한계성(限界性)은 지니고 있지 않다.”

5. 인간의 원초적 공간지각

지금까지 논의한 공간 개념은 대부분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받아들이는 원초적인 공간지각을 바탕으로, 여기에 인간의 이성적 사유를 더하여 구성해낸 일종의 인위적인 창조물이다. 따라서 별도의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은 4차원 비유클리드 공간 개념 뿐만 아니라 3차원 유클리드 공간 개념도 명료하게 파악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공간의 성격에 대한 인류의 지각은 긴 진화과정 속에서 생존에 필수적인 역할을 해왔다. 이성으로 공간에 대해 지적인 조작을 하기 전부터 인류는 이러한 원초적 공간 개념을 무의식 중에 체득해 활용해온 것이다. 예를 들어 농구선수가 공을 던지고 등산가가 지형을 살피며 자신의 발걸음을 옮길 때 활용하는 공간 개념이 바로 이러한 원초적 공간 지각이다. 이때 우리는 유클리드 또는 비유클리드 기하학같은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생각할 여유도 없다.

실제로 인간은 지각 대상이 되는 물체까지의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 양쪽 눈에서 대상으로 향하는 시각(視角)의 차이를 이용한다. 이는 삼각측량법에 해당되는 지적 연산이 두뇌에서 무의식적으로 수행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때 이루어지는 작업은 의식적인 공간 개념이나 학습한 삼각함수 연산법과는 무관하게 자동적으로 수행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명과 학습을 통해 정교하게 만들어지기 이전에 인간이 가지고 있었던 공간 지각, 어떠한 지적 조작도 더해지지 않은 생득적(生得的) 기능으로만 조성된 공간은 어떤 모습일까? 이를 알아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시각 예술가들이 공간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분석해보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세 화가들은 사물을 주로 2차원으로 묘사했고, 르네상스 시기에 들어서면서 3차원의 표현이 등장한다. 이는 사실주의 경향으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곧 보이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비롯한 르네상스 시기의 화가들은 실제로 대상을 과학적으로 연구했다. 이들은 사물을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대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는대로 나타내고자 했다. 19세기 표현주의 화풍이 등장하면서 이러한 경향은 역전된다. ‘보이는 대로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알아볼 단서를 우리는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림 7] “공장 굴뚝이 보이는 풍경”. 바실리 칸딘스키. 1910. 칸딘스키는 표현주의의 대표적 화가로 인상주의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출처 : wikipedia)

한편 사람이 느끼는 공간의 모습이 실제로 유클리드 기하학이 아니라 일종의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만족시킨다는 연구가 있다(P. A. Heelan.1983.) 대표적인 예로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 – 1890)의 그림 속에 나타나는 물체들의 공간 배치를 분석해보니 쌍곡선 공간이라는 비유클리드 공간의 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림 8] “아를의 침실”(Bedroom in Arles). 빈센트 반 고흐. 1888. (출처 : wikipedia)
[그림 9] 반 고흐의 그림을 분석한 결과. 왼쪽은 일반적인 선형적인 공간 배치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오른쪽은 반 고흐가 실제로 그린 그림으로, 보는 사람의 시각에 의해 의자의 방향, 마루의 무늬, 침대의 모양과 벽 등이 왜곡되어 있다. (출처 : P. A. Heelan.1983. http://birkhallsmiscellany.blogspot.com/2016/10/)

그러나 인간의 직접적 지각 속에 나타나는 공간의 이러한 비유클리드적 성격은 일반상대성이론에 나타나는 공간의 비유클리드적 성격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이것은 인간이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인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그러짐의 결과일 뿐, 공간 그 자체의 성격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 …

만일 인간의 눈보다 훨씬 더 정교한 공간지각 장치를 마련하여 인간의 눈에 들어온 것과 같은 대상을 지각하도록 해본다면, 이는 거의 정확하게 유클리드 공간의 성질을 보여줄 것이다. 사실 인간의 육안이 미칠 수 있는 범위 안의 공간은 거의 완벽한 유클리드 공간이라고 말해도 아무 무리가 없다.

