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시간, 인과구조, 시공간 나누어 꿰매기
1908년에 헤르만 민코프스키가 도입한 '세계선'이란 개념은 시간-공간 나아가 시공간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자연철학의 관점에서 상대성이론이 가져온 가장 큰 혁신은 시간과 공간이 독립되어 있지 않고 4차원 시공간으로 묶여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여하간 시간과 공간은 근본적인 차이를 지닙니다. 시간은 본질상 인과구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건의 원인은 반드시 그 결과보다 앞서 일어나야 합니다. (이러한 인과의 비대칭성에 반대하는 역향인과(backward causation)도 시공간 철학에서 상세하게 다루어지지만, 이것은 일단 차치하기로 합니다.) 그런 면에서 시간은 공간과 달리 일방향성을 지닙니다. 과거로부터 미래로는 갈 수 있지만 반대로는 안 됩니다. 따라서 4차원 시공간을 다루는 이론에서는 시간의 순서를 별도로 덧붙여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흔히 아핀 구조 또는 관성구조라고 부르는 것과 연관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간과 공간이 쉽사리 분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특수상대성이론에서는 일정한 속도로 반듯하게 나아간다는 조건이 충족된다면 그 어떤 좌표계도 모두 동등합니다. 내가 정지해 있는지 네가 정지해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 근거는 없습니다. 그나마 가장 근접한 개념이 빛의 매질로서 에테르의 정지좌표계인데, 마이컬슨 실험 등을 통해 그에 대한 신빙성이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게다가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시간은 공간과 직접 섞입니다. 4차원 시공간의 네 좌표 중 어느 것을 어떻게 시간으로 선택할 수 있을지 불명확합니다. 4차원 시공간에서 어떤 쪽을 시간으로 삼을 것인지는 순전히 선택의 문제이고 아주 자유롭습니다. 시공간의 인과구조를 해치지 않는다면 어떤 시간이든 다 허용됩니다. 이것을 시공간 나누어 꿰매기(foliation)라고 부릅니다.
https://en.m.wikipedia.org/wiki/Foliation
아래 그림을 통해 이를 더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구공을 당구대에서 굴리면서 고정된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과 당구공을 따라가면서 촬영하는 두 경우를 살펴봅니다.
(그림 출처: George F. R. Ellis, Ruth M. Williams, Mauro Carfora (2000). Flat and Curved Space-Times. Oxford University Press. 2nd ed. p. 8)
이 두 카메라(관찰자)의 관점을 비교해 보면, 둘 중 어느 쪽이 정지해 있는 것인지 그리고 어느 쪽이 '진짜'인지 판단할 기준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두 카메라 모두 온전하게 이 당구공의 운동을 서술할 수 있습니다.
(그림 출처: George F. R. Ellis, Ruth M. Williams, Mauro Carfora (2000). Flat and Curved Space-Times. Oxford University Press. 2nd ed. p. 8)
위의 그림에서 시간순으로 차곡차곡 쌓아놓은 스틸사진들을 옆으로 살짝 밀어서 비스듬하게 놓으면 관찰자 B의 관점에서는 당구공이 정지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당구공의 세계선을 당구대의 세계선이 수직 위로 올라가는 좌표계에서 그리면 아래와 같습니다.
