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측면 일원론과 의미의 심층구조
올해 3월에 나온 [이중측면 일원론과 의미의 심층적 구조 Dual-Aspect Monism and the Deep Structure of Meaning](https://bit.ly/3TJhZe4)는 장회익 선생님의 일원이측면론과 관련하여 살펴볼만한 좋은 연구서입니다.
하랄트 아트만슈파허(Harald Atmanspacher)와 딘 리클즈(Dean Rickles)의 공저입니다. 아트마슈파허는 독일 출신의 물리학자로서 스위스 취리히 대학의 명예교수입니다. 그는 양자얽힘 개념을 비유로 사용하여 몸-마음 문제를 제3의 중립적 영역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딘 리클즈는 영국 출신의 물리철학자로서 호주 시드니 대학의 현대물리학의 역사와 철학(History and Philosophy of Modern Physics) 교수입니다.
책은 먼저 이중측면 일원론의 의미를 분명하게 밝히고 데카르트-라이프니츠-스피노자의 논쟁을 거쳐 헤겔과 셸링의 자연철학을 살핍니다. 아트만슈파허와 리클즈의 책에서 이중측면 일원론은 (존재론적으로) 하나인 몸/마음은 신경중립이며, 몸과 마음은 (인식론적으로) 구별되는 두 측면이라는 것입니다.
이 책은 이중측면 일원론을 의미의 심층구조와 연결시키는 데 주안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브렌타노와 후설의 '지향성' 논의를 거쳐 프레게의 의미와 지칭 문제, 카시러와 상징형식, 나아가 비트겐슈타인의 논의를 간단히 검토합니다. 또 메를로-퐁티부터 생태심리학까지 지향성 논의를 다루고 바이츠제커와 젠들린를 거쳐 죄근에 관심을 모으고 있는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주장까지 소개합니다.
여기까지가 기본 배경이고, 2부에서 이중측면 일원론으로서 세 가지 접근을 상세하게 다룹니다. 널리 알려진 볼프강 파울리와 칼 구스타프 융의 논의를 정교하게 논의합니다. 다음으로 아서 에딩턴과 존 윌러의 주장을 다룹니다. 정보의 문제뿐 아니라 관계와 구조의 문제, 의미회로 등을 다룹니다. 여기에는 양자실존주의와 후기칸트주의까지 등장하는데, 보어의 상보성 개념과 공동체 문제도 포함됩니다. 끝으로 데이비드 봄과 바실 힐리의 범심론적 접근을 검토합니다.
200쪽 남짓 되는 분량으로 이중측면 일원론의 여러 면모를 특히 의미의 심층구조로 상세하게 검토해 볼 수 있는 유익한 연구서입니다. 특히 끝부분에 근본생태주의(Deep Ecology)를 다루고 있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기존의 이중측면 일원론 관련 논의에 비해 이 책이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양자역학 등의 현대물리학의 함축들을 가져오면서도 가령 코펜하겐 해석 등에서 강조하는 주체와 대상의 얽힘이라든가 양자 대상의 분리불가능성을 강조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몸과 마음의 두 측면에 앞서서 이와 별개의 중립적인 제3의 실체를 강조합니다. 몸과 마음 또는 물질과 정신은 어느 쪽도 실체 또는 실재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제3의 실체(Tertium quid)가 보이는 두 측면이 물질과 정신 또는 몸과 마음입니다. 제3의 실체는 이음매 없는 정신-신체적으로 중립적인 전체(a seamless, psychophysically neutral whole)를 이룹니다.
저자들의 관심은 여러 다원론적 실체들이 하나가 되는 양상이 아니라 이음매 없는 단일한 실체, 즉 일원론적 실체가 어떻게 두 측면으로 분화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현대물리학의 함축을 가져올 때 이 책의 저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의미(meaning)'입니다. 이 '의미'는 영어 표현 signification과 직접 연관됩니다. 이것은 'signifiant/signifier 기표(記標)'와 'signifié/signified 기의(記意)'의 연결입니다. 대략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관계도 기표와 기의의 관계로 재구성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표와 기의를 나누어 언어의 문제를 다루자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제안은 비단 언어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소쉬르나 일반언어학을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대신 기표/기의의 문제를 분석철학의 전통에서 바라봅니다. 분석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 중 하나가 지칭관계(reference relation)와 "~에 관하여(aboutness)"이며 그런 점에서 표상이론(theory of representation)이 핵심적임을 강조합니다. 몸/마음 관계 또는 물질/정신 관계에서도 결국 가장 중요한 개념이 바로 표상이라는 겁니다.
