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 생명, 인간』 (장회익, 2009) – 물질과 의식의 양면성 & 자유의지


녹색아카데미 웹진을 통해 장회익선생님의 글들을 소개합니다. 가능하면 녹색아카데미에서 진행하는 모임의 주제에 맞추어 관련되는 책이나 논문, 칼럼과 강연 등을 찾아 알리고 내용을 요약해 이곳에서 읽고 보실 수 있게 할 계획입니다.
오늘 소개할 글은 선생님의 책 『물질, 생명, 인간』(2009, 돌베개) 중에서 3장의 내용 중 일부(p.141~169)입니다. 최근 자연철학세미나에서 자유의지, 물질과 의식 등에 대해 발표와 토론을 했었는데요. 이 책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고 있어서 정리해보았습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2019)와 연결지어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1. 우주가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

물질이 어떻게 스스로를 향해 물음을 떠올릴 수 있는가? 여기에는 ‘의식’의 문제가 들어 있다. 생명의 진정 놀라운 점은 자신을 ‘주체로 파악하는’ 의식이 발현된다는 점이다. 이 의식은 외부에서 객관적 관찰만으로는 절대 파악할 수 없고, 해당 주체만이 이 의식을 경험할 수 있다.

의식은 우리에게 존재론적, 인식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논의점들을 제공한다. 존재론적으로는 의식이 물질적 측면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면서도 물질적인 측면과 구분이 된다는 점이고, 인식론적으로는 의식이 인식의 기본 바탕이 되면서도 인식 또는 서술 대상의 세계에서는 드러나지 않고 인식 주체의 자기 성찰에 의해서만 서술 대상에 포함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런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주체에 대한 바른 해명이 없이는 생명은 물론이고 우리의 삶 그 자체를 이해할 수 없는 입장”에 놓이기 때문이다. 삶은 생명의 주체적 양상이라고 밖에 정의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설명하기 어렵고 아무리 해답이 성글더라도 진지한 자세로 주체를 해명해야 삶 자체를 이해할 수 있다.

의식이 어떤 범위에서 발생할 것인가는 이 의식을 담아내는 신체의 물리적 여건에 의존한다. 마취 상태의 사람의 예를 보면 의식이 물리적 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다음 두 가지이다.

  • 의식과 물리적 여건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하는가?
  • 의식 그 자체도 물리적 인과관계에 예속되는가? 의식 주체의 자유의지도 물리적 인과의 사슬에 묶여 있는 허상에 불과한가?

해답은 “의식이 물질을 바탕으로 일어난다”에 숨어 있다. “내 의식이 물질을 떠나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내가 어떠한 의식을 지닌다는 사실은 곧 내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이 이러한 의식을 가지도록 (준비)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내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내 몸을 움직인다고 할 때는 이미 내 몸이 이를 움직여 낼 물리적 여건을 갖추고 그러한 움직임을 일으킬 여건에 당도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내가 자유를 느끼는 것만큼 내 몸이 이에 상응하는 여건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책 p.145)

이 결론에 이르는 데 필요한 논의는 매우 많지만 대표적인 몇 가지로 크릭과 슈뢰딩거의 논지를 살펴보자.

  1. 크릭의 ‘놀라운 가설’

크릭의 놀라운 가설

최소한의 가정만 설정해서 우리가 어디에 도달할 수 있는지 시도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미 과학적으로 확립된 가장 기본적인 지식만을 활용해 문제를 최대한 이해해보는 것이다. 크릭은 자신의 책 『놀라운 가설』에서 ‘놀라운 가설’을 제시한다.

“‘당신’, 즉 당신의 기쁨과 즐거움, 당신의 기억과 욕망, 당신의 개인적 정체성과 자유의지는 실제로 신경세포들과 이에 관련된 분자들의 커다란 모임이 나타내는 행위 그 이상의 것이 아니다.”

Crick, 1994, The Astonishing Hypothesis: The Scientific Search for the Soul. p.3. / 『물질, 생명, 인간』. p.146-147.