(그림 출처: George F. R. Ellis, Ruth M. Williams, Mauro Carfora (2000). Flat and Curved Space-Times. Oxford University Press. 2nd ed. p. 22)
민코프스키 이전에는 물체의 운동이라는 것을 서술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여겨졌습니다. 민코프스키는 시간과 공간을 합하여 시공간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고 이 4차원 시공간에서 물체의 운동은 '세계선'이라는 곡선으로 표현됨을 보여주었습니다. 세계선을 정확히 들여다 보면 물체가 그 선을 따라 움직이거나 어떤 방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선이 곧 그 자체로 물체의 운동입니다. 세계선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4차원 시공간과 세계선으로 표현된 세상은 아무런 변화도 없는 세상입니다. 내가 손을 뻗쳐 컵을 들고 컵 안의 물을 마시는 '운동'은 4차원 시공간에서 고정된 세계선으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과 직관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모종의 변화가 있는 것이죠. 아무런 변화도 없는 이 파르메니데스의 세상에서 움직임과 변화와 운동을 말하려면 시간축과 공간축을 어느 부분 또는 어느 방향으로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주어진 세계선이 있는 시공간에서 시간과 공간을 골라낸다는 것은 좌표축(시간축과 공간축)의 방향을 선택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이 위에서 말한 '나누어 꿰매기(foliation)'입니다. 그런데 이 나누어 꿰매기는 선택지가 무수히 많습니다. 이 선택지들을 가르는 어떤 파라미터 같은 게 있을 텐데, 그것이 바로 좌표계들 사이의 상대속력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혼동하면 안 되는 것은 이 '상대속력'은 물체들의 속력 같은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좌표계와 저 좌표계를 나누는 파라미터에 불과합니다. 물리적 의미를 살펴보면, 서술자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시간과 공간(흔히 좌표계라 부르는 것)이 기차 플랫폼인가 기차 안인가, 그 기차는 속력이 얼마인가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스케일을 키우면, 지구인가, 우주선인가, 우주선의 속력이 얼마인가라고 말해도 됩니다. 위의 그림에서는 당구대의 세계선과 당구공의 세계선 사이의 각 $\alpha$가 그런 파라미터가 됩니다.
4차원 시공간에서 어떤 물체든 그 물체가 그리는 세계선은 시간축으로 충분히 자격이 있습니다. 이것을 민코프스키는 '고유시간(Eigenzeit)'이라 불렀습니다. 영어로는 proper time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독일어로 'eigen(아이겐)'이라는 어근은 "개인적인, 고유한, 특정한"이란 의미를 지닙니다. 예를 들어 Eigenschaft는 "속성, 본성, 신분, 특징"을 의미합니다. 양자역학에서 나오는 '고유값', '고유상태'는 독일어의 Eigenwert, Eigenzustand의 번역인데, 영어로 번역할 때에도 eigenvalue, eigenstate와 같이 독일어 표현을 그대로 가져와서 공식 용어로 정립되었습니다.
고유시간은 대략 말하면 관찰자가 정지해 있는 것으로 관찰되는 좌표계에서 잰 시간입니다. 흔히 "함께 움직이는 좌표계의 시간(time in the co-moving frame)"이란 표현을 많이 씁니다. 표준적인 시공간 도표는 시간축을 수직방향으로 놓는데, 이전에 상대속도와 기울기를 다룰 때 올린 아래 그림은 시간축을 수평방향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도 시간축이 수평방향입니다.
위의 그림에서 OT뿐 아니라 OA, OB 모두 세계선입니다. OT가 두 자동차 밖에 있는 땅의 세계선이므로 곧 땅의 시간축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OA와 OB는 각각 두 자동차 A와 B의 세계선이므로 각각 두 자동차의 시간축입니다.
검은색 세계선과 초록색 세계선의 고유시간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검은색 세계선의 고유시간이 $t=\mathrm{OC}$이면, 초록색 세계선의 고유시간은 $t_0 = \mathrm{OD}$입니다. 피타고라스 정리를 이용하면 분홍색 삼각형에서 $$\mathrm{OD}^2 = \mathrm{OC}^2 + \mathrm{CD}^2$$입니다. 탄젠트는 높이와 밑변의 비이므로 $$\tan\alpha=\frac{\mathrm{CD}}{\mathrm{OC}}$$이고, 이로부터 $$\mathrm{CD}=\mathrm{OC} \tan\alpha$$를 얻습니다. 따라서 $$\mathrm{OD}^2 = \mathrm{OC}^2 + \mathrm{CD}^2 =\mathrm{OC}^2 + \left(\mathrm{OC} \tan\alpha\right)^2 = \mathrm{OC}^2 (1+\tan^2\alpha)$$ 다시 말해서 $${t_0}^2 = t^2 (1+\tan^2\alpha)$$가 됩니다. 그런데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tan\alpha=\frac{v}{i c}$$이므로 $${t_0}^2 = t^2 \left(1-\frac{v^2}{c^2} \right)$$ 다시 말해서 $$t_0 = t \sqrt{1-\frac{v^2}{c^2} }$$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172-174쪽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입니다. 참고로 상대성이론을 다룬 책에서는 고유시간을 $\tau$로 표기하는 것이 표준적입니다. 장회익 선생님은 이미 $x_4=i c t$를 $\tau$로 표기하셨기 때문에 $t_0$라는 다른 표기를 채택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고유시간이라는 것이 무슨 특별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세계선(관찰자)에 대한 각자의 시간일 뿐이므로 그냥 시간을 나타내는 $t$로 표기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상대성이론을 다룬 교과서에서 고유시간을 $\tau$로 표기하는 바람에 오히려 고유시간의 '민주주의'가 감춰진 효과도 있겠습니다.