또 meaning은 영어 표현으로 '의미(sense)'가 되기도 합니다. 저자들이 '의미'라 부르는 것은 가령 making sense of나 meaning of life 같은 표현에 나오는 개념입니다. 意味라는 한자어 조어도 단순히 '뜻'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 맥락의 '의미'는 지칭 또는 표상과 성격이 다릅니다. 말이 되는가, 앞뒤가 맞는가, 왜 그러한 것이 그렇게 있어야 하는가 등의 문제를 다루는 '의미'도 몸/마음 또는 물질/정신의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깊이 해명해야 할 주제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책에서 아트만슈파허와 리클즈가 해명하고 새로 주장하려는 것은 실체일원론 특히 물리주의 또는 물질주의를 벗어나면서도 대개 데카르트에게 귀속시키는 이원론도 벗어나기 위해 이중측면 일원론이 가장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현대물리학 특히 양자물리학과 연관되는 파울리/융, 에딩턴/윌러, 봄/힐리의 세 접근을 상세하게 규명함으로써 정당화하고 옹호하려 합니다.
저는 장회익 선생님의 일원이측면론이 양자역학에 대한 자연철학적 논의와 맞물린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는 코펜하겐 해석이나 최근 널리 퍼지고 있는 신비주의적 접근과는 결이 전혀 다릅니다. 오히려 양자역학의 [공리 4]에서 상태변화 대신 상태전환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 측정이라는 물리학적 개념보다 변별체와 성향이라는 자연철학적 개념을 강조함으로써 주체와 객체(대상) 사이의 관계를 더 적합하게 서술함으로써 서로 잘 맞아떨어지는 조화로운 자연철학의 체계를 만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 맥락에서 아트만슈파허와 리클즈의 이 최근 저서가 여러 모로 유익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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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정오표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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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철학에서 이원론을 옹호하는 철학자는 매우 적지만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2013년에 나온 논문집 "현대의 이원론: 방어"에 실려 있는 14편의 논문은 매우 설득력 있게 이원론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데이비드 스크르비나의 논문 "이원론, 이중측면론 및 마음"은 많은 참고문헌들 속에서 이원론과 이중측면론을 대비시키면서 이중측면론을 옹호하는 흥미로운 접근입니다. 25쪽이라는 짧은 분량이라서 아직은 시론적이지만, 마음의 철학에서 이중측면론을 발전시키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고 의미 있음을 보여줍니다.
David Skrbina (2013)Dualism, Dual-Aspectism, and the Mind
In: Andrea Lavazza, Howard Robinson (eds.) (2013)
Contemporary Dualism: A Defense
https://doi.org/10.4324/9780203579206
첨부파일 : Contemporary-Dualism-A-Defense-Andrea-Lavazza-Howard-Robinson-eds..pdf
공리 4에 '나'가 관계될 지점이 있을까요? 양자역학을 제가 뭘 알겠습니까마는 제가 이해하는 공리 4에는 그런 자리가 없다 싶은데요... 자칫 사람이 들여다보면 죽은 상태가 되고, 안 들여다보면 산 것과 죽은 것이 1/2씩 섞여있는 상태다 하는 식의 신비론을 합리화하게 되는 건 아닐지 의문입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장회익 선생님께서도 저연찰학 온라인 세미나에서 일원이측면론과 양자역학의 '서울해석'이 연결되지 않는다고 대답하신 것 같습니다.
양자역학에 대한 장회익 선생님의 새로운 공리 중 공리4를 '사람'을 도입하여 말하기 시작하면 자칫 코펜하겐 해석이든 1970-80년대 미국 서부에서 활발했던 신비주의 해석이 개입할 여지가 많아집니다. 그래서 '사람' 대신 '변별체'라는 다소 부자연스러운 개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흔히 스피노자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위의 글에서 소개하고 있는 아트만슈파허와 리클즈의 "이중측면 일원론"에서도 '사람'이란 존재론적 개념이 등장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후자의 경우라면 몸(물질)도 마음(정신)도 아닌 제3의 실체로서 중립적인 존재를 상정하고 이것의 두 측면으로 몸(물질)과 마음(정신)을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양자역학에서 측정의 상황을 생각하면 사건을 일으킬 성향을 지닌 대상과 사건을 유발할 수 있는 변별체가 만나서 변별체에 어떤 흔적이 남을 때 대상은 새로운 상태로 전환됩니다. 도식화하면 그 둘의 만남에서 변별체에는 흔적이 남고 대상의 상태는 전환됩니다.