이는 곧 “우리의 마음 – 우리 두뇌의 행위 – 은 신경세포(그리고 여타의 세포)와 이들에 관련된 분자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과학적 소신”을 의미한다(Crick, 1994. p.7). 크릭의 가설에서 따져볼 문제가 두 가지 있다. (1)1인칭으로서의 ‘나’는 이러한 물질의 집합이 나타내는 행위 그 이상이 아니다. (2)실체만을 지시할 경우에는 3인칭으로서의 ‘내 마음’과 1인칭으로서의 ‘나’가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이를 하나의 대상으로 보느냐, 주체로 보느냐에 따라 이 둘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내 마음과 나를 하나의 대상으로 보면, 마음이라는 현상이 지닌 모든 성질들이 이를 구성하는 신경세포의 조직을 통해 설명된다. 그러나 주체로 보게 되면,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는 주체로서의 ‘나’가 출현한다. 이는 신경조직이 형성될 때 그 안에서 객관적 서술의 대상이 되는 한 ‘현상’으로서의 ‘나’가 아니다.

물리학자들은 물리학이라는 이론으로 많은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다. 대상이 복잡해질수록 설명 과정이 점점 더 어려워질 수 있고, 현실적으로는 설명이 더 이상 불가능한 지점에 도달할 수도 있으며, 이는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신경세포들로 구성되어 있는 두뇌, 두뇌가 나타내는 마음의 많은 성질들이 궁극적으로 신경세포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설명될텐데, 이 부분에서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이 드러난다. 신경세포들이 마련되었을 때, 그 안에서 갑자기 주체로서의 ‘나’가 튀어나온다는 사실이다.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마음이 신경세포 안에서 출현한다는 것은 신비롭기는 하지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나’라고 하는 주체는 객관적 대상과는 그 존재론적 위상이 전혀 다른데 그 안에서 튀어나오는 것이다.

물질의 집합 a에서 A라는 사람이, 물질의 집합 b에서 B라는 사람이 태어나는 것 그 자체는 자연의 한 질서일 수 있다. 그런데 물질의 집합 c에서 ‘나’라고 하는 주체 C가 태어나는 사건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람 A, B와 주체 C를 동일하게 본다면 그것은 주체성과 객체성을 함께 지닌 ‘나’의 존재를 객체의 측면에서만 보는 결과가 된다. 여기서 ‘나’는 1인칭의 ‘나’이기 때문에 3인칭인 그 어떤 다른 사람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중요한 사실이 간과될 수 있다.

사람 A, B 또는 C도 그들 나름의 주체성을 지니지만, 이들에게 부여된 주체성은 이미 객체화된 주체성이다. 주체성이라는 말로 주체성을 객체화해버리면 그 본래의 성격이 상실되기때문에, 여기서 굳이 ‘주체’라는 말 대신 ‘나’를 쓰는 것이다.

물질의 집합 c에서 ‘나’라는 특별한 존재가 태어났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고, 쉽게 납득하기 어렵지만,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물질 안에 ‘나’를 이루어낼 성격이 담겨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크릭의 ‘놀라운 가설’이다.

그런데 여기서 가상적인 질문을 던져 보자. “물질이 만일 이러한 성격을 지니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3차원 영상을 찍어 놓고 우리 모두 사라졌다고 해보자.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누구도 주체성을 지니지 않지만 현상으로 보면 우리와 똑같은 행동을 보일 것이다. 현상으로서의 인간은 존재하지만 우리가 현재 느끼는 ‘나’로서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가 바로 이 세계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세계가 존재할 수 있을까? 존재할 수 있으며, 우리는 이미 세계를 상당히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양자역학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의 세계는 동역학적으로 기술되는 세계였고, 여기에 주체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세계 전부를 동역학으로 서술하는 우주로 볼 경우, 그 안에 인간은 존재하지만 ‘나’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한 세계가 된다. 한편, ‘나’가 존재하는 세계에는 존재론적 위상을 달리하는 또 하나의 영역이 존재하는데, 이것이 바로 주체의 영역이다.

일원론인가, 이원론인가?

이렇다고 해서 이원론적 존재론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크릭의 ‘놀라운 가설’은 일원론 안에서 이를(주체의 새로운 영역을) 수용한다는 데 그 ‘놀라움’이 있다. 이것은 좁은 의미의 ‘물질 일원론’으로 환원되는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가진다. 어떤 차이인가?

‘물질’이라고 하면 흔히 정신 혹은 주체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크릭의 논의는 어떻게 물질만으로 이루어진 체계 속에서 주체로서의 ‘나’ 출현할 수 있는가, 이 ‘나’가 어떻게 ‘나’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고민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나의 자유의지’도 포함된다. 이원론을 택하면 양측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므로 서로 달리 나타나는 것을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일원론을 취하면 물질과 의식이 하나의 바탕에 연원하는 것으로 보므로 서로가 서로로부터 달라지게 된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따라서 더 깊은 이해를 추구할 수 있다.