이제 이렇게 선택한 시간축에 '수직'한 공간축을 생각해 보면, 이것을 '동시면' 또는 '동시 공간'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 그림에서 시각적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림 출처: George F. R. Ellis, Ruth M. Williams, Mauro Carfora (2000). Flat and Curved Space-Times. Oxford University Press. 2nd ed. p. 11)
이 그림에서 '동시'를 나타내는 것이 평면처럼 보이지만, 4차원 시공간에서 시간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이므로 실제로는 공간입니다. 이 동시 공간에 속한 모든 점들(사건들)은 모두 같은 시각에 일어납니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것처럼 시간축은 내가 정지해 있는가 또는 네가 정지해 있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따라서 관찰자 A에 대해 동시인 사건들과 관찰자 B에 대해 동시인 사건들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동시의 상대성'입니다. 아래 그림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림 출처: George F. R. Ellis, Ruth M. Williams, Mauro Carfora (2000). Flat and Curved Space-Times. Oxford University Press. 2nd ed. p. 33)
이 동시면을 정하는 문제는 시공간의 구조를 밝히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나의 세계선 안에서는 고유시간을 확인하는 것이 매우 쉽지만, 이것을 동떨어진 다른 사건(언제 어디)과 연결시켜 동시인 사건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를 위해 가장 표준적인 방법은 빛을 보내고 받는 것입니다.
(그림 출처: George F. R. Ellis, Ruth M. Williams, Mauro Carfora (2000). Flat and Curved Space-Times. Oxford University Press. 2nd ed. p. 70)
이 그림에서 O와 동시인 사건 P, Q, ...는 시간축을 나타내는 세계선에서 볼 때 빛을 쏘는 시각과 받는 시각의 중간인 사건들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이를 이용하면 다른 세계선에 대해서도 동시면을 찾기 위해 빛을 쏘아 보내고 받는 방법을 쓸 수 있습니다.
(그림 출처: George F. R. Ellis, Ruth M. Williams, Mauro Carfora (2000). Flat and Curved Space-Times. Oxford University Press. 2nd ed. p. 71)
관찰자 B의 시간축은 그의 세계선입니다. 위의 그림에서 $\mathrm{EO}=\mathrm{OR}$이므로 O와 동시인 사건은 P'입니다. 빛의 세계선이 45도임을 이용하면 아래와 같이 B의 세계선이 A의 세계선과 이루는 각이 공간축과 동시면이 이루는 각과 같음을 쉽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림 출처: George F. R. Ellis, Ruth M. Williams, Mauro Carfora (2000). Flat and Curved Space-Times. Oxford University Press. 2nd ed. p. 72)
요컨대, 시공간 나누어 꿰매기는 4차원 시공간에서 무엇이든 물체가 그리는 세계선이 시간축이 된다는 아이디어입니다. 특수상대성이론에서는 멈춰 있거나 일정한 속도로 반듯하게 나아가는 경우만을 시간축으로 삼을 수 있지만,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말 그대로 모든 세계선이 다 시간축이 될 수 있습니다. 일단 그렇게 시간축을 선택하고 나면 나머지 3차원을 공간 초곡면이라 부릅니다.
시간축 선택과 3차원 초곡면을 보여주는 한 예를 아래 그림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림출처: https://doi.org/10.3389/fspas.2020.00058)
이렇게 4차원 시공간을 1차원 고유시간의 세계선과 3차원 초곡면으로 나누는 것이 바로 시공간의 나누어 꿰매기입니다. 특수상대성이론에서는 세계선이 언제나 직선이기 때문에 3차원 동시면도 항상 편평한 평면이지만,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아래와 같이 초곡면이 꾸불꾸불 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림 출처: slideshar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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