– 책 p.91

그렇다면 인간의 시각이 유클리드 공간을 정확하게 지각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은 두 눈으로 일종의 삼각측정법을 사용하여 거리를 추산한다. 그러나 두 눈 사이의 거리는 약 7cm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멀리 있는 물체에 대해서는 시각(視角)의 차이가 크게 줄어들어 거리를 추정하는 데 실패한다. 따라서 물체들 사이의 상대적 거리도 정확하게 추정할 수 없기 때문에 물체들의 공간적 배열이 불가피하게 뒤틀리게 된다. 이 뒤틀리는 방식이 우연히 쌍곡선 공간이라고 하는 비유클리드 공간의 한 형태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사실 인간이 이 이상 공간의 기하학적 성격을 정확히 지각해내는 것은 생존과 크게 관련이 없다고 볼 수 있다. 몸이 움직일 범위 내의 공간만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인간의 지적 능력이 엄청나게 높아졌고 먼 우주에서 발생하는 일들에 대한 정보도 얻어내고 있고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높아졌다. 따라서 이에 걸맞는 공간 이해가 필요하다. 현대과학이 이루어낸 공간 이해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깊은 이해와 정밀도를 확보했다고 말할 수 있다.

6. 맺음말 – 위치 공간과 비위치 공간

지금까지 공간 개념이 지니는 여러 국면들을 살펴보았다. 가장 원초적으로는 사물의 공간적 배치를 받아들이는 감각이 있으며, 우리는 이를 바탕으로 공간의 일차적 성격을 구성해보지만 이는 시각의 생리적 제약 때문에 일정한 수준 뒤틀리게 된다. 또 여기에 경험적으로 확인한 법칙적 질서를 적용하여 좀더 나은 공간의 표상을 얻게 된다. 특히 이것이 정교한 과학에 이르면 공간 개념이 과학의 바탕을 이루고 과학이 다시 공간 개념의 수정을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내용들은 모두 물체들을 그 안에 담고 이들의 위치를 나타내는 위치 공간(configuration space)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물리학에서는 이러한 위치 공간말고도 물리적 의미를 담고 있는 여러 비위치 공간들을 상정하여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운동량 공간‘이다. 운동량 공간은 분명히 사물이 그 안에 놓이는 위치 공간이 아니지만 물리학의 주요 개념인 운동량을 표현하는 공간이며, 실제로 위치 공간과는 서로 역-공간(reciprocal space) 관계를 형성하는 특성이 있는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들은 비록 실물을 그 안에 배치할 수 있는 실제 공간은 아니지만 주요 물리량들을 그 안에 표시할 수 있는 유용한 성격을 지니며, 많은 경우에 위치 공간의 기하학적 성격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비위치 공간으로는 지정된 대상의 상태를 표현하는 ‘상태 공간‘이 있다. 이는 경우에 따라 위치 공간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닐 수도 있으나 이것 또한 사물 서술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

이와 병행하여 또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물리적 공간 개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도 물리적 공간 개념과는 원칙적으로 독립해서 성립하는 순수한 수학적 공간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을 비롯하여 근대의 선형 대수학에 이르기까지 많은 수학이론들은 그 자체로서 공간이론이라 불러도 될 만큼 공간의 성질을 풍부하게 서술해주는 것들이 많다.

좀더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물리적 공간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물리학자들은 수학자들이 이미 만들어놓은 수학적 공간의 여러 틀 가운데 적절한 것을 선택해내는 선택자의 기능만을 한다고 말해도 좋다. 이는 물론 수학적 공간을 연구해 온 수학자들이 물리적 공간을 통해 얻게 되는 현실적 경험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말해 이러한 수학적 공간들은 물리적 세계와 아무런 연관 없이 인간의 지성이 만들어내는 순수한 지적 구성물이다. 그럼에도 이것들 가운데 적어도 몇몇이 물리적 공간과 기묘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념이 만들어내는 비위치 공간은 이것뿐이 아니다. 우리는 수많은 이념적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그 나름대로 유용성이 있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공간에 관련된 존재론적 고찰을 되짚어보면, 우주 내에는 모든 물질적 대상을 담고 있는 물리적 공간인 실제 공간이 있으며, 이와는 독립적으로 이 안에 놓인 우리 인간이 만들어내는 – 모든 이념의 산물을 담고 있는 – 이념 공간이 있다.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 이러한 이념 공간이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다. 이른바 사이버공간이라고 하는 이념이 공간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이념 공간이 실제 공간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하는, 매우 흥미 있는 새로운 성찰을 요구받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우리의 공간 개념 그 자체도 이러한 이념 공간 안에 담기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라는 점이다.


* 이 글은 장회익선생님의 다음 글을 요약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녹색아카데미에서는 새자연철학세미나 등 모임 진행에 맞추어 장회익선생님의 책, 논문, 칼럼, 강연 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요약한 것임을 유념해주시고, 정확한 내용은 원문을 참조해주세요.

“공간이란 무엇인가”. 장회익. 2003. <우리말 철학사전 3> 우리사상연구소 엮음. 지식산업사. pp.65-95.

요약, 정리 : 황승미 (녹색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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