의식 주체와 신경조직망

이 논의에서 우리가 인정해야 할 첫 번째 대전제는, 데카르트가 말하는 ‘생각하는 실체’, 곧 ‘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경우와 다른 것은, 이 ‘나’가 물질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적정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 불가피하게 출현하는 그 무엇’이라는 점이다.

즉 우리의 입장은 ‘생각하는 실체'(res cogitans)와 ‘공간을 점유하는 실체'(res extensa)가 독자적인 두 실체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이 두 성격을 동시에 나타낸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과 이를 구성하는 신경조직망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사실이 과학적 탐구를 통해 밝혀져왔기 때문에 이러한 입장을 취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상관관계가 인간의 의식 주체를 해명했다는 뜻은 아니지만, 오직 개연성 높은 한 가지 결정적인 가정은 할 수 있다. “신체를 구성하는 신경세포들의 조직망이 어느 정도 이상의 복잡성과 정교성에 도달할 때, 이러한 물질적 구성 안에서 스스로 자기 자신이라 여기는 ‘주체의식’이 발현된다”는 것이다.

이때 형성되는 내적 기구가 전체에 대해 일관된 하나의 정체성을 부여한다. 이는 내적 측면이다. 주체의식은 신경조직망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물질 구조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정체성의 내적 양상이다. 신경조직망에서 형성된 의식 주체는 자각, 인식, 서술 등의 정신 활동을 한다. 이를 통해 내가 나 스스로 살아간다는 것, 세계가 어떠한 존재인지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의식 주체의 관점과 신경조직망의 관점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의식 주체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정신 활동과 내 행위는 부분적으로는 내 의지대로 조정할 수 있고 내 뜻대로 할 수 있다. 신경조직망의 관점에서 보면, 내 정신 활동과 행위는 물질적 구성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이 일들은 자연의 보편적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물질현상이다. 그러나 의식 주체와 신경조직망을 두 개의 독자적인 실체로 보면 양립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 둘을 동일한 한 실체의 양 측면, 곧 외적 측면과 내적 측면이 지니는 차이라고 보면 모순은 극복된다.

물리학은 주체의 자유의지와 양립하는가?

물리학과 주체의 자유의지는 서로 양립하는가? 한 실체의 양 측면으로 보면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자연법칙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지닌 외부의 관측자’가 있다고 할 때, 그는 의지적 행위를 하는 한 주체의 미래 행위에 대해 그 주체가 계획하는 정도 혹은 그 이상 정확히 예측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내가 오른팔을 들겠다’는 의지가 주체적으로 설정되었을 때, 이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이상적인 물리적 서술에서,

  • a. 의지가 설정된 직후 이 사람의 ‘오른팔이 곧 올라가리라’는 사건을 예측할 수 있는가?
  • b. 의지가 설정되기 전에 이 사람의 ‘오른팔이 올라가리라’는 사건을 예측할 수 있는가?
  • c. 이러한 의지 설정의 과정을 서술 또는 예측할 수 있는가?

위 a, b, c 세 문항에 대한 가능한 해답에 따라 생각해볼 수 있는 네 가지 입장과 설명은 다음 표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입장abc설명
첫째XXX인간의 의지에 따른 행위를 물리적으로 서술할 수 없다는 입장. 이는 물리적 서술과 생리적 서술 사이의 ‘상보성'(complementarity)를 내세우는 닐스 보어의 입장에 가깝다. 보어는 하나를 서술하면 다른 하나는 서술할 수 없다고 본다.
둘째OXX첫째 입장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지에 따른 행위에 대해 물리적 서술이 가능하지 않다는 입장이지만, 일단 의지가 발동된 후에는 물리적 서술이 가능하다고 본다.
셋째OXO인간의 의지 설정 과정이나 의지 설정 이후 사건은 물리적으로 서술, 예측 가능하지만, 인간의 의지 발동 그 자체는 정상적인 물리적 서술 대상이 아니다. 이는 로저 펜로스의 입장으로, 인간의 의지 발동 그 자체가 예컨대 양자역학의 파동함수 붕괴(wavefunction collapse)에 해당하는 매우 특별한 물리적 과정이라고 본다.
넷째OOO인간의 의지에 의해 나타나는 모든 물리적 현상들은 원리적으로 물리적 서술 및 예측이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으로, 대부분의 과학자들의 관점이다.