그런데 더 생각을 하다 보면, '변별체'라 부르는 것도 물체이고 '대상'이라 부르는 것도 물체입니다. 물체라는 말은 영어/독일어/프랑스어로 object/Objekt/objet로서 '위에서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란 의미이고, 애초에 18세기 일본의 통역가 미우라 바이엔이 한자어로 物体(ぶったい 붓타이)라는 번역어를 처음 제안했을 때에도 그것은 그냥 '대상'이란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변별체와 대상은 같은 것의 다른 측면일 수 있습니다. 일종의 확장된 일원이측면론입니다.
일원이측면 이야기에서의 두 측면은 존재하는 세계의 겉면으로서 물질 세계와 안쪽 면으로서 '나'의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건 야기 성향을 가진 존재물과 사건 유발 능력을 가진 변별체는 그때 그때 무엇을 서술의 중심에 놓는가에 따라 달리 규정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애초부터 '변별체'로만 지위를 부여받는 존재물이 따로 있는 건 아닐 겁니다. 그러나 이 둘 모두 존재 세계의 겉면인 물질 세계 안에서 자연의 기본 원리에 따라 존재하고 운행하는 존재물임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일원이측면론의 '두 측면' 이야기를 "변별체와 대상" 사이의 이야기로 끌고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건 '확장'이 될 수 없지 않을까요? 그보다는 '범주 혼동'에 더 가까울 것 같은데요...
만약 '관측'이라는 점과 관련해서 '관측 대상'을 뺀 나머지 세계 전체가 '관측 주체'가 된다는 이야기에 대해 말씀하시는 거라면 여기에서도 범주들을 잘 가려 보아야 할 것 같아요. 어떤 대상에 대한 관측 장치를 마련해두고 그 관측 장치에 흔적이 남았다고 할 때 대상의 상태 전환은 분명 관측 장치를 운용하는 '사람'이 와서 기록을 확인할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관측 장치가 조우하여 사건, 또는 빈-사건을 일으켰을 때 일어난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관측의 주체'는 대상을 뺀 나머지 세계 전체(관측 장치를 포함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변별체'는 이름이 그렇게 붙어서 그렇지 관측 장치의 연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건을 유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물 일반을 가리키는 것이지 관측 장치에 속한 물체만을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죠. 도리어 관측 장치는 공리 4에 기술된 사건 야기 성향을 가진 존재물이 사건 유발 능력을 가진 변별체와 조우하여 사건을 일으키거나 또는 빈-사건을 일으키며 상태가 전환된다는 자연의 기본 원리를 응용한 물체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관측 장치는 관측 주체에 속하지만 변별체는 '나'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봅니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변별체'라는 명칭을 바꾸자고 제안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관측 장치'와 '변별체'를 같은 범주에 두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중요한 지적을 하셨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세 가지 접근이 있겠습니다.
(1) 양자역학의 철학 일반에서의 논의입니다. 동아시아의 주체(主體)와 객체(客體)는 '주인'과 '손님'이라는 의미에서 출발합니다. 실상 이것은 '일인칭'과 '삼인칭'의 차이이고, 따옴표 안에 넣은 '나'와 흔히 말하는 '주체'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유럽 언어에서 Subjekt/Objekt는 그림자를 드리우는(jekt) 것의 위(ob)에 있는가 아니면 아래(sub)에 있는가의 구별입니다. Subjekt는 드리워진 그림자가 있는, 수면 아래의 것이고 Objekt는 그림자를 드리우는, 수면 위의 것을 가리킵니다. 물론 이런 어원 분석이 별로 도움이 안 될 때가 많지만, 주인/손님 관계와 수면 위/아래의 관계는 다릅니다.
양자역학의 한 해석(결풀림 해석 또는 신정통해석)에서는 대상과 측정장치 외에 세 번째 계로서 '환경'이라 부르는 것을 상정합니다. 실험실의 먼지 같은 것도 그런 것이고 상자 속 고양이의 많은 털도 그런 것입니다. 그 세 번째 계에 대한 정보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결풀림(decoherence)의 형식체계에서는 그 세 번째 계의 정보를 평균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과정에서 소위 양자 중첩으로 되어 있던 상태가 측정장치에서 확인할 수 있는 변별력 있는 값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을 '눈금 상태(pointer states)' 또는 '눈금 변수(pointer variable)'이라 부르면서 양자 중첩과 구별합니다.
적어도 결풀림 형식체계에서는 측정장치(관측장치)와 관측자와 눈금 상태는 사실상 모두 같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결풀림 형식체계에는 '주체'나 '나'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2) 다음은 장회익 선생님의 접근을 최대한 살펴서 얻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해하기에는 사건 유발 능력을 가진 변별체는 흔히 물리학에서 측정장치라 부르는 것을 장회익 선생님이 자연철학의 용어로 바꾸어 표현하신 것에 불과합니다. 즉 측정장치와 변별체는 역할과 기능과 의미에서 같은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둘은 사실상 동의어입니다. 단지 같은 범주에 두는 것이 아닙니다. 이 '변별체' 개념은 결풀림 형식체계의 눈금상태 또는 눈금변수와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장회익 선생님의 접근에서 측정장치(=변별체)에 남은 흔적은 이것을 바라보는 어떤 '사람'의 이해와 굳이 구별되지 않습니다. 측정장치(=변별체)는 곧 주체가 됩니다.
