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대상의 상태는 입자도 파동도 아니고 상태함수일 뿐이라고 할 때 새로 발생하는 문제는 없을까? 다시 써야 하는 것들은 무엇무엇일까?
1. 입자와 파동 개념은 완전히 버려야 하나?
제가 이해하는 바로 양자역학의 장회익 해석, 혹은 서울 해석의 '입자-파동 이중성' 문제에 대한 입장은 "입자도, 파동도 아니고 상태함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소위 입자와 같은 성격도 보이고, 파동과 같은 성격도 나타나지만 그것은 모두 '상태함수'의 성격에 기인하는 것일 뿐 입자인 것도 아니고 파동인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알갱이에 빗대어 이해하거나 물결과 같은 파동에 빗대어 이해하는 것이 불필요한 고전적 사고의 찌꺼기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소박한 사고는 벽에 부딪히게 되는데요, 그럼 우리가 알갱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원자도, 분자도 알갱이라고 보아서는 안 될까요? 빨강색 부위의 파장은 630~750 nm 사이이고, 파랑색 부위의 파장은 450~495 nm 사이라며 빛은 곧 전자기파라는 파동이라고 들어왔는데 이 개념도 버려야 하는 걸까요?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그 원자는 다시 전자와 핵으로, 또 그 핵은 중성자와 양성자로, 또 그것은 쿼크로... 하는 식의 알갱이들이 존재 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상식은 이제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 걸까요? 장회익 해석, 혹은 서울 해석에 입각하면 이러한 상식적인 세계상을 모두 다시 써야 하는 걸까요?
입자와 파동이라는 관념을 모두 버려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소위 '이중성' 문제에 대해서만 그런 관념이 부적절한 것인지, 아니면 존재 세계의 기초를 '사건야기성향'과 '변별체' 개념으로 다시 써야 하는 것인지 새 자연철학을 받아들일 때 그 결과는 어디까지 어떻게 미치게 될지 궁금합니다.
2. 바탕구도 안에서 입자와 파동의 자리는 어디인가? 특성? 상태? 바탕관념?
아울러 고전역학의 앎의 틀과 양자역학의 앎의 틀 각각에서 '입자'와 '파동'에 대한 관념이 어느 자리에 들어가는 개념인지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고전역학의 앎의 틀에서는 대상의 특성은 질량과 받고 있는 힘, 대상의 상태는 대상이 '점유'하고 있는 위치와 운동량으로 규정하였는데 이 때 '입자'와 '파동' 개념은 어느 자리에 들어가게 되나요? 대상을 빗대어 이해하는 바탕관념의 한 종류일까요? 그 자리는 양자역학의 앎의 틀에서도 마찬가지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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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하고 의미 깊은 질문인데, 오늘 세미나에서 다루지 못해 아쉽습니다. 우선 장회익 선생님의 견해는 『과학과 메타과학』 6장 “이론과학의 성격과 유형” pp. 174-177을 다시 읽어보시길 강추합니다. '서술모형'은 장회익 선생님의 독특한 개념으로서, 동역학의 의미기반 중 하나입니다. 의미기반은 서술공간, 서술모형, 서술양식의 세 가지 외에 서술형식(국소대칭성)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원론적으로 입자/파동을 나누는 서술모형은 동역학 안에서 명료하게 '특성'에 속합니다. 약간 테크니컬하게 말하면, 동역학의 특성이라는 것은 해밀턴 역학에서 '특성함수'라는 것으로 서술됩니다. 이를 흔히 해밀터니안 함수(Hamiltonian)라고 부릅니다. 만일 특성함수가 $H(x, p) = \frac{p^2}{2m} + V(x)$로 주어진다면, 질량이 $m$인 '입자'에 퍼텐셜 $V(x)$가 작용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퍼텐셜은 $F = -\frac{dV}{dx}$와 같이 그 공간 미분이 힘과 연결됩니다.
파동의 경우 특성함수(해밀터니안 함수)의 모양은 훨씬 복잡합니다. 대략 말하면, $H(\psi, \phi)$와 같이 파동과 그에 대한 일종의 운동량 파동의 복잡한 함수 모양으로 주어집니다.
쉽게 말해서 특성함수만 보면 그것이 입자인지 파동인지 알아챌 수 있습니다.
세계를 이루고 있는 물질적 대상이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곡식알갱이나 물결과 비슷한 것으로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태도입니다.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에서도 일상 속에서 만나는 '흙', '물', '숨', '불'을 근본적인 것으로 보고 세상의 모든 것이 이 네 가지로 이루어졌다는 관념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자연철학이 더 확장하면서, 이 네 원소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21세기에 여전히 '입자'이니 '파동'이니 하면서 따지고 있는 것이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의 네 원소를 가지고 세상을 이해하려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자이론이 바로 그것을 지적해 주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새 자연철학에서는 '입자'니 '파동'이니 하는 불필요한 개념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그 원자는 다시 전자와 핵으로, 또 그 핵은 중성자와 양성자로, 또 그것은 쿼크로... 하는 식의 알갱이들이 존재 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상식"에 대해 틈 나는 대로 제 생각을 덧붙여 보겠습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 '상식'은 자연철학의 관점에서는 크게 오도된 것이며 수용하지 않는 쪽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물리학의 관점 또는 일상적 대화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을 뿐 아니라 근사적으로는 충분히 그렇게 해도 될 것입니다.
제가 이 자연철학 게시판에서 자주 그런 의견을 제시합니다만, 특히 물리학자들이 하는 이야기가 독자(오디언스)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전문적인 물리학자라면 자신이 다루고 있는 소위 '입자'가 정말 말 그대로 곡식알갱이나 깨알이나 크기가 $10^{-15}$미터인 아주 작은 구슬 같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비전문가에게 말할 때(심지어 대학 강의에서도)에는 정말 그런 구슬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합니다. 그런데 비전문가 입장에서는 전문적인 내용을 소화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대중화된" 또는 "직관적인 비유로 해설된" 버전만을 접하게 됩니다.
제 의견으로는, 자연철학에서는 그러한 비유적 이미지를 넘어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