각 입장에 따른 물리적 서술과 관련해, 인식 주체가 스스로 느끼는 ‘자유의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자유의지’란 신체의 물리적 바탕 속에 형성된 그 어떤 상황에 대한 주체적 파악의 한 양상이라고 해석할 때, 이러한 두 상황 파악의 양상이 과연 서로 양립할 수 있는가,하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첫 번째 물음은, 의식의 주체가 물리적 서술의 주체를 겸하는 경우로, 자신이 앞으로 할 일을 물리적으로 예측한다면 ‘자유의지’는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물음이다. 예측과 어긋나는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적어도 예측 내용을 아는 순간 자신의 자유의지는 무의미해진다.

예를 들어, 시험 전에 합격 결과를 안다고 해보자. 결과를 안다면 시험을 볼 필요가 있을까? 서술 주체는 대상의 외적 측면을 서술하는 것이고, 외적 측면을 본다는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닌 다른 주체가 서술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리적 서술의 경우 대상과 주체는 분명한 물리적 경계를 지니고 나누어져야 하므로 서술 주체가 자신의 의식 기구를 대상으로 물리적 서술을 할 수 없다.

제3자가 통보해줄 수 있지만, 양자역학에 따르면 결과를 통보받는 순간, 외부로부터 간섭을 받는 결과가 되므로 통보받은 이후 일에 대해 기존의 예측은 무효다. 따라서 의식 주체는 자신의 미래 행위에 대한 물리적 예측을 해낼 수도 없고 통보받을 수도 없다.

두 번째 물음은, 의식 주체와 서술 주체가 다른 경우(위 표에서 넷째 입장)이다. 원리적으로, 대상의 의지 발동 이전에 대상의 행위를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대상에게 알려 줄 수는 없다. 그 행위 자체가, 대상을 간섭해 대상에 대한 예측을 스스로 깰 것이기 때문이다.

예측과 자유의지가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일은 나타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측을 살리면 대상에 개입할 수 없고, 개입을 하면 그 순간부터 예측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자유의지에 대한 크릭의 견해

크릭은 그의 책 『놀라운 가설』(1994)의 부록에서 ‘자유의지에 대한 후기’라는 짧은 글을 덧붙였다. 그 내용은 우리 두뇌 안에서 일어날 법 한 과정 몇 가지를 가정하고, 이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우리 스스로 자유의지를 행사한다고 ‘느낄 것’이라는 내용이다.

크릭의 가정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두뇌의 한 부분은 미래 행위 계획에 관여한다. 그렇다고 꼭 관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계획을 의식할 수 있고, 최소한 이를 즉각적으로 기억에 떠올릴 수 있다.
  2. 우리는 두뇌의 이 부분이 하고 있는 ‘계산’ 과정은 의식하지 않으며, 과정이 만든 ‘결정’, 즉 그 계획의 내용만 의식한다.
  3. 하나 이상의 계획이 마련되었을 때, 어느 계획에 따라 행동할 것인가 결정할 때도 마찬가지 제약이 있다. 즉 그 결정에 이르게 된 계산 과정은 잊혀지고 결정된 내용만 상기된다.

이러한 가정이 성립될 때, 그 두뇌 안에서 자신의 행위를 의인화할 수 있는 어떤 존재가 형성된다면, 그는 분명히 자신이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느끼리라는 것이 크릭의 주장이다. 두뇌 내의 프로그램된 내용 중 일부를 의식 속에 떠올리고 이를 수행의지와 연결은 시키지만, 어떻게 선택됐는지는 의식하지 않으므로, 자신의 결단에 의해 수행의지가 형성됐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 사람이 ‘계산’ 과정을 놓치지 않고 충실하게 따라가며 결정하는 경우에도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볼 수 있을까? 이것은 꼭두각시놀음에 불과하다. 적어도 물리적 질서를 거스르지 못한다는 점에서 자유의지를 상실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크릭의 가설은 ‘나’와 물리적 질서를 서로 다른 것이라고 나누는 관점이다. 그러나 내 안에 각인된 물리적 질서가 바로 ‘나’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크릭의 가설같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주체는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생각하고 계획하고 자신의 수행의지에 따라 원하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여기서 그 결과가 물리적 질서에 맞추어 일어나는 것이든 아니든 주체는 관여할 바가 아니다. 주체는 현실 세계 안에서 행위를 하고, 그 결과가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다.