그러나 측정장치이든 변별체이든 모두 '삼인칭'에서 보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바로 '일인칭'으로 바꿀 수 있는지는 더 고민해 볼 문제입니다.
(3) 끝으로 제 관점에서 더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합니다. 제가 몇 년 전부터 공부해오고 있는 카를로 로벨리의 '관계적 양자역학'(Relational Quantum Mechanics, RQM)이라는 틀에서는 애초에 '삼인칭' 서술을 긍정하지 않습니다. 모두 '일인칭' 서술일 뿐이라고 봅니다. 관계적 양자역학이라고 해서 같은 대상에 대해 관찰자1과 관찰자2가 다른 서술을 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런 상대주의로 가면 물리학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대상에 대한 관찰자1의 서술과 "대상+관찰자1"에 대한 관찰자2의 서술이 달라도 물리학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음을 주장하고 그를 뒷받침하는 형식체계를 증명합니다. 이 과정에서 '정보이론'이 개입하는데 저는 이것을 메타이론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양자역학에 대한 일인칭 서술에서 자연스럽게 '나'가 등장합니다.
저는 양자역학의 측정의 문제는 심리철학의 몸-마음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근본적으로 그 두 문제는 동질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따로 무슨 글을 더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변별체'와 '측정장치'를 같은 것이라 볼 수는 없지 않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변별체(discerner)'라는 이름이 혼동을 가져올 수 있을 듯 하니 우선 용어 정리부터 해보죠. [공리 4]에는 "어떤 대상 존재물이 상태 Ψ = ... 에 놓여 있다가 할 때, 지점 j에 해당하는 위치에 '사건유발 능력을 지닌' 외부 물체를 설치해 대상과 접촉시킬 경우, ...."(p.234)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해설을 하는 이어지는 글 가운데에 '사건 유발 능력'을 지닌 외부 물체에 대해 ""이것이 특정 위치 j에 놓일 경우, 만일 대상의 상태가 특정 위치 j에 해당하는 고유상태 φj 자체라면 반드시 사건을 유발해 이 사건의 흔적을 자신 안에 남기게 되는" 외부물체를 말한다"라고 설명하면서 "상태 관측을 위해 이러한 물체를 인위적으로 설치했을 때, 이를 '변별체discerner'라 부른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설명에서 '인위적으로 설치'하는 것을 중시한다면 변별체와 측정장치를 같은 것이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대상 존재물"과 이에 대별되는 "'사건유발 능력을 지닌' 외부 물체"라는 본연의 의미를 중심에 둔다면 전자 뿐만 아니라 후자 역시 존재론의 범주에 속한 개념이지 인식론적 개념은 아니라고 봅니다. [공리4]를 인식을 위한 과정에 응용하여 인위적으로 '사건유발 능력을 지닌 외부 물체'를 설치하여 이를 '변별체', 또는 '측정장치'라 본다면 이 때에는 인식론적 맥락 위에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이 역시 존재물의 상태 전환에 대한 자연의 기본 원리(존재론적 맥락)를 인식 과정에 응용(인식론적 맥락)한 것이라 보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이런 점에서 장회익 자연철학의 '일원이측면'론의 두 개의 측면 이야기는 대상 존재물과 사건유발 능력을 지닌 외부 물체 사이의 관계 이야기와는 관계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생각합니다. 일원이측면은 존재세계에 상호작용하지 않는 겉면과 안면이 있다는 이야기이지만 [공리4]는 존재세계의 겉면에서 일어나는 상태 전환에 대한 자연의 기본원리 이야기이므로 존재세계의 안쪽 면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있다 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 논문이 도움이 되겠습니다.
Matthew J. Donald (2002). Neural Unpredictability, the Interpretation of Quantum Theory, and the Mind-Body Problem. https://doi.org/10.48550/arXiv.quant-ph/0208033
Ludwig, K. (2003). The Mind‐Body Problem: An Overview. In: Stephen P. Stich, Ted A. Warfield (eds.) The Blackwell Guide to Philosophy of Mind. Blackwell. pp. 1-46. (https://bit.ly/3RFjV5z)
첨부파일 : The-mind-body-problem-An-overview-Kirk-Ludwig-2003.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