반대로, 모든 것이 이미 정해진 일이니 이에 관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이유로 행위를 포기한다고 해도, 그 나름대로 결과가 도출될 것이며, 행위를 했을 때와는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행위를 하든 하지 않든, 주체는 결과에 영향을 주는 행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 행위를 하는 주체라는 “존재는 적어도 ‘그가 생각하는 의미의 세계’ 안에서 주체적인 삶을 영위하며, 그가 이 안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만큼의 의미 있는 삶’을 향유”한다. 이에 반해, 세계의 모든 물리적 질서를 파악하고 있고 미래를 완벽히 예측할 존재가 있다고 해도 그가 이 세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에 관여할 수 없다면, 그 존재가 가진 앎 자체는 무의미하며 그에게 어떤 의미 있는 삶이 주어졌다고 보기 힘들다.

  1. 슈뢰딩거의 인식론

내가 원자들을 움직이는가, 원자들이 나를 움직이는가?

에르빈 슈뢰딩거는 그의 책 『생명이란 무엇인가?』(1944)의 후기에 ‘결정론과 자유의지에 관하여’라는 짧은 글을 추가하였다. 슈뢰딩거는 이 글에서, 자유의지와 관련해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가 그 어떤 기여를 하리라는 가능성을 부정한다. 여기서 슈뢰딩거가 제시하는 두 가지 전제와 여기서 도출되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 내 몸은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순수한 역학적 기구로 기능한다.
  • 그렇지만 나는, 부정할 수 없는 직접 경험에 의해, 내가 내 몸의 움직임을 지시하고 있음을 안다.

여기서 도출되는 슈뢰딩거의 결론은 “내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원자들의 운동’을 조정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슈뢰딩거의 종교적 해석은 여기서는 생략. 책 p.162쪽 참조.) 이 말은 주체적 의식을 지닌 ‘나’라는 것이 이런 물질적 현상에 내재하는 ‘존재의 한 양상’이고, 이 ‘양상’ 곧 ‘나’는 물질 세계의 적어도 한 부분을 내 의지대로 움직인다고 스스로 파악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마음의 상태를 일으키는 것도 물질, 마음의 조정에 따라 움직이는 것도 물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물질이기는 하지만, 이런 마음 상태를 가진 물질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주도하는 마음에 따라 물질도 움직여야 하므로 곧 마음 자신이 물질세계를 조정한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는, “내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원자들의 운동’을 조정하는 존재”라고 할 때, 그 조정의 뜻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물리적인 힘 외의 다른 영향력을 가했다거나 물리적인 상호작용 없이 원자들의 물리적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뜻일 리는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나’는 물리적으로 볼 때 아무런 역할이 없다. 그런데 왜 “내가 원자들의 운동을 조정했다”고 할까? ‘물리적으로 볼 때’ ‘나’는 이 물질과 다른 존재가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내가 원자들의 운동을 조정했다’고 하면,이때 ‘나’는 ‘물질의 한 양상’이며 ‘물질의 또 다른 측면’으로의 ‘나’를 말하는 것이 되며, 이 측면의 ‘나’가 ‘수행의지’를 가지면 이후 발생할 물질적 상황과 인과 관계를 형성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서 ‘수행의지’는 이전의 물질적 상황에 의해 마련된 것일 테고, 그런 의미에서 ‘원자들’이 또한 ‘나’를 조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내가 내 의지를 의식한다면 그 아래의 원자들의 질서가 어떻든 그것은 현재의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여기서 모순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의 이원론적 사고 때문이다. ‘나’와 물질이 하나라는 사실만 깊이 생각해보면 문제는 의외로 간단해질 수 있다.

의식은 오직 하나인가?

슈뢰딩거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주체가 지닌 개인적인 성격을 부정하고, 세계 전체에 오로지 하나의 주체만이 형성된다고 본다. 의식은 결코 하나 둘 셀 수 있는 복수의 형태로 경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의식은 결코 복수(in the plural)로 경험되지 않는다. 오직 단수(in the singular)로만 경험된다. … 자아가 여럿이라는 관념, 정신이 복수라는 관념이 어떻게 생겨날까? … 몸들이 무척 많다. 따라서 의식, 곧 마음도 여럿일 거라는 생각이 매우 그럴듯한 가설로 들린다. … 이러한 생각은 곧 몸의 숫자에 해당하는 만큼의 많은 영혼들의 발명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들 또한 몸처럼 소멸하는가, 아니면 … 독자적인 존속이 가능한가 … 이것이(영혼들이) 소멸한다는 생각은 입맛에 거슬리고, 소멸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이러한 복수성의 가설 바탕에 깔린 사실들을 망각하거나 무시하고 부정한다.”

Erwin Schrödinger, 1944, What is life? p.94 / 『물질, 생명, 인간』. p.165.

여기서 슈뢰딩거가 부정하는 것은 다수의 의식이다. 의식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생명조차도 다수의 생명이라는 것이 우리들의 잘못된 관념의 소산이듯이, 다수의 의식 혹은 다수의 영혼이라는 것도 그럴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유일한 대안은 의식이 단수라고 하는 우리의 직접적인 경험에 출실하자 … 의식이 복수라는 것은 알려진 일이 없다. 단지 하나일 뿐이며, 여럿으로 보이는 것은 이 하나의 다른 국면들인데, 이것들 또한 미망에 의한 것이다.”

Erwin Schrödinger, 1944, What is life? p.95 / 『물질, 생명, 인간』. p.166.

독자적인 의식을 가진다는 생각은 경험의 한계로 인한 미망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경험의 내용이 바뀔 경우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의 경험과 기억의 총체가, 다른 사람의 것과 완전히 구분되는, 한 (독자적) 단위를 형성한다고 하는 부정할 수 없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것을 ‘나’라고 한다. 이 ‘나’라는 것이 무엇인가? … (젊은 시절의 나에 대해) ‘나였던 그 젊은 이’라고 3인칭으로 부를 수도 있다.”

Erwin Schrödinger, 1944, What is life? p.95-96 / 『물질, 생명, 인간』. p.166.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식은 서로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의식을 일으키는 바탕, 곧 두뇌만 보자면 다른 데서 일어나지만, 그 두뇌 안에 담긴 내용으로 보면 공통점이 많다. 여기서 먼저 결정해야 할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의식을 담는 그릇이냐, 내용이냐?

그런데 앞서 우리는 물질과 의식이 둘이 아니고 한 실체의 두 측면이라고 보았다. 그릇과 내용은 같은 것의 두 측면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식이 담긴 그릇의 범위는 어디까지 뻗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생긴다.

의식이 분자 하나, 세포 하나에 담길 수는 없다. 그렇다면 두뇌 하나에는 담기는가? 그렇게 보이기도 하지만, 고립된 두뇌가 의식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 측면들이 나타난다. 두뇌들 간의 공동작업으로 의식이 형성되지, 단일 두뇌만으로는 적어도 지금 우리가 아는 의식은 형성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의식을 담는 그릇은 적어도 우리 사회가 만들어 내는 문화 공동체까지 가지 않을 수 없다. 의식은 많은 점에서 문화 공동체의 공유물이며, 각각의 의식은 이 공유물의 약간씩 다른 복사본이라고 말할 수 있다.

  1. 낱생명 의식과 온생명의 의식

낱생명과 온생명 논의로 정리해보자.

“우리의 의식은 각각 낱생명적인 의식을 지니면서도 전체가 서로 엮이고 유통이 되면서 마치도 온생명이라는 하나의 큰 그릇에 담긴 하나의 의식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온생명 전체로 보자면 하나의 큰 의식이 담겨 있다고 하겠지만, 각각의 낱생명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하나로 연결된 전체 의식의 한 복사본에 다시 자체만의 특성을 가미한 변이본을 지니는 셈이다.

즉 우리가 실제로 접하는 의식이라는 것은 온생명 안에서 다듬어진 하나의 큰 의식이 각각의 작은 그릇으로 나뉘어 담기면서 그 그릇의 특성이 첨부되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전체로서는 온생명 의식을 이루는 가운데, 그 안에 다시 서로 간에 많은 유사성을 지니면서도 또 독자적인 양상을 유지해 가는 낱생명 의식이 나타나며, 이러한 여러 층위의 의식들이 서로 간에 관계를 맺으면서 ‘의식 세계’라고 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물질, 생명, 인간』. p.168-169.

이 글은 『물질, 생명, 인간』(장회익, 2009, 돌베개)의 3장 내용 중 일부를 요약한 것입니다.
요약, 정리 : 황승미 (녹색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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